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0 June 2022. 229-252
https://doi.org/10.22776/kgs.2022.57.3.229

ABSTRACT


MAIN

  • 1. 서론

  •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   2) 을유・정해감계의 배경과 개요

  • 2. 을유감계 수계조사와 양측의 국경주장

  •   1) 을유감계의 진행과정

  •   2) 실지조사 전 양측의 입장

  •   3) 실지조사의 내용

  •   4) 실지조사 후 양측이 각각 주장한 국경

  • 3. 정해감계 수계조사와 양측의 국경주장

  •   1) 정해감계의 진행과정

  •   2) 실지조사 전 양측의 입장

  •   3) 실지조사의 내용

  •   4) 실지조사 후 양측이 각각 주장한 국경

  • 4. 결론

1. 서론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을유감계(乙酉勘界)와 정해감계(丁亥勘界)는 각각 을유년(1885)과 정해년(1887)에 조선과 청이 공동으로 진행한 국경 관련 실지조사와 회담을 지칭한다. 이 두 차례 감계와 관련된 대표적인 연구로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1938; 신영길 옮김, 2005), 이왕무 등 역주(2008, 2010), 이화자(李花子, 2012; 2013; 2014; 2019), 김형종 등 역(2013), 김형종 편역(2014), 김형종(2018), 쑹녠선(Song, 2018; 이지영・이원준 옮김, 2022) 등이 있다.

시노다 지사쿠의 연구(1938)는 최근 연구들에 의해 그 주요 견해가 기각되었고, 그 자체로 이미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이왕무 등의 『감계사등록』 역주(2008, 2010)는 을유・정해감계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주요 지명의 고증에 오류가 있다. 이화자(2012; 2013; 2014; 2019)는 임진정계(1712) 때 설치된 두만강 방향의 토퇴들을 발견하여 논의를 크게 진전시켰다. 그러나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이 송화강에 유입되지 않는다거나, 흑석구(황화송구자, 이깔이개) 동남안 임진정계 경계표지물(토퇴) 종점으로부터 두만강 방향으로 흐르는 지표수 물줄기나 복류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설명을 진행하는 등의 오류가 있다(이강원, 2017; 2021). 김형종 등 역(2013)김형종 편역(2014) 그리고 김형종(2018)은 관련 자료를 선역하여 방대한 자료집을 만들고, 이를 기초로 1880년대 감계의 과정을 충실하게 복원했다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1880년대 감계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임진정계에 대해서는 이화자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쑹녠선의 연구(Song, 2018)는 1880년대에서 1919년에 이르는, 두만강 국경을 둘러싼 갈등을 한국과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거시적 차원의 ‘국경 만들기’ 내지 ‘국가 만들기’에 초점을 두는 관계로 국경획정을 둘러싼 지리적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하지 않았다.

국경은 지도에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지도에 표시할 수 없는 국경주장은 허구이거나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이상에서 언급한 연구들에는 을유・정해감계에서 조선측과 청측이 각각 주장한 국경을 표시한 지도가 없다. 이들의 연구는 「압록강 -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 동해」라는 1880년대 초반 조선 월경변민들의 주장이 을유・정해감계를 통해 기각되었고, 백두산 권역의 두만강 상류 물줄기를 확정하는 것만 과제로 남겨졌다고 전제하면서, 양국 대표들이 각각 주장했던 국경들과 관련해서는 홍단수(紅丹水), 석을수(石乙水), 홍토산수(紅土山水: 홍토수)만을 언급할 뿐 더 이상의 규명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양국의 두만강 국경주장은 그 물줄기에 상응하는 압록강의 지류를 상정하고 있을 것인데, 기존의 연구들은 이에 대해 규명하지도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점들은 이후에 진행된 국경협상에 대해 온전한 분석을 어렵게 한다. 을유・정해감계에서 작성된 지도에 표시된 석을수, 홍토수의 위치와 간도협약 부속지도(1909) 및 1910년대에 측량된 일제지형도(조선총독부, 1933)에 표시된 석을수, 홍토수의 위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1)

이 연구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바로 두 차례의 감계에서 양측이 주장한 국경들을 지도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두 차례 감계에서 이루어진 수계 측량작업과 측정수치에 대해 분석하고, 각각의 감계에서 제작된 지도들의 내용에 대해 검토하였다.

논문의 서술은 각각의 감계에 대하여 앞부분에서는 감계의 개요를 설명하고 뒷부분에서는 수계조사와 지도에 대해 분석하는 순서로 진행하였다. 각 감계에 대한 분석의 말미에 양측 대표의 국경주장을 지도로 제시하였다.

2) 을유・정해감계의 배경과 개요

19세기 후반 함경도 지방의 흉년으로 두만강을 건너 점거경작하는 백성들이 나타났다. 특히 1880년에는 ‘경진개척(庚辰開拓)’이라 불릴 정도로 대규모의 조직적인 월경과 점거경작 현상이 있었다(이강원, 2021, 504).2) 이에 대해 1~2년간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던 청측은 1882년 겨울 길림장군의 점거경작 조선백성 쇄환명령과 1883년 4월 돈화현의 조선백성 귀환조치 고시라는 대응책을 들고 나왔다. 이에 조선정부는 1883년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임명하고 대책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이강원, 2021, 504). 당시 종성・온성・회령・무산 등의 변경백성들은 백두산정계비에 근거하여 자신들 나름의 국경논리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압록강 -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 동해」가 바로 그것이었다.3) 어윤중은 이 논리를 확인하고자 1883년 5~6월 2차에 걸쳐 종성 유학 김우식을 파견하였다.4) 동시에 6월 종성부사 이정동(李正東)으로 하여금 돈화현 지현 조돈성(趙敦誠)에게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토문강’이 해란강을 지칭하는 ‘분계강’에 흘러드는 지 여부를 조사하자고 제안하도록 하였다. 이후 공동감계에 관한 양국 정부 차원의 문서교환이 있었다.5)

1885년 7월 20일 공동감계에 대한 광서제의 재가가 있었고(김형종, 2018, 203), 길림장군은 8월 22일 분발보용지현 진영(秦煐)을, 혼춘부도통은 혼춘좌익협령 덕옥(德玉)과 초간국총판위원 가원계(賈元桂)를 선발하였다. 조선은 1885년 7월 30일 안변부사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교섭아문 주사 조창식(趙昌植)을 토문감계종사관(土們勘界從事官)으로 삼아 공동감계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중하와 조창식은 9월 26일에, 진영・덕옥・가원계는 28일에 집결지인 회령에 도착하여 공동감계 업무를 시작하였다. 청측 인원이 귀국한 12월 3일까지 진행된 이 을유년의 공동감계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다시 양국의 논의를 거쳐 1887년 정해년 3월 26일부터 5월 20일까지 공동감계가 진행되었다. 조선측 감계사는 이중하였고, 청측 감계관은 방랑(方朗)・덕옥・진영이었다. 이 정해년의 공동감계 역시 양국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2. 을유감계 수계조사와 양측의 국경주장

1) 을유감계의 진행과정

을유감계는 1885년 9월 26일과 28일에 조선측 이중하와 청측 진영・덕옥・가원계가 함경도 회령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표 1). 김우식의 묘사에 따르면, 조선측은 이중하 외에도 20여 명의 관계인원이 참여하였고, 청측에서도 위의 3명 외에도 10명의 관계인원과 40여 명의 군사가 동원되었으며, 두 나라의 군사와 마부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리성 옮김, 2004, 226-227).

표 1.

1885년 을유감계의 진행과정 개관

일시 장소 비고
9월 26일 회령 조선측 이중하 도착
9월 28일 회령 청측 진영・덕옥・가원계 도착
9월 30일~
10월 1일
회령 회담
10월 3일 회령 출발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감
10월 6~7일 무산 회담
10월 10일 무산 출발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감
10월 11일 삼하강구 회담
10월 13일 삼하강구 3개 팀으로 나누어 ,
조사하는 안에 합의
10월 15~27일 삼하강구 출발, 양측 인원 세 팀으로 나누어 조사 정계비 조사팀
홍단수 조사팀
서두수 조사팀
10월 27일 3개 팀 무산으로 귀환
10월 29일 진영 화룡욕으로 일시 귀국
11월 7~8일 무산 회담
11월 13일 덕옥 화룡욕으로 일시 귀국
11월 15일 진영・덕옥 무산으로 귀환
11월 27일 무산 회담, 「감명도문강계지도」에 서명
12월 3일 무산 진영・덕옥 등 귀국

자료: 이왕무 등 역주(2008), 김형종 편역(2014)에 근거하여 재구성

9월 30일과 10월 1일 회령에서 회담을 열어 양측의 기본입장을 확인하였다. 이후 백두산으로 향하던 중 10월 6일과 7일에 무산에서, 그리고 다시 백두산으로 향하던 중 삼하강구(三下江口)6)에서 회담을 열었다. 삼하강구 회담에서 서두수, 홍단수, 정계비의 3개 팀으로 나누어 실지조사를 진행하기로 합의하여, 15일부터 조사가 시작되었다. 27일 3개 팀이 모두 무산으로 귀환하였고, 11월 7~8일에 회담이 있었다. 국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27일 청측 회도관(繪圖官) 염영(廉榮)의 감독 하에 제작된 「감명도문강계지도(勘明圖們江界址圖)」라는 제목의 지도에 양측이 서명하는 것으로 을유감계는 끝난다.

2) 실지조사 전 양측의 입장

1885년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회령에서 진행된 회담에서 양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측은 1712년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석퇴・토퇴들을 먼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중하가 「압록강 -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 동해」라는 월경변민들의 주장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청측은 도문강(圖們江: 두만강)이 백두산에서 발원하므로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하는 것’과 ‘도문강(두만강) 지도를 작성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하였다.7) 청측은 회령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두만강 하구로부터 지도를 작성해오고 있었다. 이는 11월 27일에 양측 대표에 의해 서명된 「감명도문강계지도」에 두만강의 회령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구간 이외에도 하구로부터 회령에 이르는 구간이 그려져 있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10월 6일 무산에서 진행된 회담에서 양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측은 백두산 정상부에 눈이 쌓이고 있으므로 우선 정계비부터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청측은 두만강 수계조사와 지도작성이 먼저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이 청측은 계속해서 두만강 지도를 작성하였다.

10월 12일 삼하강구에서 진행된 회담에서 양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측은 계속 정계비를 먼저 조사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청측은 갑자기 서두수(어윤강)를 조사하자고 주장하면서,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물줄기는 송화강에 들어가므로, 정계비의 ‘토문(土門)’은 ‘흙벽’을 가리키는 토문이 아니라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이고, 도문(圖們)・두만(豆滿)・토문(土門)은 하나의 물줄기를 가리키는 이칭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조선측은 청측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사실 청측의 이러한 주장은 옳은 것이었으며, 1887년 정해감계에서 조선측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삼하강구에서 청측이 갑자기 서두수를 조사해야겠다고 한 것은 조선측이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하천을 조사하자고 고집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청측은 이미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一統輿圖) 계통의 지도들과 소문을 통해 서두수 발원지가 두만강 물줄기 중 하구로부터 가장 멀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한다는 당초의 입장을 바꾸어, 이후 계속 두만강의 ‘가장 긴 물줄기’를 국경으로 주장하게 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조선측이 주장하는,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하천이 있고 그것이 국경이라는 설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조사하는 것은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이 아니라 ‘장백산(백두산)의 해란강 수원’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두만강 하구로부터 서두수 발원지까지 물줄기 길이가 홍단수나 홍토산수 발원지까지의 그것보다 길었다.

