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0 April 2024. 143-162
https://doi.org/10.22776/kgs.2024.59.2.143

ABSTRACT


MAIN

  • 1. 들어가며

  • 2.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와 국립공원

  •   1) 지역 자연의 문명화와 국립공원

  •   2) 정치적 실체로서의 국립공원

  • 3. 자연의 발전주의적 동원과 국토개발로 틀지워진 국립공원

  •   1) 국립공원 후보지와 관할 부서의 경합

  •   2) 자연보호를 상징하는 장치로서의 지리산국립공원 생산 전략

  •   3) 국토개발 담론 형성의 장으로서의 자연과 국립공원

  • 4. 나가며

1. 들어가며

한반도에서 근대적 국립공원 개념이 도입된 것은 일제 시기 들어서이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준비과정으로서 풍경계획안, 국립공원법(안) 등을 작성하였으나, 국립공원 제도의 시행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1937년 9월에는 일본 국립공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다무라 쓰요시(田村剛)가 지리산, 한라산 등에 직접 방문하여 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사전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37.10.04.). 금강산은 1937년 중일 전쟁의 발발로(김지영, 2021b, 306), 지리산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박찬모, 2017, 82).

국립공원은 근대 산업화 과정 속에서 자연을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이용’하면서 ‘보호’할 수 있는 방안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국립공원 제도는 그동안 자연의 생태적 다양성 유지와 지속가능한 이용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최근 국립공원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관심이 커지면서, 일제의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논의(김지영, 2021a, 2021b; 성나연・전봉희, 2021), 일제의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논의(박찬모, 2017), 해방 이후 국립공원 지정 과정(현병관, 2022), 나아가 현 시점의 지리산국립공원의 지리산 주민들이 자연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권혜윤, 2022), ‘산사람’ 허만수와 함태식의 사례를 통해 자연의 문화적 구성으로서 지리산국립공원에 접근한 연구(Jin, 2005) 등이 진행되었다.

지리산국립공원은 1967년 한국에서 최초로 지정된 국립공원이다. 그러나 국립공원과 근현대 지리산을 다룬 선행연구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 정부 수립과 본격적인 국립공원 제도 도입 과정에서 국가와 그 외의 주체가 자연을 동원해 나가는, 즉, ‘국가-자연(state-nature)’ 논의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한국의 국가-자연관계에 대한 연구는 한국 정부 수립이후 국가주도의 발전주의 전략으로서 지역의 자연을 국가-자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 박정희 정권이 물을 수자원으로 전환하는 과정(황진태, 2019; Hwang, 2015), 발전주의 도시화 속에서 한강의 생산 과정과 비둘기의 동원 및 재조정 과정(김준수, 2018; 2019), 산림녹화정책을 통해 푸른산이 ‘발전(개발)’의 상징경관(symbolic landscape)인 동시에 민족구성원 모두가 염원하는 일종의 민족경관(national landscape)으로 재현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진종헌, 2016) 등이 그것이다.

한국 최초의 국립공원인 지리산은 지역민들이 생활 자원으로 이용하던 자연이 ‘국가-자연’으로 전환된 첫 번째 사례이다. 근대 사회가 도래하고 자연을 자본/보호 대상의 논의로 환원하는 국가 및 기타 주체들이 등장하면서 지리산은 또 다른 네트워크에 놓이게 되었다. 지리산의 자연환경 중 지리산 산림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망을 형성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고, 정치적, 사회적 논의 속에서 한국의 첫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에 본 연구는 당시의 지리산의 자연이 심미적/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국가 및 기타 주체를 움직였다는 측면에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는 지리산의 자연이 국가 주도로 근대과학의 언어, 즉 지형, 산림, 생태, 농업 등 근대적 자연관으로 재해석되어 가치를 지니는 대상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국립공원 후보지로 사적지를 거론하면서 한국의 역사 회복과 내셔널리즘 성립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자연 중심의 국립공원 후보지를 내세웠고, 최종적으로 1967년 국립공원 관할 부서는 건설부로, 첫 번째 국립공원은 지리산으로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국립공원이라는 제도를 통해 국가를 시각적으로 가시화 하는 동시에 국가경제발전을 위한 자산으로 자연을 포섭하였다.

마크 화이트헤드 등(Mark Whitehead et al.)은 『국가의 자연(The Nature of the State)』에서 근대국가라는 정치공동체를 대표하기 위해 자연(동식물, 보호구역, 생태적 문구)이 사회적으로 구성됨을 추적하였다. 이는 근대 국가 시스템에서 중앙집중화(centralization), 영역화(territorialization), 자연의 틀짓기(framing)를 통해 이뤄진다고 보았다. ‘중앙집중화’는 제도적 배치와 기술적 장치를 통해 자연에 대한 표준화된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고, ‘영역화’는 지도를 제작하거나 국립공원이나 지속가능한 도시, 계획구역과 같은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자연을 경계 설정, 제도적 구조 마련, 법률 제정 등과 같은 총체적인 과정을 통해서 자연을 틀짓는다(Whitehead et al., 2007, 13-20).1)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국가-자연’이 형성되며, 국가는 국가와 자연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공간 전략을 지속적으로 구사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국립공원 제도를 들 수 있다. 국립공원과 같은 보호 지역에 대한 확장은 비인간 주체가 여전히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주체에 의해 보호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는 자연보호 지역의 지정 과정에서 강압적 방법을 선호하는데, 개발도상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Adams, 2020, 796). 이에 ‘조국 근대화’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근대국가를 형성하려 했던 박정희 정권 하에서 1960년대 국립공원이라는 제도를 통해 자연이 국가경제발전의 대상으로 정당화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자연의 사회적 구성론에 기반하면서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한 ‘국가-자연’ 접근이 적절하다고 보았다(황진태, 2019, 93). 또한 ‘국가-자연’을 만들어감에 있어 국가의 전략적 역할이 결정적이지만, 국가 이외의 안팎의 다양한 세력의 힘이 작동하면서 자연이 물질적・담론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추적하고자 한다(김지영, 2021a; Hwang, 2015).

본 연구는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 1과 같은 연구 분석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내용의 흐름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발전주의 국가였던 박정희 정권은 가치가 있다고 여긴 자연을 자본축적과 국가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위해 동원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자연은 국내외적으로 ‘조국 근대화’와 정치적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상징 경관이자 국제원조와 관광산업 진흥을 이뤄낼 자원이 된다. 이는 단순히 국가라는 단일 주체만이 아닌 국제기구와 이를 연결하는 정부 부처, 자연을 과학적이고 표준화된 언어로 조사하는 전문가, 지방자치단체, 지역공동체 등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면서 중앙집중화, 영역화, 틀짓기 등의 공간 전략에 의해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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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 분석틀
출처: Whitehead et al.(2007, 16)와 황진태・박배균(2013, 358)을 참고하여 구성

따라서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지역-국가-세계 스케일을 교차해 가며 국립공원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살펴본다. 지리산국립공원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제적인 생태외교, 지역민들의 환경 운동, 문교부와 건설부 내외의 사회적, 정치적 상호작용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우선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로서 자연을 근대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문명화하는 동시에 근대 국가 표상으로서의 국립공원을 도입하는 과정을 지리산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나아가 경제적 발전을 우선시 한 박정희 정권이 자연을 ‘국토개발 담론’으로 포섭하기 위해 내세운 ‘자연보호’ 담론이 상응하게 된 공간전략 과정을 분석한다.

