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April 2021. 161-179
https://doi.org/10.22776/kgs.2021.56.2.161

ABSTRACT


MAIN

  • 1. 서론

  • 2. ‘음성’ 지명의 유래와 의미 변화

  •   1) 음성의 지정학적 위치와 행정 연혁

  •   2) 음성 지명의 유래와 의미

  • 3. ‘음성’ 지명의 영역 변화

  •   1) 1906년의 지명 영역 팽창

  •   2) 지명 영역의 확대와 영역 정체성의 변화

1. 서론

동방의 우주관에서 보이는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 그리고 64괘라는 용어 중, ‘양의’는 곧 태극[無極, 太虛]이 낳은 ‘음양(陰陽)’이라는 두 개의 상보(相補)적인 움직임을 가리킨다(『周易傳義大全』). 음양은 서로 교합하고 관계하여 생생(生生)하고 쉼 없이[不息, 不已] 우주를 생성하고 변화시킨다. 그런데 음양은 각각, 그늘져 어두운 것(暗)과 밝은 것[明], 부드러운 것[柔弱]과 딱딱한 것[硬强], 고요한 것[靜]과 움직이는 것[動], 땅[坤]과 하늘[乾], 유순(柔順)한 것과 강건(剛健)한 것, 밤[夜]과 낮[晝], 달[月]과 해[日], 여자(女)와 남자(男), 좋지 않은 것[不善]과 좋은 것[善], 선하지 않은 것[不善]과 선한 것[善], 그른 것[非]과 옳은 것[是], 비정상(非正常)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 미개[야만]와 문명, 그리고 죽음[死]과 삶[生], 지옥과 천국, 무명(無名)과 유명(有名), 이(夷)와 화(華), 궁극적으로는 용(用)과 체(體), 기(氣)와 리(理)로 분화되어 본래 하나[如一]이었던 것이 두 개의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단순히 대상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성질을 언어로 분별하여 표현하던 것이 인간과 사회의 언어적 가치관이 작용하면서 결국 우리는 지금 ‘음적인 것과 양적인 것’, 곧 ‘좋지 않은 것과 좋은 것’, 더 나아가 ‘나쁜 것[惡]과 좋은 것[善]’으로 음양을 이분(二分)하여 각각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음양은 본래 하나의 것으로 음이 극(極)하면 양이 되고, 양이 극하면 음이 되는 상호 순환적인 것이며, 혹은 움직임 속에 고요한 것이 있고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내재되어 있는[動中靜, 靜中動], 그래서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는[陰中陽, 陽中陰] 상보적이고 상생적인 것이다. 한편 음은 언어적 질서와 규칙에 물들지 않은, 현상(現象, phenomena)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인간의 지각으로 포착되지 않는 실재계(the Real)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양은 언어로 구축된 상징계(the Symbolic)의 경험적 유산으로도 볼 수 있다(김순배, 2020, 102-105). 이러한 음이 가진 토대(土臺)적이고 기초적인 성질 때문에 ‘음양’을 말하면서 양보다 먼저 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음양이 가진 자연적이고 존재론적인 의의를 망각한 채 상징계의 가치 판단에 따라 음보다는 양을 중시하고 양을 더 좋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통용하는 ‘명암’, ‘강약’, ‘동정’, ‘건곤’, ‘주야’, ‘일월’, ‘남녀’, ‘시비’, ‘생사’, ‘유무’, ‘화이’, ‘체용’, 그리고 ‘리기’라는 용어의 글자 배치와 같이, 양의 성질을 먼저 말하면서 음의 성질을 양에 종속되어 양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그래서 언젠가는 음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교화(敎化)시켜야 하는 ‘불순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간 인식과 초기의 지명 명명에 있어서도, 단순히 지리적 실체를 기준으로 그 방위와 일조량에 따라 산의 북쪽과 강의 남쪽에는 ‘~陰’ (山陰, 漢陰 등)을,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에는 ‘~陽’ (山陽, 漢陽 등)이라는 후부 지명소(지명 형태소의 줄임말)를 이름 했을 뿐, 음양에 대한 가치 판단은 후대, 특히 일상생활까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보급되던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 영조 43년 때인 1767년에는 중앙정부에 의해, 그곳에서 역모자(逆謀者)와 음란한 부녀자[淫婦]가 발생한 이유를 지명에 쓰인 ‘陰’자에 연루시키면서 ‘安陰(안음)’과 ‘山陰(산음)’이 각각 ‘安義(안의)’(현 경남 함양군 안의면)와 ‘山淸(산청)’(현 경남 산청군)으로 개명되었다.1)

조선 후기 이래 ‘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대된 결과는 2021년 현재 우리나라 기초 및 광역 지방자치단체의 명칭에 반영되어 있다. 즉 남북한을 통틀어 지명소에 ‘陰’자를 쓰고 있는 도․시․군․자치구 단위 행정구역 명칭은 충북 ‘陰城郡(음성군)’이 유일하며, ‘陽’자가 쓰인 이름은 9곳(서울 양천구, 충북 단양군, 충남 청양군, 전남 광양시․담양군, 경북 영양군, 경남 밀양시․함양군, 북한 강원 회양군)이다(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2)

이상의 지명소 ‘陰(음)’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본 논문의 목적은 명칭에 ‘음’자가 쓰인 유일한 지방자치단체인 음성군의 지명 의미와 영역 변화를 언어 및 지리 지명학적으로 분석하여, ‘陰城’(음성) 지명의 본래 의미가 ‘그늘’ 및 ‘어둠’과는 무관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음’과 ‘양’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극복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연구 내용을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적 스케일로 바라보았을 때, 경계 및 접촉 지대에 위치한 음성 지역은 역사 지리적으로 한강-금강-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이자 요충지였으며, 지역 스케일 측면에서 행정 체제 및 구역의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둘째, 음성 지명의 의미와 관련하여, ‘陰’이라는 표기에서 유래한 ‘그늘진 곳’ 혹은 ‘음침한 곳’이라는 부정적인 장소 인식은 훈차 표기된 지명으로 오인한 데서 초래된 것임을 제시하였다. 본래는 지형이 ‘넓은 곳’이나 ‘길게 늘어진 곳’을 의미하는 ‘仍忽’(잉홀, *너홀~*느홀)과 ‘仍斤內’(잉근내, *늣내~*는내)였던 이름이 8세기 중반 경 지명의 음차 표기 과정에서 현재의 ‘陰城’이 되었음을 지명학적으로 실증하였다. 아울러 음성의 별칭인 ‘雪城’(설성)의 ‘雪’(설)이 ‘仍忽’의 또 다른 발음인 ‘*넝홀~*눈홀’에서 훈음차 표기된 지명임을 새롭게 제안하였다. 셋째, 조선시대 이래 ‘조잔하고 궁벽했던’ 음성이 1906년과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릉 및 평야 지형에 위치한 충주군과 음죽군의 두입지를 병합하면서 지명 영역이 크게 확장되어온 과정과 확대된 영역성에 의해 ‘넓고 큰’ ‘너홀’이란 이름을 매개로 새롭고 긍정적인 영역 정체성이 구축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음성 지명의 의미와 영역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 본고는 언어 지명학 분야의 선행 연구들과 『음성군 지리지』(2018)의 연구 성과를 주로 참고하였고, 실내 문헌 조사를 중심으로 현지 조사를 병행하였다.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구(舊) 음성현과 신(新) 음성군을 포함하는 현재의 음성군 행정구역으로 설정하였으며, 시간적 범위는 음성의 고지명인 ‘仍忽’이 문헌에 소개되기 시작한 삼국시대로부터 현재까지이다.

연구 대상인 ‘잉홀’과 ‘음성’, ‘설성’ 지명을 고문헌 및 고지도 등에서 수집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 그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자료들을 주로 이용하였다. 대체로 국가 스케일에서 인식되는 ‘음성’ 지명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관찬 사료들을 주로 참고 하였고, 시대별 지식인 계층의 ‘음성’ 지명에 대한 인식 정도를 살펴보기 위해 일부 개인 문집류 등의 사찬 자료들도 참고하였다. 특히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현대의 자료들에 대해서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연속간행물(신문 자료 및 한국근현대잡지자료) 등을 활용하였으며, 현재 일반 지명 언중들의 ‘음성’ 지명의 인식과 사용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 및 네이버 등의 인터넷 검색 엔진을 확인하였다.

2. ‘음성’ 지명의 유래와 의미 변화

1) 음성의 지정학적 위치와 행정 연혁

‘음성’ 지명의 통합적인 이해를 위하여 음성의 공간[지리]과 시간[역사]의 궤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국가적 스케일로 바라보았을 때, 경계 및 접촉 지대에 위치한 음성 지역은 역사적으로 한강-금강-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이자 요충지였으며, 이러한 역사지리적 요인으로 지역 스케일 측면에서는 행정 체제 및 구역의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음성군이 속한 충청북도(이하 충북)는 지정학적 경계 지대이자 접촉 지대(contact zone)로서의 지리적 위치에 분포하고 있다. 충북은 동-서 방향으로 한강과 금강 유역이 분포하는 한반도 서해안 평야 지역과 동해안 산지 및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고, 동시에 남-북 방향으로 한강 유역과 낙동강 및 영산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이자 요충지에 해당한다(그림 1).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현재 북동-남서 방향과 동-서 방향의 한반도 주요 간선 교통로가 다수 경유하고 있다. 그 결과 충북은 수도권과 영남권, 호남권을 연결하는 편리한 교통망과 수도권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수도권으로부터 분산된 산업 및 공공 시설들이 속속 입지하고 있다(충청북도・국토지리정보원, 2016, 223-224; 음성군, 2018, 112).

그런데 음성군에서는 충북이 지닌 경계 및 접촉 지대로서의 성격과 교통의 길목이자 요충지로서의 지정학적 특성이 그 축소판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요컨대 음성군 지역은 한반도 중남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한남금북정맥이 경유하면서 남한강 유역(단양, 제천, 충주, 괴산, 음성의 동부 지역)과 금강 유역(음성의 서부 지역, 진천, 청주, 보은, 옥천, 영동)의 경계[分水界]를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 상에 자리 잡고 있다(그림 1). 또한 한강 유역의 중심 지역과 낙동강 유역의 영남 지방을 연결해 주던 주요 도로가 음성군 지역을 관통하고 있었으며, 이 옛 길들을 통제하던 다수의 성곽, 성지(城址), 봉수 등의 관방 시설들(수정산성, 석인리 산성, 신천리 토성지, 사향산성, 오대산성, 가막산성, 가섭산 봉수, 망이산성 및 망이산 봉수 등)이 입지하고 있었다(음성군, 2018, 112; 청주대학교박물관, 2002, 130-190).

