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0 June 2021. 289-310
https://doi.org/10.22776/kgs.2021.56.3.289

ABSTRACT


MAIN

  • 1. 들어가며

  • 2. 금강산국립공원에 대한 자연의 사회적 구성론적 접근

  • 3. ‘제2의 자연’으로서 제국-자연 형성

  •   1) 금강산국립공원 계획 수립

  •   2) 금강산 풍경 구성을 위한 도로 건설 계획

  •   3) 근대 위생・휴향・향락 시설 설치를 위한 공간 설정

  •   4) ‘제2의 자연’, 금강산국립공원 만들기

  • 4. ‘제2의 자연’으로서의 ‘금강산 생산’을 둘러싼 ‘일제’의 균열

  •   1) 민관(民官) 협력단체 재단법인 금강산협회 설립과 ‘금강산 생산’

  •   2) ‘금강산 풍경’과 ‘금강산 중석’의 가치 충돌

  •   3)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의 조정과 계승

  • 5. 나가며

1. 들어가며

금강산은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관광지로 부상했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관광은 관(官) 주도로 전개되었는데, 제국이 관할하고 있던 철도 노선을 중심으로 하여 그 노선이 규정한 루트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김백영・조정우, 2014, 59). 일본이 1904년에 경원선 철도부설권을 획득하자, 1906년부터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 등에 일본인의 금강산 사찰 관련 기사들이 등장하면서 금강산 관광개발의 서막이 열렸다(김정은, 2016, 161-162). 금강산 관광개발은 1915년에 시정 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경복궁에서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14년에 경원선 철도를 개통하고 1915년에 외금강 온정리 호텔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금강산의 철도 중심의 관광 인프라는 조선총독부가 1929년에 조선 식민지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즈음에 완성되었다.

일본제국은 1929년 조선박람회를 통해 그 동안의 통치 성과를 내외에 알리고, 일본제국의 영토에 금강산이 포섭되어 있음을 철도 관광을 통해 일깨우고자 하였다. 철도망이라는 물질적 인프라를 근간으로 하여 제국주의가 군사적・정치적 물리력을 확장함으로써 식민지 공간에 대한 ‘형식적 포섭’을 달성했다면, 철도 관광이라는 행위는 지리적 표상의 통합 및 차등적 배분을 통해 이질적 국외의 영토공간에 대한 ‘실질적 포섭’의 기능을 담당했다(김백영, 2014, 204). 1931년에 금강산전기철도 내금강역이, 1932년에 동해북부선 외금강역이 개통되면서 금강산은 일본제국의 관광네트워크(일본-조선-만주)에 위치되었다. 금강산으로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금강산은 일본제국의 관광네트워크의 경유지로서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졌다.

동해북부선 외금강역과 금강산전기철도 내금강역이 완성되어 갈 때 즈음, 조선총독부는 ‘금강산국립공원’을 계획하여 금강산의 내부 공간의 재편을 본격화했다. 금강산 관광개발과 함께 등장한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의 목소리는 1910년대부터 등장했다. 1920년대에는 여러 주체의 국립공원 지정 청원이 이뤄졌으며, 1930년과 1931년에는 조선총독부가 국립공원지정을 위한 예비적 행정 절차에 들어갔다(김지영, 2019, 104-105).

그동안의 식민지 관광공간 금강산에 관한 연구에서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논의는 관광개발 정책으로서 비교적 간단하게 다뤄졌다(원두희, 2011).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을 다루더라도 1930년에 일본의 조경학자 다무라 쓰요시(田村剛)와 우에하라 게이지(上原敬二)가 작성한 ‘금강풍경계획안’1)을 중심으로 금강산의 영역변천과 공간변화를 단편적으로 다루거나(성나연 등, 2019; 손용훈, 2016; 水内佑輔 등, 2016),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아사이신문』 외지판의 금강산국립공원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본 정도이다(이부용, 2020). 신성희(2016)는 금강산 관광의 근대화 과정을 ‘자연의 생산’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금강산으로의 철도 구축과 온정리 온천개발 등 사회문화적인 요소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정치경제적 논의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에서는 식민지 시기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을 주도한 주체들이 금강산을 물질적으로 구성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기 어렵다.

국립공원은 특수한 ‘자연-문화 연계’를 통하여 문화적 가치로서의 민족(국가) 정체성이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상상되고 구성되는 전형적인 예이다(진종헌, 2005, 34). 이러한 ‘자연-문화’적 연계는 국가-자연 관계의 정치생태학이 발전하게 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국가가 자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것은 국가-자연 관계에서 하이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공간적 전략 중 하나이다. 그리고 국립공원으로 지정 관리되는 자연은 국가-자연의 담론적이고 물질적 구성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황진태・박배균, 2013, 353). 필자는 국가-자연 형성 과정 논의를 제국-자연 형성 논의에 대입하여, 일본제국이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논의 속에서 금강산을 일본제국의 ‘국가풍경’으로 생산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김지영, 2021). 해당 연구의 주된 내용은 일본제국이 금강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함으로써 일본제국의 ‘통치 영역’으로 포섭하는 자연의 통치 과정, 즉 일본제국의 제국주의화로서의 제국-자연 생산 과정이었다.

본 연구는 그 후속작업으로서 조선총독부 안팎의 다양한 주체가 제국-자연 생산 과정 속에서 경제적 목적으로 금강산을 생산해가는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일본제국이 금강산국립공원을 지정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을 생산하는, 자연의 물질적 구성에 관한 탐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의 생산’의 주체로서 ‘일본 제국주의 추종세력(이하 ‘일제’)’을 상정하고자 한다. 일본제국이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과정은 조선총독부라는 단일 국가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스케일의 주체들이 경합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김백영, 2009, 58-59). 이 연구에서 상정한 ‘일제’라는 주체는 자연(금강산 풍경)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함으로써 개발 이익을 기대한 조선총독부, 철도기관, 민간단체, 학자, 일본기업, 지방정부 등을 일컫다. 이들 중 일부는 제국주의에 세뇌되어 제국주의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더라도 근대 자본주의와 근대 자연관 등을 발현하면서 금강산을 구성해 나갔다.

한편, 자연의 생산 과정은 주로 물질적 환경의 변화, 건조환경(built environment)의 변화상을 추적함으로써 논한다. ‘일제’는 철도 구축을 통해 금강산으로의 접근성을 높인 이후, 금강산 내부에 도로, 탐승로, 근대적 휴양 및 향락시설 등을 구축하는 전략을 세웠다. 따라서 이 연구는 그동안 금강산 ‘관광정책’이라는 이름에 가려 비가시화되었던 ‘일제’의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에 따른 건조환경 변화의 기록을 찾아, 금강산의 시・공간을 복원한다.

2. 금강산국립공원에 대한 자연의 사회적 구성론적 접근

지리학에서 자연에 대한 연구는 자연-사회의 관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자연-사회의 관계에 대한 접근은 환경결정론, 환경가능론, 문화역사지리학, 문화생태론 등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사회를 분리해서 보는 이분법적 인식론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과학기술・종교・제도・문화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이 구성된다는 ‘자연의 사회적 구성론’이 등장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이르러 마르크시즘과 정치경제학, 급진적인 농업연구에 영향을 받은 자연의 사회적 구성론으로서의 정치생태학도 등장하였다. 본격적인 자연-사회 관계 자체에 대한 연구는 닐스미스(Neil Smith)가 1984년 『불균등 발전(Uneven Development)』에서 자연이 사회의 외재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를 하면서 부터이다. 그는 자연과 사회와의 관계의 불가피성과 창조성을 강조하면서 ‘자연의 생산’ 명제를 제안하였다. 스미스의 ‘자연의 생산’은 자연이 역사적으로 확인(구별)되는 노동과정에 의해 생산된다는 의미이다(김숙진, 2010, 465-468).

1990년대 후반에는 자연의 사회적 성격에 초점을 둔 연구가 연이어 진행되었다(Soper, 1995; Cronon, 1996; Macnaghten and Urry, 1998; Braun and Castree, 1998; Castree and Braun, 2001). 이 연구들의 주요 요점은 자연은 물질적이며 의미론적으로 만들어졌고, 이러한 구축과정 이전에는 어떠한 자연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사회적 구성은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관계와 사회적 정체성, 문화적 지배를 초점으로 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또한 ‘자연의 생산’은 경제적 노동을 통한 물질적 생산만이 아니라 소비와 문화적 활동의 장(場)이라는 의미의 생산도 포함되며, 여기에는 주체 간의 여러 역학관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자연의 의미가 창출되고 그 의미의 영유를 둘러싸고 주체 간의 갈등・대립이 전개된다는 것이 요지이다(나카시마 고지 저, 심정보 역, 2010, 143-144).2)

스미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물질적 경관의 변천을 ‘제1의 자연’이 사회적으로 생산된 ‘제2의 자연’으로 교체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의 영역인 일상생활의 물질적 기층(material substratum)으로서 그 모습을 보여준다.3) 자본축적이 진행되고 경제 발전이 확대되면서 이 물질적 기층은 점점 사회적 생산에 의해 만들어지고, 여러 사회적 힘에 의해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Smith, 2008, 50). 즉, 물질적 경관의 변천은 그 자체 자연의 생산 과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러한 차이의 결과가 불균등 발전의 물질적 징후가 된다.

제2의 자연은 칼 짐머러(Karl Zimmerer)의 ‘보존 지역’ 연구로 이어진다. 짐머러는 수익의 창출, 자본축적의 전망, 자원의 일반적인 경제적 가치 평가(예: 생물다양성, 생태관광) 등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현대의 보존 지역 지정 붐 현상을 ‘제2의 자연’ 개념으로 분석했다. 자연의 보전 지역(conservation territory)은 자본의 생태적 단계(ecological phase of capital), 자연의 사유화, 상품화 된 자연의 생산 및 새로운 인클로저 운동 등에 의해 구축되었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생물권 보호지역(biosphere reserves), 유산 등록지(heritage sites), 산림 보호구역(forest compacts), 보존 지역(conservation areas), 민간 생태관광 보호구역(private ecotourism preserves) 등 매우 다양하다. 인간이 생산한 보존 경관, 즉 ‘제2의 자연’에는 규제된 토지이용과 관리환경과 같은 ‘자연-사회 혼합물(nature-society hybrids)’이 많다. 특히 자연 보존에 있어서 ‘경계(boundaries)’는 필수적이며, 완충 지역, 문화 지역 및 전환 지역은 많은 경우에 엄격한 경계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중간 지역은 토지와 기타 자원의 사용에 대한 엄격한 규제의 공간이며, ‘핵심 구역’은 ‘국립공원’과 같이 보호된다(Zimmerer, 2000, 356-363).

