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1 October 2021. 503-522
https://doi.org/10.22776/kgs.2021.56.5.503

ABSTRACT


MAIN

  • 1. 서론

  •   1) 연구의 목적

  •   2) 김우식 국경탐사의 배경과 개요

  • 2. 1883년 5월 국경탐사와 「탐계노정기」

  •   1) 「탐계노정기」 번역문

  •   2) 「탐계노정기」의 해석과 탐사내용의 복원

  • 3. 1883년 6월 국경탐사와 「탐계일기」

  •   1) 「탐계일기」 번역문

  •   2) 「탐계일기」의 해석과 탐사내용의 복원

  • 4. 김우식의 국경탐사를 둘러싼 쟁점의 토론

  •   1)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 문제

  •   2)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의 송화강 유입 여부

  •   3) 분계강의 위치와 유로 문제

  • 5. 결론

1. 서론

1) 연구의 목적

김우식(金禹軾)은 함경도 종성 출신의 유학(幼學)으로서,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의 지시에 따라 두 차례에 걸쳐 백두산정계비와 경계표지물 그리고 이른바 ‘토문강’과 ‘분계강’에 대한 탐색을 수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1) 그가 남긴 기록으로는 『대한북여요선(大韓北輿要選)』의 「탐계공문고(探界公文攷)」에 주(註) 형식으로 실려 있는 「탐계노정기(探界路程記)」와 「탐계일기(探界日記)」가 있다. 그리고 2004년 북한에서 발간된 『백두산 고전작품 선집』을 통해, 그가 쓴 「백두산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가 남한에 알려졌다.2) 『감계사등록(勘界使謄錄)』에는 을유감계(1885년)의 ‘수원(隨員)’ 명단에 ‘김우식’이라는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데,3) 북한에서 번역・출간된 이 글을 통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그가 1880년대 조・청 국경논의의 시초를 이루는 국경탐사 활동을 했고, 감계에 수행원으로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국경논의의 중요한 증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기록 중 「탐계노정기」와 「탐계일기」는 백두산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이 두만강으로 유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보고한 것으로, 정계비의 ‘토문(土門)’이 두만강이 아니라 이른바 ‘토문강(土門江)’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이른바 ‘간도 영유권 주장’에서 중요한 근거가 되는 문건으로 지금까지 인용되어왔다. 더욱이 그의 국경탐사는 서북경략사 어윤중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기에 공신력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최근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경계표지물이 송화강 방향을 따라가다가 다시 두만강 방향으로 꺾여 설치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이화자, 2012; 2019; 이강원, 2017a; 2017b), 정계비의 ‘토문’은 두만강이며, 그에 따라 ‘간도 영유권 주장’은 성립이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김우식의 탐사보고를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정계비로부터 이어진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 경계표지물이 설치된 건천(乾川)의 길이, 그 하천이 송화강에 연결된다는 보고 등이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대표적으로, 이화자, 2013; 2019).

필자는 두만강 방향의 임진정계(1712) 경계표지물이 확인된 이상, ‘간도 영유권 주장’은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김우식의 국경탐사 기록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며, 그의 탐사보고를 정확하게 읽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김우식이 한문으로 작성한 「탐계노정기」와 「탐계일기」를 한글로 번역하고, 그것을 현지의 지리적 실제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한문원문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필자의 해석이 다른 연구자의 해석과 어떻게 다른지를 주요 쟁점을 선정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김우식의 국경탐사가 이른바 ‘간도 영유권 주장’에 확고한 근거를 제공했다고 보는 견해와 그가 조작된 보고를 하고 있다는 견해 양자 모두를 비판하고, 김우식의 국경탐사가 갖는 정확한 내용과 함의를 조명하고자 한다.

연구는 주로 김우식이 작성한 한문원문의 번역과 해석 그리고 필자의 2015년 세 차례에 걸친 백두산 동북사면 및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에 대한 현지조사 결과의 반복적인 대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만주지형도(1/10만), 일제지형도(1/5만), 러시아제 북한지형도(1/5만), 연변조선족자치주행정구획도(1991; 2002) 등 근현대 지도들과 구글어스(Google Earth) 및 고지도들을 활용하였다.

2) 김우식 국경탐사의 배경과 개요

19세기 후반 함경도 지방의 흉년으로 인해 두만강을 건너가 점거경작하는 백성들이 나타났다. 특히 1880년에는 ‘경진개척(庚辰開拓)’이라 불릴 정도로 대규모의 조직적인 월경과 점거경작 현상이 있었다(자세한 것은 김형종, 2018, 38-92 참조). 이에 대해 1∼2년간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던 청측은 1882년 겨울 길림장군의 점거경작 조선백성 쇄환명령과 1883년 4월 돈화현의 조선백성 귀환조치 고시라는 대응책을 들고 나왔다. 이에 조선정부는 1883년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임명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종성・온성・회령・무산 등의 변경백성들은 국경에 대한 나름의 논리를 제시하면서 탄원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두산에 정계비가 있고, 정계비에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 쓰여 있으며, 실제로 동쪽으로 하천이 이어진다. 그 하천은 양쪽 절벽이 흙으로 되어 있고 문처럼 마주본다. 이것이 토문강이며, 두만강과는 다른 강이다. 토문강은 백두산 북쪽으로 흐르다가 분계강이 되어 다시 두만강에 합류한다. 따라서 「압록강―정계비―토문강―분계강―두만강―동해」가 조선과 청의 국경이다. 그런데 돈화현이 우리나라의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잘못 알고,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돌아가라고 한다.

1883년 4월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회령에 도착하자, 김우식은 “간도지방의 농사문제”를 매듭지으려고 백여 명의 백성들과 함께 경략사를 찾아갔고, 경략사가 경원으로 떠나자 다시 따라가서 “백두산의 정계비와 정계표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이때 경원에 같이 간 친척 김사등과 박추오가 김우식을 적임자로 추천하였고, 경략사는 무산부에 보내는 공문과 타고 갈 말을 준비해주었다. 5월 1일 경원을 떠나 무산에 도착하여 공문을 제시하니, 산길을 잘 아는 황학채와 김여응, 짐꾼 권순여를 붙여주었다. 네 사람은 장파(長坡)의 창평(倉坪)에 가서 행장과 식량을 준비하였다. 11일 입산하여 15~17일 사이에 정계비 비문을 베끼고, 백두산 정상, 경계표지물,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 등에 대해 살펴보고, 29일 경원으로 돌아왔다.4) 이 탐사의 결과보고가 「탐계노정기」이다.

결과를 보고 받은 경략사는 사안이 중요하여, 비문을 베낀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니 비문을 탁본할 것, 다른 사람도 보낼 것이니 함께 가서 더 멀리까지 살펴볼 것을 지시하였다. 경략사를 따라 경원에서 회령에 온 김우식은 6월 3일 종성사람 오원정과 함께 다시 무산부로 갔다. 비문을 탁본할 이종려, 통역사 권홍조 및 짐꾼으로 군사 1명이 합류하였다. 14일 수봉 아래 관청 사냥막에 이르렀으나 우천으로 인해 18일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정계비와 경계표지물, ‘토문강’을 따라 내려가 황수와 황구령수가 합류하는 곳, 북증산, 청산, 해난평을 거쳐 7월 1일 회령으로 돌아왔다. 이 탐사의 결과보고가 「탐계일기」이다.

김우식의 보고를 들은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종성부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요지로 돈화현에 조회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문제가 외교사안으로 떠올랐다.

백두산에 임진년(1712)에 세운 정계비가 있고, 정계비에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고 했다.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토문강이 있다. 토문강은 두만강으로 유입되지 않고, 북으로 흐르고 있는데, 멀리 돌아 분계강이 되어 두만강에 다시 합류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사람을 보내 조사해보니 토문강과 분계강 사이가 연속되지 않는 곳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공동으로 확인하자. 사실을 조사하고 감정하여, 임진정계에 따르자.

이 조회는 김우식의 국경탐사 결과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내용을 통해 역으로 그의 국경탐사의 구체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정계비의 위치와 내용, 경계표지물의 분포,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이른바 ‘토문강’의 유로, 그리고 ‘토문강’과 이어진다고 전해오는 이른바 ‘분계강’의 유로 등에 대한 확인이었다.

2. 1883년 5월 국경탐사와 「탐계노정기」

제1절에서 「탐계노정기」의 번역문을 제시하고,5) 해석이 필요한 부분에 원문자로 번호를 부여하였으며, 제2절에서 그 번호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였다.

