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1 December 2021. 639-655
https://doi.org/10.22776/kgs.2021.56.6.639

ABSTRACT


MAIN

  • 1. 서론

  • 2. 중랑, 중량 등 각 명칭의 등장과 공존

  •   1) 각 명칭의 등장

  •   2) 명칭 공존 과정의 재구성

  • 3. 지명 사용의 지리적 맥락

  •   1) 지칭의 지리적 영역과 대상

  •   2) 다른 명칭과의 관계

  •   3) 중량포-중랑포의 위치와 지리적 위상

  •   4) 행정 단위의 형성과 지명 표준화

  • 4. 결론

1. 서론

서울 동북부의 주요 지명 중 하나인 ‘중랑’은 현재 자연 지형(천), 인공 구조물(교), 행정구역(구), 교통 시설(역) 등 다양한 지형지물의 고유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공공시설, 민간 업체의 상호까지 합치면 그 지명 사용의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중랑천(中浪川)’은 1961년 정부에 의해 표준지명으로 지정된다.1) 그러나 ‘중랑’은 1980년대까지 ‘중량’과 공존하며 사용되었다. 인구 급성장 시기에 만원 버스 ‘차장’의 소리 “청량리 중량교 가요”로 대변되는 향수가 그 지명에 묻어있다. ‘중량’ 지명의 관성이 약화된 데에는 1988년 동대문구에서 분리된 행정구역에 ‘중랑구’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정된다.2) 몇 년 앞서 정부 기관인 국립지리원(현 국토지리정보원)은 그 지형도에서 중랑천을 통일된 명칭으로 채택하였다.3)

하나의 지형물이나 장소에 대하여 일련의 명칭이 순차적으로 사용되고 때로는 공존하다가 어느 하나의 지명이 우세해지는 과정을 밝히는 것은 지명 연구자들의 공통된 관심사이다(김순배, 2011; 이강원, 2010; 주성재・진수인, 2020; 최원석, 2016). 차별화된 인간의 장소 인식, 지칭 대상의 영역, 언어적 요소, 권력과 정치성의 개입 등이 그 변화와 공존을 보는 시각이다. 중량과 중랑에 대한 관심도 여기에서 시작하였다. ‘중랑’이 일제 통치의 흔적이라는 근거 미상의 설명4)은 이 호기심을 더욱 부추겼다.

중량과 중랑에 대한 연구는 각 명칭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변화와 공존이 문서와 지도에 어떤 흔적으로 나타나는지 추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에는 각 명칭 사용의 배경과 맥락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명은 특정한 성격과 본질을 갖는 지칭 대상에 대한 사용자의 인식이 반영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확대된 조사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첫째, 지명이 지칭하는 속성 요소의 종류와 범위, 그리고 지칭 대상의 진화와 확대이다. 중량과 중랑은 물길과 포구를 동시에 나타내는 포(浦)의 명칭으로 탄생하였다. 그 탄생의 배경과 이후 지칭 대상의 확대와 발전을 관찰하는 것은 지명 사용자가 인식하는 장소의 범위와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아울러 선형 지형물인 하천의 각 부분에 대하여 달리 존재했던 별칭과의 관계를 밝히는 도구가 된다. 현재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와 서울 동부를 거쳐 한강으로 합류되는, 본류의 길이만 59 ㎞에 달하는 긴 하천이다.5)

둘째, 왕조의 통치와 관련된 지명 사용의 위상이다. 중랑천은 한강과 함께 한양 외곽의 중요한 지형물이었고 도성에서 동북쪽으로 가기 위하여 반드시 건너야 하는 하천이었다. 왕조의 시조인 태조가 묻힌 건원릉과 이후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조성된 왕릉(현재의 동구릉)으로의 능행(陵行)은 다리를 포함한 교통축과 함께 왕의 행차와 관련된 시설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장소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지명이 그 장소의 위상과 더불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셋째, 한번 채택된 지명이 다른 속성 요소로 파생되어가는 현상이 중량과 중랑 명칭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포와 천을 거쳐 거주지의 명칭으로 정착되는 과정은 또 다른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는 일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행정관리를 위한 명칭의 사용은 지명 표준화에 준하는 효력을 발휘했을 수도 있다.6)

이 연구에서는 중량과 중랑 명칭의 유래와 변천을 추적하고, 지명이 어떻게 변화하고 때로는 공존했는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지명이 지칭하는 영역, 정치적, 사회적 맥락, 행정구역의 재편과 표준화의 영향 등이 주요 관심 사항이다. 이러한 사례조사는 지명의 변화와 공존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의 틀을 세워가는 데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왕조의 수도에서 동북부로 나가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통치에서 차지했던 이 지명 지칭 대상의 우세한 위상은 다양한 문서와 도면에 기록을 남김으로써 비교적 풍성한 연구자료를 제공한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을 비롯한 각종 문서와 지리지, 읍지, 그리고 지도 등이다.7) 자료 조사는 왕조의 기록이 끝나는 시점까지로 국한하였다.

2. 중랑, 중량 등 각 명칭의 등장과 공존

1) 각 명칭의 등장

한양 동쪽의 중요한 자연 지형이면서 능행을 위하여 왕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대상물로서 하천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최초로 발견되는 기록은 1409년 「태종실록」에 나오는 송계원서천(松溪院西川)이다. 태종이 아버지 태조가 묻힌 건원릉에서 제사를 지내려 했으나 송계원서천의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어 그대로 돌아왔다는 내용이다.8) 기록된 날짜로 볼 때 당시 장마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계원은 강원도 지역으로 떠나는 관리들이 머물렀던, 하천 동편에 위치한 여관이었다.

(1) 중량(中良)과 충량(忠良)

고유 명칭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1417년 태종이 상왕인 정종과 함께 매사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머물렀던 주정(晝停) 장소로 언급된 중량포(中良浦)이다.9)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중종 대(1537)까지 20회에 걸쳐 왕의 참배, 사냥, 농사 참관 등 행차에 사용된 주정소로서 이 명칭을 기록한다.

이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이 명칭은 현종 대 권씨가(家)의 재산분배 문서인 「권위등화회문기(權偉等和會文記)」(1664)10)와 숙종 대 문신 박세채의 시문집 「남계집(南溪集)』(1732년 간행 추정)에 다시 등장한다. 아울러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일성록(日省錄)」은 영조 대(1758)부터 철종 대(1853)까지 중량포의 기록을 8회에 걸쳐 전한다.11) 순조 대에 왕의 능행을 기록한 「결속색등록(結束色謄錄)」 40책(1827)에는 중량포 네 차례와 더불어 중량포촌(中良浦村)이 두 번 등장한다.

중량포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서 조선 초기에 사용된 명칭은 충량포(忠良浦)이다. 1420년 세종이 상왕을 영접한 곳으로 언급12)된 이래, 세조의 행차와 온정(溫井) 발굴 관련 기사까지 조선왕조실록에 10회 등장한다. 기사에 언급된 동선을 추적하면 중량포와 같은 지형물을 일컫는 것이 분명하다. 인근에 따뜻한 물이 솟는 우물의 조짐이 있었고 왕이 이에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도 조선 전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연의 「경재집(敬齋集)」에 수록된 시문에도 충량포가 배경으로 언급된다.13)

(2) 중량(中梁)

이후 같은 음이지만 다른 뜻을 가진 중량(中梁)이 나타난다. 현재까지 발견되는 첫 기록은 성종 18년(1487)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다.14) 한성부 산천의 독립 항목으로 설정한 중량포(中梁浦)에서 “도성 동쪽 15리에 있어 물길이 양주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고 기록하였다.15) 이 서술은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증보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반복된다.

120여 년의 공백 이후 나타난 명칭은 흥미롭게도 중량천(中梁川)이었다. 1656년 실학자 유형원의 사찬(私撰) 지리지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는 한성부의 개천과 중량천 항목에서 각 1회, 양주목 중량천 항목에서 1회, 물길을 가로지르는 다리 속계교(涑溪橋)와 통원교(通遠橋)에서 각 1회, 총 5회에 결쳐 중량천을 다루었다.16) 이전에 사용된 속성 요소 ‘포(浦)’가 포구라는 점적 지형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위상에서 벗어나, 전 하천 구간을 지칭하는 명확한 지위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고 판단된다. 그가 가졌던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지지 편찬의 지향성(박인호, 1989; 양보경, 1992)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후 중량천보다 더 많이 나타나는 명칭은 중량포이다.17) 이 명칭은 영조 즉위년인 1724년, 선대왕 경종의 산릉(山陵) 다섯 후보지에서 최종 선택되는 장소로 「영조실록」에 언급된 이래,18) 고종 대까지 「승정원일기」에 31회, 「일성록」에 12회 기록된다. 정조 이후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철종과 고종 대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도 이 명칭을 사용한다.

