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 이론적 배경
1) 지역 경로 개념 논의
2) 광업 지역의 특성
3) 분석 방법론: 결정적 국면과 단계별 분석
3. 연구 대상과 분류 방법
1) 연구 대상 선정
2) 분류 방법과 유형
4. 한국 광업 지역의 지역 산업 경로 유형
1) 내생적 경로 갱신형
2) 경로 쇠퇴 및 고착형
3) 외생적 경로 대체형
4) 광역적 경로 전환형
5. 논의 및 결론
1. 서론
한국에서 지역 쇠퇴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부터이다.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혁신 주도적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자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도권 규제를 완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도권 집중이 심해졌다. 첨단 기술 및 금융 중심의 성장 동력을 확보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자본과 일자리는 수도권에 집중되었으며 비수도권 기업은 새로운 투자와 성장 기회에서 배제되었다. 오히려 지방의 인구와 자본이 수도권으로 유출되었으며 비수도권 지역의 경제 기반이 약해졌다(서민철, 2007). 이런 상황에서 지역 쇠퇴 문제에 관한 초기 논의는 주로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의제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수도권의 경제적 존립에 위기가 닥치는 동시에 수도권 과밀화로 인한 부작용이 커지자, 국가는 지역의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비수도권 산업도시는 중앙정부의 경제 계획에 의해 각기 다른 산업에 특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이에 산업 다양성이 부족해 위기 대응 능력이 낮아 특화 산업의 단기적・장기적 변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국제적 경기 변화나 영향력이 큰 초국적기업의 의사결정 같은 일시적 요인부터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Global Production Network)의 재편, 시장 수요의 변화,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과 같은 항구적 요인까지 다양한데, 이는 각 산업의 구조적 특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고병옥, 2025). 산업의 구조적 특징은 그 산업에 대한 국가 혹은 지방 정부의 제도적 개입, 그리고 지역의 역사・문화・관습・권력관계 등이 반영되는 ‘지역적 맥락’과 결합해 ‘지역 산업 경로’를 형성한다. 지역 경로는 특정 산업이 지역에 착근되어 형성되고 변화하는 일련의 동적인 궤적을 의미한다. 지역 경로의 변화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Martin and Sunley, 2006; Martin, 2010).
지역 산업 경로의 변화를 다룬 선행 연구들은 주로 거시적 지표에 기반한 양적 분석에 집중했다(Frenken et al., 2007; Martin et al., 2016; Neffke et al., 2011; He et al., 2017; Corradini and Vanino, 2022). 기존 접근 방식은 지역 산업 경로 변화의 결과를 보여주기에 효과적이었으나,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을 규명하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경향을 보인다. 물론 지역 경로의 변화 과정을 심층적으로 추적한 질적 연구들이 존재한다. Barrat and Ellem (2019)은 특정 지역의 단일 산업 경로를 정성적 방법을 통해 심층 분석했고, Jolly et al.(2023)은 특정 산업에서 선도 지역과 후발 지역의 경로 생성 과정을 비교 분석한 바 있다. 그밖에 외부 충격에 대한 지역 산업 경로의 전환을 유형화하거나 특정 지역의 조직 문화나 산업 문화 등의 특징에 따른 지역 산업 경로 전환을 분석한 연구도 있다(De Propris and Bailey, 2021; Eriksen and Isaksen, 2021). 그러나 단일 국가 내 동일 산업을 기반으로 한 여러 지역들이 상이한 위기를 거치며 각기 다른 경로로 분기되었는지 비교 분석하여 유형화하려는 시도는 드물다.
본 연구는 이 지점에서 출발하여 다수의 국내 광업 지역의 다양한 산업 경로 변화 과정을 비교 분석하여 유형화하고자 한다. 위기를 경험하면서 왜 어떤 지역은 쇠퇴하고 어떤 지역은 살아남았는지를 심층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다. 분석 대상으로 국내 광업 지역 산업 경로를 선정한 이유는 광업 지역 산업 경로 변화의 핵심 메커니즘이 제조업 지역에서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Bridge(2008)에 따르면 광업은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이동 불가능한 광물자원을 추출해, 지역 외부 시장의 수요에 맞춰 공급해야 한다. 또 광물자원은 국가(국토)에 깊이 착근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라는 단일 행위자의 결정에 의존적이며, 제도적 개입과 같은 단일 외부 사건의 충격을 그대로 받는다. 그 결과 경로의존성과 고착이라는 개념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고 변화의 원인과 과정을 추적하기 용이하다.
본 연구의 핵심 질문은 “한국 내 광업 지역 산업 경로가 산업구조와 위기 상황의 특징을 기준으로 어떻게 유형화되는가?”이다. 이들 지역이 ‘광업’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졌음에도 각각 전성기 이후 지역 경로를 결정하는 결정적 국면을 거치며 각 광업 지역의 지역 산업 경로는 현저하게 분기되었음에 주목한다.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본 연구는 복수의 광업 지역들을 객관적 기준에 따라 유형화하는 분석 틀을 제시하고 이를 실제 지역 분류에 적용해 각 유형의 특징과 동학을 규명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문헌 연구를 통해 광업 지역이 겪는 위기를 분석한다. 과거 정부 부처의 기록을 바탕으로 광업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광종과 그 주요 생산 지역을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고, 각 지역이 겪은 핵심 위기의 성격과 당시 지역의 산업구조를 정책 보고서, 통계 자료, 언론 기사 등의 자료를 분석해 드러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지역들을 몇 개의 유형으로 범주화한다. 그리고 이 분류 결과를 지도화한 다음 각 유형에 속한 지역들의 공통적인 특성과 경로 변화 과정의 차이점을 기술한다.
2. 이론적 배경
1) 지역 경로 개념 논의
지역 경로(regional path)란 특정 지역의 경제, 산업, 제도, 사회적 관계, 문화 등을 포함한 총체적 시스템이 시간이 지나면서 남기는 동태적인 발전 궤적을 의미한다. 지역 경로 개념은 경제학의 경로의존성 이론을 경제지리학에 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 개념은 지리학의 공간 단위 연구에 적용되어 지역 경로의존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뤄졌으며, 초기에는 지역이 과거의 성공에 의존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고착(lock-in)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지역 경로의존성 이론은 고착이 경로를 형성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과 고착의 자기 강화 메커니즘이 지역의 성공 요인 또한 강화할 수 있다는 긍정적 고착 개념 등을 포함하면서 확장되었다. 확장된 이론은 지역 발전에 관한 논의에 적용되었고, 경로 쇠퇴, 경로 갱신, 경로 창출 등 다양한 진화 패턴을 분석하는 이론적 틀로서의 ‘지역 경로’를 정립했다(Martin and Sunley, 2006; Grabher, 1993).
지역 경로를 형성하고 고착시키는 것은 비거래 상호의존성(untraded interdependencies)이 만들어 내는 자기 강화 메커니즘이다(Storper, 1995). 비거래 상호의존성은 규범, 관습, 특화된 노동시장, 암묵적 지식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산업의 효율성을 높여 기업과 인재를 유치하며, 이는 다시 비거래 상호의존성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선순환이 반복되면서 지역은 특정 산업에 특화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역 경로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비거래 상호의존성은 지역이 갖는 일종의 관계적 자산이므로 지역 내 경제적 행위자들에게는 이를 포기하고 벗어나는 것이 어려워진다(Martin and Sunley, 2006).
지역 산업 경로는 특정 지역의 주요 산업과 그 산업과 관련된 제도 및 관계망의 총체적인 발전 궤적으로, 지역의 기존 산업 및 제도적 구조를 바탕으로 현재 혹은 미래의 활동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남겨진 자취이다. 지역 산업 경로를 분석하면, 지역 변화의 핵심 원인을 더 세밀하게 분석할 수 있고, 각 지역의 산업구조 형성과 위기를 겪고 대응하는 총체적인 과정을 일관적으로 비교하기도 쉬워진다. 기존 연구들은 지역 산업 경로의 유형을 크게 자생적인 혁신에 실패하고 기존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로 연장(path extension), 기존 지역 기업들이 연관된 다른 활동이나 분야로 전환하는 경로 갱신(path renewal), 지역에 완전히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는 경로 창출(path creation) 등으로 나누었으며, 이는 지역이 가진 지역 혁신 체계(Regional Innovation System)의 특성에 따른 경로 변화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Isaksen, 2015; Isaksen and Trippl, 2017).