1) 「탐계노정기」 번역문

김우식의 탐계노정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15일(1883년 음력 5월), 날이 밝았는데 구름이 어둡고 장맛비가 내렸다. 아침이 지나자 바람이 일어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쳤으니 과연 신이 도와주는 것 같았다. (정계비를 세웠던) 강희 연간과 (정계비를 탐사하러 떠나는 지금) 광서 연간의 달과 일이 또한 일치하였다. 잠시 비문을 베끼고 산에 올라 바위 끝에 턱을 괴고 아래로 대택을 넘겨다보니 넓기가 큰 바다 같았다. 북쪽에 술 복자 모양으로 물이 넘쳐나는 것이 있었는데 ‘천상수(天上水)’라 하였다. 물이 공중으로 백 길 천 길을 떨어져 흘렀는데 바로 흑룡강의 근원이다. 못 속에서 계속 소리가 났으며, 구름이 위로 올라와 퍼지며 봉우리를 둘러싸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고, 회오리바람에 돌이 굴렀다. 겨우 나침반을 놓아보고 급하게 돌아내려오는데 구르고 넘어져 서로를 부축했다. 초경에 ① 어제 잤던 곳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늦게 마음을 가다듬고 힘써 다시 올랐는데, ② 입비처로부터 정계표시를 살펴보니, ③ 비의 동쪽에 잇따라 3개의 돌무더기를 쌓았고, 습한 곳 한 마장은 나무기둥을 연이어 세웠는데 반 척 남짓 드러나 있었으며, 개울 골짜기가 시작되는 곳은 동북에서 정동 방향 사이로 크게 열려있었는데 나무기둥이 끝나는 곳이었으며, 개울 동변에 종종 축석(築石)한 것이 10리 남짓이고, 그 아래 왕왕 둔석(屯石)한 것이 15리이며, 돌이 끝나니 왕왕 토둔(土屯)이 나무들 사이에 있었는데, ④ 60여 리에서 멈추었다. 17일, ⑤ 토둔이 있는 곳들을 따라 내려오니, 개울물은 땅속으로 숨고 스며들어 부석의 건천이 되었으며, ⑥ 30여 리에서 숨은 물이 다시 나와 차차 냇물을 이루었다. ⑦ 29일 김우식은 돌아와 경략사에게 보고하였다.6)

2) 「탐계노정기」의 해석과 탐사내용의 복원

「탐계노정기」에 따르면, 김우식은 광서 9년(1883) 음력 5월 15일에 백두산정계비를 거쳐 백두산정상에 올랐다. 그가 이날을 강희 연간과 견준 것은 목극등이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날이 바로 강희 51년(1712) 음력 5월 15일이었기 때문이다. 김우식이 양력을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광서 9년과 강희 51년의 음력 5월 15일은 양력으로도 각각 6월 19일과 6월 18일이어서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7)

① 김우식은 15일 일기에서 음력 5월 14일 밤에 어디서 잤는지 구체적인 장소나 지명을 밝히지 않고, “어제 잤던 곳”이라고 기록하였다. 백두산의 등반경로가 한정되어 있고, 그가 무산 방향에서 올라왔으므로, “어제 잤던 곳”은 우선 수봉(竪峰) 근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살펴볼 「탐계일기」에서 김우식은 6월 14일 “수봉 아래에 이르렀다.”고 기록하였는데, 이어지는 기록을 통해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8) 따라서 ‘수봉’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1885년 을유감계 과정에서 정계비 일대를 답사한 이중하는 눈보라 속에서 하산하면서 “수봉을 향해 내려갔으며…수봉 엽막(獵幕)에 도착하였는데 아직 날은 어두워지지 않았다.…아침 일찍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신무충(申武忠) 엽막에 도착하였다.”고 기록하였다(이왕무 등 역, 2008, 239). 여기서 신무충은 오늘날 신무성이다. 오늘날 신무성에서 정계비 방향으로 40리, 즉 도보로 4시간 거리 또는 등반로를 따라 대략 16km 거리에 있는 봉우리는 무두봉(無頭峰: 1,929.5m)이다. 1926년 여름 백두산에 오른 윤화수(尹和洙) 역시 신무성에서 무두봉까지의 거리를 40리로, 무두봉에서 백두산 정상까지의 거리를 30리로 기록하고 있다(윤화수, 1927, 103-112). 이상의 기록들을 통하여, ‘수봉’은 오늘날의 무두봉이며, 1883년 음력 5월 14일 밤 김우식이 잔 곳은 무두봉 아래에 있는 엽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1883년 5월 14일 밤과 15일 밤에 김우식이 잔 곳을 정계비로부터 5~6리 떨어진 압록강 상류로 해석한 적이 있다(이강원, 2016, 590). 그러나 그것은 백두산 등반 경로의 기본적인 패턴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오류였다. 이상의 논의에서 보듯이 김우식은 그 이틀 밤을 무두봉(수봉) 아래 엽막에서 잤다.

② 입비처는 정계비가 서 있는 곳을 가리킨다. 앞서의 기록들에서 언급된 바에 의하면, 정계비로부터 백두산 정상까지의 거리는 대략 10리이며, 정계비로부터 무두봉까지의 거리는 20리, 약 8km 정도이다.

③ 이 부분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정계표(定界表), 곧 경계표지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돌무더기 3개―나무기둥 한 마장―축석 10리 남짓―둔석 15리―토둔」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경계표지물에 관한 이러한 묘사는 『숙종실록』 38년(1712) 12월 7일자의 다음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정계비를 세운 곳에서 아래로 25리까지는 목책 또는 누석(累石)을 하였고, 그 아래의 물이 나오는 곳(水出處) 5리와 건천 20여 리는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내의 흔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경계표지물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 아래로 물이 솟아나는 곳(湧出處)까지 40여 리는 모두 목책을 설치하되, 그 중간의 5~6리는 원래 나무나 돌이 없고 토질 또한 강하기에 단지 토돈(土墩)만 설치하였습니다.

김우식의 묘사에 따르면, 우선 정계비로부터 둔석의 끝까지의 거리가 「돌무더기 3개 + 나무기둥 한 마장 + 축석 10리 남짓 + 둔석 15리」로서 도합 25리를 훨씬 넘는다. ‘한 마장’을 대략 5리 정도로 계산할 경우에는 30리에 이른다. 그리고 『숙종실록』 기록의 ‘누석’이든 김우식 기록의 ‘둔석’이든, 돌로 만들어진 경계표지물에 이어서 ‘토둔’이 있다고 김우식이 기록한 것 또한 『숙종실록』과의 차이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숙종 39년(1713)에 경계표지물 보강공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보강공사의 내역은 전해오지 않지만, 숙종 38년에 설치된 경계표지물에, 김우식의 용어대로, ‘둔석’ 5리 정도와 그에 이어 ‘토둔’을 추가하였을 것이다(이강원, 2016, 588-591). 다만 한 가지 기억해둘 것은 김우식이 토둔의 분포 길이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④ 김우식은 “돌이 끝나니 왕왕 토둔(土屯)이 나무들 사이에 있었는데, 60여 리에서 멈추었다. 17일, 토둔이 있는 곳을 따라 내려오니 바로 개울이었다(石盡往往土屯於樹木間, 六十餘里而止. 十七日, 從土屯處而下…).”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간 많은 연구자들이 이 ‘60여 리’를 토둔의 분포 길이로 간주해왔다(대표적으로, 이화자, 2013). 이에 대해 필자는 이 ‘60여 리’가 토둔(토퇴)의 분포 길이가 아니라, 그날 김우식이 하루 동안 걸어간 거리, 즉 「15일 밤에 잔 곳(昨宿處)―입비처(정계비)―16일 멈추어 잔 곳」의 거리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이강원, 2016, 590). 지금 필자는 당시 필자의 주장 역시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입장을 수정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기록의 ‘60여 리’는 김우식이 5월 16일 ‘정계비로부터 경계표지물을 확인하면서 걸어간 거리’이다. 김우식의 5월 국경탐사 목적은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분포상황과 그것이 설치된 하천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므로, 그의 이정 기록은 정계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문 원문에서 “自立碑處”(입비처로부터)라는 부분이 “六十餘里而止”(60여 리에서 멈추었다)라는 부분까지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장과 실제에 부합한다고 본다. 정계비로부터 경계표지물들을 따라 마지막 토퇴(토둔)까지의 지도상 거리가 약 23.1km이고, 그중 토둔의 분포 길이가 약 10.5km라는 것이 밝혀졌으므로(이강원, 2016, 606), 5월 16일 김우식은 토둔의 종점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지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⑤ 17일에는 다시 토둔을 따라 내려가다가 부석이 덮여있는 건천을 만났다. 이 부분에서 김우식은 토둔의 분포 길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기록을 통해서는 토둔의 분포 길이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토둔을 따라 내려가면 부석이 깔린 건천을 만난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점은 필자의 답사에 의해서도 이미 확인되었다(이강원, 2017a).

⑥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16일 정계비로부터 60여 리 지점에서 멈추어 잤다고 하였는데, 사실 이 지점은 토둔의 종점 부근이다.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 동남안을 따라 설치된 토둔은 종점 부근에서는 부석으로 덮인 건천과 거의 붙어 있다. 따라서 그가 17일에 따라 내려온 토둔의 길이는 매우 짧았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30여 리’이다. 부석으로 덮인 건천을 30여 리 가다보니 물이 다시 나왔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연구자들은 정계비로부터 내려오는 골짜기는 토둔과 더불어 끝나고,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이화자, 2013; 2019).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30여 리’가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와는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토둔 종점 부근에서 만난 부석으로 덮인 건천 중 17일 아침부터 김우식이 걸어갔던 구간의 거리일 뿐이라는 점이다. 김우식이 이 30여 리를 더 갔으므로, 그는 정계비로부터 90여 리까지 가본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물이 다시 나와서 냇물을 이루는 모습을 확인했던 것이다.

