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1 December 2021. 567-584
https://doi.org/10.22776/kgs.2021.56.6.567

ABSTRACT


MAIN

  • 1. 서론

  • 2. 북한이탈주민의 이주사

  • 3. 북한이탈주민 이주에 대한 모빌리티 접근의 필요성

  •   1)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기존 연구

  •   2) 모빌리티 역량과 이주 실천

  • 4. 북한이탈주민의 이주 실천 과정 분석

  •   1) 탈북 동기

  •   2) 모빌리티 역량과 이주 실천

  •   3) 한국에서의 정착지 선택

  • 5. 결론

1. 서론

2020년 말 현재 국내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3만3700여 명에 달한다. 북한이탈주민은 한국 사회에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다. 우선 민족적 동질성을 가진 동포애의 대상이다. 동일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특히나 전후 냉전시기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생애의 상당부분을 보낸 구 공산권 출신 재외동포와 유사한 면이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원천이 되는 탈북자는 독재 정권 하에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비자발적으로 삶의 터전에서 벗어난 난민이다. 특히 대규모 탈북이 19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기근과 식량난 이후에 이루어졌기에 탈북자는 경제 난민이라 하겠다. 다만 최악의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이후 북한을 이탈한 이들은 경제이주민으로 간주되어 중국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 불법체류자로 단속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3년 유엔이 지정한 난민이며 국내로 이주한 탈북자는 북한이탈주민법에 따라 내국인으로 대우받는다.1)

탈북자는 국제 사회에서 북한 정권의 정치 폭압과 경제 실패의 증거로, 그리고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사회의 북한에 대한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종종 언급되어 왔다. 북한이탈주민은 내국인으로 보호와 지원을 받지만 탈냉전기에도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한국에서 북한이탈주민은 차별받는 소수자이기도 한다. 적대적 타자이자 통일의 대상인 북한 출신이기에 남한 주민의 편견과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신효숙 등, 2016). 남북 관계가 화해와 대립 사이를 오가면서 편견과 차별의 강도는 오르내린다. 한국 사회에서 삶을 이어가는 생활인으로 북한이탈주민의 다수는 한국의 위계적 노동시장에 하층부에 위치한 미숙련 저임금 노동자이다. 이와 더불어 북한에 잔류한 가족과 연락하거나 송금을 통해 생활을 돕는 이산가족이기도 하다. 연락과 송금을 넘어 가족 재결합을 모색하는 사슬 이주 네트워크를 구성하기도 한다.

본 연구는 북한이탈주민의 한국으로 이주 과정을 모빌리티 패러다임을 통해 조명하고자 한다. 귀환한 해외동포, 외국인노동자, 결혼이주여성과 마찬가지로 북한이탈주민은 생애 상당 부분을 할애해 일구었던 삶의 터전을 떠나 새롭고 낯선 곳으로 나선 이주민이다. 이주에는 희망과 기대만큼이나 우려와 걱정도 많기에 북한이탈주민이 이주를 결단하기까지는 고심에 고심을 더하게 된다. 하지만 기존 연구는 이주를 감행할 당시 송출국과 유입국의 경제난과 일자리 기회 등 거시적 환경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이주민 개개인이 가진 인구학적, 사회적, 경제적 속성을 선별하여 정량적으로 지표를 통해 경중을 따졌다. 몇몇 연구가 거시적 환경의 결정론적 역할을 부정하고 북한이탈주민의 행위주체성에 주목하였으나 탈북과 한국으로의 유입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이주와 관련된 분석이 미흡했다. 이에 본 연구는 심층인터뷰를 통해 사례 북한이탈주민 개개인이 축적한 모빌리티 역량을 확인하고 이를 활용한 탈북과 한국으로 이주 실천 그리고 한국에서의 정착 과정을 규명하고자 한다.

북한이탈주민의 모빌리티 역량과 이주 실천을 분석하기 위해 눈덩이 표집을 통한 심층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주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목적에 맞게 2020년 8월을 기준으로 북한에서 거주 기간이 만 15년 이상이고 탈북한 지 최소 5년 이상이며 한국 정착 4년 이상인 북한이탈주민을 선택하여 인터뷰하였다. 이와 더불어 표집에 있어 통계자료 분석에서 밝혀진 북한이탈주민의 인구학적 그리고 사회경제적 특성을 반영하여 대표성을 담보하고자 노력하였다.2) 대면 및 서면 인터뷰를 2020년 6월부터 10월까지 약 4개월 간 진행하였고, 탈북 과정과 한국 내 정착과정 및 생활사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하고 분석하였다.

다음 장에서는 기존 문헌을 바탕으로 북한이탈주민의 정의, 이주 및 정착, 집단적 특성을 개관한다. 이어 3장에서는 북한이탈주민에 관련한 기존 문헌을 주제별로 묶어 리뷰하고 모빌리티 패러다임을 통한 이주 실천에 관한 분석틀을 제시한다. 4장에서는 북한이탈주민 설문사례들의 이주 동기를 간략히 언급하고 본격적으로 이들이 쌓은 모빌리티 역량이 실제 이주와 한국에서의 정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마지막 장에서 연구 함의와 향후 연구 과제를 제시한다.

2. 북한이탈주민의 이주사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에서 이탈하여 남한이나 제3국으로 망명한 정치적 또는 경제적 난민을 말한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월남민(越南民), 귀순자, 귀순용사 등으로 불렸다. 이들 용어의 근원은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1962.4)’과 ‘월남귀순용사 특별보상법(1979.1)’에서 찾을 수 있다. 법률명에서 알 수 있듯 냉전체제 하에서 남한으로 월경한 북한주민을 월남귀순자 혹은 월남귀순용사라 정의하고 국가유공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고 원호대상자로 우대하였다.3)

1990년대 중반 들어 북한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사회주의권의 정치적 와해와 자본주의로의 전환이라는 탈냉전 시기로 접어드는 와중에 북한에서 심각한 기근과 식량난이 발생한 것이다.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북한 주민이 대거 탈북하고 그 중 일부가 남한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군인이 아닌 북한 출신 입국자의 증가를 반영해 1993년 개정된 ‘귀순북한동포보호법’에서는 ‘귀순북한동포’라 불렀다. 1990년대 중반 입국자 수가 한해 1000명을 넘어서자 이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1997.1)’이 제정되었고 ‘북한에 주소, 직계가족, 배우자, 직장 등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벗어나 한국 이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을 북한이탈주민이라 정의하게 되었다(김종원, 2019; 이수정, 2020).4)

현재에도 북한이탈주민을 ‘탈북자(脫北者)’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 고향을 버린 사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풍긴다. 이에 2005년 참여정부는 ‘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시작한 사람’을 줄여 ‘새터민’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했다.5) 새 명칭은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와 의견수렴을 통해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의제기를 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새터민이라는 명칭이 사상과 자유 때문에 탈북한 사람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이유나 목적만으로 한국에 정착한 것을 해석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더구나 제3국에 체류 중인 북한이탈주민을 포괄할 수 없었다. 결국 정부는 2008년에 ‘새터민’이라는 명칭 사용을 자제하고 법률 용어인 ‘북한이탈주민’을 통용하도록 했다.

2020년 현재 북한이탈주민은 총 33,752명이며 이중에서 이민, 거주불명, 보호시설 거주 등을 제외한 실제 남한사회에서 활동 중인 인구는 총 31,516명이다. 한국전쟁 이후 1998년까지 남한으로 넘어온 북한이탈주민은 총 947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북한의 기근과 식량난 이후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2002년 한해에만 약 1천 백 명에 달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잠시 주춤하기도 했으나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09년에는 2천 9백여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6) 김정은이 집권한 2012년 이후 감소하였지만 매해 1,000명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20년에는 코로나19 전염병 확산으로 229명으로 급감했다. 젠더 구성도 고난의 행군 이후 변했다.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여 2002년 절반을 넘어섰고 현재 70~80%대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의 72.0%가 여성이다(그림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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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북한이탈주민 입국인원 시기별, 성별 현황

출처: 통일부, 북한이탈주민 입국인원 현황(https://www.unikorea.go.kr/)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대다수는 함경북도와 양강도 출신으로 중국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왔다(그림 2 참조). 함경북도는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 그리고 압록강 상류의 양강도 혜산시 맞은편에는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있다.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두 북중지역은 언어와 생활방식이 유사할 뿐만 아니라 친인척이 양국에 나뉘어 살면서 상호 방문이 잦은 곳이었다. 중국이 1960년을 전후하여 3년 연속 이어진 자연재해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문화혁명으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불안할 때 북한에 거주하는 친인척이 도왔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역으로 중국 거주 친인척이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지역 간 유대와 연계가 북한이탈주민의 은신, 체류, 탈북 브로커 접선 등을 용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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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한국 입국 북한이탈주민의 출신 지역과 정착 지역

