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을 살아내는 사람들
2. 위상적 주체들의 (안티)젠트리파이어-되기
3.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적 행위자
1) 원식 씨: 욕망과 불안
2) 선자 씨: 애착과 혐오
3) 효신 씨: 공감과 잠재성
4. 요약 및 결론: 이분법을 넘어서기
1. 서론: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을 살아내는 사람들
서울의 맥락에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은 2010년대 들어 서촌, 경리단길, 연남동 등 독특한 매력을 가진 오래된 동네에서 나타난 문화예술적 상업화와 그에 동반된 장소성 상실, 임대료 상승, 세입자 전치 등 부정적 효과를 지칭한다(신현준・김지윤, 2015; 이선영, 2016; 지명인, 2021a). 그간 다수의 국내외 선행연구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의 다양한 행위자에 주목해 왔다. 심미적 소비자로서 중산층 젠트리파이어(gentrifier)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취향과 실천을 문화자본, 사회자본, 경제자본의 차원에서 탐구하는 연구들이 대표적이며(Brown-Saracino, 2009; Zukin, 2010; 윤혜수, 2016; 경신원・정규리, 2019), 최근에는 다양한 스케일의 지방 정부가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젠트리피케이션 행위자로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분석하는 연구들이 늘고 있다(Bernt, 2012; 김숙진, 2020; 조현진・지상현, 2020; Chen and Zhang, 2021).
특히 이러한 선행연구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 구성하는 주요 행위자와 그들 행위의 양가성(ambivalence)을 설명하는 데 기여해 왔다. 예를 들어 시카고의 사례에 대한 Brown-Saracino(2009)의 연구는 심미적 젠트리파이어들이 오래된 동네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선망하고 그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그러한 동네의 배타적인 가치상향화와 상업화를 주도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울러 난징의 사례에 대한 Chen and Zhang(2021)의 연구는 정부의 다양한 부처와 정책이 갖는 파편성과 이질성을 강조함으로써 개발과 보존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정부가 젠트리피케이션을 촉발할 수도, 그에 저항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선행연구들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행위자의 복잡미묘하고 양가적인 입장을 탐색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선행연구들이 심미적 소비자, 정부 등 특정 행위자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시공간을 구성하는 주민, 소상공인 등 일상적 행위자들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그들의 유동적이고 양가적인 감정과 실천에 대한 논의가 미비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 혹은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동네에 거주하거나 통근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을 동시에 체화하고 수행하는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일상적 행위자들에 주목한다. 이러한 접근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며 살아내는(living through) 사람들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의 복잡성과 뉘앙스를 이해해야 한다는 Doucet(2009)의 주장에 영감을 받았다. 나아가 2021년 Cultural Geographies 특별 호에서 Seitz and Proudfoot(2021)이 제안했듯,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정신적 삶(psychic life)에 주목함으로써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존의 정치경제적 해석을 보완하는 또다른 차원을 추가하고자 한다. 실제로 행위자들은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반드시 고정된 찬성과 반대 혹은 승자와 패자의 입장에 있지 않다. 오히려 대다수는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liminal space)을 부유하며 양단을 동시에 체화하고 수행하는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성을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상업화를 통한 장소성의 변화와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전치(displacement)의 관계를 비판하면서도 지속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적 행위자는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에서 양단을 모두 구성하며, 스스로를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로 여기면서도 젠트리피케이션에 동참한다.
이 같은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적 행위자를 탐구하기 위해, 본 논문은 개발과 보존의 담론과 실천이 교차하며 경합하는 장(field)으로서 서촌에 주목한다. 서촌은 서울시 종로구의 효자동, 통인동, 체부동, 옥인동 등 15개 법정동으로 구성된 경복궁 서측 지역의 별칭이다. 경복궁 및 청와대와 인접해 있다는 역사적, 정치적 특수성으로 인해 해당 지역에서의 대규모 재개발은 고도 제한의 형태로 엄격하게 규제되어 왔다(최성은・이희정, 2014). 이에 따라 낡은 한옥, 좁은 골목길, 전통시장(통인시장, 금천교시장) 등으로 이루어진 서촌 특유의 오래된 경관과 분위기가 21세기 서울의 고층빌딩 숲속에서 의도치 않게 보존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근현대 문화유산과 일상경관이 갖는 의미와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서울시에서는 청계천 복원사업, 동대문역사공원 조성사업, 한옥선언 등을 통해 구도심에 남아 있는 역사문화자원을 글로벌 마케팅과 브랜딩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Lee and Hwang, 2012; Yun, 2017). 이 과정에서 한옥과 골목길로 구성된 서촌의 경관과 분위기는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통해 보호받게 된다(서울특별시, 2010; 2016).
동시에 오래된 서울의 모습을 간직한 동네로서 서촌에 대한 학술적,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2009년 한겨레의 “잃어버린 동네를 찾아서”라는 기사는 서촌에 대한 향수적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한겨레, 2009). 해당 기사에서는 서촌을 “오밀조밀 오래된 서민의 역사와 일상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묘사하였는데,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네로서 서촌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2010년대 전반에 걸쳐 서촌을 다루는 대중매체와 SNS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이정훈・정희선, 2014; 김승범, 2015). 이러한 환상이 투영된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로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이 된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ㅁ자형 한옥이나, 오래된 동네 책방인 대오서점에서 촬영한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의 자켓 사진을 들 수 있다. 향수를 자극하는 서촌의 경관과 분위기는 천편일률적인 서울의 도심지 속에서 새로운 상업지를 원하던 대중의 취향과 맞아떨어졌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촌의 급격한 주거지 상업화와 장소성 변화를 야기했다(도혜원・변병설, 2017). 2014년 말 서울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될 당시, 그 대표적인 발생지로 서촌이 꼽히게 된 것은 이러한 맥락을 반영한다(한겨레, 2014).