지역 산업 경로는 지역 경로를 결정하는 가장 강한 동력인 산업에 집중한 개념이다. 지역 경제학의 고전 이론인 수출 기반 이론(Export base theory)에 따르면 지역 경제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은 지역 외부로 재화와 서비스를 판매하여 새로운 부를 가져오는 기간 산업(basic sector)이다. 기간 산업은 지역 외부로부터 새로운 돈을 벌어와 지역의 경제를 활성화하는 ‘경제 엔진’이다. 본 연구의 대상인 광업 지역에서는 광업이 바로 이 수출 기반의 역할을 한다(North, 1955). 그러나 기간 산업의 구체적인 형태와 작동 방식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경로의 초기 조건을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수인 그 지역의 경제 활동의 근간이 되는 제도적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로의 초기 조건을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수는 그 지역의 경제 활동의 근간이 되는 제도적 환경이다. 시장 기반의 산업구조 다양성보다 중요한 것이 수많은 제도 중에서도 경제의 작동 방식을 규정하는 국가와 시장의 관계 유형이다. 모든 경제 행위의 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는 최상위 전제이기 때문이다. 크게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는 자유시장 체제와 정부 및 기관이 제한적으로 개입하는 조정시장 체제, 그리고 특정 산업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계획경제 체제로 구분되며, 이는 같은 시공간적 배경에서도 그 산업과 제품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설정되기도 한다(Hall and Soskice, 2001; Johnson, 1982). 국가가 주도해 특정 지역을 전략적 생산 거점으로 조직하는 국가 주도형 산업지구나 국가가 국영기업을 설립하여 자원 산업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제도적 환경에 의해 특정 지역의 지역 산업 경로의 초기 조건이 결정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Markusen, 1996; Bridge, 2008).
이렇게 형성된 경로의 성격은 고착 현상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경로의존성과 고착에 관한 고전적인 선행 연구인 Grabher(1993)는 고착(lock-in) 현상을 기업 간 긴밀한 협력과 전문화가 변화를 방해하는 기능적 고착,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대한 고착이 혁신적 사고를 제한하는 관념적 고착, 그리고 노조, 기업, 정부 등 행위자 간의 정치적 타협과 이해관계가 산업구조를 유지한다는 정치적 고착의 3가지로 분류했다. 이러한 고착 상태는 그 성격에 따라 특정 유형의 위기에 더 취약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정 기술과 생산 방식, 기업 간 네트워크에만 최적화된 기능적 고착이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의 등장 혹은 시장 수요의 변화 같은 기술적・산업적 위기에 취약해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지역에는 위기 속에서 탈고착화(de-lock in)하여 새로운 경로로 전환될 가능성 또한 내포되어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경로 변화를 추동하는 핵심 동인이 지역에서 내생적으로 발생하는지, 혹은 외생적으로 주어지는지에 주목한다(Breul and Atienza, 2022). 내생적 변화는 Grabher(1993)가 제시한 고착 중 정치적・관념적 고착을 극복하는 탈고착의 성공 여부(Bole et al., 2023)와 연관된다. 반면 외생적 동인에 의한 변화는 중앙정부, 대기업 등 지역 외부의 행위자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지역 거버넌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특히 지역 행위자들이 외부의 지식과 자원을 능동적으로 활용해 경로를 재편하는 전략적 커플링(strategic coupling) 개념이 중요하다(Mueller, 2021). 특정 행위자, 예컨대 중간지원조직이나 지역 리더십이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외부 자원을 연결하는 방식이 이 개념에 포함된다.
위기 이후 각 지역 경로가 서로 다른 형태로 분기되는 양상은 각 지역 내부의 산업 구조와 제도적 역량에 따라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위기 대응 방식에 따라 지역 경로는 원래 상태가 지속되거나, 연관된 다른 경로로 갱신되거나, 완전히 새로운 경로가 창출되는 등 다양하게 분기된다(Martin, 2012). 지역에서 내생적 동인에 의한 경로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 외부의 강력한 정책적 개입이 경로를 결정하기도 한다(Isaksen and Trippl, 2017). 다른 광역 시스템의 확장이라는 외생적 동인으로, 지역이 외부 제도 및 행위자들과 동기화되고 정렬되면서 시스템의 하위 기능을 분담하게 되면서 기존 지역 경로가 소멸하고, 지역의 구조가 재편되기도 한다. 대도시권이 확장되면서 인근 지역의 전통적 산업 구조가 파괴되고 산업단지나 주거단지가 세워지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Scott, 1988).
2) 광업 지역의 특성
자원이 새로 발견되거나 기존 자원의 가치가 오르는 경우 해당 지역에는 광물의 취용을 목적으로 하는 도시가 설립된다. 이후 자본, 기업, 노동이 공급되고 지역에는 즉각적인 경제 붐이 일어나 붐타운(boomtown)이 형성된다. 광업 지역의 초기 채굴 붐은 임시적 이익을 창출하면서 지역 내에서 부동산 권리와 광업권의 형성과 관련된 제도의 발전을 촉진한다. 이렇게 성장한 제도적 기반은 광업 지역의 산업 발전 방향을 결정한다. 자원의 발견에서 이어진 산업의 도입과 제도적 기반이 경로의존성을 형성한다. 특정 자원 취용을 위해 세워진 도시는 자원 채취의 생산성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다양화를 시도하거나 주민의 이탈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지역이 광물이 창출하는 소득에 경제 성장과 발전을 의존하게 되며 산업 다양화에 실패하거나 이를 시도하지 않는다. 자원 생산에 다른 경제 활동을 연계하여 발전하는 대신, 제조업에서 비교 우위가 있는 지역으로 채굴한 광물을 직접 수출하며 성장하는 특산물의 함정(staple trap)이 나타나기 때문이다(Watkins, 1963). 이는 지역 경제를 특정 경로에 가두는 강력한 고착 메커니즘이다. 자원 산업이 다른 산업에 비해 훨씬 많은 인력과 자본을 흡수하기 때문에 단일 산업에 많은 생산요소가 고정되면서 경험 기반 학습의 둔화와 기술 발전의 정체에 따라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잃는다. 또 다양성이 부족한 광업 지역의 산업구조는 외부 충격에 대한 대응 능력이 매우 낮아지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 취약해진다(MacKinnon and Cumbers, 2018; He et al., 2017).
외부 충격에 따라 지역이 산업 축소 위기에 직면하면,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광산 운영과 관련된 생산 투자와 고용을 점차 축소한다. 주택, 공공 서비스, 지방 자치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경쟁력 있는 생산지로 자본, 투자, 인력을 이동시키기도 한다. 다양하지 못하고 경직된 광업 지역의 산업 구조 특성상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전체 지역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증폭되고 주민들은 공공 서비스 철회로 인한 재정적 부담, 불안정한 고용 등으로 지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Bradbury and St. Martin, 1983). 광업 중심 구조 붕괴 이후 지역은 경로 전환이라는 문제를 직면하는데, 이때 광업 지역의 특수한 경제 구조, 기반 시설, 인적 자원, 제도적 환경을 고려해 전략이 필요해진다(Breul and Atienza, 2022).
3) 분석 방법론: 결정적 국면과 단계별 분석
지역 산업 경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기하는 동적인 과정과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이다. 이때 위기는 지역 경로 분기를 촉발하는 결정적 국면(critical juncture)으로 작용한다. 결정적 국면 분석은 역사 속 특정 분기점에서 이루어진 선택이 어떻게 이후 경로를 장기적으로 결정하고 고착시키는지를 규명하는 이론적 틀이다(Pierson, 2004). 결정적 국면이 진행되는 중에는 기존의 구조가 불안정해지며 정치・경제・사회적 불확실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 평소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특정 경로의 형태가 결정되면 경로는 자기 강화 메커니즘을 통해 더 단단하게 고착되어, 다른 대안 경로를 선택하기 매우 어려워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Martin and Sunley(2006)는 이 결정적 국면의 논리를 경제지리학에 도입해 지역의 경로가 생성되고, 고착되며, 그리고 분기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포괄적인 ‘지역 경로’ 개념을 정립했다. 즉 결정적 국면은 지역 경로 개념의 성립 논리에서 핵심적인 구성요소이다. 결정적 국면의 분석 틀은 상황을 선행 조건, 결정적 국면, 인과적 메커니즘, 결과 등의 단계로 나누어 분석하며, 이러한 연구 방식은 외부 충격에 의한 경제적 위기를 지역 내 기업들이 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로 분기가 나타난 사례를 분석한 선행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Rypestøl et al., 2022). 위기 상황을 결정적 국면으로 설정하고, 경로의 초기 조건, 위기의 성격, 위기 대응, 이후의 결과라는 단계별 분석을 통해 지역 산업 경로의 동태적 분기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은 경로의존성과 결정적 국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광업 지역의 동학을 분석하는데 적절하다(Pierson, 2004; Martin and Sunley, 2006; Baumgartinger-Seiringer et al., 2021; Bridge, 2008).