*북한 지역 구분: 평양, 남포, 평남, 평북, 자강, 함남, 함북·나선, 양강, 황남, 황북·개성, 강원(북)

*남한 지역 구분: 서울, 경기, 인천, 강원, 대전, 충남·세종, 충북, 부산, 울산, 대구, 경북, 광주, 전남, 전북, 제주

*북한 지도 출처: 국가정보원(2009)

*남한 지도 출처: GIS DEVELOPER(www.gisdeveloper.co.kr, 2020)

중국에 진입 후 한국으로 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중국 내에 있는 국제기구나 다른 나라의 외교공관으로 진입하여 한국으로 망명 신청하는 방법이다. 2001년 6월 탈북민 장길수 군 가족이 중국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진입해 한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한 이후 유사한 시도가 이어졌다. 대부분 외국 NGO들의 기획과 도움이 있었다. 같은 해 발생한 9・11 사건 이후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소위 ‘악의 축’ 중 하나로 북한을 지목했다.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를 알리는 대표 사례로 제시되었다. 2003년 미국 의회에서 ‘북한자유법’과 이듬해 ‘북한인권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일반 대중에게는 북한이탈주민이 망명을 위해 외교공관에 진입하는 장면이 세계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에 중국 정부는 외교공관 경비를 강화하고 나아가 자국 내 체류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북한으로 강제 송환했다. 언론과 대중의 큰 주목을 받았지만 실제로 외교공관에 진입하여 망명을 신청하는 방식으로 한국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많지 않았다. 도리어 국제사회의 이목에 부담을 느낀 중국 정부는 북한이탈주민에게 셋집을 내준 임대인이나 일자리를 제공한 사업주에게 벌금을 부가하고 불법체류 북한이탈주민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는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중국내 북한이탈주민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조천현, 2021).

두 번째 방법은 대다수 국내 북한이탈주민이 이용한 방법으로 몽골, 동남아시아 등으로 이동한 후 불법입국체류자로 의도적으로 체포된 후 한국의 재외공관에 인도되는 것이다. 초기에는 몽골이 주요 경유국이었으나 사막과 같은 위험 지역을 통과해야할 뿐만 아니라 국경경비가 강화되면서 점차 선호되지 않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 태국이 가장 선호되는데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등은 중국과 같은 공산권 국가였거나 친중국 성향이기 때문에 북송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브로커의 도움을 받는데 수수료는 중국에서 일해 얻은 소득으로 선불할 수도 있고 한국에 입국한 후 정부로부터 받게 되는 정착지원금으로 후불할 수도 있다. 북한이탈주민이 앞서 언급한 제3국에 진입하면, 고의로 경찰에게 붙잡힌다. 불법체류자로 체포되어 지역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불법체류 건으로 재판을 받고 임시보호시설로 이송된다. 이때 난민 지위를 신청하고 보호를 요청하면 한국의 외교부 및 관계부처가 현지에서 북한주민임을 확인해 한국 여권을 발급해 주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한국 입국 후에는 국가정보원이 보호결정 여부를 위한 조사와 긴급 치료 등의 임시보호조치를 실시한다. 이어서 한국의 사회적응교육시설인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일명 ‘하나원’으로 신병이 이관된다. 12주에 걸쳐 400시간의 사회적응교육을 받는데 심리안정, 남한사회 이해 증진, 진로지도 상담, 기초 직업훈련 등이 주요 내용이다. 사회적응교육을 이수한 북한이탈주민이 거주하고 싶은 지역을 정하면 하나원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도움을 받아 임대주택을 알선한다. 북한이탈주민 대부분은 서울에 거주하길 희망하기 때문에 추첨을 통해 입주권이 주어진다. 서울 입주 추첨에서 탈락한 사람은 주로 수도권에서도 서울과 가까운 도시를 선호하고 수도권 밖에 지역을 원하는 경우 특별한 과정 없이 바로 입주가 가능하다. 2020년 현재 북한이탈주민의 약 65.5%가 수도권 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그림 2 참조). 일부 소수의 북한이탈주민은 서울 또는 서울 인근 수도권 도시에 입주를 실패하고 주택배정 보류 신청자가 된다. 이들은 보류기간이 종료되는 시점에 다시 주택 신청을 할 수 있고 그 기간 동안 지역자치단체의 복지시설인 ‘쉼터’에서 체류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국내 정착은 북한에서의 지위, 직업, 출신지 등과는 큰 상관없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이냐 비수도권 지방도시냐에 따라 경로가 나뉜다.

한국으로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주거알선 이외에도 정착지원금을 받는다. 1인 가구 기준으로 정착 기본금으로 800만 원, 주거지원금 1,600만 원을 지급 받는다. 정착 기본금은 하나원 체류 때 500만 원이 그리고 거주지 전입 후 1년 이내 300만 원이 지급된다. 주거지원금은 임대보증금으로 우선 지급되고 잔여 금액은 정착한지 5년이 지나 거주지 보호기간이 종료되면 마저 지급된다.

북한이탈주민이 자신이 선호한 지역에 정착한 후에도 각종 지원 서비스가 제공된다. 하나센터라 불리는 지역적응센터가 하나원 수료 후 한국 내 최초 거주지에 전입하는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개인 특성과 정착지의 실정을 고려하여 맞춤형 정착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북한이탈주민은 지역자치단체의 거주지보호담당관, 고용지원센터의 취업보호담당관, 경찰의 신변보호담당관, 그리고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의 전문상담사, 자원봉사자, 복지기관 등으로부터 현지 적응, 취업 교육, 자격증 취득 및 진학, 심리 상담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담당관이나 상담사와 사회관계를 형성하기도 하며 동향 출신 모임이나 하나원 동기 모임 등을 통해 북한이탈주민 간 유대를 다지고 종교 모임, 취업 교육, 직장 근무 등을 통해 한국 주민과 사회관계를 맺는다.

3. 북한이탈주민 이주에 대한 모빌리티 접근의 필요성

1)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기존 연구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국내 사회과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핵심 주제는 크게 북한이탈주민의 집단적 특성과 성향, 한국사회에서의 인식과 지원, 이주와 정착 등이며 종종 이들 주제를 결합하고 교차하여 분석해 왔다. 북한이탈주민의 성향에 관련하여 독고순(2001)은 성취지향적인 수직적 개인주의로 평가했다. 오인혜(2016)는 북한이탈주민이 북한에 대해 그리움과 증오 등 이중적 장소감을 가지며, 한국을 제2의 고향화하려는 시도하고 있다고 보았다. 김미령(2005)은 북한이탈주민이 겪는 우울성향에 주목했고 박윤숙・윤인진(2007)은 탈북 청소년의 심리사회적 적응수준을 설문조사를 통해 파악했으며 민희(2018)은 북한이탈주민의 정서적 상태에 따른 소셜미디어 이용 등을 분석하여 사회적응도를 분석했다.