이렇듯 오래된 동네로서 서촌의 진정성에 대한 향수적 욕망과 환상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담론과 실천을 함께 지탱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진정성에 대한 욕망과 환상이 투영된 대상으로서 서촌 사람들이 모두 “오밀조밀 오래된 서민”(한겨레, 2009)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으며, 반드시 그러한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신현준, 2015; Ji, 2021). 한옥과 골목길에서의 느린 삶에 정취를 느끼고 애착을 갖는 주민들이 있는 한편, 현대적인 아파트 단지와 넓은 도로, 주차장, 놀이터에서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주민들도 있다. 실제로 일부 주민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낙후된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철거 재개발을 주장해 왔다. 그 결과 2004년 체부동, 누하동 등 서촌의 일부 지역이 재개발 예정지구로 지정되었고, 주민들은 조합을 설립하여 사업을 추진해 왔다(최성은・이희정, 2014). 따라서 주민들은 서촌의 역사문화적 재개치화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그들이 염원하던 재개발을 무산시킨 한옥보존과 상업화를 비판하는 양가성을 보인다. 이처럼 서촌은 재개발, 보존, 상업화, 전치 등을 두고 행위자 안팎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정치적, 심리적 (안티)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필자는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에서 나타나는 행위자의 양가성을 탐구하기 위해 2017년 여름부터 2018년 여름까지 13개월간 현장답사를 진행했다. 최종적으로 수집된 데이터는 50명과 수행한 47건의 인터뷰(그룹 인터뷰 3건, 추가 인터뷰 3건)에 대한 전사 자료와 카페, 레스토랑, 골목길, 관광지, 지역 공동체 등에서의 참여관찰을 통해 작성된 답사 노트이다. 필자는 텍스트에서 반복되는 주제와 핵심어를 코드화하여 해당 코드가 다른 코드와 어떻게 배치되고 연관되는지를 중심으로 패턴을 도출하였다. 이러한 질적 데이터 분석을 통해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이 갖는 구조적 맥락과 상황적 특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즉, 현상의 개량화와 일반화보다는 “구체적인 현실과 함께, 그러한 현실에 관한 더욱 다채로운 이야기”(Herbert 2010, 74)를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했다. 인터뷰 참여자는 주민 22명, 자영업자 16명, 방문객 12명이었으며, 성별 및 연령별 구성은 남성 25명과 여성 25명, 20~30대 23명, 40~50대 23명, 60대 이상 4명이었다. 인터뷰 참여자의 모집 과정에서 직업군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았지만, 자영업자와 학생 및 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사무직 및 전문직 종사자로 나타났다. 또한 경제적 혹은 사회문화적 지위 면에서 주민, 자영업자, 방문객 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을 구조주의적,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가진 자(the haves)와 못 가진 자(the have-nots)의 양자적 갈등으로 단순화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한다(Ley 1996; Smith, 1996 참고).
이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세 명의 일상적 행위자들을 통해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복잡미묘한 과정을 조명한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를 지지한다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이를 위해 먼저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모호하고 유동적인 경계를 가로지르며 생성(-되기, becoming)하는 양가적 행위자를 위상(topology)적 관점에서 개념화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행위자들은 자신의 감정과 실천을 외면화하고, 타자의 감정과 실천을 내면화함으로써 순환적인 젠트리파이어이자 안티젠트리파이어가 되어 간다. 따라서 필자는 그들을 욕망, 불안, 애착, 혐오와 같은 양가적 감정을 통해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관계를 계속해서 변형하는 동시에 유지하는 위상적 주체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적 틀을 바탕으로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을 직접 살아내고 있는 일상적 행위자들이 어떠한 양가적 감정과 실천에 의해 (안티)젠트리파이어-되기의 모순적 과정을 지속하는지 탐구한다.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에 있어 행위자의 감정과 실천을 강조하는 이 같은 접근은 기존의 구조주의적 해석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복잡성과 뉘앙스를 포착하는 포스트구조주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즉, 현실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합리적 이성에 의해 일관되게 나타나지만은 않으며, 오히려 행위자의 위상적인 내면화/외면화를 통해 역동적이고 이질적인 사건(event)으로서 창발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울러 본 논문은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안팎을 횡단하는 양가적 행위자가 자신과 타자를 서로의 거울에 비추며 순환하는 내면화/외면화의 과정을 통해 서로 간의 공감과 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본 논문은 국내외 선행연구에서 미진하게 다뤄져 온 행위자의 양가성과 위상에 관한 논의를 확대하고, 승자/패자, 개발/보존, 내부인/외부인 등 이분법을 넘어선 (안티)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틀과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2. 위상적 주체들의 (안티)젠트리파이어-되기
본 장에서는 자신의 일상 속에서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을 동시에 체화하고 수행하는 양가적 행위자들을 위상적 주체로서 개념화한다. 이러한 개념화는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에서 상업화와 전치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무너트리는 양가적 행위자들과 그들의 딜레마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선행연구에서 나타난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성에 대한 해석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되짚어 보고, 다음으로 지리학에서의 위상에 관한 논의와 들뢰즈의 생성 철학(Deleuze and Guattari, 1987; Deleuze, 1994)을 바탕으로 위상적 주체로서 (안티)젠트리파이어-되기(becoming-(anti)gentrifier)하는 양가적 행위자를 구체화할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행위자들은 젠트리파이어나 안티젠트리파이어, 승자나 패자로 이분화 및 단순화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비록 대부분의 선행연구가 이 같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복잡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을 견지하는 주류 젠트리피케이션 연구들은 지구화, 신자유주의, 발전주의, 투기적 도시화 등 초유기체적인 외부의 ‘괴물’을 상정하고 도시권(the right to the city)의 강조를 통해 피해자들 내부의 느슨한 연대를 도모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을 지속시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Smith, 2002; Lees et al., 2016; 신현방 엮음, 2017). 이러한 이분법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전치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다중스케일적 안티젠트리피케이션 운동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Lees et al., 2018; Elliott-Cooper et al., 2020).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의 괴물이 외부뿐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성으로 인해 절대적인 외부와 내부, 적과 동지를 구조적으로 구분하는 일 자체가 문제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물론 젠트리피케이션에서 행위자의 복잡미묘한 위치와 뉘앙스를 탐구한 다수의 국내외 선행연구들이 있다. 그들은 젠트리피케이션 연구에서 승자와 패자로 양분되었던 젠트리파이어와 원주민의 경계를 흐리며, 자본주의적 혹은 계급주의적 해석으로 설명되지 않는 행위자의 도덕적 딜레마와 행위력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Brown-Saracino (2009)와 Donnelly(2018)의 연구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고학력 중산층 젠트리파이어들이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 장소성 상실, 원주민 전치 등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며, 그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때 젠트리파이어들은 그들의 도덕적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원주민과 거리를 두고 그들의 진정성을 보호하거나(Brown-Saracino, 2009) 자신보다 ‘더 나쁜’ 다른 젠트리파이어들의 행태를 지적하며 자신의 책임을 외면한다(Donnelly, 2018). 다른 차원에서 Arkaraprasertkul (2018)은 상하이의 문화유산 지구에서 발생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 과정 속에서 기존 연구에서 수동적인 피해자로 그려지던 원주민의 행위력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주를 택하거나, 개발 및 상업화의 혜택을 누리고 그를 통해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복합적인 행위자로 이해할 것을 촉구한다. 이 외에도 국내 선행연구들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이 공존하는 모순을 상이한 행위자들에 의한 복합적 장소형성(신현준, 2015), 행위자가 가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불일치(윤혜수, 2016), (탈)신자유주의적 도시정책의 혼재(조현진・지상현, 2020) 등으로 해석해 왔다.