제2의 자연인 국립공원에서 국가는 야생동물의 관리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경관의 변화까지 이끌어내고, 변화된 물질적 환경에 인간의 노동의 흔적을 남긴다. 국립공원 구역 내에는 미장원, 레스토랑, 캠핑장과 요기베어(Yogi Bear) 엽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문화 체험이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옐로우스톤국립공원과 요세미티국립공원은 이러한 시설에서 매년 상당한 이익을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의 요점은 자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해 자연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Smith, 2008, 80-81).

한편, 자연의 생산 개념은 자연을 생산하고 변형하는 데 있어 자본 및 사회의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자연’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Castree, 1995, 20; 김숙진, 2010, 461-477). 그리고 스미스는 국립공원의 소비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고찰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넓은 의미에서 자본축적 과정의 일환으로 취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공원의 ‘원생자연(wildness)’ 사고방식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자연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서부개척을 근간으로 하는 아메리카 내셔널리즘이 정당화되고, 미국적 정체성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탈식민주의적인 표상의 정치학에 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나카시마 고지 저, 심정보 역, 2010, 133-134). 또한 사회적 자연 개념이 단순하게 수용되거나 사회결정론적인 ‘사회적 구성론’으로 받아들여지면, 복잡한 자연을 단면적으로 인식하는 ‘환원주의(reductionism)’가 될 수 있다(Sack, 1997, 2; 신성희, 2016, 86에서 재인용).

이에 사회적 구성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국가-자연’ 관계에 대한 연구와 결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국가가 자연을 중앙집중화(centralization), 영역화(territorialization)와 틀짓기(framing) 등과 같은 공간 전략을 사용하여 정치-경제적 목적을 위해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발전시킨다(Whitehead et al., 2007, 16). 국가-자연 관계는 축적전략과 헤게모니 프로젝트 간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는데, 황진태는 박정희 정권의 수자원 정책(1961~1979년)에 초점을 맞춰, 국가 내에서나 국가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는 사회세력에 의해 국가-자연의 관계가 물질적으로, 그리고 담론적으로 생산되는 방식을 면밀히 탐구하였다(Hwang, 2015). 특히, 국립공원은 국가-자연 관계 형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가가 국가-자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 자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공간적 전략은 자연을 통한 통일된 국가정체성의 형성, 즉 내셔널리즘 진작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국이 같은 방식으로 제국-자연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에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것은 식민지 자연이 제국의 국가정체성의 일부로 전유되어 제국의 영토로 상징화되는, 즉 제국의 건설 과정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국립공원 지정 과정, 즉 국가/제국-자연 관계 형성 과정에서 자연은 자본축적의 대상으로도 생산되었다(김지영, 2021, 109-110).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바탕으로 본 연구는 ‘제2의 자연’으로서 제국-자연 관계 형성 과정, 즉 ‘일제’가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논하는 과정에서 자본축적 전략으로서 금강산을 생산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일제’가 통치 공간으로 영역화되지 않았던 금강산을 국립공원이라는 제도로 포섭하고, 자본축적 전략으로서 자연을 생산해가는 과정을 다층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2의 자연으로서 제국-자연 관계 형성 관점이 유효하다고 보았다. ‘일제’가 금강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함으로써 식민지 관광지로 이용하려고 했던 ‘특정 상황’을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본래 자연의 사회적 구성 개념은 ‘자연은 그 구성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자연은 문화의 일부이다’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자연을 주어진 사물로 이해하는 지식의 권위를 강조하는 근대 과학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나 이는 자연-사회 간의 물질적 상호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다. 스미스의 ‘제2의 자연’은 사회-자연 관계를 매개하는 노동과 생산의 중심성을 강조하고, 그 역사적 과정에 따라 분석이 가능하다(최병두, 2009, 23-24). 본 연구는 국가로 대별되는 조선총독부 중심이 아닌 다양한 주체가 금강산을 이용의 대상으로 생산해가는 ‘과정’을 탐구하고자 하는데, 이는 ‘제2의 자연’ 논의에서 강조되는 관점, 즉 여러 주체 간의 역학관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자연의 의미가 창출되고, 그 의미의 영유를 둘러싸고 주체 간의 갈등・대립이 전개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본 논문의 분석틀로 적합하다고 보았다. 또한 본 연구는 자본축적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제2의 자연’으로서 제국-자연 형성 과정을 살펴볼 예정이지만, 제국-자연 관계는 제국이 정치적 목적으로 자연을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4) 따라서 이 관점은 탈식민주의적인 표상의 정치학에 대응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점을 유념하면서 금강산국립공원 논의 속에서 다양한 사회세력이 경제적 목적으로 생산한 물질적 환경 변화를 재구성하여, ‘제2의 자연’으로서 일본제국-금강산 생산 과정을 조명하고자 한다.

3. ‘제2의 자연’으로서 제국-자연 형성

1) 금강산국립공원 계획 수립

1914년 경원선 철도 개통에 이어 1915년 시정 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개최 이후, 1916년 일본 국립공원 아버지라 불리는 다무라 쓰요시(田村剛, 이하 다무라)는 금강산을 국립공원 풍경으로 처음 ‘재발견’하였다. 그는 금강산이 세계적인 명산임을 강조하며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것을 주장하였고, 안내도 등을 제작하기 위해 금강산 지역을 온정리 부근, 장안사 부근, 마하(연)암 부근, 유점사 부근, 고성 부근으로 나눌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역사미와 전설미의 연구, 승지의 명명, 교통 기관, 숙박시설 등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田村剛, 1916).

1920년대 금강산 관광개발이 본격화되자, 1923년 다나카 만이츠(田中萬逸) 의원5)과 1927년 마키야마 고조(牧山耕蔵) 의원6)은 중의원에 금강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고 건의하였다. 1927년에는 강원도평의원(江原道評議員) 장명준과, 공영회장(共榮會長) 이세 소오시치(伊勢總七)는 고성주민대표로서 순시 중인 정무총감에게 국립공원 지정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7)

1920년대에는 사철(私鐵) 회사 금강산전기철도(주)가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관광 인프라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4월 금강산전기철도의 설립자 구메 다미노스케(久米民之助, 이하 구메)는 금강산과 주변의 답사를 진행하였다. 당시 금강산은 세계적인 경승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통편이 불편해서 관광객 수가 적은 상황이었다. 구메는 금강산의 지경학적(地經學的) 특성을 활용한 수력발전과 수력발전에서 개발한 전력을 동력으로 하는 전기철도 부설을 계획하였다. 이후 그는 당시 일본 재계 유력자와 공동으로 회사 설립을 추진하였고, 금강산전기철도를 1919년 12월 16일 설립하였다. 1924년 철원역-김화역 구간을 시작으로 1931년 말휘리-내금강 구간에 금강산전기철도가 차례로 개설되었다. 금강산전기철도의 주가는 1926년 주당 평균 11원에서 1927년 57.4원으로 급등하였다.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이 제국의회에 제출되면서 개통된 역 주변에 개발의 붐이 일었기 때문이다(정안기, 2018, 6-20). 금강산전기철도는 1927년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청원을 진행하는 동시에 제반시설에 100만원의 투자 계획을 세우고 금강산 관광 개발을 주도하였다. 당시 금강산전기철도는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고려하여 ‘내금강역-말휘리-신풍리-온정령-만물상-온정리’ 구간에 전기철도 부설을 계획하기도 하였다.8)

금강산전기철도는 1929년 8월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1,638m)을 중심으로 내・외금강을 잇는 탐승로를 개설하였다. 비로봉 탐승로의 전체길이는 약 2리(里) 반9)(약 9.8km)이었고, 개설비용은 1,200원이었다. 탐승로가 설립된 이후로도 금강산전기철도는 매년 많은 금액을 수리비로 투자하였다. 그리고 1932년 비로봉 정상 부근의 용마석에 휴게소와 매점을 겸한 간이숙박소 구미산장(건설비 약 200원)을 설치하였다(岡本曉翠, 1932, 310-311).

1927년은 일본 경제심의회가 일본의 경제 개발로 훼손되는 풍경을 보호하고, 보호된 풍경을 이용하여 외화획득을 하고자 국립공원 지정을 제안한 해이다(Oyadomari, 2011, 329; 水内佑輔・古谷勝則, 2014, 417). 일본은 원생 풍경을 앞세우면서 풍경을 관광지로 이용한다는 미국의 국립공원 이념을 1931년 4월 1일 발표된 국립공원법에 거의 계승했고, 이를 식민지 대만과 조선에도 이식하였다(김지영, 2021, 115). 1930년대에는 일본제국이 자국10)뿐 아니라 식민지 대만11), 식민지 조선에서 동시에 국립공원 제정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1930년 1월 16일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제1회 금강산보승경영타합회(金剛山保勝經營打合會, 1차 타합회12)를, 1930년 2월 28일 제2회 금강산보승경영타합회(2차 타합회)를 개최하였다. 1차 타합회 이후에 산림부는 본격적으로 금강산을 국립공원에 적합한 풍경으로 재편하기 위해 조경학자 다무라와, 우에하라 게이지(上原敬二, 이하 우에하라)에게 풍경 조사를 위탁하였다. 그 결과 1930년 다무라와 조경학자 고사카 다쓰오(小坂立夫, 이하 고사카)는 「금강산풍경계획서(金剛山風景計画書)」(이하 다무라 보고서)를, 우에하라와 조경학자 요시무라 이와오(吉村厳, 이하 요시무라)는 「금강산공원계획제1회계획서(金剛山公園計画第一回計画書)」(이하 우에하라 보고서)를 팀을 이루어 조선총독부 산림부에 제출하였다.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1931년 3월 18일 개최된 금강산풍경계획에관한타합회(金剛山風景計画ニ関スル打合會, 이하 3차 타합회)에서 다무라 팀과 우에하라 팀이 제출한 두 개의 보고서와 조선총독부 산림부의 결정을 일람표로 작성하여 「금강산풍경계획안(金剛山風景計画案)」(이하 ‘산림부 안(1931)’)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931년 4월 8일 금강산풍경계획에관한타합회(이하 4차 타합회)에서 담당부서별 시설 구축을 논의하였다(김지영, 2021, 114-120).13)

다음 절에서는 금강산국립공원 계획 과정에서 등장하는 사회세력들, ‘일제’의 ‘금강산 생산’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1930년의 다무라 보고서・우에하라 보고서와 이 두 보고서를 기반으로 하여 조선총독부 산림부가 제시한 ‘산림부 안(1931)’을 중심으로 한다. ‘산림부 안(1931)’에서 두 학자의 풍경계획은 경합하였고, 최종 조선총독부 산림부의 선택이 이루어졌다. ‘산림부 안(1931)’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뉘어 있는데, ‘공원구역’, ‘연락(連落)을 위한 시설(도로와 통신)’, ‘교화와 오락시설(탐승객들의 휴양 및 향락을 위한 시설)’, ‘관리 경영(관리자 지정, 법규 제정)’ 등이 그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연락(連落)을 위한 시설’과 ‘교화와 오락시설’을 중심으로, 자본축적 전략으로서 금강산을 생산하는 사회주체들의 경합 과정에 주목한다.