그러나 청측의 이러한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서두수가 두만강의 여러 물줄기 중 하구로부터 가장 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서두수에 대응하는 압록강의 물줄기는 운용천(雲龍川)으로 압록강 물줄기 중에서 하구로부터 가장 긴 물줄기가 아니다. 압록강 하구로부터 계산하여 긴 물줄기는 허천강(虛川江)이다. 두만강과 압록강 각각의 가장 긴 물줄기가 서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청측은 을유감계 초기에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 수원에는 그에 대응하는 압록강의 수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측이 계속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설을 고집하며 중국의 내지(內地)를 거론하자 조선의 내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서두수 조사를 꺼내 든 것이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양측은 서두수, 홍단수, 정계비로 팀을 나누어 조사하기로 합의하였다. 그중 정계비 팀에 양측 대표 이중하와 진영이 참여하였는데, 이것으로도 당초 청측의 감계 목표가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에 대한 조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

3) 실지조사의 내용

을유감계 실지조사는 음력 10월 15~27일(양력 11월 21일~12월 3일)에 이루어졌다. 10월 27일 3개 팀은 모두 돌아와 무산에 모였다. 3개 팀의 실지조사 결과를 청측이 정리하여 조선측에 조회하였고9), 최종적으로는 「감명도문강계지도」에 반영되었다. 표 2는 실지조사 3개 팀의 조사지역과 참여인원 그리고 조사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여 나타낸 것이다.

표 2.

1885년 을유감계의 공동조사 지역과 인원 및 내용

조사지역 참여 인원 조사 내용
서두수 조선: 오원정, 통역 이대본, 길잡이 유복성
청: 회도관 염영
포담산(보체산: 포태산), 남보체(남포태)산・북보체(북포태)산,
포태천(압록강 유입), 서두수 지류 발원처. 서두수의 발원처는
조사하지 못함(두만강까지 400여 리라는 점 주민을 통해 확인).
홍단수 조선: 종사관 조창식, 이후섭, 김우식, 통역 박윤신,
길잡이 강광희
청: 감계관 덕옥
소백산 동남쪽, 황사령, 삼급포(삼지연), 허항령, 이명수, 압록강,
홍단수 발원처, 도릉하・판교하・유동, 증산,
노인봉(노은동산: 대로은산)
정계비 조선: 감계사 이중하, 최두형, 최오길, 통역 유흥조,
길잡이 곽금승

청: 감계관 진영, 가원계
정계비, 90리에 걸쳐 분포하는 180여 기의 석퇴・토퇴,
‘토문(土門)’ 지형, 황화송구자(이깔이개)・사을수・동유와붕수의
발원처 및 낭낭고-송화강 유입, 정계비 앞 토산 2개(가차을봉)・연지봉・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무봉・대각봉・팔봉・홍토산・장산령,
원지(圓地: 圓池), 홍토산수, 원지수(약류하)

(1) 서두수 팀의 조사결과

서두수 조사팀은 서두수를 따라가다가 눈에 막혀서 포태산으로 올라갔다. 이 팀이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포담산(보체산), 즉 포태산은 정계비로부터 18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둘째, 포태산에서 서두수의 지류가 발원하며, 홍토수와 합류하는 삼강구까지 물줄기 길이는 약 280여 리이다. 셋째, 서두수의 본류는 길이 멀고 눈이 깊어 조사할 수 없었으며,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서두수 본류는 길주지방 학항령(鶴項嶺)에서 발원하고, 삼강구까지 물줄기 길이는 대략 400여 리이며.10) 학항령은 정계비로부터 대략 400∼500리 떨어져 있다. (소백산 남쪽의) 중국인이 일괄하여 황사령이라고 부르는 산줄기의 서남쪽의 물줄기는 모두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동북쪽의 물줄기는 소백산 이남에서는 모두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2) 홍단수 팀의 조사 결과

첫째, 삼급포(삼지연)은 정계비로부터 130리 거리에 있다. 둘째, 삼급포 서남쪽 15리에 허항령(虛項嶺)이 있으며, 30리에 이면수(以湎水: 오늘날 이명수(鯉明水))가 있어 압록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셋째, 삼급포 동쪽 30리 지점에서 온천이 솟는데 홍단수의 발원지이다. 소홍단까지 대략 200여 리이며, 여기서 홍토산수와 합류하고, 다시 홍기하와 합류하며, 삼강구에서 서두수와 합류하여 두만강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두만강과 압록강이 특정지점에서 「두만강 - 홍단수 - 삼급포(삼지연) - 이면수(리명수) - 압록강」이라는 모습으로 대응한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소백산 남쪽으로서 ‘장백산(백두산)’에 속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청측의 을유감계 목적 중의 하나인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하는 것’에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 홍단수의 발원지로부터 소홍단까지 홍단수의 길이를 “약 200여 리”로 보았다는 점이다. 1887년 정해감계 실지조사에서는 홍단수 발원지로부터 소홍단까지 물줄기 길이가 142리 160보로 측정되었다. 각각의 감계에서 홍단수의 길이 측정치에 큰 차이가 있다. 이 구간의 현대 측정치는 76.5㎞이다.11)

(3) 정계비 팀의 조사결과

정계비 팀의 일정은 이중하의 「백두산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0월 15일 오전 삼하강구 출발 - 홍단사(소홍단묘) - (20리) - 장파(15일 지숙처) - (40리) - 직동 유게소(오늘날 광평구 서쪽의 治洞, 16일 지숙처) - (20리) - 장산령 - (20리) - 가척봉 엽막 - 월로수(약류하) - (10여 리) - 연못(원지) - (30리) - 절파총수 엽막(17일 지숙처, 오늘날 동붕수 다리 근처로 추정됨) - (30리) - 새로 개척한 길 - 삼포 - (30리) - 이석포 엽막(18일 지숙처) - 대각봉 북쪽 낭떠러지 - 대각봉 - 정계비 - 가차을봉(정계비 남쪽의 토산) - 수봉(오늘날 무두봉) 엽막(19일 지숙처) - (40리) - 신무충(오늘날 신무성)의 동씨 엽막(20일 지숙처) - (50리) - 가을척봉 엽막 - 직동 엽막(21일 지숙처) - 장파(22일 지숙처, 3일 동안 휴식)」. 이러한 여정을 거쳐 다음을 확인하였다.

첫째, 「백두산 - 분수령 - 가차을봉(토산) - 대연지봉 - 소백산 - 황사령 - 허항령」에 이르는 산줄기가 있다. 이 산줄기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계를 이룬다. 소백산은 정계비로부터 40리 떨어져 있다.

둘째, 임진년(1712)의 정계비가 있다. 정계비 서쪽에 있는 물길은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동쪽에 있는 물길은 송화강의 지류인 황화송구자(이깔이개)로 들어간다. 이 둘째 조사결과를 통하여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물줄기가 송화강으로 들어간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송화강은 해란강이나 부르하통하와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조선측은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국경설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셋째, 정계비로부터 황화송구자 동남안을 따라 180여 기의 석퇴와 토퇴가 있으며, 그 분포길이는 ‘90리’이고, 토퇴가 끝나는 곳으로부터 수십 리를 내려가야 비로소 물길이 다시 보인다. 이 셋째 사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첨언할 것이 있다. 이화자(2013)는 정계비로부터 경계표지물의 분포길이가 ‘90리’라는 이 조사결과는 1883년 김윤식・어윤중 등에 의해 조작된 수치를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김우식이 정계비로부터 경계표지물의 종점까지의 길이를 90리로 보고한 적이 없으며, 김우식의 보고는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이강원, 2021). 을유감계 정계비 조사팀 참여자들은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을 끝인 삼포(杉浦)에서 출발하여 30리를 가서 대각봉 밑 이석포(裡石浦)에 도착하였고, 삼경(밤 11시∼새벽 1시)에 다시 눈보라 속 악전고투 속에 ‘30리’를 전진하여 대각봉에 이르렀으며, 다시 30리를 가 아침 무렵에 정계비에 도달했다.12) 여기서 이석포로부터 대각봉까지는 매우 짧은 거리인데, 쌓인 눈과 눈보라로 인해 이중하 일행은 ‘30리’로 느꼈다. 어둠 속에서 3시간 동안 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조사팀이 제시한 ‘90리’라는 수치는 삼포에서 정계비까지 ‘9시간 걸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똑같이 경험을 한 청측도 이 수치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넷째, 동유와붕수(董維窩棚水: 董棚水)와 사을수(斜乙水), 홍토산(백두산 정상에서 120리 떨어져 있다), 원지(홍토산 서북쪽 5리에 있다)13)가 있다. 원지 양쪽의 두 개의 물줄기가 홍토산을 지나 합류하며, 증산의 북쪽과 장파 등을 ‘약 100여 리’에 걸쳐 지나 소홍단에 이르러 홍단수와 합류하고, 그 아래 삼하강구에서 두만강에 들어간다.14)

이 넷째 사항과 관련하여 첫 번째 첨언할 것은 홍토산(홍토산수와 원지수(약류하)의 합류점)으로부터 소홍단까지 홍토산수의 물줄기 길이가 ‘약 100여 리’라는 수치의 정확성에 관한 것이다. 이 구간에 대한 현대의 측정치는 53.3㎞이며15), 홍단수 발원지로부터 소홍단까지의 물줄기 길이는 76.5㎞이다. 따라서 을유감계에서 홍토산수의 길이가 실제보다 과소 측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넷째 사항과 관련하여 두 번째 첨언할 것은 을유감계를 통하여 홍토산과 원지 일대의 물줄기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정보가 수집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2개의 물줄기는 각각 오늘날의 ‘홍토수’와 ‘약류하’를 가리킨다. 공동조사팀은 1885년 음력 10월 17일 이 부근을 지났는데, 양력으로는 11월 23일이었다. 오늘날의 ‘홍토수’는 북한의 지리학자들이 경우에 따라 ‘신무성수’라고 부르는 하천이며(백두산총서편찬위원회, 1992a, 269), 1964년 「조・중 변계 의정서」의 ‘홍토수’를 말하는데16), 모수림하가 홍토산(적봉) 서쪽에서 중간에 합류한다. 북한의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모수림하 합류점 이상의 구간과 이하 적봉(홍토산) 계선까지의 구간은 양력 10월부터 4월까지 고갈된다(백두산총서편찬위원회, 1992a, 270). 따라서 이때 조・청 공동조사팀이 본 약류하 합류점 이상의 홍토산수 물줄기는 매우 짧았을 것이다.