2.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와 국립공원

1) 지역 자연의 문명화와 국립공원

한국은 일제시기 이후 해방과 6・25 전쟁, 남북한 분단체제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고 민족문화를 회복하기 위해 역사와 권위를 강조할 수 있는 유물, 유적, 자연(동・식물, 경관) 등을 상징적 매개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군정은 당초 장충단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자 하였다.2) 해방 직후 장충단공원 내 식민유산을 청산하고 장충단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 즉, 충신들의 추모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감안하여 1947년 입법의원 회의를 거치면서 장충단 일대는 국립기념공원으로 확정 되었지만, 산적한 현안문제들 때문에 별도의 후속 조치는 진행되지 않았다(김수자, 2018, 288-289). 이승만 정권은 민족국가 건립을 상징하는 사적지인 경주와 부여, 남한산성 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고 하였다. 1951년 문교부 장관 안호상은 “올해는 일민주의를 더욱 보급시키는 동시에 이를 국민에게 널리 선전 및 계몽할 작정”으로 경주국립공원 설계와 국립극장 건설 계획을 밝혔다.3) 1959년 4월 15일에는 경주국립공원 설계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립공원법(안)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법 제정은 이뤄지지 못하였다(법제실, 1959).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사적지(남한산성, 경주, 북한산성)와 자연 경관(설악산, 계룡산, 내장산, 지리산, 한려수도, 홍도)을 국립공원 후보지로 삼았다. 국가 정체성은 대체로 전설과 자연경관에 의해 조정되는데, 자연경관은 국가의 모양과 형태를 시각적으로 표상한다. 도덕적 질서와 미적 조화의 모범으로서 특정 경관은 국가아이콘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Daniels, 1993, 5). 자연경관은 자연이 갖고 있는 물리적인 특성보다 보는 사람들에 의해 관찰되고 이해되는 시각적 틀을 제공하기에(Whitehead et al., 2007, 11), 한국에서는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 백두대간 등이 국토를 상징하는 경관으로서 이용되어 왔다(진종헌, 2005; 황진태, 2018; Jin, 2009).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게 ‘산림’은 ‘조국 근대화’와 맞물린 경제발전의 기반이었다. 따라서 유실수와 목재로 사용할 수 있는 용재수종의 식목에 중점을 두었다(김수자, 2020, 97). 이와 동시에 산림 관리는 자연을 매개로 국민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조국 근대화’의 역동성을 가시화하는 통치 전략과도 맞닿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황폐화된 산림을 회복하고자 국민동원을 통해 산림녹화를 진행했고, 1963년 녹화사업에 국민을 총동원하기 위한 국토녹화촉진에 의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였다. 1961년 산림법을 제정으로 시작된 녹화정책은 1973년 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강정원, 2020, 169).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은 정부가 경찰력을 비롯한 행정력을 동원하여 산림녹화를 단기간 안에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정책이었다. 그 결과 용재수종 식목운동에서 속성수와 유실수 중심의 국민조림운동으로 변환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산림의 유용성과 무관하게 수종을 가리지 않고 민둥산-붉은산을 푸른산으로 바꾸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았고, 가시적 국토경관 이미지-푸른산의 의미는 발전의 내셔널리즘을 집약하는 상징경관이 되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붉은산’은 진보와 발전이라는 단선적인 의식에서는 후진과 결핍을 나타내는 것이었다(진종헌, 2016, 542-547).

1960년대 한국의 산은 국가가 ‘문명화’의 길로 인도해야 하는 비어있는 ‘붉은산’이었다. 지리산 산림은 해방 후 1948년 여순사건과 6・25 전쟁을 겪으며 훼손되었다. 이에 더해 임산물에 기대는 지역민의 난방방법이나 취사구조, 도벌과 남벌의 성행 등으로 지리산 산림의 황폐화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임송자, 2017, 114). 당시 총 면적을 따지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목재가 남벌(濫伐)되었다. 과거 규슈제대 연습림 5,500정보(町步)를 진주농과대학(일부 진주농업고등학교에서 관리)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해당 산림에서 남벌된 상당한 양의 목탄이 하루 평균 15-20대의 트럭에 실려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쪽과 시천면 쪽으로 유출되었고, 이는 진주시를 거쳐 전국으로 반출되었다(조선일보, 1959.09.16.). 지리산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 원평촌 부락구장(部落區長) 이우용에 의하면, 지리산의 비농가(非農家)는 먹고 살기 위해 임산물에 의존하였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나무를 해다 팔고 숯을 굽는 일, 벌목 등으로 먹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조선일보, 1962.03.13)(그림 2, 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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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지리산에서 남벌된 나무를 지게로 나르는 지역민
출처: 조선일보, 195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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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벌목이 된 지리산 산비탈에서 화전민이 개간하는 장면
출처: 조선일보, 1962.03.12.

1964년에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지리산 도벌사건’으로 명명되는 사건으로, 농림부・내무부・도벌업체 등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권력형 범죄였다. 권력형 중대 범죄행위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일었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빗발쳤다. 그러나 검・경의 수사는 미온적이었고, 고위층의 압력으로 사건의 핵심인물을 파헤치지 못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권력형 비리에 대한 대책 대신 1966년 「임산물 단속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고, 산림청 신설 및 화전 정리사업 등을 단행하였다(임송자, 2017, 119; 146-147).

지리산의 화전민과 화전은 ‘문명의 망각 지대’로 여겨졌기에 정부의 농업정책에 의해 계몽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1963년 정부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리산을 대대적으로 조사하였다. 이 조사는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생산 증대를 위해 산지를 개간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지리산의 잠재적인 경제적인 가치를 발견하는 동시에 현재 농촌의 영세농업의 빈곤성의 연쇄를 해결하여 장차 농촌의 생활, 문화수준을 현재보다 더 향상’시키는 데 있었다(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1963, 51). 1960년대 지리산국립공원이 지정되는 과정에서 정부는 지역민의 토지 이용 관행이 도덕적, 생태적으로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여긴 것이다. 이에 정부는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를 통해 지리산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1963년부터 본격적으로 지리산 외부의 ‘개척자’ 130여 농가를 입주시켜 지리산을 개발하고자 하였다(경향신문, 1963.01.01; 1963.12.28.).

이러한 맥락에서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의 조사에서 지리산국립공원 계획이 등장했으며, 당시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은 거의 확실시 되었다(경향신문, 1963.12.28.). 재건국민운동본부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의 『地異山地域開發에關한調査報告書』(1963)는 ‘국가-자연’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리고 1964년 박정희는 지리산종합개발계획을 위해 헬리콥터로 지리산 상공을 시찰하였고, 도벌로 인해 나무가 베어져 흩어진 것을 목격하였다(경향신문, 1964.09.07.). 그 이후 건설부는 1965년 『지리산지역종합계발계획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본격적으로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수순을 밟아 나갔다.