정계비로부터 90여 리 지점에서 그가 확인한 하천의 모습은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의 측량수 오소네 세이지(大曾根誠二)가 1907년 9월 5일∼10월 2일에 실시한 답사 결과와 일치한다. 오소네 세이지는 “…사천(砂川)의 연장은 약 1,000m로, 그로부터 하류 약 3리(조선 리 30리) 사이에 세류(細流)를 이루며, 그 이하에서는 양안절벽 수류의 곤곤(滾滾)함이…”(동북아역사재단, 2013, 164-165)라고 보고하였는데, 여기서 ‘사천’은 토둔 종점 부근에 있는 흑석구(黑石溝: 헤이스거우)의 하도가 뚜렷하지 않은 구간을 말한다. 이른바 ‘황화송전자(黃花松甸子)’ 부근이다. 그로부터 약 30리를 내려가는 동안은 물길이 매우 가늘다는 것과 그 이하에서 물길이 뚜렷하고 커진다는 점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김우식의 보고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며,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근 일부 연구자들이 정계비로부터 시작되는 하천(소위 ‘토문강’으로서, 현재 북한 구간은 백두천으로, 중국 구간은 흑석구로 불림)이 송화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그에 동조하고 있다(이화자, 2012; 2013; 김형종, 2020). 그러면서 김우식이나 오소네 세이지의 탐험과 그 결과가 모종의 불순한 의도와 조작의 혐의가 있다고 주장한다(이화자, 2012; 2013).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잘못된 지리적 지식과 정보에 기초한 것으로 본다. 김우식의 보고는 조작된 것이 아니다.

⑦ 김우식은 17일 부석으로 덮인 건천에서 물이 다시 흐르는 것을 확인했다. 그 하천은 두만강 상류로 이어지지 않고 중국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그는 정계비로부터 시작되고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이 설치된 하천이 두만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김우식은 29일 당시 경원에 있던 서북경략사 어윤중에게 국경탐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3. 1883년 6월 국경탐사와 「탐계일기」

제1절에서 「탐계일기」의 번역문을 제시하고,9) 해석이 필요한 부분에 원문자로 번호를 부여하였으며, 제2절에서 그 번호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였다.

1) 「탐계일기」 번역문

김우식의 탐계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① 14일 수봉 아래에 이르렀다. 계속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18일 날 밝을 때에 이르러 그쳤으나 쾌청하지는 않았다. 아침식사 후 입비처에 올라갔다. 다섯 사람이 각각 비옷을 이고 비석을 둘러쌌다. 겨우 8장을 탁본하였으나 모두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람과 비에 쫓겨 내려왔다. ② 다음날(19일) 날씨는 전날과 같았다. 또 가서 20장을 탁본했고, 서쪽으로 대각봉을 넘어, 석둔 끝으로부터 토둔을 따라 토문을 나와 부석 개울로 내려왔으며, 80여 리에서 멈추어 잤다. 이 위로는 건천이 100리에 가까웠으며, 이 아래로는 차차 내를 이루어 길게 흐르고 커졌다. ③ 21일, 물길을 따라 아래로 60여 리를 가서 서쪽으로 토문강을 건너 삼나무가 있는 강가에서 멈추어 잤다. ④ 22일, 북쪽으로 5리를 가서 동쪽으로 토문강을 건넜다. 북쪽으로 장산 끝자락을 넘어 산줄기를 동쪽에 끼고 80여 리를 갔다. 돌 언덕의 세 강이 합치는 곳에서 멈추어 잤다. 원류는 토문강이고, 두 물줄기는 북증산에서 발원하는데, 서류하는 것은 황수이고, 북류하는 것은 황구령수이다. 세 강이 여기에서 모여 북류하여 흑룡강에 들어간다. 강가에 길이 없어 단지 물이 얼어붙기를 기다려 길림에 왕래한다고 한다. ⑤ 23일,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80리를 갔다. 24일, 동북간으로 70리를 갔다. 25일, 북쪽으로 70리를 가서 북증산 서쪽 협곡에서 잤다. 26일, 북으로 40여 리를 가서 북증산에 올랐다. 수백여 리의 산이 둘러 있어서 마치 사람의 배꼽과 같았다. 동남에서 2개의 큰 내가 나가서 합쳐져 정남쪽으로 200여 리를 흘러 두만강에 들어가는데 올구강이라고 부른다. 서남에서 두 개의 큰 내가 나가서 토문강에 들어간다. 북쪽에서 나와 동류하는 것은 해난강이다. 서쪽으로 내려간 큰 산줄기가 서북으로 곧게 꺾였는데, 멀리 바라보고자 하여도 나무가 울창하여 깨끗하게 볼 수 없었다. 곧 산 아래로 돌아와 머물러 잤다. ⑥ 27일, 동북간으로 100리의 긴 골짜기를 나가니 남쪽 지경이 평야였다. 이곳을 청산이라 부른다. ⑦ 28일, 서쪽으로 높은 산을 올라 하반령을 마주 바라보니, 하나의 큰 강물이 산 밑에서 발원하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평하통수(坪下通水)라고 부르니, 예로부터 전해오는 분계강(分界江)이 이것인 것 같다. 이 강의 근원으로부터 토문강 지경 사이가 산으로 나뉘어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 강이 아래로 협심자(夾心子)에서 합류한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시 동쪽 해난평(害難坪)으로 향했다. 7월 초하룻날 회령에 돌아와 경략사에게 임무 완료를 보고하였다.10)

2) 「탐계일기」의 해석과 탐사내용의 복원

① 여기서 14일은 1883년 음력 6월 14일이며, 양력으로는 7월 17일이다. 수봉은 앞서 밝혔듯이 오늘날의 무두봉이다. 무두봉은 백두산 정상을 등반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숙박하는 지점으로 당시에는 엽막이 있었다. 1926년에 백두산에 오른 최남선(1927)윤화수(1927) 역시 백두산 정상에 오르기 직전 무두봉에서 1박을 하였다.

② 이하에서 김우식은 정계비에서 탁본을 한 이후 5월 국경탐사 때와 같이 석축・석둔 등의 경계표지물을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계비로부터 대각봉을 서쪽으로 넘어서 석둔의 끝으로 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계비로부터 석둔 종점까지의 구간은 5월 국경탐사에서 분명하게 확인되었기 때문에 경계표지물을 따라가지 않고 곧장 대각봉을 넘은 것이다. 대각봉 너머에서 경계표지물은 석둔에서 토둔(토퇴)으로 바뀐다. 그는 토둔을 따라 이른바 ‘토문강’(흑석구) 동남안을 계속 갔으며, 토둔이 끝나는 지점에서 부석이 덮인 개울로 내려왔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토문강’(흑석구)은 양안이 흙으로 된 절벽이 끝나고 개활지로 변한다. 김우식은 이러한 상황을 “토둔을 따라 토문을 나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80여 리에서 멈추어 잤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이 ‘80여 리’가 어디로부터의 거리인가라는 점이다.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첫째, 수봉(무두봉) 숙박지로부터 80여 리에서 일정을 멈추어 잤다는 뜻일 가능성이다. 둘째, 부석으로 덮인 개울을 80여 리 가다가 멈추어 잤다는 뜻(이화자, 2013, 260; 2019, 143)일 가능성이다. 셋째, 정계비로부터 80여 리에서 멈추어 잤다는 뜻일 가능성이다.

첫째의 경우는 바로 이어지는 “이 위로는 건천이 100리에 가까웠”다는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 수봉(무두봉)에서 정계비까지의 거리가 약 20리이므로, 정계비로부터는 60여 리가 되는 지점에서 멈추어 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건천의 길이도 60여 리에 가깝지 100리에 가깝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의 경우가 성립하려면, 김우식이 그날 수봉(무두봉) 숙박지에서 정계비까지 20리, 정계비에서 토둔의 끝까지 약 60리, 그리고 다시 부석이 덮인 개울 80리를 합하여 모두 160리(약 64km)를 간 것이 된다. 가능성이 매우 적은 경우이며, 「탐계일기」의 이후 노정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셋째는 ‘탐계(探界)’라는 그의 목적에 비추어 이정을 정계비로부터 계산했을 것으로 보는 경우이다. 「탐계노정기」에서의 ‘60여 리’와 마찬가지로 이 ‘80여 리’도 정계비로부터 간 거리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계비―대각봉 서쪽―석둔의 끝(토둔의 시작)―토둔의 끝(양안절벽(토문)의 끝)―부석으로 덮인 개울에서 멈춘 곳」의 거리가 80여 리라는 것이다. 만약 김우식이 정계비에서 대각봉 서쪽 구간을 곧장 가지 않고 경계표지물을 따라 갔다면, 이 ‘80여 리’에서 10여 리가 늘어나기 때문에 근 100리에서 멈추어 잤다고 썼을 것이다. 자신은 정계비로부터 곧장 대각봉을 넘어 그 다음부터 경계표지물을 따라 오다가 부석건천으로 내려와 계속 갔으며, 정계비로부터 80여 리 지점에서 멈추어 잤는데, 생각해보니 이 지점에서부터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정계비까지는 100리에 가까운 거리이고, 그 구간이 모두 건천이라는 의미이다. 필자는 이렇게 세 번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백두산의 실제와 김우식 문장의 구조 및 맥락에 부합한다고 본다.

그가 이날 지숙한 곳은 5월 17일에 “30여 리를 가니 숨은 물이 다시 나와 차차 내(川)를 이루었다.”고 말한 지점과 동일하다. 5월 17일에 그는 정계비로부터 경계표지물을 따라 60여 리, 그리고 그에 더하여 부석이 덮인 건천 30여 리를 갔으므로, 합하여 ‘100리에 가까운’ 거리를 갔다. 6월 19일 그는 ‘80여 리’를 갔지만, 정계비로부터 대각봉을 거쳐 석둔의 끝에 이르는 구간은 경계표지물들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갔으므로,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개울골짜기를 따라 걸으면 “100리에 가까운” 거리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5월 17일 그가 도달한 곳과 6월 19일 그가 지숙한 곳은 같은 지점이었다.