중량은 다른 종류의 명칭에서도 발견된다. 행정구역으로서 중량포계(中梁浦契)가 1751년 영조 대의 도성 관리 기록에, 중량동계(中梁洞契)가 19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에 나타나며, 교량 명칭으로서 중량포교(中梁浦橋)가 19세기 중반 채색필사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목록첩의 한성부 지도에,19) 중량교(中梁橋)가 1904년 고종 대의 「승정원일기」에 등장한다.

(3) 중랑(中浪)

중랑(中浪)은 광해군 2년인 1610년, 박명부(朴明榑)가 공조 좌랑 재직시 작성된 호패청 문서에 기재된 중랑포리(中浪浦里)로 등장한다(김소은, 1999, 89, 108). 호패 제작과 관련된 사항을 수록한 이 문서는 동대문 바깥에 있는 행정구역 중 하나로 이 이름을 적고 있어 일찍이 중랑포라는 이름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20) 이후 중랑포는 효종 4년(1653) 훈련도감의 업무를 기록한 「훈국등록(訓局謄錄)」의 병력 배치 목록, 숙종 4년(1678)에 작성된 「목장지도(牧場地圖)」의 살곶이 목장 부분 지도에 표기되어 나타난다.

이 명칭이 다시 출현한 것은 영조 즉위년(1724), 앞서 서술한 경종의 산릉 관련 기사이다. 흥미롭게도 중량포(中梁浦)라 기록한 실록에 이틀 앞서 「승정원일기」에 3회에 걸쳐 중랑포가 사용되었으며, 실록과 같은 날 「승정원일기」는 두 이름을 한 번씩 기록하고 있어 명백한 혼용의 형태를 보여준다.21)

중랑포는 고종 대까지 실록에 1회, 「승정원일기」에 35회, 「일성록」에 10회 사용됨으로써 중량포와 비슷한 빈도를 보이나, 영조 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각종 문헌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발견된다. 이 시기에 왕의 행차를 기록한 「결속색등록」, 「시종원등록(侍從院謄錄)」, 「경빈예장소등록(慶嬪禮葬所謄錄)」, 각종 도감의궤(都監儀軌) 등은 대부분 중랑포를 사용한다. 양주 지역을 서술한 19세기의 읍지도 공통적으로 중랑포를 기재한다. 「읍지(邑誌)」(1832), 「경기지(京畿誌)」(1840), 「경기읍지(京畿邑誌)」(1871), 「양주읍지(楊州邑誌)」(1899) 등이 그것이다.

중랑 명칭의 사용이 확대된 것은 영조 대 중반 이후 행정구역 이름으로의 정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 초기에 사용된 중량포계(中梁浦契)는 중랑포계(中浪浦契)로 대체되기 시작하며,22) 이 명칭은 정조 12년(1788)에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한 계의 하나로 실록에 기록되는 위상을 부여받는다.23) 중랑포계는 이후 중랑포상리계, 중랑상리, 중랑하리, 중랑포하계, 중랑포하리, 중랑상리계, 중랑하리계 등으로 변형되어 사용된다. 한편, 「결속색등록」은 순조에서 헌종 대에 중랑포촌(中浪浦村)을 8회에 걸쳐 표기하는데, 앞서 정리한 대로 이 책은 중량포촌(中良浦村)도 사용하고 있어 이 두 명칭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24)

드물게 중랑천(中浪川)은 순조 23년(1823) 「일성록」의 기록에 한번 나타난다. 이것은 한 해 전에 있었던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 조성 과정에 대한 기록을 반복한 것이다. 같은 책에 중랑포도 2회 등장하는데,25) 이는 두 지명이 다른 지형물을 지칭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종 대에는 1890년부터 1903년까지 왕의 행차 기록과 의궤26)에 중랑포대천(中浪浦大川)을 8회 사용한 것이 발견된다.27) 교량의 이름도 등장하는데, 중랑포교(中浪浦橋)는 「탁지부청의서(度支部請議書)」(1896)와 「각부청의서존안(各部請議書存案)」(1898)에,28) 중랑교(中浪橋)는 「탁지부청의서」(1896)와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孝定王后國葬都監儀軌)」(1903)에 그 기록을 남긴다.

이상 명칭의 등장과 사용 기록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중량(中良), 충량(忠良), 중량(中梁), 중랑(中浪)의 등장과 사용

종류 지명 최초 등장 이후 기록/비고
연도 문헌
中良 中良浦 1417 조선왕조실록(태종) ∙ 태종(1417)~중종(1537), (실) 20회
∙ 박세채의 남계집(1732 간행 추정)
∙ 영조(1758)~헌종(1847), (승) 5회
∙ 순조(1827)~철종(1853), (일) 3회
∙ 순조(1827), (결) 4회
中良浦村 1827 결속색등록 ∙ 2회 기록
忠良 忠良浦 1420 조선왕조실록(세종) ∙ 세종(1420)~세조(1466), (실) 10회
中梁 中梁浦 1487 동국여지승람(초간본) ∙ 중종(1530), 신증동국여지승람
∙ 영조(1724), (실) 1회
∙ 영조(1724)~고종(1904), (승) 31회
∙ 정조(1786)~고종(1904), (일) 12회
∙ 동국여지비고(정조), 대동지지(1860~1866) 등
中梁川 1656 동국여지지 ∙ 5회 기록
∙ 소재집(1759), 연경재전집(미상)
中梁浦契 1751 어제수성윤음 ∙ 순조(1808), 만기요람
中梁洞契 19세기 동국여지비고
中梁浦橋 19세기 대동여지도 ∙ 고종(1903), (승) 1회
中梁橋 1904 승정원일기(고종)
中浪 中浪浦里 1610 박명부 호구자료(광해군)
中浪浦 1653 훈국등록(효종) ∙ 숙종(1678), 목장지도
∙ 영조(1724)~고종(1884), (실) 2회
∙ 영조(1724)~고종(1907), (승) 35회
∙ 정조(1783)~고종(1904), (일) 10회
∙ 순조(1806)~고종(1904), (결) 10회, 왕의 행차 기록 다수
∙ 읍지(1832), 경기지(1840), 경기읍지(1871), 양주읍지(1899)
中浪浦契 1763 승정원일기(영조) ∙ 정조(1788), (실) 1회
∙ 영조(1763)~순조(1810) (승) 5회
∙ 정조(1788~1795), (일) 2회
∙ 내각일력(1783), 호구총수(1789)
中浪浦上里契 1800 승정원일기(정조) ∙ 이밖에 중랑포상리(헌종), 중랑상리와 중랑하리(순조, 헌종, 철종), 중랑포하계
와 중랑포하리(순조), 중랑상리계와 중랑하리계(고종)가 승정원일기에 기록됨
中浪浦村 1823 결속색등록 ∙ 순조(1823)~헌종(1840), (결) 8회
中浪川 1822 현목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 순조(1823), (일) 1회
中浪浦大川 1890 결속색등록 ∙ 고종(1890~1903), 시종원등록, 신정왕후국장도감의궤,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
등 7회
中浪浦橋 1896 탁지부청의서 ∙ 각부청의서존안(1898)
中浪橋 1896 탁지부청의서 ∙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1903)

주: (실) 조선왕조실록, (승) 「승정원일기」, (일) 「일성록」, (결) 결속색등록

중량포 또는 중랑포와 동일한 지형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명칭은 이 밖에도 여러 개 있다. 중녕포(中寧浦), 중령포(中令浦, 中泠浦, 中嶺浦), 중랑포(中郞浦), 그리고 죽(竹)을 사용한 죽령포(竹令浦, 竹泠浦, 竹嶺浦) 등이다.29) 이들 지명의 출현 빈도는 중량(中良, 中梁)이나 중랑(中浪)에 비하여 확연히 낮다. 그러나 영조 36년(1760)에 편찬된 「망우동지(忘憂洞誌)」에 중령포(中泠浦)와 죽포(竹浦)가 언급되어 있어 이들이 지역민들에 의해 사용된 명칭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이칭에 나타난 지명어의 음운 변화와 한자의 치환이 갖는 경로와 특성을 밝히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를 이룬다. ‘량(良)’을 구성 한자로 갖는 중량(中良)-중랑(中浪)-중랑(中郞), ‘령(令)’을 구성 한자로 갖는 중령(中令)-중령(中泠)-중령(中嶺)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분석은 추후 과제로 남긴다.