2) 정치적 실체로서의 국립공원

미국에서 만들어진 국립공원 제도는 근대국가가 국가 통치에 있어서 자연을 실질적으로 국가 자산으로 포섭하고 영토화하는 ‘정치적 실체(political entities)’ 개념으로 논의된다. 특히 지리학계에서는 제국주의와 근대국가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여 ‘보존’ 전략으로서 국립공원을 설정하고 영토화하는 과정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이며 근본적으로 공간적임을 강조하고 있다(Adams, 2020, 789). 국립공원과 국민국가 사이에는 배타적 경계의 설정을 통한 영역 내의 권력 및 경제적 이익의 통제라는 유사성이 있다(Dilsaver and Wyckoff, 2005, 237-238).

이승만 정권은 직접적인 재정 지원과 반공주의 전파를 도울 수 있는 경우에만 국제기구 가입을 허용하는 등 엄격한 반공외교를 유지해 왔다. 또한 국제 기구에 참석하는 북한 연구자와 한국의 연구자의 접촉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에 1957년 국제연합(United Nations, 이하 UN) 후원으로 1948년 창설된 국제자연보전연맹(International Union of Conservation for Nature and Natural Resources, 이하 IUCN)의 가입 요청이 거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는 다르게,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는 더 높은 과학기술적, 문화적 성과를 과시하면서 확보될 것이라는 전망 하에서 국제회의에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1960-1970년대 한국의 자연 및 자연보존위원회(The Korean Commiss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and Natural Resources, 이하 KCCN)4) 소속 과학자들과 IUCN은 자연을 중심으로 국제적 관계를 맺었는데,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와 발전주의의 수용 및 협상이 있었다(Hyun, 2023).

1960년 한국에 온 미 국립과학원(U.S.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태평양과학위원회 이사 해롤드 쿨리지(Harold J. Coolidge)는 공식적으로는 국립 과학관 설립과 장기적인 생태 조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IUCN의 산하 국립공원위원회 의장직도 맡고 있었는데, 비공식적으로는 한국의 국립공원 설립을 독려하였다(Hyun, 2023, 5-6). 쿨리지는 1962년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국립공원회의에 한국이 참석하길 독려했고, 정부는 건축가 김중업과 농학자 이화여대 교수 김헌규를 참석시켰다. 1962년 세계국립공원회의에서 김헌규는 한라산과 경주, 설악산, 지리산 등을 국립공원 후보지로 소개하였다(경향신문, 1962.08.22.).

1963년 쿨리지는 한국의 생물학자들에게 북한 단체인 한국자연보전연맹이 이미 IUCN의 국가 회원 가입을 신청했다고 알리면서, KCCN이 신청한다면, 북한보다 더 빨리 승인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한 IUCN 회원국의 외교적 가치가 높아졌는데, 이는 IUCN이 공원목록 등재 프로젝트(park list project)를 통해 UN과의 유대를 강화한 결과였다. 이러한 이유로 박정희 정부는 KCCN 생물학자들을 지원했고, 신속히 움직인 결과 1966년 한국의 IUCN 가입이 공식 승인되었다. 1969년 쿨리지가 약속한 대로 한국은 마침내 회원으로 승인되었다(Hyun, 2023, 7).

이러한 가운데 반공주의와 ‘조국 근대화’를 내세운 박정희 정권에게 국립공원 제도의 도입은 ‘문명화된’ 국가를 국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국제 기금을 획득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도 있었지만, 국립공원이라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근대화된 국가’, 즉 정치적 실체를 보여주고 싶은 열망의 발현이었다.

국립공원은 자연에 대한 국가의 통치 작동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국가가 실행하는 ‘조국 근대화’ 계획 뒤에는 자연이라는 공간을 독점적으로 합리화하고 시민과 같은 주체를 변화시킨다는 확신이 자리했다. 국가와 이에 협력하는 전문가, 행정가들은 과학적인 시각으로 자연을 조사하고 합리적으로 지역민의 삶의 개선에 영향을 줄 것을 정당화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국가는 전문가를 고용 및 활용하여 자연을 근대적・산업적・과학적인 언어로 변환하여 근대적 학문의 영역으로 정립하는 동시에, 자연을 국가가 통치해야 함을 합리화하였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의 지리산 조사 당시 김헌규는 국립공원 지정 제안을 위한 팀을 구성하여 지리산국립공원 관련 내용을 작성하였다. 본격적인 조사 이전에 김헌규는 1963년 3월 지리산을 방문했는데, 1960년대 무분별한 산림 벌채를 목격하고 자연자원의 훼손방지와 영구보존을 위해 방책을 고민하고 있었던 구례연합회 총무 우종수를 우연히 만났다. 김헌규는 구례연하반에 자연보호의 방안으로 국립공원 제도 도입에 대해 설명했다. 이는 구례지역민들의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례연하반은 지역의 주요 인사들을 모아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지리산의 자연보전은 장차 구례의 관광개발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항이니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자’는 취지를 설명하여 군민대다수의 찬성을 받았다. 이에 1963년 관민 협동으로 ‘지리산국립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1963년 4월말 경 군민대표 5명은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건의서를 군사정부에 전달하고자 상경하기도 하였다. 1965년 건설부 국토계획국 지역개발과가 만들어지자, 지리산국립공원추진위원회 대표 5명은 1966년 다시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건의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국립공원공단, 2019, 49-51, 우종수, 2017, 91-96; 한국국립공원협회, 1974, 6).

재건국민운동본부 지역개발조사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조사하기에 앞서 1963년 5월에 군내유지 50여 명이 구례읍회의실에 모여 ‘구례지구지리산개발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5) 그리고 구례군민은 이들이 서울에 상경할 때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지역적 차원의 여러 주체들은 지리산 산림보전의 당위성에 공감하고 자연보호를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국립공원 지정’을 내세우는 과정을 거쳤다. 이처럼 지역민들이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국립공원 지정으로 인해 지역 발전이 동반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구례지구 지리산개발위원회에서 1963년 9월 발표한 담화문에 따르면 조사위원들 중 일부는 유휴지(遊休地)를 개간하여 곡식을 키우면 식량난을 타개할 수 있고, 공비의 잠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조사위원의 80% 이상이 국립공원안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는 김헌규가 제안한 토지의 차등적 이용을 근거로 하여, 자연을 보호하는 동시에 토지를 개간하여 이용도 할 수 있다는 관점과 일맥상통하였다. 그리고 구례지구지리산개발위원회의 그림 4와 같은 호소문을 작성하여 ‘지역의 번영이 곧 개인의 이익’임을 강조하며 전군민(全郡民)의 노력을 호소하기도 했다(문동규・박찬모 편, 2017, 169-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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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구례지구지리산개발추진위원회의 호소문 표지의 김헌규 국립공원 계획도
출처: 문동규・박찬모 편, 2017, 375.

김헌규의 국립공원 설립 제안은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결과적으로 지리산은 국가와 전문가의 손길에 의해 근대화의 산물로 거듭나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는 물론 지역민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의 발현이었지만, 국가로서는 지역민만의 자연이 아닌 국가의 자원으로 포섭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결국 국립공원 제도는 국제적으로 근대화된 한국의 정치적 실체를 보여주는 동시에 지역민들을 결집하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농민들의 이주, 근대화된 영농법 소개, 집단 목장 구성 등의 일련의 과정은 국가가 흩어진 지역민을 가시화하여 국립공원 내에서 야생성을 억제하고 경계하는 ‘국가-자연’ 만들기의 공간 전략이었다.

