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2. 해방 이전 근대적 자연관의 형성과 ‘자연’의 선별
1) 자연의 과학화와 산맥 체제 정립
2) 자연 경관의 심미화 및 위계화
3. 과도정부기 국토구명사업과 실효적 영토의 재구성
1) 민족주의적 자연탐험과 과학 실천의 결합
2) 분단 이후 국가 상징경관의 재구성
4. 1960-70년대 한국의 보호구역 형성과 생태외교
1) 자연보호 목적의 ‘천연보호구역=국립공원’ 개념 도입
2) 냉전기 생태외교와 국립공원 공간 구상
5. 개발주의 국가에서의 국립공원 공간 구성 전략
1) 관광지 개발과 공간의 중층적 구조화
2) 국토 개발 과정에서의 국토자연의 균일화와 위계화
6. 나가며
1. 들어가며
2020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가거도의 명승 지정을 통해 우리 영해를 지키는 상징적인 4개의 ‘끝섬’1)들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됨으로써 적극적으로 보존・활용되고, 우리 국토에 대해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발표하였다.2) 이는 근대 국민국가가 자연과 경관을 제도화하고 국가를 상징하는 경관으로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자연이 명승・천연기념물3), 국립공원 등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국가 차원에서 재정립하는 동시에, 자연을 국가 통치 영역에 편입시키는 방식이다(Daniels, 1993, 5; Whitehead et al., 2007, 11).
자연을 국가의 자원으로 포섭하여 영토로서 상징화는 과정에는 자연을 근대적 언어로 조사하고 재정립하여 국가 통치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곳임을 합리화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즉, 특정 자연이 과학적 조사 대상으로 선별되어 조사가 수행되고, 이어서 경계가 설정되고 공간적 분할이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연은 국가의 영토이자 상징 경관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국가가 공간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영토화 전략의 일환이며, 곧 사회적 구성 과정이라 할 수 있다(Demeritt, 2001; Demeritt, 2002; Murphy, 2012; Castree and Braun, 1998; Scott, 1998).
자연을 통한 영토화 전략의 대표적 사례로서 ‘보호구역(Protected area)’ 설정을 들 수 있다. 현재 한국에는 연안과 육지 등에서 개발 압력과 보전 압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다양한 보호구역이 설정되어 있다.4) 이는 자연을 국가 자원으로 상징화하는 동시에, 상품화된 자연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이며, 새로운 인클로저 운동의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보호구역에서는 핵심구역, 완충지대, 전이구역 등의 ‘경계(boundaries)’ 설정이 필수적이다. 국가는 이러한 경계 설정과 이용 규제를 통해 자연의 통치와 이용을 구현한다(Zimmerer, 2000, 356-363).
본고는 국립공원이라는 보호구역의 형성과 전개를 다룸에 있어, 이론적 배경으로 ‘국가-자연(state-nature)’ 개념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국가는 근대국가, 즉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의미하며, 이는 단순히 국경을 가진 영토적 단위가 아니라, 국민공동체를 기반으로 국가정체성을 공유하는 시민들이 상상하는 정치공동체를 포함한다. 국가는 생물・경관・지형 등 생태학적 상징물 지정, 국립공원이나 자연보호구역과 같은 경관 지정, 그리고 생태적 언어와 담론 형성 등을 통해 자연을 구성하며, 이러한 자연의 사회적 구성 과정을 통해 국민의 정체성과 국가 유산에 대한 소속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Whitehead et al., 2007, 13; 20).
‘국가-자연’ 개념은 국가가 자연을 제도적・담론적・물질적으로 구성하여 헤게모니와 자본축적의 기반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틀이다. 이 과정에서 ‘틀 짓기’, ‘중앙집중화’, ‘영역화’라는 공간 전략이 동원되며, 자연은 국가 권력의 기획 아래 추상화되고 자산화된다. 이는 발전주의 국가의 권력 행사와 자본주의적 축적 논리를 연결짓는 이론적 장치를 제공한다(황진태, 2025).5)
그러나 본고는 ‘국가-자연’ 개념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심층적으로 전개하기보다는, 근대적 자연관의 실천이 국립공원이라는 제도와 공간 형성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시계열적이고 역사지리적인 분석을 통해 고찰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자연보호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성(modernity)의 산물이며, 이에 따라 국가가 자연보호구역을 설정하고 제도화하는 과정 또한 근대적 통치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Haila, 2012, 28).
자연의 근대적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 자연을 과학적 조사 및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인식하는 관점, 둘째, 자연을 개발 및 발전을 위한 자원으로 간주하는 관점, 셋째, 자연에 대한 환경주의적 시각과 심미적 시선의 출현 등이다(진종헌, 2016, 3). 한국의 근대적 자연관 형성과 이에 따른 보호구역 설정 과정에서, 국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 집단이 개입해 왔으며, 이들이 자연을 사회적으로 구성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은 지리학, 과학사, 환경사 등의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다.
해방 이후 자연보전운동은 전쟁과 전후를 아우르는 긴 흐름 속에서 산악 탐험과 보전 활동에서 비롯되었으며(Hyun, 2022), 나아가 한국 정부 수립 이후 근대적 자연보호운동은 냉전기 미국 생태외교의 본격화와 한반도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의 국립공원 구상 등과 연계되어 전개되었다(문만용, 2019; Hyun, 2021; Hyun, 2023; Moon, 2020). 한편으로, 이러한 미국의 생태외교와는 결이 다르게 1970년대 한국은 독자적인 자연보전운동을 전개해 나갔다(원주영・현재환, 2024). 이와 더불어 근대적 자연관과 보호구역으로서의 국립공원 제도 도입의 연계성은 식민지 시기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논의를 시작으로(김지영, 2021a), 해방 이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과정(김지영, 2024)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보호구역 지정과 제도 도입은 국민국가 설립과 결부되어 1960년대 중후반에 정착되었으나, 근대적 자연관의 발현과 그 보호구역의 공간적 전개 과정 및 그 의미에 대한 지리학적 연구는 아직 충분한 구체성을 띠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흐름 속에서 여러 사회 구성원들이 근대적 자연관을 실천해 나가는 공간적 측면을 살펴보는 과정은 근대 국민국가가 자연을 통한 영토를 재현하는 과정, 즉 자연을 통해 국민국가의 국토 공간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근대 국가 형성과 보호구역 지정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여러 주체 간의 여러 역학관계가 전개되는 가운데 ‘창출된 자연의 의미’와 그 의미의 영유를 둘러싼 ‘주체 간 갈등과 대립의 전개 과정’에 대한 논의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위에 언급한 세 가지 근대적 자연관이 복합적으로 발현되는 장으로서의 자연보호구역 설정 과정을 논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왜, 어떻게 자연은 국가의 공간으로 포섭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립공원 제도 도입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의미가 어떻게 생산되고 실질적으로 국가의 영토로 포섭되었는지 여러 문헌의 이미지나 텍스트를 등을 분석하여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조명한다.6)
1960년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지정되기 시작한 천연보호구역과 국립공원은 한국 보호구역의 역사적 시작이다. 보호구역 설정 과정에서, 한국산악회가 주관한 국토구명사업(國土究明事業)은 해방 이후 국토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과 함께 과학적 탐험을 강조한 사례로서 주목된다. 이 사업은 1945년 12월부터 ‘우리 손으로 국토의 산하를 조사하자’는 취지로 기획되었으며, 산악 경관을 중심으로 근대적 자연관의 실천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 학술 탐험에 참여한 학자들은 훗날 자연보호지역 설정에 있어서 해방 전후 정부 부처, 국가기관 및 전문가, 해외 단체(국제자연보전연맹(International Union of Conservation for Nature and Natural Resources, 이하 IUCN), 미국 스미소니언연구소(Smithsonian Institution) 등)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천연보호구역과 국립공원 논의를 전개해나갔다. 따라서 본 연구는 1945년 전후(前後)를 중심으로 살펴보되, 그 전사(前史)와의 관련성에도 주목하면서, 산을 대상으로 한 근대적 과학 조사와 심미적 관점 형성 과정, 자연을 환경 보호 대상으로 선정하는 과정, 그리고 개발주의적 시각과 제도 도입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 자연보호구역의 공간적 전개 과정과 그 의미를 추적한다.