3. 연구 대상과 분류 방법
1) 연구 대상 선정
본 연구는 특정 통계 지표만으로 과거 광업 지역의 질적 중요도를 온전히 평가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질적 연구 방법론에 입각한 목적 표집(purposive sampling) 방식을 채택했다. 목적 표집 방식은 연구 질문에 대해 심층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정보 풍부 사례(information-rich cases)’를 의도적으로 선정하는 방식이다(Patton, 2015). 경제지리학에서는 과정의 복잡성을 서로 다른 역사적・제도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 채택하는 방식이다(MacKinnon et al., 2019). 본 연구 또한 한국 광업 지역의 지역 산업 경로 분기 메커니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례를 선정하고자, 수치 지표를 기준으로 1차 후보군을 선정한 다음, 질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목적 표집을 통해 최종 연구 대상을 선정했다.
먼저, 1961년부터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서 발간한 경제백서 등의 정부 공식 문서에서 생산량을 기록한 ‘주요 광종’인 석탄(무연탄), 금, 은, 철, 텅스텐, 구리, 납, 아연, 흑연, 고령토, 활석, 형석, 석회석, 납석, 규석 등의 생산 지역을 역사적 문헌을 바탕으로 선별했다. 이어서 각 지역 내 광업이 갖는 위상과 영향력을 측정하기 위해 특정 산업의 지역적 특화도를 측정하는 지표인 입지계수(Location Quotient, LQ)를 활용했다.1) 특정 산업이 지역의 고용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주력 산업임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고병옥・구양미, 2023). 선행 연구에서 통상적으로 산업이 집적되었다고 여기는 수치인 1.25를 넘는 지역을 선별했다. 입지계수 측정은 산업의 상대적 비중만 측정하여 산업의 절대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LQ가 1.25 이상인 지역 중, 취업자 수가 500명 미만인 지역은 제외하였다. 추가적으로 역사적 문헌을 기반으로 일부 사례를 추가하였다. 특정 시점의 통계적 유의성뿐만 아니라, 경로 분기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적・산업적 맥락을 충분히 담보하고 분석의 깊이와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경기도 시흥시, 화성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동해시, 태백시, 삼척시, 영월군, 정선군, 양양군,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 음성군, 단양군, 충청남도 보령시, 청양군, 전라남도 화순군, 경상북도 상주시, 문경시, 봉화군 등 총 19개 시군이 선정되었다. 전라남도 신안군은 LQ와 취업자 수 조건은 충족하였으나 산업 분류상 대부분의 취업자가 소금 제조업 종사자이고, 이는 재생 가능한 자원이라는 측면에서 여타 광업과 같은 맥락에서 다룰 수 없으므로 제외하였으며, 동해시와 청양군은 광업 전성기와 통계 기준 시기의 차이 때문에 LQ와 취업자 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나 역사적 문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추가하였다.연구 대상 지역으로 선정된 19개 시군의 산업별 비중과 광업의 입지계수, 그리고 핵심 광종은 표 1과 같다.
표 1.
1985년 기준 연구 대상 지역의 산업별 비중, 광업 입지계수(LQ) 그리고 핵심 광종
2) 분류 방법과 유형
본 연구는 지역 산업 경로의 동태적 변화 과정 분석을 위한 방법으로, 선행 연구에서 사용된 바 있는 단계별 분석을 시도한다. Baumgartinger-Seirenger et al.(2021)에서 ‘경험적 사례를 조직하기 위한 발견적 장치’로서 단계 모델을 제시해 그 방법론의 유용성을 입증했듯, 본 연구에서도 복잡한 경로 변화의 과정을 단계별로 분석하고자 한다. 경제적 위기에 대한 지역 내 대응에 관한 분석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분석 단위를 개별 기업이 아닌 지역 산업 경로 전체로 설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국가나 초국가적 정책, 외부 기업 등 비국지적 요인, 행위자들이 갖는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한정된 자원을 둔 지역 내외의 경쟁 관계도 포함된다(Hassink et al., 2019). 이러한 분석 틀에 따라 본 연구는 특정 위기에 의해 발생한 결정적 국면을 중심축으로 결정적 국면 이전, 결정적 국면 당시, 그리고 결정적 국면 이후로 이루어진 3단계의 분석 틀을 통해 각 지역의 경로를 추적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결정적 국면 이전 분석은 위기가 닥치기 전 각 지역 산업 경로의 초기 조건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초기 조건은 경로의존성 관련 이론에서 미래 경로 분기의 범위와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로 그 영향력이 강조된다(Martin and Sunley, 2006). 지역 고유의 자산과 제도적 환경 등 경로의 출발점을 파악하는 것은 위기에 대한 지역의 위기 대응 능력을 규명하는 기초 작업이 된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와 시장 간 관계, 정책적 개입 등의 제도적 환경과 광업 의존도와 산업 다각화 수준 등의 산업 구조에 따른 경로의 출발점을 분석한다.
두 번째 단계인 결정적 국면 당시 분석에서는 ‘결정적 국면’을 촉발한 위기의 핵심 동인과 그 성격을 규명한다. 이를 위해 고착 개념을 분석 렌즈로 활용해 지역에 어떤 종류의 위기가 발생했는지 진단한다. 과거 기술과 생산 방식에 대한 기능적 고착이 새로운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술・산업적 위기로 이어졌는지, 특정 산업에 대해 지역사회가 의존하는 등의 관념적 고착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거나 변화가 방해받는 사회・인지적 위기를 낳았는지, 정치적 합의에 의해 많은 행위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춰진 정치적 고착에 의해 이후 정책 변화 등의 제도적 위기에 취약해지지 않았는지 등을 분석한다. 마지막 결정적 국면 이후 분석 단계에서는 위기에 대한 대응과 이후 결과를 분석한다. 각 지역이 위기에 대응한 전략적 행위의 진행 양상과 결과, 거버넌스 형태, 잠재적 성장력과 지속가능성을 분석하는 과정이다(Martin, 2012).
이러한 3단계 분석 틀을 통해 지역 산업 경로의 진화 과정을 추적한 결과, 위기 대응 이후 지역 산업 경로가 상이하게 분기됨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는 연구 대상 19개 지역의 지역 경로를 분석한 뒤 광업 지역의 지역 경로를 분류했던 선행 연구에서 도입한 기준에 따라 두 단계에 걸쳐 분류했다. 1차 분류의 기준은 지역 경로 변화의 핵심 동인의 시발점이다(Breul and Atienza, 2022). 분석 결과 한국 주요 광업 지역이 결정적 국면에 직면한 이후의 지역 경로 변화의 핵심 동인을 기준으로 크게 내생적 동인과 외생적 동인으로 구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생적 동인에 의해 지역 경로가 변화한 지역을 다시 나누는 2차 기준은 부정적 고착의 수준이며 이는 관련 다각화의 성공 여부와 같다(Breul and Atienza, 2022; Cole and Broadhurst, 2020; Bole et al., 2023). 기존 경로의 부정적 고착을 성공적으로 없애야 관련 다각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외생적 동인에 의해 지역 경로가 변화한 지역을 다시 나누는 2차 기준은 지역 경로 변화의 핵심 거버넌스의 초점이 외부 행위자와의 전략적 커플링(strategic coupling)을 중심으로 작동하는지 여부이다(Mueller, 2021).
한국 주요 광업 지역 19개 시군의 지역 경로를 분류한 결과 그림 1과 같이 네 가지 유형이 도출되었다.
첫 번째 유형인 내생적 경로 갱신형(endogenous path renewal)은 기존 광업 기반의 지역 산업 경로가 붕괴하지 않고, 지역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경로에 점진적 수정을 가하고 업그레이드한 유형을 지칭한다. 경로 갱신(path renewal)은 제도, 자산, 네트워크 등 과거 성공 요소가 부정적인 고착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이 유형은 지역 내부의 기존 물리적・지리적 자산을 활용해 경로를 점진적으로 수정했기 때문에 이 개념을 반영해 명명하였다(Martin and Sunley, 2006).
두 번째 유형인 경로 쇠퇴 및 고착형(path decline and lock-in)은 기존 광업 지역의 지역 산업 경로에 내생적 재구성 동력이 없어 기존 광업 경로의 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위기 대응에 실패해 장기적인 산업 및 경제 쇠퇴에 머무는 경우를 말한다. 이 유형의 지역에서는 위기 대응 동력의 부재로 고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 장기적인 산업 및 경제 쇠퇴로 이어졌다는 점이 강조되어 이와 같이 명명하였다(Martin and Sunley, 2006; Grabher, 1993).