특히 현재 음성군청이 소재한 음성읍 읍내리는 북~남 방향(장호원~서울), 북서~남동 방향(수안보~미륵원~하늘재․계립령), 북북서~남남동 방향(괴산~연풍~조령・이화령), 그리고 북북동~남남서 방향(청안~청주)의 지질 구조선들이 교차하는 지형학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골짜기와 하천이 자리 잡은 이 지질구조선들을 통해 과거로부터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 그리고 금강 유역의 주요 군사 시설과 취락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위치하였다(그림 1; 정기범, 2004, 20-24).

음성 일대가 구체적인 지명의 형태로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성 백제의 영역이었던 이 일대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한성(漢城) 함락과 개로왕[扶餘慶] 사망(475년, 『삼국사기』권제18-고구려본기 제6-장수왕 63년 9월), 그리고 남한강 상류 유역으로의 진출과 「충주 고구려비」(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280-11)의 건립이 이루어진 5세기 후반 이후로 추정된다. 고구려계 후부 지명소(~忽)를 가진 음성의 고지명 ‘잉홀’과 별칭인 ‘잉근내’ 등도 이 시기를 즈음하여 명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5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왕도인 평양에서 충주로 이어지던 간선 도로와 충주에서 죽령, 계립령[하늘재]으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괴산을 통해 조령과 이화령으로 이어지는 군사 도로가 개설되면서(정기범, 2004, 21-23) 이 교통로들이 경유하고 있는 삼국의 접경지이자 격전장으로서의 음성 지역의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음성군이 가지는 이러한 경계 및 접촉 지대로서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고려 및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嶺南大路)와 그 지선 도로들이 통과하였고, 그 연변에 많은 역원(驛院) 취락(고려시대 광주도 및 조선시대 연원도 소속의 감원역, 용안역, 무극역, 양혜원, 장신원, 우원, 석원 등)과 점(店)으로 불리던 주막촌(당동점, 보천점, 사정리점, 석인동점, 도차치점, 질음치점, 일마곡점, 생동점 등)이 분포하였다(그림 1; 정기범, 2004, 78-110). 현재는 남북 방향으로 중부(1987년 개통) 및 중부내륙고속도로(1997년 개통)와 동서 방향으로 동서(평택제천)고속도로(2008년 개통)가 경유하고 있다. 특히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된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수도권 지역과의 근접성 및 수도권 기능 분산 정책 등이 맞물려 많은 제조업 시설과 혁신 도시 등이 입지하게 되었다(음성군, 2018, 112;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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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음성군의 지형 및 교통로 분포(주1: (좌상)의 위성사진에서 보듯이 군 동쪽의 음성읍, 원남면 일대는 조선시대 음성현 구역으로 산지 지형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군 서쪽의 금왕읍, 맹동면, 삼성면, 대소면 일대는 1906년 이전 충주의 행정구역으로 구릉 및 평야 지형이 분포하고 있음. 주2: (우상)의 지도에는 군의 중앙으로 분수계 역할을 하는 한남금북정맥이 가로지르고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북동쪽으로는 남한강 유역(청미천, 음성천 등)이, 남서쪽으로는 금강 수계(미호천, 초평천 등)가 분포하고 있음. 주3: (좌하)의 지도는 군을 경유하는 조선시대 이래 현재까지의 영남대로와 그 지선 도로 및 옛길을 나타낸 것임. 주4: (우하)의 지도는 2018년 기준, 군을 경유하는 국가적 스케일의 간선 교통망 및 주요 산업단지를 나타낸 것임. 자료: (좌상) 음성군(2018,39); (우상) 음성군(2018,40); (좌하) 정기범(2004,67); (우하) 음성군(2018,104))

현재 음성군의 행정구역은 충청북도 중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오갑산(609m), 수레의산(679m), 부용산(644m), 가섭산(709m)을 중심으로 충주시와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서쪽은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 남쪽은 괴산군과 증평군, 북쪽은 경기도 이천시와 여주군 일부와 인접하고 있다. 2017년 10월 기준 음성군의 행정구역은 2읍(음성읍, 금왕읍), 7면(소이면, 원남면, 맹동면, 대소면, 삼성면, 생극면, 감곡면), 115개의 법정리, 331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음성군의 행정 연혁과 관련하여, 음성 지역은 본래 진한의 영토였으나 그 뒤에 마한 및 한성 백제의 영토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세기 후반,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비로소 ‘잉홀(仍忽)’이라는 지명으로 역사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라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강 하류까지 점령함에 따라 ‘잉홀’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통일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이 지역의 명칭이 ‘음성(陰城)’으로 개명되었다(표 1의 ①). 후삼국시대인 900년, 궁예는 충주와 청주 등지를 공격하였는데, 음성 지역은 이때 궁예의 후고구려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의 음성현조 기록에 의하면 음성은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인데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고 흑양군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에서는 그대로 따르다 이후 감무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표 1의 ②). 이후 고려 성종 때인 995년(성종 14)에는 지방행정 구역이 재편성되어 중원도(中原道) 소속 충주부(忠州府)의 속현이 되었고, 1018년(현종 9)에 양광도(楊廣道) 충주목(忠州牧)에 속하여 후에 감무를 설치하였다. 감무는 현령을 둘 수 없는 작은 현의 감독관을 이르는 것으로, 당시 음성의 열악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1356년(공민왕 5)에는 충청도(忠淸道) 국원경(國原京) 소속 ‘음성현’으로 개편되었다(디지털음성문화대전, http://terms.naver.com).

조선 초기 음성 지역은 고려의 지방제도와 같이 충주목에 속한 네 개의 속현 중 하나였다가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현감을 두었다. 그러나 남쪽을 제외한 사방이 충주로 둘러싸인 작은 현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음성현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7리, 서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17리, 남쪽으로 청안 경계까지 26리, 그리고 북쪽으로 충주 석적산에 이르기까지 19리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호구는 171호에 726명에 불과하였다(표 1의 ③).

한편 임진왜란 당시(1592~1598년) 음성 지역은 앞서 제시한 영남대로와 주요 교통로가 분포하고 있어, 높은 결절성과 접근성으로 인해 왜적에 의해 심하게 유린되었는데, 유성룡의 치계에 의하면 인근 지역과 함께 왜적의 분탕질로 피해가 막심하였다. 결국 음성은 현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어 이웃의 청안현(淸安縣)에 병합되어 폐현되고 말았다(표 1의 ⑤). 그 후 1617년(광해군 10) 현민들의 진정에 따라 복현 되었으나 현재의 음성읍과 원남면 일대에 불과하였다(표 4의 ④). 1662년(현종 3)에는 읍호승강제(邑號昇降制)에 따라 폐현되어 괴산군에 병합되었다가 이듬해인 1663년에 복구되었는데(표 4의 ⑤), 이처럼 음성군의 병합과 복구가 반복된 것은 당시 음성 지역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음성현은 동도면・남면・원서면・근서면 등 4면으로 유지되었다.

표 1.