2. 해방 이전 근대적 자연관의 형성과 ‘자연’의 선별
1) 자연의 과학화와 산맥 체제 정립
한반도에서 근대 과학의 잣대로 자연이 조사되고 자연 지식으로 구축되는 초반 움직임은 1880년대 조선의 광산 개발과 관련된 독일 학자의 지질 조사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1882년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초빙된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는 조선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광산 개발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1882년에서 1884년까지 일본 도쿄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독일인 지질학자 칼 크리스티안 곳체(Carl Christian Gottsche)에게 한반도 내륙의 지질 조사를 의뢰했다. 곳체는 1883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서 조선을 방문하였으며, 1884년에는 약 8개월 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한반도 암석을 종류와 지질시대에 따라 구분하는 조사를 수행하였다(최덕근 등, 2024).7)
곳체의 기록은 최초의 근대 지리학서로 평가된다. 이는 근대 지리학과 지질학의 훈련을 받은 야외과학자의 현지답사라는 점에서, 기존 선교사, 탐험가, 여행가들의 여행기 및 기록과 차원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조사는 이후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여러 산맥을 명명한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의 「조선 산맥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1903)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고토가 조사한 지질과 산맥에 대한 내용은 현재 기준으로 보면 오류가 많아 일부 유럽의 지질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식민지 시기 다양한 연구자들이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 광물 조사와 한반도 산지 체계를 분류하려는 지속적인 시도를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손일, 2016). 그리고 고토가 분류한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노령산맥, 낭림산맥, 마천령산맥, 적유산맥, 멸악산맥, 마식령산맥 등과 같은 산맥명칭과 랴오둥방향, 중국방향, 한국방향 등의 산맥분류 등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그림 1, 그림 2).8)
1880년대부터 진행된 지질 조사와 산맥 체계 정립은 결국 일본 제국이 한반도의 수직 공간을 ‘자질이 있는 영토’로 변환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Braun, 2000). 즉, 조선총독부의 지속적인 한반도의 지질 및 광상 조사는 광산업뿐 아니라 지하수 개발, 수력 발전, 도로 및 철도 건설을 위한 토목 지질 조사에서도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일제로서는 한반도 지형도 제작을 위한 측량 및 토지조사, 산림 조사 등과 함께 선행되거나 및 병행되어야 할 핵심 조사였다. 따라서 이 산맥 체계는 이후 일제의 영토 전략과 맞물려 한반도를 합리적으로 자원 중심의 공간으로 인식 및 활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지리학사적 맥락에서 독일 지리학자인 칼 리터(Carl Ritter)의 지리학은 미국인 제자 아놀드 기요(Arnold H. Guyot)를 거쳐, 다시 일본 메이지 시기 일본의 지문학자(地文學者)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 야즈 쇼에이(矢津昌永), 고토 분지로, 요코하마 마타지로(橫山又叉次郞), 야마가미 만지로(山上万次郎)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최남선(崔南善)과 김교신(金敎臣) 등의 지리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권정화, 1990).
식민지 시기 조선 지식인들의 산악 인식은 전통 자연관과 근대 지식 체계 사이의 전환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최남선은 1913년 『산경표』에서 전통 산줄기 체계를 민족주의적으로 정리하였으나, 1920년대부터는 전통적 산줄기 개념과 근대 지질학 개념을 혼용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마천령산맥, 낭림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 근대적 산맥 명칭과 지질학 용어를 활용해 한반도의 지형을 설명하였다(최남선, 1913; 최남선, 1947; 최남선, 1948).9)
이러한 근대 지식의 도입은 유교적 ‘천인합일’ 사상을 바탕으로 한 조선 시대 자연관의 해체를 동반하였다. 전통적으로 산은 국토의 중심축, 강은 생활과 경계의 구조로 인식되었으며, 자연은 풍수・음양오행 등의 관념을 통해 상징적 질서와 정치적 공간 구성의 기초로 작동하였다(김덕현, 2011; 양보경, 1994).
근대 산맥 체계는 이러한 자연 인식의 전환점으로 기능하며, 백두대간과 13정맥으로 구성된 전통 산지 체계를 해체하고, 서울과 백두대간의 상징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한반도의 영토를 동질화하였다. 이는 서구 과학과 전통 지식 사이의 이분법을 재생산하며, 풍수적 사고를 배제한 채 근대적 영토 개념과 민족 관념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Jin, 2009).10)
1880년대부터 진행된 과학적인 자연 조사와 이와 더불어 성립된 산맥 체계 형성과정, 즉, 산악 경관의 재구성 과정은 근대 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자연을 영토화 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을 마련하는 기제로서 기능하였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는 후술하고 있는데, 해방 이후 조선산악회(1945년 9월 창립, 1948년 한국산악회로 명칭 변경, 이하 한국산악회)의 국토구명사업은 산맥 체계와 국토의 영역성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례로서 주목된다.
2) 자연 경관의 심미화 및 위계화
자연에 대한 과학화 과정에서 근대 이전에 산악에 대한 신성한 감정은 점차 해체되었고, 자연은 심미적인 감상과 관광의 대상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192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지역 생태 관광을 장려하면서, 신문사・과학자・등산가 등이 참여한 산악 학술 탐험을 조직 및 후원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자연 자원 관리와 관광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그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적 순례와 과학적 조사를 수행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이러한 탐험들은 여러 주체들의 상업적 목적, 제국의 통치 전략, 민족주의적 의식 등이 결합되어 조선의 주요 산지인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 묘향산, 설악산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었다(Hyun, 2022, 84-88).
철도는 단순한 물질적 인프라를 넘어 제국의 공간 통합 수단이었다. 철도망은 제국의 군사적・정치적 지배를 물리적으로 확장하는 한편, 관광이라는 ‘시각적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 기반으로써 식민지의 영토성을 재현하였다. 철도 관광이라는 행위는 식민지의 지리적 표상의 통합 및 차등적 배분을 통해 이질적인 국외 공간의 영토 공간을 실질적으로 포섭하는 기능을 담당했다(김백영, 2014, 199; 204). 따라서 철도국, 신문사, 여행사 등은 관광안내서, 여행기, 사진엽서 등 시각 매체를 통해 ‘관광객의 시선(tourist gaze)’을 형성해 나갔는데, 여기에서 식민지 조선의 자연과 도시 등은 제국의 관광 자원으로서 재현되었다(김백영・조정우, 2014; 정치영, 2015).
이러한 흐름은 명승지 선정 사업으로 이어졌다. 1927년 경성일일신문사(京城日日新聞社)는 철도국의 후원 아래 조선팔경(朝鮮八景)을, 1935년 오사카매일신문사(大阪每日新聞社)는 시정(施政) 2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신팔경(朝鮮新八景)’을 선정하였다.