세 번째 유형은 외생적 경로 대체형(exogenous-led path creation)으로 기존 광업 경로가 제도적 위기에 의해 소멸된 후 외부 동력에 의해 비광업 분야의 새로운 경로가 이식되어 지역 경제 기반을 존속시킨 경우를 말한다. 이 유형은 공공 부문의 대규모 재정 투입을 통해 비광업 분야의 새로운 경로를 광업 경로의 공백에 이식한 점을 반영해 명명하였다(Isaksen and Trippl, 2017).
마지막 유형은 광역적 경로 전환형(macro-regional path transition)으로, 국토개발과 관련된 국가적 차원의 광역 정책이라는 외생적 주도성 하에 광업 지역의 정체성을 잃고 연관성이 없는 새로운 경로로 강제 전환된 경우를 지칭한다. 이 유형의 지역들은 국가 차원의 광역 국토 개발 정책이라는 외생적 충격으로 기존 지역 산업 경로가 대도시에서 분리한 지역 산업 경로로 전환되었으므로 이를 반영해 명명하였다(Cooke, 2012; Martin and Sunley, 2006; Scott, 1988).
4. 한국 광업 지역의 지역 산업 경로 유형
본 연구의 대상이 되는 한국 광업 지역 대부분이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이다. 일부 금광・철광 지역은 그 이전부터 채굴되긴 했으나 근대적・산업적 규모의 광업 지역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 자원 수급 체계에 편입되면서였다. 당시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광업 지역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해방과 분단 이후 일부 광산들만이 남한 지역에 남아 있었는데, 이들도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손상되었다. 이후 한국 내 광산들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과 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재건되었고, 대부분 민간에 불하되었으나 일부 광업은 국영기업이 운영하는 등 복잡한 제도적 경로를 형성했다(한국광업협회, 2012). 이와 같이 국내 광업 지역은 국가 주도 재건이라는 유사한 출발점을 가졌지만, 지역 산업 경로 변화를 통해 표 2, 그림 2와 같이 네 가지 유형으로 분기되었고 그 특징을 요약하면 표 3과 같다.
표 2.
유형별 한국 광업 지역
표 3.
분석 단계별 유형 분석
그림 2에서 네 가지 유형의 공간적 분포를 확인했을 때, 외생적 경로 대체형 지역 중 보령, 화순을 제외한 5개 시군은 태백산맥의 핵심 석탄 지대에 집적되어 있으며, 내생적 경로 갱신형 지역도 강원특별자치도 남동부와 충청북도 북부 태백산맥 인근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광역적 경로 전환형 지역은 수도권 및 인접 중부 내륙 지역에 배타적으로 위치해 ‘광역적 전환’이라는 유형의 특성을 지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경로 쇠퇴 및 고착형은 특정 군집 없이 전국에 분산되어 있다.
1) 내생적 경로 갱신형
내생적 경로 갱신형은 조정 시장형 광업 경로가 다른 산업과 공존하는 다각화된 기반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 산업 경로에 복합적 위기 상황이 닥친 이후 점진적인 지역 경로 수정과 산업구조 다양화가 발생한 유형이다. 부정적 고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경로 갱신 개념과 그 논리적 궤를 같이한다. 이 유형에 속하는 지역들에서는 기존 산업의 경로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으며, 지역 내 행위자들이 산업, 기술, 제도, 사회 측면의 변화에 대응해 점진적으로 기존 지역 산업 경로의 궤적을 수정하면서 새로 나타나는 산업과 공존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동해시, 삼척시, 충청북도 제천시, 단양군이 있으며 석회석 광업 기반 지역에 해당한다.
(1) 결정적 국면 이전
이들 지역 산업 경로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지역 내 광업이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민간 대기업의 대규모 자본 투자와 내수 건설 시장의 수요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 있다. 석회석은 평균 80% 이상이 시멘트 생산에 사용되었고, 국내 시멘트 산업은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중후장대형 산업의 특성상 자본이 충분한 대기업 위주였기 때문에 대기업들이 석회석 광산을 직접 소유하고 석회석을 채취하는 구조였다. 석회석의 주산지였던 이들 지역의 석회석 광산도 대부분 대기업 소유였고, 원료 지향형 산업의 특성상 광산 바로 옆에 석회석을 시멘트 반제품인 클링커로 가공하는 공장이 존재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나 중화학공업계획 등에서 시멘트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전략산업으로 명시했으나, 사회간접자본 투자 및 국토 개발을 통해 수요를 창출하거나 업계 담합을 묵인하는 이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는 지역 내 행위자 간 지속적인 역학 관계 속에서 경로가 결정되는 유연한 제도적 환경을 형성했다(한국시멘트협회, 2013). 이는 이후의 거시적 정책 변화에 대한 위기 대응 능력의 내재화로 이어졌다. 다각화된 지역 산업 구조 또한 경로 분기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는 표 4에 나타난 1985년 기준 5개 시군의 산업별 입지계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5개 시군에서는 운수・창고・통신업이나 농림어업의 집적이 확인되며, 이는 해당 지역들이 이미 석회석 광업과 시멘트 산업에만 의존하지 않는 다각화된 경제 구조였음을 보인다.
표 4.
경로 갱신 및 지속형 지역 입지계수(1985년 기준)
(2) 결정적 국면 당시
이들 지역의 위기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지역의 산업 경로는 복합적 요인에 의한 압박에 직면했다. 이 시기 발생한 위기는 기존 산업 경로의 특징적인 고착과 연결되어 해당 위기에 대한 지역의 대응 능력을 약화했다. 먼저 기능적 고착에 의한 기술・산업적 위기는 건설 경기 침체에 의한 수요 감소의 형태였다. 석회석 광업은 평균 80% 이상의 생산량이 시멘트 제조업에 투입되는 강력한 수직적 연관성이 있는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이 의존성은 기능적 고착을 형성해 1997년 IMF 외환위기처럼 건설 경기가 급격히 악화하는 기술・산업적 위기에 지역 산업 구조가 취약해지도록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주민들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기업과 사회적 갈등을 빚었다. 석회석 채석 및 시멘트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림 훼손에 따른 재해와 분진 등 공해에 의한 건강 피해 등의 문제가 가시화된 결과이다. 기업 등 행위자는 석회석 광업이 국가 경제 및 지역 발전을 지탱하는 전략산업인 시멘트 제조업과 직결되어 있다는 인지 구조에 고착되어 있었다. 이 관점에서는 환경 훼손 및 분진 피해 등 부정적 영향을 불가피한 외부효과로 보고, 산업의 지속가능성 측면에서의 환경적・사회적 요소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런 관념적 고착은 지역사회의 지지를 훼손하는 사회・인지적 위기로 이어졌다. ‘기존 관념적 고착의 붕괴’가 주민들이 기업의 활동 방식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이는 경로 수정을 요구하는 내생적 압력으로 작용했다(김진우, 2012; 한국시멘트협회, 2013).
성격이 다른 위기가 중첩되면서, 기존 지역 산업 경로의 제도적 취약성이 드러났다. 정부는 산업적으로 취약해진 기업을 단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1999년 「폐기물관리법」 개정 등을 통해 산업폐기물의 사용을 허용하고 배출허용기준을 완화하는 등 산업계를 옹호하는 정책적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멘트 산업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타협과 이해관계가 산업 구조를 유지하는 정치적 고착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고착은 국가적 차원의 환경 규제 강화 등의 제도적 위기에 취약한 구조이기도 했다. 2010년대 초, 유엔기후변화협약 및 교토의정서 등 초국가적인 제도적 압력에 한국 정부가 대응하면서 기후변화 및 환경 오염 방지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제조 시설을 폐기물 소각 시설에 준하는 엄격한 환경 규제 대상으로 분류한 2012년 「대기환경보전법」 개정, 그리고 같은 해 시행된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는 과거의 느슨한 환경 규제에 적응한 지역 산업 경로에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다. 일례로 2013년 10월 단양군의회가 시멘트 채광주변지역 지원법 제정을 촉구한 사례는 강화된 규제와 사회적 압력에 대한 지역의 대응과 동시에, 정치적 고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의 부담을 보여준다(이상복, 2013).
(3) 결정적 국면 이후
복합적 위기 상황에서 이들은 지역 내부의 자원을 활용하여 자생적으로 경로를 재구성했다. 이는 점진적인 경로 갱신(path renewal)의 형태이며, 외생적 주도 없이도 급격하게 붕괴하지 않을 수 있었다(Martin and Sunley, 2006). 먼저 제도적 개입과 지역사회가 요구한 대로 대기오염 방지 시설 투자를 이행하고 연료 사용의 제약을 수용하였으며, 고용 구조의 전환을 통해 그 충격을 완화했다. 이는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석회석 생산량과 종사자 수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IMF 외환위기 시기 생산량의 감소세에 비해 종사자 수의 감소세가 더 가파르고, 2000년 이후 생산량의 등락에 비해 종사자 수는 정체 혹은 완만한 하락세를 유지한다(그림 3).