‘잉홀’ 및 ‘음성’지명의 고문헌 기록

등재 내용 출처 비고
① 黒壤郡 一云黄壤郡, 本髙句麗今勿奴郡, 景徳王改名. 今鎭州. 領縣二. 都西縣, 本髙句麗道西縣,
景徳王改名. 今道安縣.
隂城縣
, 本髙句麗
仍忽縣
, 景徳王改名. 今因之. [흑양군(한편 황양군(黃壤
郡)이라고 쓴다)은 본래 고구려 금물노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진주이
다. 영현은 2개이다. 도서현은 본래 고구려 도서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도안현이다. 음성현은 본래 고구려 잉홀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
로 따른다.]
1145년
『三國史記』
(권35, 雜志,
제4, 地理2,
新羅, 흑양군)
仍忽 [*너홀]
漢山州: 國原城 一云未乙省, 一云託長城. 南川縣 一云南買. 駒城 一云滅烏. 仍斤内郡, 述川郡 一云
省知買. 骨乃斤縣. 楊椇縣 一云去斯斬. 今勿内郡 一云萬弩. 道西縣 一云都盆.
仍忽
. 皆次山郡.
奴音竹縣. 奈兮忽...買忽 一云水城. 唐城郡. 上忽 一云車忽...仍伐奴縣. 齊次巴衣縣, 買召忽縣 一
云彌鄒忽... [한산주. 국원성(미을성라고도 하고 탁장성이라고도 한다). 남천현(남매라고도
한다). 구성(멸오라고도 한다). 잉근내군. 술천군(성지매라고도 한다). 골내근현. 양근현(거
사참이라고도 한다). 금물내군(만노라고도 한다). 도서현(도분이라고도 한다). 잉홀. 개차산
군. 노음죽현. 나혜홀...매홀(수성이라고도 한다). 당성군. 상홀(차홀이라고도 한다)...잉벌노
현. 재차파의현. 매소홀현(미추홀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삼국사기』
(권37, 잡지,
제6, 지리4, 高句麗,
한산주의
주・군・현・성)
陰城縣
本高句麗
仍忽縣
, 新羅景德王, 改今名, 爲黑壤郡領縣. 至高麗, 來屬, 後置監務. [음성현은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흑양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충주목에〉 내속하였다. 뒤에 감무를 두었다.]
1451-1454년
『高麗史』(권56, 志,
권10, 지리1,
양광도,
충주목,
음성현)
陰城縣
: 本高句麗
仍忽縣
, 新羅改今名, 爲黑壤郡領縣。 高麗因之, 屬忠州任內, 後置監務。 本朝
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縣監。 四境, 東距忠州 並梯川七里, 西距忠州 乾川十七里, 南距淸安二十六
里, 北距忠州 石積山十九里。 戶一百七十一, 口七百二十六。 軍丁, 侍衛軍三十三, 船軍四十六。 本
土姓二, 朴、蔡; 亡姓四, 宋、尹、敬、鄭; 續姓三, 崔、李、申。 厥土塉, 風氣寒, 墾田一千九百九十
三結。(水田十分之三强) 土宜五穀, 粟、小豆、菉豆、桑楮。 土貢, 蜂蜜、黃蠟、棗、漆、黃毛、雜
羽、紅花、芝草、紙、山獺皮、狐皮、豹皮。 藥材, 自然銅、人蔘、茯神。 驛二, 坎原、龍安。 烽火
一處,
加葉山
。(南準忠州任內翼安馬山, 北準忠州望伊城。)【태백산사고본】53책 149권 4장 B
면【국편영인본】5책 626면. [음성현: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인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흑양군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라, 충주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치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
병제천에 이르기 7리, 서쪽으로 충주 건천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청안에 이르기 26리, 북쪽
으로 충주 석적산에 이르기 19리이다. 호수가 1백 71호요, 인구가 7백 26명이며, 군정은 시위군
이 33명이요, 선군이 46명이다. 본주의 토성이 2이니, 박ㆍ채요, 망성이 4이니, 송ㆍ윤ㆍ경ㆍ정
이요, 속성이 3이니, 최ㆍ이ㆍ신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 간전이 1천 9백 93결이요,
(논이 10분의 3에 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ㆍ팥ㆍ녹두ㆍ닥나무요, 토공(土貢)은 꿀ㆍ
밀(黃蠟)ㆍ대추ㆍ칠ㆍ족제비털ㆍ잡깃ㆍ잇(紅花)ㆍ지초ㆍ종이ㆍ잘(山獺皮)ㆍ여우가죽ㆍ표범
가죽이요, 약재는 산골(自然銅)ㆍ인삼ㆍ복신이다. 역이 2이니, 감원ㆍ용안이요, 봉화가 1곳이
니, 가섭산이다. (남쪽으로 충주 임내 익안의 마산에, 북쪽으로 충주 망이성에 응한다)]
세종 재위
1418-1450년
『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
149권, 地理志,
忠淸道,
忠州牧,
陰城縣)
④ [음성현(陰城縣): 동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8리이고, 북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25리이고, 남
쪽으로 괴산군 경계까지 18리, 청안현 경계까지 35리이고, 서쪽으로 진천현 경계까지 40리이
고, 서울까지 2백 4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
仍忽縣
)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흑양군의 영현을 만들었다. 고려에서 충주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군명】잉홀(
仍忽
)ㆍ설성(
雪城
)ㆍ잉근내
(
仍斤內
)육익(六翼).]
[『增補文獻備考』(1808년)【연혁】 고종 32(1895)년에 군으로 고쳤다.]
[『大東地志』(1861-1866년)【연혁】선조(宣祖) 25년(1592)에 청안(淸安)으로 예속시켰다가 광
해주 10년(1618)에 복구시켰다.【군명】설성(
雪城
)...【방면】동도(東道) 끝이 5리이다. 남면
(南面)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근서(近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원서(遠西) 서남
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1530년
『新增東國
輿地勝覽』
(제14권, 忠淸道,
陰城縣)
仍斤內 [*너근내]
陰城
......本高句麗
仍忽縣
新羅改名爲黑壤郡領縣 高麗屬忠州後置監務 本朝 太宗十三年 例改爲
縣監 壬辰倭亂後廢屬淸安 戊午因邑民陳疏復設 官員縣監一人訓導一人今廢
1757-1765년
『輿地圖書』
(上, 忠淸道,
陰城, 建置沿革)
⑥ [京畿道...左道...음죽(陰竹): 고구려 때의 노음죽현(奴音竹縣)이니, 신라 때 음죽으로 고쳤
다. 설성(
雪城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5리이다...忠淸道...左道 忠州...음성(
陰城
.): 고구려
때의 잉홀현(
仍忽縣
.)이니, 신라 때 음성으로 고쳤다. 설성(
雪城
.). 잉근내(
仍斤內
.). 선조 임진년
에 혁파했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두었다.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8리이다.]
1776-1806년
『燃藜室記述』
(別集, 권16,
地理典故, 州郡)
李肯翊
(1736-1806)

주1: ‘등재내용’ 항목의 원번호(①)와 굵은 글씨체 및 방점은 필자에 의한 것임.

주2: ‘비고’ 항목 내의 윗별표(*)는 추정된 음가임을 뜻함.

1759년경에 편찬한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4면 19리, 1,828호, 8,502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30년이 지난 기록인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21개 리로 2개 리가 증가되었으나 오히려 인구는 6,951명으로 감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인 1895년(고종 32)에는 지방 관제가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칙령 제98호에 의해 충주부(忠州府) 20개 관할군의 하나인 음성군(陰城郡)이 되었고, 이듬해인 1896년에는 13도제로 개편되면서 충청북도 음성군이 되었다(디지털음성문화대전; 음성군, 2018, 113).

대한제국 시기인 1906년에는 칙령 제49호에 의해 인접한 충주군 서쪽 두입지의 12개면과 음죽군의 남쪽 두입지(斗入地, 犬牙相入地)였던 무극면이 음성군에 편입되어 현재 행정구역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3) 1913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충주군 소속 소파면과 사이포면(이후 소이면), 경기도 음죽군 동면 일부가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에는 도령고시 제29호에 의한 면의 통폐합으로 종래의 17개면이 9개면(군내면, 원남면, 금왕면, 삼성면, 대소면, 생극면, 감곡면, 맹동면, 소이면)이 되었다. 1917년에는 지정면제 등의 실시로 군내면이 음성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 8월에는 음성면이 음성읍으로, 1973년 7월에는 금왕면이 금왕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음성군, 2018, 113-114에서 수정 재인용).

특히 1906년과 1914년의 행정구역 확대로 음성군은 산업 생산의 물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고, 1980년대 후반 이래 교통의 발달과 제조업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여 2017년 12월 31일 기준, 45,069세대(외국인 제외)에 106,053명(남자 57,616명, 여자 48,437명, 외국인 포함)이 거주하고 있다(음성군, 2018, 56-62). 특히 2007년에는 맹동면 일대에 혁신도시 지구가 지정되면서 여러 공공 기관이 이전하여 입지하고 있다(디지털음성문화대전; 음성군, 2018, 133).

2) 음성 지명의 유래와 의미

현재 일반인들에 의해 인식되는 ‘陰城’(음성)이란 지명의 의미는 그 표기에서 유래된 대체로 부정적인 것들이다. 특히 ‘陰’이라는 표기에서 유래한 ‘그늘진 곳’ 혹은 ‘음침한 곳’이라는 부정적인 장소 인식은 훈차 표기된 지명으로 오인한 데서 초래된 것임을 지명학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본 장은 지명에 쓰인 표기 한자(漢字), ‘陰’으로 인하여 부정적인 장소감과 장소 이미지가 연상되는 ‘陰城’이라는 이름이 본래는 지형이 ‘넓은 곳’이나 ‘길게 늘어진 곳’을 의미하는 ‘仍忽’(잉홀, *너홀~*느홀)과 ‘仍斤內’(잉근내, *늣내~*는내)였고, 고지명 ‘잉’홀이 8세기 중반 경 지명의 음차(音借) 표기 과정에서 현재의 ‘陰’城이 되었음을 지명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또한 음성의 별칭인 ‘雪城’(설성)의 ‘눈 雪’이 ‘仍忽’의 또 다른 발음인 [*넝홀~*눈홀]에서 훈음차(訓音借) 표기된 지명임을 제안하였다.

표 2은 음성의 고지명인 ‘仍忽’과 관련하여, 현재 ‘잉’으로 발음하는 ‘仍’이 과거에는 [*너~*느]로 발음했다는 사실(표 2의 ②④⑤)과 함께 부여계 언어에 속하는 고구려계 지명인 ‘忽’이 후부 지명소로 사용되는 경우 대체로 ‘城(성)’의 의미를 가진다는 선행연구 등(표 2의 ③)의 여러 용례들을 제시한 것이다. 이후 ‘仍忽’(잉홀)이란 한자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인 한문(漢文) 문법과 한자(漢字) 의미 및 발음 질서 내에서 통용된다(표 2의 ⑥).

한편 역사적으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년, 백제 개로왕 21년),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성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현재의 충남 공주로 천도하면서 웅진 백제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음성 지역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영역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이 일대를 지칭하던 ‘仍忽’(잉홀) 내지는 ‘仍斤內’(잉근내)라는 고지명은 부여계(扶餘系)의 백제 전기 지명이자 고구려 후기 지명으로 판단된다(표 2의 ③).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통일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이 지역을 지칭하던 명칭이 ‘잉홀현’에서 ‘陰城縣(음성현)’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음성의 전부 지명소 ‘陰(음)’은 ‘잉홀’의 ‘잉(仍)’을 유사 음차(音借) 표기한 것이고, 음성의 후부 지명소 ‘城(성)’은 성(잣 城)을 뜻하는 고구려어로 보이는 ‘잉홀’의 ‘홀(忽)’을 훈차(訓借)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표 2.