2) 금강산 풍경 구성을 위한 도로 건설 계획

‘일제’는 금강산으로의 관광객의 유치를 위해 탐승을 비롯하여 편의 시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로(전차, 자동차, 도보 탐방로) 설치를 제일 먼저 논의하였다. 1931년 내금강역과 1932년 외금강역이 완성되는 것에 시간을 맞추어, 금강산 내부로의 접근성 향상을 위한 것이었다. 도로 계획은 금강산 관광객의 시각적 경험을 구성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풍경은 ‘자동차 공간’에서 하나의 사건이 되며, 항공사진에서 볼 수 있는 일차원적 관점과 비견된다. 국립공원 설계자들은 도로에서 보이는 일차원적인 관점의 아름다운 풍경과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제거하고,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움’에 대해 시각적으로 지시한다(Soper, 1995, 241-242).

(1) 관광객의 시각적 구성을 위한 간선도로 구축

다무라는 국립공원 구역 내의 도로는 기존 것으로 충분하지만, 금강산을 ‘완전한 풍경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신설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보았다. 신설해야 할 자동차도로 양측의 풍경은 도로이용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적어도 폭 20간(間)14) 이상의 풍치림대(風致林帶)를 설치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신설해야 할 주요 노선 중 내금강과 외금강을 연결하는 ‘말휘리-장안사-내금강-비로봉-외금강 온정리’ 구간을 가장 중요한 탐승도로로 꼽았다. 이 구간의 ‘말휘리-장안사’, ‘온정리-신계사’ 는 자동차도로가 있으므로, ‘신계사-일광대’를 자동차도로로 연장하는 것이 급무라고 하였다. 또한 ‘말휘리-신풍리-온정령-온정리’ 구간에서 ‘말휘리-신풍리-세동’은 자동차로 이용이 가능하고 ‘세동-봉전’은 전철(電鐵)이 지나는데 봉전에서 온정리를 자동차도로로 연결한다면, 앞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할 것으로 예상했다. 내금강과 신금강을 연결하는 ‘장안사-사선교-내무재령-신금강 유점사’ 구간도 주요하다고 보았다. 이 구간의 기존 도로를 개수하여 훌륭한 보도(步道)로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또한 ‘장안사-외무재령-유점사-개잔령-백천교리-남강-신계천-온정리’ 구간에서 ‘온정리-백천교리’는 자동차도로가 있는데, 나머지도 자동차도로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田村剛・小坂立夫, 1930, 27-29).

우에하라는 도로 개설 논의 이전에 도입 가능한 교통의 종류와 그 목적을 언급하였다. 그는 미국 국립공원과 같이 공원 내 연결을 자동차로 하는 대신, 공용구역에서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길 원하였다. 풍경 유지를 위해서 산간에는 자동차도로 건설을, 신풍리 혹은 세동에서 온정령에 이르는 구간에는 전철 궤도 부설을 권하지 않았다. 고대 원시미를 살리기 위해 가마를 운영하는 한편, 풍경 보존을 위해 근대적 탐승교통수단으로서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편, 여름・가을 유람기간에는 일정 기간 동안 경성에서 금강산으로 오는 정기항공로를 개통하여 비행기를 운항할 것을 제안하면서, 착륙장 후보지로 장정리(長亭里)15)를 언급하기도 하였다(上原敬二・吉村厳, 1930, 9-11).

우에하라는 도로망의 종류를 연락(連絡)도로, 회유로도, 탐승도로로 나누었는데 그 중 연락도로가 간선도로이고, 회유도로와 탐승도로는 도보탐승로이다. 그는 ‘연락도로’를 크게 대연락도로(자동차)와 소연락도(자동차, 도보)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자동차가 다니는 대연락도로인 ‘흡곡-장전-온정리’ 구간과 ‘장안사-말휘리-신풍리-온정리’ 구간 등은 현재 노선으로 충분하고, ‘온정리-고성-백천교리-유점사-외무재령-장안사’ 구간을 우선 착공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소연락도로인 ‘온정리-구만물상-온정령’ 구간은 ‘온정리-삼가리’를 자동차도로를 신설하고 나머지는 도보 또는 가마를 이용하는 것을, ‘온정리-신계사-구룡연-비로봉-장안사’ 구간은 신계사까지 현재와 같이 자동차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도보 또는 가마를 이용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사선교-내무재령-유점사’ 구간은 현재 도로를 개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내금강과 외금강을 잇는 ‘백천교리-외무재령-장안사(제1선으로 칭함)’ 구간과 ‘온정리-구만물상-온정령-신풍리(제2선으로 칭함)’ 구간 중에 우에하라는 제1선을 자동차도로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구간의 거리가 짧아서 설치비용이 적게 들고 풍경도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장래 동해해안선 개통 등을 고려해서 고성과 연결되는 제1선을 연락도로로 개설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제1선의 자동차 회유로 상에 북쪽 금강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이 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희열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제2선은 한하계(寒霞溪)를 따라 겨우 1리(약 3.93km) 내외만 자동차로 갈 수 있는데, 그 마저도 수림(樹林) 사이를 누비고 나가야 해서 폐쇄된 풍치와 같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제2선의 자연미를 영원히 보존하고, 금강의 생명이라고 할 만한 만물상의 관상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하였다(上原敬二・吉村厳, 1930, 13-17).

두 전문가는 내금강과 외금강을 잇는 도로를 개설할 때, 먼저 개설해야 하는 지역에 대한 의견차이를 보였다. 다무라는 내금강과 외금강을 연결하는 ‘장안사-온정령-온정리’ 구간을, 우에하라는 내금강과 신금강을 연결하는 ‘백천교리-외무재령-장안사’ 구간을 우선적으로 정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무라는 그 이유로 이용자 수가 많고, 길가 풍경의 질이 좋을뿐더러 풍경 파괴에 미치는 영향 적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하계의 지형이 웅대하기 때문에 자동차도로의 건설로 풍경에 미치는 영향은 작다고 판단하였다.

조선총독부 산림부 ‘산림부 안(1931)’에서는 두 전문가가 제안한 도로 계획을 ‘간선도로’라고 칭하고 다무라의 계획을 내금강과 외금강을 연결하는 노선 두 개, 즉 ‘장안사-온정령-온정리(자동차, 전차)’, ‘장안사-외무재령-온정리(자동차)’로 정리했다. 우에하라의 계획은 내금강과 외금강을 연결하는 ‘장안사-온정령(전차, 자동차, 도보)’, ‘장안사-외무재령-온정리(자동차)’, ‘온정리-온정령(자동차, 도보)’ 등으로 정리하였다. 최종적으로 산림부는 두 전문가의 안을 모두 수용하여, ‘장안사-온정령-온정리(전차, 자동차, 도보)’와 ‘장안사-외무재령-온정리(자동차)’에 도로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였다(조선총독부, 1931. 4. 10, 13-14). 즉, 산림부는 다무라와 우에하라가 극찬하는 풍경을 모두 활용하여 도로 계획을 세웠다.

(2) 관광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탐승로 개발

다무라는 탐승로 및 등산도로 부분에서 현재 개통되어 있는 노선 외에 많은 노선이 신설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봉우리에 등산로를 개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등산로는 큰 위험이 없이 무난하게 통과 할 수 있는 정도가 좋으며 과하게 훌륭한 도로는 오히려 흥미가 줄어 들 수 있다고 염려하였다. 다무라는 먼저 제1기에는 내금강과 외금강에, 제2기에는 신금강과 오금강(奧金剛)16)에 탐승로를 개설하자고 제안하였다. 내・외금강의 연락(連絡)을 위한 2개 노선, 내금강 8개 노선, 신풍리 구역 3개 노선, 신금강 5개 노선, 외금강 8개 노선, 천불동 선창곡 구역 5개 노선, 내외 종횡주로(縱橫走路) 2개 노선을 탐승로 개통 지역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내・외금강을 연결하는 ‘장안사-비로봉-일광대’ 구간을 가장 중요한 탐승도로 꼽았다. 따라서 ‘말휘리-장안사’와 ‘온정리-신계사’ 사이에 각각 자동차도로가 지나는데 이 둘을 이어주는, 즉, ‘말휘리-장안사-비로봉-외금강 온정리’ 구간을 탐승로로 연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하였다(田村剛・小坂立夫, 1930, 29-31).

