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동아시아의 보편적 문화 현상으로서 ‘누정 문화’ 그리고 ‘누정 경관’
3. 조선 전기 읍치 누정의 영건 배경과 조성 과정
1) 주요 영건(營建) 배경에 보이는 장소성
2) 입지적 환경과 조성 과정
4. 읍치 누정의 주요 경관 요소와 의미 세계
1) 누정 명칭에 담긴 의미들
2) 연출된 차경(借景)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인간 삶의 모습들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시대 지방에는 330여 개소에 이르는 고을 중심지 ‘읍치(邑治)’가 있었고, 그곳에 고을 수령(守令)이나 도(道) 감사(監司) 등의 지방관(地方官)이 세운 ‘누정(樓亭)’이 있었다. 이렇게 ‘관(官) 주도로 읍치 기준 10리 이내에 건립된 누정’을 일컬어 이 글은 ‘읍치 누정(邑治 樓亭)’이라 정의한다.
본고에서 읍치 누정을 정의함에 있어 ‘읍치 기준 10리 이내’를 거리상 한계로 설정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각 고을의 향교를 비롯한 삼단일묘(三壇一廟)는 관아로부터 거의 10리 이내에 세워졌다. 이는 지방관(地方官) 주도로 이루어진 이들 시설의 관리 및 운영의 실질적 한계가 10리였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 읍치 장시의 운영 반경이 대략 10리였다는 점이나 조선시대 지방 5일장 간의 거리가 대략 10리 안팎이었다는 점 역시 읍치 기준 10리 이내가 갖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단위성을 정당화한다. 셋째, 《경국대전》 「호전」 조의 ‘서울의 성저(城底) 10리(里) 안은 모두 경역(京役)을 진다.’에 보이는 10리의 용례나, 《속대전》에 기록된 공역 관련 내용 중의 ‘관원 맞이와 전송, 사신 접대, 역마, 역부 등의 역은 모두 읍내 및 10리 이내 민호에서 차정한다[皆以邑內及十里內民戶差定].’에 보이는 10리의 용례, 이들 조선 법전의 용례 역시 읍치 기준 10리 이내가 지방 통치의 법정 기본 단위였음을 말해준다. 이상을 종합할 때 읍치 기준 5리 이내는 ‘읍치 근방’을, 10리 이내는 ‘고을 수령의 실질적 관할 반경’을 각각 가리켰다고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읍치 기준 10리 이내’는 읍치 누정을 정의하는 거리상 한계 기준으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간 읍치 누정에 대해서는 객사나 동헌 등의 여타 읍치 시설에 비해 거의 주목되지 않았던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읍치 누정은 고을 수령이나 도 감사뿐 아니라 왕인(王人), 사신(使臣), 전・현직 관료(官僚), 지방관의 지인(知人) 등 다양한 인물들이 풍류(風流)를 즐기고 교유(交遊)하며 유숙(留宿)하던 곳으로 그와 관련된 풍부한 이야기들을 품은 특별한 장소였다.
무엇보다 읍치 누정은 ‘경관을 매개로 삶과 사유(思惟)를 도모하던 장소’였다. 읍치 누정을 드나들었던 인사들은 그곳에서 조망되는 풍광을 시문(詩文)으로 노래하면서, 거기에 인생관, 자연관, 역사관, 세계관, 그리고 인륜(人倫) 및 고을 경영의 철학과 사상을 담아내고 서로 간에 나누었다. 이런 연유에서 읍치 누정은 인문지리학계를 중심으로 한 오랜 문제의식인 이른바 ‘장소 인문학’ 관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e.g. Relph, 1976; Tuan, 1977; Casey, 2000; Cresswell, 2004; Haraway, 2016; Leeuw, 2021; Waterton and Smith, 2022; Aczel, 2023). 그것은 누정이 단순한 공간적 무대가 아니라 당대의 환대 문화, 의례, 사상이 실천되고 체화되던 현장으로서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non-human agents)과의 관계를 맺는 장(場)으로서, 의미와 기억과 관계를 생산했던 주체적 장소로 작동하였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비교적 알려진 조선의 객사나 동헌 같은 주요 읍치 시설은 건물의 옛 모습이나 기껏해야 이름 정도를 남기고 있다. 이에 비하면 읍치 누정은 당대에 읍치를 오갔던 주요 인사들의 인생사와 생활 모습, 겪어왔던 세상사, 지역사회나 학문과 관련해 풀어내고자 했던 고민과 생각들, 그리고 계속되는 삶을 위한 다짐 등등을 명칭(名稱), 기문(記文), 중수기(重修記), 중건기(重建記), 시문(詩文) 등의 기록을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 같은 관심에서 본 연구는 조선시대 읍치 누정의 경관 구성과 장소성을 탐구함으로써 이곳의 문화경관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둔다.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의 개념을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연환경을 매개로 창출한 경관’으로 정의한 지리학자 칼 사우어(Sauer, 1925) 이래로, 그간 학계에서는 문화경관을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남긴 인간 활동의 흔적으로 기술하기도 하고(Bryan, 1933), 인간 활동의 단순한 흔적을 넘어 한 인간 집단의 일상적 삶과 질서를 떠받치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로서 보다 심층적 읽기가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하였다(Jackson, 1984).
물리적 경관 자체보다는 그것에 담긴 문화집단의 시선 및 그것을 재현한 도상학적 표현들을 해석함으로써 한 문화집단의 ‘보는 방식(a way of seeing)’에 접근하려 했던 흐름도 있었고(Cosgrove, 1998), 경관을 ‘담론이 물질화된 것(discourse materialized)’ 곧 다양한 사회적 담론이 공간에 침전된 가시적 결과물로 이해하거나(Schein, 1997), 더 나아가 경관이 순진한 문화적 기록물이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품거나 일정한 정체성 형성을 유도하는 등 권력의 도구로 작동한다며 이른바 비판이론의 관점에서 접근한 흐름도 있었다(Mitchell(Ed.), 2002).
