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 간도협약 본문의 검토
1) 협약 명칭과 전문
2) 협약 본문
3. 간도협약 부도의 검토
1) 간도협약 부도로 알려진 지도들
2) 간도협약 부도
4. 간도협약에서 간도의 범위와 한・중 국경
1) 간도의 범위
2) 부도에 그려진 석을수와 한・중 국경
3) 송교인의 『간도문제』와 「간도도」의 영향
4) 정해감계와 간도협약의 결과 비교
5. 간도협약 이후 일본과 중국의 백두산-두만강 국경 표시
1) 일본 제작 지도
2) 중국 제작 지도
6. 결론
1. 서론
한국과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간도협약(間島協約)’으로 불리는 협약의 정식명칭은 일문으로는 「간도에 관한 일・청 협약(間島に關する日淸協約)」, 중문으로는 「도문강 중・한 경계에 관한 중・일 조관(中日圖們江中韓界務條款)」이다(국회입법조사국, 1964, 262; 267). 중국과 일본 사이에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체결되었다. 한자 문화권에서 동일한 내용의 협약이 이처럼 상이한 명칭으로 불리는 것도 드물 것이다. 이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이 협약에서 방점을 두고 있는 내용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논문의 제목에서 ‘간도협약’이라고 따옴표를 붙인 것은 그것이 일본이 부여한 협약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부르는 방식으로 이 협약을 지칭하는 것 역시 일방적이다. 따라서 제목에서는 인용표를 사용하되, 본문에서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명칭이라는 이유에서 인용표 없이 간도협약(약칭 협약)이라 칭하기로 한다.
간도협약의 주요 내용에 비추어, 이 협약이 굳이 체결되어야 했다면 그것은 한국(대한제국)과 중국(청) 사이에 체결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간도협약 체결 당시 한국은 일본의 조선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 협약과 관련하여 한국인들로 하여금 복잡한 감정을 갖도록 만들었다. 한국사 통사들만 보아도 ‘영토상실’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에 따르면, “일본이 간도를 안봉선 개축과의 교환 조건으로 청에 마음대로 넘겨준 것은 이 일방적인 외교권 박탈의 결과였다(이기백, 1997, 397).” 한영우의 『다시 찾는 우리역사』에 따르면, “일본은 백두산정계비(1712) 이후로 청나라와 계속 국경분쟁을 일으켜오다가 대한제국이 적극적으로 관리해 오던 만주의 간도(지금의 연변)지방을 마음대로 청에 넘겨주었다. 그 대가로 일본은 안봉선(안동(단동)-봉천) 개설권을 얻어 내었다(한영우, 2008, 501).” 그러나 간도협약 이전의 마지막 조・청 공동감계인 정해감계(1887)에서 조선측이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최근 명확하게 밝혀졌다(김형종, 2018; 이강원, 2022). 따라서 이러한 통사 서술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최근까지 간도협약에 관한 최초이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논저는 일본인 시노다 지사쿠의 것(篠田治策, 1938; 신영길 옮김, 2005)이었다. 많은 한국의 연구자들이 여전히 그의 관점에 포획되어 있다. 변호사이자 국제법학자이며 경성제국대학 총장이라는 이력은 그의 저서에 큰 아우라를 드리웠다.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연구가 그의 논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에서 이 협약에 관련된 대표적인 연구로 이한기(1969, 309-351)를 들 수 있다. 그는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확신하면서(이한기, 1969, 350), 이 협약의 국제법적 무효성을 주장하였다.1) 이후 역사학과 정치학 분야에서 적지 않은 연구가 있었는데, 대부분 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에 관한 것들이다. 주로 「백산학보」를 중심으로 논문들이 게재되었다.
중국에서는 양자오취안・쑨위메이(楊昭全・孫玉梅, 1993, 446-526), 리화쯔(李花子, 2016; 2017; 2019; 이화자, 2019)의 연구가 대표적이다.2) 중국에서의 연구는 주로 한국과 일본이 제기한 문제의 부당성과 무효성 그리고 침략성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에서 출간된 쑹녠선의 연구(Song, 2018; 이지영・이원준 옮김, 2022)는 1880년대에서 1919년에 이르는, 두만강 국경을 둘러싼 갈등을 한국과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거시적 차원의 ‘국경 만들기’ 내지 ‘국가 만들기’에 초점을 두는 관계로 국경획정을 둘러싼 지리적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하지 않았다(이강원, 2022, 230).
국경이나 영토는 지도에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지도에 표시할 수 없는 국경이나 영토 주장은 허구적이거나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이강원, 2022, 230). 간도협약과 관련된 기존의 연구들은 ‘국경’과 ‘영토’에 주목하고 있지만, 정작 간도협약 부도(附圖: annexed map)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3)
간도협약은 ‘석을수(石乙水)’를 두만강 상류에서 한・중 국경을 획정하는 물줄기로 규정하고 있다. 이 ‘석을수’라는 지명은 정해감계(1887)에서 처음 등장한 두만강 상류 물줄기 명칭으로, 당시 중국측이 조・중 국경으로 주장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현대의 많은 연구자들이 간도협약의 한・중 국경규정이 정해감계 당시 중국측의 국경주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예로, 선즈화・동제(沈志華・董潔), 2011, 35; 박종철 옮김, 2012, 36).
그러나 정해감계 당시 중국측의 국경주장과 간도협약의 국경규정은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첫째, 간도협약은 ‘석을수’뿐만 아니라, 정해감계 당시 중국측 주장과 달리, 정계비를 국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둘째, 간도협약 부도에 표시된 ‘석을수’는 정해감계의 석을수와 다른 물줄기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간도협약 이후 중국에서 출판된 지도들 거의 대부분이 간도협약과 그 부도를 따르지 않았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간도협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간도협약의 국경규정이 정해감계 당시 중국측의 국경주장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후자를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에서는 간도협약 국경규정이 중국 뜻대로 타결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민국시기 중국인들은 간도협약 국경규정을 굴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간도협약에서 일본이 홍토수 대신 석을수로 양보하여 정해감계의 청측 주장대로 한・중 국경이 획정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간도협약에서 일본이 정해감계 당시 이중하의 홍토산수(홍토수) 주장을 관철시켰다는 말인가? 이러한 반문과 의문들은 간도협약 본문과 부도에 대해 점검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논문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간도협약 본문에 대해 일문본과 중문본을 대조 검토하고, 다음으로 간도협약에서 규정한 간도의 범위, 석을수라는 물줄기, 그리고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의 한・중 국경선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간도협약 이후 일본과 중국과 대만의 지도들이 한・중 국경을 어떻게 표시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논문을 위하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 일본 외무성외교사료관, 중국과학원 지리과학 및 자원연구소 도서관,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등의 소장 지도자료들을 이용하였다.
2. 간도협약 본문의 검토
1) 협약 명칭과 전문
‘간도협약’은 일문으로는 「간도에 관한 일・청 협약」, 중문으로는 「도문강 중・한 경계에 관한 중・일 조관」이다. 일반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간도협약(間島協約)’이라 불리고, 중국에서는 ‘도문강 중・한 국경 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이라고 불린다. 협약체결 당시 합의된 명칭은 없었으며, 중국과 일본 양측이 각자 협약문의 표지에 임의로 제목을 붙였다.
중국은 ‘도문강(圖們江)’이라는 지명을 협약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이 협약을 통해 한국과의 국경을 도문강, 즉 두만강으로 결정지었다는 것을 부각하고자 한 것이다. 도문강(두만강)이 국경이기 때문에 도문강 이북에 한국 영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중국은 ‘간도(間島)’라는 지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협약 본문에서도 ‘간도’라는 지명 대신 “도문강 북쪽 잡거구역”이라는 표현을 시용하고 있다. 이는 “도문강(두만강) 북쪽의 한국민과 중국민의 혼거지역”이라는 의미이다. 반면, 일본은 ‘간도’라는 지명을 협약 명칭에 넣음으로써, ‘간도’라는 구역을 실체화시키고, 자신들이 그 구역 내 한국민의 권익을 확보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간도’라는 지명은 한국인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협약(協約)’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조관(條款)’이라 한 것도 차이가 있다. 전자는 협조적이고 원만한 타결을 강조하는 것이고, 후자는 ‘사항들을 규정한 것’이라는 간단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협약의 전문(前文)에서도 확인된다.
[일문] 대일본국정부 및 대청국정부는 선린의 호의에 비추어 도문강이 청・한 양국의 국경임을 서로 확인함과 아울러, 타협의 정신으로써 모든 일 처리를 상의하여 정함으로써, 청・한 양국의 변경주민이 영원히 치안의 경사스러운 복을 누리기 바라면서 이에 좌측(다음)에 열거하는 조항에 합의한다.
[중문] 대청국정부와 대일본국정부가 선린과 우의를 염두에 두고, 도문강을 중・한 양국의 국경으로 서로 인정하며, 일체 방법을 협상함으로써 중・한 변경지역의 주민이 영원히 서로 화목하고 함께 행복을 누리도록 합의한 각 사항은 좌측(다음)과 다음과 같다.