2) 명칭 공존 과정의 재구성

각 명칭의 등장과 사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등장한 명칭은 중량포(中良浦)이며 16세기 중종 대까지 실록에서 우세한 위상으로 나타난다. 초기 일부 시기에 충량포(忠良浦)가 함께 사용되었다. 중량포(中梁浦)는 15세기 후반 성종 대에 처음 나타나서 19세기 초까지 편찬된 지리지에 우세하게 채택되고, 중량은 천, 포계, 동계, 포교, 교 등의 속성으로 변형 또는 확대되어 사용된다. 중랑(中浪)은 17세기 초에 포리(浦里)라는 속성으로 처음 나타나지만, 이것은 이전에 존재했던 중랑포의 파생지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중랑포는 영조 초기에 중량포와 혼용되다가 이후 우위를 차지하며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다양한 유형으로 확산한다.

이러한 명칭 사용의 흐름은 앞서 나타난 명칭을 새롭게 나타난 것이 완전히 대체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지명이 사용되더라도 앞선 지명은 사용의 빈도가 줄지언정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등장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명의 생존력과 단순하지 않은 지명 사용의 단면을 보여준다(주성재, 2018). 지명의 공존을 염두에 두고 현재까지 조사된 자료로부터 속성 요소 포(浦)를 중심으로 중량-중랑 명칭의 사용을 시간대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태종~세종: 중량포(中良浦) 사용.

∙세종~성종: 중량포(中良浦)와 충량포(忠良浦)가 공존(중량포 우세).

∙성종~중종: 중량포(中良浦)와 중량포(中梁浦)가 공존.

∙중종~영조: 중량포(中梁浦) 사용, 중랑포(中浪浦)가 등장하여 공존.

∙영조~고종: 중량포(中梁浦)와 중랑포(中浪浦)가 공존(점차 중랑포 우세). 중량포(中良浦)가 간헐적으로 등장중량포계(中梁浦契)와 중랑포계(中浪浦契)가 공존(점차 중랑포계 우세).

∙성종~고종: 중녕포(中寧浦), 중령포(中令浦, 中泠浦, 中嶺浦), 죽령포(竹令浦, 竹泠浦, 竹嶺浦)가 간헐적으로 등장.

그러면 하나의 지형물에 대한 이러한 여러 명칭의 출현과 공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가장 쉬운 설명은 같거나 비슷한 음(자음동화로 인한 음의 변형 포함)을 가진 한자어 또는 형태가 변형된 한자어가 혼용되는 한국어 지명의 특성(김병순, 1998; 손희하, 2012; 최원석, 2016)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중(中)과 충(忠), 량(良)과 량(梁), 량(良)과 랑(浪)의 변화와 공존을 지명의 지칭 또는 표기에서 나타난 우연한 과정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문서, 심지어 동일한 날짜에 두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각 기록자의 머릿속에 달리 존재했던 한자어가 나타난 것으로서 이러한 해석의 뒷받침이 된다.

이러한 혼용 사례는 중랑포 인근의 왕십리와 청량리의 한자 표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30) 비슷한 음가나 구성한자를 가진 대체 지명이 혼용되는 것이 지명의 한자표기가 갖는 특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중량, 중랑, 중령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언어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여전히 첫 지명(여기서는 中良)의 사용 경위를 밝히지 못한다.

또 하나의 조심스러운 설명은 각 지명의 유래와 연결하는 것이다. 첫 지명 중량(中良)은 정몽주의 문인이었다가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받은 변중량(卞仲良)이 1차 왕자의 난 때 세자 방석의 편에 섰다가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동생인 변계량이 그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변희룡, 2007).31) 이와 연계하면 중량포(中梁浦)는 변계량의 영향력이 소멸되면서32) 중량포(中良浦)를 대체하는, 이 지역의 풍요로움을 서술하는 이름으로 채택되었을 수 있다.33) 중랑(中浪)에 대해서는 하천을 지나는 송계교 개축에 동원된 중이(仲伊)라는 이름의 맹인 대신 부역에 참여했던 딸의 남장이 밝혀지고 어렵게 작업한 사정이 전해지면서 그 효행을 기념하는 이름으로 붙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서울특별시 중랑구, 1995;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중랑문화원 홈페이지).34) 그러나 중이 설은 중랑보다 이르게 나타나는 중량의 등장과 중량-중랑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스토리텔링의 요소가 강하게 포함된 지명 유래에서 지명어의 채택과 변화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진 유래는 이를 주장하는 사람의 의도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고유 지명어에 대응하여 음 또는 훈으로 한자 지명어를 차용하는 관례가 상존하는 상황에서(박병철, 2003), 한자어의 의미를 중심으로 한 해석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설명 역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지명의 등장과 공존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지명 표준화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로 존재했는가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권위를 갖춘 기관이 특정 지리적 실체에 적용하기 위한 이름 사용의 조건과 정확한 표기 형태를 규정하는(국토지리정보원, 2020, 61)” 현대적 의미의 지명 표준화 절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준하는 두 가지 과정이 관찰되는데, 그 하나는 관찬 지리지의 편찬이고 다른 하나는 행정구역의 지정이다.

「동국여지승람」이 중량포(中梁浦)를 사용한 이래, ‘중량(中梁)’은 각종 지리지에서 일관되게 사용되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中梁浦), 「동국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770, 中梁川), 「동국여지비고」(19세기, 中梁浦), 「증보문헌비고」(1903~1908, 中梁川), 그리고 사찬 지리지인 「동국여지지」(1656, 中梁川) 등이다. 이것은 이전에 편찬된 지리지에서 다루어진 명칭을 사용하려는 노력의 결과라 해석할 수 있다.

행정구역 명칭의 지정은 보다 확실한 문서적 절차를 제공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행정관리를 위한 지칭과 표기에 다양하게 인용됨으로써 표준화된 명칭의 확산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조 12년 중랑포계(中浪浦契)의 지정은 이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주민의 지명 사용 영역은 이보다 훨씬 넓어 다양한 지명이 공존하였고, 심지어는 한동안 사용되지 않던 지명이 다시 나타나는 일도 있었다. 일반 언중의 지명 사용은 중량-중랑 지명 사용에 있어서도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한 중요한 영역이다.

3. 지명 사용의 지리적 맥락

이 장에서는 중량-중랑 지명 사용이 갖는 지리적 맥락을 정리하고자 한다. 지칭의 지리적 영역과 대상, 다른 명칭과의 관계, 왕조의 통치와 관련된 지칭 대상의 지리적 위상, 그리고 행정구역의 설치와 지명 표준화의 기능 등이다. 이들 이슈를 정리하는 것은 각 지명의 등장과 사용 역사를 보다 완성된 형태로 이해하는 데에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1) 지칭의 지리적 영역과 대상

중량포(中良浦, 中梁浦) 또는 중랑포(中浪浦)가 지칭한 대상을 오늘날 중랑천의 지리적 영역과 동일하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선 들 수 있는 근거는 속성 요소로서 포(浦)의 사용 관례이다. 조선시대 지리지나 고지도에서 내륙에 있는 수로지명(hydronym)은 강(江), 천(川), 도(渡), 진(津), 포(浦), 탄(灘), 연(淵), 담(潭), 호(湖)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김종혁, 2004; 김순배, 2011; 임종옥, 2011). 이중 강과 천은 하천을 규모에 따라 차별화하여 부르는 요소로서, 탄은 수심이 얕고 유속이 빠른 여울이나 여울목을 일컫는 요소로서 선형 지형물을 나타내는 유형으로 보아 마땅하다.35) 연, 담, 호는 물이 고여 있는 호수 또는 저수지를 나타낸다.