‘잉홀’의 발음과 의미 용례

등재 내용 출처 비고
: 젼대로ᄒᆞᆯ
[『新增類合』(1576)]; 지즐 (因) [『杜詩諺解』(1481, 1632)]
*
:
(réng) - 인(因)하다(어떠한 사실로 말미암다), 그대로 따르다, 기대다, 따르다,
좇다. 거듭하다, 슬퍼하다, 거듭, 자주, 누차, 이에, 오히려, 슬퍼하는 모양, 칠대손(七
代孫) [네이버 한자사전]
황금연(2000, 135) *현대 중국어 발음 [réng]
에 비음[ŋ]이 반영된
중국 남방 방언음
[nVŋ]의 특징이 남아
있음
湄縣, 本百濟
利阿縣, 景徳王改名. 今和順縣. [『삼국사기』(권36, 지리3, 신라,
능성군)(1145)]
황금연(2000, 135) 汝: [*너]의 훈음차
仍: [*너]의 음차 표기
별칭: 海濱,汝濱 (현
전남 화순군)
*너벌섬>仍火島>汝矣島
(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김순배, 2012,
128-131)
③ 고구려 후기 지명에서 ‘
(성)’을 뜻하는 이 ‘-忽’은 무려 17회나 중출한다. 그런
데 이와 같은 북방계 지명 어미가 백제 지역의 남단에까지 깊숙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백제어의 성격이 부여계(扶餘系)와 한계(韓系)로 복합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
려 주는 증좌라 하겠다. 그 분포의 실례는 다음과 같다. 伏+忽>寶城, 辟+骨>辟城, 賓+
屈>斌城.
도수희(2003, 284) 仍忽>陰城
芿叱
지,
芿叱
개,
芿叱
달 [『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7)]
芿叱
호인李
芿叱
石 見聞見錄 [『五洲衍文長箋散稿 (東國土俗字辨證說)』(李圭景,
1788-1863)]
황금연(2000, 136) 仍ㆍ芿 [*nV-]
[*너-], [*느-](오창명, 2016)
⑤ 잉화달(
火達) <충남 청양 정산 德城> →
븐달...
븐달[공공리, 잉화달]...공공리
(孔孔里) <충남 청양 정산 덕성> → 너븐달.
재(
仍邑
岾) <경기 포천 산천> →
고개...
재 [광(
)현, 광(
)티] <경북 울진 서면
쌍전>
잉을항소(
仍乙
項所) →
목...
목[
項洞,
牧,
仍乙
項所] <경북 문경 마성 외어>
잉포(
浦) <경남 울주 두서 인보> → 인보리...인보리(仁甫리) [仁甫, 仍甫, 仍浦]...

[마을] <경남 울주 두서 인보> 인보리에 있는 마을...인보장(仁甫場) [
부장, 두서장]
<경남 울주 두서 인보>
잉도(
島) →
도 <전남 진도 군내 둔전>
잉동(
洞) <충남 아산 신창 행목> →
골...
-골 [광곡, 인골, 잉동]...칠목 동쪽에 있는
골이 넓은 마을
...
-골 <충남 아산 신창 행목> →
골...광곡(
谷)마을 →

벌 <정북 고창 심원 만돌> →
벌...
-벌 [
벌]...정동 서쪽
넓은 벌
옆에 있는 마을
『韓國地名總覽』
(1966-1986); 황금
연(2000, 137-142);
김순배(2012,
127-133)
仍ㆍ芿: *너~넙, *느~늘
仍(잉)-: 하나의 한자
지명소
仁(인)-: 한자 지명소 ‘잉-’
을 기저로한 변이형
德(덕)-: ‘잉’에 대응되어,
‘넓다’, ‘크다’의 의미
를 가짐(황금연, 2000,
140, 152)
仍>芿: 17세기 이후 발생
仍과 乃는 터쓰임
⑥ 其人
仍忽
不見。[그 사람이
이에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詳錄顚末而
仍忽忽
不樂於在世。[자세히 일의 전말을 기록하고는
인하여 갑자기
세상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大東野乘』[松都記異
(李贊成德泂撰)]
『宋子大全』 (권197,
墓表, 贈義禁府都
事洪君墓表)
李德泂(1566-1645)
宋時烈(1607-1689)

주1: ‘등재내용’ 항목의 원번호(①)와 굵은 글씨체 및 방점은 필자에 의한 것임.

주2: a>b (지명 a에서 지명 b로의 통시적 변화), a→b (지명 a에서 지명 b로의 공시적 변화)

주3: ‘비고’ 항목 내의 윗별표(*)는 추정된 음가임을 뜻함.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지명 분석을 국어 지명학계의 음운론적, 의미론적, 형태론적 선행 연구들과 필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표 3와 같다. 먼저 고지명 ‘仍忽’에 대한 음운론적 분석 결과 ‘仍’의 상고음은 현재와 같이 ‘잉’이 아니라 [*너~*느]로 추독되며(표 3의 ①⑥), ‘忽’은 현재의 발음과 유사한 [*홀]로 추정된다(표 3의 ④). ‘仍忽’의 의미론적 분석과 관련하여 선행연구들의 여러 견해가 있으나(표 3의 ⑤), 필자는 지명의 발음을 [*너홀~*느홀]로 재구한 표 3의 ⑥에 따라 ‘넓은 성’, ‘큰 성’, 그리고 ‘늘어진 모양의 성’에 주목하였다.

표 3.

‘잉홀’의 한자음과 표기의 변화

지명
형태소
고구려․백제전기․신라초기 한자음과 표기 신라 중․후기 한자음과 표기
(중국 남방 방언음 영향)
비고
① *나~내~너~느 [nV~] : 仍․乃 (음차 표기) **인~잉 [in/iŋ] : ***陰(음) [/media/sites/geo/2021-056-02/N013560203/images/geo_56_02_03_T1.jpg․ən(T)/
․i əm(Ch)/․ˀɨm(東)] (음차)
仍忽 > 陰城 (음차+훈차)
*양주동(1965,782-783); 도수희(1977,42-43,50);
박병채(1990,1990,197); 천소영(1990,108);
송하진(1993,105); 황금연(1999,148-150,
157-158); 안병섭(2015,192), 장충덕(2019,
4-8에서 재인용)
**최남희(1996,273-275); 장충덕(2019,9-10
에서 재인용)
***․․ 음(1527 字會), 그늘 음(1574
類合),  음(1575 千字) (도수희,
2003, 521)
***T(董同龢), Ch(周法高), K(B. Karlgren),
東(東國正韻,1448); 상고음(3세기 말
이전), 중고음(3세기 초~13세기 말)
② *넝 [nVŋ] : **雪[訓音 *nVn]?
(훈음차 표기)
*넝~능 > *는 > *눈 > 雪? (훈음차)
仍忽 > 雪城? (훈음차+훈차) > 雪山
*최남희(1996,295); 장충덕(2019,6-10
에서 재인용)
*仍 [réng, 러-엉] (네이버 중국어사전)
**“[:눈](雪) 하 벼리
 디니이다:
天星散落如
(1445 龍歌50章); 눈 셜
(訓蒙; 類合)”(남광우 편저, 2019,313)
; “雪 H셜, 눈 H셜<자회上:1b/2b>, 눈
셜<유합上:4a>”(권인한,2009,220)
; “[눈:] 현대국어 ‘
’은 15세기 문헌에
서부터 나타나 현재까지 이어진다”
(네이버 국어사전)
仍斤內 ③ *늣내~는내 (길게 늘어진 땅(地,壤),
延長地), 늣~는 : 仍斤內 (음차+음차
+음차)
**너내~느내 (넓은 내(川), 큰 내(川)) :
仍斤內 (음차+음차+음차)
仍斤內 > 仍忽? (는(仍斤) + (內,땅):
홀(城地) > 忽)
陰城 (음차+훈차) *신태현(1958,44); 강헌규,2003,11);
양주동(1965,782-783)
**안병섭(2015,185); 장충덕(2019,11-12
에서 재인용)
*느릅나모내 [nerkə̌n-nar] (느릅나모 땅) :
仍斤內 (음차+훈차+음차)
槐壤 (훈차+훈차)(현 충북 괴산군) *유창균(1980,285-286)
*잉걸내 [nər-ki(/kəm/kər)-nai(/nar)] (덩어
리~덩이 땅) : 仍斤內 (음차+훈차+음차)
塊(훈차) > 槐 (취형․취음) *강헌규(2003,13-16); 장충덕(2019,11-12
에서 재인용)
④ *홀 [*hol~*kol > *hol, *xur~*hur,
*kəl, *hor, *kur, *hul~*kul~*xul~*hol,
*xul] : 忽 (음차)
忽 > 城 (훈차) *박병채(1968,82); 이기문(1972,33); 유창
균(1980,281-282); 김방한(1983,110-111);
도수희(1985); 천소영(1990,44-47);
김종학(2000,29-30); 장충덕(2019,
7-8에서 재인용)
仍忽 ⑤ *늠ㅅ골 (늘어진 형상의 골?) : 仍忽
(음차+음차)
陰城 (음차+훈차) *양주동(1965,783)
**나리골 (내(川)가 흐르는 골) : 仍忽
(음차+음차)
**도수희(1977); 천소영(1990)
⑥ ***너홀 (넓은 성?, 큰 성?) : 仍忽
(음차+음차)
***느홀 (늘어진 모양의 성?) : 仍忽
(음차+음차)
***황금연(2000,137-154); 장충덕(2019,8)
*奴音竹 ⑦ **奴(노)[no(K)/nuo(Ch)/noø(東)]
***音(음) [․󰐅əm(Ch)/․ˀɨm(東)]
****竹(듁) [t/media/sites/geo/2021-056-02/N013560203/images/geo_56_02_03_T1.jpgok(T)/t͎iuk(Ch)/․tyuk(東)]
*노음~*놈 [nVm] : 奴音 (음차+음차)
*놈 > *늠 > *음 > 陰 (음차)
*****奴音竹 > 陰竹 (음차+음차)
(757년)
*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의
옛 음죽 읍내 및 설성산 일대
**도수희(2003,502)
***소 음(類合; 千字) (도수희,2003,521)
****․대․듁(字會), 대 듁(類合) (도수희,2003,
510)
*****신라 경덕왕 16년 당시, 부정적 의
미를 가진 奴자를 고의로 탈락시켜 2
자식 지명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음
⑧ *노음~*놈~*늠 [nVm] : 雪? (음차) *늠 > *눈 > 雪 (훈음차)
奴音竹 > *****雪城山 (훈음차+훈차)
*****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설성
면의 옛 음죽현의 진산 이름

주1: a>b (지명 a에서 지명 b로의 통시적 변화), a→b (지명 a에서 지명 b로의 공시적 변화)

주2: 항목 내의 윗별표(*)와 물음표(?)는 각각 추정된 음가와 의미를 뜻함.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음성현 郡名條)에는 음성의 또 다른 이름으로 ‘仍忽’(잉홀), ‘雪城’(설성)과 함께 ‘仍斤內’(잉근내)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의 협주(挾注)에는 작은 글씨로 ‘六翼’(육익, 『周官六翼』)이 기재되어 있다(표 1의 ④). 이는 고려 후기 김지(金祉)에 의해 편찬된 『주관육익』이란 문헌을 참고하여 음성의 별칭이 ‘잉근내’임을 제시한 것으로, 장충덕(2019, 11)은 이것이 저자의 지역 혼동으로 잘못 기술된 것이며 ‘잉근내’는 음성이 아닌 ‘괴산’의 고지명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고려 후기까지 음성과 괴산 일대의 산간 곡지 지형을 ‘잉근내’로 통칭하여 불렀을 것으로 판단하며, 이 지명이 음성의 별칭임을 전제하여 논지를 전개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외에 1757년 『여지도서』, 1781년 『호서읍지』에도 음성의 별호(別號)로 잉홀(仍忽), 설성(雪城), 잉근내(仍斤內)가 명기되어 있다가, 1861~1866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지지』에는 설성(雪城)만 기재되어 있다(충청북도・국토지리정보원, 2016, 351-352; 음성군, 2018, 114).