여기서 ‘도문강(圖們江)’이라는 지명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을 대변하는 일본이 두만강(豆滿江)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일문본에서도 중국과 동일하게 ‘도문강’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첫째, 일본은 정계비의 ‘토문강(土門江)’이 곧 두만강이라고 인정하고 있다.4) 둘째, 두만강 월경변민들이나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의 입장과 달리, 일본정부는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간주하지 않는다. 셋째, 이로서 ‘Tumen River(圖們江)’은 국가 간 ‘조약지명’이 되어 국제적인 공식지명으로 사용된다.
전문의 취지에서도 분위기의 차이가 있다. “치안의 경사스러운 복을 누리도록”과 “서로 화목하고 함께 행복을 누리도록”이라는 양측의 표현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협약 본문
간도협약은 모두 7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일문] 제1조 일・청 양국정부는 도문강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의 발원지역에서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로써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성명한다.
[중문] 제1조 중・일 양국정부는 도문강이 중・한 양국의 국경이며, 도문강 발원지역에서는 정계비로부터 석을수까지가 국경이라는 것을 피차 성명한다.
제1조는 「정계비 - 석을수 - 도문강(두만강)」을 한・중 국경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간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 조항의 ‘석을수(石乙水)’라는 표현을 두고, 일본이 정해감계(1887)의 청측 입장을 따르는 것이며, 따라서 간도협약은 간도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정해감계에서 조선측 대표 이중하의 주장에서도 후퇴한 것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간도협약이 정해감계 당시 이중하의 국경주장보다는 후퇴한 것이 사실이지만, 정해감계 당시 청측의 주장보다는 전진한 것 역시 사실이다. 정해감계 당시 청측의 국경주장은 「압록강 - 소백수 - 소백수 상류 우측 지류 - 소백산 정상 - 석을수 - 두만강」이었다(이강원, 2022). 간도협약은 정계비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반면, 정해감계에서의 청측 주장은 소백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제1조를 통해 정계비가 중국(청)에 의해 처음으로 국경 표지로 인정되었다. 물론 1904년 6월 15일 양국의 지방관들에 의해 체결된 「한중변계선후장정(韓中邊界善後章程)」의 제1조에서 “양국의 경계는 백두산 비석의 기록이 있어 증명할 수 있지만, 양국정부 파견인원의 공동감계를 기다려야 하므로, 그 이전에는 종전대로 도문강 물줄기를 간격으로 하여…”라는 문구를 들어, 이전에 이미 중국측이 정계비를 인정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문맥상 양국 정부차원의 감계를 기다려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있으므로, 당시 중국이 정계비를 인정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을유・정해감계 내내 중국측은 정계비의 국경 표지로서의 지위와 그 지리적 위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은 간도협약에 이르러 처음으로 정계비의 국경 표지로서의 지위와 그 지리적 위치를 인정하였다.
제2조는 대외개방구역의 지정과 영사관 및 그 분관의 설치에 관한 것이다. 국가명칭을 일본이 중국을 ‘청국정부’라 칭하고, 중국은 스스로를 ‘중국정부’라 칭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문의 일문과 중문의 내용은 동일하다.
제2조 청국정부 [중국정부]는 본 협약 조인 후 가능한 한 속히 왼쪽(아래)에 기록한 각각의 지역을 외국인의 거주 및 무역을 위하여 개방하도록 하고, 일본정부는 이들 지역에 영사관 또는 영사관 분관을 설치할 것이다. 개방의 기일은 별도로 정한다. 용정촌, 국자가, 두도구, 백초구.
제2조에서 언급된 4개의 취락은 일종의 핵심취락(key settlements)이라고 할 것인데, 당시 일본이 파악하고 있던 핵심취락은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동불사(東佛寺), 하천평(下泉坪) 등 6개소였다. 이것은 부도에서 이들 지명에 사각형의 테두리가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협상을 통하여 4곳으로 줄었다.5) 용정촌은 오늘날 용정 시내를, 국자가는 연길 시내를, 두도구는 화룡시(和龍市) 두도구진을, 백초구는 왕청현(汪淸懸) 백초구진을 말한다.
제3조는 ‘간도’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측이 ‘간도’라는 지명이나 지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문강 북쪽의 개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의 지도 [부도]”로 표시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간도의 범위’를 부도에 표시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간도의 범위를 두고 여러 논의가 있으나(예로, 박선영, 2010; 李花子, 2017; 이화자, 2019; 문상명, 2020), 필자는 영토적 사안과 관련해서는 간도협약 부도에 표시된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본다.
제4조 도문강 북쪽 지역 잡거구역 내 개간지에 거주하는 한국민들은 청국 [중국]의 법권에 복종하며, 청국 [중국] 지방관의 관할 재판에 복종한다. 청국관헌 [중국관헌]은 이 한국민들을 청국민 [중국민]과 같이 대우해야 하며, 납세 등 모든 행정상의 처분도 청국민 [중국민]과 동일하여야 한다. 이 한국민들에 관계되는 민사 형사 등 모든 소송사건은 청국관헌 [중국관헌]이 청국 [중국]의 법률에 따라 공평히 재판해야 하며, 일본영사관(官) 또는 그의 위임을 받은 관리는 자유로이 법정에 입회할 수 있다. 단 인명에 관련된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먼저 일본국영사관(官)에게 조회하여야 한다. 일본국영사관(官)이 만약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 판단한 조건이 있음을 인정하였을 때에는 재판에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따로 관리를 파견하여 다시 심리할 것을 청국 [중국]에 청구할 수 있다.6)
제4조는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민의 처우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간도’를 “도문강 북쪽 지역 잡거구역 내 개간지”로 칭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중국의 주권 내지 법권을 인정하지만, 일본영사가 한국민의 보호를 위해 소송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해두었다. 이는 1907년 일본 헌병대가 간도에 진출하고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설치되면서 많은 한국민들이 일본이 간도를 한국령으로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일본의 철병 이후 한국민에 대한 보복 내지 불이익 등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제5조 도문강 북쪽 잡거구역 내에 있어서 한국민 소유의 토지와 가옥은 청국정부가 청국인민의 재산과 같이 보호하여야 한다. 또 이 강의 연안에 장소를 정하여 도선장을 설치하고 쌍방 인민의 왕래를 자유롭게 한다. 단 병기를 휴대한 자는 공문 또는 여권 없이 월경할 수 없다. 잡거구역 내에서 산출되는 미곡은 한국민의 구매와 수출을 허가한다. 그러나 흉년의 시기에는 금지할 수 있다. 땔감과 풀을 베는 것은 이 조항을 원용하여 처리한다.
여기서 “도문강 북쪽 잡거구역”도 ‘간도’의 별칭이다. 이 구역 내에서 한국민의 재산권을 인정하고, 평시 한국민의 자유로운 한국 왕래와 미곡의 자유로운 한국 운송을 용인한다는 것이다. 제4조와 제5조를 고려하면, 간도에서 한국민은 치외법권에 버금가는 특수한 지위를 누린다고 할 수 있으며, 간도는 조계지에 준하는 특별구역의 지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제6조 청국정부 [중국정부]는 장래 길장철도(길림-장춘 철도)를 연길 경내에 연장하여, 한국 회령에서 한국철도와 연결되도록 하며, 그에 관한 모든 처리는 길장철도와 같은 방법으로 하여야 한다. 시작 시기는 청국정부 [중국정부]에서 상황을 고려하여 일본국정부와 상의한 뒤에 정한다.
제6조는 ‘간도’ 경내를 관통하는 철도에 관한 것이다. 회령에서 한국철도와 연결시키려 한 것은 러・일전쟁 시기(1904~1905)에 일본이 건설한 청진에서 회령에 이르는 궤간 600㎜의 경편철도(輕便鐵道: 협궤철도)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철도는 1917년 표준궤로 새로 완공되었다. 경원선이 완공된 것이 1914년이며, 원산-회령 철도가 완성된 것이 1928년이고, 「장춘-길림-돈화-안도-연길-용정-개산둔」에 걸쳐 건설된 중국 경내 철도와 「원산-함흥-길주-청진-회령-상삼봉-동관」의 함경선이 연결된 것은 1933년 8월 1일이다. 간도협약 당시 일본은 길장철도를 청진-회령 철도에 연결하여, 일차적으로는 청진을 통해 간도를 직접 일본과 연결시키려 하였고, 또한 부수적으로는 간도를 조선과 긴밀하게 결합시키려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철도연결은 만주국 건국(1932)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제7조 본 협약은 조인 직후 효력이 발생하며, 통감부파출소 및 문무의 각 인원들은 가능한 한 속히 철수를 시작하며, 2개월 이내에 완료한다. 일본국 정부는 2개월 이내에 제2조에 새로 약속한 통상지역에 영사관을 개설한다.
제7조는 일본 헌병대의 조속한 철병과 그를 대신한 영사관의 개설에 관한 것이다. 간도협약에서 중국측이 가장 집중한 것이 바로 ‘도문강 국경’과 ‘일본군 철병’이다. 이 조항은 철병과 영사관을 교환하는 조건이며, 동등하게 기한을 2개월 내로 정했다.
마지막으로 후문(後文)이다. 양국 대표는 간도협약에 다음과 같이 서명・날인하였다.
이를 위하여 양국의 대신은 본국정부의 합당한 위임을 받들어 일문 및 중문으로 작성한 각 2통의 본 협약에 서명하고 날인한다.