이처럼 문화경관 개념의 전개사(展開史)는 학자마다 상이한 정의와 접근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그간 이 개념이 얼마나 확장되어 왔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떠한 분석이 가능하며 어디까지 해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축적해 온 문화경관의 개념과 문제의식은 조선의 읍치 누정에 접근하는 데에도 유효할 것으로 본다. 조선의 읍치 누정은 개인의 사적 공간이라기보다 국가적 차원의 공적 장소이자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생활과 담론이 교차하는 집단적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휴식의 장이면서도 다양한 경관 요소들을 매개로 미학과 문학, 학문과 정치, 그리고 사회적 담론을 전개한 장소였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요컨대 본 연구는 문화경관의 개념에 입각해서 조선의 읍치 누정이 단순한 조망 거점이거나 휴식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표상이었다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읍치 누정의 영건에 작용한 정치・사회적 환경 및 입지적 환경을 살필 것이다. 이어서 누정 명칭에 담긴 상징과 의미의 세계를 들여다볼 것이다. 끝으로 누정으로부터 조망한 풍광의 내용들과 주요 경관 요소들에서 당대의 정신세계와 정치, 학문, 문화적 실천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간 누정에 대해서는 문학 공간으로서의 기능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예. 박정우, 2008, 하정승, 2021, 최은주, 2024). 하지만 문화경관의 관점에서 볼 때, 누정 건물 그 자체는 누정 경관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누정은 주변의 산지와 하천, 계곡과 연못, 하늘과 구름, 들판과 숲, 그리고 그곳에서 조망되는 백성들의 삶의 모습 등 다양한 자연 및 인문 요소들과 긴밀히 어우러짐으로써 보다 큰 하나의 문화경관을 창출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동일한 맥락에서, 문화경관의 관점으로 읍치 누정에 다가감에 있어서는 ‘주변 풍경이 누정의 일부였다.’는 표현보다 ‘누정이 풍경의 일부로 존재하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누정에서 바라보고 공유했던 시시때때의 자연환경과 인간 삶의 모습, 그것은 단순히 차경(借景) 개념으로만 설명되기에는 역부족인, 그 이상의 심오(深奧)한 세상이었다. 주변의 여러 경관 요소들과 더불어 읍치 누정은 그곳의 장소성의 두께를 더하였고, 보다 커다란 스케일의 완결성(integrity)을 가진 문화경관을 이루어 냈다.
본 연구는 조선의 읍치 누정에 대한 이해에서 조선 전기에 의미를 둔다. 주요 지리지 자료를 볼 때 읍치 누정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시기가 조선 전기인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내용은 조선 전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수록 누정 관련 기록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1530년대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국여지승람》(1480년대 발행)을 근간으로 내용을 증보한 자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각 고을 누정(樓亭) 조에는 읍치 누정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 그 배경을 엿볼 수 있는 조선 전기의 고을별 다양한 지리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는 전국의 도별로 각 고을의 주요 읍치 누정을 소개하고 있는데, 누정에 따른 정보량의 편차는 있지만 그 위치, 명칭과 유래, 조성 배경, 주변의 주요 경관 요소, 관련 인물과 그들의 시문 등등에 관한 비교적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조선 전기 읍치 누정의 목록과 실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참고로 이하의 본문에 인용한 각 누정의 명칭, 입지, 유래, 주변 경관, 관련 시문 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군현별 「누정」, 「고적」, 「사정(射亭)」 조에서 확인한 내용으로서,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일이 출처를 표시하지 않기로 한다. 이 외에 조선시대의 전국 지리지와 읍지, 고지도 등이 읍치 누정의 입지 환경과 주변 경관 요소를 추정하는 부분에서 참고가 되었다.
2. 동아시아의 보편적 문화 현상으로서 ‘누정 문화’ 그리고 ‘누정 경관’
누정(樓亭)이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아울러 부르는 용어이다. 어원으로 볼 때 누(樓)의 의미는 ‘층을 올렸다.’는 뜻이므로, 결국 누각이란 시야를 확보하거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2층 이상의 높은 위치에 마룻바닥을 둔 건물’을 가리킨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다락’이다. 이와 비교해 정자라는 용어에서 정(亭)의 의미는 ‘머물러 쉰다.’는 뜻으로 풍류(風流)를 즐기거나 동지들과 교유(交遊)하거나 바깥 풍경을 조망(眺望)하기 위해 머물렀던 ‘약간의 터 돋움을 하여 세운 단층의 건물’을 가리킨다.
이것은 다만 어원상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고, 조선시대의 현실 소통에서는 종종 양자가 구분 없이 혼용되는 경우도 있었고 실질적 공통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양자는 외부 조망이라는 목적을 공유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목적 때문에 건축 구조상 벽채 없이 기둥과 지붕으로만 조직된, 개방감을 특징으로 하던 시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이렇게 개방적 구조였던 만큼 머무는 자의 안전과 심리적 안정감을 고려해 가장자리에 난간을 두른 구조를 취하였고 대체로 단청(丹靑)으로 치장하였다.
기능이나 목적 면에서 누정과 유사한 여타 시설로는 당(堂)과 대(臺)가 있었다. 당은 벽채를 갖추고 있으면서 종종 온돌 시설을 구비하였다는 점에서 누정과 구별되고, 대는 인공 시설이기보다는 주로 자연 상태의 높고 평평한 암반(巖盤)을 가리켰다는 점에서 당과 달랐고 앞에 설명한 누정과도 차별되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수록 누정 조에는 누각과 정자뿐 아니라 당과 대까지 모두 수록되어 있어, 당시 이들 네 가지를 넓은 의미의 누정 범주에 포함시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본 고에서도 이 의미를 따르기로 한다.
누정은 팔경(八景), 구곡(九曲), 풍수(風水) 등과 함께 한반도, 중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던 동아시아의 보편적 경관문화(landscape culture)이자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이었다(전종한, 2025, 100). 누정을 중심 공간으로 하여 실천되던 문화를 ‘누정 문화’, 그리고 누정이 필수 경관 요소였던 문화경관을 ‘누정 경관’, 이렇게 두 용어의 조작적 정의를 내려본다면 조선의 읍치 누정은 당대 동아시아의 보편적 누정 문화와 누정 경관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지역화를 이루었는지, 그 지역화 국면의 한 양상을 보여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령 북송 시대의 학자였던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저작 《애련설(愛蓮說)》은 연꽃의 고결함과 청렴함을 찬미하며 유교적 도덕성과 군자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글인데, 그의 글에서 가져온 피향(披香), 향원(香遠), 청련(淸蓮) 등의 표현들은 후대에 중국과 한반도의 누정(樓亭) 명칭을 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 다만 중국의 전통 누정들이 주돈이의 원문에 나타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에 비해, 한반도에서는 읍청정(挹淸亭)의 경우처럼 원문의 의미에 다가가면서도 새로운 한자 조합을 통해 창의적으로 명명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한편 중국의 경우 정(亭, ting)에 관한 기록은 한(漢, 기원전 202-220) 나라 이전부터 확인된다. 중국의 정은 초기에 주변 감시를 위한 군사 시설로 등장하다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 시대를 지나면서 문인들의 활동 공간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었으며, 대략 송(宋, 960-1279) 나라 이후에는 형태상 오늘날과 같은 벽채 없는 개방형 건축물로 단순화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Chen and Zuo, 2025, 1). 이와 비교해 일본의 정(亭, tei)은 흔히 아즈마야[東室] 또는 시아[四阿]로 부르는데, 외부 풍경을 향한 조망보다는 정원 속의 잠깐 머무는 지점에 배치하여 이른바 유현(幽玄)2)과 같은 모종의 내적 체험을 위한 장소로 이용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일본의 정은 애초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기능뿐 아니라 건축 재료나 구조, 지붕 치장이나 규모 면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여 중국에 비해 대단히 소박하게 전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He, 2023, 2).