이러한 선행연구들은 다양한 행위자 안팎의 차이와 이질성에 주목함으로써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 혹은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에 대항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에서 나타나는 행위자의 ‘양가성’ 그 자체를 이론적 틀로 포착하는 데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행위자 간의 차이와 이질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각각의 행위자가 갖는 고정된 정체성을 당연시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즉, 행위자의 경제력, 거주 형태, 교육 수준, 문화적 취향 등에 기반해 그들이 젠트리피케이션에 찬성하거나 반대한다는 점이 여전히 구조주의적, 계급주의적으로 설명되었고, 개개의 행위자가 젠트리피케이션에 찬성하는 동시에 반대할 수 있다는 양가성이 간과되어 왔다. 이에 따라 실제로 상업화와 전치의 관계를 체화하고 수행하는 행위자들의 양가적 감정과 실천은 물론, 그들이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모호하고 유동적인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과정이 경시되어 왔다.
양가성은 사랑과 증오, 욕망과 혐오 등 “반대되는 충동이 서로를 무효화하거나 해소하지 않으면서 나란히 지속하며 공존하는 상태”(Seitz and Proudfoot, 2021, 216)를 뜻한다. 그간 서구의 젠트리피케이션 연구에서 양가성은 흑인, LGBT+ 원주민에 대한 백인, 이성애자 젠트리파이어의 양가적 감정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Summers, 2019; Gieseking, 2020). 이러한 연구들은 젠트리파이어들이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가 풍기는 이국적이고 미학적인 진정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동경하면서도, 그들에게 여전히 범죄, 폭력, 가난, 저개발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씌움으로써 그들을 통제하고 배제하는 양상에 주목해 왔다(Burnett, 2014; Tissot, 2014 참고). 하지만 젠트리파이어들의 모순적 욕망과 환상에 관한 논의가 확대되는 가운데,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 혹은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동네의 주민 혹은 통근자로서 일상적 행위자에 관한 논의는 그들의 주관적 경험과 상이한 입장을 강조하는 식에 머무르고 있다(대표적으로 Doucet, 2009; 신현준, 2015). 그 결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행위자의 양가적 감정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젠트리파이어와 원주민이라는 암묵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이 강화되는 역효과가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행위자들을 위상적 렌즈로 분석하는 것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비판하면서도 지속시키는 일상적 행위자들의 양가적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위상은 2000년대의 관계적 전환 속에서 공간의 관계성, 연결성, 연속성 등을 강조하기 위해 ANT(actor network theory), 아상블라주(assemblage) 등과 함께 지리학에 도입된 개념이다(Jones, 2009; Allen, 2011; Malpas, 2012). 구조적(topographical) 세계관을 갖는 학자들이 일정한 공간적 ‘경계’ 속에서 나타나는 정체성과 통일성에 주목했다면, 위상적 세계관을 갖는 학자들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는 공간적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차이와 이질성을 강조한다(Martin and Secor, 2014). 수학적으로 위상은 계속되는 변형 속에서도 유지되는 기하학적 성질을 뜻한다. 위상적인 공간적 변형에는 늘리고, 비틀고, 구부리는 것 등이 포함되지만, 공간 자체를 찢거나, 구멍 내거나, 붙여버리는 것은 해당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의 구멍’이라는 공간적 속성을 유지하면서 늘이고, 비틀고, 구부리는 변형을 통해 도넛 모양의 찰흙이 머그컵 모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위상적으로 같다(지명인 2021b, 363-364). 중요한 것은 지리학에서 위상에 관한 논의가 수학적인 물리적, 추상적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상 개념은 다양한 사회적, 정신적 관계 속에서 그것을 통해 창발하는 공간과 그러한 관계적 공간의 이질성, 유동성, 우연성 등을 탐구하기 위해 널리 도입되고 있으며(Blum and Secor, 2011; Shields, 2013; Martin and Secor, 2014), 2010년대 들어서는 국내에도 해당 개념이 소개되어 활용되고 있다(최병두, 2015; 김숙진, 2016; 이용균, 2017).