1927년 조선팔경은 독자들의 투표와 일제 심사위원의 근대적 풍경관이 반영된 결과였다. 즉, 전국 단위의 지리적 분류(산악, 호수, 온천 등)를 바탕으로 대규모 자연 경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다. 그 결과 금강산은 별좌(別座)로, 조선팔경으로는 장수산(황해), 속리산(충북), 주왕산(경북), 무등산 적벽(전남), 통군정(평북), 목단강(평남), 주을온천(함북), 부여(충남) 등이 선정되었다(홍영미, 2012, 12; 52-53).11) 1935년 진행된 조선신팔경 선정 이벤트는 독자들의 투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그림 3), 한라산(전남), 부전고원(함남), 지리산(경남), 속리산(충북), 내장산과 백양사(전북), 불국사(경북), 부여(충남), 한려수도(경남-전남) 등이 선정되었다. 일제는 조선신팔경을 선정한 이후, 9위부터 16위까지의 지역을 조선팔승으로 추가 선정하였다. 조선팔승은 동래 해운대, 해인사, 변산반도, 황해 몽금포, 묘향산, 평양 모란대, 평북 통군정, 주을온천 등이 포함되었다(동아일보 1992. 9. 22).
조선신팔경과 조선팔승이 선정된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조선관광지략도(朝鮮觀光地略圖)」(1936년경)를 엽서로 제작하였다. 여기에서 조선신팔경과 팔승을 시각적으로 배치하여 조선 영토의 자연 질서를 재현하였다(그림 4). 금강산은 조선신팔경 후보지로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그림 4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명승지 중 하나로서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조선신팔경 선정 이후, 금강산뿐만 아니라 지리산, 한라산도 국립공원 후보지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조선일보, 1937. 2. 12). 이에 따라 팔경/팔승은 지역적 풍경을, 국립공원은 국가적 풍경을 상징함으로써 자연 경관은 위계화되었으며, 이를 통해 자연 경관을 국가 표상으로 조직하는 체계가 구축되었다(荒山正彦, 1995, 8). 일본은 자국, 대만, 조선에 걸쳐 국립공원과 팔경 제도를 병행하며 제국적 영토를 자연을 통해 가시화하였다.12)
자연을 국가 자원으로 제도화하는 것은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제정을 통해 추진되었지만, 명승은 고적 또는 천연기념물과 병기되어 지정되었고, 단독 지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당시 명승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13) 1939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본격적으로 명승지 발굴을 위해 8도에서 명승지 조사 보고를 받았지만, 공식적으로 지정된 단독 명승은 없었다(정서율, 2023, 33-34; 김창규, 2013, 1214).14)
한편,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1931년 ‘조선국립공원령’을 제정하여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추진하였으나, 중일전쟁과 텅스텐 자원 채굴 등의 이유로 무산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는 1937년 금강산국립공원계획을 조정하여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에 근거한 ‘금강산탐승시설계획’으로 전환하였다. 금강산은 명승으로 공식 지정되진 않았지만, 탐승로와 도로 건설 등 일부 탐승시설계획은 현실화됨으로써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로서 기능하였다(김지영, 2021a; 김지영, 2021b).
식민지 시기 자연에 대한 심미적 시선과 제도적 논의는 뚜렷한 제도적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을 대표하는 경관을 선정하고 식민지 조선의 표상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35년 선정된 조선신팔경에 포함된 남한의 주요 명승들은 해방 이후 국립공원 후보지로 계승되었으며, 이를 통해 자연 경관에 대한 위계화와 공간 질서의 형성이 가능해지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한편, 1930년대 후반에는 ‘자연’을 국가 자원으로 포섭하여 관광지화하는 업무는 학무국(學務局)으로 통합되었고, 이러한 행정 체계는 해방 이후 문교부로 계승되며 유사한 성격을 유지하였다.
3. 과도정부기 국토구명사업과 실효적 영토의 재구성
1) 민족주의적 자연탐험과 과학 실천의 결합
1945년 12월부터 한국산악회15)는 해방 이후 분단된 국토의 ‘산하’를 우리 손으로 규명하자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국토구명사업(國土究明事業)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근대적 자연관이 본격적으로 발현되는 실천의 장이었으며, 전국의 지형지세, 동물, 식물, 광물 분포뿐만 아니라 농림, 지질, 방언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종합적 탐사였다. 조사 결과는 강연회와 전시회를 통해 대중에게 공유되었으며, 사회 각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표 1).
표 1.
한국산악회 국토구명사업 내용
한국산악회에서 진행한 국토구명사업이라는 학술 탐험은 산악인, 학자, 군인 등이 연합하여 진행되었는데, 이는 1935년 일본 교토제국대학의 백두산 동계 등반이나 1942년・1943년 백두산 등행단에서 볼 수 있었던 미개척지의 탐험형 학술답사와 유사한 방식이었다(손경석, 2010, 107). 1차 조사는 한라산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1936년부터 10년간 입산이 금지되었던 남조선의 산에 대한 민족적인 동시에 과학적 탐험 시도였다(조선일보, 1945. 12. 17).
한국산악회는 1차 조사에 과학자들의 참여가 미비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 조사 이후 신속하게 학술위원회를 구성하였다(Hyun, 2022, 93). 이에 따라 곤충학자 석주명, 식물학자 조복성, 사학자 유홍렬 등을 이사로 선출하였으며, 상대적으로 개발에서 소외되었던 남쪽 산악 지역에 대한 근대 학문적 조사가 본격화되었다. 조사단은 식민지 시기 한국인에 의해 제대로 발굴되지 못했던 동・식물, 문화유적 등을 직접 조사하고 표본을 수집하였다(이용대, 2019, 205).
국토구명사업은 과학적 탐험을 넘어, 생명의 ‘구호’와 함께 국토의 구명/구명(究明/救命)을 통해 당시 과도정부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 확보를 수행하고자 한 실천이었다. 태백산백, 소백산맥, 한라산, 파랑도, 울릉도, 독도, 한라산, 다도해, 덕적도 등 내륙과 연해를 포괄하는 조사 공간은 국토 전체를 상징하고 있었다. 2차 태백산맥 종단조사에서는 가리왕산 화전민들의 참혹한 사회상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을 보고회에서 전달하였으며, 6차와 7차 섬 조사에서는 의학반이 동행하여 무료 진료를 실시하기도 했다. 4차(울릉도・독도), 8차(제주도・파랑도), 9차(울릉도・독도) 조사는 정부의 지원과 의뢰를 받고 진행되었다. 이는 국토 주권의 선언이기도 했다(유하영, 2020; 이용대, 2019; 이태우, 2023; 홍성근, 2022). 전쟁 이후에도 국토구명사업은 지속되었고, 11차 설악산 조사는 남한 수복 이후의 상징적 등반으로 기억되었다(손경석, 2010, 114-115).
국토구명사업은 산악인의 주도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지만, 과학적 탐사 중심은 점차 학자들에게로 이동하였다. 당시 산악인의 역할은 학술반 지원에 그쳤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며(손경석, 2010, 102), 국토구명사업은 주로 과학자들이 근대적 자연관을 실천하는 장으로 전환되었다.