우에하라는 각 탐승로는 보통 탐승로, 약간 다리 힘이 강한[健脚] 사람의 탐승로, 가장 다리 힘이 강한 사람의 탐승로 등으로 구분하여 구비할 것을 제안하였다. 내・외금강의 연락(連絡) 2개 노선, 내금강 12개 노선, 신풍리 구역 6개 노선, 신금강 9개 노선, 외금강 13개 노선, 천불동 선창곡 구역 7개 노선, 내외 종횡주로(縱橫走路) 2개 노선, 해금강 4개 노선을 탐승로 개통 지역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풍경의 가치는 절대적・객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유람자의 심리를 연구해서 탐승로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上原敬二・吉村厳, 1930, 17-21). 우에하라는 각 구역별 탐승로에서도 다무라보다 많은 탐승로를 제시하고 있고, 해금강을 포함하여 다양한 탐승로를 계획하였다.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간선도로는 두 사람의 안을 적절히 혼합해서 수용하였고, 탐승로는 다무라 안을 기본으로 해서 우에하라 안을 추가로 반영하였다.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최종 내・외금강의 연락(連絡) 2개 노선을 제안하고, 내금강 11개 노선, 신풍리 구역 4개 노선, 신금강 5개 노선, 외금강 8개 노선, 천불동 선창곡 구역 4개 노선, 내외 종횡주로(縱橫走路) 2개 노선을 탐승로 개통 지역으로 정하였다(조선총독부 산림부, 1931. 4. 10, 15-18). 산림부는 두 전문가가 제시한 코스를 거의 수용하였다. 관관광객들이 다양한 탐승로를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다무라 보고서와 우에하라 보고서, 산림부 안(1931) 등을 참고하여 각 주체별 도로계획도를 그렸다(그림 1, 2, 3).17) 지도를 분석해 보면, 세 주체 모두 금강산국립공원 전 지역을 오갈 수 있도록 공원 외곽을 자동차도로로 연결하고자 하였다. 즉, 내금강의 ‘탑거리-신풍리-온정령’을 넘어 외금강 ‘온정리-백천교리’에서 신금강 주변의 ‘개잔령-외무재령’을 통해 내금강 장안사를 연결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림 1에서 다무라는 ‘탑거리-말휘리-세동’ 구간에 전기철도를, ‘신풍리-온정령-온정리’ 구간에 자동차도로를 먼저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반면, 그림 2에서 우에하라는 ‘백천교리-외무재령-장안사’ 구간, 즉, 온정리에서 신금강, 내금강을 잇는 자동차 도로를 먼저 개설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림 3을 보면 산림부는 이를 다 수용하여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해당 구간의 자동차도로를 건설을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두 전문가는 제시하지 않은 '온정령-만물상-온정리'에 전기철도 부설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는 1927년 금강산전기철도가 전기철도 부설을 계획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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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930년 다무라 쓰요시의 금강산국립공원 구역과 도로계획도
(자료: 田村剛・小坂立夫(1930)조선총독부 산림부(1931. 4. 10) 내용을 참고하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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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30년 우에하라 게이지의 금강산국립공원 구역과 도로계획도
(자료: 上原敬二・吉村厳(1930)조선총독부 산림부(1931. 4. 10) 내용을 참고하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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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1931년 조선총독부 산림부의 금강산국립공원 구역과 도로계획도
(자료: 조선총독부 산림부(1931. 4. 10) 내용을 참고하여 그림)

지도의 보도(步道) 탐승로를 보면, 금강산국립공원 내부의 내・외・신금강의 곳곳을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장안사-비로봉-옥녀봉-상팔담-일광대'로 이어지는, 즉, 내금강과 외금강을 잇는 보도탐승로가 주요하였다. 우에하라는 기선을 타고 장전항을 통해 외금강으로 입산하는 탐승객과 외금강역을 통해 해금강으로 입산하는 탐승객까지 염두하고 보도탐승로를 계획하였다. 산림부는 해금강을 국립공원 구역으로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금강 지역의 보도탐승로를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전항에서 외금강으로 입산하는 탐승객을 고려해서 보도탐승로를 만들고자 하였다. 다무라는 보도탐승로를 계획할 때, 내금강역 중심으로 입 산한 탐승객을 주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전과 천불동 등 장전항을 통해 입산하는 경우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금강 방면에서 온정리로 오는 도로를 2기로 계획한 것을 봤을 때, 내금강역을 보도 탐승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으로 판단된다.

3) 근대 위생・휴향・향락 시설 설치를 위한 공간 설정

‘일제’는 도로 계획 다음으로 편의 시설을 계획하였다. 관광객이 탐승할 때 필요한 안내판, 화장실, 숙박시설, 오락시설 등과같은 시설의 종류와 개별 시설을 설치할 지역, 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시설집중지역' 등에 대한 논의였다. 시설집중지역 설정은 도로 계획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는 계획이기도 하다.

(1) 건조환경(建造環境)의 중심지, 시설집중지역

금강산에서 논의되는 건조환경은 전근대 금강산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시설의 종류는 크게 숙박시설(호텔, 여관, 대별장(貸別莊), 산소옥(山小屋), 야영장), 교화와 오락시설(박물관, 천연동식물장, 소운동장, 골프장, 테니스코트, 스케이트장, 스키장, 수영장, 낚시터, 자연과학관, 공회당, 유원지), 노방시설(피난소옥, 전망소, 조망대, 휴게소, 변소, 게시판, 이정표, 안내표, 지경판(指景盤), 수음장(水飮場), 지도표(指導標), 벤치, 온천욕장, 상하수, 자동차 발착소, 매점, 음식점, 찻집) 등이다.

다무라는 시설 지구에 대해서 ‘풍경지의 이용의 중심지가 되는 곳으로서 숙박, 휴양, 운동, 위락 등 문화시설을 집중하는 지구’라고 하고, 탑거리, 장안사, 신풍리, 유점사, 온정리 등을 언급했다(田村剛・小坂立夫, 1930, 23-24). 우에하라는 시설 지구를 ‘적당한 휴양, 위락, 위안, 편익을 제공하기 위해 각종 용도에 적합한 것을 제공하기 위한 지구’라고 정의하였다(上原敬二・吉村厳, 1930, 8). 장안사 방면, 신풍리, 유점사, 온정리, 신계사, 삼일포 등을 꼽았다. 우에하라가 꼽은 신계사와 삼일포는 다무라가 언급하지 않은 지역이다.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시설집중지역’을 ‘탐승의 중심지가 되는 곳으로서, 그 중요한 정도에 따라 필요한 시설을 집중’하는 지역으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① 내・외금강에 있어서 대(大)중심지로서 숙박, 교화, 위락 기타 시설을 집중할 제1위 지구: 탑거리, 장안사, 온정리 ② 내・외금강 연결과 그 부근 탐승의 중심지: 신풍리, 유점사 ③ 한적한 숙박지 시설 지역: 신계사, 삼일포, 표훈사 등으로 나누었다(조선총독부 산림부, 1931. 4. 10, 13-14).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다무라와 우에하라가 제시한 지역에 표훈사까지 더해서 지역별 기능에 중점을 두었다. 해금강은 조선총독부 산림부의 금강산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숙박시설을 설치하여 관광객이 찾도록 유도하였다. 산림부는 당시 철도국이 경영하던 장안사 호텔을 표훈사 부근으로 이전할 계획이었다. 장안사 호텔 자리를 시설집중지역으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2) 근대 위생・휴양・향락 시설

다무라는 도로와 통신 시설 이외의 주요 시설은 내금강, 외금강, 신금강, 신풍리 방면에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내금강의 중심지는 단연 장안사와 탑거리이지만, 탑거리는 공원 외의 지역이라 논외로 하고 4개 구역(장안사, 온정리, 신금강, 신풍리)을 나누어 계획하였다. 그는 장안사를 내금강의 탐승 및 등산을 위한 입구이자 피서지로서 각종 시설을 완비해야 하는 곳으로 꼽았다. 숲이 울창한 장안사 거리 풍경에 여관, 호텔, 매점, 음식점 등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철도국이 경영하는 장안사 호텔을 표훈사 부근으로 이전하고 호텔 자리에 수영장, 운동장, 대별장(貸別莊), 캠프장 등을 신설하자고 주장하였다. 온정리는 외금강의 중심지로서 많은 시설이 이미 있지만 앞으로 완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1년 내내 목욕객을 맞이할 수 있는 온천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등산, 탐승에 대한 시설과 함께 휴양, 향락에 대한 시설을 완비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미래에 내・외금강의 발전과 함께 신금강을 잇는 자동차도로가 개통되면 신금강에 많은 시설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리고 신금강의 중심지로 유점사를 꼽았다. 유점사 기온이 장안사, 온정리보다 낮아 피서지로 제일 적합할 것이므로 숙박시설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를 설치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신풍리는 추후 자동차도로가 개통되었을 때, 내・외금강을 연결하는 금강산의 관문이 될 것이므로 많은 시설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봉전에서 세동에 이르는 지역은 전차와 자동차의 발착지점이므로, 숙박시설 등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였다(田村剛・小坂立夫, 1930, 32-36).

이에 비해 우에하라는 시설의 종류별로 나누어 계획했다. 숙박시설, 신시가지 시설, 각종 휴양시설, 각종 건설물, 노방시설 등으로 나누어 시설별로 설치되어야 하는 지역을 언급하였다. 우에하라는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신계사 일대를 중심지로 삼아 계획을 세우길 주장하였다. 온정리는 온천 이외에 특징이 없지만, 깨끗하고 새로운 호텔을 경영하면 중심 지점으로서 적당하다고 했다. 그리고 1, 2기를 정하여, 먼저 추진할 제1기의 계획을 제안하였다. 한편, 그는 다무라와 달리 현재 장안사 호텔의 위치가 적당하다고 하였다. 그는 캠프시설과 텐트시티와 관련해서 미국국립공원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리고 시설을 이용할 때 유료 또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유점사, 신계사와 같이 피서지로서 적합한 지역에 캠프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에하라는 두 번째로 신시가지를 언급하면서, 온정리와 탑거리를 그 대상지역으로 제안하였다. 신시가지는 미국이나 캐나다의 국립공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이용을 주로 하는 곳이다. 공원 내에 지역을 정해서 하나의 도시 계획을 입안・설계하는 것인데, 공회당을 중심으로 자연과학관, 필드하우스(체육관), 식물원, 소동물원, 소록지대, 식수대, 실내오락장(체육 운동 겸), 소운동장, 수영장, 화원 등을 배치하고 그 바깥에 호텔, 캠프장, 여름 별장지대를 추가로 짓는 것을 계획하였다(上原敬二・吉村厳, 1930, 22-27).