북한이탈주민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인식과 지원에 대한 연구 또한 이어졌다. 신효숙 등(2016)는 북한이탈주민이 적대적 분단국가 출신이자 한민족이고 비자발적 난민이자 자발적 경제이주민이며 남북 대치상황에서 잠재적 위협이면서도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통일의 초석으로 여겨지는 등 양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북한이탈주민은 일면적 범주로 정의되어서는 안 되며 정착 지원 정책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성경(2018)은 분단국가에서 북한이탈주민을 남북 체제 경쟁의 승리, 잠재적 위협, 통일 마중물 등으로 기술되는 ‘특별한’ 존재 아닌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호혜성을 근간으로 환대하는 윤리적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북한이탈주민 지원에 관련한 특정 이슈와 특정 하부 집단에 초점을 맞춘 분석도 이어졌다. 박호선(2004)은 북한이탈주민이 빈곤층으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며 지원을 위한 민관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보다 최근에 나근호(2019)는 지원 체계의 효과성에 문제제기하며 생활밀착형 지원을 강화하는 민관거버넌스를 구축할 것은 제안했다. 지역 현장의 상황을 조망한 연구로 박채순(2011)은 서울시 노원구를 사례로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정착지원 프로그램과 지역협의회 활동을 정리하고 지역주민의 인식과 반응을 설문하였으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의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본 연구의 주제와 관련된 북한이탈주민의 이주와 정착에 관한 연구이다. 김성경(2012)은 중국 체류 북한이탈주민이 북한에 인접한 조선족자치지역에 집중 분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북한주민의 중국 이주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의 경제난 탓으로만 돌리 수 없으며 구한말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북중접경지역의 문화적, 언어적 유사성이 함께 작동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동북3성 밖으로 탈영역화하고 한중수교를 계기로 한국 기업이 진출하면서 초국적 민족 공간이 더욱 넓혀졌고 이를 바탕으로 북한이탈주민의 이주 경로가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중국의 핵심 대도시와 청도, 위해, 연태 등 연해지역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북한 주민의 월경은 단순히 다른 나라로의 국제 이주라기보다는 하나의 민족이 국경을 넘나들며 생활을 일궈왔고 확장한 커뮤니티 내의 이동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성경(2013)은 북한이탈주민의 대부분이 여성임을 주목했다. 탈북여성은 동북 3성 도시지역에서 육아 가사 도우미, 간병인 등 가내 돌봄 노동을 하거나 불법체류자 신분이기에 종종 이를 약용당해 식당, 유흥업소, 마사지 숍 등에서 (유사)성노동 산업에 종사한다. 인신매매를 통해 농촌지역에 결혼이주자로 팔려가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출산, 가사노동, 농사, 부모공양 등을 짊어지고 있다. 이는 중국의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로의 편입, 한반도에 뿌리를 둔 민족 경제의 북-중, 한-중 국경넘기에 더해 가부장적 젠더 관계가 결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탈북 여성이 결국 중국 내 도시로 혹은 한국으로 경제이주한 조선족 여성의 빈자리를 채우고 중국 변방 농촌지역에서의 성비 불균형과 인력난을 완화하며 심지어 남성 위주 유흥 문화가 유지되는데 이용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북한이탈주민의 중국 이주에 있어 중국과 조선족 사회의 가부장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으로 유입되는 북한이탈주민은 국내에 이미 정착한 혈연, 친지의 알선과 지원으로 사슬이주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중국에서 몇 년을 체류한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수가 한국으로 이동한 북한이탈주민의 많게는 수십 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 체류 북한이탈주민은 국내 북한이탈주민의 중간 원천이 된다. 이들 연구는 원천 집단의 형성 과정을 분석하여 이주 경로의 전반부를 규명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북한이탈주민의 이주와 정착은 초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조망되기도 했다. 이주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북한이탈주민도 세계화 시대에 국경을 넘나드는 국제이주민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이주 이론은 유출국과 유입국으로 분리 범주화하고 전자에서의 배출요인과 후자에서의 흡인요인을 파악하고 경중을 가늠하고 했다. 반면 초국가주의 관점에서는 이주 행위자의 일상공간이 국경을 넘어 확대되고 있고 사회, 정치, 경제적 관계가 구성되는 공간적 지평이 넓어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즉 유출국과 유입국을 분리하여 바라보지 않고 수많은 이동으로 연결되어있음을 인식하고 이러한 이동과 연결에 초점을 맞춘다(박배균, 2009). 실제로 북한이탈주민은 재북 시기에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북중 무역상, 중국 조선족과의 교류를 통해 관계망을 가지고 있다. 그중 중국 조선족은 북중 접경 지역에 거주하면서 북한이탈주민들의 이주(탈북) 과정에서 중요한 경유지를 제공하며 북한이탈주민에게 매매혼, 일자리, 탈북 브로커 등을 알선한다(진미정・김상하, 2018). 그리고 한국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탈북과 남한 정착 과정에서 기존에 보유했던 사회관계망과의 단절을 겪지만, 일부 북한이탈주민은 탈북할 때 알던 중국의 브로커를 통해 이를 복원하여 북한 내부 정보를 수집하거나, 북한의 가족에게 송금하는 형태를 보인다. 또한 초국적으로 구축된 가족 간의 관계망은 일반적으로 연쇄이주의 시발점으로, 정착 이후 본국의 가족 구성원에게 그들을 따라서 이주할 것을 독려하고 돕기도 한다(손명아・김석호, 2017). 따라서 남한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은 북한, 중국 등지에 체류 중인 친인척을 남한으로 부르는 등의 형태로 초국가적인 형태의 이주와 정착 형태를 보인다.

이주 후반부에 해당하는 한국 내 정착지 선택에 관한 연구도 있었다. 최정호・박선미(2013)는 북한이탈주민의 정착이 이주민의 사회경제적이고 심리적 과정일 뿐 아니라 독특한 특성을 가진 구체적 지역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적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거주지 선택과 그에 따른 지리적 패턴을 분석하였다. 2007년에는 북한이탈주민이 부천시, 성남시, 수원시 등 서울과 인접한 도시들에 집중 거주하였으나 2012년에는 화성시, 안산시, 평택시 등 경기도 서남부권역에 집중되면서 지리적 패턴에 있어 변화가 나타남을 확인했다. 이러한 거주지 패턴 변화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사회적 연결망, 임대아파트 수, 제조・건설업 수를 지목하였다. 특히 사회적 연결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사회적 연결망 측도로 지역별 기존 북한이탈주민 비율을 활용하는 등 정량적 집계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황적 증거만을 제시하였다. 이어 최정호・박선미(2014)는 북한이탈주민이 한국 내 정착 과정에서 형성한 사회연결망을 주목하고 그 특성에 따라 거주지 선택이 달라진다고 주장하였다. 경기도 일대 도시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을 심층인터뷰하여 가족 간, 북한이탈주민 간, 정부 주도, 한국인과의 사회연결망 등으로 유형화하고 이들 연결망은 지역 특성과 상응하여 독특한 지리적 패턴을 보였다 한다. 이는 개별 북한이탈주민이 가진 연결망 유형에 따라 정착지를 달리함을 뜻한다. 예컨대 서울과 인접하여 교육 및 주거 환경이 상대적으로 좋은 고양시에는 혈연 중심의 사회연결망이 연쇄이주를 낳고 있다.

한국에 입국했던 북한이탈주민의 일부는 다시 제3국으로 재이주하기도 한다.7) 대표적인 제3국 이주국으로 영국이 꼽힌다. 2006년 유럽연합의 북한인권법 제정이 계기가 되어 영국에서 북한이탈주민을 난민으로 받아들었다(이수정・이우영, 2014; 이수정, 2019a, 2019b; Song and Bell, 2018). 영국으로 재이주는 난민심사가 까다로워지기 전까지인 2007년과 2008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북한이탈주민 600명 가량이 영국에서 난민비자를 받았으며 대다수가 런던 남서쪽에 위치한 뉴몰든(New Malden)에 집중거주하고 있다.8) 뉴몰든은 북한이탈주민의 동아시아 이외 지역에 가장 큰 집거권일 뿐만 아니라 재영교포와 조선족과 혼거하는 코리안타운이 되었다(이수정, 2020). 이는 이주민 종족집거권(ethnic enclave)이 이주국의 주류 집단 관점에서 흔히 가정되는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정적이며 단일민족성에 바탕을 둔 강한 연대감으로 특징지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Shin, 2017). 뉴몰든 거주 북한이탈주민은 한국과 달리 남녀 비율이 비슷하고 가족이주민이 많은데 이수정(2020)은 이를 북한이탈주민 남성의 ‘젠더화된 초국적 이주’때문이라고 보았다. 한국에 입국했던 북한이탈남성이 분단문화와 직간접적 소외로 지위 상승이 불투명해지자 남성/가장으로서 자존감을 찾고자 재이주를 기획하였다고 분석했다(이수정, 2020).

이와 같이 북한이탈주민의 이주와 관련한 기존 연구에서 탈북, 중국으로의 이주 및 정착, 중국 내 재이주, 한국으로의 이주 및 정착, 제3국으로의 재이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이주 경로와 과정에 대한 광점위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특히 몇몇 연구는 이주의 발생 요인 및 지속 요인과 관련하여 시기별 정치사회경제적 여건 등 환경적 요인만을 제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터뷰와 설문 등 정성적인 방법론을 활용하여 그러한 환경적 요인에 대한 행위자인 이주민의 인식, 판단, 행위 등에 대한 분석도 심도 깊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기존 연구는 이주 결정과 실천에 있어 구조와 주체 간 상호작용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잠재적 이주민 각자가 가진 이주와 관련된 능력과 역량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 이에 본 연구는 모빌리티 패러다임을 도입하여 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2) 모빌리티 역량과 이주 실천