대일본국 특명전권공사 이쥬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 날인
대청국 흠명 외무부 상서회판대신 량둔옌(梁敦彦) 서명
명치 42년 9월 4일/ 선통 원년 7월 20일/ 북경에서
중국과 일본이 각각 중문과 일문으로 된 협약문 한 벌을 보관하였고, 중국 보관본의 중문본과 일문본은 모두 중국이 앞서 호명되고 있으며, 일본 보관의 일문본과 중문본은 모두 일본이 앞서 호명되는 식으로 작성되어 있다. 다만 부도는 양국이 각각 1부만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간도협약 부도의 검토
1) 간도협약 부도로 알려진 지도들
간도협약 부도로 알려진 지도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에 수록된 지도(그림 1)7)를 간도협약의 부도로 제시하는 경우(이화자, 2019, 334)가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도협약에 규정된 한인 ‘잡거구역’(雜居區域: 혼거구역)을 표시한 지도일 뿐이며, 간도협약 부도의 원본이 아니다. 다만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기요(紀要)를 만들면서 이러한 지도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간도협약 부도의 초안 역시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지도의 축척은 원본과 같이 40만분의 1이다.
간도협약 부도의 또 다른 판본은 1920년 일본 외무성이 편찬한 『대정 7년 집록 조약휘찬(大正七年輯錄條約彙纂)』(1920)8)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간도협약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조약 모음이다. 이 책에 실린 간도협약의 부도는 그림 2와 같다. 그런데 『소화 11년 개정 조약휘찬(昭和十一年改訂條約彙纂)』(1936)9)의 간도협약 부도는 그림 3과 같다. 각각의 『조약휘찬』에 실린 간도협약의 본문은 일문본과 중문본이 원본과 차이가 없으나, 부도는 원본의 영인본이 아니며, 『조약휘찬』에 따라서도 부도가 서로 다르다.10)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조약휘찬』들의 두 지도는 축척이 80만분의 1로서 원본의 40만분의 1과 다르다. 둘째, 간도의 범위를 표시한 선이 원본과 다르다. 원본은 일점쇄선이다. 대정 7년 집록본(1920년 출간본)은 실선이며, 소화 11년본(1936년본, 그림 3)은 붉은색 실선 위에 검은색 파선을 덧씌웠다. 셋째, 한국인 집거지 주요 지명에 두른 네모 표시가 지도마다 서로 다르다. 넷째, 난외주기의 내용은 같으나, 글자체가 지도마다 다르다. 다섯째, 두만강 상류에 석을수, 홍토수, 원지, 신무성 등이 두 지도에 표시되어 있고, 그 상대적 위치는 원본 지도와 같다.
간도협약 체결 당시 지도는 일본측이 제작하고 제공하였다(이화자, 2019, 311). 협약문을 일문과 중문으로 각 2부씩 작성하여, 양국이 각각 중문과 일문 1부씩을 보관하고 있으므로, 부도 역시 최초의 원본이 있고, 모사본을 만들어 부도로 편철하였을 것이다.
2) 간도협약 부도
일본이 접수한 간도협약 관련 문서들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보관된 간도협약 부도(그림 4)11)가 최초의 원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2018년 2월 원본지도의 촬영을 섭외하였지만, 담당자는 펼쳤을 경우 파손의 위험이 있어서 규정상 촬영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서지사항은 전달받을 수 있었다. 조약문의 크기는 여백포함 가로 21.5㎝, 세로 32㎝, 1매의 부도가 있으며, 부도의 크기는 가로 약 50㎝, 세로 약 69㎝이다. 이 부도는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온라인 공개하고 있다. 바로 간도협약 제3조에서 언급된 “별도의 지도(別圖; 附圖)”이다.
이 지도는 가로 9칸 세로 12칸의 방안에 그려졌으며, 오른쪽 아래에 40만분의 1의 축척이 표시되어 있다. 축척 위에 방위가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의 위쪽을 북쪽으로 하고 있다. 방위 표시의 위쪽에 북쪽을 나타내는 알파벳 ‘N’을 쓰고 그 위에 ‘北(북)’이라는 글자를 다시 써넣은 것은 중국측을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일본이 보관하고 있는 일문본과 중문본에 각각의 부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지도 하나만 부도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이 보관하고 있는 중문본과 일문본에도 단 1매의 부도만 있을 것이다.
이 지도에는 범례가 없지만, 두만강을 따라 표시된 일점쇄선은 이 협약에서 정한 한・중 국경으로, 파선은 길 표시로, 실선은 하천 표시로 해석하는 데 무리가 없다.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일점쇄선은 원래 붉은색으로 표시되었으며, 당시 이 지도 제작자들이 이해하고 있던 두만강 수계(두만강・홍기하(紅旗河)・해란강(海蘭江)・포이합통하(布爾哈通河, 부얼하퉁하)・알아하(嘎呀河, 가야하))의 송화강 및 목단강 수계와의 분수계(분수령)를 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간도의 범위를 표시하는 선과 한・중 국경을 표시하는 선이 일점쇄선으로 같다. 지도학적으로 이는 간도가 중국 내지로부터 다른 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구분되는 지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표기된 지명들 중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동불사(東佛寺), 하천평(下泉坪) 등 6개 지명에 실선의 사각형이 둘러있다. 이것은 당초 일본이 개방과 영사관 설치를 요구하였던 6개 지역을 말한다. 최종적으로는 앞의 4개 지역만 개방하기로 결정되었음에도, 지도에 이렇게 표시되었다. 이로 보아 이 협약이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부도 역시 일본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 왼쪽 아래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가 ‘益葛浦(익갈포)’로 표기된 것도 이 지도가 일본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익갈포’는 간도 현지의 한국민들이 사용하는 ‘이깔이개’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옮긴 것으로, 중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4. 간도협약에서 간도의 범위와 한・중 국경
1) 간도의 범위
간도협약 부도의 난외주기 위에는 중국 대표의 날인이 아래에는 일본 대표의 날인이 있다. 난외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협약의 제3조에서 말한 두만강 북쪽의 잡거구역(혼거구역)이 곧 이 지도에 그린 지역이며, 남쪽은 두만강, 동쪽은 알아하(가야하), 서쪽과 북쪽은 균히 붉은 색 선을 경계로 삼으며, 경계 내에서 한국민의 중국민과의 잡거(혼거)가 허락된 개간지를 특별히 이같이 성명한다.12)
이를 통해 지도의 왼쪽 아래 정계비로부터 시작되는 산줄기 표시의 가운데에 그려진 일점쇄선이 붉은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간도협약에서 말하는 ‘간도’의 범위가 바로 이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간도협약 본문 및 부도 난외주기에 따르면, 간도의 범위는 「모수림하 - 두만강・송화강 분수계 - 두만강・목단강 분수계 - 알아하(가야하) - 알아하・도문강(두만강) 합류점 - 도문강(두만강) - 모수림하」를 잇는 선으로 구획되는 지역이다. 이를 오늘날의 행정구역지도에 표시하면 그림 5와 같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용정시와 연길시 전 구역, 화룡시의 대부분, 안도현, 도문시, 왕청현의 일부를 포함한다. 오늘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대략 1/3 정도에 해당한다.
간도협약 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산줄기 표시이다. 오늘날 이 산줄기는 서쪽으로부터 장산령(長山嶺, 창산링), 노령(老嶺, 라오링), 영액령(英額嶺, 잉어링), 합이파령(哈爾巴嶺, 하얼바링), 노야령(老爺嶺, 라오예링)으로 불린다. 이 산줄기를 이렇게 뚜렷하고 분명하게 표시한 것은 1880년대 초 함경도 월경변민들의 「압록강 -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 동해」라는 국경주장에서 ‘토문강’(송화강의 상류 지류)과 ‘분계강’(두만강의 지류) 사이가 물줄기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 지도를 통해 중국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간도의 범위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까지 한국정부는 간도의 범위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간도협약의 간도의 범위도 조선정부가 제시한 것이 아니다. 차지해야 할 땅이 있다는 정부가 찾아야 할 땅의 정확한 범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1880년대 초 함경도 월경변민들은 「압록강 -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 동해」로 이어지는 하천이 있고, 이것이 조・청의 국경이라고 상상하고 주장하였다(이강원, 2021; 2022). ‘분계강’을 때로는 해란강으로 때로는 포이합통하(부얼하퉁하)로 비정하는 등 일관성은 부족했지만, 그들은 하천이라는 자연적 경계(natural boundary, 천부적 경계)를 근거로 국경을 상상하고, 그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이주와 거주를 정당화했다. 자연지리적 실체를 근거로 사회지리적 실제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 경계는 없었으며, 그것이 없다는 점이 을유・정해감계 이후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의 일본인들에 의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간도협약은 ‘한국민들의 잡거구역(혼거구역)의 분포’라는 사회지리적 현상, 곧 이주와 정착을 전제로 간도의 구역을 획정하였다는 점에서 1880년대 초의 월경변민들의 주장과 차이가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 역시 ‘두만강 수계와 송화강 및 목단강 수계 사이의 분수계(산줄기)’ 그리고 ‘알아하(가야하) 물줄기’라는 자연적 경계(천부적 경계)를 추구하였다는 점은 1880년대 월경변민과 같다. 그럼에도 간도협약에 규정된 간도의 범위는 그 이전에 월경변민들이 주장하던 간도의 범위(이강원, 2021)보다 축소되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1880년대 월경변민들의 ‘상상의 지리’와 20세기 초반 두만강 북안의 ‘사회지리적 실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는 간도협약의 간도 범위가 그 이전에 월경변민들이 주장한 간도 범위보다 축소되었다면서, 일본을 책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한국 병합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일본이 한국의 영토가 넓어지는 것을 꺼릴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나이토 코난(內藤湖南) 등의 조사를 통하여, 월경변민들의 주장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과 정해감계에서 조선대표 이중하의 국경주장이 간도영유권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2) 부도에 그려진 석을수와 한・중 국경
간도협약 전문에서 한・중 국경은 총론적으로 도문강(圖們江)으로 한다고 규정하였으며, 제1조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강의 발원지역에 있어서는 정계비로부터 석을수(石乙水)까지”로 한국과 중국의 국경을 삼는다고 하였다. 이 전문과 제1조는 일본이 만주에서의 이권을 위해 중국에 간도를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마저 정해감계(1887)에서 중국측이 주장한 석을수로 양보하였다는 논리의 대표적인 논거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일본이 이권을 위해 ‘간도를 양보하였다.’는 주장은 정확하다 할 수 없다. 정해감계에서 조선측 대표 이중하가 월경변민들의 「압록강 -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 동해」라는 국경주장을 버리고, 「압록강 - 정계비 - 황화송구자(이깔이개) 토퇴 종점 - 홍토산수(홍토수) 발원지(오늘날 모수림하 발원지) - 두만강」을 국경으로 주장했기(이강원, 2022, 248)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만주에서의 이권을 위해 ‘간도는 영토 분쟁 지역이 아니라고 성명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편,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의 국경선을 정해감계 당시 중국측이 주장한 석을수로 양보하였다는 논리도 정확하다 할 수 없다. 간도협약 부도에 그려진 석을수가 정해감계의 그 석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이에 대해 검토하기로 한다.