포의 용례에 대하여 김종혁(2004, 47-49)은 주로 해안이나 하천 하구의 인근에 분포하며 내륙에는 진이나 도에 비하면 훨씬 적지만 사용된 바가 있다고 밝힌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진이었고, 행정적, 군사적 업무를 수행하는 관리가 파견되는 곳을 도로 구별하였다는 것이다. 포는 진이나 도와 마찬가지로 나루를 비롯한 포구 시설과 때로는 거주지까지 포함하는 용어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지명 부여의 흐름을 보면 인근 부락의 이름이 하천의 고유 지명과 겸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나기(김순배, 2009, 22) 때문이다. 실제로 「선의왕후국휼등록(宣懿王后國恤謄錄)」의 영조 7년(1731) 기사에서 의릉 밑의 중랑포, 청량, 장위 세 마을의 능역(陵役)에 대해 논하고 있어 중랑포가 부락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36)

사료에 나타난 여러 기사의 내용들은 일정 영역을 가진 점적인 장소로서 중량포 또는 중랑포의 사용을 지지한다. 왕이 행차 중에 머물렀던 장소, 재산목록에 등재된 토지가 있는 곳, 따뜻한 우물이 발견된 곳, 개천의 물길이 들어가는 곳, 산릉 후보지의 장소 등, 모두 물이 있지만 물길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물길이 양주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는 「동국여지승람」의 중량포(中梁浦) 항목 설명은 물길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보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따라서 ‘포(浦)’라는 속성 요소에는 포구, 마을, 물길의 의미가 모두 존재하며, 이중 어느 하나의 의미도 배제할 수 없다. 포구의 시설과 부락은 물을 끼고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일정 영역이 그 영향권 하에 있다는 사실도 이 판단을 지원한다.

2) 다른 명칭과의 관계

포에 담긴 물길의 영역은 길게 흐르는 물길 각 부분에 대한 차별화된 인식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명칭과 대조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37)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송계(松溪)다. 세종 3년(1421)에 임금이 선대왕 태종이 머물고 있던 풍양궁에 문안하러 가는 길에 송계를 배로 건넜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다.38) 어느 부분의 물길을 지칭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으나, 풍양궁의 위치(현재 남양주시 진접읍)를 감안할 때 하천의 북부라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속계(涑溪)는 유형원의 「동국여지지」에 중량천(中梁川)의 별칭으로 언급된다. 그의 저서에서 드러난 중량천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중랑천과 유사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한성부 산천에 중량천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又名涑溪。在都城東十三里。水自楊州, 經箭串郊, 南流至豆毛浦, 入於漢江。

(다른 이름은 속계다. 도성 동쪽 13리에 있다. 물이 양주에서 시작하여 살곶이 들녘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서 두모포에 이르러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그는 「동국여지지」의 「수정동국여지지범례(修正東國輿地志凡例)」에서 종래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하나의 물길이 지역마다 다른 여러 속칭으로 수록되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비추어보면, 그가 속계를 중량천의 한 이칭으로 보고자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인식한 속계의 영역은 하천의 북부, 즉 상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속계는 속계교와 연관해서 봐야 하는데, 속계교는 주 동쪽 30리에 있다고 서술하여 중량천보다 멀리 있다고 적시한 것이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39) 1860년대 김정호에 의해 그려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도 속계는 물줄기의 북쪽 끝에 표기되어 있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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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의 동쪽 부분(1860년대) (中梁浦, 涑溪, 石橋)

이후 문헌에 등장하는 송계천(松溪川) 역시 중랑천의 상류임을 명시한다. 1860년대 저술된 김정호의 「대동지지」는 속계라고도 하는 송계천이 속계교를 지난 후 중량포(中梁浦)가 되고 한강으로 들어간다고 서술한다.40) 이보다 먼저 편찬된 「읍지」와 「경기지」, 후에 발간된 「경기읍지」, 「양주읍지」도 공통적으로 중랑포(中浪浦)가 송계천에서부터 하류로 흘러 살곶이다리로 들어간다고 기록한다41).

이러한 사료들의 설명은 당대인들이 송계교(속계교)를 기준으로 송계천과 중량포를 나누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승정원일기」의 1877년 기사에 고종이 “석교(송계교 또는 속계교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42)와 살곶이다리 사이가 중령포인가” 묻는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받은 것은 이 추정의 타당성을 입증한다.43) 종합해보면 속계교를 기점으로 송계천과 중량포가 구분되고 있으므로 속계 또는 송계천은 속계교 북쪽의 구간을, 중량포는 송계교에서 살곶이다리에 이르는 구간을 일컫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송계 명칭의 파생 과정에 대해서는, 상류를 부르는 송계라는 이름이 있었고 이로부터 숙박시설에 송계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 송계천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고 하는 것이 현재로서 가능한 추정이다.

경기읍지 양주목의 지도(1871), 지방지도(1872), 양주군읍지 삽입 지도(1895)가 일관되게 물길의 남쪽에 표기한 청량천(淸凉川)은 이것이 중랑천 하류를 부르는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낳게 한다(그림 2). 이에 대해서는 1779년 「일성록」의 언급이 반론의 근거를 제공한다. 여기서는 청량천이 제터고개(현재의 제기동) 아래를 지난다고 기록하고 있어44) 상당한 위치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도에 표시된 청량천의 위치가 중랑천 하류임이 명백하고 청계천이나 다른 실개천을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볼 때, 위의 추측에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것은 「일성록」에 기록된 청량천의 흔적을 면밀하게 추적함으로써 추후 밝혀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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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지방지도(1872) (淸凉川)

한천(漢川)은 1750년대 제작된 「광여도(廣輿圖)」와 「해동지도(海東地圖)」에서 중랑천 상류에 표기되어 있다(그림 3). 「해동지도」에는 상류를 더 거슬러 올라간 부분에 두험천(豆驗川)도 표기한 것이 보인다. 고지도에서 드물게 나타난 한천은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형도(1915)에서 다시 등장한다. 「광여도」와 「해동지도」에서 상류에 표기된 것과 대조적으로 여기에는 중랑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서 하류 부분에 표기되어 있다.45) 한천의 지칭 영역과 위상 변화에 대해서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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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해동지도(18세기) (中浪浦, 漢川, 松溪橋)

두험천은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1849)에서 지류로 보이는 독두천과 함께 상류에 표시하였다(그림 4). 「동국문헌비고」 권13 여지고(輿地考)는 독두천이 중량천의 상류이며, 두험천은 불곡산을 원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독두천으로 들어가며, 중량천은 독두천의 하류라고 설명한다.46) 또한 김정호의 「여도비지(輿圖備志)」에서는 독두천(獨豆川)이 두험천과 만나 남으로 흘러 송계천이 된다고 서술하면서, 송계천이 중량천의 상류라고 언급한다.47) 이러한 관계는 「대동지지」와 「동국여지비고」 등에서도 확인된다. 이들 기록을 종합하면, 두험천과 독두천이 모인 물이 양주의 어느 시점에서 송계천이 되고, 이것이 속계교를 지나면서 중량포, 중량천이 되는 것으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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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대동방여전도(1849) (中梁浦, 涑溪, 豆驗川, 獨豆川)

이상 중량포-중랑포의 지리적 영역과 다른 명칭과의 관계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중량포-중랑포는 포구를 중심으로 하천의 일부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지만 때로는 전체 물길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를 명확히 하는 ‘중량천’이 한때 사용되었으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대신에 상류를 일컫는 명칭으로 송계와 속계, 그리고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 송계천이, 더 상류에 한천과 두험천이 사용되었다. 하류 명칭으로 청량천이 발견되지만, 중랑천의 일부를 일컫는 것이었는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3) 중량포-중랑포의 위치와 지리적 위상

점 사상인 포구로서 중량포-중랑포의 위치를 추측하게 해주는 단서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조선 초기 왕의 선대왕 참배 후 돌아오는 길에 언급되는 주정소로서 중량포(中良浦)이다. 당시 왕릉은 현재 동구릉에 모여 있었으므로 이곳이 그 능행길에서 하천을 건넌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송계원에서 매사냥을 보고 환궁길에 중량포에 이르렀다는 기록48)에서 송계원이 있던 하천 상류, 즉 묵동천과 우이천이 합류하는 현재의 월릉교 부근임을 알 수 있다.