해방 이후 국토구명사업에 참여한 여러 주체들은 전쟁 이후 변화한 과학 및 사회・정치적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식민지 지식과 유대감을 새롭게 재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산악회는 국토구명사업 과정에서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과 함께 산림 보호 운동을 진행하였으며, 이를 통해 생물학자와 산림 보호 운동, 천연기념물 지정 사이의 연관성이 강화되었다. 1950년대, 6・25 전쟁으로 황폐화된 고산지대를 대상으로 생물학자들과 산악회는 학술 탐사를 진행하면서, 천연기념물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보존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 수송과 언론의 후원을 통해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다도해 등으로의 광범위한 조사 활동이 이어졌다(Hyun, 2022).
이러한 활동의 성과는 1959년 진행된 제주도종합학술조사로 이어졌다.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이 조사 단장을 맡고,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15개 학문 분야의 학자와 운영 본부 요원, 보조 조사원 등 총 95명이 참여한 이 대규모 조사에서는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인문・사회적 특성, 경제・산업 구조를 연구하고 개발 방향을 설정하는 데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들은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기상학, 보건학 및 인류학 분야 등에서 성과를 냈다(한상복, 1984).16) 이 조사는 한국지역사회학술조사기구가 주최하고, 아시아재단이 지원했으며, 정부 기관과 언론사, 제주도청, 해군 등이 협조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가장 규모가 큰 학술 조사로 평가되었으며, 1962년 제주도식물자원조사대가 파견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산악회의 국토구명사업은 민족주의적 의미를 띠고 있었지만, 그 조사 방식과 과학적 표본 수집의 절차는 제국 일본의 학술조사의 구조적 틀을 참조하고 있었다. 이는 식민지 시기에 축적된 실천적 기법이 해방 후 과학자들에 의해 일정 부분 재구성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과도정부 시기 국토구명사업을 필두로 전개된 일련의 학술 탐험은 근대적 자연관의 실천 공간이자, 국가적 영토 인식의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 시기의 학술적 탐사와 조사 방법은 한국 자연을 근대 지질학・생태학 용어로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천연보호구역 및 국립공원 제도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2) 분단 이후 국가 상징경관의 재구성
해방 이후 자연을 둘러싼 법제화 시도는 분단된 국토 내에서 새로운 상징 경관을 재편성하려는 국가의 공간적 실천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기존의 일제 시기 문화재 관련 법령을 계승하면서도, 독립 국가로서의 문화 정체성과 영토적 통합성을 반영할 수 있는 법적 틀을 구축하고자 했다.
1947년 9월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안」을 상정하였고, 이승만 정부는 1950년 3월 15일 동일 법안을 국회에 발의하였다.17) 이후 「문화재보호법안」(1959)과 「문화재법안」(1960)의 입법을 잇달아 추진하였지만,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다만 1960년 「문화재보존위원회규정」이 행정입법 형태로 제정 및 공포되면서 해방 이후 문화재 관련 최초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규정은 무형문화재를 문화재 범주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김종수, 2019).18) 과도정부 시기에는 해방 이전의 문화유산 정비가 일부 이루어졌으나, 명승이나 천연기념물 제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했다.19)
이와 더불어, 문교부는 문화재 보호에 국한되지 않고 국립공원 제도 도입을 통해 자연 경관/사적지의 국가적 관리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 시기 국립공원 대상지는 민족적 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사적지 중심으로 논의되었다.20) 1949년부터 경주, 부여 등을 중심으로 국립공원 지정이 논의되었고, 1951년에는 「국립공원설치에 관한 건」이 국무회의 안건으로 상정되기에 이르렀다(문교부, 1951). 1959년에는 보다 구체적인 「국립공원(안)」이 마련되었다. 당시 「국립공원(안)」을 살펴보면, 추후 국립공원위원회를 편의상 내무부에 두고, 국립공원 계획과 그 사업은 각각 주무부에서 시행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법안에서 국립공원의 목적은 ‘국토의 적정하고 합리적인 이용을 도모하며, 아울러 국민보건의 향상과 관광사업의 발전에 기여함’으로 명시하고 있다. 또한, 내무부장관은 공원 안의 ‘특별풍치지구’를 정하고 그 안에서 일정한 행위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였다(법제실, 1959).
1959년 마련된 국립공원법이 통과되었을 경우, 문교부는 경주뿐만 아니라 해당 주민들이 건의한 부여, 속리산, 설악산, 한라산, 한려수도 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조선일보 1959. 5. 11) 그러나 1957년 이후 미국의 원조 정책이 변화하면서 원조가 차관 형태로 전환됨에 따라 한국 경제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인태정, 2006, 358). 이로 인해 국립공원법 제정 또한 예산문제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이러한 제도화 시도에서 주목되는 지점은 분단 이후 상실된 국토의 정체성을 보완하고,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상징 경관을 구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측면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설악산과 홍도이다.
설악산은 1955년 수복 이후 진행된 국토구명사업의 주요 대상으로 부각되었으며,21) ‘옷 입은 금강산’이라는 표현을 통해 금강산의 대체 경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당시 등반대와 학자들의 답사기는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었고(조선일보 1955. 9. 4), 이를 계기로 동식물을 채집하고 조사하는 인사도 늘고 관광객들도 늘었다(문화재관리국, 1967, 45).
한편, 홍도는 ‘잊혀진 낙도’에서 새로운 명승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1947년 경향신문이 파견한 무의도서 진료대와 동행한 학술조사단의 활동은 풍란 자생지로서의 홍도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경향신문, 1947. 9. 14). 이후 1954년 전라남도 고적연구회는 홍도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만한 가치 있는, ‘해금강에도 지지않을 경치’임을 강조하며 문교부에 명승 지정 건의를 하였고(조선일보, 1954. 10. 28), 1956년 문화재보존회 조사에서도 홍도는 천연기념물 후보지로 포함되었다(경향신문, 1956. 9. 26).22) 비록 1950년대에 홍도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못했으나, 이러한 논의는 1965년 홍도가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분단 이후의 자연 경관 재구성은 단순히 관광 자원 개발 차원을 넘어 상징 경관의 대체를 통해 국가의 영토성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공간적 실천이었다. 식민지 시기 금강산이 갖는 위상은 설악산과 홍도로 점진적으로 이식되었으며, 이는 분단 이후에도 여전히 ‘민족의 산하’를 구축하려는 여러 주체들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공간의 재구성은 정권의 변화와 관계없이 근대적 자연관이 지속적으로 작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4. 1960-70년대 한국의 보호구역 형성과 생태외교
1) 자연보호 목적의 ‘천연보호구역=국립공원’ 개념 도입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정부는 정치・사회적 체제 전환과 더불어 자연보호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식민지 시기와 과도정부 시기에 형성된 근대적 자연관의 실천과 맞물리며, 천연보호구역 기준 도입이라는 구체적인 제도화 과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 시기 국토구명사업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문교부 산하의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한 입법 및 조사활동과 긴밀하게 결합되었다. 이들은 근대 과학에 입각한 자연 분류와 서식지 보호 논리를 접목시켜 국가 주도의 보호지역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1961년 문교부 외국으로 문화재관리국이 신설되었고, 1962년 1월에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공포되었다. 같은 해 구성된 문화재위원회는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 등 세 분과로 나뉘었고, 제3분과가 명승과 천연기념물을 담당하게 되었다. 1964년 시행규칙을 통해 명승의 기준과 천연기념물의 유형이 구체화되었고, 천연보호구역은 ‘생물학적・지형학적 가치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공간 단위의 보존 대상’으로 정의되었다. 이는 동식물의 생물학적 가치뿐 아니라 지역적, 지형적 특성을 포함하는 공간 단위의 보존 논리를 법률적으로 도입한 데 의의가 있었다.