간도협약 부도에 그려진 도문강은 「석을수 - 홍토수 합류 - 장산령 - 증산 - 천평리 - 창평 - 장파 - 하구 - 무산 - 회령 - 종성」으로 이어지는 유로를 갖는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두만강이라고 부르는 하천의 유로와 같다. 그리고 이 두만강 유로를 따라 국경선 표시로서 일점쇄선이 그려져 있다(그림 4).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에서 이 일점쇄선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분수계를 따라가다가 좌측에 익갈포(益葛浦)라 표기된 곳 부근에서 갈라져 홍토수와 석을수 사이에서 석을수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장산령 이하에서는 두만강 본류를 따라 그려져 있다(그림 6). 따라서 “도문강 상류에서는 「정계비 - 석을수」를 국경으로 한다.”는 제1조의 내용이 반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정계비로부터 석을수의 발원지로 곧바로 선을 긋지 않고,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압록강・송화강 분수계, 두만강・송화강 분수계 능선을 따라가다가 석을수 중간에서 하천을 따라 이어지는 선(일점쇄선)으로 한・중 국경을 표시하였다.13)
그러나 간도협약 부도에 그려진 원지(圓池), 홍토수(紅土水), 석을수(石乙水)는 석을수가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명명된 「정해감계지도」(그림 7)의 표시와 일치하지 않는다. 나아가 1964년 이래 북한과 중국에서 만들어진 지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일치하지 않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는 약류하(弱流河)이며 홍토수가 아니다. 이 물줄기는 때로 원지수(圓池水)라 불리기도 했지만, 홍토수(홍토산수)라 불린 적은 없다. 이 물줄기는 홍토수(홍토산수)와 합류하여 두만강을 이룬다. 이 물줄기가 ‘홍토수’로 표시되는 것은 간도협약부터이며,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후 일본의 지도들과 1920년대 이후 일부 중국 지도들에서 원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홍토수’라고 표시하였다.
둘째, 간도협약 부도에 석을수로 표시된 하천은 정해감계의 홍토산수(홍토수)이다. 원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합류하는 것은 홍토산수(홍토수)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무성(神武城)이라 표시된 지명은 을유・정해감계에서 이중하에 의해 ‘신무충(申武忠)’으로 기록되었고, 유건봉의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岡志略)』(1908)의 지도에서는 ‘신민둔(新民屯)’으로 표기되었는데, 본래 중국인이 설치한 엽막(獵幕)이 있던 곳이다.14) 신무성을 남쪽에 두고 간도협약 부도에서처럼 그 북쪽을 흐르는 두만강 상류 물줄기는 오늘날 모수림하(母樹林河)로 불리는 하천밖에 없으며, 정해감계에서 홍토산수(홍토수)는 모수림하를 의미하므로(이강원, 2022), 간도협약 부도에 석을수라고 표시된 물줄기는 정해감계의 홍토산수(홍토수), 오늘날의 모수림하이다.
따라서 간도협약 부도의 두만강 상류지역 물줄기 표기는 「정해감계지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간도협약 제1조에서 두만강 상류지역의 한・중 국경은 정계비로부터 석을수까지로 한다고 하였고, 이 지도에 의하면 석을수가 홍토산수(홍토수)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간도협약은 실제로는 「압록강 - 정계비 - 압록강・송화강 분수계 - 두만강・송화강 분수계 - 홍토산수(모수림하) - 두만강」을 한국과 중국의 국경으로 성명한 것이 된다.
그림 8은 간도협약 부도의 내용을 『1/5만 지형도』(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등, 1933)에 표시한 것이다. 검은색 점선이 간도협약 부도가 표시하고 있는 한・중 국경선이며, 붉은색 실선은 간도의 범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 분수계를 나타낸 것이다. 이 지도에 ‘장산령’이라는 지명이 2개 있는데, 서쪽의 것은 중국에서 부르는 곳이고 동쪽은 조선에서 부르는 곳이다. 부도는 중국쪽의 장산령을 ‘익갈포 주산(益葛浦 主山)’이라 표기하였다.

그림 8.
『1/5만 지형도』에 재현한 간도협약 부도의 내용
주: 조선총독부(1933)에 표시. 검은 점선은 간도협약 부도의 「압록강-정계비-석을수-두만강」 국경선이며, 붉은 실선은 간도협약 부도의 분수계선(分水界線).
그림 9는 간도협약 부도의 내용을 『최근 북한 1/5만 지형도』(경인문화사, 1997)에 표시한 것이다. 천지를 가로질러 이어진 선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며 그 중간의 표시들은 북・중 국경표지석을 나타낸다. 정계비를 중심으로 그려진 점선은 간도협약 부도의 한・중 국경이며, 붉은색 실선은 간도의 범위를 구획하는 분수계이다.

그림 9.
『최근 북한 1/5만 지형도』에 표시한 간도협약 부도 내용
주: 경인문화사(1997)에 표시. 검은 점선은 간도협약 부도의 「압록강-정계비-석을수-두만강」 국경선이며, 붉은 실선은 간도협약 부도의 분수계선(分水界線).
셋째, 부도의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산줄기 표시 위쪽에 ‘益葛浦(익갈포)’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고, 그 위치는 길 표시 중간에 작은 원으로 기재되어 있다.15) 이 지명은 이깔이개(잎갈나무, 곧 장백낙엽송의 개울)16)를 한국 한자음으로 표시한 것이다. 「정해감계지도」의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를 말한다. 이중하는 정해감계에서 「정계비 - 이깔이개(황화송구자)의 토퇴 종점 - 홍토산수(모수림하) - 두만강」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주장하였고, 「정해감계지도」에도 ‘황화송구자’라는 지명이 표시되었다. 따라서 간도협약 부도는 정해감계를 반영하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익갈포’(이깔이개, 황화송구자)는 두만강 상류에 너무 가깝게 그려졌다. 1916년에 측도되고 1933년 발행에 발행된 『1/5만 지형도』(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등, 1933) 「원지(圓池)」 도엽에 의하면, 정해감계 때의 이깔이개(황화송구자)는 ‘익갈포(益葛浦)’로 표시되었고, 그 외에도 ‘상익갈포(上益葛浦)’와 ‘하익갈포(下益葛浦)’가 표시되어 있다(그림 8). 잎갈나무(장백낙엽송, 황화송)가 자라는 곳에 있는 개울은 모두 ‘이깔이개’로 불릴 수 있으므로,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설치된 1907~1909년에 백두산 동사면에서 그렇게 불리는 지명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도협약 부도의 ‘익갈포’는 상대적인 위치로 보아 정해감계의 이깔이개(황화송구자)가 아니라 『1/5만 지형도』(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등, 1933)의 ‘하익갈포’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는 1907~1909년에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이깔이개(황화송구자) 동남안에 설치된 토퇴들을 확인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07년 9월 탐험에 나선 오소네 세이지(大曾根誠二)는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석퇴는 발견했지만 토퇴는 발견하지 못했기(이강원, 2016, 599-600; 이화자, 2019, 244-248) 때문이다.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는 간도협약에 이르기까지 이깔이개(황화송구자) 동남안의 토퇴 종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하여, 간도협약 부도의 국경표시는 「압록강 - 정계비 - 압록강・송화강 분수계 - 대연지봉 - 두만강・송화강 분수계 - 현재의 홍토수 지류 모수림하 - 홍토수 - 두만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이 언제부터 홍토수(홍토산수)를 ‘석을수’로 표기하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에 수록된 「헌병 및 청국군대 배치도」(명치 42년(1909) 8월 현재)를 참조할 수 있다(그림 10). 이 지도는 간도협약 직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두만강 대안 지역에서 일본 헌병과 중국군대의 배치 상황을 그린 것이다. 이 지도의 왼쪽 아래가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지역인데, 그 지역을 확대한 것이 그림 11이다.