이 지점은 임진정계 토둔(토퇴)의 종점으로부터 흑석구 하도를 따라 30여 리(약 12km) 내려간 곳으로, 흑석구와 사을수(斜乙水)의 합류점에 약간 못 미치는 곳으로 추정된다. 사을수는 흑석구와 동붕수(董棚水) 사이에서 동북류하는 하천으로 서쪽으로 흑석구와 합류한 후 다시 동쪽으로 동붕수와 합류하여 오도백하(五道白河)를 이루고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사을수는 을유감계에서 처음 기록된 지명이며(이왕무 등 역, 2008, 201-20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감계사등록(상), 90-91), 정해감계의 지도(규축 26675)에 표시되었고, 오록정(1907, 242)에 의해서도 기록되었다.11)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이 부분의 “80여 리” 및 “100리에 가깝다”는 표현이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를 이른바 ‘90여 리로 조작하려는 의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김우식의 보고는 조작된 것이 아니다. 그간 그의 보고를 잘못 읽었을 뿐이다.

김우식의 이번 국경탐사의 목적은 경계표지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표지물이 설치된 하천이 어디로 흐르며, 그것이 과연 분계강이 되어 두만강으로 이어지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보고에서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5월의 답사에서 경계표지물의 분포 상황에 대해 이미 보고했기 때문이다.

③ 20일 기록은 없고, 바로 21일 기록으로 이어진다. 김우식 일행은 19일에 수봉(무두봉) 엽막에서 정계비까지 20리, 그리고 정계비에서 지숙처까지 80여 리를 갔으므로, 도합 100여 리를 갔다. 40km를 넘는 거리이다. 20일은 아마도 기상상의 이유로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21일 기록에서 처음으로 ‘토문강(土門江)’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정계비에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했으므로, 정계비로부터 동쪽으로 이어진 하천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 하천은 오늘날 북한 구간에서는 백두천, 중국 구간에서는 상류에서 하류로 가면서 흑석구,12) 오도백하, 송화강으로 불린다. 이 하천 동안을 따라 60여 리를 내려가서 강 서안의 삼나무가 있는 곳에서 지숙했는데, 오늘날 성화임장(星火林場: 싱훠린창) 부근의 오도백하 서안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는 백두산 동사면과 동북사면에서 많이 보이는 장백낙엽송이 잘 보이지 않고, 전나무・백송・가문비나무 등 삼나무 종류가 많다.

④ 22일의 기록을 검토하기로 한다. 김우식은 21일 지숙처에서 ‘토문강’(오도백하) 서안을 따라 5리를 내려가서 동안으로 건넜다. 그리고 “북쪽으로 장산 끝자락을 넘어 산줄기를 동쪽에 끼고 80여 리를 갔다.”고 했다.

여기에 언급된 장산(長山)은 백두산의 원지(圓池) 북쪽의 「장산령(長山嶺: 창산링)―장홍령(長紅嶺: 창홍링)―북증산(北甑算: 증봉산: 甑峰山)」으로 이어지는 남북방향의 산줄기 중에서 장산령-장홍령 구간을 말한다. 조선에서는 ‘진장산(眞長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산체의 북쪽 끝자락에 오늘날 성화임장이 위치한다. 이곳에서 김우식은 곡류하는 하천을 따라 걷지 않고 장산의 한 지맥으로 뻗어 내려온 강가의 낮은 언덕을 약 2km 정도를 가로질러 갔다. 물길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이 갑자기 “장산의 끝자락을 넘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장산령―장홍령―북증산」이라는 산줄기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토문강’을 따라 갔기 때문에, 산줄기를 동쪽에 끼고 간 것이 된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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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883년 6월 22일 김우식의 행로 복원(주: Google Earth에 표시)

“돌 언덕(石陵)의 세 강이 합치는 곳에서 멈추어 잤다.”고 했는데, 21일의 지숙처로부터 80여 리 떨어진 곳이자 세 강이 합치는 곳이므로, 오늘날 안도현(安圖縣: 안투현) 삼도향(三道鄕: 싼다오향) 삼도촌(三道村: 싼다오촌) 동쪽이다. 원문의 ‘석릉(石陵)’이 지명인 것 같지는 않다.13) 김우식이 세 하천이 합쳐지는 곳의 경관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삼도촌의 동쪽은 강물에 의해 운반된 자갈이 두텁게 퇴적되어 단구를 이루고 있다. 김우식은 ‘돌로 쌓인 언덕’ 혹은 ‘돌의 구릉’이라는 의미에서 ‘석릉’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여기서 ‘세 강’은 김우식이 따라 내려온 ‘토문강’(백두천―흑석구―오도백하), 황수(黃水), 황구령수(黃口嶺水)이다. 황구령수는 오늘날 황구(荒溝: 황거우)로 불린다. 김우식이 따라 내려온 ‘토문강’은 백두산정계비 부근에서 골짜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원류라고 보았고, 황수와 황구령수는 북증산(北甑山)14)에서 발원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북증산은 오늘날 「증봉산(甑峰山: 쩡펑산, 1,676m)―노령(老嶺: 라오링, 1,458m)―평정산(平頂山: 핑딩산, 1,436m)」으로 이어진 산줄기 중 증봉산을 말한다. 오늘날 화룡시(和龍市: 허룽시) 서쪽에 위치한다. 이 산에 대응하는 ‘남증산’은 백두산 동쪽 대홍단에 있는 증산이다. 모두 시루를 엎어놓은 모습이다. 황수가 서류한다고 한 것과 황구령수가 북류한다는 것은 세 강의 합류 지점 일대에서 김우식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이며, 오늘날 지도를 통해서 살펴보면 황수는 전체적으로 서류의 경향을 보이지만 황구령수는 전체적으로 동북류하는 경향을 보인다.

22일의 국경탐사 활동을 통해 김우식은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첫째, 자신이 80여 리를 북쪽을 향해 오는 동안 동쪽에 장산령이 버티고 있어서 자신이 따라 내려온 ‘토문강’이 동쪽으로 흘러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 현지주민의 증언으로서, 자신이 따라 내려온 ‘토문강’이 북류하여 흑룡강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셋째, 역시 현지주민의 증언으로서, 황수와 황구령수가 동쪽에 있는 북증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자신이 따라 내려온 ‘토문강’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5)

그는 자신이 따라 내려온 이른바 ‘토문강’이 ‘분계강’으로 들어가고 다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지를 확인하러 왔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정보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자신이 따라 내려온 ‘토문강’이 동쪽으로 흘러 ‘분계강’이 되고, 다시 두만강이 되어 동해 바다로 들어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당황했을 것이다. ‘토문강’을 계속 따라 내려가 정말 길림을 거쳐 흑룡강에 들어가는지 확인하고자 해도, 강가를 따라 길이 없다. 강물이 어는 겨울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이제 남은 방법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는 것뿐이었다.

⑤ 김우식은 23일부터 26일 밤까지 4일 동안 300리(약 120km) 넘는 거리를 갔다. 23일 동쪽으로 80리를 갔다고 했는데, 동쪽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북증산(증봉산) 방향이다. 그러나 북증산(증봉산)을 아무 곳으로나 올라갈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일단 황구령수를 따라 장산령 산체와 북증산(증봉산) 산체 사이의 낮은 지점에 있는 고개에 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23일의 지숙처는 그가 기록한 거리와 취락입지의 관성을 고려할 때, 오늘날 화룡 황구임장(和龍荒溝林場: 허룽황거우린창) 쯤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일본이 1933년에 발간한 『만주십만분일지도(滿洲十萬分一地圖)』「연길십삼호(延吉十三號): 봉밀구(蜂蜜溝)」 도엽에 오늘날 화룡황구임장의 위치에 ‘양방자(楊房子: 양팡쯔: 버드나무집)’라는 단독가옥 표시가 있기 때문이다.

24일 동북 간으로 70리를 갔다고 했는데, 동쪽으로 가고 북쪽으로도 간 거리가 70리라고 읽힌다. 23일의 지숙처에서 화룡 방향의 고갯길이 오늘날도 그렇게 나 있다. 이 구간은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길이다. 오늘날 허가동임장(許家洞林場: 쉬자동린창) 또는 사금구(沙金溝: 사진거우) 부근에서 지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3년 『만주십만분일지도』「연길십사호호: 석인구(石人溝)」 도엽에는 이 일대에 ‘沙金溝(사금구)’와 ‘大東水溝(대동수구)’라는 취락이 표시되어 있다.

25일, 북으로 70리를 갔으며, 그곳은 북증산(증봉산)의 서쪽 협곡이었다. 오늘날 실제로 증봉산 서쪽에 남북으로 긴 협곡이 있다. 그리고 그 협곡이 끝나는 지점의 바로 북쪽에 노리극호(老里克湖: 라오리커후)라는 연못이 있는 노리극(라오리커) 봉우리가 있다. 노리극호는 해란강의 발원지이며, 노리극 봉우리는 동으로 흐르는 해란강(海蘭江: 하이란강), 서로 흐르는 황구(황구령수), 남으로 흐르는 올구강(홍기하)의 분수령이다.

26일, 북으로 40여 리를 가서 북증산(증봉산)에 올랐다. 북증산 서쪽 협곡에서 잤으므로 동쪽으로 가야 북증산에 오를 수 있을 것인데, 북쪽으로 40여 리를 갔다고 하였다. 아마도 북쪽으로 난 긴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가 다시 노리극 동쪽 능선으로 올라가서, 잠시 동남 방향의 능선을 타고 북증산 정상에 이르렀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 같다.