다섯째, 두만강 방향으로 설치된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흔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양측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중하가 발견하여 「추후별단」으로 고종에게 보고한 것이다. 이것은 이중하가 정해감계의 기본입장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7).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을유감계 조사팀들은 석을수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눈이 쌓인 겨울이었기에 그러했겠지만, 그들이 참조한 「일통여도(一統輿圖)」(皇輿全覽圖)에 훗날 ‘석을수’로 불리게 되는 물줄기가 다른 물줄기들보다 짧게 그려졌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실지조사 결과를 반영하여 만든 지도에는 석을수 물줄기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실지조사 후 양측이 각각 주장한 국경

(1) 「감명도문강계지도」의 분석

을유감계 실지조사 후 양측이 합의한 지리적 상황에 대한 지도는 「감명도문강계지도(勘明圖們江界址圖)」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지도가 양자오취안・쑨위메이의 저서(楊昭全・孫玉梅, 1994, 283-285)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것을 영인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특히 서두수 물줄기 상단에 표기하고 양국이 확인한 내용이 없다. 글자의 위치를 분석해보면 일본외무성외교사료관 소장본과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외무성외교사료관과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감명도문강계지도」 이미지 자료는 1매의 지도가 10개의 부분으로 분할 복제되어 있다. 필자는 이들 이미지 자료들을 합성하여 하나의 지도로 복원하였다(그림 1). 지도의 우측에는 “청나라 주재 일본공사관 발송, 메이지 40년(1907) 12월 31일, 기밀 제150호에 딸린 부속지도 2매 중의 1매”18)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른바 간도문제와 관련하여 북경주재 일본공사관에서 수집한 것이며, 기밀자료로 분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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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감명도문감계지도(勘明圖們江界址圖)」
주: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분류번호: 1.4.1.33, 보존장소: 후나바시 분실(船橋分室), 사료관리번호: 200-000943), 아시아역사자료센터 공개자료(B03041198200)를 필자가 합성한 것임. 위쪽이 남쪽이고 아래쪽이 북쪽임.

「감명도문감계지도」는 청측의 회도관(繪圖官) 염영(廉榮)의 주관 아래 그려졌다. 이 지도는 정사각형의 방안을 사용하였는데, 방안의 “한 변이 50리”라고 우측 하단에 표기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며, 아래쪽이 북쪽이다. 좌측 하단에 “중국 감계관 진영・덕옥・가원계, 조선 감계사 이중하, 종사관 조창식, 중국 회도관 염영” 순으로 이름과 서명이 있다. ‘중국(中國)’이라는 글자가 ‘조선(朝鮮)’보다 한 글자 높게 쓰여 있다. 중국과 조선의 위계를 나타낸 문서격식으로 보인다. 지도의 중앙 상단과 좌측 상단에 중국측 참여자 4명의 직명이 붙어 있다. 지도의 내용을 보증하는 의미로 붙여둔 것으로 보이며, 이 지도가 청측의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두수 물줄기를 표시한 부분 위에 “서두수의 본류는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길주의 북쪽 경계에 있는 학항령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강구(삼강구)까지 약 400여 리를 흘러 홍단수와 합류한다. 학항령은 장백산(백두산)의 입비처와 대략 400∼500리 떨어져 있다. 중국인이 일괄하여 황사령이라고 부르는 산줄기의 서남쪽의 물줄기는 모두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동북쪽의 물줄기는 소백산 이남으로부터는 모두 두만강으로 흘러든다.”19)이라 쓰고, 그 좌측과 우측에 각각 조선측 이중하와 청측 진영의 서명지가 붙어 있다. 이는 실사하지 않아 이 지도에 분명하게 그릴 수 없는 내용이기에 특별히 글로 기록해둔 것이고, 동시에 그 내용에 대해 양측이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도에서 주목할 부분은 우측의 백두산 부근이다. 그림 2는 우측 중단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1번 원 표시 내에 ‘도문강 조선호두만강(圖門江 朝鮮呼豆滿江: 도문강(투먼강)을 조선은 두만강이라 부른다)’이라 하였는데, 이는 하구로부터 서두수와 홍단수의 합류점, 곧 강구(江口: 삼하강구)까지를 두만강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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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감명도문감계지도」 우측 중단 부분
주: 1. 圖門江 朝鮮呼豆滿江 2. 小紅丹 3. 紅丹水源 4. 紅土山 圓池 5. 碑 此處碑刻謂之分水嶺 6. 土堆 黃花松溝子 朝鮮呼伊戛力蓋

2번 원 표시는 소홍단(小紅丹), 3번 원 표시는 홍단수원(紅丹水源)이다. 오늘날 홍단수는 소홍단에서 발원지까지를 가리키지만, 이 지도에서는 강구(삼하강구)로부터 홍단수원까지를 홍단수로 보고 있다. 소홍단에서 갈라지는 다른 물줄기는 4번 원 표시의 홍토산 원지(紅土山 圓池) 부근에 이른다. 이 지도는 이 홍토산수를 홍단수의 지류로 간주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서두수에 관한 부분에서 서두수가 강구에서 (홍토수가 아닌) 홍단수와 합류한다고 기록한 점도 이 지도가 홍토수를 홍단수의 지류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지도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석을수(石乙水)는 그려져 있지 않다.

홍단수가 홍토산수보다 약 100리 정도 더 긴 것으로 측정되었고, 지도에도 대체적으로 그와 유사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와 다르다. 실지조사에서 소홍단에서 홍단수 발원지까지 물줄기 길이가 200여 리, 소홍단에서 홍토산수 발원지까지의 길이가 100여 리였다. 그런데 각각에 해당하는 현대의 측정치는 76.5㎞와 58.9㎞이다. 비율상 홍토산수의 길이가 실제보다 과소 측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토산수가 홍단수보다 북쪽에 있고, 전반적인 고도가 더 높다. 을유감계 실지조사 진행 시기에는 눈이 쌓였기 때문에 물줄기 길이가 실제보다 길게 측정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홍토산수의 길이가 실제보다 훨씬 작게 측정된 것은 홍단수를 두만강의 본류(정원)로 간주하려는 청측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을유감계에서는 물줄기의 길이를 보수(步數)까지 측정하지는 않았다. 조사도 팀별로 각각 이루어져, 서로 다른 물줄기에 대한 일관된 측량과 비교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조선측 역시 이러한 오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5번 원 표시에는 “비석, 이곳을 비문에서는 분수령이라 부른다(碑 此處碑刻謂之分水嶺).”고 쓰여 있다. 바로 임진년(1712)에 세운 정계비와 그 터를 말한다. 6번 원 표시에는 “토퇴, 황화송구자 조선은 이깔이개라고 부른다(土堆 黃花松溝子 朝鮮呼伊戛力蓋).”라고 쓰여 있다. 청측이 황화송구자, 즉 ‘장백낙엽송이 자라는 곳에 있는 골’이라고 부르는 것을 조선에서는 ‘이깔이개(잎갈이의 개울)’라고 부르며, 그 남안에 토퇴가 있다는 뜻이다. 이 물줄기는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지도가 나타내고자 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은 송화강으로 유입되므로 조・청의 국경이 될 수 없다. 둘째, 두만강 상류에는 서두수, 홍단수, 홍토산수라는 세 개의 물줄기가 있으며, 그중 서두수는 끝까지 조사하지 못했지만 조선의 내지 깊숙이에서 발원하는 것이 분명 하므로 두만강의 본류(정원)나 조・청 사이의 국경으로 삼기 어렵고, 홍단수와 홍토산수 중 홍단수가 더 길다.

(2) 을유감계에서 양측이 주장한 국경

청측의 주도하에 그려진 「감명도문감계지도」에 표현된 지리적 사실들에 대해 조선측이 동의하였지만, 양측이 주장한 국경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결국 을유감계는 무산되었다.

조선측 이중하는 정계비와 황화송구자(이깔이개)에 설치된 임진정계(1712) 경계표지물(석퇴, 토퇴 등)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림 3).20) 이중하는 1883년 김우식의 탐사 결과로 이른바 ‘토문강’이 두만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분계강’의 존재가 확증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계비와 경계표지물이 그렇게 존재하는 이상 임진년(1712)에 그렇게 설치하게 된 연유를 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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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을유감계(1885) 결렬시 조선과 청의 국경주장

여기서 이중하는 일종의 지연술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10월 17일 두만강 방향으로 설치된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는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국경설을 철회해야만 하는 중대한 발견이었다. 그로서는 이에 대해 조정에서 검토하고 논의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발견에 대해 을유감계 동안 함구하였고, 고종에게만 「추후별단」으로 보고하였다. 따라서 을유감계 결렬시 이중하의 국경주장은 명확하지 않다. 그는 청측이 정계비와 황화송구자(이깔이개)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들(석퇴・토퇴)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이중하의 보고를 받은 조선조정은 이중하가 「추후별단」에서 언급한 ‘두만강 방향’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다. 광서 12년(1886) 1월 11일 조선국왕이 북양대신에게 보낸 자문(咨文, 김형종 편역, 2014, 510- 515)을 통해 조선 조정이 「정계비 - 임진정계경계표지물 - 토문강 - 토문자(부얼하퉁하) - 두만강 - 동해」를 국경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이어지는 하천은 없다. 그리고 조선정부가 이 일대의 지리적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선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여전히 1880년대 초 월경변민들 탄원과 어윤중의 주장에 기초하고 있었다.

청측은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 - 삼급포(삼지연) - 홍단수 - 두만강」을 국경으로 주장하였다(그림 3).22) 청측이 홍단수를 국경으로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까지 밝혀진) 두만강 최상류 물줄기 홍단수와 홍토산수 중 홍단수가 더 길기 때문에 홍단수가 두만강의 본류(정원)이다. 둘째, 홍단수는 압록강에서 멀리 떨어진 홍토산수와 달리 압록강의 지류 이명수와 근접한다.

그러나 이러한 국경주장은 을유감계 초기에 자신들이 천명한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한다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홍단수, 삼지연, 이명수는 ‘장백산(백두산)’의 영역에서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 1885년 11월 27일 공동답사 결과를 담은 지도가 완성되어 양측이 서명하였고, 이것으로 을유감계는 종료되었다.

3. 정해감계 수계조사와 양측의 국경주장

1) 정해감계의 진행과정

을유감계 결렬 이후 양국 정부는 국경문제 해결을 위해 다시 감계할 것을 협의하였다. 정해감계는 1887년 3월 26일 함경도 회령에 청측 대표 진영이 도착하고, 4월 5일 조선측 대표 이중하가 도착하면서 시작된다(표 3). 4월 7일부터 20일까지 회령에서 제1차 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쌍방의 입장을 확인하고, 감계의 전체적인 계획이 논의되었다.

표 3.

1887년 정해감계의 진행과정 개관

일시 장소 비고
3월 26일 회령 청측 감계관 진영 도착
4월 5일 회령 조선측 감계사 이중하 도착
4월 8일 회령 청측 감계관 덕옥 도착
4월 7~20일 회령 회령 제1차 회담
4월 17일 측량인원 회령 출발 청측 측량위원 유우경 주도로 측량
4월 17일 회령 청측 감계관 방랑 도착
4월 22일 양측 대표 회령 출발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감, 인원 100여 명
4월 29일 양측 대표 장파 도착 장파 제1차 회담
윤4월 2~6일 양측 대표 실지조사 참관 홍단수, 삼지연, 허항령 조사
윤4월 6일 양측 대표 장파 도착
윤4월 8~10일 장파 장파 제2차 회담
윤4월 13~16일 양측 대표 실지조사 참관 홍토산수, 정계비・석퇴・토퇴, 천지 조사
윤4월 16일 신무충(신무성) 신무충 제1차 회담, 청측 홍단수 주장, 이중하 “吾頭可斷 國疆不可縮”
윤4월 18일 신무충 방랑과 지창한, 동붕수 하류 조사
윤4월 19일 신무충 신무충 제2차 회담
윤4월 23일 신무충 이중하와 진영, 동붕수 하류 조사
윤4월 24~30일 신무충~장파 날짜를 특정할 수 없으나 이 기간 중 석을수 조사, 신무충에서 장파로 이동
5월 1일 양측 대표 장파 출발 청측이 조선측에 홍토산수・석을수 지리정보 조회
5월 2일 양측 대표 무산 도착 -
5월 5일 양측 대표 회령 도착 -
5월 11~19일 회령 회령
제2차
회담
15일, 진영, 지도 완성 후 논의하자고 함
16일, 방랑, 구두로 석을수를 국경으로 제안
18일, 이중하, 조회를 통해 홍토산수와 석을수로 입장 갈렸음을 명시,
공동으로 측량한 거리에 따라 지도를 그려 올려 황제의 결정을
주청하자고 함
18일, 진영, 조회를 통해 홍토산수가 정계비 및 석퇴 토퇴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석을수 주장, 결렬 인정,
지도를 그려 함께 직인을 찍어 보고하자고 함
5월 20일 회령 회담 종료
5월 26일 회령 지도에 서명

이중하는 고종에게 보낸 보고에서 24일 장파에서 출발했다고 했는데, 이는 윤4월 24일 신무충에서 출발한 것의 착오인 듯하다. 이중하는 장파에서 5월1일 출발했다. 『감계사등록(하)』, 이왕무 등 역주(2010), 김형종 편역(2014)에 근거하여 재구성.