물론 위에 인용한 중국과 한반도의 누정 이름 명명상의 공통점과 차이점, 중국과 일본의 누정 경관 및 누정 문화의 지역화 국면은 이제 막 연구가 시작되는 단계의 아주 개설적(槪說的)인 주장들이다. 우리나라 누정도 그러하겠지만, 누정의 경관과 기능은 역사적으로 고정적이지 않았을 테고, 같은 시대라도 지리적으로 다양한 변이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동아시아 스케일에서 누정 경관의 보편성과 지역화 양상에 대한 이해를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가설 수준의 비교문화적 탐색도 필요하지만 각국의 지역적 실상과 맥락을 고려한 심층적 분석 및 구명 작업이 동시에 요구된다.
3. 조선 전기 읍치 누정의 영건 배경과 조성 과정
1) 주요 영건(營建) 배경에 보이는 장소성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전국의 누정 빈도는 500개로 확인된다. 대부분 누정들은 이 자료의 「누정」 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부는 「사정(射亭)」 조에서 확인되고 때로는 「고적」 조에서도 보인다. 그림 1은 전국의 도별로 전체 누정 수 대비 읍치 누정의 수를 나타낸 빈도 그래프이다. 전체 누정의 도별 분포를 확인해 보면, 전체 누정의 약 33.2% (166개소)는 경상도에 소재하였고, 다음으로 전라도 23.0% (115개소), 충청도 12.4%(62개소) 순으로 나타난다.
한편 읍치 누정은 전체 누정의 약 85.2%(426개소)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도별로 보면 전체 읍치 누정의 32.3%(138개소)가 경상도에 있었고, 전라도 24.6%(105개소), 충청도 13.1%(56개소) 순이다. 각 도(道) 안에서 읍치 누정의 비중이 높은 지역은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 등이었고, 상대적으로 읍치 누정의 비중이 낮은 곳은 강원도와 경상도였다.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읍치 누정의 비중이 낮은 이유는 전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이 두 지역에 자연경관이 수려한 경승지가 읍치에서 다소 떨어진 지점에 많았으며 그러한 곳의 명승지를 찾아 관립 누정들이 세워졌기 때문으로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사설(私設) 누정들이 낙향(落鄕), 독서(讀書), 강학(講學), 시묘(侍墓), 이거(移居), 시회(詩會) 등 다양한 배경에서 세워졌던 것과 달리(김경옥, 2024, 전종한, 2025), 읍치 누정은 관(官)의 주도로 세워졌던 만큼 무엇보다 공적(公的) 목적이 중요한 영건 배경이었다. 그중에서도 귀빈(貴賓) 접대가 영건의 주된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귀빈이란 중앙 조정의 명령을 전하러 오가는 왕인이나 사신, 공적 혹은 사적인 일로 지나다 들르는 전・현직의 관료 및 수령의 지인 등을 지칭하고, 접대란 고을 수령이 그들에게 휴식과 숙식 등 여정상의 편의를 제공하는 행위를 말한다.
경기도 광주목의 청풍루(淸風樓)에 보이는 ‘공청(公廳)과 백성의 집이 우물 밑에 있는 것 같아 손님들이 오면 낮고 누추하다고 불편하게 여길 것이다.’라는 기록, 이천도호부 애련정(愛蓮亭)에 보이는 ‘오가는 왕인(王人)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기록, 음죽현 죽남루(竹南樓)에 보이는 ‘누각을 세우는 것은 사신(使臣)을 예로써 접대하여 그곳에서 일을 듣는 것이다.’는 기록 등등 다수의 누정 기문(記文)에서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예상할 수 있듯이 귀빈 접대는 특히 도읍 근교의 교통 요지, 지방의 경우에는 국가 교통망상의 결절지나 지방 중심 도시였던 고을에서 읍치 누정의 주요 건립 배경이 되었다. 경기도 용인현의 신정(新亭)에 보이는 ‘왕도(王都)와 인접한 까닭으로 밤낮으로 모여드는 대소 빈객(賓客)이 여기를 경유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 (하략).’라는 기록, 수원도호부 운금루(雲錦樓)에 보이는 ‘안찰부(按察部)의 치소(治所)로 여러 주・군을 통제하므로 도(道) 전체의 일이 집중되는 곳이 된다.’는 기록, 충청도 충주목의 청연당(淸燕堂)에 보이는 ‘남북의 손님이 서로 만나는 때를 당하면 관사가 수용하지를 못하고 … (하략).’라는 기록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읍치 누정의 영건 목적이 오직 귀빈 접대에 있었다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 수령의 중요한 책무가 ‘왕명을 받들어’ 고을을 다스리는 일이었음을 상기한다면,3) 읍치 누정은 오히려 고을 수령이 책무를 다하기 위한 심신 수양의 장소로서 더 중요했다고 볼 수도있다. 조선왕조는 초기부터 중앙집권화를 강력히 추구했기 때문에 지방 수령의 일차적 책무는 왕명(王命)을 받들어 백성을 친애(親愛)하는 데에 있었다. 전국의 읍치 누정 기문들을 분석해보면 수령이 백성을 친애(親愛), 다시 말해 백성을 가까이하며 사랑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일이 요구되었다. 하나는 그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지척에서 살피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령이 언제든지 백성을 대할 수 있도록 사전에 늘 자신의 가슴에 막힌 것을 트고 항상 정신을 맑게 유지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수령이 가슴에 막힘이 없어야 비로소 백성과 소통할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정신을 맑게 한 뒤에야 복잡한 업무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전자와 후자는 무관한 일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도모할 수 있도록 마련된 장소가 바로 읍치 누정이었다. ‘누대를 설치하는 것은 경치를 구경하기 위함만이 아니고 장차 막히고 답답한 것을 풀어서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노고(勞苦)와 안일(安逸)을 조절하는 것은 정치하는 자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경상도 예천군 쾌빈루의 기문에 관련 내용이 보이고, 강화도호부 이섭정(利涉亭) 기문에는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이첨(李詹)의 기문에 … (중략) … 기운이 번거롭고 정신이 산란하며 보는 것이 막히고 뜻이 걸릴 때를 당하면, 군자는 반드시 놀고 쉴 만한 물건[游息之物]과 높고 상쾌한 도구[高爽之具]가 있어서 군자로 하여금 이리저리 바라보고 거닐며 정신을 맑게 한 뒤에야, 번거로운 것이 간단해지고[煩者簡] 산란한 것이 안정되며[亂者定] 막힌 것이 소통되고[壅者通] 걸린 것이 트이게 되는[滯者行] 법이다. … (중략) … 관리와 백성이 모두 함께 ‘그렇다.’고 하자, 곧 그러한 장소[여기서는 누정을 가리킴.]를 도모하여 경영하고자 하였다[圖所以經營].4)
이렇게 고을 수령에게 읍치 누정은 훌륭한 지방관이 되기 위한 배태(胚胎)의 공간이자, 유교적 이상 사회를 지향한 조선시대의 특성상 유가적(儒家的) 수양(修養)을 실천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역시 누정 영건의 주요 배경이었다. 경상도 경주부의 빈현루(賓賢樓)에 보이는 ‘《시경(詩經)》 행위편(行葦篇)에, 활쏘기가 이미 공정하게 이루어졌으므로[射矢旣均] (얼마나 잘 했는지) 그 잘함 정도를 가지고 손님의 우선순위를 정한다[序賓以賢]고 하였으니, 연회로 술 마실 때에도 반드시 활 쏘는 예[사례(射禮)]를 먼저 행하였다. 활을 쏘는 도(道)에서 그 덕행(德行)을 볼 수 있고, 그 효용(效用)은 천하에 위엄을 보일 수 있다.’는 기록은 유학(儒學)의 여섯 가지 덕목 중 하나로 활쏘기를 제시한 다음 이것이 갖는 유가적 의미를 잘 풀어주고 있다. 이를 구현하는 장소가 바로 빈현루라는 누정이었고, 그 명칭 역시 위의 시경 행위 편에 나오는 ‘활쏘기를 잘한 정도를 가지고 손님의 우선순위를 정한다[序賓以賢].’는 것에서 지은 것이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알리거나 기념하기 위해 읍치 누정이 세워졌던 사례도 확인된다. 경기도 안성군의 극적루(克敵樓)는 이름에 ‘적을 이겨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권근이 지은 극적루 기문(記文)에는 ‘지정(至正, 원나라 순제의 연호) 신축년에 홍건적에게 송도가 함락되고 승여(乘輿)가 파천(播遷)하였을 때 이 고을에서 북쪽으로 30여 주(州)는 풍문(風聞)만 듣고도 항복하였다. … (중략) … 온 나라가 같이 망해도 막을 수 없었는데 오직 이 고을이 남보다 의기를 분발하여 항복하는 체하며 잔치를 벌여 적군을 호궤하였다. 적이 취한 다음 섬멸하니, 적은 이 때문에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라고 하여 이 누정이 기념하고자 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있다. 충청도 직산현의 제원루(濟源樓)에 보이는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라는 기록, 경상도 청송도호부의 찬경루(讚慶樓)에 보이는 ‘이 누에 올라 소헌왕후의 곤덕(坤德)과 의표(儀表)를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찬경루라고 명명한다.’라는 기록 등도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여 세웠던 사례이다.