이어지는 서술은 북증산 정상에서 본 경관에 관한 것이다. 북증산(증봉산)은 해발고도가 1,676m으로, 백두산 지구의 산봉우리들을 제외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김우식이 북증산에 오른 것은 가장 높은 이곳에서 사방의 지세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먼저 하천에 대해 서술한다. 북증산(증봉산) 남록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에 합류하는 올구강(兀口江: 홍기하: 紅旗河)16)을 확인한다. 이 올구강이 ‘분계강’일 수 없다. ‘토문강’이 이 강으로 유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북증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토문강’(오도백하)에 합류하는 2개의 큰 내는 오늘날 황구(황구령수)와 성화구(星火溝: 싱훠거우)를 가리킨다. 이 하천들은 동류하지도 않고 두만강에 합류하지도 않으므로 ‘분계강’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북증산의 북쪽 노리극 정상 호수에서 나와 동류하는 ‘해난강(害難江)’을 관찰했다. 오늘날의 해란강(海蘭江)을 말한다. 이것도 분계강이 될 수 없었는데, 자신이 따라 내려왔던 ‘토문강’이 ‘해난강’에 유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는 산세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북증산(증봉산)은 서쪽으로 노리극 봉우리로 낮아지다가 서북쪽으로 꺾여서 노령으로 이어진다. 그 산줄기는 계속 뻗어나갔지만, 나무가 울창하여 뚜렷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북증산(증봉산) 정상에서 남・서・동의 하천을 확인했고, 그 하천들이 분계강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다. 다만 북쪽과 북동 방향의 하천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산 아래로 돌아와 잤다. 바로 40여 리 서쪽에 있는 어제 잤던 곳이다.

⑥ 27일, 김우식은 북증산 북쪽에 있는 동-동북 방향의 긴 골짜기를 내려왔다. 먼저 서쪽 협곡에서 산등성이를 넘어 동북쪽 골짜기로 와서 계속 동쪽 방향으로 내려갔고, 따라 내려온 하천의 남쪽에 펼쳐진 들판을 만났다. 그는 이 지점을 ‘청산(靑山)’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오늘날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허룽시)의 소재지와 용성진(龍城鎭: 룽청진) 일대를 말한다. 그가 따라 내려온 것은 노리극 봉우리의 연못에서 발원하여 북증산(증봉산) 동북쪽에서 동류하는 해란강 본류였는데, 노리극으로부터 골짜기를 따라 100리 지점은 화룡시 소재지와 용성진 일대이며, 그 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야’라고 부를 수 있는 넓은 들을 볼 수 있다. 청산리 대첩으로 널리 알려졌고,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청산(靑山)’이 노리극으로부터 이어지는 골짜기 중간에 있기 때문에, 김우식이 28일 그곳에서 지숙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십만분일지도』「연길십삼호: 봉밀구」도엽에 오늘날의 화룡시 소재지 및 용성진 일대에 ‘靑山洞’(청산동: 칭산동)과 ‘三道溝’(삼도구: 싼다오거우)가 나란히 표시되어 있다(그림 2). 이곳이 김우식이 언급하고 있는 ‘청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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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청산과 서쪽의 높은 산(출처: 『滿洲十萬分一地圖』 「延吉十三號: 蜂蜜溝」 도엽, 주: 오른쪽 원표시 안에 ‘靑山洞’이 표기되어 있다. 왼쪽 끝 중간의 봉우리가 ‘서쪽의 높은 산’이다.)

⑦ 28일, 김우식은 서쪽에 있는 높은 산에 올랐다. 오늘날 화룡시 소재지 서쪽에 있는 1,467m의 봉우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봉우리로서 증봉산의 일부로 간주된다. 그가 이 산에 오른 이유는 북증산(증봉산) 정상에서 울창한 나무 때문에 북쪽과 북동쪽의 지세를 조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화룡시 일대에서 북쪽으로 합이파령(哈爾巴嶺: 하얼바링: 下畔嶺: 하반령)17)을 바라볼 때 중간에 1,000m 급의 산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높은 곳이어야 그 일대를 조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화룡시 서쪽에서 그러한 조망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1,467m 고지이다.

그는 이 산에서 ‘하반령(下畔嶺)’ 곧 합이파령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출간된 「백두산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는 “북증산에서부터 하반령에 이르러 예로부터 분계강이라고 부르는 강을 살펴보니”(리성, 2004, 214)라고 번역하였다. 1883년 6월 김우식이 하반령에 직접 간 것처럼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이 번역 역시 한문 번역 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실제의 맥락에서는 오역이 된다.

하반령은 고개가 아니라 오늘날 하얼바링이라 불리는 산으로 해발 1054.5m이다. 김우식이 올라간 청산 서쪽의 높은 산에서 정북 방향에 있다. 그리고 그 산 아래에서 포이합통하(布爾哈通河: 부얼하퉁허)18)가 발원한다. 김우식은 이 하천을 당시 청나라 사람들이 ‘평하통수(坪下通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예로부터 전해오는 ‘분계강’인 것 같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필자는 청나라에서 포이합통강을 ‘평하통수’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포이합통수(布爾哈通水)’의 현지 발음인 ‘부얼하퉁수이’19)를 ‘벌하통수’라 듣고, ‘벌’을 ‘坪(평)’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김우식은 현지 발음으로 ‘부얼하퉁수이’라는 지명이 ‘벌하통수’, 곧 ‘坪下通水’, 다시 말해서 ‘벌(평평한 땅) 아래로 통하는 하천’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옛날 사람들이 “‘토문강’이 땅 밑을 통과하여 ‘분계강’으로 이어진다.”20)고 생각한 것과 연장선에 있다. 때문에 그는 ‘포이합통하(부얼하퉁허)’, 곧 ‘평하통수’가 예부터 전해오는 ‘분계강’인 것 같다고 한 것이다. ‘토문강’과 ‘분계강’은 연결되어 있을 것인데, 마침 하반령에서 나오는 물줄기의 이름이 ‘벌 아래로 통하는 하천’이라는 뜻이고, 백두산에서 시작된 ‘토문강’이 산줄기들을 멀리 휘돌아 땅 밑을 통하여 나와 두만강에 들어간다고 예로부터 전해오므로, 바로 이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가 옛 사람들이 말한 ‘분계강’이라고 김우식은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김우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밝혀놓았다. 첫째, ‘토문강’과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 사이가 평평한 땅도 아니고, 「백두산―장산령―북증산(증봉산)―하반령」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가로막혀 있어서 물이 통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평하통수’가 예로부터 전해오는 ‘분계강’으로 추정된다 할지라도, ‘토문강’과의 사이가 산줄기로 막혀 두 하천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평하통수’가 ‘토문강’이 이어지는 ‘분계강’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가 흘러내려가 협심자(夾心子)에서 두만강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두 가지 견해를 검토해보면, 전자는 이 지역의 지리적 사실과 부합하지만, 후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가 두만강에 이르는 동안 ‘협심자’(夾心者: 자신쯔)라는 지명은 확인할 수 없다. 이 지명은 혼춘하(琿春河: 훈춘허)의 유로상에 존재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용정・화룡・도문・돈화・왕청・혼춘・안도 등 8개 시현의 지명지를 모두 검토한 결과, ‘협심자’라는 지명은 두 곳에 나타난다. 혼춘시 마적달향(馬滴達鄕: 마디다향)의 탑자구(塔子溝: 타쯔거우) 경내와 삼가자만족향(三家子滿族鄕: 싼자쯔만주향) 경내이다. 전자는 민국시기 초기에 마을이 만들어졌다가 탑자구에 통합되었다(琿春市人民政府, 1990, 356). 후자는 혼춘하와 두만강이 만나는 지역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위치는 대략 북위 42도 48분 39초, 동경 13도 17분 58초이다. 이 마을은 청 강희 53년(1714)에 만들어졌으며, 혼춘하와 그 지류 고극납하(庫克納河: 쿠커나허)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만주어로 ‘좁다’는 의미에서 ‘자신쯔(夾心子: 협심자)’라고 부른다고 한다(琿春市人民政府, 1990, 90). 이 마을과 지명은 일본이 만든 지도에서도 확인된다. 1907년 측량, 1933년 발행의 『조선만주십만분일지도(朝鮮滿洲十萬分一地圖)』「혼춘(琿春)」도엽에는 ‘夾信子(협신자)’가 두 곳에 표시되어 있다(그림 3). 1935년의 수정판에는 ‘夾信子’가 한 곳에 표시되어 있지만, 앞의 지도와 같은 위치이다(그림 4). ‘夾信子(jiaxinzi)’와 ‘夾心子(jiaxinzi)’는 동일한 만주어를 음역한 것으로서 중국어 발음도 같다. 따라서 지도의 ‘夾信子’는 김우식이 언급한 ‘夾心子’를 의미한다. 조선의 경원군 소재지에서 동으로 약 7km 거리이며, 혼춘(훈춘) 평원의 하단으로, 두만강과 혼춘하(훈춘허)가 합류하는 지점 부근이다.

이렇듯 ‘협심자’라는 지명이 혼춘하 유로상에 있으므로, 김우식은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가 혼춘하(훈춘허)로 이어지고 혼춘하가 두만강으로 이어진다고 확신한 것이 된다. 이러한 김우식의 확신은 지리적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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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협신자(夾信子) 지명의 위치(출처: 『朝鮮滿洲十萬分一地圖』 「琿春」 도엽(1933), 주: 원 표시 내에 ‘夾信子’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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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협신자(夾信子) 지명의 위치(출처: 『朝鮮滿洲十萬分一地圖』 「琿春」 도엽(1935), 주: 원 표시 내에 ‘夾信子’가 표시되어 있다.)