1990년대 후반부터 지리학을 비롯한 인류학, 사회학, 문화 연구, 이주 연구, 과학기술 연구, 관광 및 운송 연구 등 사회 과학 및 인문학 전반에 걸쳐 모빌리티(mobility)에 대한 관심이 광범위하게 증가했다(Sheller and Urry, 2006; Kwan and Schwanen, 2016). 현대 사회에서 이동은 예전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달라졌다. 사람, 물자, 아이디어 등이 예전에 비해 다량으로 보다 먼 거리를 빨리 그리고 빈번하게 이동하고 있다. 사람만 하더라도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체류하는 국제 이주민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국제 이주민은 난민, 비호신청자, 유학생, 테러리스트, 여행객, 사업가, 스포츠 선수, 통근자, 군인, 조기은퇴자, 외국인 노동자, 상사주재원등의 자격으로 체류하면서 그 목적 또한 한층 다양해졌다.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예전과 달라진 이동에 주목하여 그에 관한 인식, 관점, 방법을 중심으로 세상과 그 변화를 이해하려 하는 시도와 노력이라 할 수 있다(이용균, 2015; 윤신희・노시학, 2015). 기존 사회과학은 인간은 활동을 위해 한 장소에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정주주의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았다. 예로, 로마인과 게르만족, 중국 한족과 북쪽 유목민 간 비교에서 나타나듯이 유목사회는 정주사회에 비해 열등하고 불완전하며 심지어 위험하다고 여겼다(이희상, 2012: 191). 이러한 정주우월주의 기반 사회과학은 정적이어서 이동을 하나의 블랙박스로 바라봄으로써 다양한 목적을 위한 사람들의 체계적인 이동을 무시하였다(Sheller and Urry, 2006: 208). 초이동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사회를 읽어 내는데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패러다임 주창자인 어리(Urry)는 비이동적 사회과학에서 이동적 사회과학으로 전환, 즉 모빌리티 전환(mobility turn)을 주장했다.

실제 연구에서 모빌리티라는 용어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움직임을 뜻하는 이동(movement)과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에 사용된다. 우선 모빌리티는 사람, 사물 및 정보 등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이동하는 주체 혹은 대상을 가리킨다. 기차, 자동차, 휴대폰 등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용이하게 하는 기술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모빌리티 기술에는 이동을 통제하는 CCTV, GIS, GPS 또한 포함된다. 인프라로서 모빌리티는 기차역, 터미널, 공항, 출입국관리소, 세관 등 이동의 관문이자 그와 관련된 통제의 관문이 되는 시설이다. 실천으로서 모빌리티는 걷기, 뛰기, 춤추기, 운전하기, 비행하기 등 이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또한 어리에 따르면 모빌리티는 인간과 기계가 상호작용적이고 사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된 시스템이며 대표적으로 보도와 길, 기차, 자동차, 비행, 통신 시스템이 있다. 모빌리티 시스템은 삶의 방식, 사회관계, 그리고 공간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데 예로, 근대 기차 시스템은 시간 관념(열차시간표), 계급 분화, 도시 공간 구조(중심부 기차역) 등에 변화를 낳았다(강현수・이희상 역, 2014).9) 보다 중요하게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이동에 내재하는 의미를 탐구한다(이용균, 2015: 147). 지리적으로 이동은 그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소를 만들어 낸다. 앞서 언급한 기차역, 공항과 같이 모빌리티 인프라뿐만 아니라 자동차 안, 비행기 안 등도 추상적 공간이 아닌 이동자의 체험과 경험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장소가 된다. 또한 이동은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지리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그리고 현대 초이동 사회에서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분석함에 있어 핵심 개념이 카푸만(Kaufman)의 모빌리티 자본(mobility capital)이다. 불평등을 발생시키고 유지하는 자본으로 경제적 자본, 브르디외(Bourdieu)가 주목한 문화적 자본, 퍼트넘(Putman)의 사회적 자본뿐만 아니라 이동을 통해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 자원 또는 능력 즉 모빌리티 자본이 있다(Kaufmann et al. 2004). 이러한 자본으로는 장소와 시간에 제약받지 않는 정보 접근 및 활용 능력, 모빌리티 시스템과 정보시스템에 대한 접근성, 떨어져 있는 타인들과의 의사소통 능력이 꼽힌다. 이들 모빌리티 자본은 앞서 언급한 다른 자본들을 보완하고 증강시킬 수 있다(윤신희・노시학, 2015).

카푸만의 모빌리티 자본은 어리에 의해 네트워크 자본으로 확장되었다(강현수・이희상 역, 2014). 모빌리티 자본이 이동을 통한 접근 능력에 주목했다면 어리는 이동을 통한 사회적 관계의 형성, 유지, 발전에 방점을 두었다. 네트워크 자본은 비록 서로 인접해 있지 않다 손치더라도 정서적 혹은 실제적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역량이라 정의되는데(Urry, 2007; 윤신희・노시학, 2015: 498) 간략히 모빌리티로 인해 얻어진 비경제적인 편익이라 할 수 있다(백일순 등, 2020).

사회적, 지리적 공간을 가로질러 이동하기 위해서는 이동 능력과 실행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를 모빌리티 역량(mobility capability)이라 부른다. 카푸만과 동료들은 이를 ‘모틸리티(motility)’10)라 명명하고 이동 주체가 출발지에서 도착지로 특정 궤도를 따라 이동하는 공간적 모빌리티와 주어진 사회 구조에서 이동 주체의 사회적 위치나 자원의 배분에서의 변화인 사회적 모빌리티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이들을 연결시켜 사고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제시하였다. 모빌리티 역량은 상호의존적인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접근(access)으로 잠재적 모빌리티의 범위를 말하는데 장소, 시간 및 기타 상황적 제약에 따라 다르다. 예로, 잠재적 모빌리티의 범위는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가 제공하는 교통통신수단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가진 구매력에 따라 달라진다. 둘째, 능숙(competence)으로 이들 잠재적 모빌리티의 범위를 인지하고 사용할 수 있는 숙련과 능력을 말하며, 대표적 예로 운전면허나 여권 등을 들 수 있다. 셋째는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전용(appropriation)으로 앞서 언급한 접근과 능숙을 인지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전략과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기는 방법을 뜻한다. 요약하면 모빌리티 역량은 자신이 처한 시공간에 외적으로 주어진 잠재적 모빌리티의 범위에서 자신이 가진 활용 기술을 바탕으로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기는 기획・조직・실행력이라 할 수 있다(Kaufmann et al. 2004).

이주도 인간이 행하는 일상 이동, 여행과 함께 모빌리티 역량에 바탕으로 한 대표적인 모빌리티 실천이다. 본 연구는 한국으로 이주한 북한이탈주민이 북한 그리고 중국에서 거주하면서 어떠한 모빌리티 역량을 축적하였고 어떻게 이를 활용하여 탈북과 한국으로의 이주를 계획하고 감행하였는지 밝혀내고자 한다. 어리(Urry)의 주장처럼 모빌리티 역량은 문화 역량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권리이며 현 시대의 새로운 인간 유형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자본이 된다(강현수・이희상 역, 2014). 모빌리티 역량은 이주 이전과 그리고 이주 과정에서 축적되고 종국에는 한국 내에서 정착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북한이탈주민의 모빌리티 역량에 관한 분석은 그들의 한국 사회로의 안착에 관한 논의에도 시사점을 던져 줄 것이다.

4. 북한이탈주민의 이주 실천 과정 분석

본 장에서는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북한이탈주민의 탈북 동기와 모빌리티 역량 그리고 이들에 바탕을 둔 이주 실천 과정을 분석하였다(표 1 참조). 탈북, 중국으로의 이주 및 체류, 한국으로의 이주 및 정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기존의 축적된 모빌리티 역량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이주 단계를 밟아가면서 역량이 축적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주가 연속적이고 누적적 과정임을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또한 모빌리티 역량은 이주의 최종 단계인 한국 내 정착지 선택에도 영향을 미침을 보여줄 것이다.

표 1.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의 탈북 동기와 모빌리티 역량

구분 연령대, 성별,
출신지역
탈북 시기 북한 직업 남한 직업 탈북 동기 모빌리티 역량
A씨 50대, 여, 온성 2010년대 초반 회계사 회사원 남편의 권유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B씨 50대, 여, 나진 2010년대 초반 무역원 대학원생 자녀의 진로 해외 방문 경험,
북한 내 지역 이동 경험
C씨 40대, 여, 의주 2010년대 초반 무역원 프리랜서 지인의 권유 해외 방문 경험,
북한 내 지역 이동 경험
D씨 40대, 여, 삭주 2000년대 중반 노동자 회사원 북한 사회와 삶에 대한 불만족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E씨 40대, 여, 구성 2000년대 후반 가정주부 회사원, 대학원생 친척의 권유 해외 방문 경험
F씨 40대, 여, 개성 2000년대 중반 노동자 자영업자 북한 사회와 삶에 대한 불만족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G씨 20대, 여, 경성 2000년대 후반 학생 대학생 본인의 진로, 북한 사회와 삶에 대한 불만족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H씨 20대, 여, 나진 2010년대 초반 호텔 직원 대학생 본인의 진로 북한 내 지역 이동 경험,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I씨 50대, 남, 평양 2010년대 초반 연구원 연구원 북한 사회와 삶에 대한 불만족 북한 내 지역 이동 경험,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J씨 30대, 남, 남포 2010년대 초반 운동선수 체육 강사 북한 사회와 삶에 대한 불만족 해외 방문 경험,
북한 내 지역 이동 경험
K씨 50대, 남, 청진 2010년대 초반 수리공 회사원 북한 사회와 삶에 대한 불만족 북한 내 지역 이동 경험,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1) 탈북 동기

여느 이주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주 동기를 가장 먼저 논한다. 이주 동기는 모빌리티 역량의 발현과 모빌리티 실천에 방아쇠이자 발사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은 북한 사회와 삶에 대한 불만족, 주변인의 권유, 진로 및 진학 목적 등이 주된 탈북 동기라고 응답했다. 분명 탈북 동기는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 동기를 찾기 위해 실제 설문에서는 응답자에게 경중을 따져 하나를 꼽아 달라고 요구했다.