시설과 관련해서 두 전문가는 숙박시설과 교화와 오락시설 등 대체로 비슷하게 제안하였다. 다무라는 노방(路傍) 시설 중 피난소옥, 전망대와 조망대, 휴게소, 변소 등만 제시했고, 우에하라는 다무라가 계획한 것에 더해 탐승안내를 위한 게시판 이정표, 안내표, 지도표, 벤치 등 관광객들이 길을 잃지 않고 곳곳을 탐방할 수 있는 안내 시설을 추가로 제안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산림부는 우에하라가 제안한 시설지구를 따로 마련한다는 계획은 언급하지 않았다. 호텔, 여관, 대별장, 산소옥은 대체로 두 전문가의 안을 적절히 수용하고 있으며, 야영장은 대체로 다무라 안을 따랐다. 그 외에 교화와 오락시설 중 박물관, 천연동식물, 소운동장, 테니스코트, 스케이트장, 스키장, 풀(수영장), 조어장(낚시장), 공회당, 유원지 등을 계획에 포함하고 자연과학관은 포함하지 않았다. 노방시설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에하라 안을 따랐다(조선총독부 산림부, 1931. 4. 10, 19-24).

일본 국립공원 역사에서 대체로 1920년대 다무라는 이용 중심의 국립공원관을 지지하고 우에하라는 보호 중심의 국립공원관을 갖았다고 평가되었다. 1920년대 우에하라는 다무라의 국립공원론이 보호 중심이 아닌 ‘자연의 이용’ 중심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水内佑輔 등, 2016, 435-436; 水内佑輔, 2015, 45).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1930년대 다무라와 우에하라는 공통적으로 금강산 풍경을 관광자원으로서 상정하고, 일정 구역을 보호하는 동시에 시설구역의 자연은 이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우에하라는 미국이나 캐나다의 국립공원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시업(施業)18)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관광자원으로 이용하여 더 많은 탐승객을 유치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조선총독부 산림부도 도로와 시설 등을 계획할 때, 대체로 다무라 안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우에하라 안도 많이 수용함으로써 금강산 풍경을 최대한 관광자원으로서 이용하고자 하였다.

4) ‘제2의 자연’, 금강산국립공원 만들기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3차 타합회 이후, 1931년 4월 8일에 진행된 4차 타합회에서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이전에 시행할 수 있는 시설과 기관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에 각 담당기관과 부서는 협의 내용을 수행해 나갔다. 1931년 가을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신풍리 봉전에서 시작하여 구성동 계곡을 돌아서 비로봉 위 용마석의 산막에 이르는 약 8.7km의 탐방로를 신설하였다. 신설 비용은 2,400원이었다. 1931년 철도국은 사선교에 캠프시설을 마련하였다. 사선교는 내금강에서 가장 경치가 그윽하고 조용하여 휴양지로 꼽히는 곳이며, 신금강과 외금강을 같이 살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철도국은 하계(7월 25일부터 9월 7일까지) 캠프장(동 수 5, 그 외 취사장, 식당, 목욕탕 등)을 운영하였다. 그 운영 경비가 1,200원이었으며, 이용자는 연 400명이었다.

체신국에서는 1931년 10월, 온정리-신계사 사이에 전화선을 설치하였다. 특히 자동차를 이용하는 탐승자를 위해서는 경승지 안팎의 주요지점을 연락하는 전화선이 필요한데, 가장 주요한 온정리-신계사 사이에 경비 820원을 들여 설치하였다. 전신주의 재료는 신계사에서 기부하고, 그 채벌과 운반 등의 비용은 온정리의 유지가 부담한 결과였다. 강원도는 1932년 3월부터 탐승 상의 간선이 될 ‘말휘리-세동’ 구간 및 ‘온정리-삼가리’ 구간의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설치된 시설도 있었다. 금강국립공원 지정을 주장해오던 금강산전기철도는 1930년 강원도, 내무국, 학무국 등의 원조를 받아, 탑거리에 소도시 건설계획을 세우고 토지의 매수, 구획 측량 등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 공회당 및 일본식 여관을 건설했다. 43,000원의 공사비를 들여 건립한 공회당19)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내린 휘호 ‘금강각(金剛閣)’ 편액이 걸렸다(岡本曉翠, 1932, 293-297).

한편, 1931년 3월 18일 개최된 3차 타합회 자료에 조선총독부 산림부가 계획한 시설 중 이미 설치된 시설을 지역별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표 1). 당시 이미 설치되어 있는 시설 종류는 숙박 시설(탑거리, 장안사, 표훈사, 비로봉, 한천, 유점사, 온정리, 옥류동)과 휴식을 취하는 시설(만폭동, 사선교, 명경대, 봉전, 극락현 아래, 보광암 부근, 옥류동, 구룡연, 삼가리, 삼선암) 등이다. 이미 설치된 시설이 많은 지역을 보면, 장안사와 온정리가 관광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지역은 내금강역과 외금강역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내금강과 외금강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다.

표 1.

주요 시설의 지역별 일람표(3차 타합회 1931년 3월 18일 기준)

구역 지역 시설 계획 이미 설치[旣設]


탑거리 여관, 천연동식원, 소운동장, 공회당, 산책지, 변소, 상수하수,
자동차발착소, 매점, 음식점
여관, 공회당
탑거리 부근 골프장
장안사 대별장(貸別莊), 캠프장(유료), 박물관, 풀(pool), 조어장, 변소,
게시판, 이정표, 안내표, 자동차발착소
호텔, 여관(일본식 3개, 조선식 7개), 대별
장(貸別莊), 매점, 음식점, 자동차발착소
장안사 부근 테니스코트
표훈사 호텔(배재령 아래), 캠프장, 테니스코트(배재령아래), 조어장, 변소,
자동차발착소, 매점
여관(조선식), 매점(3개)
정양사 휴게소
만폭동 휴게소, 매점 매점
마하연 캠프장, 변소, 이정표 여관(조선식)
백운대 전망소
사선교 여관, 캠프장, 휴게소, 변소, 매점 매점
황천강 입구 캠프장
명경대 변소, 매점 매점
수렴동 휴게소
망군대 피난소옥, 전망소
금장동 휴게소


비로봉 산소옥, 조망소옥(眺望小屋), 변소, 안내표 산소옥, 변소
구성동 오(奧) 캠프장
구성동 입구 휴게소, 변소
삼성암 산소옥
봉전 매점 매점
세동 캠프장
한천 여관, 풀(pool), 조어장, 변소, 게시판, 이정표, 안내표, 자동차 발착소 여관


유점사 호텔, 여관, 대별장(貸別莊), 캠프장, 테니스 코트, 조어장, 변소,
게시판, 이정표, 안내표, 자동차발착소, 매점, 음식점
여관(2개)
선담 풀(pool)
구연폭 휴게소
미륵봉 전망소
차일봉 피난소옥
은선대 아래 캠프장, 휴게소, 변소
십이폭포 아래 휴게소
칠보대 전망소
채하봉 산소실
내무재령 산소옥, 휴게소
개잔령 조망소옥(眺望小屋), 휴게소
백천교리 여관, 휴게소, 변소


온정리 여관, 대별장, 천연동식물원, 소운동장, 호텔, 테니스코트, 스키장,
풀(pool), 조어장, 공회당, 산책지, 변소, 게시판, 이정표, 안내표,
온천욕장, 상수하수, 자동차발착소, 매점, 음식점
호텔, 여관(일본식 3개, 조선식 3개),
온천욕장, 자동차발착소, 매점, 음식점
온정리 부근 스키장
극락현 아래 캠프장, 매점 매점
신계사 대별장, 휴게소, 변소, 게시판, 이정표, 안내표, 자동차발착소 자동차발착소
신계사 부근 호텔
법기암 부근 캠프장
보광암 부근 캠프장, 매점 매점
일광대 휴게소, 변소, 자동차발착소, 매점
옥류동 휴게소, 매점 여관, 매점
상팔담 전망소
구룡연 조망소옥, 변소, 매점 매점
상팔담 위 전망소옥, 휴게소
월출봉 피난소옥
온정리 위 캠프장(유료)
삼가리 캠프장, 휴게소, 변소, 매점 매점
수정봉 전망소
삼선암 캠프장, 조망소옥, 변소, 안내표, 매점 매점(2개)
오(奧)만물상 전망소
온정령 휴게소, 변소, 이정표





이단폭포 캠프장, 휴게소
선인굴 피난소옥
허공폭 휴게소
이(裏) 만물상 피난소옥
천불동 입구 게시판, 안내표
천불동 산소옥, 캠프장, 휴게소
오봉산 피난소옥, 전망소
선창곡 피난소옥

주: 본표에는 지경판, 수음장, 지도표, 벤치 등의 노방시설은 생략

4. ‘제2의 자연’으로서의 ‘금강산 생산’을 둘러싼 ‘일제’의 균열

1) 민관(民官) 협력단체 재단법인 금강산협회 설립과 ‘금강산 생산’

(1) 재단법인 금강산협회 설립 과정

1931년 3차 타합회 때,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긴급하다고 인정되는 내・외금강을 잇는 자동차도로, 경승지 내의 전화선, 탐승도로 및 산소옥(山小屋) 등의 설치비용 31,400원을 1931년도 예산에 반영하도록 일본에 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예산은 일본 탁무성에서 삭제되었고,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시설 확충 예산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岡本曉翠, 1932, 304). 게다가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금강산전기철도가 1920년대 후반에 이르자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과정에서 점차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20)

조선총독부는 1차 타합회부터 논의한 ‘민간 위원회’ 설립을 서둘렀다.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관련 업무를 위탁하여 관민(官民) 협동 체제를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민간 위원회는 1930년과 1931년에 개최된 총 4번의 타합회에서 ‘금강산보승회’(가칭)라는 이름으로 논의되었다. 본래의 금강산보승회는 1930년대 논의되던 ‘금강산보승회’(가칭)와는 다른 조직이었다. 금강산보승회는 1915년에 시정 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금강산을 소개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5년 당시 정무총감이었던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가 금강산보승회 총재로 추대되었고, 이규완 강원도지사가 회장이었다. 이후 관계(官界)의 이동과 경비(經費) 조달 등의 문제로 특별한 활동은 없었다. 1925년경 고니시(小西) 내무부장이 금강산보승회의 목적을 살려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금강산보승회는 1930년까지 사실상 운영되지 않고 있었다(조선총독부 산림부, 1930. 1. 16, 163).