아마도 김우식은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허퉁허)를 「서북피아양계전도(西北彼我兩界全圖)」에 표시된 하천 ‘보토오라’(甫土烏喇: 푸투우라)21)와 같이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그림 5). 이 지도에서 ‘보토오라’ 물줄기 최상류에는 ‘源出於白頭山(근원은 백두산에서 나온다)’라고 표시되어 있다. 백두산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것으로 그렸으면서도,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온다고 쓴 것이다. 하류에서는 ‘後春江’(후춘강: 혼춘하: 훈춘허)이 되어 두만강에 합류한다. 그는 국경탐사 출발 전에 이러한 유형의 지도를 참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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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서북피아양계전도」(부분)에 표시된 ‘보토오라’(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 주: 원 표시 부분에 ‘甫土烏喇’와 ‘源出白頭山’이 표기되어 있다. ‘보토오라(甫土烏喇: 푸투우라)’는 오늘날 포이합통하(부얼하퉁허)로서 합이파령(하얼바링: 하반령)에서 발원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백두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 유로가 후춘강(혼춘하: 훈춘허)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김우식은 이러한 종류의 지도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가 ‘분계강’이고 ‘협심자’에서 두만강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한북여요선』의 「사계공문고(査界公文攷)」에도 기록되어 있다.22) 이는 김우식의 「탐계일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다만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가 온성 대안에서 흘러와 두만강에 유입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고, 그에 따라 ‘협심자’가 온성 대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바뀌어 있다. 그러나 온성 대안에 ‘협심자’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백두산정계비지도」(奎 26676)의 두만강 온성 대안에 ‘一名夾心子’라는 표기가 있다. 이 지도는 『대한북여요선』 「사계공문고(査界公文攷)」에 기록된 1898년 ‘사계(査界)’의 결과물로 보인다. 김우식의 탐계일기 기록과 포이합통하(부얼하퉁허)의 실제 유로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알고서 타협책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一名’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28일, 청산의 서쪽 높은 봉우리에서 북쪽과 북동쪽의 하천들을 관찰한 김우식은 다시 동쪽으로 길을 틀어 ‘해난평(害難坪)’으로 향했다. ‘해난평’은 오늘날 해란강 유역의 평원을 지칭한다. 「서북피아양계전도」에서는 오늘날 해란강 유역에 ‘대해난평(大害難坪)’이라 쓰고 있다. 김우식이 해란강 유역의 평원을 다른 한자가 아닌 ‘害難坪’으로 쓴 것 역시 그가 출발 전에 「서북피아양계전도」와 같은 유형의 지도를 보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김우식은 28일 높은 산에 올랐다가 길을 고쳐 해난평을 향해 출발했다. 회령으로 귀환했으므로, 「청산―해란강―용정―회령」의 경로를 따라 약 100km를 이동했을 것이다. 29일과 30일 그리고 1일까지 계속 길을 가서 1일 저녁 회령으로 돌아왔다고 가정했을 때, 그는 하루에 약 33km, 대략 80리 정도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해난평(용정)에서 회령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이런 경로로 귀환했기 때문에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가 해란강과 합류하고 다시 알하하(가야허)와 합류하여 두만강에 유입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경략사를 만나러 5월에 경원에 갔을 때에도 두만강변을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종성에서 경원으로 바로 난 길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해난평’을 흐르는 ‘해난강’(해란강)은 온성에서 두만강에 합류하지만,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는 혼춘하로 이어지고 경원 대안의 협심자로 흘러와 두만강에 합류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이상에서 확인한 김우식의 제2차 국경탐사 경로를 지도에 표시하면 그림 6그림 7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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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김우식의 1883년 6월 제2차 국경탐사 경로 상세도(주: 지도에 숫자로 표시된 지점에서 지숙한 날짜는 다음과 같다. 1. 14・15・16・17・18일(수봉: 무두봉) 2. 정계비(탁본, 지숙하지 않음) 3. 19‧20일 4. 21일 5. 22일 6. 23일 7. 24일 8. 25・26일 9. 27・28일(청산: 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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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김우식의 1883년 6월 제2차 국경탐사 경로의 거시적 조망(주: 지도에 표시된 숫자의 의미는 그림 6과 같음.)

4. 김우식의 국경탐사를 둘러싼 쟁점의 토론

이상에서 김우식의 두 차례에 걸친 국경탐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김우식의 활동과 관련하여 필자가 다른 연구자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점들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첫째,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곧 목책・석축・석둔・토둔의 분포 길이, 둘째,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의 송화강 유입 여부, 셋째, 분계강의 위치와 유로가 그것이다.

1)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 문제

일부 연구자들은 김우식 「탐계노정기」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분포 내용이 조작된 것이며, 조작의 배후에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있다고 주장한다(대표적으로, 이화자, 2013; 2019, 129-161). 그들은 「탐계노정기」의 5월 16일 기록이 「정계비―돌무더기 3개―나무기둥 한 마장(약 5리)―석축 10리 남짓―석둔 15리―토둔 60여 리」를 의미한다고 읽고, 김우식이 보고한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가 도합 ‘90여 리’에 이른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는 『숙종실록』의 「정계비―목책 또는 누석 25리―물 나오는 곳 5리―건천 20여 리―목책 40여 리(중간 5∼6리 토돈)―용출처」라는 기록에 보이는, 정계비로부터 용출처까지의 ‘90여 리’에 꿰맞추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이화자, 2019, 157-159). 임진정계 경계표지물은 정계비로부터 송화강 방향을 따라가다가 다시 두만강 방향으로 설치되었는데, 두만강 방향으로 설치된 40여 리를 은폐하고, 경계표지물이 송화강 방향으로만 설치된 것으로 위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정계비 부근의 축축한 골짜기 한 마장에 목책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 것 역시 조작된 것이라 주장한다. 170년이 지난 시점까지 나무가 썩지 않고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화자, 2013, 259).

이러한 주장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5월 16일 기록의 ‘60여 리’는 토둔의 분포 길이가 아니며, 정계비로부터 당일 지숙처까지의 거리일 뿐이다. 16일 김우식은 정계비로부터 「돌무더기 3개―목말 한 마장―석축 10리 남짓―석둔 15리―토둔」을 거치면서 60여 리에서 지숙했다. 그리고 17일 그는 부석으로 덮인 건천 30여 리를 가서 물이 솟아나 하천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정계비로부터 ‘60여 리’와 ‘30여 리’를 갔으므로, ‘근 100여 리’를 간 것이다. 여기서 ‘60여 리’는 ‘정계비로부터 60여 리’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김우식은 이 부분에서 토둔의 분포 길이는 제시하지 않았는데, 아직 토둔의 끝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날이 저물어 일정을 멈추었기 때문이다.23) 17일 그는 토둔으로부터 건천으로 내려왔는데, 그 거리는 미미했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답사한 결과 토둔(토퇴)는 정계비로부터 지도상 거리로 약 23.1km 지점에서 끝나고 있었고, 마지막 토둔의 바로 옆이 건천 골짜기였다. 김우식이 말한 정계비로부터 60여 리에 부합한다. 김우식이 기록한 5월 17일의 ‘30여 리’는 토둔(토퇴)의 분포 길이도 아니고, 다른 어떤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도 아니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부석으로 덮인 건천 중 김우식이 걸어갔던 거리일 뿐이다. 따라서 김우식의 보고는 조작된 것이 아니다.

둘째, 김우식이 토둔의 분포 길이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토둔의 종점에서 매우 가까운 지점에서 지숙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토둔의 분포 길이는 정계비로부터의 거리 60여 리에서 ‘정계비로부터 석둔 끝까지의 거리’(30리 남짓)를 제한 값일 것이다. 따라서 대략 30리 정도가 김우식의 기록에서 추론되는 토둔의 분포 길이이다. 이는 토둔(토퇴)의 지도상의 분포 길이가 약 10.5km로 측정된다는 연구결과(이강원, 2016, 606)와 부합한다. 따라서 김우식의 보고는 조작된 것이 아니다.

셋째,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를 ‘90여 리’로 조작하려면, 김우식이나 어윤중이 두만강 방향의 경계표지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김우식과 어윤중은 두만강 방향의 토둔(토퇴)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 두만강 방향의 경계표지물의 존재는 1885년 10월 을유감계의 일환으로 백두산 조사에 나선 이중하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우식의 보고는 조작된 것이 아니다.