영조 즉위년(1724)에 선대왕 경종의 산릉 위치로 기록된 중량포(中梁浦) 또는 중랑포(中浪浦)는 또 다른 위치정보를 제공한다. 경종이 묻힌 의릉의 위치를 하천과 연계하여 읽으면 현재의 월릉교보다는 약간 남쪽으로 보이지만, 동구릉으로 가는 능행길의 시각에서 보면 주정소 중량포(中良浦)와 같은 위치를 서술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망우동지」(영조 36년, 1760)는 40~50보쯤을 돌로 쌓은 송계교 몇 리 아래 중령포(中泠浦)가 있고, 거기에 사람 다니는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다고 기록한다.49) 중령포를 중량포-중랑포의 이칭이라고 볼 때, 현재 월릉교 부근에 있던 송계교50) 아래 몇 리, 즉 현재의 중랑교 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로써 중량포-중랑포가 지칭하는 위치는 하천의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때까지 이곳에는 안정적인 형태의 다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4년(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六典條例)」 호전(戶典) 편에 한성부 도성 바깥 십 리에 벌목이나 개간을 금지하는 지역의 동쪽 경계로 송계교에서 중량포에 이르는 곳을 명시한 것51)도 이와 동일한 위치 인식을 반영한다. 1890년 순조의 며느리이자 다음 왕 헌종의 생모인 신정왕후의 장례 행렬이 청량리, 청량현하교, 구 휘경원점, 노가교, 중랑포, 천왕수교, 삼서동후교, 봉황동 주정소를 거쳤다는 기록도 이를 지지한다.52) 구 휘경원은 현재의 휘경중학교 자리이며, 봉황동은 현재의 상봉동이므로, 중랑포는 그 중간 지점인 현재의 중랑교 부근이라 추정할 수 있다.

도로망 서술에도 같은 위치 인식이 나타난다.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그리고 이를 수정, 보완하여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1770), 김정호의 「대동지지」(1860년대 초반)는 공통적으로 강원도 평해(현재의 울진)로 이어지는 길이 흥인지문-중랑포-망우리-왕산탄-평구역을 통과한다고 서술한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75-77). 「대동지지」 27권 정리고(程里考)는 이 길이 중량포(中梁浦)를 거치는 것으로 명시한다. 망우리로 가는 경로를 고려할 때 중랑포는 현재의 중랑교 부근이라 추정해 마땅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나무다리이면서 “큰 비로 물이 불어나면 건너지 못하는”53) 다리가 중요한 교통축으로서 기능하지는 못했을 것인데, 중랑포를 건너는 다리와 그 길은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까? 고종 대에 진행된 신작로 건설이 이에 대한 대답을 일부 제공한다. 1879년 고종은 건원릉 행차를 위하여 새로운 도로 조성을 적극 추진하였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123). 이것은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고종이 관심 가졌던 사업 중 하나였다. 국왕을 대신해서 왕릉을 관리하는 봉심(奉審)을 수행한 관료들에게 수시로 신작로의 상태와 편리한 정도, 교량의 상태를 확인한 사실로부터 왕의 큰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고종과 호조판서 박정양의 대화(고종 41, 1904. 2. 22)에 의하면, 이즈음 산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1891년 설치하기 시작한 중랑포의 교량을 더 넓게 증축했으며, 박정양 재임 시 수차례 중랑포 다리를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그가 한성부판윤으로 이동하는 1894년까지 현재 중랑교 위치에 교량을 수축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중량교(中梁橋)는 1904년, 중랑교(中浪橋)는 1896년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왕의 능행길 변화를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고종의 신작로 건설은 정형화된 능행길의 변화를 고민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54)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1890년 신정왕후의 장례였다. 신작로와 구작로 사이에서 거리가 짧고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가 적은 신작로로 정하라는 고종의 전교가 있었다.55) 이로써 동구릉으로 가는 능행길은 중량포(中良浦)와 송계교에서 현재의 중랑교 일대를 일컫는 중량포-중랑포로 바뀌었다. 그림 5는 고종 3년(1866)의 능행로와 고종 29년(1892)의 신정왕후 국장로를 비교하여 보여준다. 조선 왕조 내내 존재했던 능행에 대해서는 그 경로와 관련 기사를 더 발굴하여 정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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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고종 3년(1866) 능행로(붉은색)와 고종 29년(1892) 국장로(푸른색)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2016, p.23.

영조 대 중반 이후 남쪽으로 이동한 중량포 또는 중랑포의 지칭 대상은 이로써 현재의 중랑교 위치로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는 신작로와 교량의 건설이라는 근대적 발전의 요소와 새로운 능행길의 채택이라는 전통과 상징의 요소가 결합된 새로운 지리적 위상의 부여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중랑교 일대가 서울 동북부에서 차지하는 거주지와 교통축으로서의 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4) 행정 단위의 형성과 지명 표준화

지명은 한번 채택되면 다양한 속성 요소로 파생되어가는 성격을 갖는다. 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발전이 이루어지는 곳은 또 다른 현상을 유발하면서 연쇄적인 지명 수요를 창출한다. 중량-중랑도 예외가 아니었다. 흐름이 일어나면서 사람이 모인 거주지를 부르는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행정 단위의 명칭으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1610년 호패청 문서에 나타난 중랑포리(中浪浦里)였다. 문서에 수록된 동대문외(東大門外)의 16개 행정구역은 3개의 계(契), 12개의 리(里)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16개의 계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김소은, 1999, 98, 109) 여기서 ‘리’는 ‘계’와 동등한 행정구역 단위로 간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영조 대에 이르러 중량-중랑은 ‘계’의 위상을 안정적으로 부여받는다. 본래 계는 주민 자치 결사 또는 특정 목적을 위한 사모임에서 출발했으나, 인조 대인 17세기 중반에 한성부가 부(部)-방(坊)-계(契)의 행정 단위로 정착되면서 말단 행정 단위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성부 주민 대부분이 계에 소속될 정도로 확대되었고, 18세기 성저십리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마을의 수가 늘어나자 이들에게 역(役)을 징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많은 계가 형성되었다(고동환, 2007). 계의 명칭으로서 중량과 중랑의 등장은 이 지역의 인구 증가와 취락 형성과 연관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계의 명칭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1751년, 영조 27)에 기록된 중량포계(中梁浦契)이다. 이 문서는 유사시에 도성의 거주민들을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에 분속시켜 도성 방위를 맡을 수 있도록 담당 구역을 지정하는 목적을 가졌다. 이 문서 중 일부인 「도성삼군문분계총록」은 분속된 군영마다 한성부의 방(坊)과 계(契)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동부 성외에 중량포계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이 명칭은 1808년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중랑포계(中浪浦契)의 가장 이른 기록은 1763년(영조 39) 「승정원일기」에 등장한다. 포도청이 중랑포계에 거주하는 사노비를 형조로 이송한다는 내용이다.56) 포(浦)의 명칭과는 달리 계는 이후 ‘중랑(中浪)’으로 일관성 있게 사용된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앞서 서술했듯이 여기에는 1788년(정조 12) 한성부가 행정 편제를 개편하면서 인창방(仁昌坊)의 10개 계 중 하나로 중랑포계를 지정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57)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성저십리의 주민을 관리하기 위하여 한성부의 방과 계를 정비하여 행정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만큼(고동환, 2007, 345-349), 이 조치의 효력은 매우 컸을 것이고 명칭도 그만한 위상을 부여받았을 것으로 보인다.58)

중랑포 명칭이 일관성을 보이는 반면, 함께 쓰인 지명 요소는 상리계, 하계, 하리, 상리, 그리고 ‘포’가 빠진 중랑상리, 중랑하리 등으로 변형해나간다. 그 다양한 사용은 표 2에서 확인된다. 1800년 ‘중랑포상리계’ 이후 상-하로 나뉜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이 지역으로의 인구 유입과 관련있을 것임을 추측하게 해준다.59) 한 추정에 의하면, 1426년(세종 8)에 한성부의 도성 밖 인구 비율은 5.5%에 지나지 않았지만, 1789년(정조 13)에는 그 비율이 40.6%에 이르렀다(고동환, 2007, 144). 이것은 약 360년의 기간에 도성 안 인구가 9천 명 남짓 증가한 반면, 도성 밖 인구는 7만 명 정도 늘었다는 계산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구 증가에는 조선 후기 강원도의 물산을 거래하던 행상들이 동대문에서 망우동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이용하면서 그 길 일대에 만들어진 주막거리와 노변 취락(서울특별시 동대문구, 1994)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표 2.