1930년 1월 1차 타합회 이후 조선총독부 관계부국(내무, 학무, 체신, 철도, 산림), 강원도청, 금강산전기철도의 관계자 등이 수시로 모여 협의회를 개최하며 국립공원 실현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이 협의회에서 보승경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관(官)의 시설에 조력해야 할 기관설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조력기관으로서 재단법인의 형태로 설립하고 재단의 명칭, 설립 목적, 사업 등을 논의하였다(岡本曉翠, 1932, 302-303).

당시 금강산전기철도는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과정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금강산협회를 조직하는 과정에는 적극적으로 임했다. 1930년 1차 타합회에 참석한 금강산전기철도 안도 마타사부로(安藤又三郞) 전무는 민간 위원회 설치를 위한 구체적인 안(案)을 제안하였다. 당시 그는 위원회 명칭과 목적, 사업, 자금 조달 방법, 역원, 잡건 등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언급하였다(조선총독부 산림부, 1930. 1. 16, 174-176). 훗날 조선총독부가 1932년 금강산협회를 설립할 때 이를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금강산전기철도 구메 사장은 1930년 11월에 금강산협회 설립기금으로 20,000원을 기부하였다. 당시 기부금은 구메의 20,000원을 필두로 하여, 총 28,300원에 달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자산으로 하여 1932년 1월 30일 재단법인 금강산협의회 설립허가 신청을 했으며, 4월 11일자로 설립이 허가되어 4월 19일 등기를 마치고 1차 평의회를 열었다(岡本曉翠, 1932, 304-305).

금강산협회는 관(官)에 조력하며 금강산국립공원의 지정을 위한 각종 설비를 갖추기 위해 설립되었다.21) 설립당시 회장은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 정무총감, 부회장은 박영효(朴泳孝) 후작과 조선총독부 직속기관 조선전기사업조사회 위원인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였다. 그리고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해 저축되어 있는 30,000원, 민간의 기부금과 조선총독부의 보조 등을 예산으로 하여 아래와 같은 사업을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 금강산에 관한 각종 조사

2. 금강산의 소개 및 선전

3. 강연회 또는 전람회 등의 개최

4. 공회당 및 숙박, 휴게에 필요한 시설 및 그 경영

5. 운동, 오락 기타 유원 등에 관한 시설 및 그 경영

6. 별장 기타 주택지의 경영

7. 안내에 관한 제반 시설

8. 앞의 각호 외에 본회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각종 시설(岡本曉翠, 1932, 293-297)

일본제국은 내지(內地)와 외지(外地)의 국립공원 지정을 위해 관민(官民) 조직을 설립했는데, 금강산협회도 그 일환이었다. 일본제국은 일본에서 1929년 국립공원협회를, 식민지 조선에서 1932년 재단법인 금강산협회를, 식민지 대만에서 1935년 대만국립공원협회를 차례로 설립하였다. 일본제국의 국립공원협회는 국립공원 시설을 갖추고 추후 시설을 관리・운영하는 주체로 기능하였다. 금강산협회도 조선총독부 산림부에서 계획한 사안을 시행해 가면서, ‘자연의 생산’의 한 주체로서 부상하였다.

(2) 재단법인 금강산협회의 ‘금강산 생산’

금강산협회는 본격적으로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해 계획한 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림 4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1934년에 편찬한 『조선여행안내기』에 게재된 것과 같다. 금강산협회가실립된 1932년 4월에서 1934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주요 자동차 도로와 탐승로가 설비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4를 보면, 강원도가 1932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한 ‘말휘리-세동’ 구간, ‘온정리-삼가리’ 구간은 자동차도로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세동-온정령’, ‘삼가리-육화암’ 구간도 자동차 도로가 개설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금강 장안사-말휘리-세동-온정령-외금강 온정리-삼일포 부근-신금강 부근 백천교’ 구간에 자동차도로가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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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금강산협회에서 제작한 「조선금강산탐승지도」(소장처: 강원도디엠제트(DMZ)박물관 (관리번호: DMZ박물관 2474))

금강산 내부의 탐승로 또한 확충되었다. ‘사선교-비로봉’, ‘비로봉-구성동-봉전’, ‘비로봉-구룡연-비룡폭-옥류동-일광대-신계사-온정리’ 구간이 보도탐승로로 연결되었다. ‘비로봉-월출봉-장군봉-채하봉-집선봉-발연교-발연소’, ‘내무재령-일출봉-월출봉’ 구간에도 보도탐승로가 생겼다.

금강산협회는 1936년에 20,000원의 예산으로 도로를 신설 및 개수하고, 비를 피하기 위한 작은 집을 건축하는 동시에 구미산장의 수리도 계획했다.22) 1936년 8월에는 수미암 탐승을 위한 탐승로 구축 공사에 착수했다.23) 1937년 7월에는 철도국과 금강산협회가 외금강 구룡연에 현대식 건물인 관폭정(觀瀑亭)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금강산협회는 탐승객을 유치하고자 구룡연-동석동(動石洞) 구간(5,367m, 1,890원), 금제(金梯), 은제(銀梯)24) 하구(下口)-구미산장 구간25)의 탐승로 신설을 계획했다. 1937년 9월에는 금강산 세존봉에 신탐승로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신탐승로는 동석계에서 세존봉 1,160미터를 올라서 구룡연으로 내려가는 약 5km의 코스이다.26)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192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주체가 금강산의 근대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사실상 우리가 단순히 ‘관광정책’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제2의 자연’으로서 금강산국립공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1931년 제 3, 4회 타합회에서 수립한 계획의 실행은 1932년 금강산협회 설립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일본 내지(1934년)와 식민지 대만(1937년)은 국립공원이 지정되는 데 반해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2) ‘금강산 풍경’과 ‘금강산 중석’의 가치 충돌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자, 1934년에 고성군의 마쓰무라(松村)라는 사람은 강원도회(江原道會)에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수속촉진의 건’을 제출했다.27) 1935년에는 도쿄대학교 농학부 우치다 게이이치로(內田桂一郞) 교수가 금강산을 탐승한 후, 금강산국립공원계획이 무산된 이후 금강산협의회가 각종 시설 및 경영을 하고 있지만 법제력 없는 협회 사업으로 인해 풍경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그는 금강산 풍경의 이용 가치와 금강산에서 행해지는 임업, 광업, 수력전기산업 등의 국가산업 가치 중 어느 것의 가치가 더 큰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또한 온정리-육화암 구간의 자동차도로로 인해 온정천과 한하계의 아름다움이 파괴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교통시설(자동차도, 도로, 차고, 광장, 교량 등), 노방시설(지도표, 지명표, 벤치 및 탁자 등), 숙박시설(야영장, 산장, 여관, 식당, 매점 등), 기타 보건위생, 통신교화 시설 등에 관해서도 금강산 풍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국립공원법을 제정하여 풍경을 보호하고, 전문적인 토공기술자를 고용하여 여러 시설을 설치할 때 풍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였다(內田桂一郞, 1935, 178-187).

이렇듯 1930년대 중반까지 금강산국립공원이 지정되지 못한 이유는 금강산에 매장되어 있는 중석(텅스텐) 때문이었다. 중석(텅스텐)28)은 무기생산에 긴요한 물질인데, 금강산 중석은 1912년 온정리에 거주하던 일본인 오가사와라(小笠原鍵)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1914년 7월 발생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금강산 일대의 중석 도굴꾼이 횡행하였으나,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금강산 중석 도굴꾼은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 호남지방에서 생산된 중석이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면서 한반도에서 생산된 중석은 가격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특수광의 수요가 급증한 상황이었다. 일본 중석(텅스텐) 수요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던 중국으로부터 중석 수입이 막히면서, 한반도 중석의 가치가 폭등하였다. 따라서 당시 금강산 지역에는 중석 도굴로 생계를 유지하는 도굴꾼과 이들에게 음식과 유흥을 제공하면서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손용석, 2020, 233-254). 다시 금강산에 중석 도굴꾼이 등장한 시기는 1934년 즈음이다.29) 금강산 수연(水鉛)30)과 중석 도굴꾼이 지속적으로 생김에 따라, 1937년 조선총독부는 ‘보승(保勝)’에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개발을 허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31) 1938년 광구허가를 8개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중석 도굴꾼을 막을 수 없었다. 동해안 각 공사장과 인근 광산에 이주해 온 노동자들은 20~30명씩, 많게는 100명씩 떼를 지어 도굴을 감행하였다. 도굴꾼이 도굴 과정에서 산림을 난벌함으로써 금강산 풍경을 해쳤기 때문에 강원도 당국에서 이들을 체포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33) 당시 김대우 사회교육과장은 “중석 도굴현장과 풍경이 파괴된 현장에 가 보았다. 자동차도로의 개설로 인해 보승지구가 파괴된 일은 없고 도굴도 점차 적어지고 있으므로 탐승시설 설비에 더욱 주력해야 한다”고 피력하였다.34) 그러나 1938년 10월 강원도와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공식적으로 지하자원 개발을 위한 금강산 광석 발굴을 본격화하였다.35)

이에 철도국은 “지하자원도 귀중하지만, 풍치 또한 자원이라 할 수 있다”며, “조선의 간판인 금강산 풍경을 훼손하면 철도국 영업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금강산 광석 발굴을 멈추길 바란다”고 주장하였다.36) 조선총독부는 1938년부터 금강산대책위원회를 두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1939년에는 중석 채굴 허가가 증가했을 뿐 아니라, 도굴이 심해져서 대책이 시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현장 시찰에 나선 금강산협회의 주요 간부들과 금강산대책위원회 위원 모두 ‘금강산 풍경’을 보호해야 함을 주장하면서도, 군수공업상 중석 또한 중요했기 때문에 난감해하였다.37)

3)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의 조정과 계승

조선총독부는 1936년 난개발에 의한 금강산 풍경의 훼손을 막는 방편으로 일원화된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국립공원 지정 논의를 주도했던 조선총독부 산림부가 아닌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 소속 기관의 설립을 예고하였다.38)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육과는 재단법인 금강산협회를 대신해서 국정에 속하는 조직이 필요함을 인지하였고, 1937년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朝鮮総督府学務局社会教育課, 1937, 125-126).