본 논문에서는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을 체화하고 수행하는 행위자들의 감정과 실천이 ‘계속적인 변형 속에서도 유지’된다는 점에서 위상적으로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에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불안과 혐오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을 욕망하는 양가적 감정을 가진 행위자를 위상적 주체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하나의 면, 하나의 가장자리를 가졌지만, 뒤틀림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동시에 지속되는 뫼비우스의 띠는 바로 이러한 위상적 공간과 주체를 시각화하는 좋은 예시이다(Blum and Secor, 2011; Cockayne et al., 2020). 뫼비우스의 띠에서 내면과 외면은 가장자리를 공유하는 같은 면이자 다른 면으로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한쪽 면은 다른 면을 계속해서 변형하는 동시에 유지하는 조건이 된다. 즉, 내면과 외면은 가장자리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지만, 뒤틀림을 통해 내면은 외면화하고 외면은 내면화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내부/외부의 면이 생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계속되는 변형의 과정 속에서도 뫼비우스의 띠는 그 자체의 온전한 상태로서 주체성을 유지한다.
이를 내밀한 외재성(혹은 외심, extimacy)을 가진 위상적 주체로서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적 행위자가 생성하는 과정에 빗대어보도록 하겠다(외심에 관해서는 Kingsbury, 2007 참고). Ji(2021, 226)는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주체가 진정성을 담지한 타자를 욕망하고 진정한 주체/타자의 합일(unity)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면화/외면화의 정신적 순환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때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주체는 스스로의 감정과 실천을 타자의 것처럼 낯설고 멀게 느끼는 동시에 타자의 감정과 실천을 자신의 것처럼 익숙하고 가깝게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적 행위자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도하는 상업화를 체화하고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실천과 거리를 두고 그를 비판함으로써 스스로를 외면화한다. 다른 한편 그들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자신을 그들 중 하나라고 여김으로써 타자의 감정과 경험을 내면화한다. 이처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행위자는 욕망, 불안, 애착, 혐오 등으로 뒤틀린 감정과 실천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의 후원자이자 비판자로서 위상적인 주체/타자가 되어간다.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행위자를 양가적 감정에 기반해 계속해서 편을 바꿔가며 상업화와 전치의 관계를 끊임없이 변형하고 유지하는 위상적 주체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위상적 관점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복잡미묘한 뉘앙스를 카오스 그 자체가 아닌, 코스모스의 기반이 되는 카오스로서 (혹은 카오스의 기반이 되는 코스모스로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Allen이 주장했듯, “위상은 영역화된 혹은 네트워크화된 권력의 공간적 구성이 갖는 명백한 구조에 도전하지만, 그러한 구조를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않는다”(Allen, 2011, 284). 따라서 위상적 관점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적 구조에 대한 자본주의적 혹은 계급주의적 설명이 갖는 강점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구조적 설명에서 소외된 승자/패자의 사이공간을 조명함으로써 그 약점을 보완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승자와 패자라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안티젠트리피케이션 운동과 연대의 기반을 완전히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행위자가 승자/패자의 뒤틀린 가장자리를 순환하며 승자와 패자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한 (안티)젠트리파이어로서 양가적 행위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위상적 관점은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적 행위자가 생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잠재성(virtuality)을 인지하고, 그들이 서로를 내면화/외면화하며 닮아감으로써 만들어 갈 공감과 대화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이때 잠재성은 들뢰즈의 생성 철학에 기반한 개념으로서 “현실 세계에 존재(being)하지 않으나 현실화하여 현실이 되는 생성(becoming)의 의미를 함축한다”(지명인 2021b, 363; Deleuze and Guattari, 1987; Deleuze, 1994 참고). 다시 뫼비우스의 띠를 통해 설명하자면, 내면은 가장자리와 뒤틀림으로 유지되는 안팎의 경계로 인해 현재 외면과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외면을 생성하고 곧 그것이 될 (혹은 방금 그것이었던) 잠재성을 갖는다. 즉,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젠트리파이어는 새로운 안티젠트리파이어가 생성하는 조건이자 그 결과로써 잠재성을 갖는다. 이러한 (안티)젠트리파이어-되기의 위상적인 외면화/내면화의 순환 속에서 행위자들은 서로의 거울에 서로를 비추며 닮아가고, 이는 자본주의적 혹은 계급주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그들 간의 공감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위상적 관점은 기존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비판하고 그에 대항하는 연대를 와해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연대 안팎에서 (안티)젠트리파이어-되기하는 양가적 행위자들을 통해 대안적 도시공간의 잠재성을 포착할 수 있게 한다.
3.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적 행위자
본 장에서는 구체적인 경험 데이터에 기반하여 주민, 소상공인 등 일상적 행위자의 (안티)젠트리파이어-되기의 과정을 조명한다. 이를 통해 현장의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이 동반하는 복잡미묘한 상업화와 전치의 역학을 위상적으로 이해하고, 젠트리피케이션의 이분법을 넘어선 사이공간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본 장에서는 그들의 감정과 실천에 있어 대표성을 띠는 세 행위자에 집중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서촌의 (안티)젠트리피케이션과 그 양가적 행위자가 어떻게 위상적으로 생성하며 찬성/반대 혹은 승자/패자의 관계를 뒤트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모든 인터뷰 참여자의 이름은 가명이다.