이 밖에 신구(新舊) 지방관이 교대하거나 조정의 사명(使命)을 받들기 위한 곳, 해안이나 강 연안의 경승지, 지리적 적환점에 위치했던 역원(驛院)이나 도진(渡津)에도 지방관(地方官) 주도로 읍치 누정들이 건립되었다. 예를 들면 전라도 전주부의 서북쪽 5리에 있었던 공북정(拱北亭)은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내리는 경우 전주 부윤이 관리들을 인솔하여 의관을 갖추고 맞이하거나 조정의 애경사 때에 대궐을 향해 예를 행하던 누정이었다.5) 큰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지점과 같이 지리적 입지 특성상 행인들이 가령 물때와 같은 어떤 특정 시기를 한동안 기다려야만 했던 역원들에서도 누정이 세워진 사례가 보인다. 충청도 옥천군의 적등원에 건립된 적등루(赤登樓)가 대표적이다.
서거정은 적등루 기문에서 ‘화성(和成) 최공(崔公)이 어느 날 들로 행차하였다가 적등루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백성의 장관으로서 어찌 차마 보기만 하고 수습하지 아니하여 행인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겠는가 하고 분연히 중수(重修)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여 고을 수령의 중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역원(驛院)이나 도진(渡津)과 같은 특수한 지점의 누정 같은 경우, 그것이 고을 수령의 주도로 건립 혹은 중수되었다면 넓은 의미의 읍치 누정으로 간주할 여지도 있겠으나 여객의 쉼터라는 기능적 측면이나 읍치로부터의 원격성 측면에서 본다면 엄밀한 의미의 읍치 누정으로 간주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누정’하면 대개 ‘빼어난 자연 경치’가 떠오르지만, 조선전기의 읍치 누정 중에는 훌륭한 자연 경치를 누정 영건의 직접적 배경으로 내세운 경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한가하게 경치를 즐기고자 누정을 세웠다.’는 비판이 있을까봐 누정을 일으키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하였다. 이미 과거부터 있었던 누정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경치 구경을 일삼거나 유희(遊戲)를 즐기는 것을 대단히 경계하며 그 이상(以上)의 것을 추구하였다.
읍치의 누정(樓亭)을 짓는 것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임금이 보낸 사자(使者)를 존중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함이며, 때와 기후를 점치고 농작(農作)을 살펴서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겨할 뜻을 가진 것이다.6) 이 문장은 서거정이 쓴 강원도 홍천현 학명루의 기문에 나오는 것인데, 조선 전기 읍치 누정의 영건 배경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면서도 그 방점을 어디에 두었는지 잘 드러내 준다.
‘저 산 모양과 바다의 빛 같은 경치 좋은 것은 이 누정에서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예전에 이미 음란하고 사치하며 안일하고 향락함으로써 망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 또한 뒷날 이 누정에 오르는 자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이다.’라는 권근의 기문 내용이나, ‘고려 중엽이후로 문관(文官)은 안일(安逸)에 빠지고 무관(武官)은 놀기를 즐겨하여 누대(樓臺)는 풍악과 노래와 춤의 처소가 되고, 꽃과 달은 놀고 구경하고 음영(吟詠)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어찌 오늘날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정인지(鄭麟趾)의 기문 내용 등은 모두 조선 전기 읍치 누정의 영건을 통해 지향하고자 했던 의지(意志)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곳에 응축된 장소성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방증한다.7)
2) 입지적 환경과 조성 과정
조선시대의 읍치 공간에서 동헌이 통치・행정을 위한 실질적 중심이었다면, 객사는 읍치의 상징적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라 부르던 패(牌)를 정청(正廳)의 감실(龕室)에 안치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 수령이 궁궐을 향해 배례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 바로 객사였기 때문이다. 객사 중앙의 한 단계 높은 지붕 공간을 정청이라 하며, 일반적으로 그 양쪽에는 익실(翼室)을 두어 방과 마루를 마련하고 귀빈의 유숙을 지원했다.
객사는 읍치 누정 입지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 조에 기록된 읍치 누정들의 입지를 살펴보면, 전국 읍치 누정의 상당수가 가령 ‘객사 북쪽’, ‘객사 동쪽’, ‘객관 남쪽’ 등등 객사를 기준으로 입지가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2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전국 426개소의 읍치 누정을 대상으로 각각의 입지를 서술한 기록을 분석하여 객사 누정, 동헌 누정, 성문 누정, 기타로 세분해 본 것이다. 그 결과 총 426개 읍치 누정 중 269개소(약 63.2%)가 객사를 기준으로 입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지방 중심지인 큰 고을이나 교통의 요지인 고을의 경우에는 읍치 누정을 두 곳 이상 경영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충청도 충주목에는 객관 동쪽의 경영루(慶迎樓), 객관 서쪽의 망경루(望京樓), 객관 동쪽의 청연당(淸燕堂), 객관 동쪽의 자경당(自警堂)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해 홍귀달은 청연당 기문(記文)에서 설명하기를 ‘중원(中原)은 남북의 요충(要衝)이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 강물과 육지를 달려 중원에 모이며, 여기서 길이 갈라져 두 고개(조령과 죽령)를 넘어 목적지에 도달하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사람들도 이 두 고개를 넘어 중원에 모이며, 이곳에서 강물과 육지를 경유하여 서울에 도달하는데, 만일 남북의 손님이 서로 만나는 때를 당하면 관사(官舍)가 수용하지 못한다. 게다가 본도(本道)의 세 사(使)는 벼슬이 높은데 혹 동시에 이곳에 이르면 관사를 대접하는 것이 실로 어렵다.’고 하였다. 경상도 경주부의 경우에도 객관 동쪽의 빈현루(賓賢樓)와 객관 서쪽의 의풍루(倚風樓)가, 의성현에도 객관 북쪽의 문소루(聞韶樓)와 객관 남쪽의 죽루(竹樓)가, 전라도 순창군에도 객관 남쪽의 관정루(觀政樓)와 객관 후원의 북루(北樓)가 있었다.