그림 3.
강원특별자치도・충청북도의 석회석 생산량 및 종사자 수 변화 지수 추이(1995~2020, 1995년=100)
자료: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광산물생산량현황; 통계청, 광업제조업조사2)
광업・제조업 종사자 수의 감소는 서비스업 종사자 수 증가로 상쇄되었으며, 기존 산업의 경로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새로운 산업과 공존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이러한 고용 구조의 점진적 개편은 단양군과 삼척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1996년부터 2020년까지 단양군과 삼척시는 광업・제조업 종사자 수가 감소세를 보였다. 이를 통해 석회석 광업 및 시멘트 관련 제조업의 자본집약화 및 자동화, 그리고 제조업의 쇠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고용 축소에도 전체 산업 종사자 수는 단양군과 삼척시에서 증가세를 보였다. 이는 광업과 제조업의 축소분이 서비스업 분야의 신규 고용 확대로 상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기간 서비스업 종사자 수가 단양군에서 165%, 삼척시에서 167% 증가했기 때문이다(표 5).
표 5.
내생적 경로 갱신형 지역 산업별 종사자 수
서비스업의 발전은 기존 지역 자원의 재활용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기존 지역별 고유 자산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해안 지역인 동해시・삼척시는 시멘트, 석탄 등의 자원 무역항의 역할을 하던 동해항・묵호항 등이 여객 기능을 강화해 다각화를 모색한 사례가 있다. 1997년 묵호항과 울릉항을 잇는 여객 노선의 정기 운항이 시작되었으며, 2009년 동해-블라디보스토크 노선과 동해-사카이미나토 노선이 개설되었다. 국제여객 이용객 수는 국제 정세, 관광 수요 변화, 팬데믹 등 외부 변수에 의해 등락하고 있으나, 동해시는 2026년 이후 묵호항에 여객 기능을 통합하고 크루즈 유치를 추진하는 등의 지역 산업 경로 갱신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조필규 등, 2016). 또 내륙 카르스트 지형의 단양은 석회석 광산의 기반이 되는 지형을 활용한 관광자원을 개발하며 지역 산업 경로를 갱신했다. 고수동굴, 도담삼봉 등 전통 명소 외에도 스카이워크, 집와이어, 패러글라이딩 등 체험형 콘텐츠 개발이 활성화되었며 이는 기존 지리적 자원을 새로운 지역 산업 경로 갱신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이다. 그 결과는 정량적인 관광객 수 변화에서 드러난다. 1995년 500만 명대에 머물던 단양군의 연간 관광객이 IMF 외환 위기 시기인 1998년 400만 명으로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꾸준히 증가해 팬데믹 직전인 2019년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들 지역의 산업 경로 변화는 전형적인 지역 경로 갱신의 동학을 보여준다. 이들 지역은 IMF 외환위기, 초국가적 환경 규제 강화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충격에 직면했으나, 지역 산업 경로가 단절되거나 쇠퇴하지 않았는데 이는 지역의 초기 조건과 내생적 역량 때문이다. 경로 형성기부터 국가의 개입이 약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제도적 환경을 구축했으며 다각화된 산업 구조가 위기 대응 역량을 제공했으며,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기존 지역 경제 기반의 자산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자생적으로 경로를 수정할 수 있었다. 이는 부정적인 고착을 지역 내부의 적응력과 다각화를 통해 극복하고, 다양한 산업 경로가 공존하는 점진적인 경로 갱신의 전형을 보인다.
2) 경로 쇠퇴 및 고착형
경로 쇠퇴 및 고착형은 거대광산이 일부 읍・면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기존 농업지역과 병립하는 지역 산업 경로가 기술・산업적 위기 상황에서 지역에 내생적 역량이 부족하거나 부재하여 점진적으로 쇠퇴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은 경로 쇠퇴(path decline)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기능적・관념적・정치적 고착 등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이다. 경로 쇠퇴란 과거의 성공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부정적 고착의 지속이며 지역 경제 성과의 장기적 감소로 이어진다(Martin and Sunley, 2006). 국내 광업 지역에서 이런 양상은 주로 금속 광물을 기반으로 했던 지역에서 주로 나타났다.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충청남도 청양군, 경상북도 봉화군이 이 유형에 해당하며, 이들 지역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외부의 정책적 지원이나 지역사회 차원의 조직적 대응 없이 점진적인 경로 소멸을 겪고 광업 경로가 소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이 유형에 속한 지역의 경로가 영구히 고착되는 것은 아니다. 양양군의 사례는 고착 상태라 새로운 외생적 충격에 의해 탈고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 결정적 국면 이전
해당 유형 지역의 산업 경로는 국가의 전략적 통제보다는 민간 시장의 수요 등에 의해 결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금이나 철 등의 자원은 개발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자원 수급 체계가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광종은 국가 경제에서 중요도가 높았으나, 국가가 직접 가치사슬을 통제하거나 전략산업으로 육성하지는 않았다. 이들 유형 지역의 광업은 대부분 채취한 광석을 수출에 의존하는 경로를 형성했다. 당시 자원뿐만 아니라 기술과 지식, 기반 시설 설립 등을 해외 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국내 제련・제철을 포함한 제조업의 규모가 생산되는 원자재를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광물들은 미국 혹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미국은 냉전에 의해 자원 수급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일부 전략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싶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텅스텐 등을 수입했다. 일본의 경우 급격한 산업화로 안정적인 자원 공급망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 체계가 남긴 초기 조건에 따라 일본에 필요한 광물이 이미 한국 내에 개발되어 있었고, 운송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도 다른 국가보다 우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1960년대까지 꾸준히 광물을 수입했다(Kim, 1971; Kohli, 1994). 그 결과 해방 이후에도 국내 중화학공업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 광업은 국제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단일 광종의 장기적 변동에 취약해지는 ‘특산물의 함정’에 쉽게 빠지는 경로 의존적 초기 조건을 형성했다.
해당 유형 지역의 특징으로는, 무연탄과 석회석을 제외하면 국가 단위로 자급이 가능한 광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매장량이 적은 국내 지질 특성상, 적은 수의 광산이 국내 특정 광종 광업에 있어서는 큰 비중을 차지해 그 경제적 지배력은 읍・면 단위에 미칠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라 기존 산업 기반에 따라 형성된 지역사회와 광산촌이 병존하는 이중적인 경제 구조가 형성되기도 했다. 일례로 충남 청양군의 경우 구봉광산이 1962년 기준 한국 금 생산량의 42%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해 특정 지역에 고도로 집중되었다. 거대한 광산 하나가 읍・면 단위의 지역 경제를 지배하고 기존의 지역사회와 병존하는 이중적 경제 구조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우영환, 2009). 경북 봉화군 또한 일제강점기 연화광산의 개발과 1970년대 영풍석포제련소를 기반으로 해당 지역이 리에서 면으로 승격될 정도로 특정 지역에 그 경제적 영향력이 집중되었으며, 광업의 경로가 인근 지역의 농업 기반 지역사회와 공존하며 지역의 경제를 재편한 이중 구조의 또 다른 사례로 볼 수 있다(김혜나, 2020).
(2) 결정적 국면 당시
이들이 직면한 위기는 주로 산업적 위기로,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친 탈냉전 분위기와 경제 세계화에서 이어진 국제 시장 가격 경쟁이 심해지는 한편 국내 광산의 광량 고갈 및 심부화(deepening)3) 따라 채산성이 크게 나빠졌다. 국내 금속 광산들은 경쟁력을 상실했고, 이는 각 지역 광업의 점진적인 쇠퇴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1978년 철광석 수입량은 5만 톤, 1979년에는 10만 톤, 1980년에는 20만 톤을 돌파했다(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1981). 철광석의 수입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한편, 양양 철광의 생산량은 1982년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했다. 국산 금속광물이 수입품과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이며, 다른 금속광물도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위기의 충격이 시군 전체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은 아니나, 광산촌 공동체의 소멸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주민들의 격렬한 사회적 저항 혹은 국가 정부와 주민 사회 간 정치적 상호작용도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관련 산업 종사자와 그 가족 등이 조용히 지역을 떠나는 일종의 국지적 공동화가 발생했다. 해외 사례에서 나타나는 ‘고스트 타운’과 흡사하게 그 흔적만이 지역에 남았고, 쇠퇴가 고착화된 공간이 되었다(권석천, 1996).