이 지도에는 석을수, 홍토수, 홍단수가 그려졌으며, 지명은 석을수만 표기되었다. 원지 역시 지명은 표시되지 않았지만 작은 타원형으로 그려졌다. 이 지도에 그려진 물줄기들의 길이를 홍단수 합류점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석을수가 가장 길고, 다음이 홍토수, 그 다음이 홍단수로 나타난다. 이는 정해감계의 측정결과 및 지도와 일치한다.17) 다만 석을수가 두 갈래의 물줄기가 합류하여 두만강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려진 것은 「정해감계지도」와 다르지만 정확한 것이다. 이는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정해감계지도」를 기초로 이 지역에 대한 지리조사를 새롭게 시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조사 내용이 간도협약 부도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렇듯 두만강 상류 수계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지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도협약 부도는 왜 이와 다르게 그려졌으며, 「정해감계지도」와도 다르게 석을수와 홍토수의 지명이 표시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기초 지도를 제공한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어떤 이유에선지 잘못 그려진 지도를 북경에 보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높지 않다.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는 자신들이 제작한 「헌병 및 청국군대 배치도」(1908, 그림 10)와 같은 지도에서 정확하게 석을수를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북경주재 일본공사관이 「정해감계지도」와의 대조 속에서 수정했을 가능성이다. 「정해감계지도」의 두만강 최상류는 홍토산수와 석을수만 지명이 표시되어 마치 두 물줄기만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그림 7). 따라서 현지의 지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가장 북쪽의 물줄기가 홍토수이고 그다음의 물줄기가 석을수라는 식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해감계지도」에서 원지는 물줄기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의 협상단은 제3의 지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3) 송교인의 『간도문제』와 「간도도」의 영향
간도협약 직전 중국에서는 간도 관련 논저가 3종 발간된다. 오록정(吳祿貞)의 『연길변무보고(延吉邊務報告)』(1908), 유건봉(劉建封)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岡志略)』(1908), 송교인(宋敎仁)의 『간도문제(間島問題)』(1908)가 그것이다.18) 모두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이 간도의 지정학적 가치에 관심을 보인 것과 그 연장선에서 1907년 8월 일본이 헌병대를 간도에 진입시키고 용정촌에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를 설치한 것과 관련 있다. 이 3편의 논저들은 각각 지도를 수록하고 있는데, 간도협약 부도와 가장 근접하는 지도는 송교인의 『간도문제』에 수록된 「간도도」이다. 송교인은 오록정이나 유건봉과 달리, 「압록강 - 정계비 - 석을수」를 국경으로 주장하였다.
간도협약에 대한 송교인의 영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일본과의 협상이 준비되지 않은 중국측으로서는 그의 『간도문제(間島問題)』라는 저작에 크게 의지한 것으로 알려졌다(손승회, 2006). 중국이 1909년 3월 22일 간도문제를 헤이그 중재 재판에 회부할 것을 일본에 통보한 것은 이 책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손승회, 2006, 74).
그는 간도의 범위에 대해서도 “서쪽의 황화송구(黃花松溝) 및 영액령(英額嶺: 잉어링)으로부터 북쪽으로 합이파령(哈爾巴嶺: 하얼바링) 및 노야령(老爺嶺: 라오예링), 동쪽으로는 알아하(嘎牙河: 가야하), 남쪽은 두만강(豆滿江)으로, 대체로 연길청(延吉廳)의 서부와 수분하청(綏芬河廳)의 서남 일부”로(宋敎仁, 1908, 70) 규정하고, 그 대체적인 경위도는 서단 경도 127도 50분, 동단 경도 129도 50분, 남단 위도 41도 30분, 북단 위도 43도 50분이라고 하였다(宋敎仁, 1908, 71). 한・중 국경과 관련하여 그는 긴 논증 과정을 거쳐 「압록강 - 정계비 - 석을수 - 두만강」을 국경으로 주장하였고, 철종 12년(1861)판 「대동여지도」 역시 이러한 점을 보여주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宋敎仁, 1908, 34- 35). 그의 생각은 책 앞부분에 실린 「간도도(間島圖)」에 나타나 있다(그림 12, 그림 13).
첫째, 이 지도에 “일본인이 가정하는 간도의 경계”로 표시된 구역은 그가 규정한 간도의 범위이다. 이는 이후 간도협약 부도에 표시된 간도의 범위와 같다. 일점쇄선으로 간도의 서쪽과 북쪽 경계선을 그린 것도 간도협약 부도와 같다. 따라서 간도협약의 부도는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가 제공한 지도에 기초하고, 그 위에 송교인의 「간도도」의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교인은 간도에 갔지만,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 지역을 답사하였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는 한국, 일본, 중국에서 제작된 몇몇 지도들을 참고하여 「간도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지도 두만강 하류에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도문강(圖們江)’ 대신 ‘두만강(豆滿江)’이 표기되어 있다. 이는 그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발행된 지도를 참조하여 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이 지도에 그려진 두만강 상류 물줄기들에는 각각 홍토수, 하을수(下乙水), 석을수, 소홍단수가 표기되어 있다. 이 중 홍토수는 원지로 추정되는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오늘날의 약류하를 홍토수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이 홍토수(실은 약류하)에 합류하는 물줄기를 ‘석을수’로 표기하였다. 곧 정해감계에서의 홍토산수(홍토수), 오늘날의 홍토수(안심수)를 ‘석을수’로 표시한 것이다. 이 점 또한 간도협약 부도와 같다. 다만, 석을수에 ‘하을수’라는 지류가 있는 것으로 그려진 것은 간도협약 부도와 다르다. 오늘날 홍토수(안심수)를 ‘석을수’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하을수’는 그 지류인 모수림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부근에 “벽도화전(碧桃花甸)”이라는 표기는 마적 한변외(韓邊外)와 관련된 산채를 일종의 ‘이상향’으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한다.19)
셋째, 송교인은 「압록강 - 정계비 - 석을수 - 두만강」을 한・중 국경으로 주장했다. 그의 「간도도」에 그의 이러한 주장이 표시되어 있다. 「간도도」에는 백두산정계비가 “계비(界碑)”라고 표기되어 있다. 또한 정해감계에서 청측이 세우려고 시도했던 “화하금탕고하산대려장(華夏金湯固河山帶礪長)”이라는 열 개의 글자가 비석표시와 함께 각각 표기되어 있다.20) 그런데 백두산에 있는 정계비와 소백산 정상에 있어야 할 화자비(華字碑) 표시가 매우 가깝게 그려졌다.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계비와 화자비가 거의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을 지경이다. 이 지도의 이러한 점이 간도협약의 중국측 협상팀으로 하여금 정계비를 한・중 국경으로 인정하도록 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측 협상팀은 송교인의 주장이 정해감계에서의 중국측 주장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백두산 정계비와 소백산 화자비가 지척에 있는 것으로 그의 지도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4) 정해감계와 간도협약의 결과 비교
1909년 9월 4일 체결된 간도협약은 5일 전보로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에 전달되었으며, 9일 간도 일대에 그 전문이 발표되었다(동북아역사재단, 2013, 523). 간도협약에 대한 간도 한국민 사회의 여론은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위의 협약 발표에 따라 가장 고려가 필요한 것은 간도에 있어서 인심의 동요이다. 파출소도 종래의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며 청국이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한민 회유의 수단으로 매번 이 주의를 고취했다. 그러므로 간도 한민이…한・청 양국 간에 다년간 해결할 수 없었던 간도문제가 일본제국의 힘에 의해 유리하게 해결될 것임을 확신하고 또 파출소의 현실적 보호에 대한 신뢰가 깊어질 즈음에, 협약 발표의 결과가 완전히 영토권을 포기하고 광서 13년(1887) 이중하가 주장한 홍토수조차 유지할 수 없음을 보고, 더러는 원망과 한탄의 목소리를 높이고, 불온한 무리들도 이를 이용해 우민을 선동해 배일사상을 고취하고자 할지 모르며, 또한 한편에서는 사려가 천박한 청국 관리와 병사 등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간도는 완전히 청국의 영토에 귀속되므로 한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경멸심을 낳아 다시금 한민을 능멸하고 학대할 우려가 있다.…이 때문에 한민에 대해서 평화리에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상호양보와 타협에 의할 수밖에 없으며, 이번 협약은 영토권을 양보하는 대신 청국이 다른 외국인에 허가하지 않은 토지 소유권을 한민에게 인정하고, 또한 간도 일대를 자유 잡거구역으로 삼아 일본제국 영사관의 공식적인 보호를 누리기에 이른 것은 이중하가 광서 13년(1887)에 어떠한 권리를 얻은 바 없이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데 동의한 것에 비하면 또한 성공을 잃지 않았음을 설명하였다(동북아역사재단, 2013, 526).