다음으로 읍치 누정의 조성 과정을 알아보자. 대체로 볼 때 읍치 누정의 영건(營建)은 먼저 고을 수령이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지고 정사(政事)가 안정된 때를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아전에게 의견을 듣고 고을 백성의 여론을 살펴 누정의 신설이나 중건, 중수 등의 시행 여부를 판단하였다. 경기도 이천도호부 애련정에 보이는 ‘고을을 다스린 지 2년 만에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다스려져서, 백성들이 그 생업을 편안히 하였고, 마침 그 해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는 기록, 충청도 황간현의 가학루(駕鶴樓)에 보이는 ‘아전과 백성들과 의논하여 공인과 역군을 모아서 객관을 중수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여 기유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이듬해 7월에 완성했다. 먼저 정청을 세우고 다음으로 익실을 지었으며 익실 동남쪽에는 옛터대로 누(樓) 세 칸을 일으키고 인하여 가학(駕鶴)이라고 현판을 달았다.’는 기록, 경상도 안동도호부의 영호루(映湖樓)에 보이는 ‘이에 아전과 백성들에게 논의하여 이 누를 고치기로 하였다.’는 기록 등에서 이점이 확인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백성이란 고을의 부로(父老) 곧 백성들이 따르는 원로들을 가리킨다.
누정 터를 다듬고 실제로 건물을 세우는 등의 공역(工役)은 누가 담당하였을까? 이러한 토목 공사에는 사찰의 중과 일 없는 백성을 동원했고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경상도 의성현의 문소루(聞韶樓) 기문에는 ‘역사(役事)를 한 사람은 백성이 아니면 중들이었는데, 모두 품삯을 주어서 노고를 보상했다.’고 나온다. 이 밖에도 경상도 안동도호부 관풍루(觀風樓)의 경우 ‘이 고을에도 반드시 중으로서 기와를 잘 굽는 자, 나무를 잘 다루는 자, 먹줄을 잡아 길고 짧음을 잘 잴 줄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전라도 함평현 관정루(觀政樓)의 경우 ‘일이 없는 중들을 모아 재목을 벌채하고 기와를 굽고’ 등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누정의 규모와 형태, 구조 등은 주변 고을의 기존 누정들을 참고하여 결정했던 것으로 확인된다.8)
읍치 누정의 건립에 소요되는 재목은 주변의 산지에서 장만하기도 했지만, 주목되는 것은 가능하면 기존의 낙후된 관아 건물 자재를 이용하고자 하였고 폐사찰(廢寺刹) 재목을 재활용한 경우도 종종 확인된다는 점이다. 경상도 밀양도호부의 영남루(嶺南樓)는 폐사찰이었던 옛 영남사(嶺南寺)의 누각 터와 이름과 자재를 모두 그대로 가져와 고쳐 세운 대표적 사례로, 절 이름을 그대로 누정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성주목의 임풍루(臨風樓)와 남정(南亭)의 경우에도 재목은 폐사(廢寺)에서 가져와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향사당(鄕射堂)은 곧 용흥폐사(龍興廢寺)이다.’라는 내용도 보인다. 전라도 창평현 용담대의 경우에도 ‘옛 승사(僧寺)가 있었던 곳이다.’라고 되어 있다.
읍치 누정의 건립은 안전사고의 우려가 있는 토목 공사였던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은 건물의 안전한 설계와 공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장인(匠人) 즉 공장(工匠)을 두는 일이었다. 공장은 사찰의 중이나 연륜이 깊은 관노(官奴) 중에서 뽑았다는 기록이 있고, 작은 규모의 누정인 경우에는 아전들이 돌아가며 맡았던 것으로도 확인된다. 여기서 불가의 중이 읍치 누정 건립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평소에도 사찰의 중건이나 중수 등 건축이나 단청 작업에 익숙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불교 국가였던 고려왕조에서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나타난 유가(儒家)와 불가(佛家) 간의 재편된 위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읍치 누정을 세우는 일은 고을 수준에서 수령의 권한만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도(道)의 관찰사 더 나아가 중앙 조정에까지 보고해야 했던 일일까?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읍치의 관아 건물의 보수나 건립 문제는 고을 형편에 따라 시행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수령에게 맡겨졌던 일로 보인다. 이보다 큰 사업인 읍치 이설(移設)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고을 자체적으로 재정을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부족할 때에는 조정에서 일부 자금을 해당 고을에 빌려주고 차후 돌려받는 방식을 취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전종한, 2024, 724).
하지만 읍치 누정 건립과 관련해 도 관찰사, 나아가 중앙 조정에 보고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재정이나 물자를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고을 수령에 따라 그것을 ‘백성을 부리는’ 중요한 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충청도 황간현의 가학루에 보이는 ‘백성을 부리는 데도 법금(法禁)이 있으므로 기유년 가을에 기회를 얻어 감사 이명덕에게 보고하였다.’라는 기록, 음죽현 죽남루에 보이는 ‘조정에 청하여 놀고 있는 사람을 역사시켜 공해 동편에다 누각 몇 칸을 일으켰는데’라는 기록 등에서 그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民爲貴], 사직이 그다음이며[社稷次之], 군주는 가볍다[君爲輕].’, ‘백성을 잃는 것은 천하를 잃는 것이고[失其民者失天下], 천하를 잃는 것은 그 나라를 잃는 것이다[失天下者失其國].’9) 같은 유교적 명구들이 보여주듯이, 조선왕조는 백성을 정치의 근본으로 여기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을 기본 통치 이념으로 추구하였고, 이는 읍치 누정의 입지와 조성 과정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읍치 누정의 주요 경관 요소와 의미 세계
1) 누정 명칭에 담긴 의미들
읍치 누정의 명칭만큼 건립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목적, 그리고 그 지향(志向)을 농축해 담은 경관 요소도 드물다. ‘한 고을의 빼어난 경치는 누정에 모이고, 한 누정의 빼어난 경치는 사람의 마음에 모인다.’10)라든가, ‘누정이 비어 있어야만 일만 가지 경치를 용납하는 것처럼, 마음이 비어 있으면 여러 가지 선(善)한 것들을 능히 용납할 수가 있다.’11)와 같은 문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전국의 누정 기문들에서 종종 공유되는 것인데, 자연적 요소를 인문적인 것으로 전화시키는 장소로서 누정의 장소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결국 풍(風)・월(月)・운(雲)・연(蓮) 등 자연적 명칭조차, 자연을 빗댄 표현일 뿐 실재는 정치・사회・문화・학문적 담론이 응축된 경관 요소였다.