음성의 별호인 ‘仍斤內’의 경우, 필자는 선행연구의 여러 의견 중 그 발음은 [*늣내~*는내]로 재구되고, 그 의미는 ‘길게 늘어진 땅’으로 해석한 견해에 주목하였다. 특히 이 지명이 고구려 영토가 된 5세기 후반 이전에는 현재의 음성과 괴산 일대를 지칭하던 한성 백제, 즉 백제 전기의 지명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 고구려에 점령된 5세기 후반 이후, 한성 백제의 지명이었던 ‘仍斤內’가 ‘仍忽’로 공식적으로 개명되었으며, 고구려의 공식 지명으로 ‘仍忽’이 명명되면서 ‘仍斤內’는 이 일대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잔존해 오다가 앞서 언급한 고려 후기, 김지의 『주관육익』에 수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음성의 또 다른 별칭으로 현재에도 지명 언중들에 애용되는 지명이 바로 ‘雪城’(설성)이다.4) 고지명 ‘雪城’에 대한 지명학적 선행연구은 장충덕(2019)에서 간략히 진행되었을 뿐, 활발히 연구되지 않아 필자의 지명 분석에 의존하여 그 본래 발음과 의미를 재구하였다. 필자는 음성의 별칭인 ‘雪城’(설성)의 ‘눈 雪’이 ‘仍忽’의 또 다른 발음인 [*넝홀~*눈홀]에서 [*넝~*눈]을 훈음차(訓音借) 표기한 것으로 제안하였다. 표 3의 ②에 제시한 바와 같이, 최남희(1996, 295)는 ‘仍忽’의 ‘仍’을 [*너~*느]가 아닌 비음 [응, ŋ]이 첨가된 [*넝, *nVŋ]으로 추정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이후 梁(양), 陳(진) 등의 중국 남조(南朝) 국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중국 남방의 방언음이 신라의 한자음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신라 초기에는 상고음 기층의 한자음으로 실현되던 ‘仍’[*너~*느]가 남방 방언 기층의 한자음 ‘仍’[*넝~*잉]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점령한 고구려와 백제 영토의 지명들을 2자식의 한자 지명으로 개정할 때 음이 비슷한 한자인 ‘陰’[*인~*잉]으로 음차 표기한 것으로 판단하였다(장충덕, 2019, 6-10). 그런데 필자는 당시 ‘仍’이 ‘陰’으로 개명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仍’의 발음이 [*넝, *nVŋ]으로 불리었고, 후대로 오면서 ‘*넝~*능 > *는 > *눈’으로 음운 변화되어 결국 ‘雪’[訓音 *눈~*nVn]으로 훈음차 표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雪’자의 훈음(訓音)이 현재와 같은 ‘눈’이었다는 문헌적 근거를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국어 ‘눈’은 15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표 3의 ② 비고). 요컨대 ‘仍忽[*넝홀~*눈홀] > 雪城’로의 지명 변화는 ‘훈음차+훈차 표기’의 과정을 경험한 것이고, 후대에 다시 ‘雪城 > 雪城山・잣고개(尺峙・栢峙・栢峴) > 雪山’으로까지 새로운 지명이 파생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표 3의 ②).5)

한편 음성의 북쪽에 인접하여 위치했던 음죽현(陰竹縣)(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및 설성면 일대)의 별호 및 읍내 뒷산의 이름이 음성의 별칭과 동일한 ‘雪城’(설성) 및 ‘雪城山’(설성산)이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음죽현 郡名條); 표 1의 ⑥].6) 필자는 이에 대해 음죽의 757년 이전의 고지명인 ‘奴音竹(노음죽)’을 분석하여 ‘*놈 > *늠 > *음 > 陰’ (음차 표기)과 ‘奴音竹 > 陰竹’ (음차+음차)(757년), 그리고 ‘*늠 > *눈 > 雪’ (훈음차)와 ‘奴音竹 > 雪城’ (훈음차+훈차)로의 지명 변화 과정을 추정하여 제시하였다(표 3의 ⑦, ⑧). 즉 ‘노음죽’이 ‘음죽’(음차)과 ‘설성’(훈음차)으로 지명 변화되는 과정은 ‘잉홀’이 ‘음성’(음차)과 ‘설성’(훈음차)으로 변화되는 과정과 유사하게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아울러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음성과 음죽이 과거 이른 시기에 동일한 전부 지명소와 별호를 공유한 이유에 대해 ‘지명의 화동성(和同性)’을 제시할 수 있다(지헌영, 2001; 도수희, 2003, 396). 즉 사람 이름에 동일한 돌림자[항렬자]를 사용하듯이, 과거 중앙 및 지방 권력에 의한 행정 편의를 위해 인접한 지방 행정구역 명칭을 동일한 지명소를 부여하는 사례가 ㉠

山(연산, 현 청주시 문의면) :
岐(연기, 현 세종시 연기면) [신라 경덕왕 16년 757년 명명], ㉡
德(회덕, 현 대전시 회덕동) :
仁(회인, 현 보은군 회인면) [고려 태조 23년 940년 명명] 등에서 발견되고 있어 흥미롭다.

그렇다면 음성의 옛 이름인 ‘仍忽’[*너홀~*느홀]과 ‘仍斤內’[*늣내~*는내]가 ‘넓은 성’, ‘큰 성’, ‘늘어진 모양의 성’, 그리고 ‘길게 늘어진 땅’을 의미한다면 구체적으로 이 지명의 명명 유연성(命名 有緣性)은 무엇인가? 즉 이 지역의 어느 지형을 바라보고 ‘仍忽’과 ‘仍斤內’라는 이름을 지었는가에 대한 지리적인 추론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 고지명들이 옛 음성과 괴산 일대에 분포하는 산지 지형을 표현하는 명명 유연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한다(그림 1, 그림 2). 즉 표 3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仍忽’과 ‘仍斤內’라는 고지명은 한남금북정맥이 펼쳐 놓은 높고 넓은 산지 지형과 길게 늘어선 산간 곡지 및 산 능선을 나타내는 산지 지명으로 보인다.

특히 두 고지명의 의미를 ‘늘어진 모양의 성’[*느홀]과 ‘길게 늘어진 땅’[*늣내~*는내]으로 접근했을 때, 주목되는 지점이 바로 현재 음성읍 읍내리에서 한벌리로 넘어가는 고개, 곧 그림 2에 제시된 ‘잣고개’(栢峙, 백치)로 비정되며, 이 위치는 말안장처럼 가섭산과 수정산을 잇는 ‘늘어진 긴’ 능선이 나타나는 곳이다. ‘잣고개’[“잣 셩”(권인한, 2009, 221), ‘잣’은 城(성)을 뜻하는 사라진 古語, 즉 城이 있는 고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한때 현재의 수정산성에서 가섭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에 축성된 산성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이나, 아직 관련 고고학적 유적 및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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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느홀’의 명명대상으로 추정되는 가섭산-망산-잣고개-수정산 능선(주1: (좌상) 1872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가섭산~망산(설산?)~잣고개(백치)~수정산(설성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표시한 것임. 주2: (우상) 현대 위성사진에 가섭산 남록에서 수정산 정상으로 이어져(늘어져) 있는 능선을 점선과 지명으로 표시한 것임. 주3: (좌하) 음성읍 읍내리 한일중학교에서 북동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가섭산~수정산 능선 사진에 지명을 표시함. 주4: (우하) 음성읍 한벌리 한벌2교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찍은 수정산~가섭산 능선 사진에 지명을 표시함. 자료: (좌상) 〈음성현 지도〉《1872년 지방지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우상) 카카오맵(https://map.kakao.com, 2027 02.27. 검색); (좌하) 및 (우하) 필자 촬영 사진(2020.08.27., 2021.02.26.))

다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섭산~수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지점은 북~남 방향(음성~장호원~서울), 북서~남동 방향(음성~충주, 음성~수안보~미륵원~하늘재․계립령), 북북서~남남동 방향(음성~괴산~연풍~조령・이화령), 그리고 북북동~남남서 방향(음성~청안~청주)의 지질구조선들이 교차하는 지형학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과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방증하듯, 잣고개의 약 450m 북서쪽에는 ‘망산’(望山, 망재, 망현, 망재산)이란 지명이 위치한다.7) ‘망산’은 교차하는 여러 골짜기들을 ‘조망’하고 ‘망볼 수’ 있는 감시 초소의 망루(望樓) 위치로 적합하다.

3. ‘음성’ 지명의 영역 변화

1) 1906년의 지명 영역 팽창

대한제국 시기(1906년)로부터 일제강점기 초기(1914년)에 발생한 당시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음성군이 소속된 충북 전체를 시야에 두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894년에 시작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조선 고종 32)에는 기존의 팔도제를 혁파하여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6년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현재의 ‘충청북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고, 23부제 실시 당시 행정단위를 나타내는 후부 지명소가 ‘~군(郡)’으로 통일되어 음성현이 음성군이 되었다. 13도제의 실시로 당시 충북은 18군(단양군, 영춘군, 제천군, 청풍군, 충주군, 괴산군, 연풍군, 청안군, 음성군, 진천군, 청주군, 문의군, 보은군, 회인군, 옥천군, 청산군, 영동군, 황간군)으로 편제되어 충주군에 도청이 위치하였다(그림 3의 좌상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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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음성의 행정구역 변화(1906~2018) (주1: (좌상)의 지도 중 “청천”은 “청산”(현 옥천군 청산면 일대)의 오기(誤記)임. 주2: (위 가운데)의 지도 중 “少多(소다)”와 “東(동)”은 각각 “沙多(사다)”와 “東道(동도)”의 오기임. 주3: (우상)의 지도 중 “석우”지명(현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석우 마을)은 1624년과 1811년에 충주의 서쪽 두입지인 “석우” 이서 지역을 충주에서 음성으로 이속시키려 시도했던 곳임(바탕 지도에 필자가 기입한 것임). 자료: (좌상) 음성군(2018,131); (위 가운데) 음성군(2018,132); (우상) 음성군(2018,133); (좌하) 및 (우하) 필자 촬영(2017.08.01.))