(1) 북한사회와 삶에 대한 불만족

북한사회와 그 속에서의 삶에 대한 불만족은 가장 많은 수의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이 꼽는 탈북 이유이다. D, F, I, J, K씨가 그에 해당한다. D씨의 경우 가족들이 평양에 거주하였으나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에 지방으로 추방당하여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저는 지방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형제들은 다 평양에서 나서 살았어요. 저는 항상 억울했어요. 나도 평양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이런 국경촌에서 살아야 하나.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고난의 행군이 겹치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그게 계속 쌓여서, 속으로 강 건너 중국으로 갈까? 시장에서 한국 얘기를 들어보니 괜찮은 거 같았고요.”(D씨, 40대 여, 평북 출신)

D씨는 정치적 그리고 지역적인 열등감이 들었고 차라리 남쪽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브로커를 찾은 후 탈북했다. 이와 같은 북한사회에 대한 불만족뿐만 아니라 남한사회에 대한 동경도 이주 동기가 된다. F씨는 남북 접경지대 선전 도시에 거주했었기 때문에 1990년대 경제난 때에도 다른 지역보다 물자 공급이 원활하여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남북 접경지역에서 들을 수 있는 남한의 라디오 방송과 마주보이는 남한의 풍경 등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확인했다고 하였다.

“개성에서 조금만 나가면 남쪽이 보여요. 그땐 몰랐는데, 자유로? 그쪽은 항상 불빛이 반짝이니까, 여기보다도 더 풍족하구나 느꼈죠. 그리고 암시장에서 들은 한국 이야기나 라디오 전파 잡아서 듣다보니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국경이랑 가장 먼 곳이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중국 쪽, 평양 쪽 물건이 이쪽으로 들어오는 걸 타고 올라가는 방법을 상인들과 연계된 브로커랑 합을 맞추면 잘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F씨, 40대 여, 황북 출신)

한편 I씨는 평양에서 대학을 다니고 전문 인력으로 활동하였으며 영어,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도 수학하였다. 그 덕에 군복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함경도 오지로 쫓겨나 북중접경지대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는 더 이상 머물 가치가 없어졌구나. 적어도 가족을 위해서, 내 지식을 활용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남쪽으로 어떻게든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국경 지역에서 살고 있어서 브로커를 찾기도 쉬웠습니다. 있는 돈을 끌어 모아서 바로 출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D씨, I씨는 각각 부모님, 자신과 배우자가 평양에서 지방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것이 탈북을 촉발한 요인이 되었다. 이는 평양이 북한에서 ‘혁명의 수도’, ‘주석의 도시’로 표방되며, 이에 따라 평양주민들은 상위 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다(김성경, 2012). 따라서 D씨와 I씨는 상위 계층에서의 추락으로 인해 북한 정권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하여 탈북을 결심했던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J씨는 운동선수로서 자신의 미래가 북한 체제에서는 불안정하다는 판단이 탈북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정권의 기호에 따라 투자하는 운동 종목이 수시로 바뀐단 말이에요? 지도부가 갑자기 내 종목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 종목을 밀어주면 난 할 게 없단 말이야. 뭐 노동하던 것도 아니고, 밥 먹고 운동만 하던 사람인데.”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온성에서 전자제품 수리공이었던 K씨는 남한 소식을 쉽게 그리고 무엇보다 발각되지 않고 접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TV나 라디오는 특정 주파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기기에 손을 대거든요? 근데 수리공은 라디오를 수리해야 하니까 주파수를 여기저기 잡아볼 수 있어요. 이때 남한이나 중국 조선족 라디오 주파수를 잡아서 몰래 듣곤 했죠.” 다른 노동자들이 단체로 직장이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상호 감시를 하지만, 수리공은 혼자서 작업 장소를 가지기 때문에 감시가 허술하며 노동의 자유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보통 협업하는 일반 노동자들과 달리 수리공으로 혼자 작업하다 보니 감시에서 자유롭고 해외 특히 남한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동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2) 주변인의 권유

A, B, C, E씨 등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권유와 설득에 의해 탈북을 결심하였다. A씨는 남편 K씨가 남한사회를 동경하면서 탈북을 계획하고 권유할 때까지 탈북에 대해 생각조차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탄광 사업소의 회계사로 일하였기에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저는 갈 생각 자체를 안 했어요. 여기서 잘 살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 버리고 가냐. 근데 남편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으면 자기 혼자라도 가겠다고 엄포를 놓으니까, 탈북자 아내라는 소리가 나오면 여기서는 낯도 못 들고 살겠다 싶어서 따라 나왔어요. 남편이 중국 조선족 통해서 철저하게 준비했으니까 그건 걱정 안 했어요.”라며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반면 B씨는 자신은 탈북을 원하지 않았지만 딸 H씨의 장려를 위해 탈북했다고 한다. 남편은 당 간부였고 본인은 결혼 전에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고등중학교에서 선생님을, 결혼 후에는 원산의 대학 졸업하고서 대중국 무역회사에서 회계 및 마케팅 업무를 하였다고 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만큼 지방 거주민들이 쉽게 드나들 수 없는 평양으로 종종 출장을 갔다고 한다. 이렇게 사회경제적 지위가 안정적이었으나 딸 H씨가 북한을 벗어나서 더 넓은 세상에서 진로를 찾고 싶다는 소망으로 남한으로 가고자 했다고 한다.

“딸이 공부를 잘 했어요. 북한에서는 받기 힘든 음악 교습도 받고 평양으로 유학 갈 정도였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제게 남쪽으로 가겠다는 거예요. 나는 더 좋은 곳에서 공부해서 풍족하게 살고 싶다고요. 엄마 입장에서 자식이 하겠다는 걸 어떡하겠어요. 그래서 내가 무역상 하면서 아는 사람들 통해서 정보 받아가지고 딸아이가 가는 길을 내가 미리 터놓고 안전한지 봐서 뒤 따라오게 길을 만들어놔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B씨, 50대 여, 나진 출신)

C씨는 신의주에서 무역업을 하며 중국을 오가긴 했으나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 탈북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족 브로커를 통해 중국에서 병 치료를 받기로 한 것이 탈북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중국에 아는 사람 통해서 병을 고치겠구나 싶었죠. 근데 중국에 막상 가니 아파서 쩔쩔 매는데, 브로커가 중국에서도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하면서 날 안 보내주는 거예요. 그렇게 점점 중국 안쪽으로 데려가더니, 이제는 한국에 간다고 하면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주겠대요. 여기서는 이런 병 완치 못 하니 한국으로 가야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요. 그 땐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알았다고, 알았다고 하면서 각서를 쓰게 하더니 그때서야 의사를 부르더라고요. 그러고 대충 치료가 되니까 저를 한국으로 보낸 거죠.” 중국 체류 기간이 예상 밖으로 길어지면서 북한 당국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브로커를 통해 탈북한 것으로 비춰졌고 이로 인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한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구체적 이유를 밝히진 않았지만 E씨는 출산 직후 홀어머니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 조선족 친척이 E씨의 아이가 보고 싶다며 그리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니 중국으로 오라고 했다.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가정주부로서 뿌리치기 어려웠다고 한다.