중량(中梁)과 중랑(中浪)의 행정구역명 사용

명칭 최초 등장 문헌 소속 단위
중랑포리(中浪浦里) 1611년(광해군 3) 「호패청치부」 동대문외
중량포계(中梁浦契) 1751년(영조 57) 「어제수성윤음」
※ 중량동계(中梁洞契)가 19세기 편찬된 「동국여지비고」에 등장함
성외
중랑포계(中浪浦契) 1763년(영조 39) 8월 19일 「승정원일기」
※ 1788년(정조 12) 10월 16일 「정조실록」에서 행정 단위로 지정됨
인창방
(정조실록의 기록)
중랑포상리계(中浪浦上里契) 1800년(정조 24) 3월 15일 「승정원일기」 -
중랑포하계(中浪浦下契) 1804년(순조 4) 6월 23일 「승정원일기」 -
중랑포하리(中浪浦下里) 1821년(순조 21) 6월 16일 「승정원일기」 -
중랑상리(中浪上里), 중랑하리(中浪下里) 1832년(순조 32) 7월 8일 「승정원일기」 인창방
중랑포상리(中浪浦上里) 1846년(헌종 12) 5월 1일 「전향사발관책」 -
중랑상리계(中浪上里契),
중랑하리계(中浪下里契)
1865년(고종 2) 「육전조례」 인창방

행정지명의 변형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1846년 이후로 중랑포의 ‘포’가 탈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지역의 고유 명칭이 중랑(中浪)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증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행정관리의 편의상 줄임말을 사용할 가능성은 있어 보이나, 포구 또는 하천으로서 중량포나 중랑포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오개혁 당시 ‘중랑’이 동(洞)의 명칭으로 채택되지 못한 사유60)나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지명을 수록한 1910년대의 문서61)에 중랑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사실과 함께 향후 밝혀야 할 부분이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지정이 지명 표준화의 기능을 충분히 갖고 있었는지는 아직 확신 있게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조실록의 공식 기록이 이후 명칭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정되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파생지명이 특정한 절차 없이 사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행정기구와 주민 간 소통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지명 부여자와 사용자의 괴리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4. 결론

서울 동북부의 중요한 하천이자 행정구역의 명칭인 중랑은 다양한 고유 명칭의 존재와 더불어 각각의 공간 영역을 갖는 여러 속성 요소의 파생과 사용, 그리고 왕조의 통치와 행정관리에 따라 지칭 대상이 특별한 지리적 위상을 부여받은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같은 지형물을 지칭하는 여러 명칭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에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 명칭 사용의 역사를 단순화하면, 중량포(中良浦)로부터 시작하여 중량포(中梁浦)가 등장하여 사용되고, 이후 중랑포(中浪浦)가 새롭게 나타나 공존하다가 행정구역 명칭의 위상을 부여받으면서 중랑포계(中浪浦契)가 우세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화가 충량, 중녕, 중령, 죽령 등 각종 변형 한자어의 사용, 그리고 천, 포계, 동계, 상리, 하리, 포교, 교 등 다른 속성 요소로 파생되는 4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려서는 안 될 것이라 본다. 고유 요소와 속성 요소가 결합하여 나타나는 지명은 각각의 탄생 배경을 갖고 사용자에 의하여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나타난 지명이 우세하게 사용된다는 것이 이전에 사용된 지명을 대체하였다고 보는 시각 역시 주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기에 사용되었던 중량포(中良浦)는 후기 문헌에 다시 나타나고, 중랑포(中浪浦)가 우세하게 사용되는 시점에도 여전히 중량포(中梁浦)가 권위 있는 문서-예를 들어 관찬, 사찬 지리지-와 지도에 기재된 것이 발견된다. 이것은 사료를 이용한 지명 변화 분석에 지명 공존의 현실을 포함한 유연한 관점이 도입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중량 또는 중랑 명칭이 사용되는 지리적 맥락이 지명 사용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라는 관점을 지향하였다. 지칭의 공간 영역은 포구에서 일정 구간의 하천으로 확대되고, 이것은 속성 요소 포와 천의 혼용으로 표현되었다. 하천 각 부분에 대한 차별화된 인식은 여러 다른 명칭을 창출하였다. 중량천 또는 중랑포의 상류를 부른 이름 송계, 속계, 송계천, 두험천, 독두천, 하류에 대한 청량천이 그것이다. 상류를 지칭했던 한천이 일제 강점기 도면에 하천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표기된 것은 추후 조사를 통해 밝혀질 부분이다.

중량포 또는 중랑포가 왕의 능행길에 지나야 할 길목이고 돌아오는 길에 쉬어가는 곳이었다는 사실은 이 장소의 중요성을 주목하게 하고 그 명칭도 빈번하게 언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천을 건너는 든든한 다리가 중요하다는 지속적인 인식은 마침내 조선 후기 신작로가 건설되고 교량이 수축됨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현 위치 중랑교의 탄생이었다. 이 길은 새로운 능행길로 채택되었지만 왕조의 소멸과 함께 이에 합당한 위상을 누리지 못하는 운명을 맞았다.

인구 변동과 행정 편제 개편으로 채택된 행정지명 중랑포계(中浪浦契)는 작은 단위로 분리되어 사용되면서 영향력을 증대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지명 표준화 기능을 충분히 담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행정적으로 지정된 명칭에 주민들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는 아직 정리된 자료가 없다.

이상의 연구 결과로부터 중량-중랑 명칭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 연구과제를 도출할 수 있다. 이것은 비슷한 형태로 변화 또는 공존하는 일련의 지명 사례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첫째, 지명 연구를 위한 보완된 사료 조사와 그 방법론의 정립이다. 이 연구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각종 읍지를 비롯해 여러 사료 데이터베이스의 전산화 자료에 의존하였다. 이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모든 시기의 통시적 지명 사용을 보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다. 누락된 시기의 현황을 보완하기 위한 확대된 근원의 자료 조사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초기 이후의 명칭 사용 조사도 중요한 보완 사항이다.

언중의 지명 사용이 중요한 측면이라고 본다면, 이를 대변하는 자료, 예를 들어 현지 주민 삶의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읍지 집필의 맥락을 좀 더 중요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왕조실록이나 지리지에 사용된 지명의 권위와 효력에 대해서도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다.

둘째, 고유어 지명에 대한 추적과 더불어, 다양한 자형의 한자어에 대한 언어학 중심의 연구가 필요하다. 아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들 한자어 지명이 앞서 존재하였던 고유어 지명의 음차 표기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한자어에 있어서는 중녕(中寧)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량(良)과 령(令)을 구성한자로 갖는 한자어나(中良, 中浪, 中郞, 中令, 中泠, 中嶺), 아니면 동일한 음을 가진 한자어(中梁, 죽으로 대체된 竹令, 竹泠, 竹嶺)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사용이 단순히 기재의 편의성 또는 우연한 표기의 변화에서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체계성을 갖고 변화하는 것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고유어 지명과 한자어 사용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 첫 명칭 중량포(中良浦)의 도입 배경, 중량포(中梁浦)의 사용 배경, 그리고 아직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명칭 유래를 밝히는 데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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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1961년 4월 22일, 국무원 고시 제16호 「標準地名使用에關한件」에 의한다.

[3] 2) 1987년 12월 22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전날 있었던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중랑구, 노원구, 양천구, 서초구, 송파구의 이름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중랑구에 대해서는 면목동에서 유래한 ‘면목구’나 용마산에서 딴 ‘용마구’ 등의 의견이 있었으나, 지역을 가로지르는 중랑천에서 착안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전한다.

[4] 3) 1981년에 수정되고 1985년에 인쇄된 1:50,000 지형도 ‘성동’ 도엽에는 장안교 인근에 ‘중랑천’을 한자로 표기하고 상류 창동역 인근에는 ‘한천’, 이보다 더 상류인 서울-경기도 경계 부분에는 ‘서원천’을 적고 있다. 그러나 1986년 인쇄한 1:25,000 ‘의정부’ 도엽에는 한천과 서원천이 없이 중랑천으로만 표기한다. 1:50,000 지형도에서는 1988년 도엽부터 중랑천만 사용된다. 두 도엽의 현지 조사 연도를 모두 1985년이라 밝히고 있으므로 1985년에서 1986년에 이르는 작업 과정에서 지명이 통일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5] 4)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911년 일제가 발행한 경성부지도에서 중량교(中梁橋)를 중랑교(中浪橋)로 잘못 표기해 놓은 후, 이를 따른 각종 문헌에서 ‘중랑천’이라고 표기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정착되었다고 설명한다. 서울시 성동구가 1992년에 출간한 「성동구지(城東區誌)」는 이를 근거로 ‘중랑’을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로 여겼다(서울특별시 성동구, 1992, 23). 중랑문화원(2019, 23)도 이 관점을 따르고 있다.