청측 진영의 요청을 받아들여 길림장군 희원(希元)이 감계위원으로 방랑(方朗)을 추가 파견하였고, 17일 그가 회령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을유감계의 진영・덕옥・가원계23)라는 청측 감계관 인원구성이 방랑・덕옥・진영으로 바뀌게 된다. 방랑은 진영이 길림장군에게 자신이 ‘여도지학(輿圖之學: 지도학)’에 어둡고, 복잡한 업무를 감당하기 어렵다24)는 이유로 추가 파견을 요청하여 감계에 참여하게 된 인원이다. 따라서 그는 ‘여도지학’에 상당한 식견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정해감계 지도의 서명란에 방랑・덕옥・진영의 순으로 이름이 나열된 것으로 보아, 정해감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방랑으로 보인다. 또한 측량관으로 유우경(劉虞卿), 회도관으로 왕여주(王汝舟)가 참여하였다. 청측의 주도로 측량과 지도제작이 시작되었으며, 17일 측량인원들이 회령을 출발하여 두만강 상류방향으로 향하였다.

양측은 22일 회령을 출발하여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 29일 장파에 도착하여 회담을 열었다. 윤4월 2∼6일에 장파를 출발하여 홍단수, 삼지연, 허항령을 조사하고, 다시 장파로 돌아와, 8∼10일에 장파에서의 두 번째 회담을 가졌다. 13∼16일에는 장파를 출발하여 홍토산수, 정계비 및 석퇴・토퇴, 천지를 조사하고, 신무충(신무성)에서 첫 번째 회담을 열었다.

신무충(신무성)에 머무르는 동안에 양측은 ‘황화송구자 토퇴 종점에서 동붕수를 거쳐 홍토산수에 이르는 구역’에 대해 추가 공동조사를 진행하였다. 특히 동붕수 하류 구역이 집중 조사대상이 되어, 18일에 방랑과 지창한이, 23일에는 이중하와 진영이 거듭 조사하였다. 그 사이 신무충에서의 두 번째 회담이 있었다.

날짜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24일부터 30일 사이에 ‘석을수’ 및 ‘석을수 발원지로부터 소백산 정상에 이르는 구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을수에 관한 언급이 『감계사등록(하)』 5월 1일자 조회에서야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후 5월 1일자 조회로부터 19일자 조복에 이르기까지 ‘동붕수 하류와 홍토산수 상류’ 그리고 ‘석을수로부터 소백산 정상까지’가 수차례 거론된다.

한편, 24일부터 30일 사이에 신무충을 떠나 장파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24일 신무충을 떠나 석을수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중하가 고종에게 올리는 「장계」에서 “24일 장파를 출발”했다고 한 것은 아마도 24일 신무충을 출발했다는 것의 착오일 것이다. 5월 1일 장파를 출발하여 5일 회령에 도착하였고, 11∼19일 회령에서의 두 번째 회담을 가졌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2) 실지조사 전 양측의 입장

정해감계에서 이중하의 입장은 4월 15일 회령 회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감계사등록(하)』에 실린 「4월 15일 청국 관원에 답함」이라는 기록에서, 이중하는 「압록강 - 정계비 -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 홍토산수(모수림하) - 두만강」을 국경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이왕무 등 역주, 2010, 128-139). 을유감계에서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물줄기가 있다는 조선측의 주장은 지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청측에 의해 논파되었다. 이는 이중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중하는 임진정계 관련 기록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을유감계 실지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발견한 두만강 방향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이 홍토산수 발원지(오늘날 모수림하 발원지)에 가깝다는 점에 근거하여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중하의 이러한 입장은 정해감계 내내 변하지 않았다.

정해감계 초기 청측의 국경주장은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 - 삼급포(삼지연) - 홍단수 - 두만강」으로, 을유감계 결렬시의 입장과 같은 것이었다. 이중하의 보고에 따르면, 청측은 자신들의 주장에 따라 경계표지물을 설치하고자 15개의 비석을 홍단하구에 운반해 놓고 있었다(이왕무 등 역주, 2010, 219-227). 그럼에도 청측은 실지조사 과정을 거쳐 이러한 입장을 수정하게 된다.

3) 실지조사의 내용

정해감계 실지조사는 계절적으로 비교적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양력 11월 하순에 시작했던 을유감계 실지조사와 달리 양력 5월 하순에 시작되었으므로 두만강 최상류 지역의 물줄기를 관찰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정해감계의 실지조사는 선발대와 본진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먼저 4월 17일 청측 측량위원 유우경(劉虞卿)이 궁병(弓兵), 승수(繩手: 줄잡이), 측량기구, 낙타와 말을 이끌고 떠나자 조선측도 오원정(吳元貞) 등 2인을 합류시켰다.25) 대략 보름 후인 윤4월 2일에 양측 대표가 참여하는 실지조사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청측 측량위원 유우경이 주도하는 선발대가 홍단수, 홍토산수, 정계비・석퇴・토퇴, 천지 등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양측 대표들이 오기를 기다려 길 안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진의 실지조사 때 홍단수, 홍토산수, 정계비・석퇴・토퇴 구간을 청측 유우경과 조선측 지창한(池昌翰)이 한 조가 되어 조사・기록하였고, 양측 감계 대표들은 주요 지점까지 입회・참관하였다.26) 이중하와 방랑・덕옥・진영 등이 모든 조사에 일일이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양측 대표들이 입회・참관한 것만으로도 조사내용에 공신력이 부여될 수 있었다. 윤4월 2일부터 6일까지(양력 5월 24~28일) ‘홍단수, 삼지연, 허항령’ 지역, 윤4월 13일부터 16일(양력 6월 4~7일)까지 ‘홍토수, 정계비・석퇴・토퇴, 천지’ 지역, 윤4월 18일과 23일 동붕수 하류 지역, 그리고 윤4월 24일부터 30일(양력 6월 15~21일) 사이로 추정되는 석을수에 대한 실지조사에 양측 대표들이 입회・참관하였다. 무엇보다도 각 물줄기들의 길이에 대해 일관된 측정이 이루어지고 비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청측에게 이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두만강 상류의 어느 물줄기가 더 긴가, 라는 문제에 주목해왔고, 가장 긴 물줄기를 본류이자 정원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감계사등록(하)』에는 물줄기들의 길이에 관하여 이중하가 청측과 주고받은 내용들이 있지만, 측정치들이 일관되게 정리・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잘못 기재된 것도 있다.27) 각 물줄기의 길이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측정치들은 『조선린변감계문략(朝鮮隣邊勘界文略)』에 수록된 「조록길림장군래문내청절(照錄吉林將軍來文內淸折)」(광서 13년(1887) 6월 1일)을 통해 알 수 있다.28)

이 자료의 물줄기 길이는 리수(里數)와 보수(步數)로 표시되었다. 1리는 360보이다. 당시 조선과 청에서 사용된 리의 실제 길이는 서로 달랐다. 어느 것을 사용했는지 명시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주요 물줄기와 관련된 측정치는 다음과 같다.

무산성으로부터 두만강과 박하천이 합치는 곳까지 물길 41리 141보/ 두만강과 박하천이 합치는 곳으로부터 삼강구까지 물길 31리 93보/ 삼강구로부터 소홍단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까지 물길 36리 314보/ 소홍단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으로부터 유동하와 홍단수가 합치는 곳까지 물길 69리 반/ 유동하와 홍단수가 합치는 곳으로부터 판교하와 홍단수가 합치는 곳까지 물길 35리 300보/ 판교하와 홍단수가 합치는 곳으로부터 도릉하와 홍단수가 합치는 곳까지 물길 25리 반/ 도릉하와 홍단수가 합치는 곳으로부터 홍단수의 남쪽 근원과 북쪽 근원까지 물길 11리 220보, 10리 40보/ 이상 무산성으로부터 홍단수 남쪽 근원과 북쪽 근원까지 각각 물길 251리 168보[251리 348보의 착오-역주], 250리 348보[250리 208보의 착오-역주].29)

(홍단수의) 남쪽 근원과 북쪽 근원으로부터 삼급포(삼지연) 첫 번째 연못까지 각각 15리 반, 17리/ 삼급포 두 번째 연못을 조사하니, 곁에 작은 못이 있어서 물이 커지는 시기에는 두 번째 연못과 합쳐져서 하나의 물을 이루고, 물이 작아지는 시기에는 홀로 작은 못을 이룬다. 재보니 삼급포 첫 번째 연못은 (둘레가) 1리 258보이며, 장백산(백두산) 정상으로부터 육로로 63리 150보 떨어져 있다. 두 번째 연못은 둘레가 3리 200보이며, 세 번째 연못과 202보 떨어져 있고, 작은 연못은 둘레가 1리 20보이고, 두 번째 연못으로부터 5보 떨어져 있으며, 세 번째 연못은 둘레가 1리 190보이고, 압록강으로부터 육로로 48리 반 떨어져 있다.

무산성으로부터 소홍단수(홍단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까지 물길 109리 188보/ 소홍단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으로부터 장파 부교까지 물길 23리 290보/ 장파 부교로부터 석을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까지 물길 88리 반(180보)/ 석을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으로부터 홍토산 아래 두 개의 근원이 합치는 곳까지 물길 23리 200보/ 홍토산 아래 두 개의 근원이 합치는 곳으로부터 홍토산 원지(둘레 1리)까지 물길 4리 30보/ 홍토산 아래 두 개의 근원이 합치는 곳으로부터 홍토산 서쪽 머리 수원이 나오는 곳까지 물길 11리 340보/ 이상 무산성으로부터 홍토산 원지까지 물길 249리 168보, 무산성으로부터 홍토산 서쪽 머리 물이 나오는 곳까지 물길 257리 118보.

(홍토산 서쪽의) 수원으로부터 동붕(동유와붕) 남쪽을 지나는 물줄기 하류의 물이 흐르는 곳까지 8리 반/ 동붕(동유와붕) 남쪽의 물로부터 하류의 물 흐름이 끊어진 곳까지 물길 24리 반/ 동붕(동유와붕) 위로 팔봉까지 물길 9리 55보/ 팔봉으로부터 대각봉까지 물길 18리/ 대각봉으로부터 동붕(동유와붕) 남쪽을 지나는 물줄기의 수원이 나오는 곳까지 물길 7리/ 이상 둥붕(동유와붕) 남쪽을 지나는 물줄기의 하류 물 흐름이 끊어진 곳으로부터 물줄기의 근원이 나오는 곳까지 58리 235보, 근원이 나오는 곳으로부터 목극등비(정계비)까지 육로 14리 반, 목극등비로부터 장백산(백두산) 정상의 큰 호수 가장자리까지 13리, 목극등비로부터 토산을 지나 연지봉까지 15리, 연지봉으로부터 소백산까지 20리.