이후 1908년 6월 5일 충주군에 있던 충북 도청이 청주군으로 이전되었고(18군 199면),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실시된 전국 단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10군[단양군(+영춘군), 제천군(+청풍군), 충주군, 괴산군(+연풍군+청안군), 음성군(+충주군 일부), 진천군, 청주군(+문의군), 보은군(+회인군), 옥천군(+청산군), 영동군(+황간군)]과 114면으로 통폐합되었다(김순배, 2013, 35).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발생한 급격한 지방 행정구역 개편은 음성의 지명 영역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이래 1906년 이전까지 산지 지형에 입지하여 겨우 4개의 면(面)으로 구성되어 있던 ‘조잔하고 궁벽했던’ 음성은 1906년과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릉 및 평야 지형에 위치한 충주군과 음죽군의 두입지를 병합하면서 지명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즉 조선시대 음성현은 단지 4개의 면(동도면, 근서면, 원서면, 남면; 현재의 음성읍과 원남면)으로 구성된 아주 작은 소규모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었다(그림 3). 그 후 1906년에 단행된 비입지(飛入地, 越境地) 및 두입지 정리로 옛 음성 면적의 두 배 가량 되는 충주군 및 음죽군의 두입지를 편입하면서 현재 행정구역의 큰 골격을 갖추게 된다.

이 때 편입된 지역은 경기도와 인접한 곳으로 남한강 수계인 청미천과 응천 유역, 그리고 금강 수계인 미호천과 한천 유역에 분포하는 대부분 해발고도가 낮은 구릉 내지는 평야로 이루어진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당시 충주에서 가장 넓은 들이 분포하여 토지 생산성이 높았고 취락과 교통도 상대적으로 발달한 곳이었다. 속칭 ‘노른자위’ 충주 땅을 편입하면서 음성군은 20세기 후반 비약적인 산업 발전의 물적 토대를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림 34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1906년(대한제국 光武 10년) 칙령 제49호에 의해 당시 충주군의 서쪽 두입지에 해당되던 금목면(金目洞面), 법왕면(法王面, 法旺面) (1914년 이후 금왕면), 생동면(省洞面, 笙洞面, 생골면), 대조곡면(大鳥谷面, *한새골면), 사다산면(沙多山面), 소탄면(所呑面) (이후 대소면), 두의곡면(豆衣谷面, 두리실면), 천기음면(川岐音面, 내거름면), 지내면(枝內面, 가래실면) (이후 삼성면), 감미곡면(甘味谷面, 甘味洞面, 개미실면), 거곡면(居谷面, 그일면) (이후 감곡면), 맹동면(孟洞面, 맹골면), 그리고 음죽군의 남쪽 두입지였던 무극면(無極面) (이후 생극면) 등 13개 면이 음성군에 편입되면서 오늘날과 유사한 행정구역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표 4의 ⑦).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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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1906년 음성의 지명 영역 팽창(자료: 『韓末近代法令資料集 Ⅴ』(대한민국 국회도서관, 1971, 172)).

7년 뒤인 1913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충주군 소속의 소파면(蘇坡面, 蘇城面)과 사이포면(沙里浦面, 沙伊浦面) (이후 소이면), 그리고 경기도 음죽군 동면의 노평리 일부, 하율면 팔성리, 석교촌의 일부가 음성군에 편입되어 또 다시 음성의 지명 영역이 확대되었다(표 4의 ⑧). 전국 규모의 행정구역 통폐합이 있었던 1914년에는 도령고시 제29호에 의한 면리(面里)의 통폐합에 따라 면 행정구역의 이름도 음성면과 맹동면을 제외하고는 두 면 이름의 한 글자씩을 취하여 만든 합성 지명(금왕면, 생극면, 대소면, 감곡면, 소이면, 원남면) 내지는 새로운 통합 면 명칭(삼성면)이 부여되었다(음성군, 2018, 131-132에서 수정 재인용).

2) 지명 영역의 확대와 영역 정체성의 변화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음성 지명의 영역 확대는 하나의 영역적 기표(territorial signifier)이자 영역 정체성(territorial identity)을 구성하고 구축하는, 동시에 지명의 지시 및 상징 기능과 대표・통합 기능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물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모든 지명은 배타적으로 통용되는 구체적인 위치와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지명을 통해 해당 지명 영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긴밀한 유대감과 소속감,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는 물리적이고 동시에 인식 수준의 주요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김순배, 2019, 16).

‘잉홀’에서 ‘음성’으로 개명된 757년 이래 음성 지명은 1,25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 일대를 지칭하여 타 지역과 구별해온 오랜 연륜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명 영역이 크게 확장된 1906년 이전까지 옛 음성 지역은 단지 4개의 면으로 구성된 초라하고 궁벽한 곳이었다. 자연 환경 또한 소백산지 및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한남금북정맥이 뻗어 있는 해발고도 500~700m 내외의 산지가 넓게 분포하여 농경지가 부족하였다.

이 같은 열악한 거주 및 생산 환경을 증명하듯 표 4에는 옛 음성현 지역의 산으로 둘러싸인 ‘조잔하고 궁벽한’ 상황이 여러 문헌에 등장하고 있다(표 4의 ①②③⑥). 이러한 열악한 지역 경제 상황은 20세기 초인 1925년까지 이어져, ‘읍은 쇠잔하고 주민은 피폐’하다거나, “충북에서 읍잔민피(邑殘民疲)하기로 유명한 음성군”, 혹은 지역 상황을 ‘빈약하고 비참’ 하다고 표현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표 4의 ⑨⑩). 조선시대 이래로 이 같은 부정적인 지역 인식이 확산되면서 단순히 ‘잉(仍)’을 음차 표기한 글자에 불과한 ‘陰(음)’자에 대해 훈차 표기한 것으로 오해하여, 결국 음성을 ‘그늘진 곳’ 혹은 ‘음침한 곳’으로 오인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열악한 지역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7세기 초반인 1624년 경, 당시 음성현감으로 부임한 김육(潛谷 金堉, 1580~1658)은 가섭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약 5.5km에 위치한 ‘석우’(石隅, 돌모루, 현 충북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석우 마을) 서쪽의 충주목 두입지를 음성현에 이속 및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와 동일한 시도가 순조 11년인 1811년에도 있었으나 거론만 되었을 뿐 실행되지는 못하였다(한글학회, 1970, 458; 표 4의 ⑥; 그림 3의 오른쪽 위 지도).

그런데 석우 마을에서 서쪽으로 요도천을 건너 약 1.4km 지점에는 조선시대 연원도(連原道) 소속의 용안역(龍安驛, 현 충북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 외룡 마을)이 위치하고 있었다. 표 4의 ①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용안역은 조선 전기인 1477년(성종 8년) 이전에는 음성현에 속해 있다가 이 해에 충주목 관할로 바뀌게 된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 후기 충주에 속해 있던 가섭산의 북쪽 및 북동쪽 일대가 조선 전기에는 한때 음성 관할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9) 요컨대 용안역의 소속 군현 변경 사실을 통해 조선 후기의 음성현 행정구역 확대를 위한 기준 지점을 논의하면서 왜 용안역 인근에 위치한 석우 마을이 설정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음지에서 도광양회(韜光養晦)해 오던 음성군은, 21세기에 이르러 비약적인 산업 발전과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대한민국의 교통과 산업 요충지로서의 지명 이미지와 상징성을 강화해 오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음성’의 확대・강화된 지명 영역성(territoriality)을 토대로 하는 ‘새롭고’ ‘독자적인’ 영역 정체성, 즉 ‘자랑스런 음성 사람[陰城人]’의 구축을 기대하고 있다. 동일한 질적 정체성을 지닌 ‘음성 사람’, 그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음성 문화’라는 이름들은 앞으로 그들의 소속감과 문화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화해 주는 상징물이자 매개물로 작동할 수 있다.

한편 과거 외부자들에 의해 ‘그늘지고 음침했던’ 곳, 혹은 ‘쇠잔하고 궁벽했던’ 곳으로 인식되던 ‘陰城’(음성) 지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제 ‘넓고 큰’ ‘너홀’(仍忽)이란 이름을 매개로 새롭고 긍정적인 지명 정체성(toponymic identity)을 구축해 나갈 것이다. 미래 ‘음성 사람들’의 ‘너홀’ 지명에 대한 강한 동일시(identification) 현상은 과거에 퇴적된 ‘음성’의 부정적 인식을 걷어내는 동시에, 선호하고 후원하는, ‘희망찬’ 새 이름을 필요로 하고 있다.

표 4.