평안도 평양부의 풍월루(風月樓)라는 명칭을 예시로 들어보자. 한자 뜻으로만 접근할 경우 풍월루는 일견 바람[風]과 달[月]을 즐기는 데에 의미를 두었던 누정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색(李穡)이 지은 기문에 의하면 풍월(風月)의 의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에 의하면, 어디서 오는지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 그리고 자취를 남기지 않는 달, 이 두 요소는 끝을 알 수 없는 도(道)의 세계와 유교적 치세관을 보여주는 증거로 쓰였고, 인륜이 무너지거나 세상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았을 때에는 풍월에 변고가 생긴다고 이해되었다. 따라서 도의 세계가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는지의 여부는 그 증거인 풍월을 살피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였고, 이런 의도에서 누정 명칭을 풍월루라 지은 것이었다.
경기도 이천도호부의 애련정(愛蓮亭)은 군자를 연꽃에 비유한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을 인용해 누정 옆에 연못을 조성하고 명명한 누정이고, 수원도호부의 운금루(雲錦樓)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연못을 조성하고 그곳의 연꽃을 ‘구름과 비단’으로 은유하여 군자의 품격과 고결함에 비유하고자 명명한 누정이다. 양자는 공히 군자라는 유학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담론을 연꽃에 비유하며 누정 명칭에 담아낸 경우로서, 오늘의 우리에게는 ‘모든 못이 늘 연못’으로 통용되고 있을 만큼 한때 심오했던 담론이 이제는 평범한 일상적 표현이 되어 버린 예이다.
충청도 청풍군의 한벽루(寒碧樓)는 이 고을의 이름인 청풍(淸風)과 짝을 이루도록 명명한 것인데 차고 맑은 강물[寒]과 짙푸른 산지[碧]의 고장에서 맑은 기풍[淸風]이 일어나길 바라는 소망이, 단양군의 이요루(二樂樓)는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는 한자성어를 따라 어짊과 지혜로움이라는 두 가지 가치 지향이 각기 담겨 있다.
경상도 영천군의 명원루(明遠樓)는 밝게[明] 판단하는 재주와 원대한[遠] 정치 이상을 가지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지방관을, 안동대도호부의 관풍루(觀風樓)는 백성들의 풍속[風]을 세심하게 살펴서[觀] 공의로운 정치를 구현하는 지방관의 모습을, 예천군의 쾌빈루(快賓樓)는 손님으로 하여금 막히고 답답한 것을 통쾌하게[快] 풀어내게 함으로써 업무와 휴식을 조절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하던 바를, 밀양도호부의 덕민정(德民亭)은 백성들을 덕으로 대함으로써 덕에 감복하도록 정치를 펼치겠다는 통치 철학을 각각 담고 있다.
전라도 전주부의 매월정(梅月亭)은 매화와 달처럼 청신(淸新)하고 맑으며 담담한 삶의 모습을, 고부군의 민락정(民樂亭)은 백성이 즐거워하는 정치를 향한 바람을, 나주목의 무이루(撫夷樓)는 오랑캐가 우리나라 해안 지역을 침탈하지 않도록 잘 달래고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광산현의 희경루(喜慶樓)는 읍격이 강등되었다가 임금의 명으로 특별히 옛 칭호로 회복된 경사에 대한 지역민의 기쁨을 각각 담은 명칭들이다.
경상도 안음현의 광풍루(光風樓)는 이곳에 현감으로 왔던 정여창이 이전의 선화루(宣化樓)를 개칭한 이름으로 여기서 광풍이란 ‘비가 그친 뒤에 부는 맑고 화창한 바람’으로 직역되지만, 실재적으로는 군자의 청정무구하고도 고결한 인격을 의미한다(그림 3). 그래서 광풍이라는 명칭은 종종 제월(霽月) 즉 ‘비가 그친 뒤에 뜨는 맑고 밝은 달’[실재적 의미는 ‘군자의 맑고 청고한 인격’]과 짝을 이루며 인접한 시설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안음현의 경우에도 관풍루 옆에 제월당(霽月堂)을 지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원주목의 숭화정(崇化亭)은 백성을 다스리는 정사의 근본이 형벌과 법률에 있기보다는 교화(敎化)에 있다는 사상을 담은 명칭이고, 함경도 함흥부의 문소루(聞韶樓)는 태조 이성계의 선대(先代)가 살았던 함흥 지역을 순 임금의 음악[韶]과 같은 아름다운 예약으로 찬양한다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삼남(三南) 지방일수록 누정 명칭은 정치, 사회, 학문, 문화적 함축성이 큰 경향이 있고, 강원도와 평안도의 경우는 각각 당대 한반도 최고의 경승지(景勝地)12) 및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의 경유지였던 지역적 성격을 반영하여 상대적으로 빼어난 자연환경 요소가 부각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와 비교해 전라도 나주목의 무이루(撫夷樓)나 경상도 동래부의 정원루(靖遠樓)처럼 서남해 연안이나 북부의 변방 지역에서는 외적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명칭에 담은 사례가 종종 확인되는데 이 역시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평안도 강계도호부에는 변방 지역의 고을이면서도 인풍루(仁風樓)라는 유교적 명칭의 누정이 보인다(그림 4). 정문형(鄭文烱)의 기문에는 당시 변방 지역의 읍치 누정이 일반적으로 국방(國防)이나 병사(兵事)와 관련된 의미를 담아 명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계도호부의 경우 누정 명칭을 인풍루(仁風樓)로 지은 것은 어짊[仁]이라는 것이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이고 백성을 어질게 대해야만 사졸(士卒)들도 즐겨 따르기 때문이라 하면서 ‘인자(仁者)는 대적할 만한 이가 없다.’는 맹자의 구절을 적용하여 지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14)
이상의 지역별 사례로부터 읍치 누정의 명칭과 관련해 대략 세 가지 함의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전국적으로 조선 전기 읍치 누정의 명칭에는 그 시대와 사회를 지배하던 담론의 세계가 응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민본주의에 기초한 덕치(德治) 사상, 유가적 인간상인 군자로서의 심신 수양, 임금에 대한 존숭(尊崇) 의식, 기타 지역 정체성이나 문화적 상징 등이 그것이다. 둘째, 강원도와 평안도, 변방 지역 등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읍치 누정의 명칭에는 타지역에 비해 빼어난 자연환경, 중국과 통하는 사신로, 국방상의 요충지 등등 지역별 특성이 어느정도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셋째, 평안도 강계도호부의 사례는 변방이라는 지역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仁)과 같은 유교적 이념은 누정 명칭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던 의미 세계였음을 보여준다.