넷째, 정계비 부근 습한 곳에 나무기둥이 반 척 남짓 드러나 있었다고 김우식이 보고한 것은 1712년 임진정계시에 설치한 목책의 흔적이 분명하다. 필자는 해발고도 약 2,300m, 추운 기후, 연중 장기간의 지표 동결, 축축한 습지, 부석층 등을 고려하면, 1883년 당시까지 충분히 목책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지금도 이 구간을 발굴한다면 목책의 흔적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이강원, 2016, 587). 김우식의 보고는 조작된 것이 아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근거로 필자는 경계표지물의 분포에 대한 김우식의 보고가 조작된 것이 아니며,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필자는 경계표지물의 분포에 관한 김우식의 보고가 『숙종실록』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숙종실록』의 기록은 1712년 가을의 경계표지물 설치공사 내역에 관한 것이고, 1713년에 있었다고 기록한 보강공사에 대해서는 그 내역을 상술하지 않았다. 김우식은 17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실제조사와 충실한 기록을 통해 1713년에 있었던 경계표지물 보강공사의 내역 일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의 송화강 유입 여부

일부 연구자들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을 따라 90여 리를 내려간 지점에서 물이 나와 점차 냇물을 이룬다는 김우식의 보고 역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대표적으로, 이화자, 2013; 2019). 그들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중국명 흑석구라는 하천이 정계비로부터 60여 리, 곧 24km 정도에 있는 ‘황화송전자’에서 끝나며, 물길이 송화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김우식이 90여 리에서 물이 솟아난다고 보고한 것은 ‘흑석구’ 곧 ‘토문강’의 길이를 90여 리까지 늘여서, ‘토문강’이 결국은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 을유・정해감계에서의 이중하의 추론에 기대고 있다. 이중하는 을유감계(1885) 과정에서 두만강 방향의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흔적을 혼자서 발견하고는 송화강 방향의 토둔(토퇴)가 끝나는 지점으로부터 물길이 복류(伏流)하여 두만강 상류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 적이 있다. 그러한 수문상황이 있기에 1712년에 그곳에 경계표지물을 설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추정에 입각하여 그는 정해감계(1887)에서 계속 삼포(황화송구자: 흑석구)로부터 두만강 상류에 이르는 복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주장하였다.24) 이중하의 이러한 주장은 청측에 의해 거부되었고, 정해감계 지도(「백두산정계비지도」(奎 26675))에도 반영되지 않았다(이강원, 2016, 593-594). 토둔의 종점 부근으로부터 두만강 상류방향으로의 복류도 확인되지 않았고, 을유감계에서 이중하가 발견한 두만강 방향의 경계표지물도 다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답사과정에서 확인한 바로도 흑석구 토퇴(토둔) 종점 부근으로부터 두만강 상류에 이르는 복류는 존재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1908년 백두산을 답사한 유건봉(劉建封) 역시 자신이 ‘흑석구’라고 명명한 하천이 황화송전자에서 끝난다고 하였다. 2012년 이 지역을 답사한 이화자(2012) 역시 흑석구가 황화송전자 부근에서 사라지며, 송화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유건봉과 이화자는 움푹 파인 하도가 사라지기 때문에 하천이 끝났다고 보는 것 같다. 둘 다 필요 이상으로 주장이 완강하다.

그러나 1712년 임진정계시 조선측 선전관 이의복(李義復)의 기록, 접반사 박권의 「북정일기(北征日記)」 1712년 5월 19일자 기록 그리고 목극등의 답사경로는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이 송화강으로 유입되며, 그들 역시 그렇게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1883년 김우식, 1885년 을유감계와 1887년 정해감계에서 조청 양측이 합의해서 그린 지도들, 1907년의 오록정(吳祿貞)과 오소네 세이지(大曾根誠二), 일본에 의해 1916년 측량되고 1933년 발행된 「지형도(1/5만)」, 러시아에서 발간된 「북한 지형도(1/5만)」, 1990년대 초반 북한의 『백두총서』편찬자들 그리고 2015년의 필자(이강원, 2015)까지, 이 많은 사람들이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이 송화강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김우식의 보고는 조작된 것이 아니며, 지리학적 상식으로도 정확하다.

3) 분계강의 위치와 유로 문제

일부 연구자들은 김우식의 국경탐사가 이른바 ‘간도영유권’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주장한다(대표적으로, 양태진, 1981, 130). 그리고 일부 단체들은 ‘분계강(分界江)’이 ‘경계를 나누는 강’인데, 김우식에 의해 그것이 하반령(하얼바링)에서 나오는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로 밝혀졌으므로, 조선과 청의 국경을 그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미 ‘분계강’이 우리 한자음으로 풍가(豊家)・풍계(豊界)・풍계(豊溪)・분계(分界) 등으로 옮겨 쓸 수 있는 여진어로서, 어원상 국경과는 관계가 없으며, 본래 오늘날 해란강의 용정(龍井: 룽징) 구간을 지칭하는 지명이라는 점을 밝힌바 있다(이강원, 2007).

그러나 1883년의 시점에서 ‘분계강’은 ‘경계를 나누는 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김우식의 1883년 6월 국경탐사 목적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 즉 ‘토문강’(흑석구)의 유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1883년 당시까지 「압록강―정계비―토문강―송화강―흑룡강―(아무르강)―타타르 해협」을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상상하는 사람은 조선에도 청에도 없었다. 1882년 길림장군의 쇄환 요구, 1883년 4월 돈화현의 귀환 고시에 당면하여 조선변민들이 제시한 것이 「압록강―정계비―토문강―분계강―두만강―동해」라는 국경개념이었다. 정계비에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정계비로부터 동쪽으로 이어지는 하천은 ‘토문강(土門江)’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 ‘토문강’은 두만강에 이어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토문강’이 송화강―흑룡강이 되어 타타르 해협까지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25) 그들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토문강’이 중간에 ‘분계강’으로 흘러들 것으로 상상하였으며, 그 ‘분계강’으로 해란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26)

따라서 이들에게 ‘토문강’과 ‘분계강’은 분리될 수 없는 지리적 개념이었다. 1883년 6월 김우식의 제2차 국경탐사는 바로 ‘토문강’을 따라 내려가 ‘토문강’이 유입되는 ‘분계강’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하천은 없다. 이른바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의 한 지류였을 뿐이다. 「백두산―장산―북증산(증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동쪽에서 분계강의 후보가 될 만한, 남쪽의 올가강(홍기하)과 동쪽의 해난강(해란강)이 ‘토문강’과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북증산(증봉산) 산정에서 김우식은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멀리 북쪽 하반령(하얼바링)에서 나오는 ‘부얼하퉁수이(布爾哈通水)’를 ‘벌하통수’로 듣고, ‘벌판 아래로 통하는 강’(坪下通水)으로 새기면서, 옛날 사람들이 그것을 분계강으로 여긴 것 같다고 그는 추정했다. 옛 사람들이 ‘토문강’이 멀리 산줄기 밖으로 휘돌다가 땅 속으로 흘러서 포이합통하(부얼하퉁허)가 되어 다시 땅 위로 흐른다고 생각했다고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옛날 사람들의 생각이며, 자신이 살펴보니 ‘토문강’과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 사이가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를 ‘분계강’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맥이 이러함에도 오늘날 일부 연구자들과 단체는 김우식을 인용하며 포이합통하(부얼하퉁허)가 조・청의 국경이 되는 분계강(分界江)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우식은 평하통수(포이합통하: 부얼하퉁허)가 흘러서 온성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경원의 대안 협심자(夾心子: 자신쯔)에서 두만강에 합류한다고 확신했다. 오늘날의 포이합통하(부얼하퉁허)가 혼춘하(훈춘허)가 되어 두만강에 합류한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포이합통하(부얼하퉁허)―혼춘하(훈춘허)―두만강―동해」로 이어지는 하천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귀환 경로상 포이합통하 유로를 관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김우식의 이러한 오류는 1883년 당시 조선인들이 포이합통하의 유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두만강 대안에 대해 매우 제한적인 지리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에, 역으로 김우식의 탐계 활동이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김우식의 국경탐사 활동을 통하여 두만강뿐만 아니라 송화강 상류와 장산, 북증산(증봉산), 올가강(홍기하), 해난강(해란강), 하반령(합이파령) 등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인식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5. 결론

이상에서 1883년 음력 5월과 6월에 진행된 김우식의 국경탐사에 대해 그가 남긴 「탐계노정기」와 「탐계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보고는 한편으로는 이른바 ‘간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적 논거로 인용되어 왔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국경협상에서 유리한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두 가지 견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다음과 같은 점들이 확인되었다.

첫째, 백두산 임진정계(1712) 경계표지물의 분포에 대한 김우식의 보고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 이른바 ‘토문강’ 동남안에 설치된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를 김우식이 ‘90여 리’로 보고하였다고 보는 기존의 견해들은 오류이다. 김우식은 정계비로부터 토둔의 종점까지의 거리를 60여 리로 보았음이 분명하며, 이는 실제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우식이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를 조작하였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둘째, 백두산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이 송화강으로 유입된다는 김우식의 보고 역시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김우식이 경계표지물의 분포 길이를 ‘90여 리’로 조작하였다고 보는 연구자들은 그가 그렇게 조작한 이유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유입된다는 억지를 부리기 위한 술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은 정계비로부터 50∼60여 리 지점에서 끝나며, 송화강에 연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형에 대한 오해이며, 부분적으로 이중하의 추정에 기대고 있거나, 또는 유건봉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다.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하천은 송화강에 유입된다. 김우식의 보고는 정확한 것이었다.

셋째, 김우식은 ‘토문강’이 ‘분계강’과 연결되지 않으며, 따라서 두만강으로 유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김우식은 오늘날 포이합통하(부얼하퉁허)라고 불리는 하천을 ‘평하통수’라고 부르면서, 이를 예부터 ‘분계강’이라고 불려온 하천으로 추정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따라 내려간 ‘토문강’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결국 그의 보고는 더 자세한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지, 간도가 조선 영토라고 증명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하반령(하얼바링)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예부터 ‘분계강’이라 불린 하천이며, 혼춘하(훈춘허)로 이어져 협심자에서 두만강에 합류한다는 그의 보고는 답사결과가 아니라 추론이었으며, 실제로는 오류였다.