1) 원식 씨: 욕망과 불안
30대 남성인 원식(가명, 2017년 9월 20일 인터뷰) 씨는2011년부터 서촌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해당 카페가 들어선 곳은 원래 인테리어 사무실 겸 쇼룸으로 쓰이던 공간이었는데, 그는 적당한 카페 자리를 물색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이곳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원식 씨는 건물의 인테리어나 동네의 분위기가 자기가 구상하던 카페와 맞아떨어져 인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초기부터 지켜봐 온 그는 카페를 열 당시만 해도 젊은 예술가들이 운영하던 공방, 소규모 상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변하면서 예전의 정취가 없어진 점을 아쉬워했다. 그는 스스로도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서촌이 이미 뜬 후에 새로 들어온 “투자를 많이 했으니 돈을 벌어야” 하는 카페들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가게를 포함한 서촌의 카페들에는 여전히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인 느림과 자유로움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서촌은 느린 동네라는 느낌이 강하고,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아날로그적이죠. 또 그런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다 보니까 돈 버는 것보다 개인적인 생활도 중요하게 생각하고요. 한국에서 서비스업은 쉴 수 있는 날이 별로 없거든요. 근데 여기는 월요일에 다 닫아요. 그래서 월요일에 오시는 분들은 그냥 꽝 치고 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포장이 되는 가게도 없었는데, 하도 민원이 많다 보니까 이제 포장이 되는 가게도 조금씩 생기고 있고요. (웃음) 그래서 많이 변하긴 했는데, 어느 정도 그 전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기는 한 것 같아요. [...] 여기서 살아남은 카페들은 각자의 특색으로 살아남고 있어요. 서촌의 카페들이 각자 살아남는 방식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아까 자유로움이라고 한 서촌의 특색이예요. 각자 가지고 있는 확고함이 있어요. 운영철학이 있죠. 그러니까 장사보다는 운영이라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약간 장인정신을 갖고 있어요.
원식 씨는 경쟁이 심하고 가게의 손바뀜도 잦은 서촌에서 7년이나 살아남은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카페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느리고 자유로운 서촌의 특색을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서촌의 오래된 경관과 분위기에 대한 향수적 욕망을 가지고 외부에서 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서촌의 특색을 자신의 사업 속으로 내면화함으로써 서촌과 감정적인 연대를 쌓으며 자신을 내부인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식 씨는 느림과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한 ‘서촌다움’이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원식 씨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와 심미적 자영업자들은 서촌의 문화예술적 가치상향화를 주도하며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토대를 만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상업화에 기여했던 그의 실천은 임대료 상승을 자극하며 이제 자신의 사업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이에 따라 원식 씨는 “돈의 논리”에 따라 상업화에 참여하는 자신의 실천을 외면화하며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을 강하게 비판했다.
저는 기존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젠트리피케이션이] 싫죠. 이유는 뭐 확고한 거고요. 서울의 중심에 이런 분위기가 있는 곳이 없어지는 것은 슬프죠. 너무 소비의식이랑 시장경제 논리만 남는 것 같아요. [...] 여기를 지키는 게, 문화를 지키는 게 힘들어졌어요. 그럼 여기가 장사가 잘된다고 했을 때, 정작 누가 돈을 버냐? 그걸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여기서 장사가 잘된다고 해 봤자, 그렇게 돈을 많이 벌지 못해요. 그냥 뭐 회사 다니는 동년배 수준으로 벌거든요. 근데 돈의 논리 때문에 동네 분위기가 망쳐지는 게 싫은 거죠. 열심히 이 동네를 꾸려왔던 사람들을 지켜줄 법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법을 좀 설명도 해줬으면 좋겠고요. 부동산 업자들이나 집주인들한테 그런 걸 좀 교육을 해줘야 하는 거 같아요.
원식 씨의 발언에는 서촌, 문화, 기존에 있던 사람(혹은 내부인)을 가치 있는 것으로, 돈, 장사, 부동산을 천박한 것으로 여기는 심리가 내재해 있었다. 이러한 심리는 앞서 자신의 카페를 “장사보다는 운영”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지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때 “돈의 논리”에 눈이 먼 부동산 업자와 집주인에게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의 도덕적 우월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원식 씨가 자신을 “열심히 이 동네를 꾸려왔던 사람”으로서 내부인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문화와 자본, 내부인과 외부인에 대한 이분법은 확고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는 원식 씨 자신이 결국은 카페를 열기 위해 서촌을 찾았고, 여전히 카페 운영을 통해 수익을 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원식 씨는 이 같은 스스로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서촌을 낭만화하고 상품화하는 외부인이지만 동시에 서촌다움과 그 문화를 이해하고 지키려는 내부인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꿔가며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경계를 흐리고 있었다.
물론 원식 씨가 말한 대로, 임대료 상승에 기반한 전치의 과정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부동산 중개업자와 건물주일 것이다. 서촌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업자와 지주로 이루어진 부동산 카르텔이 주거용 건물을 상업용으로 변경하고 보증금과 임대료를 올리는 일련의 과정에 관해 언급했다. 원식 씨는 그러한 과정에서 서촌의 임대료가 실제로 장사가 되는 수준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A 가게는 말도 안 되는 임대료를 불러서 그 위로 쫓겨났거든요. 그전에는 통인시장 바로 앞에 있었는데 완전 위로 갔어요. 여러 군데 있어요, 임대료 때문에 힘들어서 옮겨간 분들이. 솔직히 얘기하면, 임대료를 꼬박꼬박 냈는데도 그런 식으로 쫓겨나는 게 저는 너무 한 거 같아요. 사실 가게주들이 이 건물에서 영업하면서 대신 돈을 벌어 주고 있는 거잖아요, 꾸준히. 근데 그게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올리는 건데, 그게 누가 봐도 너무 비싸니까 문제죠. 그래서 “여기서 더 임대료가 올라가면 더 장사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계속하는 거죠.