문화재관리국은 이 시기부터 사실상 천연보호구역을 국립공원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1962년 4월, 국립과학관이 주도한 제주도 식물자원조사는 이러한 인식을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립과학관 관장 박만규를 중심으로 한 조사단은 현지에서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하였고, 이 발견은 한라산 원시림 전체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논의로 확장되었다(동아일보, 1962. 4. 19). 박만규는 조사 이전부터 개별 식물 지정 방식에서 벗어나 일정 구역 단위의 원시 자연 보호 필요성을 주장하며 국립공원 창설을 주장했다(동아일보, 1962. 4. 6). 이후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한라산 보호를 위한 조사와 심의를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국내적 논의는 1960년대 초 국제 생태외교의 흐름과도 맞물려 있었다. 1962년 정부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제1차 세계국립공원회의에 건축가 김중업과 농학자 김헌규를 파견하였고, 김헌규는 이 자리에서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 경주 등을 한국의 국립공원 후보지로 소개하였다. 이 회의 참여는 1960년 IUCN 국립공원위원회 의장 해롤드 쿨리지(Harold J. Coolidge)의 방한과 한국 내 국립공원 제도 도입을 권고한 결과였다(Hyun, 2023, 5-6). 1963년에는 IUCN이 국립공원 전문가 윌리엄 하트(William J. Hart)를 한국에 파견해, 문화재관리국과의 협의를 통해 설악산, 한라산, 홍도 등의 생태적, 학술적 가치를 재확인하고 종합적 조사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어 1964년 2월, IUCN 부위원장 장 폴 해로이(Jean-Paul Harroy)는 설악산과 한라산의 국제 등재 가능성을 한국에 통보하였다(문화재관리국, 1967, 45).23)
이에 대응하여 문화재관리국은 1964년 2월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제2차 회의를 열고 설악산・한라산・홍도를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기 위한 학술조사를 결정하였다. 그 해 3월 박만규가 한라산 조사 책임자로 공식 임명되었고, 4월에는 설악산에 대한 기초조사가 시작되었다.24) 같은 해 4월, IUCN 산하 기구인 국립공원위원회 로버트 시크(Robert Seeke)가 방한하여 천연보호구역 지정 절차를 논의했다. 10월에는 조사 대상과 범위, 원칙을 확정하였고, 설악산・한라산・홍도를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문화재관리국은 설악산과 한라산을 UN 국제국립공원 목록에 등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문화공보부, 1968, 37-38; 313-315; 문화재관리국, 1967, 45-46).25)
1963년 IUCN이 한국 정부에 국립공원 업무를 산림국으로 이관할 것을 권고한 것(Hyun, 2023, 11)과 달리, 당시까지는 자연유산 업무가 문교부의 문화재관리국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문화재관리국이 지정한 천연보호구역은 자연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국립공원 후보지로 간주되었고, 초기 후보지는 생물다양성과 원시림 보존 가치를 기준으로 홍도, 설악산, 한라산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자연보존 중심의 흐름은 곧 개발 중심의 국립공원 정책으로 방향이 전환된다. 박정희 정부는 국립공원을 자연보호보다는 관광지 개발과 국토개발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문화재관리국과 IUCN의 노선과는 별개로 1967년 건설부 주도로 「공원법」을 제정하고 지리산을 한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이처럼 1960년대 중반까지 천연보호구역 제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립공원 담론은, 이후 행정 주체의 이동과 발전주의적 국가 전략에 따라 그 방향성과 성격이 재편되었다.
2) 냉전기 생태외교와 국립공원 공간 구상
1960년대 한국에서는 문화재관리국이 국립공원 지정과 연계된 천연보호구역 지정을 주도하던 시기에, 또 다른 축에서는 IUCN, 스미소니언연구소, 미국 국립공원청 관계자들이 한국자연 및 자연자원보존 학술조사위원회(1965년 한국자연보존위원회로, 1969년 한국자연보존연구회로, 1974년 한국자연보존협회로 개편)와 함께 별도의 국립공원 구상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들은 설악산과 한라산 등 주요 산악지대를 후보지로 고려하면서도, 미국의 과학기술 원조 정책과 DMZ 생태 연구계획을 반영하여 보다 전략적인 자연보호 및 공원 체계를 구상하였다.
이 흐름은 1962년 한국 대표가 제1차 세계국립공원회의에 참가한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IUCN 국립공원위원장이었던 쿨리지의 주도로 1963년부터 한국자연 및 자연자원보존 학술조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서울대 강영선을 비롯한 1세대 자연과학자들은 이 단체에서 활동하며, 미국과의 학술・외교 채널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쿨리지는 이 단체 설립을 위한 재정적,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인적, 실질적 자원은 문화재위원회 중 기존 한국산악회에 소속된 생물학자와 그들의 학술탐험 경험이 기반이었다(Hyun, 2022, 107).
1963년, IUCN은 국립공원 전문가 윌리엄 하트를 한국에 파견해 자연자원 보존을 위한 기초조사를 시작하였다. 학술조사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설악산, 울릉도, 제주도, 낙동강 삼각주 등을 국립공원 후보지로 제안하며 6만 달러의 연구비를 요청했으나, 실질적인 재정 확보에는 실패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Hyun, 2021, 322-323).
1965년부터 쿨리지는 DMZ 생태조사를 추진하였다. 한국의 생물학자 강영선은 이에 협력하여 쿨리지에게 서울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는가 하면, DMZ 조사 관련 국제 회의 개최 등을 주도했다(문만용, 2019, 39-44).26) 1966년부터 스미소니언연구소의 지원 하에 남방한계선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한미 공동 생태조사가 시작되었으며, 동물, 곤충, 조류, 식물 등 각 분야의 연구가 수행되었다(한모니까, 2023, 303-310).27) 이 조사는 당초 계획보다 이른 1968년 6월 30일에 종료되었고28), 같은 해 Ecological Study in Korea Final Report가 발간되었다. 보고서는 DMZ가 생태적 회복력과 천이 연구에 적합한 지역임을 강조하며 향후 국립공원 지정의 필요성을 시사하였다(Buechner et al., 1968).
이와 병행하여 1966년, 미국 국립공원청 아시아 태평양 지역국장 겸 하와이국립공원 박물관장이자 IUCN 컨설턴트인 조지 룰(George C. Ruhle)은 한라산, 설악산, 경상남도 해안, 남서쪽(전라도), 서울 경계지역 등으로 나누어 다양한 장소를 직접 답사하고 국립공원 지정 자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그림 5). 룰은 미국식 국립공원29)의 구분 기준(야생보호, 삼림보호, 휴양지 등)을 한국에 적용할 것을 권고하며, 지역별로는 한라산과 설악산,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제안하고, 기타 지역은 사적, 도립공원, 레크리에이션 공간 등으로 구분해 관리할 것을 권유하였다(Ruhle, 1968).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DMZ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되자, 강영선은 『비무장지대의 천연자원에 관한 연구』(1972), 『남북한 천연자원의 비교연구』(1972), 『공동개발을 통한 남북 협조 방안』(1973) 등을 연이어 출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문화공보부의 『비무장지대인접지역종합학술조사 보고서』(1975)로 이어졌으며, 설악산-향로봉-금강산을 잇는 태백산맥을 남북 공동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는 논의로 확장되었다(문화공보부, 1975, 29). 그러나 1973년 향로봉, 대암산, 건봉산 등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실제 국립공원 지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0)
1950년대부터 축적된 산악 탐사 경험과 자연과학자의 국토구명사업은 1960년대 들어 국제 정세와 맞물려 한국의 자연을 보호구역으로 영토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였다. 미국은 자국의 경관, 과학적・교육적 가치, 그리고 영감을 주는 최고의 사례로서, 자연 경관과 야생의 특성, 자생 야생 동물 및 자생 식물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국립공원’이라는 미국적 자연관을 한국에 이식하고자 했다. 한국 정부와 학자들은 이를 수용하여 ‘천연보호구역’과 ‘국립공원’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국내 정치・외교 환경에 맞추어 조정하였다. 특히, 냉전시기 통일 상징 공간으로서의 DMZ와 이 인근 태백산맥은 국립공원화 논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보호와 개발, 분단과 통일이라는 이중적 맥락 속에서 공간적 위상을 형성해갔다.
