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렛 크리스토퍼스(Brett Christophers, 스웨덴 웁살라대 사회경제지리학과 교수)의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는 영국경제에 대한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현대자본주의의 체제적 본질을 지대추구(불로소득주의)의 관점에서 종합한 저서이다. 저자는 1980년대 이후의 세계정치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일련의 구조적인 정치경제적 변화들, 신자유주의와 불평등의 심화의 원인을 새로운 지대이론에서 찾고 있다. <새로운 인클로저The New Enclosure: The Appropriation of Public Land in Neoliberal Britain>, <데이비드 하비: 그의 사상에 대한 비판적 입문David Harvey: A Critical Introduction to His Thought(공저)>등 그의 다른 저서들 역시 호평을 받았다. 올해 초 발간된 번역서는 4인의 저명한 경제학자와 지리학자(이병천, 정준호, 정세은, 이후빈)에 의해 유려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인가? <불로소득자본주의시대>는 사람들이 익숙하게(관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몇 가지 관례적인 사고에 도전한다. 크리스토퍼스는 지대를 정의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마르크스, 케인스, 주류경제학에서 지대를 다루는 방식과 자신의 접근을 차별화한다(이하 p.38).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전의 접근들은 모두 지대를 자본주의에서 “한계적이고, 잔여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토지불로소득자(토지지대)를 봉건시대의 잔여물로 생각했으며, 케인스는 자신이 주로 관심을 두었던 불로소득자본주의의 금융적 형태(금융지대)가 곧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를 ‘안락사’로 표현했다. 한편, 주류경제학에서의 지대는 ‘지대추구행위’라는 경제학교과서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정상에서 벗어난 이상 현상이며, 교정해야할 나쁜 자본주의 상태로 간주된다.
반면에, 크리스토퍼스는 지대추구를 자본주의 동학의 분석에서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요소로 간주하지 않는 기존의 해석법에 반대하며, 세 경제학이 가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경제현상이라고 말한다. 21세기 초반의 현실은 세 경제학을 ‘배신하고 있으며’, 토지지대, 금융지대 모두 완강하게 살아있거나 더 강화되었고 다른 다양한 자산형태의 지대와 함께 복합적 양태로 현대경제의 핵심적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현대자본주의체제를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라고 칭한다.
크리스토퍼스의 새로운 지대개념의 기초는 비주류경제학의 ‘희소자산을 소유, 통제하는데서 얻는 소득’이라는 전통적 정의에 ‘시장지배력(market power)’이라는 주류경제학의 지배개념을 융합한데 있다(이병천 2022, 242). 이처럼 지대를 대하는 새로운 ‘관점’에서 그는 지대를 다루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7가지 자산형태를 제안하고 있다. 그는 금융, 토지지대 외에 자연자원, 지식재산, 디지털플랫폼, 서비스계약, 사회간접자본으로 현대 불로소득주의의 7가지 형태를 범주화한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영국의 신자유주의화를 ‘금융화’의 과정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불로소득경제화’라고 칭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말하는데, 7가지 자산형태는 그 탐구의 결과물이다. 즉, 금융지대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지대를 더 많이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영국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에 대한 그의 분석과 일치하는데, 예를 들면, 1970년데 영국에 거의 없었던 계약지대(외주화)는 플랫폼지대와 함께 21세기 영국제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두 형태의 불로소득주의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함께 ‘결합성장’하여 현재 영국의 불로소득경제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지적재산권 불로소득주의에 대해 “자본은 한동안 지식재산권이라는 여물통에 코를 박고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p.273)고 표현하며, 지식재산권이 혁신을 위한 긍정적 요인이라는 통상적인 관념을 강렬하게 맞선다.
그렇다면 불로소득주의는 현대경제사회에 얼마나,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의 질문에 대해 크리스토퍼스는 불로소득주의가 “혁신을 짓누르고 자본주의 경제의 역동성을 억누른다”(p.39)고 답한다. 지대의 본질은 독점이며, 불로소득주의에 내재된 독점력은 경제사회의 역동성과 혁신에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의 고전적 명제를 통해 우회적으로 답변한다. “기업이 절대적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때 왜 상대적 잉여가치를 창출하려고 투자할까?” 불로소득자가 캐시카우를 갖게 되면 혁신을 가로막는 적극적인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지대추구는 특정한 방식의 불로소득주의를 수반한다. 이는 새로운 자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연구와 개발을 수행하는 것보다 기존 지대를 창출하는 자산을 땀흘려 관리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p.272)
통계적으로 1970년대 이후 영국의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히 하락했으며,(p.95) 이같은 소득불평등의 심화는 자연스럽게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부의 불평등명제(r>g: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자본주의 경제동학의 경향)를 재확인한다. 피케티의 부의 불평등의 구조연구는 불로소득(지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지만, 지대 자체를 주 분석대상으로 하지는 않았다.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는 불평등 구조의 원인이자 메커니즘이 불로소득자본주의‘체제’에 있음을 밝힌다. 피케티 이후 불평등과 불로소득에 대한 다수의 저서들이 나왔지만, 저자 크리스토퍼스나 역자들 역시 피케티연구의 계승자로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를 강조하는 듯하다. 저자에 의하면, 영국의 불로소득경제는 피케티의 법칙이 성립하기 위한 완벽한 실험실 조건이다. 역자 이병천교수는 피케티는 자본의 소유, 통제에 집중했으며, 시장경쟁과 독점을 경시한 반면에, 크리스토퍼스는 소유적 자산인 불로소득자 자본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불로소득의 추출에서 매우 중요한 시장지배력을 강조했기에 피케티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본다(p.610). 그리고 크리스토퍼스의 연구를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국민적 스케일의 불로소득자본주의 정치경제비판’이라고 상찬한다(이병천 2022, 242).