이에 따르면, 간도협약이 두만강 상류지역에서 한・중 국경으로 석을수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정해감계 당시 이중하의 주장도 방어하지 못하고 당시의 청측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 또한 오해였다.
정해감계에서 청측은 정계비를 국경설정의 근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청측이 주장한 국경은 「압록강 - 소백수 - 소백수 상류 우측 지류 - 소백산 정상 - 석을수 - 두만강」이었다(이강원, 2022). 따라서 간도협약의 조문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정해감계 당시 청측 주장에 비해 ‘소백산에서 정계비에 이르는 지역’을 더 확보한 것이 된다. 부도에 표시된 석을수를 놓고 본다면, 일본은 이중하의 주장에 비해 ‘이깔이개(황화송구자, 흑석구)로부터 현재의 모수림하에 이르는 지역’을 중국측에 양보한 것이 된다(그림 14).
그림 14에서 A와 B는 각각 정해감계 당시 조선측과 청측의 국경주장을 나타낸 선이다. C는 간도협약 부도에 표시된 석을수와 한・중 국경선을 재현한 것이다. D는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변계지도집(中華人民共和國邊界地圖集)』의 간도협약 해석이다.
D는 정계비와 정해감계의 석을수, 곧 오늘날의 석을수를 연결한 것이다. 간도협약 부도에 표시된 석을수와 한・중 국경선을 따르지 않고(또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중국에 유리한 방식의 해석을 피력한 것이다. 해석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정작 변계지도집 지도에 그려진 1959년 현재 중국측 변방순라선(“目前我方邊防巡邏線”)은 D선을 따르지 않고, C에 가까운 『1/5만 지형도』(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등, 1933)의 석을수를 따르고 있다.21) 간도협약 부도에 그려진 석을수를 의식한 것이다. 이는 간도협약 이래 국경관리가 간도협약 부도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그것이 중화인민공화국에도 계승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C와 D 가운데 어떤 것을 따르더라도, 간도협약에서 일본이 정해감계 당시 청측의 국경주장에 따라 양보하였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한편, 간도협약 직후 중국인들은 간도협약에서 석을수가 국경으로 규정된 것을 정해감계 당시 중국측 주장이 관철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간도협약이 정계비를 인정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간도협약 자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생겨났다. 이러한 점은 간도협약 이후 제작된 지도들의 압록강 상류 - 백두산 - 두만강 상류 일대 국경표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제작된 많은 지도들은 이 지역의 국경을 표시하면서 정계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석을수는 간도협약 부도에 그려진 대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간도협약 부도의 물줄기 표기는 정확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 위에 정해감계에서의 중국측 주장을 표시하고자 했다. 간도협약에서 인정한 정계비를 중국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5. 간도협약 이후 일본과 중국의 백두산-두만강 국경 표시
정해감계는 결렬되었지만,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을 지도화하고 각자의 주장을 표시한 「정해감계지도」의 내용은 양국이 합의하였으며, 현재 그 지도가 전해오고 있다. 정해감계를 통해 석을수와 홍토수(홍토산수) 등은 국가 간 ‘공인지명’이 되었고, 그 위치는 「정해감계지도」에 표시된 바와 같다. 간도협약(1909)에 의해 도문강, 석을수, 홍토수 등은 일종의 ‘조약지명’이 되었고, 그 위치는 간도협약 부도에 표시된 바와 같다. 그러나 「정해감계지도」에 그려진 석을수와 홍토수는 간도협약 부도에 그려진 석을수・홍토수와 각각 다른 물줄기이다. 따라서 1909년 이후 동일한 명칭을 가진 상이한 두 개의 물줄기가 국가 간 지명 혹은 조약지명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간도협약 협상과정에서 그리고 협약체결 이후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간도협약의 석을수가 정해감계의 그것과 다르다는 문제제기는 지금까지 없었다. 이는 양국의 협약체결 당사자들도 의식하지 못했다. 간도협약 부도는 약류하(원지수)를 ‘홍토수’로, 홍토수를 ‘석을수’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간도협약 이후 ‘석을수’는 간도협약 부도에 그려진 석을수, 곧 정해감계의 홍토산수(홍토수), 오늘날의 모수림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간도협약 부도의 물줄기 표기가 정확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간도협약 이후 일본 정부기관에 의해 제작된 지도들의 물줄기 표기와 한・중 국경표시는 간도협약 부도와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간도협약 이후 중국에서 제작된 지도들은 대부분 간도협약 부도의 물줄기 표시와 명칭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지만, 국경표시는 따르지 않았다.
1) 일본 제작 지도
대정(大正) 5년(1916)에 측도되고 15년(1926)에 발행된, 1/5만 축척의 『조선교통도(朝鮮交通圖)』(조선총독부, 1926; 그림 15)는 백두산 일대에서 등고선이 없다는 점 등을 제외하면 1933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등이 발간한 『1/5만 지형도』와 유사하다. 이 도엽에는 홍토수와 석을수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홍토수는 현재 약류하라고 불리는 물줄기에, 석을수는 현재 홍토수라고 불리는 물줄기에 표기되었다.22) 이는 간도협약 부도에서와 같은 표기이다. 따라서 적어도 1916년 이전부터 간도협약 부도의 내용이 일본 정부기관 발간 지도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만 지형도』(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등, 1933)의 두만강 상류 부분(그림 16)에서 홍토수와 석을수라는 지명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교통도』와 마찬가지로 원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에 홍토수, 그 서쪽에 있는 물줄기에는 석을수라 표시되어 있다. 이 역시 간도협약 부도에서의 표기와 일치한다.
만주국에서 일본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만주오십만분일도(滿洲五十萬分一圖)』(大日本帝國 陸地測量部, 1936; 그림 17)는 물줄기 명칭 표기는 없지만, 신무성, 소백산, 봉서동, 대연지봉 등의 표기와 천지 표시 등을 통해, 간도협약 부도의 국경표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도협약 부도의 ‘홍토수’와 ‘석을수’ 표기는 일본의 정부기관이 만든 이와 같은 공식적인 지도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점들은 간도협약 부도의 그러한 표기를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보기 어렵게 한다.
2) 중국 제작 지도
(1) 민국시기
먼저 간도협약 이후 중국 정부기관에 의해 발간된 지도들이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 국경을 어떻게 표시하였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그림 18은 중화민국 북경육군측량국(北京陸軍測量局)이 민국 6년(1917) 편집하고, 참모본부 제도국(製圖局)이 민국 7년(1918) 수정 인쇄한 『1/50만 중국여도(五十萬分一中國輿圖)』의 「연길(延吉)」과 「장백(長白)」 도엽을 합성한 것이다. 이 지도는 중국과학원 지리과학 및 자원연구소(地理科學與資源硏究所)와 대만의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제시된 것은 PDF 파일을 제공한 후자의 것이다.
이 지도에서는 「압록강 - 포도하(蒲桃河) - 홍단수(紅丹水) - 두만강」을 국경으로 표시하고 있다. 여기서 ‘포도하’는 오늘날 포태천(포태수)을 가리킨다. 이 지도에 ‘세린하(細鱗河)’로 표시된 물줄기는 칠성호(七星湖, 삼지연) 부근에서 시작되므로 오늘날 이명수를 표시한 것이다. 한편 천지 동쪽에 호수를 그려 넣고 ‘도문강원(圖們江源)’이라 표기하였는데, 오늘날 원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 아래 ‘도랑수(刀浪水)’라는 표기가 있는데 이는 석을수를 표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석을수는 본래 도랑수의 한국식 한자표기 ‘乭央水(돌앙수)’의 돌(乭)을 위아래로 읽은 데서 나온 지명이기 때문이다(Song, 2018, 78-79; 이지영・이원준 옮김, 2022, 125; 429; 이강원, 2022, 242). 천지 남쪽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의 본류 역시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라 ‘애강(曖江)’이라고 표기하여, 압록강의 지류의 하나일 뿐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의도적인 지명표기이다.
이러한 국경표시는 정해감계, 나아가 을유감계에서 중국측의 주장보다도 더 조선 쪽으로 국경을 이동시킨 것이다. 을유감계 당시 중국측은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 - 삼급포(삼지연) - 홍단수 - 두만강」을 국경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지도에서는 또한 간도협약의 ‘석을수’를 ‘도랑수’라 표기하여, 간도협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9는 중화민국 국방부 측량국 발행(1943)의 『1/100만 중국여도(百萬分一中國輿圖)』 영길(永吉) 도엽(NK- 52)이다. 이 지도는 홍단수를 ‘석을수’로 잘못 표기하고 있으며, 그 위에 국경을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에 표기된 ‘강두수(江頭水)’는 홍단수의 지류이며, ‘석을수’로 표기된 물줄기의 유로 역시 홍단수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지도는 석을수 물줄기는 표시하지도 않았다. 압록강 상류에서는 이명수로 추정되는 물줄기를 국경으로 표시하고 있다. 국경표시만 놓고 본다면 을유감계를 따르는 것이고, ‘석을수’라는 잘못된 지명표기까지 고려한다면, 을유감계와 정해감계를 혼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간도협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림 19.
『1/100만 중국여도』(1943)
주: 中華民國 國防部 測量局(1943). 지도상의 이점쇄선이 조선과 만주국 간의 국경표시임. 이 지도는 홍단수 위에 ‘석을수’라 표기한 오류가 있다.