‘음성’ 지명의 영역 및 영역 정체성 관련 기록

등재 내용 출처 비고
① 吏曹據忠淸道觀察使梁順石啓本啓: “
陰城縣彫殘莫甚, 其縣屬用安驛, 請移屬忠州。
” 從之。
[이조에서 충청도 관찰사 양순석의 계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
음성현은 조잔하기가 막심

하니, 그 현에 속한 용안역을, 청컨대 충주로 이속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77년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77권,
성종 8년 윤2월 29일
정묘 6번째 기사)
② [음성현(
陰城縣
)...【제영】고목행상인(古木行相引) 서강(徐岡)의 시에, “닭이 울자 관도
(官道)로 향하였는데, 머리를 돌리니 벌써 아침 햇빛이로구나. 고목은 가는 대로 서로 연달
았고,
먼 뫼뿌리는 바라보면 다시 에워쌌네
...백구겸수정(白鷗兼水靜) 서거정(徐居正)의 시
에, “음성(陰城)은 오랜 고을인데, 양지골에는 아침 햇빛이 깨끗하다.
산이 좋으니 병풍이

천 폭이요
, 시내가 맑으니 옥(玉)이 한 둘레로다...『신증』 지벽산장현(地僻山藏縣) 양희
지(楊熙止)의 시에, “
땅이 궁벽하니 산이 고을을 감추었고
, 숲이 그윽하니 새가 사람을 부른
다...]
1530년
『新增東國輿地勝覽』
(제14권, 忠淸道,
陰城縣, 題詠)
陰城本以殘邑
, 近來縣監數遞, 凋弊益甚。 迎送之弊, 吏民數少, 縣將難支。 請依歙谷、禮安
例, 蘇復間, 勿令挈家。[
음성은 본디부터 쇠잔한 고을인데
근래 현감이 빈번이 체직되어
그 피폐됨이 더욱 심합니다. 수령을 맞고 보내는 데 따르는 폐단으로 아전과 백성의 수가
줄어들어 고을을 지탱하기가 어려우니, 흡곡과 예안의 예에 따라서 고을이 회복될 동안은
수령이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소서.]
1541년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94권,
중종 36년 1월 19일
병오 4번째 기사)
④ 義禁府啓曰: “‘逆賊丁忠敏, 旣已正刑,
其所居陰城官
,
降其邑號
罷其守令
、破家瀦澤等事, 依
律文施行何如?’...傳曰: ”允。“ [의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정충민에게 이미 정형을 시행하였
으니, 그가 살던 음성 고을에 대해서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고 집을 헐어내고
못을 만드는 등의 일을 율문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었더니...윤허한
다고 전교하였다.]
1616년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37권,
광해 8년
8월 14일
임자 4번째 기사)
陰城縣殿牌見失
, 監司啓聞, 下禮曹。 回啓: “
請只革其邑, 勿罪其守令
, 以防奸民逐倅之計。”
已有此例故也。 上從之。[음성현에서 전패를 도난당했다고 감사가 계문하였는데,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
그 읍만 혁파하고
수령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 간악한 백성이
계획적으로 수령을 몰아내는 일을 막도록 하소서.”하였는데, 이미 이렇게 처리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이 따랐다.]
1662년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 5권,
현종 3년 2월 4일
무신 1번째 기사)
⑥ 備局, 以前後諸道各都陳弊冊子, 回啓言...
陰城地狹民少
,
忠州 石隅以西
,
移屬本縣事也
。 忠
州 石隅以西, 移屬本縣, 雖有故相金堉未徹之疏, 而割此與彼, 事難遽議。 關問該道, 與兩邑守令,
爛商便否, 而更爲報來以爲稟處。 [비국에서 제도와 각도의 전ㆍ후 진폐 책자를 가지고 회계
하기를...
음성은 지역이 좁고 주민도 적으니 충주의 석우(石隅) 이서 지역을 본현에다 이속

하는 데 대한 일
입니다. 충주 석우의 이서 지역을 본현에다 이속하게 하는 것이 비록 고
상신 김육의 등철되지 못한 상소에 있었으나, 이쪽을 분할하여 저쪽에 주는 일은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도에다 공문으로 하문하여 두 고을의 수령과 편부(便否)를 충
분히 상의하여 다시 보고하도록 해서 품처하게 하소서.]
1811년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14권,
순조 11년 3월 30일
무인 2번째 기사)
石隅: 현 충북
충주시 주덕
읍 당우리 석
우(돌모루)
마을
金堉(1580-1658):
이괄의 난 때
(1624) 음성
현감 역임
(潛谷遺稿)
⑦ 勅令第四十九號...ㅊ27地方區域整理件...第一條 地方區域은別表와갓치整理ᄒᆞᆷ이라 第二條
別表中飛入地ᄂᆞᆫ 甲郡土가 越在乙郡ᄒᆞᆫ者ᄅᆞᆯ 謂ᄒᆞᆷ이니 仍屬土在郡ᄒᆞ며 斗入地ᄂᆞᆫ 丙郡土가
侵入丁郡ᄒᆞᆫ者ᄅᆞᆯ 謂ᄒᆞᆷ이니 移屬附近郡ᄒᆞᆷ이라 第三條 本令은 頒布日노브터 施行ᄒᆞᆷ이라 第四條
從前地方區域에 關ᄒᆞᆫ 諸規程中 本令에 抵觸되ᄂᆞᆫ者ᄂᆞᆫ 幷廢止ᄒᆞᆷ이라 光武十年九月二十四日...
陰城, 原面(四)...移去面(없음)...來屬面(忠州 斗入地 金目面 笙洞面 孟洞面 法旺面
所呑面 枝內面 大鳥谷面 豆衣谷面 沙多山面 川歧音面 甘味洞面
居谷面 陰竹 斗入地 無極面)...現面(十七面)
1906년
『조선왕조실록』
(高宗實錄,
光武 10년 9월 24일;
勅令, 49호, 9월 24일;
官報, 9월 28일 부록)
충주 12개면,
음죽 1개면이
음성에 편입됨
⑧ 충주군 소속 소파면(蘇坡面)과 사이포면(沙伊浦面) [蘇伊面]이 음성군에 편입됨 1913년, 1914년
조선총독부령
(朝鮮總督府令)
제111호
邑殘民疲한 陰城郡
: 忠淸北道의 地圖를펴서보면 西北部에 蕞爾한 囊狀形을 成한 一郡이잇
서서 東은 忠州郡, 南은 槐山郡, 西南은 鎭川郡, 西北은 京畿道의 利川, 安城, 驪州等郡과 界하
얏스니 이것은
忠北에서 邑殘民疲하기로 有名한 陰城郡이다
이 陰城의 古號는 仍忽, 雪城又
는 仍斤內니 本來陰城, 遠南二面에 不過한 小縣인中 忠州와 接近한 關係로 壬辰亂時에 特히
慘禍를 被하야 아주 廢縣이되야 淸安郡에 屬하얏다가 光海朝十年에 僅히 縣을 復하얏스니
當時巡察使李安訥詩에 「壬辰幷邑久戊午設官新, 縣吏縫三戶鄕儒未十人」이라는 句와 觀察使
洪受疇詩에 「職愧二千石縣無三百困」이라는 句를 보고 前日忠北俗言에 陰城郡守는 到任
時에 도울고 邈任時에도운다는 말을 들으면 其郡의 殘疲가 如何한 것은 可히 推知할 것이다
(陰城이 貧邑인 故로 前日郡守時代에 到任床지도개다리소반을 씻스나 隱結은 比較的만하
서 郡守의 私俸이 厚함으로 郡守가 올울고갈운다는말이잇섯다)
近來에 至하야는 忠州

郡의 金旺, 孟洞, 笙極, 三成, 大所, 甘谷, (以上은 光武十年九月移屬)蘇伊(大正十三年十二月編

入)等七面을 移屬하야 合計九面一一二里洞이되고
廣衰三十三方里에 至하며 産物로도 米가
年産額七萬七千餘名에 達하고 其他麥豆類도 相當히 産出되고 特用作物의 陸地棉, 黃色煙草도
每年增産되며 遠南面의 金鑛 柿, 金旺의 金鑛, 二成面의 柿는 亦本郡의 著名産物이되얏다
그리고 交通도 忠北線의 二等道路와 長湖院忠州間의 一等道路가 郡內를 貫通하야 比較的便
利하며 其他學校, 金融機關市場等도 隣郡에 不讓하게<74> 施設되야 前日에 比하면 額히
括目의 感이잇다 그러나
그것은 全혀 形式의 發展과 統計의 發展에 不過한이오 實地人民

의 生活程度는 前日보다도 極히 貧弱하고 悲慘하다
1925년
개벽 제58호,
忠北踏査記
(1925.4.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잡지자료]
⑩ 難聞打餠聲: 一月二十九日-舊曆으로 섣달금음날이다 나는 鎭川을 나 陰城으로 向하는
데 八十餘里路程에 所謂大村落이라는 곳을 몃몃곳이나지냇스되 到處에 치는 소리를 듯지
못하얏다 나는 혼자생각에 오날이벌서금음날이닛가 영간개를 좀해먹을사람들은 몃칠
젼에 다해서 그런것이라고 하엿더니 알고보니
陰城은 元來貧色
이 故로다른해에도설에 
해먹는 집이 別로 업는데 昨年을 特히 凶年이저서 은커녕 正月一日에도 발굴물집이만타
고한다 아-이것이 엇지 陰城이랴 今日朝鮮사람의 生活이다그러하다 언제나 이 問題를
解決하야 名節마다 잘먹고 잘놀고...
1925년
개벽 제58호,
湖中雜記 (1925. 4.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잡지자료]

주: ‘등재내용’ 항목의 원번호(①)와 굵은 글씨체 및 방점은 필자에 의한 것임.

4. 결론

세계를 구성하는 ‘음(陰)’적인 것과 ‘양(陽)’적인 것은 서로에게 독립적이고 대립적이지 않으며, 본래 좋고 나쁨의 가치의 선후(先後)와 경중(輕重)이 있지 않았다. 음과 양은 서로에게 열려 있는 존재이며, 상보적이고 상생적인 것들이자 차이와 다양성으로 인정되고 존중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 둘을 배타적으로 나누어 ‘양’을 긍정적인 것으로, ‘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칭적인 인식은 지명의 인식과 명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한자문화권에서 ‘陰(음)’이라는 지명소를 가진 지명들은 ‘그늘’과 ‘어둠’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면서 역사적으로 지명 영역 내외에 거주하는 언중들로부터 개명의 요구를 끊임없이 받아왔다.

이러한 지명소 ‘陰(음)’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본 논문은 ‘음’자가 쓰인 유일한 지방자치단체인 음성군의 지명 의미와 영역 변화를 언어 및 지리 지명학적으로 분석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궁극적으로는 ‘陰城’(음성) 지명의 본래 의미가 ‘그늘’ 및 ‘어둠’과는 무관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음’과 ‘양’의 차별적인 인식을 극복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음성’ 지명의 통합적인 이해를 위하여 음성의 공간과 시간의 궤적을 정리하였다. 국가적 스케일로 바라보았을 때, 지정학적인 경계 및 접촉 지대에 위치한 음성 지역은 역사 지리적으로 한강-금강-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이자 요충지였으며, 지역 스케일 측면에서 행정 체제 및 구역의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음성 지명의 의미를 분석하여, ‘陰’이라는 표기에서 유래한 ‘그늘진 곳’ 혹은 ‘음침한 곳’이라는 부정적인 장소 인식은 훈차 표기된 지명으로 오인한 데서 초래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즉 음성의 본래 지명이 지형이 ‘넓은 곳’이나 ‘길게 늘어진 곳’을 의미하는 ‘仍忽’(잉홀, *너홀~*느홀)이었고, 8세기 중반 경 지명의 음차(音借) 표기 과정에서 현재의 ‘陰’城이 되었음을 지명학적으로 분석하였다. 요컨대 통일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의 ‘仍忽 > 陰城’으로의 지명 개정은 음성의 전부 지명소 ‘음(陰)’은 잉홀의 ‘잉(仍)’을 유사 음차(音借) 표기한 것이고, 후부 지명소 ‘성(城)’은 성(城)을 의미하는 고구려어, 즉 잉홀의 ‘홀(忽)’을 훈차(訓借) 표기한 것으로 분석하였다.