크리스토퍼스는 불로소득자본주의가 1980년대 이후 ‘부활’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역사적인 배경은, 산업혁명의 절정기였던 19세기 영국경제에서 부자들의 대부분은 산업가보다는 대토지소유주였다는 것이다(p.56). 즉, 불로소득경제화는 1980년 대처수상이 집권하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잠복기의 사이클을 거쳐서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귀환한 것이다. 노동조합주의가 강력하고 노동소득의 상대적 중요성이 컸으며, 불로소득주의가 약화되었던 1920년대에서 70년대 사이가 오히려 예외적인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은 자연발생적이고 시장메커니즘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백히 ‘불로소득자 친화적인 정책과 거버넌스’를 통해서 현실화되었다. 예컨대 민영화과정에서 국가는 토지와 네트워크인프라를 민간에 넘겼을 뿐만 아니라 자산소유와 관련된 권리에 대해 강력한 법정비와 규제를 실시했다. 인프라지대인 무선주파수경매정책이나 지자체임대주택이 개인임대주택으로 전환유도된 사회주택매입권정책 등이 그 사례였다(p.495). 독점이윤을 보장하는 독점권력이 지대추구자본주의를 완성한 것이다. 저자는 영국을 ‘불로소득자의 천국’이라고 주저없이 정의한다.
이 즈음에서 저자는 과연 영국에 대한 실증연구를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지 궁금해질 수 있다. 토지상승분의 일부를 환수하는 메커니즘(토지세, 자산세)이 완전히 부재한, 불로소득자 천국인 영국과 달리 많은 나라들은 관련세제를 갖추고 있다. 한국도 한 예로 언급된다.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명확하게 답한다. “불로소득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나 시대, 즉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본주의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자본주의의 일부이자 구성부분인 불로소득동학(rentier dynamics)이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름 아닌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한국어판 서문) 즉, 지대추구자본주의는 경험적(영국) 특수성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일반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체제적 본성으로까지 이해되고 있는 불로소득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크리스토퍼스는 크게 네 가지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경쟁정책으로 시장독점을 막는 것, 둘째, 조세정책, 조세정의와 생산적 투자촉진, 셋째, 산업정책과 경제구조의 진보적 전환, 넷째, 소유구조재편: 다원적 혼합구조의 생태계로(과도한 민영화를 막고 공동체가 더 많은 자산을 소유).
규범적이면서 진보적인 위 대안들은 책의 막바지에서 사실상 매우 급진적이며, 또한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불로소득주의가 자본주의에 내재한 것이라면 불로소득주의의 대수술은 자본주의 자체의 심대한 수정일 수밖에 없음을 저자는 함축한다. 또한 영국의 브렉시트찬성 쪽에 있었던 보수당이 불로소득자 자본의 정당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2018년과 2019년 노동당의 재국유화계획으로 불로소득자집단이 얼마나 위협을 느꼈는지를 강조한다.
여기까지는 판단을 유보할 수 있지만, 주택시장과 연금을 거론하면서 ‘모두가 불로소득자가 되려는 상황’을 묘사하는데 이르면, 이 상황이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람들이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의 영국 그리고 한국은 ‘쁘띠불로소득국가’를 넘어서 ‘워너비’불로소득국가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고, 불로소득자-비불로소득자의 투표격차가 영국의 선거결과를 좌우했다는 분석을 접할 때면, 이 책이 가진 다른 차원의 정치-경제학적 보편성이 지구반대편으로 횡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참신한’ 참여적 지식인의 모습은 대부분의 서평에서 크게 강조되지 않는데, 학문적 해석에 도움되지 않는 별개의 실천영역(사족)으로 이해되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다른 시각으로 볼 때, 지리학자의 미덕일 수도 있는 그의 참여적 태도까지 포함한다면, 그의 실증적 진보주의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사구시’ 경제지리학 탐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