우선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는 1937년부터 금강산탐승시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여 1938년에 금강산탐승시설계획을 마련하였다.39) 1938년 7월 15일에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는 총독부 제2회의실에서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40) 회의의 주요 안건은 ‘1939년 금강산탐승시설사업계획에 관한 건’과 ‘중석광허가에 관한 건’이었다. 위원회는 금강산의 중석, 수연 등의 개광과 도굴에 대해서는 보승 구역에서는 절대로 불허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탐승시설을 손상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개광만 허용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41) 막대한 예산의 조달 방안은 미지수였지만, 탐승시설은 예정대로 1939년까지 구축하기로 결정하였다.42)

이 과정에서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는 ‘산림부 안(1931)’을 저본으로 해서 1938년에 4건의 ‘금강산풍경계획안’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금강탐승시설조사위원회는 ‘금강산풍경계획안’에 수반되는 예산을 표로 작성한 4건의 ‘금강산탐승시설계획안’도 작성하였다. 이는 현재 수원광교박물관과43)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44)로 나뉘어 있다. 해당 문서들을 살펴본 바, 1938년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에서 어떠한 자료를 근거로 논의했는지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세부적인 결정사항도 알 수 없다.45) 다만 ‘금강산풍경계획안’의 도로와 탐승로 부분에 공통적으로 이미설치[旣設]되어 있다는 문구가 작성되어 있어, ‘산림부 안(1931)’의 도로와 탐승로 설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문서의 완결성, 공신력 등이 높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금강산풍경계획안」(F171-003)을 기반으로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의 도로계획도를 그렸다(그림 5). 그림 5의 탐승시설구역은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도면]금강산탐승구 지도」(F171-004)를 근거로 했다. 탐승시설구역과 국립공원구역의 차이는 남쪽 하단의 ‘국사봉 국유림’이 포함 여부이다. 1938년 탐승시설구역은 국사봉 국유림이 포함되지 않았다.

1931년 조선총독부 산림부의 도로계획(그림 3)과 1938년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의 도로계획(그림 5)를 비교해 보자. 조선총독부 산림부에서 계획한 자동차도로 중에 내금강과 외금강을 잇는 ‘장안사-말휘리-온정령’, ‘백천교리-온정리-육화암’, ‘온정교-신계사’ 구간은 설치되었다. 신금강으로 접근하는 구간은 일부 개설(백천교리-온정리-육화암)되었다. 1938년까지 ‘장안사-외무재령-백천교리’는 완성되지 못했는데, 이 부분이 완성되면 내금강-신금강-외금강을 잇는 자동차도로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38년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는 외금강 일대의 ‘한천-육화암’, ‘신계사-일광대’ 구간, 내금강 일대의 ‘탑거리-표훈사’ 구간에 자동차도로 개설을 계획했다.

보도탐승로의 경우, 1931년 조선총독부 산림부의 계획이 많이 구체화되었다. 1938년 당시 완성되지 않은 보도탐승로 구간은 내금강 2개 구간(한천 위-오봉산, 용마석-옥녀봉 구간), 신금강의 3개 구간(선담-구연폭・미륵봉, 칠보암-칠보대‧은선대 갈림길까지’, ‘송림사-내무재령’), 외금강의 5개 구간(신계사-유점사, 일광대-삼성암, 구룡연 아래-상팔담, 천불동 입구-천불동 북쪽-오봉산, 천불동-한천, 천불동 북쪽 계곡-선창곡-천불동), 내・외 종횡주로(縱橫走路)의 1개 구간(외무재령-백마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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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1938년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의 금강산탐승구역과 도로계획도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금강산풍경계획안」(F171-003)의 도로계획과 「[도면]금강산탐승구 지도」(F171-004) 탐승시설구역을 근거로 그림)

1930년부터 진행된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이 1937년 금강산탐승시설계획으로 조정되는 사이, ‘일제’에 의해 제2의 자연으로서의 금강산은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금강산국립공원 계획 때 사용했던 ‘산림부 안(1931)’이 계승되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 산림부가 금강산국립공원 지정과정에서 논의했던 관리 경영 부분은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 금강산탐승시설구역에 관한 관련 법규와 관리 주체 등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금강산 풍경을 이용한 관광개발(‘보승’)과 금강산 중석 채굴 허가(‘자원개발’)를 동시에 진행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개최 예정이었던 동경올림픽 전후로 금강산탐승시설계획 실행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재무국은 절약 방침을 세우고 최종 예산 배정을 취소하였다.46) 이 와중에 1939년에는 중석 개발을 위한 천만원 자본금 회사가 설립되었다.47) 1940년 1월에는 중석 도굴꾼에 의해 금강산에 불이 나면서, 사람들의 ‘금강산 풍경 보호’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지만,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는 도굴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1940년 5월에 3개의 광구(강원도 회양 내금강면 신흥면, 고성군 외금강면 주험리, 고성군 서면 화우리)를 추가로 허가했다.48) 전시상황에서 금강산 풍경보다 중석(텅스텐)의 가치가 높았다.

5. 나가며

식민지 시기 ‘일제’는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통해 자연의 통치와 이용을 공간적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과정에서 ‘일제’(조선총독부, 철도기관, 민간단체, 학자, 일본기업, 지방정부 등)가 다양한 층위에서 물질적 환경을 생산하는 역동성에 주목하였다. ‘제2의 자연’으로서 일본제국-자연 관계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그동안 금강산 ‘관광정책’이라는 이름에 가려 비가시화되었던 ‘일제’의 금강산국립공원 계획 중 건조환경의 변화를 추적하였다. 그 결과 여러 주체 간의 역학관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금강산은 생산되었고, 금강산 생산을 둘러싸고 주체 간의 갈등・대립이 전개됨을 면밀하게 밝힐 수 있었다.

일본 조경학자 다무라 쓰요시가 1916년 처음 금강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고 주장한 이래, 1920년대에는 금강산전기철도(주)가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요구하며 전기철도, 비로봉 탐승로, 구미산장 등을 설치하였다. 1930년과 1931년 조선총독부 산림부가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예비적 행정절차를 시작하면서 ‘제2의 자연’으로서의 제국-자연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 3차 타합회에서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1930년에 다무라와 우에하라가 각각 팀을 이루어 작성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조선총독부 산림부의 금강산 생산 전략이 담긴 「금강산풍경계획안」을 제시했다. 본 연구는 두 팀의 보고서와 조선총독부 산림부가 작성한 「금강산풍경계획안」(1931년)의 ‘연락(連落)을 위한 시설(도로와 탐승로)’, ‘교화와 오락시설(탐승객들의 휴양 및 향락을 위한 시설)’이 ‘일제’에 의해 생산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3차 타합회에서 결정한 주체별(금강산전기철도, 산림부, 체신국, 학무국, 강원도)로 설치해야 할 건조환경은 꾸준히 완성되어 갔다. 조선총독부 산림부는 1932년 재단법인 금강산협회를 설립하여 관민 협동체제를 구축하고, 금강산협회에 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조사와 시설 설치 업무를 위임했다. 금강산협회는 1932년 이후 본격적으로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을 실행하며 ‘제2의 자연’으로서의 금강산을 생산해 나갔다. 그러나 금강산국립공원은 1930년대 중반이 지나도 지정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군수물자 급증에 따라 중석(텅스텐)의 수요가 급증한 상황이었는데, 금강산에 중석(텅스텐)이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중반 금강산 풍경은 금강산협회의 관광개발과 중석 도굴꾼들의 벌채 등으로 훼손되고 있었다. 이에 도쿄대학교 농학부 우치다 교수, 고성군민 마쓰무라, 철도국 등은 ‘금강산 풍경’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금강산의 풍경을 관광자원으로서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 속에 있었지만,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중석(텅스텐) 채굴 허가 요청 또한 무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금강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 중석 채굴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학무국 사회교육과에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을 ‘금강산탐승시설계획’으로 조정하여 실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금강산탐승시설계획도 최종 예산배정이 이뤄지지 않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1940년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는 중석 도굴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3개의 광구를 허락하였다. 전시상황에서 금강산 풍경보다 중석(텅스텐)의 가치가 높았던 것이다.

결국 다양한 사회세력들 중심으로 진행된 ‘제2의 자연’으로서의 제국-자연 형성, 즉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금강산국립공원 계획이사회세력들에 의해 식민지 전(全) 시기에 걸쳐 금강산에서 다층적으로 작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본 연구는 금강산국립공원을 둘러싸고 경제 이익을 기대한 사회세력을 밝혀내고, 그들이 실천한 금강산의 물질적 환경의 시・공간을 면밀히 재구성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당시 형성된 금강산의 물질적 환경, 즉 근대 관광인프라는 현재까지 금강산의 유산으로서 남아있기에 본 연구가 근현대 금강산 관광 연구의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금강산이라는 자연 자체의 역할은 살펴보지 못한 점, ‘제2의 자연’인 금강산국립공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노동자였을 조선인에 대한 부분은 반영하지 못한 점 등은 본 연구의 한계이다. 조선인에 대한 부분은 자료 발굴의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1) 田村剛・小坂立夫, 金剛山風景計画書(AJP002_14_00B0087,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30)上原敬二・吉村厳, 金剛山公園計画第一回計画書(AJP002_14_00B0087,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30)를 일컫는다.

2) 이러한 맥락에서 브루스 브라운(Bruce Braun)은 1878년에 캐나다지질조사국 직원이었던 조지 머서 도슨(George Mercer Dawson)이 캐나다 서부 해안의 지질조사를 하는 과정을 통해 ‘통치성(governmentality)의 자연’과 ‘자연의 사회적 생산(social productions of nature)’ 과정에 대해 추적했다. 브라운은 자연이 여러 가지 관행의 교차점에서 경제적, 정치적 합리성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가 공간의 ‘지질화’에 참여함으로써 수직 공간을 ‘자질이 있는 영토’로 만들어가는 과정, 즉, 자연이 과학자, 국가 공무원 또는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관행 속에서 지속적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을 견지했다(Braun, 2000).

3) 스미스는 생산 일반에서부터 교환을 위한 생산,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에 이르는 생산과정의 이론적・역사적 단계에 근거하여 자연과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를 그려낸다. 인간의 외부에 위치한(다고 생각되고 있는) 원초적인 제1의 자연조차도 그것을 원초적・야성적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의 장치를 통해서 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자체가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기층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나카시마 고지 저, 심정보 역, 2010, 131-132). 그는 ‘자본주의적 자연’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독특한 특징이 자본주의적 생산과 상품 유통,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제도 안에서 자연에 대한 관념도 생산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Prudham, 2009, 589).