“갑자기 중국 친척 언니가 내 애를 보고 싶다고 계속 연락을 했어요. 처음엔 갓난아기인데, 위험하다고 싫다고 거절했죠. 그런데 그 언니가 아기가 보고 싶다고 엄청 간절하게 얘기하면서 중국 오가는데 비용 다 대주고 어려운 살림 보탬도 해준다고 하니까 몰래 간 거죠. 그러곤 갑자기 제가 한국으로 가야한다고 하더니 브로커를 통해서 저를 한국으로 보냈어요.”(E씨, 40대 여, 평북 출신)

E씨도 C씨처럼 결과적으로 탈북한 것으로 여겨져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의도치 않게 남한으로 들어왔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타인의 권유로 탈북한 사람들은 주변의 환경에 의해 탈북‘당했다’라고 표현하였다. 탈북이 고국과 그곳에 남겨질 가족, 친인척, 지인 등을 저버리는 부정적 행위이기에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는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이들 주변에 탈북을 부추기는 요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족의 탈북(A, B), 중국 거주 친척(E), 직업 상 중국 왕래(B, C)가 탈북을 촉발하게 되었다.

(3) 진로 및 진학 목적

진로와 진학의 목적으로 한 미래지향적 탈북도 있었다. G씨는 북중접경지역에 거주하지는 않았고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 어머니는 고등중학교 교사로 비교적 안정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90년대 경제난 이후 어머니가 북중접경지역을 무대로 밀무역을 하면서 자신도 중국인들을 만나고 중국 물건을 접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경제난 때부터 국경을 오가면서 중국제를 받아서 집에서 몰래 장사를 했어요. 그때 어머니를 도우면서 바깥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고, 어깨너머로 이것저것 정보들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어요.” 이처럼 북한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등중학교 졸업 직전에 어머니께서 갑작스런 병환으로 몸져눕고 가세가 기우면서 입이라도 덜 겸 예전부터 궁금했던 중국으로 넘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국경수비대에 소속된 중국 군인에게 두 번 연거푸 잡힌 것이 인연이 되어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서 훈춘으로 이동해 자리 잡게 되었다. “진짜 운명처럼 잡혔던 사람한테 또 잡히더니 결국 사귀었고 그 사람(G씨 애인)이 저를 자신의 의형제 애인 집에 몰래 숨겨준 거죠. 그렇다고 집에서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 집 식당 종업원으로 집, 밥만 제공받으면서 한 2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무급으로 숙식만 해결하는 식당일에는 미래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손님으로 접하는 중국 조선족과 한국인을 보며 발전 없는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창 공부할 나이인데 무일푼 식당을 하면서 회의감도 들고, 북한으로는 못 돌아가겠고. 조선족이나 한국 사람들 접대하면서 한국 얘기를 듣고 한국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죠.”(G씨, 20대 여, 경성 출신)

G씨는 중국에서는 자기 삶에 진전이 없다고 생각하고 남한으로 가야된다는 판단을 내려 중국 애인과 그 주변인에게는 주변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한다고 말하고서 탈북 브로커를 통해 남한으로 들어왔다고 진술했다.

H씨의 경우에는 평양에서 대학을 다녔을 정도로 수학 능력이 뛰어났으며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탈북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나진에 있는 호텔에서 근무하며 탈북을 준비했다. 관광이나 사업 목적으로 왕래하는 중국인들을 접촉하며 탈북 관련 정보를 모았다고 한다.

“고위층 가족이니까 확실히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는 잘 먹고 잘 살았죠. 근데 평양까지 가서 공부를 하다보니까 북한 안에서는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럴 바에 남쪽으로 가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무역 회사에 다니셔서 중국 쪽도 잘 알고 조선족 친척도 있으니까 어머니의 도움을 받고 탈북한 거죠.”(H씨, 20대 여, 나진 출신)

진로 목적의 탈북을 한 두 대상자는 탈북 초기의 목적, 방식에 차이를 보였다. 탈북 후에 중국 체류 중 진로 목적으로 한국행을 택하는 경우(G씨)와 북한보다 더 좋은 환경인 남한에서 공부하고자 탈북하는 경우(H씨)로 나뉘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중국으로의 이동성을 지닌 가족이 있었다. G씨, H씨 모두 모친이 중국과의 교류를 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이동을 촉발하는 요인이 되었다. 즉, 정치적 자유 목적으로 탈북하는 사람과 같이 탈북에 이용 가능한 이동성을 적극 활용하는 점은 같았지만, 정보를 수집 방향이 상대적으로 단순하다는 차이를 보였다. 직접 이동 경험을 축적하거나 여러 사람의 정보를 취합하여 이동하는 것이 아닌 한 명(어머니)의 정보에 의지하여 탈북이 구상되었다. 다만, 이는 사회 경험이 적은 20대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 모빌리티 역량과 이주 실천

본 절에서는 탈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모빌리티 역량을 분석한다. 사실 앞서 살펴본 탈북 동기를 가졌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다수의 잠재적 탈북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모빌리티 역량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연구에 참여한 북한이탈주민이 북한에서 거주할 때 어떠한 모빌리티 역량을 가지거나 새로이 축척하였으며 어떻게 이를 바탕으로 탈북하게 되었는지 분석한다.

인터뷰에 응한 북한이탈주민은 재북 기간 동안 세 가지 유형의 모빌리티 자산을 가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업 출장이나 조선족 친척과 교류 등 해외 경험, 고향 친지 방문, 거주지역 변경, 대도시로의 유학 등 북한 내 지역 이주 경험, 그리고 외지 방문객이나 방송 매체 등을 통한 현지내(in situ) 외부 정보 획득을 통한 상상 이동 등으로 축약될 수 있다.

(1) 해외 방문 경험

해외 경험은 하물며 국내에서도 지역 간 이동에도 제약이 있는 북한에서 해외 방문은 특권적 이동이라 할 수 있다. 해외 경험은 조선족 친척 방문, 북중 무역, 국제대회 출전 등으로 다양한 계기로 얻게 되지만 결과는 공통적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 비해 외국과 외국생활에 대한 신비감과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중국과 무역을 했던 B씨 그리고 C씨는 중국인 대방과 만남 그리고 중국 사업체 방문 등으로 중국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C씨는 “북한에서는 구하려면 평양에 가야할 것을 중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쪽 사업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접촉하고 비공식적으로 생필품이나 의약품을 접하는 것이 빈번했고,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다.”하였다. B씨는 “중국과 무역을 하다 보니 중국인 몇몇과는 개인적으로도 연락이 가능했고, 물건을 부탁하기도 했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단순한 무역 분야 외에도 의료나 생활문화 부분에 대한 접촉도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의사소통, 여행 등의 모빌리티의 지리적 영역이 북한을 벗어나 중국으로까지 확장된다.

J씨는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면서 외국과 한국을 손쉽게 알 수 있었다. “해외 다니면 확실히 한국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통제한다고 해도 이동 과정이나 체류 국가에서 외국인 접촉이 발생하니까요. 경기에 한국 선수도 나오고요. 그래서인가? 해외가 어렵거나 두렵거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해외 체류가 요구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국제 모빌리티 역량이 길러진 또 다른 사례이다.

접경지역에서 떨어져 살고 가정주부인 E씨는 중국과 접점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간간히 연락하고 방문하던 조선족 친척이 모빌리티 자산이 된 경우이다. “중국에 있는 친척은 자주 보지는 않아도 가끔 연락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서로 보내주기도 하고 그랬죠.” 장기간 안정적이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교류는 아니었지만 간헐적 연락과 방문이 탈북을 감행 수 있던 모빌리티 역량을 제공했다. 앞서 언급한 B씨 또한 가족 교류가 있던 조선족 친척의 도움으로 탈북 당시 임시 거처를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몇 달 간 친척집 빈 방에서 TV만 보면서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죠. 친척이니까 딱히 머무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이처럼 해외 친척은 일상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주 실천을 가능케 하는 모빌리티 자산/역량이 된다.

(2) 북한 내 지역 이동 경험

북한 헌법 제 75조에 “공민은 거주, 려행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기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단적인 예로, 평양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평양시관리법에 따라 일정 요건을 충족하여 평양시민증을 받아야 한다. 심지어 평양시 안에서도 제약이 있다. 평양시 주변지역에서 중심지역으로 이주하기 위해서도 관련 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이제우, 2017). 북한주민이 거주지를 바꾸거나 벗어난다는 것은 특수한 경우로 예외적이다. 그 같은 경우는 대부분 강제이주, 이사, 출장, 유학, 고향 방문 등의 이유에서다. 구체적 이유가 어찌되었든 이주민의 모빌리티 자산을 축적되고 모빌리티 역량을 갖추게 된다.