3. 자연의 발전주의적 동원과 국토개발로 틀지워진 국립공원

1) 국립공원 후보지와 관할 부서의 경합

해방 이후 국립공원 관련 업무는 지속적으로 문교부가 진행해 왔었다.6) 정부는 1962년 세계국립공원회의에 전문가를 파견한 이후, 구체적인 국립공원 후보지와 제도 도입을 논의하였다. 1961년 문교부 외국(外局)으로 문화재관리국이 설립되었고, 1962년에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회(1분과 유형문화재, 2분과 무형문화재, 3분과 기념물)이 만들어졌는데, 문화재위원회 3분과는 명승과 천연기념물을 담당하였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회는 1964년 설악산, 한라산, 흑산도 등 3개 지역을 자연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이 세 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7) 그리고 문교부는 국립공원 지정 전초 단계로서 홍도 천연보호구역(1965년 4월 7일). 설악산 천연보호구역(1965년 11월 5일), 한라산 천연보호구역(1966년 10월 12일) 등을 지정하였다.

정부의 세 지역에 대한 천연보호구역 지정은 IUCN의 지원을 받기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1962년 세계국립공원회의에 전문가가 참여한 이후, IUCN은 한국에 국립공원을 이식하기 위한 생태외교를 본격화하였다. 1963년 IUCN은 국립공원전문가인 윌리엄 하트(William J. Hart)와 로버트 씨크(Robert Seeke)를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의 자연자원보존에 대해 계획 검토하기도 했다(문화재관리국, 1967, 36). 1965년 쿨리지는 서울대를 방문해 자연의 보호의 중요성과 UN의 국제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강연을 진행했다(경향신문, 1965.11.06.).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1966년 8월 IUCN에서 가입하였고, IUCN 총회에 서울대 문리대 교수 강영선이 참석하여 설악산, 한라산, 홍도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경향신문, 1966.07.09.).

문화재관리국은 1966년 5월 24일부터 6월 12일까지 약 20일간의 일정으로 설악산자연자원조사를 위해 서울대 문리대 식물학 교수 이민재를 단장으로 하는 102명의 대규모 조사단을 파견했다(경향신문, 1966.05.23.). 정부는 설악산뿐 아니라 한라산, 홍도와 함께 학술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IUCN에 제출할 계획이었다. 이 보고서를 기반으로 세 곳이 ‘국제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 IUCN으로부터 천연자원보호관리에 필요한 기술과 재정 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동아일보, 1966.05.25.). 실제로 IUCN에서 1966년 5월 28일 한국에 50만 달러를 후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설악산 학술조사는 더욱 탄력을 받기도 했다(경향신문, 1966.05.30.).

문화재관리국은 1967년 조사한 내용을 『(天然保護區域)雪嶽山』으로 출판하였고, 해당 보고서의 서언(緖言)에 쿨리지와 IUCN의 자연보호 정책과 한국과의 관계를 상세히 언급하기도 하였다(문화재관리국, 1967, 35-37). 그리고 쿨리지는 1966년 9월 한국에 과학관을 건립하려 방문하였는데, 함께 방한한 미국 국립공원청 아시아 태평양 지역국장 겸 하와이국립공원 박물관장이었던 IUCN 컨설턴트인 조지 룰(George C. Ruhle)을 파견하여 한국의 국립공원 제도 도입과 관련한 자문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룰은 9월부터 11월까지 한국의 여러 지역을 살펴보고 1968년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는 크게 제주도와 한라산, 설악산, 경상남도 해안, 남서쪽(전라도), 서울 경계 지역을 나누어 조사하고 자문을 덧붙였다. IUCN과 1966년 한국을 방문한 룰은 대체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회에서 제안한 한라산, 설악산, 홍도 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것을 권고하였다(Ruhle, 1968, 1-3).8)

한편, 문교부와 별개로 1963년에 당시 창설 초기였던 건설부는 ‘국토종합개발계획’을 진행하면서 담당 업무 확대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은 정부 조직법에 ‘국토・수자원・도시・도로・항만 주택 하천… 등등이 건설부장관의 소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건설부 소관’이라는 논리를 대며 공원 업무를 담당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65년 국립공원에 대한 업무는 건설부에서 맡게 되었다.

1962년에 건설부 기획조정실에 기획계장으로 5년간 있었던 김의원(金儀遠)의 회고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풍경을 대표할만한 수려한 자연경관’으로는 설악산을 으뜸으로 꼽았지만, 설악산은 수복지구여서 군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사전 조사가 불가능했다. 또한 설악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것을 강행을 하더라도 6・25 전쟁 때 매장되었던 포탄과 대인지뢰밭을 제거하는 데에는 상당한 특수인력과 시일이 필요하다는 국방부 견해 때문에 첫 번째 국립공원이 될 수 없었다고 전한다(국립공원관리공단, 1998, 377-378).

문교부와 건설부, IUCN은 공통적으로 설악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9) 그러나 당시 설악산은 간첩을 막기 위해 특수작전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1966년 설악산학술조사 당시, 조사단은 현지 육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각반 간의 연락은 군통신망을 이용하였는데, 실제 조사 중에 간첩이 나타나 중단된 적도 있었다(동아일보, 1966.05.28.).

그러나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립공원 관할 부서가 정해지지 않은 1963년에 이미 지리산이 1호 국립공원 후보지로 거의 확실시되었고, 국내 여론의 지지와 지역민들의 지정 운동을 이끌어 냄으로써 통치 합리성에 기반을 둔 통치 기술의 실천이 이루어진 단계였다. 그리고 건설부 내 국토계획국 지역개발과가 설립된 1965년부터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움직임에 탄력을 받았고, 1967년 12월 29일 건설부장관 공고에 의해 지리산국립공원이 지정됐다.

정부로서는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통해 지리산 도벌 사건을 계기로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역의 요구, 국제적인 생태외교 등 지역과 국가를 넘어선 주체들의 목소리에 대응하는 명분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국 국립공원 제도 도입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문가 김현규에 의해 가시화되기도 했다. 그는 세계-국가-지역 스케일을 가로지르며 ‘국립공원=자연보호’ 논리를 성립시키는 주체였다. 1963년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에 참가하여 지역의 자연을 국가 스케일에서 논하였으며(그림 5), IUCN과도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지리산을 포함하여 한국의 지역 자연을 세계 스케일에서도 논하기도 하였다(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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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1963년 구례유지들과 김헌규(좌측)
출처: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1963, 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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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1966년 조사 차 한국을 방문한 조지 룰과 김헌규(좌측)
출처: Ruhle, 1968, VII

그러나 1963년 이후 김헌규와 건설부의 지리산국립공원 계획에 대해 IUCN 관계자 하트와 쿨리지가 친환경 용어로 위장한 개발주의 계획으로 간주하고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듯(Hyun, 2023, 10-11), 지리산을 첫 번째 국립공원으로 정한 이유 중 하나는 국토개발 담론으로 자연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국토개발의 관점에서 보자면, 설악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경관일지는 몰라도 개발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지리산은 근대 자연관에 입각한 자연의 보호 개념과 자연 개발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곳이었다. 본격적인 국토 개발 담론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군사정부는 산지개발을 통한 식량 증산과 관광산업을 병행할 수 있는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것이다.