그림 4.
봉화군(좌)과 양양군(우)의 인구수 및 광물 생산량 변화(1966-2020)
자료: 통계청, 2010, 인구총조사; 통계청, 2024, 인구총조사; 한국광업협회, 2012에서 재인용
(3) 결정적 국면 이후
이후 지역 산업 구조는 과거의 농림어업 기반으로 회귀했다. 해당 지역의 양상은 '광업 경로의 급격한 소멸로 인한 농업 경로로의 퇴행’이라는 점에서 여타 농림어업 지역의 쇠퇴와 구분된다. 표 6에서 제조업 종사자 수가 일부 증가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기는 하지만, 농림어업 등의 분야에서 감소하는 수가 더 많아 상쇄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청양군의 경우 구 광산촌 지역이 다시 농업 기반 지역으로 회귀했고, 제조업 성장이 미미해 이를 상쇄하지 못했다. 봉화군에서 원자재 국제 가격 상승에 힘입어 일부 광산이 생산을 재개했으나 역시 미미한 수준이다. 서비스업 종사자 수가 가장 많아졌지만, 이는 새로운 성장 동력의 창출이라기보다는 기존 인구를 대상으로 한 공공행정, 보건복지, 소규모 도소매업 등이 중심이며, 지역 경제의 질적 성장을 보여주는 전문,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의 비중은 매우 작다는 사실을 표 7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청양군과 봉화군은 과거의 농림업 기반 경제가 저성장 상태의 서비스업 경제로 모습을 바꾼, 전형적인 저성장 고착 경로를 보여준다.
표 6.
청양군・봉화군 지역 산업별 종사자 수
(단위: 명)
| 지역 | 구분 | 1996년 | 2020년 |
| 청양군 | 농림어업 | 14,488 | 9,656 |
| 광업 | 42 | 0 | |
| 제조업 | 1,450 | 2,731 | |
| 서비스업 | 3,670 | 11,071 | |
| 계 | 19,650 | 23,458 | |
| 봉화군 | 농림어업 | 18,078 | 8,489 |
| 광업 | 219 | 82 | |
| 제조업 | 884 | 1,886 | |
| 서비스업 | 3,764 | 9,471 | |
| 계 | 22,945 | 19,928 |
표 7.
2020년 청양군・봉화군의 서비스업 대분류별 종사자 수
(단위: 명)
| 구분 | 청양군 | 봉화군 |
|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 | 1,961 | 2,242 |
| 보건업 및 사회복지 서비스업 | 1,727 | 1,200 |
| 도매 및 소매업 | 1,659 | 1,402 |
| 숙박 및 음식점업 | 1,373 | 1,185 |
| 전문,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 134 | 148 |
| 정보통신업 | 59 | 50 |
양양군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점진적 쇠퇴 그리고 1995년 양양 철광산 폐광 이후 청양군・봉화군과 동일한 쇠퇴 및 고착 경로를 보였으며, 이는 인구 추이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1980년 42,209명이었던 인구가 1985년 36,484명, 1990년 35,643명까지 점진적으로 감소하고, 1995년 28,190명을 거쳐 2010년 25,294명에 이른다. 그런데 2015년 이후 서울양양고속도로 개통이라는 외생적 충격이 양양군에 새로운 결정적 국면으로 작동했다. 수도권과의 접근성이 극적으로 개선된 상태에서, 서핑이라는 새로운 컨텐츠가 SNS 바이럴 마케팅이라는 동력과 결합했으며, 20년간 고착되었던 경로를 벗어나 후발적으로 경로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유예지・김주락, 2024). 경로 쇠퇴 및 고착형의 특수 사례인 양양군은 유형화된 광업 지역의 지역 경로가 고정불변이 아니고, 시간에 따라 재분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복합성을 시사한다. 특히, 고속도로라는 하향식(Top-down) 기회가 지역 내 행위자의 상향식(Bottom-up) 동학과 결합해 탈고착이 이루어진 점은 정책적 거버넌스에도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3) 외생적 경로 대체형
외생적 경로 대체형은 국가적 통제에 종속된 광업 경로가 제도적 위기에 의해 소멸한 후 외부 동력에 의해 이식된 비광업 분야의 새로운 산업 경로가 지역 경제 기반을 존속시킨 유형이다. 이 유형은 외생적 경로 창출 개념에 가장 부합하며, 정치적 고착의 급진적 해체를 보여준다(Isaksen and Trippl, 2017). 이 유형에 해당하는 지역으로는 강원도 태백시, 영월군, 정선군, 충청남도 보령시, 전라남도 화순군, 경상북도 상주시, 문경시가 있다. 이들 지역은 석탄 광업 위주의 단일 산업 경로에 의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지역 내부에서 자생적 경로 전환에 실패하고, 중앙정부의 대규모 정책적 개입과 공기업 투자에 의존해 기존 산업과 관련 없는 지역 산업 경로를 이식받았다.
(1) 결정적 국면 이전
주요 석탄 산지였던 이들 지역의 산업 경로는 일제강점기 석탄 수급 체계와 함께 형성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국가 에너지 수급 정책의 핵심 원료 산지였다. 국가에서는 1950년 대한석탄공사를 설립해 직접 산업에 참여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도 에너지 수급과 석탄의 중요성을 명시했다. 「석탄개발임시조치법(1961)」과 「석탄광업 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1969)」 등 석탄 산업 지원 법률을 제정하고, 주요 석탄 산지에 광구집합체를 탄좌로 설정하고 대단위 투자와 경영 현대화를 유도하며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석탄 중심의 에너지 정책은 제1, 2차 석유파동이 끝나는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정부는 석탄 증산을 위해 석탄 생산량에 따라 보조금을 지원하고 탄광에 각종 면세 혜택을 부여하며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정부는 「석탄수급조정에 관한 임시조치법(1975)」 등을 바탕으로 한 석탄 및 관련 제품의 수급 조정과 가격 통제에 적극적이었다(대한석탄공사, 2001).
그 결과 이들 유형 지역 내 모든 인적・물적 자원은 석탄 증산을 위해 투입되어, 지역 산업 경로가 석탄 산업에 아주 강력하게 고착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전국 광업 취업자 중 60%가 태백, 정선, 영월, 보령, 화순, 문경, 상주 7개 지역에 있었으며, 특히 광업 취업자 비중이 높은 태백과 정선에서는 전체 취업자 대비 광업 취업자 비율이 각각 56%, 42%에 달했음이 표 8에서도 나타난다. 탄광 주민들은 석탄 산업이라는 단일 산업이 제공하는 압도적인 경제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받았다. 열악한 정주 조건이 경제적 보상으로 상쇄된 것이다. 그 결과 압도적인 보상을 제공하는 석탄 산업을 축소하고 산업 경로를 다변화 혹은 대체, 전환하는 것을 생각하기 힘든 인지적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는 지역의 단일 산업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고착 요소로 작용했다.
표 8.
1985년 전국 및 외생적 경로 대체형 지역 전체 취업자 및 광업 취업자 수
(2) 결정적 국면 당시
이들 지역에 닥친 위기 상황의 중심에는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에 의한 제도적 위기가 있다. 무연탄 위주의 석탄 산업에 기능적으로 고착되어 있던 지역의 취약점을 공격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무연탄은 편리성과 청정성뿐만 아니라 가격 경쟁력의 측면에서도 석유나 천연가스에 완전히 열세로 밀려났다. 경제 활황에 따라 공업도시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탄광 노동력 수급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국내 석탄 산업은 전략적 가치, 시장 경쟁력, 사회적 필요성을 모두 상실했고 무연탄의 수요는 급감했다.
이때 정부는 노조, 기업, 정부 등의 행위자 간 복잡한 정치적 타협과 이해관계에 기반해 산업 구조를 유지하는 정치적 고착을 일방적으로 해체했다. 정부는 석탄 산업의 급격한 붕괴로 인한 충격을 최소화하고자 비효율적인 탄광의 폐광을 유도하기 위해 1989년에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을 시행했다. 근로자 퇴직금 75%, 임금 2개월분, 1개월분 임금에 해당하는 실직위로금, 생활안정금, 이사 및 구직활동비 등을 지급하고, 폐광 탄광에는 생산 톤당 일정 금액에 해당하는 광업시설 이전 폐기지원비를 지원했다. 1995년 대형 탄광을 대상으로 하는 생산감축 지원제도를 마련해 단계적 폐광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는 실직한 노동자들의 외부 이주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출구 전략으로 작동했다(정성호, 2004). 표 9와 같이 1985년부터 1995년까지 10년간 적게는 2만여 명에서 많게는 6만여 명의 인구가 각 시군에서 유출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으며 특히 석탄 산업 의존도가 높았던 태백시와 정선군은 인구의 반 이상이 유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탄광지역 내에서 일어난 급격한 지역 기반 붕괴의 속도와 파괴력은 복합적 위기를 겪었던 내생적 경로 갱신형 지역과 비교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표 9.