이러한 점들을 통하여, 김우식의 보고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며, 부분적인 오류가 있을지언정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렇다고 그의 보고가 이른바 ‘간도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1883년 김우식의 2차에 걸친 국경탐사 보고는 1712∼1713년 임진정계 경계표지물 설치 이후 170년 만에 이루어진 경계표지물에 대한 기록이며, 장산령 이서와 두만강 대안 지역의 산줄기와 물줄기에 대한 사실적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본래 의도는 국경탐사였지만, 의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두만강 대안에 대한 조선인의 지리적 인식 범위가 확대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1) 그의 생몰연대와 가계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2) 리성 번역 및 편찬, 2004, 백두산 고전 작품 선집, 사회과학출판사, 평양(통일부 북한자료실 소장, 청구기호 811.1 리53ㅂ), 213-231, 「백두산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 한문원문과 출처를 밝히고 있지 않으며, 감계수행일기 역시 부분 번역이지만, 이 번역이 가지는 자료발굴의 가치는 크다. 이 기록은 『대한북여요선』에 실린 김우식의 기록보다 늦은 시기에 기록된 것이며, 따라서 1883년의 국경탐사에 대해서는 『대한북여요선』의 기록이 더 정확하고 상세하다.

3) 『감계사등록(상)』 을유감계, 광서 11년(1885) 11월 8일자 조회, “중국 감계관 덕옥, 가원계와 조선 종사관 조창식, 수원(隨員) 이후섭, 김우식은 소백산 동남쪽을 조사했는데…”(이왕무 등 역, 2008, 204). 여기서 ‘수원’은 수행원을 의미한다.

4) 『대한북여요선』에서 언급되지 않은 일정은 리성(2004, 213-214)을 참조하여 추가했다.

5) 널리 인용되고 있는 양태진의 번역(1992, 147)을 참고는 하였지만,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으며, 번역에서 도출되는 결론도 전혀 다르다는 점을 밝혀둔다.

6) 金魯奎, 1904, 『大韓北輿要選』, 「探界公文攷」: 金禹軾探界路程記曰 十五 天明 雲暗雨霔 朝後 風作捲止 果若神助 康熙光緖之月日 又是符合 暫謄碑文 攀登上角 掛頷巖捫 越下視大澤 浩若大海 北邊有酒鐥樣濫退者 謂之天上水 水落空中百千丈而流 黑龍江之源也. 自澤中有聲若一 浮雲上升 散鎖峯巒 不分咫尺 回風轉石 暫時放鐵 忙忙回下 轉倒相扶 初更 到于昨宿處. 翌晩 勵精更上 自立碑處看審定界表 則碑東邊仍築三磊 濕處一馬連樹木枺 露半尺餘 浦壑始圻大開艮卯間 而木枺盡處 浦東邊種種築石者十餘里 其下往往屯石十五里 石盡往往土屯於樹木間 六十餘里而止. 十七日 從土屯處而下 則浦水隱漏爲泡石乾浦 三十餘里隱水更出 次次成川. 二十九日 禹軾還報經略使.

7) 음력의 양력 변환은 한국천문연구원(KASI) 천문우주지식정보 사이트(https://astro.kasi.re.kr/life/pageView/8)를 이용하였다.

8) 북한에서 번역된 「백두산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에는 6월 14일 “수봉 아래 관청 사냥막에 이르렀다”고 했다(리성, 2004, 214).

9) 널리 인용되고 있는 양태진의 번역(1992, 148-149)을 참고는 하였지만,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으며, 번역에서 도출되는 결론도 전혀 다르다는 점을 밝혀둔다.

10) 金魯奎, 1904, 『大韓北輿要選』, 「探界公文攷」: 金禹軾探界日記曰 十四日 到竪峯下 霖雨始作 至十八日天明止 而未快 朝後上立碑處 五人各以雨衫荷環抱碑 僅刊八張 全不成樣爲 風雨所驅而下. 翌日 氣勢如昨 又往 刊二十張 西踰大角峯 自石屯尾 從土屯 出土門 下來泡石浦 八十餘里止宿 以上乾川近百里 以下次次成川 長流而大. 卄一日 從派下往六十餘里 西渡土門江 止宿杉木浦. 卄二日 北向五里 東渡土門江 北踰長山端 挾嶺東 行八十餘里 止宿於石陵之三江合口 原流土門江 而二水源出北甑山 西流者黃水 北流者黃口嶺水 三江會此 北流入於黑龍江 沿無陸路 但由水待合氷 往來吉林云. 卄三日 自此東行八十里. 卄四日 東北間 行七十里. 卄五日 北行七十里 止宿北甑山西峽. 卄六日 北行四十餘里 上北甑山 周幾百餘里山 如人臍 東南出二大川 合正南流二百餘里 入於豆滿江 稱曰兀口江也. 西南出二大川 入於土門江 北出東流者害難江 西落大脉直翻西北 雖欲望遠 樹木深䆳 未可快見 卽回山下 止宿. 卄七日 東北間出百里長谷 南圻平野 此所謂靑山也. 卄八日 西登高山 對望下畔嶺 一大江水源出嶺底 淸人稱曰坪下通水 古傳分界江似是也. 自此江之源 距土門江界 隔嶺不通 而此江下合於夾心子 丁寧無疑 故更東向害難坪. 七月朔日 還告竣于經略使.

11) 유건봉은 『장백산강강지략』 본문에서 ‘사을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백두산 일대 지도에도 사을수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사을수로 추정되는 물줄기는 그려져 있다. 다만, 흑석구와 이 물줄기가 합류하여 사도백하를 이룬다고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 지도와 다른 점이다.

12) 이 하천은 을유감계에서 이깔이개(伊戛力蓋), 삼포(杉浦),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정해감계의 지도에는 ‘황화송구자’로 표시되었다. 오늘날 중국 지도들에서는 ‘黑石溝(흑석구: 헤이스거우)’로 표시되는데, 1908년 안도현 지현 유건봉이 『장백산강강지략』에서 명명한 것이다. 중국에서 오늘날 오도백하(五道白河: 우다오바이허)로 불리는 하천의 상류다. 오도백하는 ‘양양고하(娘娘庫河: 냥냥쿠허)’라고 불렸으며, 후에 ‘이도송화강(二道松花江: 얼다오쑹화장)’ 또는 ‘이도강(二道江: 얼다오장)’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87년부터 ‘오도백하’로 불린다. 북한에서는 중국에서 흑석구라고 부르는 하천의 북한 경내 구간을 ‘백두천’이라고 부른다. 『백두산총서: 기상수문』에서는 이 하천이 중국의 사도백하(四道白河: 쓰다오바이허)로 이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13) 安圖縣人民政府가 1987년 출간한 『安圖縣地名志』에서도 ‘石陵’이라는 지명은 찾을 수 없다.

14) 『감계사등록(상)』의 을유감계 ‘별단초’에서 이중하는 황수와 황구령수가 ‘출개타(秫稭垜: 수제둬)’에서 발원한다고 했다. 여기서 출개타는 그 위치상 북증산(증봉산)을 말하며, 중국어로 ‘수숫대 더미’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산의 모양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러나 『安圖縣地名志』는 ‘출개타산(秫稭垜山: 수제둬산)’이 증봉령(증봉산, 북증산)의 지맥으로 안도현 소사하향(小沙河鄕: 샤오사허향) 소사하촌 동쪽의 산(1,050m)으로 기록하고 있다.

15) 참고로, 1883년 당시까지는 장산령 이서 지역에 조선인들이 아직 정착하지 않았다. 현지주민은 한족과 만주족으로 이루어진 청나라 백성이었다.

16) ‘小土門’(만주어로, Ajige Tumen(아지거 투먼))으로도 불렸다. 이 하천이 두만강에 유입하는 것은 자신이 무산을 거쳐 백두산에 오를 때 이미 확인했을 것이다.

17) 『감계사등록(상)』에서는 한자가 약간 다른 ‘下盤嶺(하반령)’으로 표기되었다.

18) 『감계사등록(상)』에는 박이합통(博爾哈通: 보얼하퉁)으로 표기되었다.

19) 만주 현지어를 한자로 표시한 것이다. ‘博爾哈通水’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20) ‘토문강이 땅 밑을 통과하여 분계강에 이어진다’는 생각이 잘 나타난 대표적인 지도로 「양계지도(兩界地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양보경 등, 2016, 54)를 들 수 있다.

21) 만주어 ‘우라(Ula)’는 강이라는 뜻이므로, ‘푸투 강’이다.

22) “분계강의 수원은 하반령에서 나와 소지명(小地名)이 토문자수(土門子水)인 곳에서 합류하여 200여 리에 있는 협심자(夾心子)에 이르러 온성(穩城)의 어이후수(於伊後水)로 흘러가니, 물이 모이는 곳은 확실히 원래 정한 경계인 토문강의 하류가 아니다.”

23) 이날 그는 수봉(무두봉) 엽막에서 출발하여 80여 리를 갔다.

24) 『감계사등록(하)』의 1887년 윤4월 16일 신무충(신무성) 담판에 관한 이중하의 기록, 윤4월 19일 신무충에서 청국관원의 조회, 같은 날 청국관원의 조복, 윤4월 25일 이중하의 조회, 5월 11일 이중하의 기록, 5월 13일 청국관원의 답장, 1월 13일 청국관원에 대한 답장 등에 삼포(황화송구자: 흑석구)와 두만강 상류 사이의 ‘복류’ 등 수문상황 조사를 둘러싼 양측의 신경전이 서술되어 있다.

25) ‘토문강’이 송화강-흑룡강이 되어 바다에 이른다는 인식은 『대한북여요선』에 실려 있는 광무 2년(1898)의 「사계공문고(査界公文攷)」에서야 볼 수 있다.

26) 당시까지 조선인들의 월경 개간은 아직 해란강 평원에 이르지 않았다.

Acknowledgements

이 연구는 서울대학교 신임교수 연구정착금으로 지원되는 연구비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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