무산성으로부터 석을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까지 물길 221리 298보/ 석을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으로부터 석을수 수원이 나오는 곳까지 물길 41리 215보/ 석을수 수원이 나오는 곳과 이어진 물골(水溝)의 위쪽 입구는 삼급포 첫 번째 연못과 18리 떨어져 있으며, 석을수 수원으로부터 첫 번째 연못까지의 거리는 총 20리이다. 물골로부터 위쪽으로 이어지는 황화송수전(黃花松水甸) 구간은 총 길이가 5리이다. 이상 무산성으로부터 소백산 동쪽 기슭 황화송수전까지, 물길 280리 153보이며, 황화송수전으로부터 위쪽 방향으로 또 이어지는 골(溝)는 총 길이가 22리이며, 이 골의 위쪽 입구에서 소백산 정상까지는 육로로 15리이며, 소백산 정상은 서쪽으로 압록강 물줄기와 육로로 42리 떨어져 있다.

이 자료는 다음을 말하고 있다. 첫째, “홍단수(소홍단수)와 홍토산수(홍토수)가” 합류한다고 하였으므로, 실지조사 참가자들은 여전히 홍단수와 홍토산수를 두만강 상류의 주된 물줄기로 간주하고 있었다. 새로 발견된 석을수는 발견 초기에 홍토산수의 지류로 인식되었다.

둘째, 홍단수(소홍단수)에는 남과 북 두 개의 근원이 있으며, 남쪽 근원이 북쪽 근원보다 길다. 무산성으로부터 홍단수 남쪽 근원까지의 물길 거리는 251리 348보이다.

셋째, 무산성으로부터 홍토산 서쪽머리 물이 나오는 곳(오늘날 모수림하 발원지)까지 물길 거리는 257리 118보이다. 따라서 홍토산수(홍토수)가 홍단수보다 5리 130보 길다.

넷째, 무산성에서 석을수 수원까지의 물길 거리는 263리 153보이다. 따라서 석을수의 길이가 홍단수보다 11리 165보 길고, 홍토산수보다 6리 35보 길다.

다섯째, 석을수는 발원지 위쪽으로 축축한 땅인 ‘황화송전자’로 이어지고, 다시 골(溝)이 소백산 동사면까지 이어진다.

표 4는 을유감계와 정해감계 그리고 현대에 조사된, 소홍단으로부터 각 물줄기들의 발원지까지의 길이를 나타낸 것이다.30) 을유감계에서는 “서두수 > 홍단수 > 홍토산수” 순으로 길이가 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정해감계에서는 가장 긴 서두수를 제외하고 “석을수 > 홍토산수 > 홍단수” 순으로 길이가 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대에 측정된 값은 “서두수 > 홍단수 > 석을수 > 홍토산수” 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을유감계에서는 홍토산수 길이가 과소 측정되었다. 반면에 정해감계에서는 석을수가 지리적 실제와 다르게 가장 긴 물줄기로 측정되고 지도에도 그렇게 그려졌으며, 홍토산수 역시 홍단수보다 긴 것으로 측정되고 또 그렇게 지도에 그려졌다.

표 4.

소홍단으로부터 측정한 두만강 상류 각 물줄기들의 길이

물줄기 명칭 물줄기 길이 측정치
을유감계(1885) 정해감계(1887) 현대
홍단수 약 200여 리 142리 160보 76.5㎞
석을수 - 153리 325보 62.5㎞
홍토산수 약 100여 리 147리 290보 58.9㎞

주: 서두수는 삼하강구에서 두만강에 합류한다. 삼하강구에서 서두수 발원지까지의 물줄기 길이는 을유감계에서 전문(傳聞)에 의하여 400여 리로 기록되었다. 현대의 측정치는 173.1㎞이다. 을유감계에서 석을수는 조사되지 않았다.

자료: 『朝鮮隣邊勘界文略』「照錄吉林將軍來文內淸折」(光緖 13年 6月 1日) 楊昭全・孫玉梅(1994, 1135-1137), 백두산총서편찬위원회(1992a, 271-273), 長白山志編纂委員會(1987, 146).

4) 실지조사 후 양측이 각각 주장한 국경

(1) 정해감계 지도의 분석

정해감계의 실지조사 내용과 양국의 국경주장은 정해감계 지도에 반영되어 있다. 이 지도는 「백두산정계비지도」(규축 26675)31) 라는 이름으로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그림 4). 지도는 정사각형의 격자방안을 사용하였으며, 지도 상단에 한 변이 40리라고 표시하였다. 그 좌측에 격자 한 변을 20마디(寸)로 등분하고 각 마디가 2리를 의미한다고 표시했으며, 그 아래 방위를 그림으로 나타냈다. 동시에 상단 중앙에 북(北) 하단 중앙에 남(南)이라 썼다. 지도의 위쪽이 북쪽방향 아래쪽이 남쪽방향이다. 왼쪽 상단에 광서 13년(1887) 5월 26일이라는 날짜가 있고, 하단에 중국 감계관 방랑・덕옥・진영 그리고 조선 감계사 이중하, 위원 팽한주 등의 명단이 있다. 을유감계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中國勘界官”이라는 글자 중 “中”자가 “朝鮮勘界使”보다 한 글자 높게 쓰여 있다.

이 지도에 그려진 두만강 상류(그림 5), 특히 소홍단묘(小紅丹廟) 이상의 물줄기들은 을유감계의 「감명도문강계지도」에 그려진 것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소홍단묘(小紅丹廟)’가 홍토산수와 홍단수가 합류하는 곳의 홍단수 북쪽에 표기되어 있고, 집모양의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을유감계 지도에서는 글자만 표기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의 백성들이 홍단수 북쪽의 소홍단 및 장파에 이미 오래 전부터 거주해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조선측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둘째, 을유감계 지도와 달리 홍토산수가 홍단수보다 약간 길게 그려져 있다. 홍토산수가 홍단수보다 5리 130보 더 길다는 실지조사 측정치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측정치에 따르면 이것은 오류이다. 실제로는 홍단수가 홍토산수보다 더 길다.

셋째, 석을수(石乙水)라는 물줄기가 새로 그려졌다. 석을수는 ‘도랑수’의 한국식 한자표기 ‘돌앙수(乭央水)’를 새로로 쓴 ‘石乙央水’를 중국측이 ‘石乙水’로 부르면서 고착된 지명이다.32) 실지조사 측정치를 열거하면서 조사자들은 석을수가 홍단수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홍토산수가 홍단수와 합류하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석을수가 홍토산수의 지류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당시 실지조사 측정치에 의하면 석을수가 홍토산수보다 6리 35보 길며, 이러한 점이 지도에도 반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측정치에 따르면 이 측정치와 지도는 오류이다. 실제로는 홍단수가 석을수보다 길다.

넷째, 정계비로부터 이어지고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라는 물줄기 표시 동남안에 석퇴와 토퇴가 각각 회색과 붉은 색 점들로 표시되어 있다(을유감계 지도에서는 ‘石堆’와 ‘土堆’라는 글자만 표시되었다). 이는 조선측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중하는 을유감계로부터 정해감계에 이르기까지 계속 임진정계시 설치된 정계비와 석퇴, 토퇴를 강조했다. 특히 정해감계에서는 임진정계 경계표지물로부터 홍토산수로 이어지는 지표수 혹은 복류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33) 그래서 그는 「윤4월 25일자 중국 관원에게 보낸 조회」에서 “지도를 그릴 때 토퇴의 종점으로부터 홍토산수 사이에 언덕이 없게 그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섯째, ‘동붕(董棚)’이라는 글자와 더불어 집모양의 그림이 그려졌다. 이는 을유감계지도에서 ‘동유와붕(董維窩棚)’으로 기록된 동(董)씨 성을 가진 중국 사람의 엽막이다. 백두산에 분포하는 다른 엽막들, 예로 무봉(무두봉: 수봉) 엽막이나 신무충(신무성) 엽막이 그려지지 않은 데 비해, 이 지도에서 특별히 이 엽막을 집 모양까지 그려 표시한 것은 그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 때문이다. 동붕수(董棚水, 또는 동유와붕수)라 불리는 이 물줄기는 황화송구자와 홍토산수 사이를 흐른다. 이중하가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황화송구자로부터 홍토산수로 이어지는 지표수 또는 복류 물줄기”가 없다는 증거로 청측은 이 물줄기의 존재를 들었다. 다시 말해서 임진정계 경계표지물들과 홍토산수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청측은 이 물줄기를 내세웠다. 따라서 ‘동붕’과 집 표시는 청측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여섯째,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4개의 물줄기가 그려져 있다. 위로부터 각각 정계비, 소백산-석을수, 허항령-홍단수, 학항령-서두수에 대응하는 물줄기를 개념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2) 정해감계에서 양측이 주장한 국경

정해감계지도에는 두 장의 붉은 색 종이가 덧붙여져 있다. 위쪽의 것에는 “조선측 파견 인원은 이 물로써 정계하고자 한다(朝鮮派員要此水定界)”, 아래의 것에는 “길림측 파견 인원은 이 물로써 정계하고자 한다(吉林派員要此水定界)”라고 쓰여 있다. 전자는 홍토산수를, 후자는 석을수를 가리키고 있다.

지도의 좌측 하단에 ‘중국’과 ‘조선’ 감계 대표들의 명단이 있는데, 여기서는 ‘길림’파원과 ‘조선’파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감계 문제에 있어서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지닌 이중성을 보여준다. 감계에 있어서 광서제와 중국은 심판자이자 당사자였다. 그럼에도 당사자로서 조선과 동등하게 ‘중국’이라 표시할 수는 없었다. ‘길림’파원이라 표시한 것은 그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측 이중하는 정해감계에서 일관되게 임진년(1712)에 설치된 정계비와 석퇴, 토퇴의 존재를 강조하였고, 을유감계 실지조사 과정에서 발견한 두만강 방향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흔적과 임진정계 기록들을 참고하여, 「정계비 - 황화송구자 토퇴의 종점 - 홍토산수(현재의 모수림하)」로 이어지는 지표수 물줄기 혹은 복류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을유감계 때 자신이 목격한 두만강 방향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을 언급하였지만, 동붕수 일대를 실지조사한 인원들은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임진정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자신이 목격한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흔적에 근거하여 국경을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한 국경은 「압록강 - 정계비 - 황화송구자 동남안의 토퇴 종점 - 홍토산수 발원지(오늘날 모수림하 발원지) - 두만강」이었다.34)

이중하가 주장한 국경은 임진년(1712)에 조선측 실무자들이 설치한 경계표지물의 분포와 거의 일치한다.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종점을 이중하가 모수림하 발원지로 보았던 반면, 실제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종점은 1964년 「조・중 변계 의정서」에 ‘홍토수’로 표시되는 하천(북한지형도에서 ‘안심수’로 표시되고, 북한지리학자들이 백두총서에서 ‘신무성수’로 부른 하천)의 하류 마지막 용출처라는 점만 다르다(이강원, 2017).