2) 자연보호를 상징하는 장치로서의 지리산국립공원 생산 전략

‘국가-자연’ 생산은 크게 중앙집중화, 영역화, 틀짓기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세 가지 과정은 국가 헤게모니 프로젝트와 자본축적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기적으로 작동된다. 정부는 자연의 중앙집중화를 위한 전문가의 자연 조사, 경계 설정(영역화), 법제정(틀짓기) 등의 과정에서 지역민의 활동이 적절하지 않거나 허용되지 않는 공간을 ‘자연’으로 정당화하는 개념적 틀을 완성한다. 이는 각종 과학 보고서와 지도, 교육 등을 통해 만들어진다.

지리산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는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시작했지만, 1961년부터 산청덕산국민학교, 진주농업고등학교, 진주농대, 경상남도, 한국 민사 원조 사령부 등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이들 조사의 주안점은 주로 자연자원(토양, 동식물, 수자원) 조사를 통해 개발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표 1 참고). 그리고 그 안에서 지리산국립공원은 형식상 자연보호 논리를 동반한 관광계획이었다.

표 1.

지리산개발계획과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경위(1961-1967)

내용
주관처
조사일 조사비용(원) 조사 내용
산청덕산국민학교 1961.10 - 지리산개발모형도작성
(제5회교육과학전시회 출품)
진주농업고등학교 1962.05 - 종합개발계획작성
(군사혁명제1주년기념산업박람회 출품)
재건국민운동본부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1963.05.15~1963.12.10 2,500,000 지리산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
(토양, 기상, 임업, 약초, 작물, 원예, 축산, 양잠, 해충,
식물병, 국립공원, 사회, 농업, 경제, 수자원)
진주농대 1963.03.01~1963.12.30 434,290 지리산개발연구조사단 구성
(기상, 토양, 식물, 사회, 개간)
경상남도 1964.09.11~1965.02.20 9,500,000 지질(1,664㎢), 수력(함양 제2)산업, 관광도로(5개 105㎞)
경상남도,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
1964.09.22~1964.10.24 - 5개 노선측량(연장 87㎞)
노선비교 22개선
(연병력 13,348명)
건설부 1965.06.06.~1965.12.30 - 지리산 종합개발을 위한 계획조사
건설부 1967.06.30~1967.08.24 - 지리산국립공원기본조사보고서
건설부 1967.12.29 -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출처: 건설부(1965, 12-13)와 경상남도 함양군(1968a, 1)의 표를 수정 및 보완

1963년 조직된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는 16명의 위원과 그 위원을 돕기 위한 전문위원 4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각 분야에 따라 토양, 기상임업, 약초, 작물 원예, 축산, 양잠, 해충, 식물병, 육수 및 지형, 국립공원, 사회농업경제 등 14개 분야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는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지리산지역개발에관한조사보고서』(1963)로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지리산의 자연・인문환경이나 산업, 문화, 생태, 사회 관련 부문의 세부적인 조사결과와 개발이용 계획을 제시했다. 이들은 지리산의 자연적 조건(고도별 지형 및 기후와 그에 따른 적합한 산업 제시), 농업경제적 요건(주변 교통 및 시장 관계와, 작물의 경제적 가치 제시), 사회적 조건(빈곤한 현주민을 위한 복지를 위한 개발 요청), 관광자원(지형, 동식물, 명승고적 등) 등 다방면으로 조사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제시된 국립공원 계획은 크게 등반도로, 동계스포츠(스키장 : 서울에서 특수기동차 혹은 헬리콥터 운행), 선유장(船遊場: 섬진강 주변 보트장, 수영장, 낚시터 등), 휴가촌, 비행장, 박물관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국립공원으로 지정한다면 특별보호지구(경치가 절승인 곳, 사향노루 서식지, 철쭉지대 등 자연 그대로 보호해야 할 곳: 민간인 자유개간을 금지), 특별지구(원시림, 기타 보호를 필요로 하는 곳: 허가를 얻은 곳에 한해 개간 허용), 보통지구(자유롭게 개간) 등으로 토지를 나누어 인간 활동의 제한 범위를 제안하였다. 마지막에 국립공원 설계도(그림 7)를 제시하면서, 설계의 가장 중요한 것은 도로 시설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도로 개설은 전적으로 정부예산으로 하고, 케이블카, 호텔 산장, 휴가촌 등과 유료시설은 지리산지역개발공사와 같은 회사를 설립해서 추진할 것을 제안하였다(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1963, 570-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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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지리산국립공원 설계도
출처: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1963, 594-598, 범례 부분 확대

이 계획은 지리산 토지의 차등적 이용을 통해 자연의 보호와 개발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논리였으나, 실상 1964년 동경올림픽 특수효과로서의 관광 수익을 기대한 관광계획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동경올림픽을 계기로 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찾을 것을 대비하여, 하루속히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우리나라 자연풍경을 보여주는 것은 국가적 견지에서 유익한 일’이기에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서둘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1963, 570). 1963년에 한국은 동경올림픽을 앞두고 관광사업 진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관련 인프라 구축과 더불어 국내 10개 관광지구를 설정하기도 하였는데, 지리산 지구도 그중 하나였다(동아일보, 1963.01.03.).

한편, 박정희는 지리산도벌사건 현장과 지리산개발 상황 등을 확인하기 위해 1964년 9월 지리산 지역을 상공에서 시찰하고 난 뒤 이 지역을 광산, 농산, 관광 등 분야별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개발할 방침을 세우라고 지시하였다(경향신문, 1964.09.08.). 그리고 1965년 건설부 내 국토계획국 지역개발과가 설립된 이후, 건설부는 『지리산지역종합계발계획조사보고서』(1965)를 편찬하였다.

이 보고서 서언에서는 1961년부터 시작된 지리산의 조사가 종합적인 시각으로 진행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각종자연자원을 조사하여 효과적으로 개발하는 동시에 보전하기 위한 합리적인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건설부, 1965, 11). 그리고 토지자원, 임산자원, 지하자원, 관광자원, 수자원 등을 조사하고 구체적인 예산안까지 세웠다. 전체 사업비는 약 87억 5천만 원으로 추산되었으며, 그림 8과 같은 지리산종합개발계획평면도가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개간지, 관광권, 공업지조성지, 농경지, 간척지, 니켈, 흑석, 장석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리산은 화엄사지구, 천은사지구, 산령지구, 남원 및 구룡폭포지구, 마천 및 실상사지구, 대원사지구, 쌍계사지구 등으로 나뉘어서 노란색의 관광권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관광호텔, 관광여관, 방갈루, 정류장, 케이블카, 스키장, 수상스키, 낚시, 식물원, 박물관, 상수도 등 편의시설을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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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지리산지역종합개발계획평면도 중 지리산(주황박스) 지역과 범례(초록박스) 부분 확대
출처: 건설부, 1965, 3; 주황박스 지도의 노란색은 지리산의 관광권

건설부는 이 조사결과를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는데, 이는 박정희, 관련 부처 관계자들이 지리산이라는 자연을 과학적이고 표준화된 언어로 변환하여 국가의 자원으로 포섭하기 위해 논의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그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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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박정희 대통령 지리산개발 관계 보고 청취 장면
출처: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1965

이후, 1967년 3월 3일 「공원법」, 1967년 6월 17일 「공원법시행령」, 7월 10일 「공원법시행규칙」이 공포되어 국립공원 제도 도입의 토대가 완비되었다. 1967년 11월 20일에는 국립공원위원이 위촉되었으며, 그 해 11월 24일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것을 결의했다. 12월 2일에는 국립공원 경계 설정을 위해 소위원회를 다시 구성하여 원안을 확정했으며, 이후 12월 27일 국토건설종합계획 심의회에서 지정안이 통과되었고, 12월 29일 건설부 장관 공고에 의해 지리산국립공원이 지정되었다.