5. 개발주의 국가에서의 국립공원 공간 구성 전략
1) 관광지 개발과 공간의 중층적 구조화
19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 정부는 국립공원을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재구성하였다. 특히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76)과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국립공원을 외화 획득과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관광거점으로 배치하였다. 이 시기 국립공원은 ‘국민/자연관광지’로서의 개념이 강조되며, 국가가 직접 기획하고 활용하는 관광 기반 자산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정책 전환은 국립공원이 보호/보전 중심의 공간에서 벗어나, 개발 가능한 국토자연의 전략적 구성물로 전환된 것을 뜻한다.
1950년대 말부터 정부는 외화 유입을 위한 관광산업 진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957년 국제관광기구연맹(IUOTO: International Union of Official Travel Organizations, 유엔 세계관광기구(UNWTO)의 전신)에 가입한 이후 교통부는 관광개발을 본격화했다. 1959년에는 서귀포・무등산・설악산 등에 산장 호텔을 확장하고, 해운대・불국사 등지에도 서구식 호텔을 신축하였다(조선일보, 1959. 8. 30; 한국여행신문사, 1999, 89; 96-98).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0년 정부는 1961년을 ‘한국 방문의 해’로 지정하고 외국인 관광 유치를 위한 기반 정비에 나섰다(동아일보, 1960. 11. 9). 이는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한 관광자원 개발로 시작되었지만,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을 수립하면서 국민 관광을 포함한 국가 주도형 관광산업 육성으로 전략적 전환이 이뤄졌다.
이 계획 하에서 관광산업은 외화 수입의 주요 수단으로 설정되었고, 1961년 「관광사업진흥법」 제정 및 관광공로국 신설, 1962년 국제관광공사 설립, 관광지구의 법제화가 연이어 추진되었다. 특히 1962년 전국에 10대 관광지구가 지정되며, 관광은 단일 시설이 아니라 지역 단위 개발 속에서 설정되기 시작하였다(그림 6).31)
이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에서 관광은 보다 체계적인 개발 대상이 되었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정부 관계부처 장관, 경제과학심의회, 기획조정실, 주한미경제협조처(USOM: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이하 USOM), 미국・서독 고문단 등이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32)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교통부는 1968년 미국 USOM과 협력하여 Tourism to Korea 보고서를 도출해 정책기조의 합리화를 꾀했다.33)
이때부터 국립공원은 ‘관광자원’과 ‘지역개발의 거점’으로 점차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교통부는 관광지 지정 권한을 기반으로 관광정책의 기획과 집행을 주도하였다. 1963년 관광국으로 조직이 확대되며 관광개발의 공간 전략을 구체화하였고, 1969년과 1971년 두 차례에 걸쳐 33곳의 관광지를 지정하였다.34) 이들 관광지 중 상당수가 이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거나 예정된 지역과 중복되었고, 이는 건설부의 국립공원계획과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대표적으로 지리산, 설악산, 내장산, 속리산 등은 교통부의 관광지 지정 목록과 건설부의 국립공원 지정 계획에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다. 교통부는 관광지 지정을 위해 「공원법」, 「문화재보호법」, 「산림법」 등의 소관 부처와 사전 협의를 해야 했고, 이는 실질적으로 타 부처의 계획권한과 중첩되었다. 특히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은 건설부의 관할이며, 문화재보호구역은 문화재관리국의 관할로 지정되기 때문에, 법률적 관할권 상 충돌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교통부, 1968a, 3-4).
1968년 교통부는 카우프만의 Tourism to Korea와 외국 관광정책 등을 참고하여 『한국관광진흥을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였다. 여기에서 국립공원 제도를 교통부로 이관하고 관광자원 중심으로 재편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구상은 단순한 행정 조정이 아니라, 관광개발・홍보・행정집행을 통합하는 ‘관광청’ 신설 계획까지 포함한 근본적인 재편 시도였다. 특히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1도 1공원’ 체계를 제시하고, 국립-도립-도시공원의 계층화를 통해 국토 전반을 관광지화하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명시하였다(교통부, 1968b).
1971년, 교통부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전국을 10대 관광권으로 구분하고, 이 중 40개 관광지를 집중 개발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0대 관광권은 수도권, 설악산권, 속리산권, 지리산권, 내장산권, 한려수도권, 부여권, 부산권, 경주권, 제주권 등으로, 대부분이 국립공원 예정지 또는 지정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조선일보, 1971. 11. 6; 그림 7).
이러한 관광권은 법적 경계가 명확한 국립공원과 달리 권역 개념이었으며, 동일한 공간이 ‘관광지’, ‘관광권’, ‘개발권’, ‘국립공원’ 등으로 다중적으로 포섭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예컨대 설악산은 교통부의 관광지・관광권・개발권의 중심지이자 건설부의 국립공원으로서, 양 부처의 공간 전략이 중첩되었다.
1971년 10월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개발계획 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부처 간 협조를 지시하고, 관광자원 개발을 위한 전담 기구의 재조정 또는 신설 가능성도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매일경제, 1971. 10. 9). 이에 따라 청와대 관광개발계획단35)이 조직되어 『경주 관광종합개발계획』(1971)과 『제주도관광종합개발계획』(1973)을 수립하였다. 1973년에는 설악・부여・공주 지역의 개발계획을 위해 계획단이 재조직되었고36), 1974년 2월에는 미국 보잉사(The Boeing Company)에 『한국관광개발조사보고서(Korea Tourism Development Master Plan)』 작성을 의뢰하였다. 보잉사는 자연경관, 사적, 편의시설, 교통 등을 기준으로 관광가치를 평가한 결과, 설악산, 한려수도, 공주・부여를 특별개발지역으로 선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교통부는 같은 해 7월 『관광장기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고, 해당 3개 지역을 3대 관광개발권으로 지정하였다(국제관광공사, 1974; 경향신문, 1974. 7. 8; 한국여행신문사, 1999, 214-215; 그림 8).37)
건설부는 창설 초기였던 1963년 「국토건설종합계획법」이라는 건설종합계획의 법제화를 통해 ‘국토자연’의 질서 있는 개발이라는 상위 계획의 주도권을 확보한 상태였다. 1966년 『한국국립공원후보지자료』를 발간하고, 같은 해 국무회의에 「공원법」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1967년 공원법을 제정하여 지리산을 한국의 첫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국립공원 제도화를 본격화하였다. 이 시점부터 국립공원은 국토계획의 하위 체계로 편입되었고, ‘관광지로서의 수려한 산수’를 중심으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이 제도화 과정에서 건설부는 국립공원을 지역개발과 국토자연의 질서를 확충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으로 설정하였다.38) 이로써 국립공원은 관광자원 개발과 국토계획이라는 두 축이 교차하는 핵심 지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립공원은 1960-70년대 경제개발계획과 국토종합개발계획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책적 전환을 겪었으며, 교통부와 건설부 간의 행정 주도권 경쟁 속에서 제도의 방향성이 결정되었다. 공간적으로는 교통부의 ‘관광권’ 전략과 건설부의 ‘국립공원’ 제도가 중첩되면서, 동일한 지역이 다층적이고 중복적인 계획 대상으로 구성되었다. 이로 인해 국립공원은 국가 발전 전략 하에서 개발과 보호/보존이 교차하는 중층적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2) 국토 개발 과정에서의 국토자연의 균일화와 위계화
건설부는 1967년 지리산을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문교부는 자연생태와 경관을 중시하며 한라산과 설악산을 우선 후보지로 고려하였으나, 지리산은 개발주의적 관점에서 지정이 추진되었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 산하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가 지리산을 개발 대상으로 조사하며 여론을 형성했고, 지역민 주도의 지정운동도 전개되었다. 특히 1965년 건설부 국토계획국 내에 지역개발과가 신설되면서, 지리산의 국립공원 지정은 정책적으로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는 건설부가 창설 직후인 1963년부터 ‘국토종합개발계획’ 추진을 통해 부처의 역할을 확장한 결과이기도 하다(김지영, 2024).