청측은 정해감계 시작부터, 그리고 실지조사가 끝나고 이루어진 신무충(신무성) 회담에서조차도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 - 삼급포(삼지연) - 홍단수 - 두만강」을 국경으로 계속 주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이중하의 반론 역시 계속되었다. 실지조사가 끝난 직후인 윤4월 16일에 있은 신무충(신무성) 제1차 회담에서 양측은 홍단수와 홍토산수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날의 상황에 대해 이중하는 홍단수로 정할 것을 겁박하는 청측 대표들에게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나라의 땅은 줄일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나라의 옛 기록(임진정계 기록)이 있는데, 어찌 이렇게 압박하십니까?”35)라고 소리 질렀다고 쓰고 있다. 반면 청측은 “(정계비・석퇴・토퇴・홍토산수가 국경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설득하여) 이중하가 마음으로 굴복하게 만들었다.”36)고 쓰고 있다.

그런데 청측은 5월 1일자 조회에서, 홍단수를 제외한 홍토산수와 석을수 조사결과만을 제시하면서 지리정보에 대한 조선측의 동의를 요청하였다.

본 국처(청측 진영)는 윤4월 13일 귀 부사(조선측 이중하)와 함께 장파에서 북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부교(浮橋)에서부터 측량하기 시작하여, 장산령을 지나 홍토수(홍토산수)와 석을수가 합류하는 곳에 이르렀는데, 측정치를 계산하니 물길의 길이는 88리 반이었습니다. 합류하는 두 물줄기(홍토수와 석을수)를 분별하여 자세히 측량하고 조사하였습니다. 홍토수를 조사하니 상류에는 두 개의 근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원지(圓地)에서 발원합니다. 이 물줄기는 합류처에서 구부러지면서 서북쪽으로 향하여 원지(圓地)에 이릅니다. 계산하니 (홍토수와 석을수 합류처로부터) 27리 230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홍토수 상류의 합류처로부터 서남쪽을 향하여 평평한 언덕의 물이 다하는 곳에 이릅니다. 계산하니 (원지수와의 합류처로부터) 11리 340보였습니다. 모두 동붕수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홍토수의 두 수원은 모두 정계비나 석퇴 토퇴로부터 거리가 매우 멀었으며,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또 석을수라는 한 물줄기를 조사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도랑물(도랑수)이라고 부릅니다. 이 물줄기는 소백산에서 발원합니다. 본 국처와 귀 부사가 감독하며 측량위원 등과 함께 흐름을 거슬러 조사해 갔습니다. 석을수 위쪽의 골이 시작되는 곳【삼급포(삼지연) 첫 번째 연못으로부터 18리 떨어져 있습니다】과 양쪽에서 석을수로 모여드는 물골과 짧은 흐름은 계산하지 않고 제외하였습니다. 홍토수와 석을수 합류처로부터 조사하기 시작하여 서남쪽을 향해 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향해 석을수의 물 흐름이 다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계산하니 41리 215보였습니다. 또 물 흐름이 다한 곳으로부터 하나의 골(溝)이 이어지는데 서남쪽을 향해 가며, 길이는 20리였습니다. 골의 넓이는 2~3장, 깊이는 5~6척으로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골은 황화송전(黃花松甸)과 이어지며, 이 전(甸)은 서쪽을 향해 있고, 길이가 5리였습니다. 이 전(甸)은 다시 하나의 골과 이어져 서북을 향하는데, 길이는 22리이며, 소백산 서쪽 가장 높은 봉우리의 동쪽 기슭에 이릅니다. 계산하니 골의 넓이는 4~5장에서 2~3장까지 일정하지 않았으며, 깊이는 1~2장으로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골의 양안은 모두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절벽이었습니다. 장파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조사한 석을수의 원류(源流)는 이와 같습니다. 아울러 소백산으로부터 물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서 다시 확인한 석을수의 상황 역시 이와 같습니다. 또한 소백산 서쪽에 있는 물줄기는 압록강으로 들어갔습니다. 귀 부사께서는 서로 들어맞는지 살펴보시고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37)

필자는 이러한 중국 측의 태도 변화는 실지조사 및 추가조사 과정에서 석을수가 가장 긴 물줄기로 확인된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 측은 서두수가 길다는 이유로 두만강의 원류라고 고집을 부린 일이 있고, 홍단수가 길다는 이유로 두만강의 원류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정해감계 실지조사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홍단수보다 조선 측이 주장하는 홍토산수가 더 길고, 나아가 새로이 발견된 석을수가 홍토산수보다도 긴 것으로 측정되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원칙, 즉 ‘가장 긴 물줄기가 원류’라는 원칙에 따르자면 석을수가 두만강의 원류가 되어야 했다. 여기까지는 청측 나름의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정해감계의 물줄기 길이 측정치들은 잘못된 것이었다.

청측이 조회에서 언급하고 있는 「석을수 발원지 - 물골(水溝) - 황화송전(黃花松水甸, 5리) - 골(溝, 22리) - 육로(15리) - 소백산정상」, 곧 석을수가 소백산 골짜기로 이어진다 것 역시 지리적 실제와 다르다. 석을수 발원지 위쪽으로 황화송전(黃花松甸)이라는 일종의 습지(甸子: 뎬쯔)가 존재한다는 것은 일제지형도(조선총독부, 1933)나 북한지형도(경인문화사, 1997)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에서 골(溝)이 소백산 정상 방향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일제지형도나 북한지형도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지형상 그렇게 존재할 수도 없다. 석을수 발원지 위쪽에 존재하는 골(溝)들은 모두 무두봉(무봉: 수봉)과 소연지봉 방향으로 발달되어 있다. 석을수 발원지와 소백산 사이에는 적어도 3개의 긴 언덕(岡)이 가로로 놓여 있으며, 특히 무두봉과 소연지봉 사이의 1,968미터 고지로부터 간삼봉에 이르는 긴 언덕은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다(그림 6, 그림 7). 따라서 석을수는 소백산 골짜기와 이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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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일제지형도의 백두산과 소백산 일대 골짜기 방향과 석을수
주: 석을수와 소백산 골짜기는 이어져 있지 않다. 바탕지도는 1/5만 지형도(조선총독부, 1933) 백두산 일대 도엽들을 합성한 것임.

https://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2-057-03/N013570301/images/geoa_57_03_01_F7.jpg
그림 7.

1980년대 초 북한지형도의 백두산과 소백산 일대 골짜기 방향과 석을수
주: 석을수와 소백산 골짜기는 이어져 있지 않다. 바탕지도는 1/5만 북한지형도(경인문화사, 1997) 백두산 일대 도엽들을 합성한 것임.

이는 북한 지리학자들의 기술에서도 확인된다. 그들에 따르면, “석을수는 무두봉 남동 1,724m 봉우리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동 방향으로 흐르다가 간삼봉 계선에서 동쪽으로 흘러 삼지연군 무봉구에서 두만강에 흘러들며, 정상유출 구간 길이는 17.0㎞이다(백두산총서편찬위원회, 1992b, 271).”

조선측은 5월 1일자 청측의 조회와 관련하여, 조회문 중에 나오는 ‘황화송전(黃花松甸)’에 대해 처음 듣는 지명이라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문의하였다. 이에 청측 측량위원 유우경이 조선측 지창한에게 “언덕(岡)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라고 답하였다. 청측은 다시 유우경의 답변을 정정하는 문서를 곧바로 다음과 같이 보낸다.

방금 귀 조회에서 황화송전의 뜻에 대해 물으셨는데, 황화송전은 결코 언덕(岡)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곳에 있는 나무가 모두 황화송(낙엽송) 나무인데, 언덕(岡)도 아니고 산(嶺)도 아니며, 마치 평평한 비탈 같은 곳으로, 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진흙이 항상 물에 젖어 있어 지나가다 보면 불시에 진흙에 발이 빠지기도 하여, 이와 같은 곳들을 통칭 황화송전(黃花松甸)이라고 합니다. 석을수 상류의 물줄기가 다하는 곳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골(溝)을 따라 올라가면서 살펴보면 경사가 낮은 언덕과 같이 보이며, 소백산에서 골을 따라 내려오면서 살펴보면 또한 평평한 비탈 같기도 합니다. 그곳의 상황은 바로 습지(甸)에 해당되고, 또한 황송(낙엽송)이 있기에 황화송전(黃花松甸)이라고 부르니, 이렇게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중하는 5월 11일자로 청측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하였다.38)

석을수의 물이 다하는 곳은 유우경과 지창한 두 위원이 동시에 조사할 때 평평한 언덕(岡)이 소백산 동남쪽 기슭에 대하여 가로로 끼워져 있다는 것을 붓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 저희에게 보낸 조회에서 갑자기 황화송전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이 네 글자의 지명은 우리 쪽에서 알지 못하는 바여서 지창한 위원으로 하여금 묻게 하였는데, 유우경 위원이 ‘언덕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였기에, 그대로 답장 조회를 보냈던 것입니다. 오늘 귀 조회에서 다시 곧바로 말하기를 ‘골(溝)과 습지(甸)가 이어져 있다’고 하시니 분명해지는 바입니다.

이중하의 답장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첫째, 조선측 지창한과 청측 유우경이 석을수의 물이 다하는 곳(발원처)을 조사한 일이 있다. 둘째, 석을수 발원지 근처에는 골(溝)이 있고, 다시 그에 이어지는 습지(甸)가 있다. 셋째, 석을수 발원지 근처에서 소백산을 향해 바라볼 때 가로로 놓인 평평한 언덕이 있다(“以平岡橫揷對小白山東南麓”). 이 세 번째 사항은 중요하다. 소백산 골짜기가 석을수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청측은 5월 1일 조회에서 석을수 발원지 위쪽 물골(水溝)로부터 「황화송전(5리) - 골(溝, 22리) - 육로(15리) - 소백산 정상」이어진다고 기록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골(溝)을 따라 올라가면서 살펴보면 경사가 낮은 언덕과 같이 보이며, 소백산에서 골을 따라 내려오면서 살펴보면 또한 평평한 비탈 같기도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 구간 조사에는 이중하 내지 지창한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구간은 정해감계지도(그림 4, 그림 5)에 표시되지 않았다.

청측의 입장에서는 석을수가 가장 길기 때문에 두만강의 원류로 확정되어야 하는데, 그 물줄기가 무두봉과 소연지봉 방향, 즉 백두산으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장백산이라는 청나라 조상의 발상지에 거리낌”39)이 된다. 따라서 석을수 물줄기가 소백산 골짜기와 이어지는 것으로 지리적 실제를 왜곡한 것이다. 을유감계 및 정해감계 지도에서 소백산이 백두산(장백산)과 구별되는 산체로 그려져 있듯이, 소백산에 국경이 설정되는 것은 “장백산 발상지에 거리낌”이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중하와 청측 감계관들은 석을수 일대 실지조사 때 석을수 물줄기 끝까지만 갔고, 이때 청측 유우경과 조선측 지창한이 측량위원으로 물줄기 길이 측정치와 지세를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석을수가 두만강 상류의 가장 긴 물줄기이고,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및 도랑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청측은 단독으로(혹은 그다지 지위가 높지 않은 조선측 인원을 대동하고), 황화송전에서 소백산 정상에 이르는 구간을 조사하고, 그 구간의 측정치와 지세의 상황을 조선측에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석을수가 두만강 상류 물줄기 중 가장 길다는 것은 측정 오류이고, 석을수가 소백산 골짜기와 이어진다는 것도 지리적 실제와 다르다.