건설부는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직전인 1967년 9월 『지리산국립공원기본조사보고서』를 완성했다. 이를 통해 최종 공원 경계와 기본 구상, 공원관리의 목표 등이 확정되었다. 공원 구역을 결정할 때의 기본방침과 기준은 표 2와 같으며, 많은 부분 표고 700m의 선을 따르고 있다(건설부, 1967, 325-326). 남원지구(107.78㎢), 구례지구(87.28㎢), 하동지구(84.28㎢), 산청지구(94.74㎢), 함양지구(64.84㎢)에 총 438.92㎢가 지정되었다(그림 10, 그림 11).

표 2.

지리산국립공원 경계 설정 시 기본 방침과 기준

방침 기준
1. 행정구역으로서의 의의와 관리상 최적지구
2. 문화재 및 보호림 등 학술적 연구가치 있는 구역
3. 자연경관지를 최대한으로 확보하는 지역
4. 지리학경관지로서의 지구를 포함하는 지역
5. 취락형성이 최소한으로 인접되는 지역
6. 기본적 이용시설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구
7. 국유림 및 공유림이어야 한다
8. 동식물학적 보존과 보호가 전망되는 지구
9. 경제상으로 정부시설이 최대로 지원되어야하는 지구
1. 공원법시행령 중 공원지정기준에 의거
2. 표고 400m에서 700m의 등고선의 기준
3. 현지조사와 의견 청취 결과를 종합

출처: 건설부(1967,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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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지리산국립공원 위치도
출처: 건설부, 1967,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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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공원구역약도
출처: 건설부, 1967, 333

표 2의 공원의 경계 설정 방침을 보면, 문화재와 자연경관이 보호되어야 하는 지역이 있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는 국립공원 제도 도입으로 자연 이용의 효과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천연보존지구, 동식물 보존 등과 같은 자연 보호 담론과 병립하는 제도라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공원구역 내에 천연기념물이나 문화재(문교부)가 있는 경우나 관광사업진흥법에 따라 관광지가 있는 경우(교통부) 등 행정적 관할권이 중첩되는 우려에 대해서는 공원법과 시행령 등을 들며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관광시설과 문화재 보호권은 건설부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보호나 보존을 필요로 하는 지구는 보호를 받게 되고, 국립공원은 그것과 관련 없는 지형적 경관을 다루고 있음을 강조하였다(건설부, 1967, 358-360).

나아가 자연미 보존에만 치중한 공원 정책은 시대착오적이며, 개발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위적인 조형미를 어느 정도 가미할 수 있다는 논지를 내세웠다. 그리고 이용시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교통수반이 되는 도로망의 건설이며, 이에 따른 이용자의 숙박시설 계획과 오락시설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공원과 설정과 지정은 그 궁극의 목적이 이용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림 12와 같은 구상계획도를 제시하였다(건설부, 1967, 37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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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지리산국립공원기본구상계획도
출처: 건설부, 1967, 361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기본구상계획도는 그동안 제작되었던 지리산 개발과 국립공원 관련 지도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림 12는 「공원법」이 제정된 이후 마련된 지리산국립공원 경계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국가의 영역 내의 권력 및 경제적 이익의 통제권을 가시화한 것이다.

1967년 12월 지리산을 첫 번째 국립공원을 지정한 후 건설부는 공원법에 따라 지리산국립공원이 속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에 구체적인 계획안 제출을 요구하였다. 그림 13과 같이 경상남도는 함양군 중심으로 보호계획(자연경관보호시설 및 문화경관 보호시설, 조림계획, 위험방지시설)과 이용시설계획(차도, 등산로, 교량, 정유소 및 급유소, 케이블카, 헬리콥터장, 관광호텔, 관광여관, 산장, 휴식소, 전망대, 골프장, 의료구급시설, 목욕탕, 간이우체국, 매점), 관리계획(관리사무소, 안내소, 공원표식)을 세웠는데, 총 4억 49만 1천 원의 예산이 산출되었다. 예산 중 보호계획은 460만 6천 원에 불과했으며, 관광자원 개발을 위한 이용시설계획은 3억 9050만 원으로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외에 관리계획은 138만 5천 원이 책정되었다(경상남도 함양군, 1968b, 30-31). 그러나 전라남도는 재정 및 인력 문제로 사무소 설치가 곤란한 실정이라 계획 내용이 없었다(전라남도,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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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지리산국립공원계획도
출처: 경상남도 함양군, 1968a, 17

국가의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은 체계적인 절차를 따르기보다 지리산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국립공원 제도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이라는 목표가 맞물려 정해진 것이기에, 지자체의 계획 속도와 맞지 않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은 지리산 개발과 자연보호를 상징하는 국립공원 제도를 연결지어 계획의 합리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즉, 박정희 정권 초반부터 진행된 지리산 개발담론 안에서 지리산국립공원은 ‘개발’의 보조 도구로서의 ‘보호’를 상징하는 기제였다. 이는 지리산국립공원 계획 과정에서 공간 생산 전략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다양한 주체가 지리산을 조사하고 계획했던 과정의 핵심은 결국 국립공원 지정을 통한 관광산업 육성에 있었다. 국립공원 조성 계획/예산에서도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생태 보호 계획/예산이 아닌 관광 기반 시설 설치 계획/예산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지리산개발계획 속에서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과정은 보호를 위시한 이용이었으며, 1970년대로 이어지면서 이러한 국립공원은 국토개발 담론으로 시・공간을 확장하고 있었다.