국립공원 제도 도입을 위한 법적 기반은 1967년 3월 「공원법」 제정을 시작으로, 6월 시행령, 7월 시행규칙의 공포를 통해 마련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건설부 주도로 각 부처와 전문가를 포함한 국립공원위원회39)가 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립공원 후보지 선정은 생태적 가치보다는 ‘수려한 산수’를 중심으로 한 관광 자료에 기반하였으며, 이는 국립공원이 국토종합개발계획 하에서 관광자원 개발의 수단으로 기획되었음을 보여준다.
1971년 수립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81)은 전국을 행정구역을 초월한 4대권, 8중권, 19소권으로 재편성하며, 국토를 기능적으로 조직화하려는 국가 주도의 공간 기획이었다. 이 가운데 8중권(수도권, 태백권, 충청권, 전주권, 대구권, 부산권, 광주권, 제주권)은 지역별 개발의 중심 단위로 설정되었고, 국립공원은 중권을 대표하는 ‘자연경관의 거점’으로 배치되었다(표 2).40)
표 2.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1981)의 권역별 국립공원 계획
출처: 대한민국정부, 1971, 116-130
건설부는 전체적인 국토종합개발계획 하에서 『국토건설종합계획기본자료』(1969)를 작성할 때부터 국립공원 후보지로 경주, 계룡산, 내장산, 설악산, 속리산, 지리산, 한라산, 한려해상, 가야산, 북한산 등을 선정하고, 이를 연결하는 관광 루트를 구상하였다. 서울-경주-부산-제주, 서울-설악산, 서울-한려해상지구, 서울-온양-유성-부여 등의 루트가 그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국립공원이 국토개발 전략에서 ‘탁월한 자연경관’으로서 위계화된 위치에 있었으며, 문화유산(사찰 등)과의 연계를 통해 복합적인 관광자원으로 개발되었다는 점에서 전략적이었다(건설부, 1969, 119; 대한민국정부, 1971, 108-118).
하지만 국립공원의 이러한 전략적 위치는 관련 부처 및 법령과의 충돌을 초래했다(경향신문, 1970. 8. 18).41) 한라산, 설악산, 경주 등은 동시에 천연보호구역, 문화재보호구역 등으로 중첩 지정되면서, 「공원법」, 「불교재산관리법」, 「문화재보호법」, 「산림법」 등의 소관 부서와 행정적 협의가 요구되었다.42) 특히 교통부는 관광정책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고, 청와대 관광개발계획단은 국제관광지로서의 국립공원 개발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국립공원은 ‘사치스러운 유흥지’로 인식되며 생태적 가치는 경시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경향신문, 1970. 8. 11).
1970년대에 들어 공업단지 조성과 도시 확장이 본격화되면서 자연환경 훼손과 지가 상승,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부작용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72년 12월 30일 「국토이용관리법」을 제정하고 국토를 도시지역과 비도시지역(농업, 산림, 공업, 자연・문화재 보전지역, 유보지역)으로 이원화하였다. 도시지역은 「도시계획법」, 비도시지역은 「국토이용관리법」의 규제를 받게 되었으며(국가기록원, 2014, 42-43). 제9조 제4항에 따라 자연환경보전지구, 문화재보전지구, 관광휴양지구 등 세분화된 용도지구가 지정되었다.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은 이 가운데 ‘자연환경보전지구’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국립공원의 역할과 운영 방향을 둘러싼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1971년 10월, 건설부 산하에 국립공원협회가 창립되었으며,43) 같은 해 11월 동아일보사와 공동으로 ‘국립공원의 이상적 관리 운영방향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세미나에는 정부 실무자, 지자체 담당자, 학계 및 시민사회 관계자 등 약 90명이 참여하여, 국립공원이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국립공원협회, 1972, 114). 정부는 개발과 이용을 전제로 한 자연경관 보호를 주장했지만, 강영선, 이숭녕, 이민재, 김헌규, 원병오 등의 학자들은 호텔과 케이블카 설치에 따른 자연 훼손을 경고하며 원형 보존을 강조하였다(동아일보, 1971. 11. 22).
그러나 국립공원 계획은 국토종합개발계획 내의 전체 경제 발전 축의 일환으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관련 부서 및 법령 체계 내에서 자연보호를 유지하면서도 개발에 방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건설부가 제시한 국립공원의 청사진은 자연 경관을 보호한다는 내용을 먼저 제시하지만, 궁극적으로 관광 및 휴양지로 개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그림 9, 10, 그림 11, 표 3).
표 3.
1972년 국립공원 지정 현황 및 국립공원 계획
출처: 동아일보 1972. 12. 6
1973년을 기점으로 정부는 당분간 추가적인 국립공원 지정을 보류하고, 9개 지역을 ‘국제적 규모의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지역개발에도 중점을 두기로 했다. 당시 경주는 이미 국립공원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계룡산(공주・부여 도시개발), 제주도 및 설악산종합개발은 관광개발계획단에서 추진하고 나머지 5개 국립공원은(지리산, 한려해상, 속리산, 내장산, 가야산)은 건설부가 주관 및 개발하기로 했다(경향신문, 1973. 6. 11; 경향신문, 1973. 8. 18). 이에 따라 1973년 9월 건설부는 『국립공원 기본계획 및 기본설계(지리산, 한려해상, 속리산, 내장산, 가야산)』를 발간했다. 이 계획에는 표 4와 같이 토지용도를 구분해 놓았을 뿐 자연환경 조사 등의 내용은 없고, 숙박지구, 상업지구, 공용관리지구, 조원지구, 도로, 주차장 등과 같은 ‘집단시설계획’이 대부분이었다(건설부, 1973a).
표 4.
공원지역 토지의 용도별 이용
출처: 秘, 1974, 23
1973년 건설부는 처음으로 당시 개발 중이던 경주를 제외한 8개 국립공원 기본계획을 확정・고시하면서 자연보호에도 힘쓰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주요 요지는 각 공원의 토지를 용도별로 구분하여 행위규제를 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용도지구 확정을 위해 항공사진 측량과 현지조사를 진행하였다(매일경제 1973. 12. 14).