유우경이 황화송전에 대해 처음에 “언덕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라고 답한 것도 의문이다. 언덕(岡)과 습지(甸)을 구분하지 못할 리 없기 때문이다. 유우경은 「지창한 당신과 나는 석을수 물줄기가 다하는 곳까지 조사했습니다. 거기서 소백산 방향으로 바라봤을 때 가로지르는 언덕(岡) 밖에 더 보이던가요? 황화송전은 그것을 통칭하는 겁니다.」라고 답한 것과 같다. 이에 대해 청측이 곧바로 정정 답신을 한 것으로 보아, 황화송전에서 소백산 정상에 이르는 구간을 조사하고, 석을수를 그에 연결 지은 것은 유우경이 아닌 청측의 다른 인원으로 보인다.

이후 십자계비를 설치할 위치까지 보고한 것으로 보아,40) 이러한 작업은 길림장군이 파견한 방랑이 직접 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을수가 소백산 골짜기에 이어진다고 자신들이 왜곡한 지리정보에 대해 조선측의 동의를 얻어내고자 5월 1일 조회를 보낸 것이다. 실제로 5월 16일 자신을 방문한 이중하에게 방랑은 “석을수로 경계를 정하면 (조선백성들이 이미 거주하고 있는) 장파도 잃지 않을 것인데, 부사께서 한결같이 (홍토산수를) 고집하시니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41)라고 하였다. 비록 구두였지만, 청측이 석을수를 국경으로 주장한 최초의 입장 표명이었다. 그러나 홍토산수를 주장하고 있던 이중하는 석을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국 측이 정해감계 결렬시 주장한 국경은 「압록강 - 소백수(小白水) - 소백수 상류 우측 지류 - 소백산 정상 - 석을수 - 두만강」이었다(그림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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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정해감계(1887) 결렬시 조선과 청의 국경주장

필자가 청측 국경주장의 압록강의 지류로 ‘소백수와 소백수 상류 우측 지류’를 지목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해감계지도(그림 4)에서 압록강의 지류로 그려진 4개의 물줄기 중 위에서 세 번째 물줄기는 ‘두만강 - 홍단수’에 대응하는 압록강의 지류 이명수(이면수)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므로, 위에서 두 번째 물줄기는 이명수 북쪽에 있으면서 이명수에 속하지 않는 물줄기일 것이다. 둘째, 실지조사에서 측정되기를, “소백산 정상은 서쪽으로 압록강 물줄기와 육로로 42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현대지도에서 압록강은 소백산 정상으로부터 정서 방향으로는 대략 7~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 지역의 압록강 물줄기는 깊은 U자형 협곡(백두산총서편찬위원회, 1992b, 252)을 이루기 때문에 육로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 물줄기 주변의 능선을 따라 42리 정도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물줄기는 「압록강 합류점 - 소백수 - 소백수 상류 우측 지류 - 소백산 정상 부근」으로 이어지는 물줄기이다.

정해감계에서 청측의 국경주장은 “화하금탕고하산대려장(華夏金湯固河山帶礪長)”이라는 10개의 글자를 각각 하나씩 새긴 비석들(十字界碑)을 소백산 정상으로부터 석을수와 두만강을 따라 박하천 합류처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설치하려는 계획으로 구체화 된다. 그러나 십자계비는 설치되지 않았다. 설사 설치되었다 해도 조선측의 동의가 없었으므로 효력이 없다.

중국 측의 이러한 국경주장은 자신들이 천명한 감계의 목적, 즉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하는 것’과 ‘도문강(두만강) 지도를 작성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목표 중 첫 번째 목표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중국 측의 주장대로라면 석을수는 ‘소백산의 두만강 수원’이 되기 때문이다.

4. 결론

이상에서 을유감계와 정해감계에서 진행된 두만강 수계조사와 조선과 청 양측의 국경주장에 대해 검토하였다. 1880년대 초 조선의 두만강 월경변민들은 「압록강 - 정계비 - 토문강 - 분계강 - 두만강 - 동해」로 이어지는 하천이 있으며, 그 하천이 조선과 청의 국경이라고 상상하였다. 이는 조선과 청 양쪽에 세금을 내야 할 상황에서, 기왕이면 조선에 세금을 내려는 의도와 맞물린 지리적 상상이었다. 이러한 상상의 지리는 임진정계(1712)의 오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을유감계(1885)를 통하여 월경변민들의 주장은 허구라는 것이 드러났고, 조선측 감계사 이중하는 간도영유권은커녕 임진정계의 결과를 방어해야 하는 수세적인 처지에 몰렸다. 그는 정계비와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이 왜 그곳에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수준에서 청측의 주장에 대응했다. 을유감계에서 청측은 「압록강 - 이명수 - 허항령 - 삼급포(삼지연) - 홍단수 - 두만강」을 국경으로 주장하였다. 그들의 논리는 가장 긴 물줄기가 본류(정원)라는 것이었다. 을유감계에서는 홍단수가 홍토산수보다 더 길게 측정되었고, 「감명도문감계지도」에도 그렇게 그려졌다. 그러나 홍단수 발원지는 백두산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한다는, 청측이 천명한 감계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해감계(1887)에서는 석을수라는 새로운 물줄기가 발견되었고, 홍단수, 홍토산수, 석을수의 물줄기 길이와 윤곽이 다시 조사되었다. 그 결과 “석을수 > 홍토산수 > 홍단수” 순으로 물줄기 길이가 긴 것으로 측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오류였다. 실제 물줄기의 길이는 “홍단수 > 석을수 > 홍토산수” 순이다.

한편, 석을수는 백두산의 무두봉과 소연지봉 방향에서 내려오는 계절적 지표수 내지 복류와 관련된 것이지 소백산과는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청측은 물줄기나 골짜기를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축축한 ‘전자(甸子: 뎬쯔)’를 통해 석을수가 소백산 골짜기에 연결되어 있다고 지리적 사실을 왜곡하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청측이 측량과 지도제작을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청측은 가장 긴 물줄기가 본류(정원)라는 사고에 입각했다. 그들은 가장 긴 것으로 측정된 석을수가 발원지 윗쪽에서 백두산 방향으로 연결되자, 소백산 골짜기와 이어진 것으로 지리적 실제를 왜곡시켰다. 장백산(백두산)을 청조의 발상지라 여기고, 조선과 공유할 수 없는 배타적 영역으로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청측은 「압록강 - 소백수 - 소백수 상류 우측 지류 - 소백산 정상 - 석을수 - 두만강」을 국경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자신들의 당초 감계목적인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한다는 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중하는 조선과 청의 국경은 1712년 임진정계의 경계설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중하는 황화송구자(이깔이개) 동남안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토퇴) 종점 부근으로부터 홍토산수 방향으로 흐르는 지표수 혹은 복류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그러한 지표수 흐름이나 복류를 따라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이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지표수 흐름이나 복류는 없다. 이중하는 임진정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자신이 발견한 두만강 방향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흔적에 근거하여, 「압록강 - 정계비 - 황화송구자 동남안의 토퇴 종점 - 홍토산수 발원지(오늘날 모수림하 발원지) - 두만강」을 국경으로 주장하였다.

을유감계와 정해감계에서 개진된 조선측 대표 이중하의 주장은 조선 내부에서 그다지 공유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감계 결렬 이후 간도협약(1909)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간도영유권(間島領有權)’에 관련된 강렬한 지리적 상상이 널리 확산되었다. 두 차례의 감계에서 청측의 주도로 획득된 두만강 상류 물줄기 길이 측정치들은 국경획정을 위한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오류가 있는 것이었으며, 지리적 실제에 대한 왜곡도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오류와 왜곡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정계비 ‘이비설(移碑說)’이라는 또 다른 지리적 상상이 널리 확산되었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서울대학교 창의선도 신진연구자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결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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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논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7] 2) 경진개척에 대해서는 김형종(2018, 38-92)에 의해 자세하게 연구되었다.

[8] 3) 이것은 조선과 청 양쪽에 세금을 내야 할 상황에서, 기왕이면 조선에 세금을 내려는 의도와 맞물린 지리적 상상이었다. 세금의 이중납부 문제에 대해서는 김형종(2018, 152-153; 477)을 참조.

[9] 4) 김우식은 변경백성들의 논리를 확증하지 못했으며, ‘토문강’이 ‘분계강’으로 흘러드는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이강원, 2021).

[10] 5)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형종 편역(2014)김형종(2018)을 참조할 수 있다.

[11] 6) 삼강구(三江口) 또는 강구(江口)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양강도 대홍단군 삼장노동자구의 두만강변에 위치한다. 대안에 중국 숭선진(崇善鎭) 고성리(古城里)가 있다. 일대에서 두만강, 서두수(西頭水; 西豆水), 홍기하(紅旗河)가 합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2] 7) 광서 11년(1885) 10월 3일. 덕옥 등이 혼춘부도통에게 보낸 문서. “그래서 저희들은 26일에 출발하여 28일에 회령부에 모두 모여서 이중하와 만나 수일 동안 필담을 나누었습니다.…오늘 함께 출발하여 회령에서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장백산의 도문강 발원에 이르기까지의 산수를 측량하고 함께 상세하게 조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조사가 끝난 다음 따로 지도와 설명서를 갖추어 보고하겠지만…(김형종 편역, 2014, 453-454).”

[13] 8) ‘장백산(백두산)의 두만강 수원을 조사하는 것’과 ‘두만강의 지도를 제작하는 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긴 물줄기를 본류(本流) 내지 정원(正源)으로 간주한다는 입장에 선다면, 가장 긴 물줄기가 장백산(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을 경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청측은 이러한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14] 9) 조회 내용은 『감계사등록(상)』(88-94; 이왕무 등 역주, 2008, 200-209; 김형종 편역, 2014, 461-466)에 수록되어 있다.

[15] 10) 북한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서두수의 발원지로부터 두만강 합류처(삼강구)까지 물줄기의 길이는 173.1㎞이다(백두산총서편찬위원회, 1992a, 271-273).

[16] 11) 북한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홍단수의 발원지로부터 두만강 합류처(소홍단)까지 물줄기의 길이는 76.5㎞이다(백두산총서편찬위원회, 1992a, 271-273).

[17] 12) 이에 대해서는 이중하의 「백두산일기」(이왕무 등 역주, 2008, 223-245)와 을유감계에 참여한 김우식의 기록을 참조할 수 있다. 김우식은 정계비 팀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정계비 팀 수행원의 말을 듣고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백두산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라는 이름으로 『백두산 고전작품선집』(리성 옮김, 2004)에 실려 있다.

[18] 13) 이중하는 그의 「백두산일기」에서 오늘날 ‘원지(圓池)’라고 불리는 연못을 그냥 ‘하나의 연못(一池)’으로 쓰고 있는데, 11월 8일자 「청국 관원의 조회」에서는 ‘원지(圓地: 둥근 땅)’로 표시되어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감계사등록(상)』, 91쪽). 이것은 단순한 오자가 아니며, 당시에 눈이 오고 물이 얼어있었으므로, 지금의 원지가 하얗게 눈이 덮여 둥그런 나지의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당시 원지 수면의 크기는 오늘날보다 훨씬 작았을 것이다.

[19] 14) 이후 이 물줄기는 ‘홍토산수’ 또는 ‘홍토수’라 불리게 된다.