K씨의 경우 재북 시절 해외 경험이 없었을 뿐더러 해외에 체류하는 친척이나 지인도 없었다. 실제로 탈북을 결행하면서 집을 비울 때에는 주기적으로 하던 고향 방문을 핑계 삼았다고 한다. “고향에 송이가 많이 나요. 그래서 가을만 되면 송이를 따러 고향에 갑니다. 당국에서도 항상 (고향 방문) 보고를 하기 때문에 탈북하는 순간까지 의심받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가족과 같이 간다고 말하고 나온 거죠.” 탈북으로 인한 자신의 거주지 부재와 그에 따른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본인의 고향 방문 모빌리티 자산을 활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무역업에 종사하는 B씨, C씨는 일반 노동자보다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다. 해외 출장 외에도 북한 내 여러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평양은 아무나 못가요. 북한 살면서도 평양 한 번 안 가본 사람 천지에요. 저는 무역상이라 평양에도 오가고 그랬죠.”(B씨, 50대 여, 나진 출신)

H씨는 고위층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음악 교습을 받기 위해 대도시로 나갔고, 음악을 접고서도 공부를 위해 평양으로 유학을 갔다.11) H씨는 “북한에는 피아노가 거의 없어요. 그래도 저는 청진에 나가서 피아노를 교습 받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더 큰 곳에서 공부하려고 평양에 갔어요. 평양은 북한의 엘리트들이 있는 곳이잖아요?”라고 하며 학구적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I씨는 평양에서 추방된 후 북중 접경지역과 오지를 전전하면서 평양과 지방에서의 삶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평양에 있을 때는 군대도 안 가고 연구에만 몰두 했는데 말입니다. 근데 지방에 가니까 다른 일도 해야 하고, 건강도 안 좋아지고.” 강제 이주로 평양과 지방에 대한 격차를 느끼고 신분 추락을 온몸으로 느꼈다고 하였다.

I씨와 유사하게 J씨도 해외와 북한의 지방을 다니면서 해외와 북한의 격차를 실감했다고 한다. “북한에 돌아가면, 장비도 허술하고, 물자도 없고, 그게 컸죠. 해외랑 너무 비교되는 거에요. 당장 평양과 해외도 그런데, 지방에 가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이동하면서 느낀 북한의 현실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감이 겹치면서 기존의 이주 경험을 탈북에 활용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북한주민 누구나 평양을 방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평양 방문이나 왕래 자체가 남다른 모빌리티 자산이 된다. 이와 더불어 평양 방문은 북한이탈주민의 탈북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평양과 지방의 격차를 절감하게 했고 평양시민증 획득 장벽은 탈북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했다. 따라서 북한 내 지역 이동은 탈북을 위한 모빌리티 역량이 됨과 동시에 탈북에 동기 부여를 했다.

(3) 현지내(in situ)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경험

현 거주지 내에서 외지 정보 획득은 앞서 언급한 모빌리티 역량과 달리 물리적 이동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본인이 직접 맞닥뜨려 얻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 정보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 의문 없이 무작정 수용하거나 심지어 과장 미화하기도 한다.

해외 경험이나 북한 내 타지역으로의 이동 경험이 없었던 D씨, F씨, G씨의 경우 간접적인 방식으로 탈북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외부 세계를 나름 상상하였다. 이주 직접 경험의 부재는 탈북과정에서 두려움과 끊임없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일단 마음먹고 나오긴 했는데, 내가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잘 되어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 생각이 많았어요(D씨).”, “중국으로 가는 길이 머니까 잘 되다가 걸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내가 보던 곳(남한)이 정말 그런 모습인 게 확실한지도 의문이 들었고(F씨).”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직접 경험의 부재가 때론 맹목적 저돌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머니 하시는 걸 보던 게 있으니까, 일단 중국으로 가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죠(G씨).”, “남편이 알아서 하니까, 저는 정말 얹혀가는 거였죠. 나오면서 뒷수습은 해둬서 걱정은 없었는데, 그냥 ‘모르겠다.’였어요(A씨).” 상상 이동 경험은 가장 낮은 수준의 모빌리티 역량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동반 탈북자가 가진 모빌리티 역량에 의존하여 탈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말할 나위도 없는 말이지만 외지 정보는 해외 경험이나 역외 이주 경험과 결합되면 탈북은 더욱 탄력을 받고 과정은 안정적이 된다. “어머니가 먼저 한국에 가셔서 연락을 했으니까, 저는 기다리다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H씨), “평양에 있을 때 정보도 있고, 여기저기 이사하면서 얻은 정보도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교차 확인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확실하지는 않아도 이렇게 하면 되겠다 싶어 위안은 되었습니다.”(I씨), “라디오 듣던 걸 바탕으로 친구한테 물어물어 조선족 소개도 받았고, 그렇게 해서 하다보니까 ‘이거 괜찮겠다.’ 싶었습니다.”(K씨) 이들 경우 모두 직접적인 모빌리티 자산과 간접적인 모빌리티 역량이 결합되어 이주 실천이 이루어졌다.

3) 한국에서의 정착지 선택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 모두 탈북 후 중국, 동남아시아 국가, 그리고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또한 모두 하나원을 거쳐 거주 지역 배정받은 후 해당 지역 내 임대아파트에 입주하였다.12) 이들 모두 하나원에 체류할 때에는 재북 기간, 탈북 직전, 중국 체류, 한국 입국 과정 등에서 형성한 사회연결망에 접속하지 않았다. 다만 브로커 비용을 지급하거나 북한에 남겨진 가족에게 한국 무사 도착을 알리는 정도의 연락은 취했다.

한국 내 거주지를 선택할 때에는 다시금 모빌리티 역량이 발현되는 모습을 보였다. I씨는 “평양에 산 내력도 있고, 연구 분야는 대학과 연구소, 기업 등의 인프라와 인적 자본이 몰린 서울이 좋다고 판단했다.”라며 재북 시절 가졌던 모빌리티 자산을 활용하는 한편 높은 수위의 역량을 유지하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로 목적으로 탈북한 G씨와 H씨는 동일하게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서울에 거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자발적인 탈북을 한 사람들은 한국 내 거주지 선정에 있어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다. 한편 D씨의 경우는 흥미롭다. “평양에 가고 싶은 마음을 서울에 살면서 대신 풀고 싶다.”라고 진술했는데 재북 기간 그리고 탈북을 감행하면서 자신의 모빌리티 역량을 높이면서 이주 목적인 사회지리적 지위 상승을 달성하였다.

북한이탈주민 대부분은 서울에 정착할 것을 선호하지만 입국 후 현지 사정을 접하면서 선호를 조정하기도 한다. F씨는 “탈북 전에도 그렇고 하나원에서도 얻은 정보로는 서울도 좋지만 서울 주변의 신도시 쪽에 사는 것도 서울에 사는 것만큼 좋은 선택일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한국에서는 부동산이 중요하다고 들어서요. 그래서 성남을 택했어요.”라고 하였다. 비수도권 도시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경우도 있었다. K씨는 충청남도 공주를 선택했는데,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 중에 규모가 어느 정도 있고 주변 대도시에 가기 용이한 곳을 그 당시 기호에 따라 골랐어요.”라고 진술했다.

이상의 사례와는 달리 정착지를 소극적, 수동적으로 선택한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도 있었다. B씨는 “딸이 서울의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하는데, 미리 서울에 자리를 마련해놨어야 했죠.”라고 하며 자신은 딸을 위해서 서울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고 답하였다. 또한 A씨는 “저는 다른 곳으로 갔으면 했어요. 남편 따라 간 것이지만, 왜 공주를 골랐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였다. C씨와 E씨는 모두 “오긴 왔는데, 생각도 없이 왔으니, 남들도 신청하는 서울에 신청해야겠다고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이거나, 남들이 많이 거주를 희망하니까 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들 대개 한국으로의 이주 과정에서 동반 탈북자의 모빌리티 자산에 의존한 경우들이었다.

이상의 논의를 카푸만과 그 동료들이 제기한 모틸리티 개념으로 적용하여 종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중접경지역에는 친인척 왕래에 의해 이어진 친족 연결망, 동일 민족성에 기반한 문화적 유사성, 국경무역을 통한 경제적 상호 의존 등으로 잠재적 모빌리티의 범위(접근)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를 인지하고 활용하는 능력(능숙)은 본 연구의 분석에서 밝힌 해외 방문 경험, 북한 내 지역 이동 경험, 현지내(in situ) 외지 정보를 통한 상상 이동 경험 등의 형태로 정리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탈북과 한국 입국을 계획하고 조직하여 실천하는 전용은 북한사회에 대한 불만과 사회적 이동성의 제약, 가족, 친척, 지인 등 주변인의 권유,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진로와 진학 등의 동기로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들 모빌리티 역량은 한국 내 정착 과정에서 북한이탈주민의 거주지 선택의 능동성에 영향을 미쳤음이 드러났다.