[6] 5) 국토교통부가 발간한 「한국하천일람」(2018)에 의하면 중랑천의 유로 연장은 지방하천 구간(양주시 산북동 발원지~서울-의정부 경계) 36.44 km, 국가하천 구간(서울-의정부 경계~한강 합류점) 22.78 km이다.

[7] 6) 이 연구에서 다루는 한성부의 하부 행정조직인 계(契)가 특정 공간을 가리키는 행정구역인지 역(役)을 부과하기 위한 호적상의 편제 단위에 불과한지는 아직 학계의 명확한 합의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한성부의 행정조직에 대한 선행연구는 계가 말단 행정기구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공통된 의견을 내놓는다(서현주, 2002). 본 고는 계가 동일 거주지역에 형성되었고 그 설치와 폐지에 조정의 공식 승인이 필요했다는 점(고동환, 2007)에 근거하여 지리적 범주를 갖는 한성부의 공식 행정구역 단위로 간주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8] 7)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자료포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웹사이트 등을 사료 검색의 주요 원천으로 사용하였다.

[9] 8) 「태종실록」 권17, 태종 9년 5월 21일(壬辰)의 기사이다.

[10] 9) 「태종실록」 권34, 태종 17년 9월 4일(丙辰)의 기사이다.

[11] 10) 1664년에 작성된 재산상속에 관한 문서로, 권씨 가문이 갖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네 명의 자식에게 나누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당 문서에서는 양주 광진(현, 광나루), 만리현(서울 만리재), 포천, 보령, 옥구 등 전국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가문의 토지를 적시하고 있다. 이때 등장하는 중량포는 타 지역 지명으로 발견된 바 없다는 점에서 현재의 중랑천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12] 11) 「승정원일기」에는 영조(1758), 정조(1776), 순조(1827), 헌종(1847) 대의 기사에서, 「일성록」은 순조(1827), 헌종(1847), 철종(1853) 대의 기사에서 중량포(中良浦) 명칭을 사용한다.

[13] 12) 「세종실록」 권8, 세종 2년 4월 24일(壬戌)의 기사이다.

[14] 13) 「경재집」 권1에 나오는 다음 표현이다. 送牛豐壤農莊。至忠良浦。橋破牛墮而死。送成均館。以皮買酒。以肉爲肴。爲諸生一慰良辰。

[15] 14)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8년에 간행되었으나 이 초간본은 완질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한성부가 수록된 권3은 이겸노(李謙魯)의 장서인 산기문고(山氣文庫)에 보관되어 있다(서인영, 1999, 225). 필자가 확인한 것은 초간본인 을해자판(乙亥字版)으로, 이를 소장하고 있는 통문관에서 열람하였다.

[16] 15) 「동국여지승람」 권3 「漢城府」의 中梁浦에 대한 다음 설명이다. 在都城東十五里。水自楊州南流入漢江。

[17] 16) 「동국여지지」 권1, 「京都」 漢城府 산천의 개천과 중량천, 楊州牧 산천의 중량천, 관량(關梁)의 속계교와 통원교의 5개 항목을 말한다.

[18] 17) 중량천을 사용한 문헌은 1759년 이이명이 집필한 「소재집(疎齋集)」의 한성부 항목, 1760년 「영조실록」 127권 부록의 영조대왕 행장(行狀), 「국조보감(國朝寶鑑)」,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성해응이 집필한 연대 미상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한강 항목, 고종 대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 등이다.

[19] 18) 「영조실록」 권1, 영조 즉위년 9월 16일(丙辰)의 기사는 구영릉(舊寧陵), 중량포(中粱浦), 용인(龍仁), 교하(交河), 왕십리(往十里)의 다섯 후보지에 관한 논의 끝에 중량포로 결정한 사건을 전한다. 산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장례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능을 말한다.

[20] 19) 「대동여지도」 중 가장 잘 알려진 1861년 목판본에서는 중량포(中梁浦)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보다 전 단계의 것으로 평가되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채색필사본(1843~1859년 추정)에는 같은 자리에 중량포교(中梁浦橋)라는 지명과 함께 교량 표시가 되어 있다(김기혁・장진숙, 2014).

[21] 20) 김소은(1999)은 이 자료를 소장한 박명부가 당시 병조참판이던 이시발과 호패제를 논의했다는 기록에 근거해 작성 연대를 1610년 12월 전후로 보았다. 호패 지면에 기록된 ‘萬曆 三十九年’은 1611년에 해당하며 사용 연도를 나타낸다. 이 문서의 원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고문서 자료관에서 검색된다.

[22] 21) 중랑포는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9월 14일 기사에 1회, 9월 15일 2회, 9월 16일 1회 나타난다. 9월 16일에는 중량포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같은 문헌상에서 혼용을 보이는 사례는 「광여도(廣輿圖)」(영조 대 편찬 추정, 규장각 소장, 古4790-58)와 「여지도(輿地圖)」(연대 미상, 규장각 소장, 古4709-68) 등의 지도에서도 확인된다. 두 사례 모두 도성(都城) 지도에서 중량포(中梁浦)로 표기한 반면, 함께 수록하고 있는 양주목 지도에는 중랑포(中浪浦)로 기재되어 있다.

[23] 22) 「승정원일기」 1221책, 영조 39년(1763) 8월 19일, 이곳에 거주한 노비 관련 기사가 최초로 발견되는 기록이다.

[24] 23) 「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10월 16일(甲辰)의 기사에 의한다. 이때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의 배경과 내용은 3장에서 상술한다.

[25] 24) 이때의 ‘촌(村)’이 정형화된 속성 요소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단지 중랑포 또는 중량포에 있는 마을이라는 보통명사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건에서는 중랑포만 촌을 사용하고 있다.

[26] 25) 이 책의 명칭은 「현목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顯穆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이다. 1책 전교(傳敎)에는 중랑천이, 1책 이문(移文)과 일록(日錄)에는 중랑포가 언급된다.

[27] 26) 「결속색등록」, 「시종원등록」, 「신정왕후국장도감의궤」,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 등이다.

[28] 27) ‘대천(大川)'은 왕의 행차길에 나타나는 하천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전곶대천, 대송계대천 등의 사례가 있다.

[29] 28) 중랑포촌과 마찬가지로 중랑포교가 하나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중랑포에 있는 다리”라는 설명적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30] 29) 중녕포(中寧浦)는 15세기 후반 남효온의 시문에 사용된 후, 정조 13년(1789) 중녕포문(中寧浦門)이라는 표현으로 「일성록」에 나타나고, 순조 대에서 철종 대까지 「승정원일기」, 「결속색등록」과 여러 도감의궤 등에 등장한다. 중령포(中令浦)는 인조 10년(1632)과 숙종 9년(1683)의 「승정원일기」에 등장하여 19세기 철종 대에 이르기까지 사례가 발견된다. 숙종 36년(1710) 「농암집(農巖集)」에 중령지포(中泠之浦)로 처음 나타난 이래 철종 대까지 사용된 중령포(中泠浦)와 영조, 헌종, 고종 대 기록에서 발견되는 중령포(中嶺浦)는 령(令)을 구성 한자로 갖는 다른 한자로 치환된 것으로 해석된다. 중랑포(中郞浦)는 19세기 헌종, 철종 연간에서 발견된다. 중(中)이 죽(竹)으로 바뀐 죽령포(竹令浦, 竹泠浦, 竹嶺浦)는 영조 이후 고종 대까지 나타난다. ‘령’이 탈락한 죽포(竹浦)도 발견되며(영조), 죽포리(竹浦里)(정조), 죽량포(竹梁浦)(정조), 죽량천(竹梁川)(고종)도 있다. 심지어는 ‘중’이 탈락한 량포(梁浦)(1760년경, 「한양도(漢陽圖)」,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나 령포(泠浦)(「정조실록」 47권, 정조 21년 10월 4일 기사)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31] 30) 한국학자료포털, 고전종합DB,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검색되는 여러 자료들에서 왕(王, 往, 旺, 汪, 枉)과 심(心, 審, 深, 尋) 또는 십(十)을 조합한 여러 ‘왕십리’와 ‘왕심리’가 발견된다. 청량리의 경우 淸 대신 靑을 사용하거나, 청량리가 아닌 청녕리(淸寧里, 靑寧里)로 표기한 사례도 있다.

[32] 31) 변중량의 동생인 변계량이 형의 시신을 싣고 건넌 나루터를 그의 이름에서 사람인(人) 변을 빼고 중량포(中良浦)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후 태종에 의해 중용된 변계량의 영향력으로 인해 이 명칭이 널리 쓰였고, 세종에서 세조 대까지 사용된 충량포(忠良浦)는 변중량의 충절을 기리는 이름이었다는 시각도 있다(중랑신문, 2020).