3) 국토개발 담론 형성의 장으로서의 자연과 국립공원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도시 및 산업경관의 급속한 건설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경관의 근본적 개조를 통해 발전 전략을 수립했다(진종헌, 2016, 541). 1963-1971년에 걸쳐 수립된 한국의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1-1981)의 기본 목표 중 ‘국토포장자원개발과 자연의 보호보전’과 관련하여, 명목상으로 국립공원 제도는 자연의 보호보전을 목적으로 도입한 제도였다(대한민국정부, 1971, 108).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국토종합개발계획도(그림 14)에서 자연은 발전주의 국가의 헤게모니 프로젝트로 포섭되었다. 지리산을 포함한 산, 해안, 사적 등의 이질적인 자연/사적은 ‘국가의 자연/사적’이라는 균질적인 공간으로 묶여 있다. 이로써 지역의 이름은 소거되고 ‘국가’로 상징화되고 있다. 자연(국도립공원)은 보호의 대상이지만 국토개발 담론에서 공항, 항구, 공업단지, 댐, 고속도로, 전철, 송전과 함께 개발 논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관광루트 지도를 보면(그림 15),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건설되는 도로가 이어주는, 국가가 공인한 ‘관광지’이자 ‘보호해야할 자연’으로 생산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건설부에서 1973년 편찬한 한영(韓英) 요약본 『한국의 국토개발계획』에 제시된 국립공원 개발도(National Park Development Map)는 한국 전역이 고속도로와 국립공원으로 연결되어 통합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그림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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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국토종합개발계획도
출처: 대한민국정부, 197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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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관광루트
출처: 대한민국정부, 1971,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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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국립공원 개발도
출처: 건설부, 1973, 34

이처럼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 국립공원은 보호를 내세우긴 했지만, 실제로는 해외 원조와 관광지 개발에 따른 관광수입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1차 국토종합계발계획 내에서 상충하는 부분이 드러나고 있다. 사실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이론적 한계와 여러 정치적인 요구들에 조응하며 형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해외의 이론과 건설부의 내외의 정치사회적 상호작용 끝에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짜기워진 패치워크(patchwork)였다. 따라서 어떤 목적에도 부합할 수 있어 보이는 동시에 상충하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이주영, 2015, 45).

건설부는 1964년부터 국립공원 제도 도입을 추진하였으며, 1966년 후보지 조사에 대해서 ‘특히 한국의 공원입지 조건을 감안하여 산수가 수려하고 역사적으로 보아 관광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고적, 사적, 명승지, 사찰 등이 집중적으로 있거나한 점 등을 고려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밝히고 있다(건설부, 1966, 1). 그리고 남한산성, 설악산, 속리산, 계룡산, 내장산, 지리산, 토함산(경주), 가야산, 한라산, 남해안(한려수도), 북한산성, 홍도 등 총 12개 후보지를 언급했다(그림 17). 12개 후보지 선정의 배경에는 국토개발과 발맞추어 지역 안배를 고려하는 동시에, 관광지로서의 지명도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또한 건설부는 1966년 국립공원 후보지 중 5개 지역을 선별하여 지원하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5개 국립공원 건립에 투여될 국고비용은 1억씩 총 5억 원에 달하였다. 특히 공원으로 통하는 관광도로와 풍치림 조성, 상하수도시설과 관리사무소, 휴게소, 화장실 등 공공시설만 국고로 설비할 계획이었다. 이 중 가장 큰 비용은 관광도로 공사비로, 총 예산의 40%에 해당했다. 그리고 숙소와 풀(pool), 스키장, 케이블카 등은 민간 투자를 기대하고 있었다(동아일보, 196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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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국립공원후보지분포도
출처: 건설부, 1966, 479

건설부의 국립공원 지정 논의는 사실상 자연의 이용에 방점이 놓여 있었지만, 1967년 3월 3일 제정된 「공원법」 1조의 제정 목적에 의하면, ‘자연풍경지를 보호하고 국민의 보건・휴양 및 정서생활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자연 보호를 내세운다. 그러나 같은 법 제2조 5항의 공원계획과 관련한 정의에서, ‘공원계획은 공원의 보호 또는 이용을 증진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의 제한과 공원시설에 관한 계획’이라고 하고 있다(공보부, 1967, 23). 이러한 공원법과 시행령 등은 앞서 언급한 『지리산국립공원기본조사보고서』(1967)에서 국립공원 도입 목적이 ‘자연의 이용 효과를 높이는 것’에 있다는 입장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국립공원 최종 지정은 ‘국토건설종합계획’에 의거하여 ‘국토건설종합계획 심의회의’ 승인10)을 통해 이뤄진 것을 보면, 국립공원 지정은 자연 보존을 목표로 하기보다 자연 ‘개발’에 방점을 둔 것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11)

국립공원은 공원법 상 ‘국가를 상징하는 풍경의 보전’이 목표였지만, 국립공원 제도 시행 이후에도 허술하게 관리되었고 자연환경에 대한 조사보다는 관광개발지역으로 더 각광을 받고 있어 생태계는 계속 파괴되고 있었다(경향신문, 1970.08.11.). 즉 1960년대 지리산국립공원을 필두로 한 국립공원 제도의 도입은 자연보호 자체에 역점을 두기보다는 자연을 국토개발 담론으로 포섭하는 ‘국가-자연’의 생산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나가며

1960년대 비문명의 지대 지리산은 ‘전문가’들이 근대화 노력으로 합리적인 질서체계를 부여할 수 있는 비어있는 공간이었기에, 박정희 정권이 자연을 개발/이용하기 위해 도구적 목표로서 자연보호 논리를 내세우며 국립공원이라는 공간 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지리산국립공원 지정과정은 국가의 자연의 독점적 이용을 합리화하는 과정이었고, 자연보호의 효시라기보다는 사실상 ‘관광한국’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지리산국립공원은 지역의 산을 국가의 스케일로 상승시킴으로써 조국 근대화 헤게모니 프로젝트와 발전주의적 자본 축적을 목표로 경주하던 박정희 정권의 근대 국가를 가시화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지리산 산림은 개간과 국립공원 지정을 통해 문명화된 국가를 가시화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국제적인 자연보호 흐름에 발맞춘 국립공원 지정과 IUCN 가입은 반공이데올로기에서의 발전된 근대 국가의 표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 위해 지역-국가-국제적 스케일을 가로지르는 공간 전략을 구사하였다. 즉, 정부는 중앙집중적인 자연의 관리를 위한 자연 조사, 경계 설정(영역화), 법제정(틀짓기) 등의 과정에서 지역민의 활동이 적절하지 않거나 허용되지 않는 공간을 ‘자연’으로 정당화하는 개념적 틀을 완성하였다. 이는 각종 과학 보고서와 지도, 교육 등을 통해 만들어졌다.

우선 지역 스케일에서 1959년부터 가시화된 지리산 산림 도벌은 1964년 ‘지리산 산림 도벌 사건’이라 불리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지리산의 임산물은 지리산 산지의 지역민 생계와도 연결되는 문제였기에, 지역민을 비롯하여 농림부・내무부・도벌업체 등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권력형 범죄사건이었다. 이에 지리산 지역의 지자체, 산악회, 지역 주민 등은 산림 보호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지역산악회인 구례연하반과 지역민들은 1963년 지리산을 방문한 김헌규를 만나 국립공원은 자연을 보호하고 토지의 차등적 이용을 통해 지역 경제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제도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러한 내용에 동의한 지역민들은 1963년 관민 협동으로 지리산국립공원추진위원회를, 1963년 5월 구례지구지리산개발추진위원회를 결성하며 국가-자연 생산에 협력했다.