이상에서 중화민국 정부기관(군대)이 제작한 지도들을 살펴보았다. 한편, 1949년 이전 중국공산당과 그 군대가 측량사업을 통해 일정한 지도학적 규칙을 가진 대축척 지도를 제작한 것 같지는 않다. 지리학 분야 중국과학원 원사(院士) 중에는 남경 중앙대학(中央大學) 지리학과에 보관된 대축척 지도들을 공산당에 넘겨준 이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러한 점들은 중국공산당이 지도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수집’해서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아직까지도 중국공산당이 1949년 이전 인쇄한 지도 중에서 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축척을 가진 지도는 보지 못했다.
이제 민국시기 민간에서 만든 지도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림 20은 소갑영(蘇甲榮, 1922)의 『중국지리연혁도(中國地理沿革圖)』중 「간도도(間島圖)」이다.23)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이 송교인의 「간도도」(그림 12)와 유사하다. 송교인 지도와 마찬가지로 두만강을 도문강(圖們江)이라 표기하지 않고 ‘豆滿江’으로 표기하고 있다. 소갑영의 「간도도」 중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을 확대한 것이 그림 21이다.

그림 21.
『중국지리연혁도』(1922) 「간도도」의 백두산 부분
주: 蘇甲榮(1922). 지도에 필자가 표시한 번호 옆에 쓰여 있는 지명은 다음과 같다. ①紅土水 ②石機艶 ③甸屯 ④石乙水 ⑤石乙水 ⑥小紅丹水 ⑦西豆水 大紅丹水 卽魚潤河 ⑧三及泡 ⑨小白山 鴨綠江源 ⑩西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송교인의 「간도도」에 있는 정계비(“界碑”)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국경선은 「압록강 - 소백수 - 소백산 - 석을수 - 두만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정해감계 당시 중국측 국경주장과 같다. 따라서 간도협약에 규정된 한・중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①‘홍토수(紅土水)’가 원지(圓池)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송교인의 「간도도」나 간도협약 부도와 같다. ②‘석기염(石機艶)’은 만주어 ‘써키옌’(Sekiyen, 江源)을 중국어로 음역한 것이다. 홍토수와 석을수 사이에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두 물줄기가 두만강의 근원이라고 간주한 것 같다. ③‘전둔(甸屯)’은 취락을 지칭하는 것인데, 송교인 「간도도」의 “벽도화전(碧桃花田)”(무릉도원)과 위치가 같다. ④와 ⑤에는 각각 ‘석을수’가 표시되어 있다. 석을수가 2개 표기된 것은, 석을수의 본류(상도랑수)와 지류(하도랑수)를 나타낸 것으로 보기 어렵다. ④와 ⑤는 각각 오늘날의 모수림하와 홍토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원지에서 나오는 물줄기(약류하)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는 송교인의 「간도도」와 같고 간도협약 부도와도 개념상 같다. 이 지도는 “화하금탕고하산대려장(華夏金湯固河山帶礪長)”이라는 ‘십자계비(十字界碑)’의 글자들을 각각 표기하고 비석의 위치도 그려놓았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정해감계에서의 중국측 주장을 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⑥‘소홍단수(小紅丹水)’는 오늘날의 소홍단수에 해당한다. ⑦‘서두수 대홍단수 즉 어윤하(西豆水 大紅丹水 卽魚潤河)’라고 표기된 하천은 오늘날의 서두수, 곧 어윤강에 해당한다. 다만 ‘대홍단수’라는 표기가 중간에 들어간 것은 오류이다. ‘대홍단수’는 ‘소홍단수’의 일부구간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⑧‘삼급포(三及泡)’는 삼지연에 해당한다. ⑨‘소백산 압록강원(小白山 鴨綠江源)’은 오늘날 소백수에 해당한다. ⑩‘서원(西源)’은 오늘날의 압록강 본류에 해당한다. 정해감계 중국측 대표의 한 사람인 방랑(方朗)의 『길조분계안(吉朝分界案)』에는 오늘날의 압록강 정원(正源)이 ‘西源’으로 표기되어 있다.
소갑영의 「간도도」는 송교인의 「간도도」를 따르면서도, 간도협약을 부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에 따라 정해감계에서의 청측의 국경주장을 표시하고자 했으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지도가 표시하고 있는 국경을 오늘날 지도에 재현하면, 「압록강 - 소백수 - 소백산 - 오늘날의 홍토수(안심수) - 두만강」이다. 이는 이전에 조선과 청 어느 일방도 주장한 적이 없는 국경이다. 『중화최신형세도(中華最新形勢圖)』(屠思聰, 1937)가 이 지도를 따르고 있다.
그림 22는 『중국분성신도: 신보 60주년 기념, 개정판(中國分省新圖: 申報六十周年紀念, 改訂版)』(1936)의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 지도에 필자가 오늘날의 지명을 표기한 것이다. 붉은색 실선과 일점쇄선이 겹쳐진 것은 중국의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선이며, 붉은색 실선과 이점쇄선이 겹쳐진 것이 국경표시이다. 국경이 「압록강 - 소백수 - 소백산 - 오늘날의 홍토수 지류 모수림하 - 두만강」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전에 조선과 청 어느 일방도 주장한 적이 없는 국경이다. 두만강 쪽에서는 간도협약 부도의 석을수 표시를 따르면서, 소백산 이서는 정해감계 당시 청측 주장을 따르고 있다. 간도협약에서 인정된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소갑영의「간도도」의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경표시는 『내정부심정중국분성지도(內政部審定中國分省地圖)』(金擎宇, 1948), 『중국분성신도: 전후정정제5판(中國分省新圖: 戰後訂正第五版)』(丁文江 등, 1948), 『중화인민공화국 신지도(中華人民共和國新地圖)』(光華輿地學社, 195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쑨저(孫喆)는 중국에서 민국시기에 제작된 동북지방 지도 중 이 지역 국경선 처리 문제에 대해 홍단수와 석을수를 두만강 정원으로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었으며, 자신이 열람한 지도에 따르면, 만주사변 이전의 지도에서는 홍단수를 정원으로 보는 것이 많고 1930~40년대의 지도에서는 석을수를 정원으로 보는 것이 많다(쑨저(孫喆), 2017, 105; 123)고 하였다. 이는 일본의 만주국 수립 부당성을 국제협약에 호소하였기에, 국제협약의 일종인 간도협약을 준수한다는 의미에서 간도협약에 따라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 국경을 표시하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하였다.24)
그러나 민국시기의 지도들 중 간도협약에 명시된 정계비를 인정하는 지도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석을수를 조선과 중국의 국경으로 그린 지도들이 국제협약을 존중하였다고 보는 것은 간도협약과 그 부도의 정확한 내용을 검토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국경표시에 있어서 민국시기의 지도들은 정계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석을수는 간도협약 부도에 따라 그리는 방식으로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석을수는 오늘날 홍토수의 지류 모수림하로서, 이전에 청측 그 누구도 이것을 국경으로 주장한 적이 없다. 민국시기의 민족주의자들은 간도협약의 국경조항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그림 23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출간된 『중화인민공화국분성정도(中華人民共和國分省精圖)』(金擎宇, 1951)의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이다. 천지, 소백산, 신무성의 위치로 보아 이 지도의 국경표시는 간도협약 부도를 따르고 있다. 즉 「압록강 - 정계비 - 석을수(오늘날의 모수림하) - 두만강」을 국경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간 중국 지도들의 국경표시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 아마도 건국 초기에 국경의 현상유지 혹은 기존의 조약에 대한 암묵적인 인정이 이러한 국경표시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림 24 역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출간된 『중화인민공화국분성정도: 보급본(中華人民共和國分省精圖: 普及本)』(亞光輿地學社, 1953)의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이다. 허항령(虛項嶺)을 호정령(虎頂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장백산, 소백산, 신무성의 위치로 보아, 이 지도의 국경표시는 압록강 상류에서는 을유감계를 따라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을, 두만강 상류에서는 정해감계를 따라 「석을수 - 두만강」을 국경으로 표시하고 있다. 두 차례의 감계에서 중국측이 각각 주장했던 내용을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식은 『중화인민공화국지도집』(地圖出版社, 1958), 『중국분성지도집』(地圖出版社, 1959)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23과 그림 24를 놓고 볼 때, 건국 초기 ‘국제협약’과 ‘민족주의’ 사이에서의 좌충우돌이 지도상의 선 긋기에서도 나타났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53년 이후 편찬된 중국 지도들은 1964년까지 그림 24와 같은 방식으로, 곧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 - 삼지연 - 석을수 - 두만강」을 따라 북・중 국경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전에 조선과 청 어느 일방도 주장한 적이 없는 국경이었다.
1964년 6월 지도출판사에서 1/400만 축척의 「중화인민공화국지도」를 출판하면서, 북・중 국경을 1962년 북・중 국경조약에 의거하여 표시하였다(沈志華・董潔, 2011, 45; 박종철 옮김, 2012, 56). 이후 지도들은 이에 따르고 있다.