[33] 32) 태종에 의해 중용되었던 변계량은 사망(1430) 이후 급속히 영향력을 잃게 된다. 심지어 그의 아들인 변영수는 예종 즉위년인 1468년, 유자광이 주도한 남이옥사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한다(변희룡, 2007).

[34] 33) 「세종실록」 권13, 세종 3년 8월 26일 병진(丙辰) 기사에 의하면, 세종이 상왕과 매사냥 구경을 마친 후 중량포(中良浦)에서 가진 술자리에서 병조참의 윤회(尹淮)가 이 하천 일대의 풍요로움을 서술할 때 상왕이 흡족했다고 한다. 과거 이곳은 지천인 우이천과 묵동천의 합류 지점으로서 바닷가와 같은 경관을 나타냈다고 한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187).

[35] 34) 동료들이 남자인 줄 알고 부르던 이름 중랑자(仲郎子)가 여인 이름 중랑(仲娘)으로, 다시 중랑(中浪)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중랑신문(2020)은 중랑(中浪)도 변중량과의 인연으로 보는 다음과 같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송계교와 연결되는) 송계원은 태종이 능행길에 자주 머물던 장소이므로 태종의 상징이고, 태종에게 참살을 당한 변중량은 설화 속에서 중이(仲伊)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장님이 된 것은 참살당한 것의 비유이고, 중랑자의 효행은 변중량의 절의, 수령의 치하는 변중량의 명예회복을 비유한 것이다.”

[36] 35) 여기에 더 작은 규모의 개울을 나타내는 계(溪)를 추가할 수 있다.

[37] 36) 영조 7년 1월 22일 기사에 의하면 “陵底中浪浦淸凉長位三里”라 언급하고 있는데, ‘삼리’가 세 마을을 의미한다고 볼 때 중랑포를 마을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38] 37) 김순배(2009)는 권력관계가 수반되어 지명 지칭 영역이 변화, 확장하는 것을 ‘지명의 영역화(territorialization)’라는 개념으로 말한다.

[39] 38) 「세종실록」 권12, 세종 3년 6월 16일(丁未)의 기사이다.

[40] 39) 「동국여지지」 권2 양주목 관량(關梁)의 “속계교는 동쪽 30리에 있다. 중량천에 놓여 있는데, 중량천은 또 속계로도 부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어졌다”는 설명에 근거한다. 양주목 산천에는 중량천이 주(州) 동쪽 20리에 있다고 했는데, 속계교가 동쪽 30리에 있다고 할 때 그 기준점이 어딘지, 양주에서는 동쪽에 있고 속계교는 동남쪽에 있는데 왜 동쪽이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양주목 관아로부터의 위치 인식에 의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41] 40) 「대동지지」 권3, 「경기도 하」 양주 산수의 다음 서술이다. 松溪川 一云涑溪 南四十里豆驗獨豆二水合而南流經涑溪橋爲中梁浦 經拜峯之東出濟礬橋 經箭串坪入于漢江.

[42] 41) 「읍지」 2책 「양주목읍지」 산천, 「경기지」 1책 「양주목읍지」 산천, 「경기읍지」 4책 「양주목읍지」 산천, 「양주읍지」 산천명승에서 동일하게 다음 기록이 작성되어 있다. 中浪浦 在忘憂里面 南距六十里 自松溪川下流入于箭串橋.

[43] 42) 「대동지지」에서 석조 교량으로 밝히고 있는 송계교(속계교)는 1632년(인조 10)에 작성된 「인목왕후산릉의궤(仁穆王后山陵儀軌)」에서 ‘송계석교’로, 여러 왕대의 「결속색등록」에서 ‘대송계석교’로도 언급된다. 고지도에서도 송계교(속계교)를 석교로 표기한 사례가 잦으므로 여기서 언급된 석교를 송계교(속계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4] 43) 「승정원일기」 2839책, 고종 14년 6월 6일의 다음 기록이다. 上曰, 石橋・箭串橋之間, 卽中嶺浦耶。永壽曰, 然矣。

[45] 44) 1779년(정조 3) 5월 12일자 「일성록」」의 다음 기록이다. 善復曰 淸涼川 橫彎於祭墟峴下 祭墟峴逶迤於淸涼川 今若改出大路 則當穿峴防川 而開路於祭峴之外矣 此甚難處矣.

[46] 45)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총독부 박물관 문서에 포함된 경성 및 인천지방 도면 독도(纛嶋) 도면의 표기를 말한다.

[47] 46) 「동국문헌비고」 권13 「여지고」 산천 한성부와 양주에 나오는 다음 서술에 의한다. 獨豆川 在南十里中梁川上流 右諸水見總說. 豆驗川 在南十五里源出佛谷山南流經州境入獨豆川. 中梁川 在都城東十三里楊州獨豆川下流.

[48] 47) 「여도비지」 권4 양주목 산천의 다음 서술이다. 松溪川 一云涑溪中梁川上流. 豆驗川 治南十五里源出佛谷山經治南入于獨豆川. 獨豆川 治南東十里源出祝石嶺與豆驗川合而南流爲松溪川.

[49] 48) 주 33)의 기록과 동일함.

[50] 49) 「망우동지」 1책, 「형승」의 다음 기록이다. 至烽火山陰而爲松溪橋, 石築四五十步許, 又下數里而爲中泠浦。每歲秋冬之交, 自本洞作徒杠。여기서 도강(徒杠)은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외나무다리를 말한다.

[51] 50)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2000, 187)에 의하면, 1995년 서울시 중랑구의 문화유적 탐방로 조사 과정에서 송계교의 일부가 월릉교 아래 묻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52] 51) 「육전조례」 권4, 「호전」 한성부 사산에 금표(禁標)를 설치하는 기준점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때 표기는 중량포(中梁浦)이다.

[53] 52) 「神貞王后國葬都監儀軌」권1, 내관에 의한다.

[54] 53) 「대동지지」 정리고의 세주에 나오는 다음 표현이다. 潦漲未渡.

[55] 54) 능행길의 변경에는 기존 능행길의 중요한 지점이었던 송계교의 철거도 함께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송계교의 철거는 흥선대원군 당시 경복궁의 중건 과정을 기록한 「경복궁영건일기」의 을축년(1865, 고종 2) 윤5월 9일의 기사에 등장한다(서울역사편찬원, 2019, 87-92).

[56] 55) 「승정원일기」 2997책, 고종 27년 5월 21일. 서울역사박물관(2020, 37)에서 재인용함.

[57] 56) 주 22) 참조.

[58] 57) 인창방에 속한 10개의 계는 역일계(驛一契), 역이계(驛二契), 사계(私契), 마장리계(馬場里契), 답십리계(踏十里契), 전농리계(典農里契), 청량리계(淸凉里契), 제기리계(祭基里契), 중랑포계(中浪浦契), 장위리계(長位里契)이다.

[59] 58) 당시 성저십리의 인구 증가에 의해 각 5부마다 방에는 포함시키지 않고 계만 설치되는 ‘유계무방(有契無坊)’ 지역이나, 반대로 방에는 소속되어 있으나 역이 면제되어 계가 없는 ‘유방무계(有坊無契)’ 지역이 형성되었다. 주민 현황을 파악하여 적절한 역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계를 개편하여 체계적인 관리를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였다(고동환, 2007).

[60] 59) 계의 편성은 인구수보다는 주민의 특성에 따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서현주, 2002). 그러나 방역 부과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인구가 증가하면 계가 추가로 신설되고 인구가 감소하거나 역을 피하는 주민이 늘어나면 계가 소멸하기도 하였다(고동환, 2007).

[61] 60) 1867년 당시까지만 해도 한성부의 동부는 7방 43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갑오개혁 때 동서(東署)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7방 20계 165동으로 개편되었다(김동철 역, 2019, 151). 중랑을 이름으로 하는 계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소멸하고, ‘중랑하리’와 같은 리(里) 단위의 지명으로만 잔존한다. 이마저도 중랑은 동의 이름으로 계승되지 못하고, 1910년에 사라져 1988년 중랑구가 제정되기 전까지 행정구역명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리와 동이 어떤 기준으로, 어떤 행정적 차이를 갖고 채택되었는지 파악한다면 중랑이 동으로 정착하지 못한 이유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62] 61)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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