5. 결론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으로 탈북자가 급증했고 이중 일부가 한국으로 유입되어 2020년 현재 국내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3만3700여 명에 달한다. 한국사회에서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있다. 민족적 동질성을 가진 동포애의 대상으로 구 공산권 출신 재외동포와 유사하다고 여기거나 최악의 경제 상황을 피해 탈북한 경제 난민으로 혹은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한 경제이주민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여전히 냉전적 시각에서 적대적 타자로 바라보는 한편 북한 정권의 실패의 증거로 통일의 마중물로 보기도 한다. 위 어느 시각에서도 북한이탈주민은 한국 사회에서 남북 관계 변화에 따라 정착 지역에 따라 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편견과 차별을 받는 소수자이며 자신의 삶의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주민이다. 이에 본 연구는 북한이탈주민을 이주민으로 규정하고 이주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리고 이주 과정에서 축적한 모빌리티 역량이 이주 실천과 종착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 하에 국내에 유입된 북한이탈주민의 이주 실천 과정을 분석하였다.

실증 분석을 위해 북한과 한국에서 생애의 일정 기간을 보냈던 북한이탈주민을 눈덩이 표집하고 심층 인터뷰하여 탈북 동기, 모빌리티 역량, 한국 입국 후 정착지 선택을 살펴보았다. 탈북 동기에 대한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들의 응답은 북한사회에 대한 불만과 사회적 이동성의 제약, 가족, 친척, 지인 등 주변인의 권유,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진로와 진학으로 요약된다. 탈북 동기는 이주의 원동력인 만큼 이주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능동성과 적극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어 탈북에 동원한 모빌리티 역량으로 사업 출장이나 조선족 친척과 교류 등 해외 경험, 북한 내에서 고향 친지 방문, 거주지역 변경, 대도시로의 유학 등의 이유로 지역 간 이주 경험, 그리고 외지 방문객이나 방송 매체 등을 통한 현지내(in situ) 정보 노출을 통한 상상 이동 경험이 확인되었다. 탈북 후 중국, 동남아시아 국가, 그리고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한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은 하나원을 거쳐 한국에 정착하였다. 한국 내 정착 과정에서도 모빌리티 역량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모빌리티 역량의 크고 작음에 따라 한국 내 거주지를 선택함에 있어 능동성에서 차이를 보였다.

북한이탈주민의 이주에 관한 기존 연구 다수는 유출국인 북한과 유입국인 한국의 거시환경과 그 차이를 강조하거나 이주민 개인의 인구・사회・경제적 특성을 선별하고 정량화하여 기술하는데 그쳤다. 몇몇 연구가 거시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북한이탈주민의 행위주체성을 탐구하였으나 탈북, 한국 이주, 한국 정착지 선정 등 이주 전 과정에 대한 분석이 미흡했다. 본 연구는 북한이탈주민의 행위주체성을 부각하는 새로운 접근으로 모빌리티 패러다임에 기반하여 이들의 탈북, 한국 입국과 정착으로 이어지는 이주 전체 과정에 모빌리티 역량의 영향을 실증적으로 밝혔다는데 학술적 의의가 있다. 사회적으로는 이미 적지 않은 수의 북한이탈주민이 시기를 달리 하여 한국에 입국하였고 한국 사회로의 적응에 편차를 보이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사회에서 안착을 돕는 정책을 새로이 구상할 때 본 연구에서 드러난 모빌리티 역량에 대한 이해가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는 탈북 동기와 모빌리티 역량의 상호 관계와 이들의 교차작용이 한국 내 정착지 선정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일정 정도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접경지역에는 탈북브로커와 같은 모빌리티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데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이 시스템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 또한 미흡했다.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 정착에 있어 주요 이슈 중 하나는 탈북 과정에서 상실한 사회연결망을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가이다. 모빌리티 역량과 관련지어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내 사회연결망 재구성에 대한 연구는 추후 과제로 남긴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2020학년도 상명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4장에 수록된 북한이탈주민 인터뷰 내용은 정연형(2020)의 석사학위논문에서 게재된 바 있으며 본 연구에서 모빌리티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해석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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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자료]

1
교육통계서비스, https://kess.kedi.re.kr/
2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s://www.law.go.kr/LSW/
3
남북하나재단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nkrf_blog/
4
통계청, http://kosis.kr/
5
통일부, 2020, 2020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실무편람, 14-123. 10.7560/320167-026
6
통일부, https://www.unikorea.go.kr/

[1] 1) 난민 지위에 관한 1951년 협약에 따르면 난민은 외국인이나 무국적자이어야 한다. 한국으로 이동한 탈북자는 내국인 신분이므로 난민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2] 2) 연구자가 북한이탈주민 모임에 자원봉사를 하면서 표집하다 보니 표집이 편향되었을 수 있음을 밝혀둔다. 또한 연구참여 북한이탈주민 수는 11명으로 많다 할 수 없다. 하지만 김성경(2012), 염유식・김여진(2011), 최정호・박선미(2014) 등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정성적 분석을 행한 선행 연구들도 표본 수가 10~20명을 수준으로 본 연구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김부헌・이승철(2019)은 북한경제의 시장화 과정이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일상생활의 관행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과정이라 주장하면서 근거자료로 북한이탈주민을 설문한 바 있다. 실제 13명을 심층면담하고 71명을 구조화 설문조사했다. 심층면담자 수는 여전히 10여 명이이나 특정 전문 주제를 다루는 데 이례적으로 연구 참여 북한이탈주민 수가 많아 고무적이다.

[3] 3) 1993년에는 ‘귀순북한동포보호법(1993.6)’이 제정되어 귀순자를 국가유공자에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전환하고 정착금을 하향조정하는 등의 지원 규모를 축소한 바 있다.

[4] 4)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정의) 1항”, 국가법령정보센터, 2020.08.19 접속, https://www. law.go.kr/LSW/main.html

[5] 5) “‘탈북민, 북한이탈주민, 새터민, 탈북자’ 어떻게 부르는 게 맞을까요?”, 남북하나재단 블로그, 2020.08.20 확인, https:// blog.naver.com/nkrf_blog/221952039333

[6] 6) 사실 2000년대 중반 들어 북한이탈주민의 수 자체가 급감하였는데 국경지대 철책 사업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북한 정부가 비공식적인 월경을 단속하는 한편 중국 방문을 허가하여 합법화하려는 노력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 북한이탈주민가 겪는 외국생활에서의 고충을 전해옴에 따라 무작정 탈북을 감행하기 보다는 친지의 송금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다(김성경(2013: 239-240).

[7] 7) 남한에 입국해서 국적을 취득했던 북한이탈주민 중 제3국으로 망명한 재이주자는 약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김종원, 2019).

[8] 8) 영국에서 난민비자를 받았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다른 나라로 재이주한 북한이탈주민도 있다. 공식통계는 없으나 뉴몰든 거주민들은 지역내 북한이탈주민이 최대 150가구, 400명 가량으로 추정하며, 남녀 비율은 거의 비슷하거나 여성이 조금 많을 것이라고 본다(이수정, 2020).

[9] 9) 백일순 등(2020)은 개성공업지구의 경계를 정기적으로 넘나드는 통근 버스와 그 이용자의 이동과 그를 통한 개성시와의 교류로 인해 개성공업지구가 경계 다공성, 탈영토화, 공간 혼종성, 창발적 미시 변화를 획득하는 과정을 전문가 심층인터뷰를 통해 분석하면서 모빌리티 시스템 개념을 적용하였다.

[10] 10) 모틸리티는 생물학이나 의학에서 유기체가 움직일 수 있는 ‘운동성’을 의미하며 사회학에서는 모바일 능력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Kaufmann et al. 2004: 750).

[11] 11) 북한은 주민등록사업에서 모든 주민의 성분을 규정한다. 성분은 ‘출신성분’과 ‘사회성분’으로 나뉜다. ‘출신성분’은 계급적 토대로 본인이 출생하여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부모의 사회정치생활경위에 바탕으로 규정한다. 예로, 혁명가의 가정,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 노동을 하였거나 기업을 한 사람의 가정, 사무원의 가정, 체포・처단・월남・도주・행방불명된 자의 가정, 종교를 믿는 가정, 아버지・어머니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등이다. 다시 세분류되는데 예로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의 경우 고농, 빈농, 농민, 농장원, 중농, 부유중농, 농촌십장, 부농, 지주 등으로 구분된다. 반면 ‘사회성분’은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본인 스스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사회정치생활경위에 바탕을 두고 정해진다. 즉 학교 입학하고 사회적 직업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고부터 지금까지 학력, 경력, 정치적 활동에 따라 정해진다(이제우, 2017).

[12] 12) 임대아파트에 입주하기 전에 A씨와 K씨, B씨는 북한이탈주민 임시 거처인 쉼터에 머문 적이 있으며, G씨는 대학 진학을 위해 북한이탈주민 학원시설에 머물다 대학에 입학하고 임대아파트에 입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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