국가 스케일에서,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 국립공원의 후보지로서 지리산을 포함한 산, 해안, 사적 등의 이질적인 공간은 ‘국가의 자연/사적’이라는 균질적인 공간으로 묶임으로써 지역의 이름은 소거되고 국가의 일부로 상징화되고 있었다. 자연은 보호의 대상이지만 국토개발 담론에서 공항, 항구, 공업단지, 댐, 고속도로, 전철, 송전과 함께 개발의 논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 지리산국립공원을 필두로 한 자연보호 담론으로서 국립공원 제도 도입 과정은 사실상 관광산업으로서의 국토개발 담론 형성 과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지리산 자원에 대한 조사와 국립공원 지정 논의는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시작되었다. 이 조사는 ‘개발’을 위한 사전 조사에 가까웠으나, 형식적으로는 국립공원 지정을 함께 논의함으로써 ‘자연 보호’ 또한 고려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재건국민운동본부 지역개발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행된 『지리산지개발에관한조사보고서』(1963)와 건설부의 『지리산지역종합계발계획조사보고서』(1965)에 이은 『지리산국립공원기본조사보고서』(1967)에서 지리산국립공원은 국토개발 담론 속에서 자연보호를 상징하는 도구로서 필요한 장치였다.

이러한 국토개발담론에서 논의되는 국립공원에 대한 담론은 사실 세계 스케일에서 논의되는 자연 보전 중심의 국립공원 논의와 어긋났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기도 했다. IUCN의 국제 원조와 맞물려 박정희 정권기 학자들과 자연단체는 IUCN과 교류하고 있었다. IUCN은 KCCN, 문교부 문화재관리국과 협력하여 한라산, 설악산, 홍도를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한 후 이 세 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는 절차를 밟고 있었지만, 정부는 관할부서를 건설부로 하여 지리산을 한국의 첫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IUCN 관계자들은 김헌규와 박정희 정권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친환경 용어로 위장한 개발주의 계획으로 간주하였기에, 정부는 가시적으로 자연보호를 위해 국립공원 제도는 수용하되 관할 부서 및 지역의 선정면에서는 자연의 이용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세계적인 자연보호 흐름을 비롯하여 지리산 산지를 생계 수단으로 이어가는 지역민의 목소리, 지리산 산림의 경제적 가치와 보호의 목소리 등 지리산을 둘러싼 주체들의 목소리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 중심의 국토개발 담론으로 흡수되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부는 자연을 근대적 언어로 재정립하고 국토개발 담론 안에서 관광지로 개발하는 것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는 표면적으로 지리산이 ‘세계-국가-지역’ 스케일을 가로지는 ‘자연보호의 장’ 이라는 논리와 등치되는 과정이었다.

본 연구는 ‘국가-자연’ 생산 과정 중심으로 논의한 결과, 지리산의 국립공원 지정 이후 국가, 지역산악회, 지역민의 자연 실천 과정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다루지 못했다. 또한 첫 번째 국립공원 지정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기 ‘국가-자연’ 관계 전반을 살펴보지는 못한 한계도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설악산, 한라산에 대해 룰의 권고에 기초한 것임을 인정하기도 했는데(Hyun, 2023, 12), 박정희 정권에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1967년), 경주・계룡산・한려해상(1968년), 설악산・속리산・한라산(1970년), 내장산(1971년), 가야산(1972년), 덕유산・오대산(1975년), 주왕산(1976년), 태안해안(1978년) 등의 ‘국가-자연’ 생산 관계를 살펴본다면 당시 발전주의 국가에서 국립공원이 가졌던 의미를 보다 종합적으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1S1A5B5A17050696)

[3] 1) ‘국가-자연’과 국립공원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황진태・박배균(2013), 김지영(2021a; 2021b) 등의 연구를 참조.

[4] 2) 이승만, 김구, 김규식, 변성옥, 황중극, 이종태 등이 장충단공원발기위원이었으며, 이들은 중앙 관재처(管財處)와 임대차계약을 완료했었다(조선일보, 1947.08.09.).

[5] 3) 이 외에도 이승만 정권은 부여, 남한산성 등을 국립공원 후보지로 언급하였다(동아일보, 1951.12.24.; 경향신문. 1954.05.18.). 1951년 문교부는 경주국립공원 지정을 주장하는 ‘국립공원설치에 관한 건’을 국무회의 부의안(附議案)으로 올리기도 하였다(문교부, 1951). 1954년에는 남한산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 위해 수리를 하고 재개장하였고(경향신문, 1954.05.18.), 1957년에는 건축가 김중업이 경주국립공원계획안을 마련하기도 했으며, 1959년 문교부는 주민들의 건의에 의해 경주, 부여, 속리산, 설악산, 제주도, 한려수도 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조선일보 1959.05.11.).

[6] 4) 1963년 한국의 자연 및 자연자원보존학술조사위원회로 발족, 1965년 한국자연보존위원회, 1969년 사단법인 한국자연보존연구회, 1974년 한국자연보존협회, 1998년 3월 한국자연보전협회로 개칭되었다가, 2006년 1월 한국자연환경보전협회로 개칭되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에서 이 단체의 설립을 도왔다.

[7] 5) 앞서 언급한 ‘지리산국립공원추진위원회’ 임원과 몇몇은 겹쳤다.

[8] 6) 1963년부터 IUCN은 한국의 국립공원 업무를 산림국에서 맡길 권고했다. 당시 문교부는 자연보전보다 문화재 보전과 더 관련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Hyun, 2023, 11).

[9] 7) 문화재관리국은 1964년 3월 학술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지답사에 나서기로 했다(조선일보 1964.02.16.).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64년 5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강원도 설악산과 제주도, 한라산이 우선 자연보호구로서의 국립공원이 될 거라 전망됐다(경향신문 1964.05.16.).

[10] 8) 1966년 당시 룰은 지리산에 대해 사찰이나 경작을 위해 개발되었거나, 벌목과 채광 등 상업적 용도로 이용된 구간이 산재해 있어 전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분류하기보다, 상업지역, 종교적 성역, 레크레이션지역 등으로 구분하고, 야생식물 및 야생동물 보호구역, 풍경보호지역, 과학적 사이트(scientific sites) 등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Ruhle, 1968, 68).

[11] 9)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회와 IUCN은 한라산을 첫 번째 국립공원 대상지로 강력하게 지지했다고 하지만(Hyun, 2023, 11), 정부 부처 등을 아우르는 공통된 후보지는 설악산이었다.

[12] 10) 지리산은 1967년 12월 27일, 경주・계룡산・한려수도는 1968년 12월 23일, 설악산・속리산・한라산은 1970년 3월 16일 국토건설종합계획 심의회를 거친 후 차례로 지정되었다.

[13] 11) 1호 지리산국립공원을 비롯하여 13호 태안해국립공원까지 구 공원법에 의해, 건설부장관의 지정・공고에 의해 설치되었다. 「자연공원법」이 1980년에 제정되면서 적정한 이용을 통한 보전관리라는 새로운 정책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공원정책은 주로 기반시설 마련과 같은 개발에 중점을 두었다면, 1980년을 기점으로 자연보전과 공원 관람객의 이용을 동시에 도모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1987년 국립공원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설립되고, 1991년 건설부에서 내무부로, 1998년 내무부에서 환경부로 주무기관을 이관하면서 보다 환경보전 중심으로 변화했다(소병천, 2011, 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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