2) 연출된 차경(借景)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인간 삶의 모습들
일반적으로 누정의 건축 구조가 사방으로 트여 있는 것은 주변의 환경을 누정에서 살피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학계에서는 소위 차경(借景)이라는 용어를 동원하기도 하는데, 차경이란 외부 자연의 일부를 끌어들여 한 폭의 경(景)으로 빌려 오는 행위로 정의된다. 차경은 중국의 명나라 말기(1600년대) 계성(計成, 1579-1640)이라는 인물이 쓴 《원야(園冶)》(1634)15)에 나오는 개념으로 그 뒤 근대 이후의 일본에서도 이 개념을 재해석하거나 재유형화를 시도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학자들은 소쇄원과 같은 전통 정원을 설명할 때 종종 동원한다.
그런데 《원야》에 나타난 계성의 차경 개념은 대단히 인공적으로 연출된 성격의 경관 조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외부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끌어들이는 것이기보다는 인위적 경관 보기, 어떤 면에서 일종의 ‘조경(造景)’에 훨씬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계성은 차경의 유형으로 원차(遠借, 멀리서 끌어들임), 인차(隣借, 가까이에서 끌어들임), 앙차(仰借, 위에서 끌어들임), 부차(俯借, 아래에서 끌어들임), 응시이차(應時而借, 시간에 따라 끌어들임)의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모든 유형의 궁극적 목적은 임원(林園) 즉 ‘인위적으로 정교하게 산림정원을 조성’하는 데에 있었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차경 행위가 기본적으로 ‘자연 경관을 들이는 것’이고 그래서 차경 개념도 자연 경관에 관한 것임을 강조하려 들기도 하지만, 《원야》의 권1 〈원설(園說)〉에 명시된 바 ‘비록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만 마치 하늘이 만든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다.’[雖由人作 宛自天開]는 계성의 주장은 차경이 기본적으로 인위적인 것이었음을 증거한다. 영어권의 번역본 제목인 『The Craft of Gardens』(1988)16) 역시 ‘Craft’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차경 개념이 본질적으로 인위적 성격의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이상에서 차경 개념을 살펴본 이유는 조선의 읍치 누정에서 조망한 풍광이 계성의 차경 개념과 본질적으로 달랐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읍치 누정에서 조망하려 했던 풍광은 보는 각도를 조정하거나 시선 방향을 특정해야만 시야에 담을 수 있는 그런 연출된 성격의 경관이 아니었다. 이천의 애련정이나 강릉의 운금루 등등의 다수 누정들에서 인위적으로 연못과 섬, 숲 등을 조성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누정 안에서의 고정된 틀을 통한 차경 행위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유가적, 정치적, 문화적인 의미들을 누정에 오르기 전이나 누정에 올라서 또는 누정 밖에서 일상적으로 잊지 않고 다짐하기 위함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전국의 상당수 읍치 누정들의 기문(記文)과 시문(詩文)을 수록하고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해당 읍치 누정에서 조망하던 풍광이 어떤 것이었는지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특히 기문은 누정의 위치와 조성 과정, 누정에서 바라본 풍경, 누정 영건을 통해 의도했던 것들, 그리고 누정을 처음 조성한 사람이나 중수 및 중건에 기여한 사람, 누정을 오르내리며 누렸던 인물들 등등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누정 영건자들은 그 시대의 주요 인사나 높은 위치의 지인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문의 지은이가 해당 누정의 지명도나 권위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기문을 유력 인사에게 의뢰하기 위해 누정 영건자는 누정 조성의 전말(顚末)과 이를 통해 의도하던 바를 서찰을 통해 기문 작성자에게 보내거나 현장에 초청하여 소상하게 안내해야만 했다. 그 결과 전국의 주요 읍치 누정들에는 기문이 있게 된 것이고, 이를 통해 누정의 명칭이 의도했던 바나 해당 누정이 차지했던 풍광, 향유하고자 했던 경관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었는지 오늘의 우리에게 자세히 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 경상도 밀양도호부의 수산현에 있던 덕민정(德民亭)의 풍경에 관한 기문 내용을 살펴보자. 아래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권람(權擥)의 기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 고을의 ❶경치가 모두 다 이 누정에 들어와 있다. 이 누정의 남쪽은 먼 봉우리가 하늘에 떠 있고 새파란 빛이 하늘에 비껴 있어 먼 곳은 옅고 가까운 곳은 짙은 것이 함께 이 누정에 모인다. 긴 강이 연이어 뻗어 있고, 평형한 모래밭은 눈을 깔은 듯하며, 연기는 먼 물가에 가라앉고, 달은 긴 섬에 찼으며, 장삿배의 돛은 바람을 가득히 안고 고깃배는 그물을 걷으며, 그 동쪽은 넓은 들이 갈아놓은 듯 평평하여 멀리 바라보아도 끝이 없고, 밭두둑에서는 ❷농부가 노래하고 둑에서는 목동이 피리를 불며, 외로운 마을에는 늙은 나무가 있고, ❸땅거미가 질 때에는 연기가 비끼며, 그 북쪽은 백 이랑이나 되는 못이 있는데, 물결 위에는 연꽃이 피어서 우뚝한 푸른 일산이요, 윤기 있는 붉은 옷엔 바람이 비껴 불고 비가 윤기 있게 내려 적시고, 물가의 난초와 기슭의 향풀은 이슬을 띠고 연기를 머금었으며,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날아 모이고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헤엄치며, 못 가운데에 섬이 있어 푸른 대나무가 길쭉길쭉 아름답게 무성하여, 바람을 맞으면 구슬을 비비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달빛을 띠면 금가루를 키질하는 것 같으니, ❹이것이 또한 이 누정에서 보이는 훌륭한 경치이다.17)
위에 표시한 ❶과 ❹는 이 누정의 향유자가 바라보며 누렸던 경관 요소가 얼마나 다양했는지 알려준다. ❶에서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모두 다’였다. 위 인용문의 밑줄 친 부분들은 그중 일부만이라도 식별하기 위해 연구자가 임의로 표시한 것이다. 하늘의 달과 멀리 있는 봉우리로부터 가까운 물가의 새와 물고기, 난초와 향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강줄기와 모래밭과 들판과 안개와 연기와 장삿배와 고깃배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것을 향유자가 바라보며 음미했음을 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❷이다. 향유자가 누리고자 했던 풍광의 종류에는 자연환경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습도 포함되었다는 점, 그리고 감각적인 면에서는 시각적인 요소에 국한되지 않고 노랫소리나 피리 소리와 같은 청각적인 요소, 옷깃에 비껴부는 바람과 같은 촉각적인 요소까지도 포함하였다는 사실이다. 기문 속 농부와 목동은 다중(多衆)을 이뤘던 백성을 상징한다. 실제로 그들이 노래하거나 피리를 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태평한 시대의 한적함과 평화로움을 바라는 상징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경관, 이 역시 향유자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였음을 보여준다. 대낮을 지나 저녁이 되면서 들판은 낮에 없던 연기와 이슬이 내려앉은 풍경으로 변하고, 하늘의 달은 그냥 달이 아닌 달빛으로 변하여 금가루를 키질하는 것 같이 되었다고 향유자는 표현하였다. 같은 자연이라도 하루에도 시시때때로 변화하고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풍광, 이 역시 덕민정을 통해 조망하던 중요한 풍광이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읍치 누정에서 조망하고자 한 풍광은 ‘인위적으로 의도된 차경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것은 누정 밖에서, 누정 계단을 오르면서, 누정 위의 난간을 거닐면서, 때로는 누정 안의 자리에 앉아서,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감상하고 음미하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었다. 읍치 누정의 향유자들은 누정의 네 기둥을 결코 고정된 액자 틀처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기둥을 붙들거나, 기둥에 의지하고, 기둥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다채로운 자연의 모습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얻는 감흥에 심취하고자 하였다.