원식 씨는 그가 처음 카페를 열었던 때에 비해 임대료가 두 배 정도 올랐지만, 자신은 건물주를 잘 만난 편이라 아직 감당할 수는 있는 수준이라고 씁쓸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더 임대료가 올라”갈 수도 있다고 걱정하며 닥쳐올지 모를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내비쳤다. 앞선 그의 발언이 낭만적이고 향수적인 욕망의 대상으로서 서촌과 그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선구자 젠트리파이어로서 승자의 시각과 도덕적 우월성을 투영한 것이었다면, 다른 가게들의 전치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가 자신을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패자로 여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원식 씨는 자신에게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높아진 임대료로 전치된 다른 가게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젠트리피케이션 피해자의 감정과 경험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러한 내면화를 통해 만들어진 전치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원식 씨는 그를 야기한 가해자로서 부동산 중개업자와 건물주를 지목했다. 그리고 그들을 제어하기 위한 강력한 안티젠트리피케이션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러나 더 넓은 맥락에서 이러한 현상, 즉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현상 자체는 개개인의 부동산 업자와 집주인을 통해서만 지속되지 않는다. 투박하게 예를 들자면 구도심에서 지대 격차의 발생, 상가 부동산에 대한 투기 성행, 허술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도시계획 및 개발 패러다임의 변화, 역사문화 자원의 재가치화, 문화예술적 식음료 산업의 성장, SNS를 통한 장소적 소비의 공유 등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이 교차하며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역사적, 지리적 맥락을 구성하고 있다. 기억해야 할 점은 원식 씨 자신 역시 그러한 조건을 구성하는 행위자로서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순환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한 순환 속에서 그는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승자와 패자의 감정과 실천을 양가적으로 내면화/외면화함으로써 그 경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지속시키고 있었다. 즉, 그는 승자/패자인 (안티)젠트리파이어로서 위상적으로 생성하고 있었다.
2) 선자 씨: 애착과 혐오
선자(가명, 2018년 3월 26일 인터뷰) 씨는 1987년 자녀교육을 위해 학군이 좋은 서촌으로 이주하여 30여 년째 옥인동의 단독주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50대 여성이다. 그녀는 서촌을 입지 덕분에 편리하고 청와대 덕분에 안전하고 인심이 좋은 곳이라고 소개하며, “그전에는 참 살기 좋은 동네였어요”라고 덧붙였다. 필자가 “그전에요?”라고 다시 묻자, 그녀는 “네, 조용하고, 암튼 그전에는 살기 좋았는데 지금은 너무 시끄러운 거 같아요”라고 답했다. 선자 씨는 서촌을 ‘과거’에는 참 살기 좋았지만 ‘현재’는 상업화로 너무 시끄러워진 동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좋았던 과거로부터 이어진 동네 주민들과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통해 현재에도 서촌에서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선자 씨는 자녀들의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 부녀회, 계모임 등을 기반으로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집 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밥 먹고 오고, 아니면 봄 됐으니까 인왕산 둘레길 산책하고, 인왕산에서 뭐 쑥이나 돈나물도 뜯고. [...] 그냥 누구 집 마실 가는 거는 꾸준히 하고 있어요. (웃음) 누구 집에 가든지, 자기 집에는 잘 안 있고, 어느 한 집에 모여서 마실을 하면, 한 사람 오고 또 한 사람 오고, 그러다 막 서너 사람이 되죠. 동네 마실은 자주 다니고 있어요.
이렇듯 서촌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동네 주민과 일상에 대한 애착을 가진 선자 씨였지만, 그녀는 서촌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가 사는 옥인1구역은 2000년대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해제되며 현재까지 서울시와 재개발조합 간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한 곳이다. 그녀의 집 주위에는 재개발을 기다리다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린 한옥과 단독주택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제는 빈집까지 늘고 있어 생활환경이 좋지 않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최근의 한옥보존과 그에 기반한 문화예술적 상업화를 모두 비판하며, 은연중에 재개발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흥미로운 부분은 인터뷰 초반과 후반에 걸쳐 비판의 주체와 뉘앙스가 변했다는 점이다. 인터뷰 초반, 그녀는 한옥보존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 발언을 망설였으며, 그를 “한옥에 사는 사람들”이나 “불만이 있는 사람들” 등 타자의 입을 빌려 전달했다. 또한 반대의 이유에 대해 재산권 침해와 한옥이 적다는 객관적 지표를 들었다.
서촌에 사는 사람은 한옥보존지구하는 거를 별로 (망설이다)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한옥에서 사는 사람들은 재산권 침해가 된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한옥이 많지가 않거든요. 뭐 한옥이 북촌마냥 많이 있으면, 한옥보존지구 해가지고 깨끗하게 고쳐서 살면 좋죠. 근데 여기 있는 한옥은 군데군데 조금씩 있는 거지, 전체적으로 진짜로 막 보존할 만한 한옥은 많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거를 헐고 고층으로 빌라를 짓고 싶은데, 그렇게 못 하게 하니까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있죠.
선자 씨가 한옥보존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에 망설이며 거리를 두었던 이유는 다층적일 것이다. 우선 인위적인 인터뷰 상황 자체에 대한 불편감으로 초반부터 본인의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때 오래된 한옥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빌라나 아파트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을 혐오하고 천박하게 여기는 사회적 인식 역시 암묵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서촌의 주민과 일상에 대한 애착이 있는 그녀가 직접적으로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하는 것을 꺼렸을 수 있으리라 본다. 이렇듯 선자 씨는 서촌의 개발, 보존, 상업화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외면화하며 그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터뷰가 더 진행되자 “우리”로 발언의 주체를 바꾸며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본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러한 감정을 뒷받침하는 이유로 느낌이 안 좋다, 예쁘다, 맛있다 등과 같은 주관적인 지표를 들었다.
우리가 보기로는 뭐 한옥이라고 해봤자 다 쓰러져가고 별로 좋지도 않아. 그런데 오는 사람들은 뭐 동네가 너무너무 이쁘다는 둥 하면서 사진도 많이 찍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러는 게 너무 안 좋아. 뭐랄까,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고. 그렇지만 뭐 동네 전체가 내 땅도 아니고 내 구역은 아니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는데, 우리 사는 사람들끼리 하는 얘기는 “아우~ 꾸질꾸질하니, 예쁘지도 않은데 우리 동네 뭐 하러 와서 뭣이 좋다고 저러나?” 그러지. [...] 주민들 편의가 있는 시설들이 다 없어졌지. 세탁소니, 철물점이니, 뭐 전파사 같은 거. 기존에 우리들 생활에 필요한 그런 가게들이 거의 다 밀려나고 이제 새로운,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패스트푸드점이라든지, 카페라든지, 그런 것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 근데 우리 동네 식당을 동네 사람이 맛집이라고는 아무도 안 하거든. (웃음) “그 집 맛있다”고 하는 집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진짜 동네 사람은 동네에 밥 먹으러 잘 안 다녀요.