이상에서 검토한 중국 지도들의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 국경표시는 일관되지 않으며, 을유감계, 정해감계, 간도협약이 혼합된 경우가 많았다. 거의 모든 지도들이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상당수의 지도들이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간도협약 부도의 석을수 표시를 따르는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2년 체결된 북・중 국경조약을 반영한 지도가 1964년 6월 출판되면서 정리되었다.
(3) 대만의 경우
대만은 중화민국 정부가 대륙에서 철수한 곳이다. 몽골(외몽골)도 중화민국령으로 표시하는 등 기본적으로 민국시기의 국경개념을 따르고 있었다. 1988년 제정된 「우리나라 대륙지역 지도 편찬 인쇄 주의사항(编印我国大陆地区地图注意事项)」이라는 행정명령은 2002년 「대륙지역 지도 편찬 인쇄 주의사항(编印大陆地区地图注意事项)」으로 제목이 변경되었다. ‘대륙지역’에 대해 “우리나라”라는 수식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때 ‘대륙지역’(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과 몽골공화국의 경계선을 국경 부호로 표시하도록 규정하였다. 그해 몽골과 대사관급 대표처를 서로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2004년 「대륙지역 지도 편찬 인쇄 주의사항」은 폐지되었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이래 대만 내정부(內政部)는 「중화민국전도(中華民國全圖)」를 발행하지 않았다(維基百科). 이는 대만 독립론과 관련이 있다.
이어서 대만 정부가 백두산 일대의 국경표시를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민국시기 지도들의 한・중 국경표시가 다양했으므로, 대만 철수 후 상당 기간 동안은 이전과 같은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대략 1979년 무렵 백두산 일대 국경표시가 「중화민국전도」(1979)와 같이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만의 공식적인 지도는 1979년 제1계 국민대회 6차 회의 회의록(第一屆國民大會第六次會議實錄)에 실린 「중화민국전도」였다.25) 이 지도의 한・중 접경지대를 나타낸 것이 그림 25이다. 원 표시는 백두산 일대이다. 한국의 지도들과 모양이 확연히 다르다. 이 부분이 어떻게 표시되었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제시한 것이 그림 26이다. 이 지도는 내정부(內政部)의 검정(“審定”)을 통과한 『중화민국분성도(中華民國分省圖)』(莫先熊, 1983)에 수록된 것이다. 천지(天池)가 표기되어 있고, 그 오른쪽에 백두산과 해발고도(白頭山 2744), 아래쪽에 병사암(兵使巖)이라 써 있다. 물줄기로 보아 압록강 쪽에서는 이명수, 두만강 쪽에서는 홍단수 위에 국경선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는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 - 삼지연 - 홍단수 - 두만강」을 국경으로 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을유감계에서 청측이 주장한 국경과 같다. 이 지도가 내정부의 검정을 통과하였으므로, 앞서 언급한 대만의 「중화민국전도」(그림 25)의 국경표시가 이와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대만 정부는 1990년대 전반까지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의 국경을 을유감계 당시 청측의 주장에 입각하여 표시하였다. 이는 간도협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을유감계도 정해감계도 어차피 결렬된 것이므로, 그중 가장 넓은 영토를 주장한 을유감계 당시의 청측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6. 결론
이상에서 ‘간도협약’의 명칭과 전문 및 조문들을 검토하고, 간도협약 부도를 근거로 간도의 범위, 석을수의 위치, 그리고 한・중 국경표시에 대해 분석하였고, 일본과 중국 및 대만에서 제작된 지도들의 한・중 국경표시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중국은 도문강(두만강)을 한국과의 국경으로 한다는 것을 성과로 여겨 협약의 명칭을 ‘도문강 중・한 경계에 관한 중・일 조관’이라 하고, 일본은 두만강 북쪽 잡거지(혼거지)에서 한국민의 치외법권적 지위에 준하는 권리확보를 성과로 여겨 ‘간도에 관한 일・청 협약’이라고 칭한다.
둘째, 간도협약 내에 ‘간도’라는 표현은 없으며, ‘도문강 북쪽 지역 잡거구역 내 개간지’ 또는 ‘도문강 북쪽 잡거구역’ 등이 간도를 대신하여 사용된 지역명칭이었다. 간도협약에서 간도의 범위는 「장산령(창산링) - 노령(라오링) - 영액령(잉어링) - 합이파령(하얼바링) - 노야령(라오예링)」의 남쪽, 알아하(가야하)의 서쪽, 두만강의 북쪽으로, 오늘날 지도의 「모수림하 - 두만강・송화강 분수계 - 두만강・목단강 분수계 - 알아하(가야하) - 알아하・도문강(두만강) 합류점 - 도문강(두만강) - 모수림하」를 잇는 선으로 구획되는 지역이다. 이는 간도를 자연지리적 실체로서 규정하고자 했던 월경변민들과 달리, 몇십 년간의 이주와 잡거(혼거)라는 사회지리적 실제를 전제로 간도의 범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논리상 간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강도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을 통하여 간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실감한 일본은 한국민을 앞세워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교두보(bridgehead)로서 일종의 준 조계지(pene-cocession)를 확보하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러・일전쟁 승리로 만주에서 이미 대련(大連: 旅大)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간도를 직접 지배해야 하는 절박성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셋째, 간도협약은 「압록강 - 정계비 - 석을수 - 도문강(두만강)」을 한・중 국경으로 삼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간도협약 부도는 「정해감계지도」에 그려진 석을수나 오늘날의 석을수를 석을수로 표기하지 않고, 「정해감계지도」의 홍토산수(홍토수), 곧 오늘날의 모수림하를 ‘석을수’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약류하로 불리는 물줄기를 ‘홍토수’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측이 간도협약에서 정계비를 한・중 국경 경계표지의 하나로 동의한 것과 간도협약 부도에서 홍토수와 석을수가 표시된 방식은 송교인의 『간도문제』와 그에 수록된 「간도도」의 영향이 크며, 중국측 협상팀의 실책 역시 그 지도로부터 기인하는 바 있다.
넷째, 간도협약 부도의 국경을 현대의 지도에 재현하면, 「압록강 - 정계비 - 압록강・송화강 분수계 - 대연지봉 - 두만강・송화강 분수계 - 현재의 홍토수 지류 모수림하 - 홍토수 - 두만강」를 잇는 선이 된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일본이 정해감계에서 이중하가 주장한 홍토수를 포기하고 청측이 주장한 석을수에 양보했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간도협약 부도의 국경선을 「정해감계지도」에 표시하면 「압록강 - 정계비 - 홍토수 - 두만강」과 같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간도협약에서 한국은 이중하의 주장에 비해 ‘황화송구자(이깔이개) - 홍토수’ 구역을 잃은 것이 되며, 중국은 방랑의 주장에 비해 ‘소백산 - 정계비’ 구역을 잃은 것이 된다(그림 14).
다섯째, 간도협약 이후 일본정부는 해당 지역 지도들을 제작하면서 간도협약 부도에 표시된 바에 따랐다. 『1/5만 지형도』(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등, 1933)가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에서 민국시기 정부기관이 발행한 지도들은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 국경표시가 일관되지 않으며, 을유감계, 정해감계, 간도협약 등의 내용이 혼합된 경우가 많았다. 일관된 것은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민국시기 민간에서 발행한 지도들은 간도협약 부도의 석을수 표시를 따르면서도 정계비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간도협약 부도의 석을수가 정해감계의 홍토산수(오늘날 모수림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간도협약 부도의 석을수를 따라 국경을 표시하는 것이 정해감계 당시 청측 주장에 비해 영토를 잃는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여섯째,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분성정도』(1951)와 같이 간도협약을 따르는 지도와 『중화인민공화국분성정도: 보급본』(1953)과 같이 극단적으로 국경을 북한 쪽으로 밀고 들어와 긋는 지도가 있었다. 후자가 출간된 1953년 이후 1964년까지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 - 삼지연 - 석을수 - 두만강」으로 북・중 국경선을 표시한 지도만 출간되었다. 이러한 국경선은 임진정계(1712), 을유감계(1885), 정해감계(1887), 간도협약(1909) 등, 그 어느 국경협상에서도, 그 어느 측에 의해서도 주장된 적이 없는 것이었다. 1962년 북・중 국경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는 1964년부터 중국의 지도에 반영되었다. 한편, 대만의 지도들은 을유감계 당시 청측의 국경주장을 따르고 있었다.
임진정계(1712), 을유감계(1885), 정해감계(1887), 간도협약(1909)에 이르는 긴 과정에는 지리정보의 부재 또는 오류가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임진정계는 수계를 오판했다. 결렬된 을유・정해감계에서 조선측은 당초 잘못 세워진 임진정계의 정계비와 경계표지물들을 고수했다. 청측은 두만강 상류의 가장 긴 물줄기를 국경으로 삼고자 했지만, 두 차례 감계 모두에서 물줄기 길이 측정에 오류가 있었다. 간도협약은 당초 잘못 세워진 정계비를 근거로 한 것도 문제였지만, 정해감계의 홍토수를 ‘석을수’로 오인한 문제마저 있었다. 오류에 오류가 누적되어 온 것이다. 간도협약은 체결 이후 한・중 양국의 지도들에 반영되지 않았는데, 이는 양국 국민 모두 간도협약을 통해 영토를 상실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이념적 모순과 갈등으로 인해 한・중 국경에 대한 재논의는 불가피했다. 그것은 1960년대 초 북한과 중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