외생적 경로 대체형 지역 인구 변화(1985~2024)(단위: 명)
(3) 결정적 국면 이후
단일 산업에 적극적으로 의존한 이 유형의 지역들에는 위기 대응 능력이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주력 산업의 붕괴와 급격한 인구 유출이 생존권 사수를 기치로 내건 주민들의 조직적인 사회적 저항을 촉발했다. 사태가 격화되자 심각성을 느낀 정부는 1995년 3월 3일 주민들과 합의했으며,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폐특법) 제정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었다. 폐특법은 내국인 카지노 허가라는 탈규제적 특혜를 통해 외부 자원의 지역 내 도입을 유도하는 핵심 제도적 장치였다. 폐특법에 규정된 폐광지역 중 가장 사정이 열악한 곳에 내국인 카지노 1개소를 설립한 의도는 한시적 특혜를 통해 폐광지역의 대체 산업을 육성할 시간과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법에 따라 1998년에 내국인 카지노 운영을 담당하는 공기업 ㈜강원랜드가 세워졌다. 이는 Isaksen and Trippl(2017)에서 설명하는 외생적 경로 창출과 정책적 지원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기존 지역 경로의 공백을 지역 외부의 행위자가 주도해 새로운 산업 경로로 대체하며 지역 경제 기반을 존속시킨 것이다(고한사북남면신동 지역살리기 공동추진위원회, 2015).
정부가 발표한 대체 산업 육성 계획은 원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내국인 카지노에 의해 형성되는 폐광지역개발기금의 실질적인 유용 과정에서, 이권 추구에 의한 비효율이 발생했다. 지역에 재투자되는 금액보다 세금이나 관광기금의 형태로 중앙 정부 부처에 유입되는 금액이 높은 문제가 발생했다. 또 신규 산업 육성을 통해 기존의 지역 산업 경로의 대체하는 목적으로 활용되지 않고, 국토교통부와 행정안전부 소관의 도시재생 및 복지 지원 등으로 유용되는 문제가 발생했다(권혁수. 2013; 김선주・오정석, 2021; 김영미 등, 2022). 이처럼 폐광지역에 외부의 자원이 투입되었음에도,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가 뒤얽히며 새로운 산업 경로 확산과 지역 산업 경로 재구성이 제한되었다.
그 결과 폐특법이 세 차례 연장되었음에도, 강원랜드를 제외한 뚜렷한 사업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김선주 등, 2021). 법률 제정의 핵심 근거지였던 강원권 폐광지역에는 강원랜드라는 독점적이고 강력한 대체 산업이 인근 지역의 즉각적인 경제 회생에 기여했으나, 강원랜드의 경제적 파생효과에 지자체가 의존하는 새로운 경로의존성이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지자체 간 정치적 이익 갈등이 나타나 그 효과를 파편화시켰다(이선향, 2010). 이와 같은 문제는 재정적 지원 등 간접 혜택을 공유하는 비강원권 폐광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나타났으나 역시 뚜렷한 사업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외생적 경로 대체형에 해당하는 지역들은 여전히 배분된 자원을 바탕으로 다른 대체 경로를 모색하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라는 새로운 제도적 기회를 활용하여, '운탄고도길 관광', '바이오매스', '폐석 업사이클링' 등 지역 자산에 기반한 '질적으로 다른' 산업을 추진하는 것이 그 예이다(박재희・김봉균, 2024).
4) 광역적 경로 전환형
광역적 경로 전환형은 대도시 인접이라는 입지적 잠재력을 가진 민간 시장 중심 광업 경로가 국가적 국토 정책이라는 거시적 제도적 위기에 직면하면서 광업 경로는 완전히 파괴되고 수도권 배후지에 편입되어 그 기능을 분담받은 결과 새로운 경로로 강제 전환된 유형이다, 이 유형은 Scott (1988)이 논의한 광역 대도시 경제권의 구조 재편 및 분산 논리와 Cooke(2012) 등이 논의하는 경로 전환(path transition) 개념에 근거하며 지역 내부 요인이 아니라 상위 공간 계획에 의해 경로가 결정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경기도 시흥시, 화성시, 충청북도 충주시, 음성군의 지역 산업 경로는 급격한 광역 도시화의 영향을 받아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시흥과 화성은 수도권 팽창으로 주거 및 산업 기능을 수행하는 위성도시가 되었고, 충주와 음성은 수도권에서 가까운 중부내륙의 중심지라는 지리적 특성,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중부내륙선 KTX 등 전국적 교통 기반시설 확충, 기업도시・혁신도시 등의 국가 정책과 맞물려 새로운 산업 거점이 되었다.
(1) 결정적 국면 이전
이들 지역의 산업 경로는 국가가 통제하지 않는 민간 기업 위주의 광물 생산 기지 역할과 수도권과의 접근성 혹은 교통 요충지라는 지리적 잠재력이 결합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 시흥 오류광산의 흑연, 화성 삼보광산의 납・아연, 충주 철산광산의 철광석, 음성 무극광산의 금 등은 국가 외화 확보 혹은 중화학공업 육성 등을 위한 전략적 자원이기도 했다. 이러한 광물들은 포항제철 및 고려아연 제련소 등의 국내 수요를 책임지며 국가 경제망에 편입되었으나 석탄 산업처럼 국가가 직접 생산과 시장을 통제하는 계획경제 체제에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는 이미 입지적 잠재력 옵션(MacKinnon et al., 2019)이 있었다. 이들 지역 경제가 광업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잠재력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광역적 경로 전환 유형 지역 내 산업 간 비중을 표 1에서 확인할 수 있고, 제조업 비중이 43.6%로 높은 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985년 기준 시흥・화성의 인근 지역에는 국가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서울의 공장들이 이전해 오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당시 시흥군은 안산시, 군포시, 의왕시, 시흥시로 분리되기 이전이었는데, 이미 현 안산시 지역에는 반월국가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시흥이 1980년대부터 이미 국가 주도의 수도권 산업 분산 정책의 직접적 영향권에 있었음을 보인다. 충주・음성 또한 중부내륙 교통축과 맞닿아 있어 이미 수도권 배후지로서의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광업 경로의 존속 여부가 광업의 채산성이나 지역 내부의 산업 구조가 아닌 국가 차원의 공간 계획에 따라 결정되는 초기 조건이 되었다.
(2) 결정적 국면 당시
이들 지역 산업 경로의 위기는 광업적 토지 이용의 논리가 도시적 토지 이용의 논리가 충돌하면서 기존 경로가 소멸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위기의 성격은 복합적이었으나 그 결정적인 동력은 거시적인 제도적 위기였다. 먼저 중국이 본격적으로 세계 광물 시장에 광산물을 저가로 공급하면서 납, 아연, 철 등 광물의 가격이 하락했다(USGS, 2024a; 2024b; 2024c). 대기환경 기준 확대(1983), 수질환경기준・배출허용한도 설정(1983), 배출부과금제 도입 시행(1983) 등 환경 규제도 시행되었다. 이는 국내 광산의 채산성 악화로 이어졌고, 이들 지역에서는 기능적 고착에 의한 기술・산업적 위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산업적 위기가 이들 경로의 운명을 결정한 핵심 요인은 아니었다. 이는 경로 쇠퇴 및 고착형인 봉화군과 광역적 경로 전환형인 화성시의 비교를 통해 명확히 보인다. 두 지역의 핵심 광종은 납・아연으로 같으나, 결정적 국면 직전의 산업 구조 측면에서 극명한 차이가 나타난다. 봉화군은 농림업(73.6%) 중심의 농업 구조였던 반면, 화성시(당시 화성군)은 이미 제조업이 27.7%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다각화된 농공 복합 지역’이었다. 따라서 두 지역에서의 광업 쇠퇴가 주는 충격의 영향력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들 지역 경로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기술・산업적 압력보다 더 강력한 “국가 차원의 장기적 공간 계획”의 힘이었다. 이들 지역 산업 경로는 국토종합개발계획과 수도권정비계획으로 대표되는 거시적인 제도적 위기 속에서 수도권 산업 기능의 분산과 첨단산업의 새로운 입지라는 초지역적 필요성에 의해 재편되었다. 전략 광물 생산 활동이 농업과 병존하는 기존 정치적 고착 논리는 광역적 도시 개발 논리 앞에서 비합리적 토지 이용으로 전락했다. 광업적 토지는 새로운 산업단지, 주거단지, 물류단지 등으로 재편되었다.