이와 함께 건설부는 공원 내부뿐 아니라 외부 지역까지 관리 범위를 확장하여, 공원 경계 밖에 ‘공원보호지구’라는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별도로 집단시설지구를 설치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표 5). 이러한 시도는 1970년대 국립공원이 개발과 보호의 균형을 꾀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공간적 전략을 보여준다.44) 동시에 지역과 무관하게 균일한 전략으로 자연을 영토화한다는 계획이기도 하다. 다만 이 계획들은 당시 「공원법」 수준에서의 규제에 머물렀으며, 국립공원 내 토지이용 규제의 법적 명문화는 1980년 1월 제정된 「자연공원법」 제16조 ‘용도지구 조항’을 통해서야 가능해졌다. 실질적인 보전 관리 체계는 계획 수립보다 늦은 시점에서야 제도화 된 것이다.45)
표 5.
개별 국립공원의 토지이용계획
출처: 秘, 1974, 25-41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1960-70년대 국립공원은 국토자연을 기능적으로 재편하고 균일화 및 위계화하는 기제였다. 국립공원은 국토종합개발계획의 공간 전략 안에서 8중권 관광지 개발의 핵심 거점으로 설정되었으며, 건설부 주도로 도로・철도 등 기반 시설과 연계되어 개발되었다. 탁월한 자연경관은 관광지로 집적되는 ‘결절지’로서 기능하였고, 국토를 균일적으로 재편성하려는 국가 개발 네트워크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1970년대 들어 국립공원 정책의 발전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자, 정부는 보호지구 설정과 주변 인프라 조성 등 차등적 이용 방식을 도입하며 국토자연의 ‘합리적 통치’ 모델을 구현하고자 했다. 1973년부터 항공 측량을 통한 용도지역 확정이 시작되었고, 국립공원 내 토지의 용도별 이용 구분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계획은 주로 집단 관광시설 조성에 집중되었고, 자연보존을 명확히 규정한 법률은 1980년에 이르러서야 마련되었다.
국토종합개발계획 속 국립공원은 ‘관광개발’이라는 이상과 ‘환경 훼손’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잃었으며, 결과적으로 임기응변적 규제와 제도 마련이 반복되었다. 대표적으로 북한산은 1968년부터 수도권의 국립공원 후보지로 등장하였으나, 수도권 인구 억제를 위한 정책 기조에 따라 1971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먼저 지정되었다. 이후 국립공원 지정이 지속적으로 예고되었으나 최종 지정은 1983년 4월 2일 제15호 국립공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국립공원이 실질적인 자연 보호/보존보다는 국토자연 개발 중심의 공간 기획으로 작동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6. 나가며
본 연구는 192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국립공원 제도 도입 과정을 통해 ‘자연의 영토화’가 ‘근대적 자연관’의 실천 과정을 따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분석하였다. 근대적 자연관의 실천을 통한 자연보호구역 설정은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의 정치・사회적 전환 속에서 다층적으로 구성되었다. 해방 전후 한반도에서 진행된 국립공원 제도는 단순한 자연 보호 차원을 넘어서, 근대 국가의 통치와 공간 지배 전략의 일환이었다. 특히 식민지 시기 조선신팔경의 시각적 구성, 국토구명사업을 통한 실효 지배의 시도, 그리고 문교부 및 문화재관리국, 건설부 중심의 제도화 등은 자연의 영토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근대 초기 자연의 지식화의 단계에서는 여러 주체는 자연을 과학적, 심미적으로 이해하고 분류하려고 하였다. 식민지 시기 전부터 시작된 근대 지리학과 지질학을 바탕으로 한 산맥 체계 도입과 철도망과 연계한 명승지 개발, 특히 1935년 조선신팔경 선정은 자연 경관의 규격화와 국가 중심의 자연 표상을 정당화하는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백두대간 중심의 전통적 자연 인식은 해체되고, 근대적인 공간 분할과 자연 경관 서열화가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 근대적 자연관의 실천의 단계에서는 자연 인식을 바탕으로 한 학술탐사 및 조사, 명명, 홍보 등의 활동이 구체화되었다. 과도정부기 한국산악회의 국토구명사업과 국립과학원,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의 자연조사는 근대적 자연관 실천의 대표적 사례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원조 체계와 기술 외교, IUCN의 자연보호 담론이 도입되었다. 특히 홍도, 한라산, 설악산 등에 대한 학술조사 및 보호 논의는 이후 천연보호구역 지정으로 이어졌으며, DMZ 생태조사, 태백산맥 보호 논의 등은 자연을 민족 공간이자 냉전체제 속 국가 자원으로 위치시키는 실천으로 기능하였다. 당시 문교부를 중심으로 한 천연보호구역은 국립공원 지정 전초 단계로서 진행되었으나, 국립공원 제도화 단계에서는 국토개발의 관점이 투영되었다.
1960-70년대, 제도화 단계에서는 이러한 지식과 실천이 구체적인 보호구역 지정 및 법령 제정으로 이어졌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을 통해 문화재관리국 주도의 천연보호구역 제도와 개념이 명확히 명문화되었으며, 이후 건설부는 1967년 「공원법」을 근거로 지리산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천연보호구역은 ‘원생자연’의 보존이라는 논리 하에 제도화되었고, 국립공원은 국가경제 전략과 연동된 ‘국토자연 개발’의 핵심 수단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도화된 국립공원은 국가가 설정한 개발 질서 속에서 공간적인 위계를 부여받고, 경제개발과 관광정책의 거점으로서 구성됨으로써 균일화되었다.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전국을 8개 중권으로 구획하고, 각 권역에 대표 국립공원을 지정함으로써 ‘탁월한 자연경관’이 국가의 자연을 대표하는 상징 공간으로 재구성되었다. 이는 곧 자연의 서열화이자 이용 가능한 명승지임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교통부의 관광권, 문교부의 천연보호구역 등이 하나의 공간에 중첩되면서 국가 통치의 전략적 결절지로 작동하였다.
이는 식민지 시기 조선신팔경 선정 과정, 즉,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지’를 선정한 후 국립-도립-도시공원 등으로 위계화하고, 이를 교통망과 결합해 관광 중심의 국토개발 거점으로 활용하는 전략과 닮아 있었다. 원생 자연의 보전보다는 심미적 경관에 주목한 국립공원 구상은 전통적 경승지를 근대적 자연관으로 재구성하여, 보호의 대상으로서 동시에 소비 가능한 균일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즉,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틀 안에서 국립공원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경제적 가치로 치환하는 발전주의 전략의 일환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1970년대 자연 훼손 문제가 대두된 이후에도 정부는 토지의 차등적 이용과 보호 지구 설정을 통해 ‘보호’를 표방하면서도, 관광 기반시설 위주의 개발을 지속하였다. 1973년 국립공원 계획서 역시 자연환경 조사보다는 도로・숙박・상업시설 조성 계획이 중심이었다. 이는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이 다양한 외부 이론과 정치적 요구가 덧붙여진 비일관적인 패치워크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이주영, 2015, 45). 결과적으로, 국립공원은 ‘국토자연 보호’의 상징성을 앞세운 ‘국토자연 개발’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본 연구는 국립공원 제도 도입과 공간 형성과정에 있어 근대적 자연관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주로 추적하였다. 특히, 개발도상국이라는 맥락에서 정부 주도의 제도적 추진 과정과 공간 구성을 주로 다루었다. 그러나 향후 연구에서는 국가 주체 이외에도 다양한 행위자들이 공간을 구성・수행하는 방식, 그리고 거대 담론의 틈새에서 드러나는 균열된 공간의 전개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개별 국립공원의 변화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탐색될 수 있을 것이며, 본 연구의 후속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