[20] 15) 長白山志編纂委員會(1987, 146)에 제시된 수치에 근거하였다.

[21] 16) 吉林省革命委員會 外事辦公室(1974, 25). 북한지리학자들이 이 하천에 대해 ‘홍토수’라 부르지 않고 ‘신무성수’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부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사용했을 일제지형도(조선총독부, 1933)에 약류하가 ‘홍토수’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두산총서편찬위원회(1992a, 240)에서는 “두만강은 적봉 부근의 중국 홍토수 합류점부터 시작되며, 본류는 대연지봉의 남사면에서 무두봉-신무성을 거쳐 흐르는 신무성수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중국 홍토수’는 약류하를 말한다. 일제지형도는 오늘날의 약류하를 ‘홍토수’로, 오늘날의 홍토수를 ‘석을수’로 표기하고 있다.

[22] 17) 시노다 지사쿠는 이중하가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흔적이 숲속에서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 것은 신빙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당시 수행원이었던 지창한(池昌翰)이 한 말에 의하면, 당시 수행원 중 어느 한 사람도 이것을 본 사람이 없으며 또 하등 화제에 오른 일이 없다고 한다.”고 썼다(신영길 옮김, 2005, 133-134;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2013, 172-174). 이중하가 고종에게 은밀하게 보고할 일을 수행원에게 발설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23] 18) 在淸公使館發 明治四十年十二月三十一日 附機密第一五ㅇ号 附屬地圖 二枚內一.

[24] 19) 西頭水經流 據土人云 發源吉州北界之鶴項嶺 北至江口 約四百餘里 與紅丹水合流 其鶴項嶺 距長白山立碑處 約四五百里 華人統名黃沙嶺 嶺西南之水 歸均鴨綠江 東北之水 自小白山以南 均歸圖們江.

[25] 20) 『감계사등록(상)』, 126-130; 이왕무 등 역주, 2008, 260- 267.

[26] 21) 당시 청측에는 임진정계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조선은 을유감계 후인 1886년 1월 14일 청에 관련 자료를 보내게 되며, 1887년 4월 20일 청측 감계 실무진에게도 전달된다(김형종 편역, 2014, 516-528; 김형종, 2018, 274- 279).

[27] 22) 琿春招墾局總辦委員呈文(광서 11년 12월 16일; 김형종 편역, 2014, 504-505)은 진영・덕옥・가원계의 감계결과 보고에 대한 길림장군의 지시를 담고 있다. 그에 “해당 위원들은 (정계비) 비석을 세운 곳은 응당 삼급포(삼지연) 일단의 분수령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공평한 말인 것 같다.”는 내용이 있다. 청측 위원들었던 진영・덕옥・가원계는 이중하의 국경주장에 대해 조선측이 정계비를 옮겼다는 이비설(移碑說)로 대응한 것 같다. 이는 11월 27일에 있은 회담에 대한 이중하의 기록(이왕무 등 역주, 2008, 122- 123)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28] 23) 전 무산군수 지창한이 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한 진술에 의하면, 덕옥은 아편쟁이였다(동북아역사재단 엮음, 2013, 173). 김우식의 기록에 의하면, 가원계는 신무충(신무성)에서 진영과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리성 옮김, 2004, 228- 229).

[30] 25) 4월 15일 「중국관원(진영)의 조회」와 「중국관원에 대한 (이중하의) 답장」(김형종 편역, 2014, 744-745).

[31] 26) 이러한 점은 『감계사등록(하)』 5월 1일자 조회와 답장들을 통해 알 수 있다.

[32] 27) 대표적인 것으로 5월 11일자 이중하의 답장에는 마지막 부분에 “석을수의 길이는 유우경・지창한 두 위원이 함께 기록한 것으로, 감계한 곳에서 물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55리 반 15보이며, 장백산 정상에서 13리에 비석…”이라 쓰여 있는데, 여기서 ‘석을수’라 쓴 것은 오류이다. 이 부분은 임진정계 마지막 토퇴로부터 정계비가 있는 발원처까지의 거리를 말하고 있다. 즉, 비퇴(碑堆) 분포길이가 55리 반 15보, 즉 55리 195보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명을 쓴다면, 3‘석을수’ 대신 ‘황화송구자’ 또는 ‘석퇴, 토퇴’라고 써야 옳을 것이다.

[33] 28) 『朝鮮隣邊勘界文略』은 楊昭全・孫玉梅(1994)의 『中朝邊界沿革及界務交涉史料匯編』pp. 1119-1137에 수록되어 있다. 그중 「照錄吉林將軍來文內淸折」(광서 13년(1887) 6월 1일)은 pp. 1135-1137에 실려 있다.

[34] 29) 이 논문의 이하에서는 교정된 측정치로 계산한다.

[35] 30) 현대의 측정치는 다음과 같다. 삼하강구에서 서두수 발원지까지 173.1㎞, 삼하강구에서 소홍단까지 17.2㎞, 소홍단에서 홍단수 발원지까지 76.5㎞, 소홍단에서 석을수・홍토수 합류처까지 45.5㎞, 석을수・홍토수 합류처로부터 석을수 발원지까지 17.0㎞, 석을수・홍토수 합류처로부터 홍토수・약류하 합류처까지 7.8㎞, 홍토수・약류하 합류처로부터 홍토수・모수림하 합류처까지 2.6㎞, 홍토수・모수림하 합류처로부터 모수림하 발원지까지 3.0㎞(장백산지편찬위원회, 1987, 146; 백두총서편찬위원회, 1992a, 271-273). 동일한 구간에 대한 정해감계에서의 측정치는 다음과 같다. 삼하강구에서 서두수 발원지까지 대략 400여리, 삼하강구에서 소홍단까지 36리 314보, 소홍단에서 홍단수 발원지까지 142리 160보, 소홍단에서 석을수・홍토수 합류처까지 112리 110보, 석을수・홍토수 합류처로부터 석을수 발원지까지 41리 215보, 석을수・홍토수 합류처로부터 홍토산수 발원지(모수림하 발원지)까지 35리 180보. 실제와 달리 석을수와 홍토산수의 길이가 홍단수보다 길게 측정된 것은 주로 소홍단으로부터 석을수・홍토수 합류점까지의 길이가 실제보다 과대 측정되었기 때문이다.

[36] 31) 현재까지 필자가 확인한 정해감계지도는 3종이다.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일본외무성외교사료관 소장본(분류번호: 1.4.1.33), 양자오취안・쑨위메이의 영인본(楊昭全・孫玉梅, 1993, 338-339 사이에 삽입된 지도)이 그것이다. 규장각 소장본은 이중하가 고종에게 올린 5월 28일자 장계의 말미에서 언급한 지도이고, 일본외무성 소장본은 1907년 북경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입수한 지도로 을유감계 지도와 함께 당시 기밀로 분류되었다. 이 세 지도는 차이점들이 있다. 양자오취안・쑨위메이의 영인본은 축척과 방위가 하단에 표시되어 있다. 각각의 지도에 쓰인 글자의 위치가 3종 모두 서로 약간씩 다르다. 따라서 정해감계에서 최소 3장의 지도가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37] 32) 이에 대해서는 Song(2018, 78-79; 이지영・이원준 옮김, 2022, 125; 429) 참조. 경우에 따라서는 ‘島浪水’(도랑물)라고도 표기된다(감계사등록(하) 5월 1일 장파에서 중국관원이 보낸 조회(김형종 편역, 2014, 763)). 훗날 유건봉은 『長白山江岡志略』에서 ‘대랑하(大浪河)’ 및 ‘석일하(石逸河)’로 표기하였다.

[38] 33) 『감계사등록(하)』 윤4월 16일~5월 19일 기록들 참조.

[39] 34) 여기서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는 조선의 월경변민들이 ‘토문강(土門江)’으로 부른 하천이며, 이깔이개(낙엽송 개울)라고도 불렸다.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토퇴의 종점 부근에서 위쪽으로는 낙엽송, 아래쪽으로는 삼나무가 우세하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삼포(삼나무 개울)라고도 불렸다. 오늘날 중국에서 흑석구(黑石溝)라고 부르는 하천이다. 홍토산수는 을유감계에서 만들어진 지명으로 홍토수라고도 불렸으며, 『감계사등록(하)』의 5월 13~19일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오늘날 모수림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인된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조약에서 보이는 ‘홍토수’는 그 이름이 을유감계의 홍토산수(홍토수)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쪽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이 하천에 중국 쪽에서 발원하는 모수림하가 유입된다는 점에서, 정해감계에서 언급되고 있는 홍토산수 내지 홍토수와는 주의 깊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42] 37) 1887년 5월 1일자 청국 관원의 조회(『감계사등록(하)』, 93-95). 이왕무 등 역주(2010, 190-192)와 김형종 편역(2014, 763-764)의 번역을 참조하여 다시 번역함.

[44] 39) 중국 측이 이런 태도를 회담 과정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1887년 7월 4일 원세개가 조선에 보낸 조회문에는 “장백산은 우리 조정의 발상지이므로 홍토산으로써 경계를 나눌 수 없습니다.…석을수는…이곳을 경계로 할 경우 백산 발상지의 근본에 손해가 되지 않을뿐더러…조선은 석을수 천연 계한을 버리고 물의 흐름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 홍토산으로써 경계를 나누고자 하는데 이는 조선에서 이익을 얻지 못할뿐더러 우리 조정의 백산 발상지에도 불리해집니다.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라는 중국 측 감계 대표 방랑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이화자, 2009, 254). 광서 15년(1889) 12월 24일자 照錄軍機處交 長順等抄摺, 附片, 禮部來文(김형종 편역, 2014, 1031)에도 “장백산 발상 중지에 거리낌이 되기 때문에 홍토수로 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45] 40) “길림과 조선의 경계비를 세우고자 하는 곳을 덧붙입니다: 화(華)자 비를 소백산 정상에 세운다. 하(夏)자 비를 소백산 동록 도랑의 입구, 화자 비로부터 15리 지점에 세운다. 금(金)자 비를 황화송전자와 도랑과 접하는 곳, 하자 비로부터 22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 탕(湯)자 비를 황화송전자가 끝나고 물도랑이 시작되는 곳, 금자 비로부터 5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 고(固)자 비를 석을수 수원이 나오는 곳, 탕자 비로부터 12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 하(河)자 비를 석을수와 홍토수가 합치는 곳, 고자 비로부터 41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 산(山)자 비를 장파 다리 남안, 하자 비로부터 88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 대(帶)자 비를 석을수와 홍단수가 합치는 곳, 산자 비로부터 23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 여(礪)자 비를 삼강구의 두만강과 서두수가 합치는 곳, 대자 비로부터 36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 장(長)자 비를 두만강과 박하천이 합치는 곳, 여자 비로부터 31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 이상 경계비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모두 10좌이다…. ” 『朝鮮隣邊勘界文略』「照錄吉林將軍來文內淸折」(光緖 13年(1887) 6月 1日); 楊昭全・孫玉梅, 1994, 135-1137.

[46] 41) 『감계사등록(하)』, 「5월 16일 회령에서 중국 관원 방랑을 찾아가 만남」(김형종 편역, 2014, 771).

[47] 42) 정해감계 이후 중국의 지도들은 자신들의 국경주장을 「압록강-이명수-삼지연-석을수-두만강」으로 그리기도 하고, 「압록강-이명수-삼지연-홍단수-두만강」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모두 잘못 그린 것이다. 청측의 국경주장은 십자계비 설치계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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