불행히도 덕민정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덕민정의 옛 기문을 통해 우리는 덕민정에서 조망하던 풍광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 5는 위의 덕민정 기문 내용을 생성형 인공지능에 제공하여 재현한 이미지이다.
앞에서 다룬 바와 같이 누정의 명칭은 의미 세계로 충만한 요소이다. 이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덕민정의 향유자는 자연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종국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어찌 다만 승지(勝地)를 유람하는데 그치랴.’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 이야기의 요체는 ‘고을 수령이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백성은 고을 수령의 덕에 감복하였다.’는 것이었다.18) 결국 덕민정에 대한 위의 기문 내용을 통해 그가 의도했던 것은 ‘순리대로 돌아가는 자연과 태평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이 누정에 올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조선 전기의 읍치 누정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하나의 총체로 조망하고 음미하는 장소로 기능하면서, 그곳에서 자연환경과 정치・학문적 담론과 사회・문화적 의미의 세계를 수렴시킴으로써 하나의 문화경관을 창출하고 이끌었음을 의미한다.
5. 맺음말
본 연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 「사정」, 「고적」 조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 읍치(邑治) 누정(樓亭)의 형성과 그 문화경관적 성격을 탐구하였다. 조선의 누정 문화와 누정 경관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양식이 조선의 지형・제도・유교적 담론・사회적 풍습과 결합해 변용(變容)된 지역화(地域化)의 산물이었다고 이해하였다. 조선시대 지방의 읍치는 단순한 행정 중심지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 의례가 교차하는 복합적 공간이었으며, 그곳에 관(官)의 주도로 세워진 읍치 누정은 지방관의 귀빈 맞이와 유교적 수양, 그리고 백성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던 현장이었다. 읍치 누정은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휴식의 장이면서도 다양한 자연환경 및 인문적 요소들을 매개로 미학과 문학, 학문과 정치, 그리고 사회적 담론을 전개한 장소였다.
이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는 첫째, 동아시아적 맥락에서의 누정 문화의 보편성과 한반도에서의 지역적 변용을 전제로 조선 전기 읍치 누정 영건의 정치・사회적 환경과 입지적 환경을 살폈고, 둘째, 누정 명칭에 담긴 상징과 의미 세계를 해석하였으며, 셋째, 누정에서 조망한 풍광의 내용와 주요 경관 요소을 검토함으로써 조선 전기 읍치 누정의 문화경관적 성격을 이해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조선의 읍치 누정은 공적 기능을 지닌 국가적 장소로서 왕명을 받들어 지방을 다스리던 수령에게 왕인과 사신, 귀빈을 접대하던 의례의 현장(現場)이었으며, 유교 사상과 민본주의에 기초해 심신을 수양하고 백성과의 교감을 새롭게 하는 장소였다. 누정의 건립과 경영은 귀빈을 접대하고 연회를 베풀기 위한 행위의 일환이면서도, 유교 사상, 민본주의, 군자로서의 심신 수양 등등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정신세계를 구현하려던 정치적, 학문적, 문화적 실천이었다.
입지 측면에서 읍치 누정은 읍치의 상징적 중심점인 객사 중심의 공간 질서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영건 과정은 백성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고 항상 고을 향리와 협의하고 종종 도 감사나 중앙 조정에 보고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는 읍치 누정이 행정 권력에 의해 주도된 공적(公的) 공간이면서도 공동체적 참여의 장소였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누정 영건에 있어 폐사찰 재목을 재활용하거나 사찰의 중을 장인(匠人)이나 노동력으로 동원한 사례는,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에서 유교와 불교의 재편된 위계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되었다.
누정의 명칭은 순진하게 자연 요소를 담은 것이기보다는 조선 전기의 담론 세계를 응축한 상징 체계였다. ‘덕민정(德民亭)’, ‘관풍루(觀風樓)’, ‘인풍루(仁風樓)’ 등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민본주의와 덕치(德治), 군자의 심신 수양과 백성의 교화 등의 유교적 세계관을 함축한 것이었고, 각 지역의 역사적 기억과 정체성을 내면화한 사례들도 있었다. 이렇게 조선 전기의 읍치 누정은 당대의 정신적 가치와 집단적 기억을 공간적으로 구현한 상징적 기호였다.
한편 읍치 누정에서 조망하던 풍광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차경의 성격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우러진 세계였다. 읍치 누정은 자연을 감상하는 무대이면서도,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의 풍광을 통해 세상과 인간, 그리고 이상적 통치와 군자로서의 인품(人品)과 도(道)를 성찰하던 장소였다. 덕민정의 사례를 통해 살폈듯이 읍치 누정에서 바라본 풍광은 자연환경과 인간 삶의 총체였으며, 물리적 경관과 인간의 감정, 사회적 질서와 정치적 이념이 교차하는 ‘문화경관의 현현(顯現)’이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읍치 누정은 ‘공적 공간으로서의 장소성’, ‘유교적 담론과 문화적 의미의 세계’,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상호감응으로 형성된 문화경관’ 등 여러 층위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읍치 누정은 자연과 인문, 정치와 학문, 풍속과 도덕이 상호 변환되는 ‘의미들의 접점’이었는데, 이는 읍치 누정이 물리적 건축물이나 풍류의 공간을 넘어, 조선의 환대 문화, 통치 이데올로기, 학문과 사상 등이 펼쳐진 상징적 실천의 장이자 당대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담지한 한국적 문화경관이었음을 뜻한다.
오늘날 전국 각 지역에서는 옛 누정을 복원하는 사례들이 많고 여행의 목적지나 적어도 주요 경유지로 현대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 중에 들어 있다. 이에 비해, 최근 지자체 차원에서 옛 읍치(邑治)에 대한 관심과 복원 움직임은 있으나 그곳의 읍치 누정에 대한 인식은 거의 부재하다고 보이고, 일반 누정의 경우에도 토목건축 위주의 인위적 조경, 누정과 연계된 주요 경관적 함의에 대한 인식의 결여 등으로 인해 품격 있는 교양(敎養)과 쉼을 원하는 현대인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고찰한 읍치 누정의 문화경관적 성격은 옛 누정의 현대적 복원 구상뿐만 아니라 이곳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전통적 향유 방식의 이해와 간접 체험, 동아시아적 유산이면서도 상당히 한국적인 문화유산으로의 재인식, 각 지자체의 지역 정체성과 시민 자존감 제고에 기여하는 헤리티지로서의 가치 등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우리에게 함의하는 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