선자 씨는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일상의 불편과 사생활 침해를 반복해서 언급하며,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자신과 다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낭만적으로 욕망하는 것을 혐오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한옥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고, 식당이 그렇게 맛있지 않다고 자신의 동네인 서촌을 저평가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그러한 발언의 이면에는 외부인은 “진짜 동네”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서촌에 대한 그녀의 애착과 주인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듯 서촌에서의 한옥보존과 상업화를 부정하는 선자 씨였지만, 동시에 그녀는 서촌의 변화를 긍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동네가 시끄러워지긴 했지만, 덕분에 활기가 돈다는 인터뷰 응답에서 그러한 양가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울러 그녀는 서촌의 한옥을 예뻐하고 식당을 맛있어하는 외부인과의 만남과 관계 맺기를 통해 그러한 외부의 긍정적인 감정과 실천을 내면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필자는 뉴트로 스타일의 한옥 레스토랑에서 서버 일을 하며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해당 레스토랑은 옥인동의 골목 어귀에 위치한 작은 한옥을 리모델링한 곳이었는데, 외벽에 큰 유리창을 내고 실내를 샹들리에, 괘종시계, 전축, 찻잔 등 서양식 골동품으로 장식한 전형적인 “새로운, 젊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선자 씨는 그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주방일을 봤으며, 홀이 바쁜 시간에는 직접 서빙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외부에서 온 젊은 사람들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들을 주요 고객층으로 하는 레스토랑에서 일했으며, 서촌을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손님들과의 교류를 즐기는 한편 해당 레스토랑을 인수하는 데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가 일하던 레스토랑이 가게주의 개인 사정과 영업 부진으로 부동산에 매물로 오르게 됐을 때, 선자 씨는 자녀들을 통해 암암리에 임대 문의를 하기도 했다. 매물이 나오기 며칠 전, 가게로 돌잔치를 위해 장소를 대여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었는데 그러한 수요를 직접 눈으로 보아서인지 그녀는 꽤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아쉽게도 선자 씨는 며칠 만에 계약을 밀어붙인 다른 매수자에 밀려 가게를 인수하지는 못하게 된다. 우리가 일하던 레스토랑이 서촌에 잘 어울리는 인테리어와 분위기로 이미 꽤 입소문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이후 그곳은 뉴트로 감성의 카페 겸 와인바로 변하였으며, 2~3년의 자리 잡는 과정을 거쳐 현재는 여러 매체와 SNS에 등장하는 서촌의 또다른 ‘외부인이 더 잘 아는 맛집’이 되었다. 가게가 문을 닫고 선자 씨는 다시 다른 집에 마실을 다니고, 인왕산을 산책하고, 텃밭을 가꾸던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바탕으로 그것을 위상적으로 체화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선자 씨는 확실히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을 부유하며 그 뒤틀린 안팎을 생성하고 있었다.
3) 효신 씨: 공감과 잠재성
마지막으로 효신(가명, 2018년 7월 6일 인터뷰) 씨는 서촌에서 나고 자란 40대 남성이다. 서촌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현재도 가족과 함께 서촌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동네의 속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당발이자 소식통이었다. 자신을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원식 씨나 선자 씨와는 달리, 효신 씨는 자신이 서촌의 원주민이면서도 스스로 동네의 변화를 이끌고 그를 통해 이득을 본 수혜자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어머니가 하시던 서촌의 가게 자리를 이어받아, 2009년부터 유명 음식점 B를 운영하고 있다. B는 각종 매체에서 서촌을 소개할 때 자주 언급되는 가게로 서촌의 상업화와 관광지화 초기부터 그러한 변화에 앞장선 곳이다. 현재도 저녁 시간이나 주말이면 가게 앞으로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동네 사람들도 줄 서서 먹어야 하는 집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대부분의 가게 손님은 주민보다는 인근 직장에 다니거나 서촌에 놀러 온 방문객들이며, 주요 고객층은 20~30대 남녀이다.
B 음식점이 소위 ‘대박’이 나자 옆집과 건넛집으로 가게가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임대료를 내는 건물주도 둘이 되었고 그들이 요구하는 임대료도 점점 높아졌다고 한다. 필자가 “혹시 건물주들과 갈등은 없었냐”고 묻자 그는 “내가 기본적으로 인복이 많아”라고 답하며, 지금까지 건물주들과 큰 문제 없이 임대료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건물주 입장에서도 “꾸준히, 많이” 임대료를 지급할 수 있는 안정적인 세입자를 원하기 때문에 B 음식점의 존재를 오히려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효신 씨는 만약 건물주가 “조금 더 임대료를 올려 달라고 하면 맞춰줄 의향이 있다”고 첨언하며, 결국 음식 장사도 건물 장사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지출을 감당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효신 씨와 그의 건물주들은 상가 소유권을 사이에 두고 갑과 을, 혹은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서로를 조금씩 내면화/외면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 효신 씨와 건물주들은 승자와 패자의 관계가 현실화하는 것을 막고, 순환적이고 위상적인 공감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어서 “요즘 서촌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단연 C 음식점에서 있었던 강제 철거 사태를 들었다. C 음식점은 2016년 건물주가 바뀌는 과정에서 새 건물주가 임대차 계약 연장을 거부하며 내쫓긴 곳이다. 갈등 과정에서 다양한 시민단체와 대중매체가 C 음식점의 편에 서서 안티젠트리피케이션 운동에 동참했지만, 해당 음식점은 2018년 6월에 끝내 강제 철거되었다. 인터뷰를 진행한 같은 해 7월까지 안티젠트리피케이션 운동의 물리적인 흔적(C 음식점 앞에 붙은 현수막과 대형스크린 등)이 서촌에 남아 있었다. 그러한 흔적은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을 체화하고 수행하는 행위자들에게 공감과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효신 씨는 자신의 건물주가 C 음식점 사태를 보고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며, 최근 진행된 재계약에서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차원에서 임대료를 올리지 않고 임대 기간을 2년 연장해 주었다고 말했다. 효신 씨는 그러한 건물주의 호의에 응답하며 대신 보증금을 살짝 올려주었다고 덧붙였다. 즉, C 음식점 사태에서 나타났던 건물주와 세입자의 첨예한 갈등은 효신 씨와 그의 건물주에게 자신과 상대방의 입장과 실천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효신 씨가 C 음식점 사태의 직접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건물주와 세입자보다, 중간에서 갈등을 부추겼던 부동산 중개업자와 시민단체가 더 문제라고 지적한 점이다.