4) 본 연구는 일본제국의 헤게모니 프로젝트 논의는 최소한으로 하고, 자본축적 전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국-자연 생산을 통한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실현 과정은 김지영(2021)을 참조.

5) 第46回帝国議会衆議院本会議, 1923. 3. 23. 第37号, ‘金剛山国立公園設置に関する建議’.

6) 第52回帝国議会衆議院本会議, 1927. 3. 25. 第32号, ‘朝鮮金剛山国立公園設定ニ関スル建議’.

7) 동아일보, 1927. 7. 4, ‘金剛山┈을 國立公園으로’.

8) 동아일보, 1927. 8. 6, ‘金剛山을 世界樂園으로 諸般施設에 百萬圓投資’.

9) 당시 일본에서 1리(里)는 약 3.93km였다.

10) 일본은 1927년 내무부 위생국 국립공원협회 설치(관민 단체), 1930년 내무부 위생국 국립공원조사회 설립(후보지 조사), 1931년 일본 국립공원법 공포, 1932년 국립공원위원회 내의 ‘국립공원선정에 관한 특별위원회’ 가 최종 12곳의 후보지 선정, 1934년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운젠(雲仙)・기리시마(霧島)・아칸(阿寒)・다이세쓰잔(大雪山)・니코(日光)・주부산악(中部山岳)・아소(阿蘇) 지정, 1936년 도와다(十和田)・후지하코네(富士箱根)・요시노쿠마노(吉野熊野)・다이센(大山) 지정 등의 절차를 진행했다.

11) 식민지 대만은 1931년 아리산국립공원협회와 동대만승지선전협회(東台湾勝地宣伝協会) 설치, 1933년 대만총독부 내무국 대만국립공원조사위원회 설치, 1934년 국립공원법 공포, 1935년 대만총독부 내무국 토목과에서 대만국립공원협회 설치(관민 단체), 칙령 대만국립공원법 시행, 1936년 제1회 대만국립공원위원회에서 후보지 결정, 1937년 다툰산(大屯山)・니타카아리산(新高阿里山), 쓰기타카타로코(次高タロコ) 지정 등의 절차를 진행했다.

12) 타합회(打合會)는 본격적인 행정절차를 시작하기 전에 진행하는 예비 회의를 말한다.

13) 본 연구에서는 금강산국립공원 계획 수립 과정 논의는 최소한으로 하고, 금강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해 1931년 작성된 조선총독부의 산림부의 「금강산풍경계획안」을 중심으로 자본축적 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자세한 금강산국립공원 논의 과정과 자연의 통치 과정에 대한 내용은 김지영(2021)을 참조.

14) 1간(間)은 약 1.82m 이다.

15) 강원도(江原道) 간성군(杆城郡: 현재 고성군)의 리(里)이다.

16) 온정령 북쪽에 있는 장전 일대 천불산, 천불동 일대를 일컫는다.

17) 이 글에서 직접 그린 지도의 배경지도는 朝鮮總督府(경인문화사 편)(1998)에 수록된 「말휘리」, 「내금강」, 「고성」, 「화천」, 「외금강」, 「해금강」 등 총 6도엽이다. 국립공원 구역설정에 관한 내용은 김지영(2021) 참고.

18) 시업(施業)은 삼림을 유지, 조성하기 위한 벌채, 조림, 보육 등의 작업을 적절히 적용하여 산림경영목적에 맞도록 산림을 관리하는 경영행위이다(산림입업 용어사전, 시업, https://www.kofpi.or.kr/info/tech_04.do).

19) 공회당 설계는 이토 츄타(伊東忠太)가 했으며, 평수 160평, 수용인원 약 200명이었다. 당시 일반의 회동 및 집회에 이용하는 것 외에 단체 간이숙박으로도 사용했다.

20) 동아일보, 1930. 11. 1. ‘從來方針을 變하야 實際事業에 注力’.

21) 협회 사무실은 경성부 광화문로[光化門通] 1번지에 있었다. 조직은 회장 1명, 부회장 2명, 간사 약간 명, 평의원 약간 명, 감사 약간 명을 두기로 했다.

22) 동아일보, 1936. 4. 14, ‘金剛山에 새施設’.

23) 동아일보, 1936, 7. 23, ‘世界絕勝金剛山 探勝路改修入札’.

24) 내금강지역 비로봉 구역에 있는 바위다. 사선교에서 비로봉에 오르는 사이 수 백 미터에 달하는 바위는 마치 하늘에 세워놓은 사다리와 같은데 여기에 아침 해가 비칠 때면 영롱한 은빛을 내고 저녁 노을이 비치면 황금빛을 뿌린다고 하여 이곳을 은사다리 금사다리라 했다. 한자로 은제, 금제라 한다(북한지역정보넷, 은사다리금사다리, http://www.cybernk.net/)

25) 동아일보, 1937. 9. 19, ‘金剛山探勝新設路’.

26) 동아일보, 1937. 9. 21, ‘金剛山世尊峰 幽林의 新探勝路開拓’.

27) 조선일보, 1934. 3. 17, ‘八十五件의 建議案中 六十二件만 採擇’.

28) 한반도에서 텅스텐광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08년으로 경상북도 약목(若木) 부근에서 철망간중석이 채집된 것이라 한다. 광상은 1911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처음 발견된 뒤, 1912년 강원도금강산의 광산, 1913년 충청남도 청양군의 청양광산, 충청북도 중원군(현재의 충주시)의 대화(大華)광산 등이 계속 발견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만주사변, 2차세계대전 등이 진행될 때, 일본은 한반도 텅스텡광상을 정책적으로 크게 개발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텅스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 SearchNavi?keyword=%ED%85%85%EC%8A%A4%ED%85%90&ridx=0&tot=3).

29) 동아일보, 1934. 11. 3, ‘重石盜堀者 十餘名檢擧’.

30) 수연은 크롬족에 속하며 은백색의 광택을 내는 금속원소로서 다른 금속에 첨가하면 경도가 커지고 내열성(耐熱性)・내식성(耐蝕性)이 커지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성질에 따라 합금강(合金鋼)・스테인리스강・공구강・주철・초합금(超合金) 등의 용도로 이용된다. 1917년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금강(金剛) 광산이 발견되어, 개발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8%98%EC%97%B0&ridx=1&tot=42).

31) 내금강면(수연, 중석 784,300평(日本高周波鋼業株式会社)), 임남면 신풍리(수연, 중석 647,000평(韓康椒)), 임남면 운암리(수연, 중석 1,000,000평(松本 武)), 임남면 운암리(수연, 중석 901,000평(前田 承)), 임남면 운암리(중석 660,000평(李東植)), 임남면 명문암(중석 944,000(閔潤植)), 임남면 운암리(중석 589,000평(崔益秀)), 임남면 운암리(수연, 중석 118,000평(李德議)) 등이다. 조선일보, 1937. 11. 23, ‘金剛山資源의 開發方針决定’.

32) 동아일보, 1938. 6. 4, ‘金剛山保勝區域의 特殊鑛許可鑛區’.

33) 조선일보, 1938. 9. 7, ‘金剛山盜掘防止 本格的檢擧를 續行 大西保安課長指揮五十名逮捕’.

34) 동아일보, 1938. 10. 5, ‘探勝施設에注力 盜掘은取締로漸减: 金大羽社會敎育課長 談’.

35) 동아일보, 1938. 10. 21, ‘金剛山鑛石發掘 漸次本格化! 江原當局現地出張’.

36) 조선일보, 1938. 10. 7, ‘破毁되는靈峰金剛의悲鳴! 鐵道局員의□查踏查報告 風致損傷으非單盜掘 主力은 大規模會社’.

37) 동아일보, 1939. 6. 30, ‘좀먹는 金剛靈峰 盜掘黨이 大跳梁’.

38) 동아일보, 1936. 3. 29, ‘金剛山自然美!’.

39) 동아일보, 1938. 7. 17, ‘金剛保勝問題를 再論’.

40) 회의에는 미즈타 나오마사(水田直昌) 재무국장,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 학무국장,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一郞) 경무국장, 구토 요시오(工藤義男) 철도국장, 나카무라 료조(中村兩造) 제대교수, 강원도지사 등이 출석하였고,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郎) 정무총감 통제로 개회했다. 동아일보, 1938. 7. 13, ‘天下絕勝의 金剛靈山 守護施設完備가 緊急’.

41) 조선일보, 1938. 7. 16, ‘靈峯金剛에 靑信號 豫定施設遂行同時 盜掘도 斷乎處分’.

42) 동아일보, 1938, 7, 16, ‘百萬圓經費로 明年부터 施設에 着手’.; 동아일보, 1938. 7. 16, ‘營林署員과 警官을 增員 盜掘을 徹底히 抑壓’.

43) 수원광교박물관 소장 문서는 「(제1안)금강산탐승시설계획안」(B-1-738), 「(제1안)금강산탐승시설계획안」(B-1-739), 「(제2안)금강산탐승시설계획안」(B-1-740), 「금강산풍경계획안」(B-1-741), 「금강산풍경계획안」(B-1-742), 「제1회간사회 금강산풍경계획안」(B-1-745) 등이다.

4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는 웹사이트(https://www.museum.go.kr/modern-history/)로 서비스되고 있다. 「금강산탐승시설계획안」(F171-002), 「금강산풍경계획안」(F171-003), 「[도면]금강산탐승구 지도」(F171-004), 「[도면] 고성군 각종 시설도」(L016-001) 등이다.

45) 이 연구는 금강산국립공원 지정 과정에서 자연을 이용하는 맥락에서 금강산탐승시설계획으로 계획을 조정한 것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따라서 금강산탐승시설계획에 수반되어 작성된 문서의 서지적 내용보다는 문서에 작성된 공간 변화 내용을 주로 살펴본다. 관련 문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연구를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46) 조선일보, 1938. 7. 15, ‘金剛山探勝施設 節約方針下中止’.

47) 동아일보, 1939. 10. 25, ‘遺恨!金剛靈峯의逢厄’.

48) 동아일보, 1940. 5. 12, ‘保勝, 開發의 歧路에서 새로운 黑點잇게 保勝’.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필자의 박사논문 일부를 수정・보완한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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