(3) 결정적 국면 이후
이런 형태의 제도적 위기는 어떤 지역의 쇠퇴라기 보다는 급격한 압축 성장에서 오는 혼란이었다. 신도시 및 산업단지가 매우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서울 통근자 혹은 제조업 노동자가 해당 지역에 유입되었고, 오히려 1차 산업 혹은 광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이 소수가 되었다. 이런 추이는 표 10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이 지역들의 과거의 광업 경로는 완전히 지워졌으며 국가 차원의 국토 계획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아 완전한 산업 구조 재편을 겪는다. 화성이나 시흥은 수도권 기능 분담을 위한 배후 주거 및 첨단산업 기지가 되었으며, 충주와 음성은 수도권 이전 기업을 담는 새로운 산업 거점이 되었다. 화성이나 시흥 등 수도권 도시에 비해 다소 발달이 미진한 부분은 이후의 ‘혁신도시’나 ‘기업도시’ 등 정책적 개입으로 보완되었다.
표 10.
시흥・화성 산업별 종사자 수(1996~2020)(단위: 명)
이들의 경로는 광업이 지역과 동반 쇠퇴하는 상황에서 더 큰 외부의 힘이 기존 산업 지형을 완전히 지워버린 후 새로운 구조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다른 유형과 구분된다. 이들에게 지난 역사의 광업 흔적은 당장의 지역 경로를 방해하는 요소다. 충주의 동양광산과 같이 폐광 이후 관광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이상적인 사례도 있으나, 화성 삼보광산처럼 폐광 후 방치되어 시급히 정화해야 할 오염원이자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로 규정되기도 한다(이형찬, 2022). 이는 과거의 지역 산업 경로가 남긴 물리적 흔적이 새로운 지역 산업 경로와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5. 논의 및 결론
본 연구는 한국 광업 지역 19개 지역이 위기 상황을 겪고 서로 다른 산업 경로로 분기하는 과정을 분석해 위기의 배경, 성격, 그리고 대응 결과의 차이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첫째, 내생적 경로 갱신형은 다각화된 기존 산업 기반과 유연한 제도적 환경을 바탕으로 높은 위기 대응 능력을 보인 유형이다. 외부 충격에 의한 복합적 위기를 겪고도 지역의 내생적 역량을 통해 경로를 점진적으로 수정해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둘째, 경로 쇠퇴 및 고착형은 농업지역과 대형 광산이 병존하는 지역에서 국제 시장 변화라는 기술・산업적 위기에 대응할 내부 동력을 찾지 못해 광업과 연관된 지역 산업 경로가 쇠퇴한 유형이다. 셋째, 외생적 경로 대체형은 위기 대응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국가 정책에 의한 거대한 제도적 위기에 의해 기존 지역 산업 경로가 급격히 붕괴한 뒤, 중앙정부의 정책적 개입으로 비관련 산업이 이식된 유형이다. 넷째, 광역적 경로 전환형은 지역 내부의 논리와 관계 없이 대도시의 확장 및 기능 분리라는 상위 스케일의 공간적 동학으로 기존 광업 경로가 소멸하고 지역의 기능과 정체성이 전환된 유형이다.
본 연구의 학술적 함의는 첫째, 단일 산업 내 복수 지역의 경로 분기를 비교 분석하는 유형학적 접근을 통해 지역 쇠퇴와 전환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거시경제적 지표 위주의 양적 분석이나 단일 사례 중심의 질적 연구가 포착하기 어려웠던 과정의 복잡성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특히 같은 산업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성격과 지역의 내재적 역량, 그리고 행위자들의 전략 행위가 어떻게 현저히 다른 경로 변화를 발생시키는지 살펴보았다. 또, 경로 쇠퇴 및 고착형의 특수 사례인 양양군에서 고착이 영구적이지 않고 탈고착 및 재분기가 일어날 수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지역 경로의 복잡성을 심층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둘째, 광업 지역의 사례를 통해 국가라는 강력한 단일 행위자의 영향력이 경로의존성, 고착, 경로 창출에 어떻게 미치는지 그 메커니즘을 밝혔다. 제조업이나 첨단산업의 경우 대기업, 대학, 연구소, 중소기업 등이 구축하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혁신과 경로 변화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는 반면 광업 지역들은 국가 정책이 경로의 형성과 해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이들 지역을 분석하면서 Grabher (1993)에서 제시된 기능적・관념적・정치적 고착의 심화, 그리고 Isaksen and Trippl(2017)이 제시한 외생적 주도와 정책적 보조에 의한 신경로의 개발 등의 이론적 개념의 성립과 구체적 작동 방식을 분석했다. 셋째, 산업구조의 다양성이 위기 대응에서 수행하는 완충재의 역할을 고찰하였다. 경로 갱신 및 지속형에서 산업 다양성이 외부에서 기인하는 충격이나 장기적 압박을 완화하면서 점진적인 경로 갱신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임이 해석되었는데, 산업 다양성이 부족했던 석탄 도시들이 급격히 붕괴한 사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본 연구 결과는 지역 쇠퇴에 대한 정책 접근을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함을 시사한다. 본 연구의 네 가지 유형은 동일한 산업 기반이 위기의 성격과 내재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경로로 분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각 지역이 어떤 경로 유형에 속하는지 진단하고 그 고유한 특성과 동학을 고려한 다양한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중앙정부 부처 중심의 최종 의사결정 및 예산 배분 과정에서 정책 집행이 결과적으로 경직될 수 있는 위험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개별 지역에 대한 정책적 개입에서 특정 사업이나 인프라 건설 같은 단기적 결과에 집중하기보다, 정책 자체를 지역이 스스로 변화에 적응하고 지역 경로를 재구성할 ‘내재적 역량’을 배양하는 과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정부가 중앙에서 모든 지역에 맞춤형 정책을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역 역량’이란 단순히 지방자치단체의 공공 행위자들의 정책 입안 능력이나 행정 효율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지역 경로의 분기와 변화를 빠르게 체감할 수 있는 지역 주민들이 직접 사업을 기획하고 예산을 집행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실질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양양군의 사례가 보여주듯, 고속도로 개통이라는 인프라 개선이 그것을 활용한 지역 주민과 중간 조직의 역량과 결합될 때 실질적인 경로 변화가 가능하다. 이러한 접근은 최근 강조되는 'Middle- up-down' 방식의 정책 거버넌스와 비슷하다. 따라서 주민 주도성을 촉진할 ‘중간 지원 조직’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선행 연구 및 일부 사례에서 나타나듯, 지자체 혹은 중앙 부처가 직접 운영하는 중간 조직은 행정적 간섭으로 인해 경직성을 보일 우려가 있으므로(김영환, 2020), 더 자율적인 형태의 중간지원조직이 플랫폼 역할을 맡는 정책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정선군의 민간 위탁형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예로 들 수 있다. 진정한 맞춤형 정책은 주민의 자생적 역량을 강화하고(Bottom-up), 이를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자율적인 중간조직을 육성하며(Middle-up), 중앙과 지방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행정적・재정적으로 뒷받침(Top- down)하는 거버넌스가 실질적으로 작동할 때 가능하다.
그럼에도 본 연구는 한국이라는 정치・경제적 맥락과 광업이라는 산업에 한정되어 있어 모든 산업에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기반 지역의 경로는 국가가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광업의 경로와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분석 틀을 다른 산업에 적용하기 전 추가적 검증이 필요하다. 그리고 데이터 구득의 한계에 의해, 경로가 분기되는 과정을 질적으로 추적한 연구의 특성상 각 유형에 해당하는 지역의 장기적인 성과를 체계적으로 비교 분석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미시적 행위자 분석의 문제가 있다. 본 연구는 시군 규모에서 경로 변화를 분석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참여한 개별 기업, 노동조합, 시민단체, 지방정부 등 미시적 행위자 간 구체적인 상호작용을 다루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지역 내 행위자들이 위기 대응 과정에서 어떤 전략을 세워서 행동하는지, 그 전략과 행위의 의도는 무엇인지,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과정 분석을 더욱 심화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향후 본 연구의 유형론적 분석 틀을 수정해 다른 산업 쇠퇴 지역에 적용하는 비교 연구, 각 유형별 경제적・사회적 성과를 추적하는 계량 연구, 그리고 특정 지역의 의사결정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사례 연구가 진행될 수 있으며, 이러한 논의는 지역 산업 경로 변화에 관한 더욱 깊고 넓은 이해로 이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