언론에서는 2년 사이에 월세가 300만 원에서 1200만 원까지 오른 부분만 부각해서 얘기하는데, 사실 문제는 그거보다 더 복잡해. 원래 건물주가 바뀌면서 1억 줄 테니 나가라고 했는데, C 가게에서 시세보다 너무 낮은 가격이라고 반발한 거지. [...] 사실 그 사이에서 부추기는 사람들이 더 문제였지. 한쪽에서는 보증금 덜 주고 쫓아낼 수 있다고 부추기고, 한쪽에서는 더 버티면 보증금 더 받을 수 있다고 부추기니까. [...] 근데 뭐 나도 지금은 D 단체에 대해서 좀 비판적이지만, 나도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또 모르지. 전화해서 막 도와 달라고 할지도.
이렇듯 효신 씨는 스스로 장사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장사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D 시민단체에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D 단체가 보증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사태가 이렇게 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만약 자신이 C 음식점과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D 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게 될지 모른다고 언급했다. 즉, 그는 현재의 성공적인 사업과 건물주와의 원만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자신 역시 언젠가 강제 퇴거의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D 단체의 안티젠트리피케이션 운동으로 인해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강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중의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효신 씨는 C 음식점 갈등에 뒤엉킨 다양한 행위자들의 입장에 일시적이고 유동적으로 공감과 반감을 느끼며, 승자와 패자의 사이공간을 오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에서 일견 확실한 수혜자로 보였던 효신 씨 역시,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을 맴도는 양가적 행위자로서 잠재적으로 생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효신 씨의 잠재성은 높아지는 임대료 속에서 그와 건물주의 상생 관계가 지속될지도, 혹은 그러한 관계의 와해와 함께 그가 D 단체와 연대할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행위자들이 어떻게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을 위상적으로 변형하며 유지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4. 요약 및 결론: 이분법을 넘어서기
본 논문은 서촌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을 살아내고 있는 일상적 행위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성을 탐색한 결과이다. 비록 젠트리피케이션 이론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사회공간적 갈등이라는 차원에서 자본주의 및 계급주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훨씬 더 복잡미묘하고 양가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절대적 승자도 패자도 아닌 양가적 행위자들은 지속적인 욕망, 불안, 애착, 혐오 등을 통해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에서 양단을 모두 체화하고 수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 논문에서 소개한 원식 씨, 선자 씨, 효신 씨는 모두 그러한 양가적 감정 속에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안팎을 나누는 이분법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였지만, 그러한 안팎의 경계를 호명함으로써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그러한 경계가 위상적으로 생성한다는, 즉 끊임없이 변화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며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이 반드시 발전, 자본, 외부인, 악(惡) 등을 뜻하지 않으며,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이 반드시 보존, 문화, 내부인, 선(善) 등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보존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그들은 자본이자 문화로서, 외부인이자 내부인으로서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순환적 굴레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양가적 행위자들은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속에서 오직 생성의 움직임으로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원식 씨, 선자 씨, 효신 씨는 각자의 고정된 정체성과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에 절대적으로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욕망, 불안, 애착, 혐오 등의 감정을 오가며 개발, 보존, 상업화 등의 변화를 비판하면서도 그를 지지한다. 이러한 행위자의 유동적이고 양가적인 감정과 그에 기반한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실천은 반드시 경제적 이윤 추구의 차원에서 설명되지만은 않으며, 이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존의 자본주의적 혹은 계급주의적 이해를 넘은 대안적 시각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간의 선행연구는 양가적 행위자와 그들이 만드는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사이공간을 분석할 언어와 이론을 제공하는 데에 미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의 포스트구조주의적 시각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구조주의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그 뒤틀린 경계와 사이공간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이론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찬성과 반대, 혹은 승자와 패자의 구도에 기반한 기존의 젠트리피케이션 논의를 보완한다.
아울러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양가적 행위자가 가진 잠재성은 다양한 행위자들의 공감과 대화로 만들어질 대안적 도시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기존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인식 속에서 이분되었던 외부인으로서 가게주인 원식 씨와 내부인으로서 주민인 선자 씨는 사실은 같은 (안티)젠트리피케이션의 뫼비우스의 띠 속에서 순환하는 존재들이다. 즉, 그들은 서촌의 개발, 보존, 상업화 등과 맺는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관계를 통해, 동지이자 적으로서 서로가 서로의 감정과 실천을 내면화/외면화하며 (안티)젠트리파이어가 되어간다. 이러한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우리는 행위자 간 공감과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효신 씨가 갖는 D 단체의 안티젠트리피케이션 운동에 대한 동시적인 공감과 반감, 그리고 잠재적인 참여의 가능성에서 잘 나타난다. 이렇듯 행위자들 모두가 자신과 타자의 양가적 감정과 실천에 위상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은 이질성과 유동성에 기반한 연대의 잠재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괴물로 상상되었던 젠트리피케이션이 사실 모든 행위자의 안팎에 있음을, 동시에 그를 와해하는 안티젠트리피케이션 역시 모두의 안팎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이 그러한 (안티)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위상적 인식의 장을 열고, 나아가 이분법을 넘은 대안적 도시공간의 잠재성을 상상하고 현실화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