한편 음성의 옛 이름인 ‘仍忽’[*너홀~*느홀]과 별칭인 ‘仍斤內’[*늣내~*는내]의 지명 의미를 ‘넓은 성’, ‘큰 성’, ‘늘어진 모양의 성’, 그리고 ‘길게 늘어진 땅’이라 판단하여, 이 고지명들을 한남금북정맥이 펼쳐 놓은 높고 넓은 산지 지형과 길게 늘어선 산간 곡지 및 산 능선을 표현하는 지명으로 판단하였다. 특히 ‘늘어진 모양의 성’[*느홀]과 ‘길게 늘어진 땅’[*늣내~*는내]의 구체적인 위치로 현재 음성읍 읍내리에서 한벌리로 넘어가는 ‘잣고개’(栢峙, 백치)로 비정하였으며, 이 지점은 가섭산과 수정산을 잇는 ‘늘어진 긴’ 능선이 나타나는 곳이다.

아울러 음죽의 별호 ‘설성’과 비교하여, 음성의 별칭인 ‘雪城’(설성)의 ‘눈 雪’이 ‘仍忽’의 또 다른 발음인 ‘*넝홀~*눈홀’에서 훈음차(訓音借) 표기된 지명임을 새롭게 제안하였다. 결과적으로 ‘노음죽’이 ‘음죽’(음차)과 ‘설성’(훈음차)으로 지명 변화되는 과정은 ‘잉홀’이 ‘음성’(음차)과 ‘설성’(훈음차)으로 변화되는 과정과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셋째, 조선시대 이래 1906년 이전까지 4개의 면으로 구성되어 있던 ‘궁벽했던’ 음성이 1906년과 1914년에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릉 및 평야 지형에 위치한 충주군과 음죽군의 두입지를 병합하면서 지명 영역이 크게 확장되어온 과정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현재 행정구역의 형성과 함께 산업 발전의 물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고, 확대된 지명 영역성을 토대로 새롭고 독자적인 영역 정체성이 구축되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특히 지난 날 외부자들에 의해 ‘그늘지고 음침했던’ 곳, 혹은 ‘조잔하고 궁벽했던’ 곳으로 알려진 음성 지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넓고 큰’ ‘너홀’(仍忽)이란 이름을 매개로 새롭고 긍정적인 지역 정체성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1) “임금이 숭정전 뜰에서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하교하기를, 추로(鄒魯)의 고을과 같은 현(縣)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생각해 보니 바꾸어야 하겠다. 안음(安陰)과 산음(山陰)은 서로 경계가 접해 있는데 불과하나, 전에는 정희량(鄭希亮, 이인좌의 난에 가담)이 생겼고 지금은 음부(淫婦)가 생겼다. 아미산(蛾眉山)이 있었기 때문에 삼소[三蘇,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 소식(蘇軾)・소철(蘇轍) 형제]가 태어났던 것이니, 이름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현의 이름을 한두 번만 바꾸지 않았다. 안음을 안의(安義)로 고치고 산음을 산청(山淸)으로 고치되, 해조(該曹)로 하여금 표지를 붙여 계하(啓下) 하도록 하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영조실록 109권-영조 43년 윤7월 30일 辛酉 1번째 기사, 1767년].

2) 음성군과 함께 ‘陰’자가 쓰인 경기도 ‘陰竹郡(음죽군)’은 조선 초기까지 충청도 소속 군현이었다가 1413년에 여흥, 양지, 안성, 양성과 함께 경기도로 이속되었다(김순배, 2020, 110-113).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국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인접한 이천군에 통합되어 그 명칭이 사라졌다(越智唯七, 1917, 91-92).

3)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로도 불리는 두입지(斗入地)는 고려 및 조선시대 군현(郡縣)의 경계선이 서로 교입(交入)하여 마치 犬牙(개의 치아)가 위아래로 상착(相錯)해 있는 모습과 같은 구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한편 월경지(越境地)는 소속 읍과 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군현의 특수구역으로 고려 현종 대에 주현의 영속(領屬) 관계가 확립된 이후 종전의 속현(屬縣), 향(鄕), 소(所), 부곡(部曲) 등의 임내(任內)가 분리, 독립하거나 혁파, 정리되면서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이래 행정구역의 개편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그 정비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지방 통치체제의 미비, 수취 체제의 모순, 군현 토착세력과 주민의 이해관계 등이 얽혀 있어서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광무(光武) 10년(1906) ‘지방구역정리건(地方區域整理件)’에 관한 칙령(勅令)에 따라 완전 정리되었다. 또한 두입지[견아상입지]와 월경지의 차이점은 전자는 ‘侵入他境(침입타경)’한 데 반해 후자는 ‘越在他邑(월재타읍)’한 데 있으며, 조선 초기의 자료에서는 양자가 혼동되는 경우가 있었다(이수건, 1989, 148-150). 본 연구 지역에서는 1906년에 충청북도 충주군의 서쪽 두입지와 경기도 음죽군의 남쪽 두입지가 각각 음성군에 통합되었다.

4) 음성의 별칭인 ‘설성’이란 지명은 현재에도 ‘설성 공원’, ‘설성 문화제’, ‘설성 지구대’, ‘설성 파크’, ‘설성 산업’, ‘설성 어린이집’, ‘설성 종합카센타’, ‘설성 알루미늄’, ‘설성 손세차장’, ‘설성 방앗간’ 등으로 음성군, 특히 음성읍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활발하게 통용되고 있다(그림 3; 다음, 설성 음성군, https://search.daum.net).

5) 雪城山(설성산), 雪山(설산), 尺峙・栢峙・栢峴[잣고개, ‘자 尺(척)’과 ‘잣나무 栢(백)’은 잣(城)의 훈음차 표기]는 현재 수정산과 수정산성(음성읍 읍내리-한벌리-평곡리), 그리고 가섭산과 수정산 사이의 고개를 가리키는 옛 명칭이었음을 조선 후기의 많은 고지도(광여도, 팔도군현지도, 여지도, 1872년 지방지도, 해동지도, 지승, 동여도, 비변사인방안지도,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특히 현재 가섭산과 수정산 사이의 잣고개(잣, 즉 城이 있는 고개) 부근에 위치한, 음성향교 뒤편의 ‘望山’(망산)이 다른 고지도와는 달리《靑邱圖》(규장각한국학연구원, 古4709-21-v.1-4, 1834)에는 ‘망산’ 대신 ‘雪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6)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기도 음죽군은 1914년에 인접한 이천군에 통합되어 현재 공식적인 명칭이 사라진 상황이다. 당시 통폐합된 군의 전부 지명소는 대체로 군청 소재지인 군내면의 새로운 면(面) 이름으로, 혹은 리(里) 이름으로 다시 사용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기존 음죽군의 군내면과 읍리는 ‘음죽면’이나 ‘음죽리’로 개편되지 않고 신설된 이천군 청미면(현 장호원읍) 및 청미면 선읍리에 통합되었다. 한편 음죽군의 두입지인 무극면은 1906년에 남쪽에 인접한 음성군에 통합되어 생극면 및 금왕면 무극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 1912, 46-47; 越智唯七, 1917, 91-92; 180-184). 과거 음죽군 군내면 읍리 지역이었던 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2리 마을 주민들은 공식적으로 소멸된 ‘음죽’이란 이름을 ‘음죽읍내’, ‘음죽내’, ‘음죽골’, ‘음죽댁’ 등으로 일상생활에서 비공식적으로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면담: 주민 4명, 선읍2리 마을회관 경로당, 2020.08.27. 실시).

7) ‘망산’의 별칭인 ‘望峴’(망현)이란 지명이 『광무 양안』(음성군 양안, 동도면)에 등재되어 있으며, 현재 음성읍 읍내1리 향교말의 ‘망재산’을 가리킨다(조범희, 2019, 51).

8) 조선 후기 경상도 안동부 소속의 월경지인 내성과 춘양을 봉화현으로 이속할 때, 그곳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들이 “차라리 안동의 백성이 되어 죽을지라도 봉화의 백성이 되어 살고 싶지 않다”라고 극력 반대한 경우처럼(이수건, 1989, 183-184), 대읍에서 소읍으로 자신들의 소속이 바뀌는 경우 주민들의 소속감과 영역 정체성 변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충주군에서 음성군으로 편입된 12개 면의 충주 주민들도 대읍 소속의 ‘충주 사람’에서 갑자기 소읍 소속의 ‘음성 사람’으로 바뀌면서 음성군으로의 이속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여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 가섭산(709m)은 이 일대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산으로 주변에서 가장 쉽게 확인 가능한 지형지물이자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에는 산 정상에 봉수대가 위치하였고, 현재는 CJB 청주방송 송신소와 충주문화방송 가섭산 송신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이 산은 수레의산 및 부용산과 함께, 충주 시내에서 서쪽을 조망할 경우 북서서-남동동 방향의 지질구조선을 따라 흐르는 요도천의 상류 지역에 위치한 분수계로 인식되어 조선시대 충주 서쪽 두입지의 시작 지점으로 관찰된다. 따라서 조선 후기 충주의 서쪽 두입지를 음성에 이속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가섭산 북쪽에 위치한 용안역과 석우 마을 부근이 그 기준으로 언급되었고, 급기야 1906년에는 수레의산과 부용산의 서쪽에 위치한 충주의 두입지가 음성군으로 이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2019년 1차 충북학 포럼(2019.11.22.)에서 발표한 “음성 지명의 의미와 영역 정체성”을 수정 및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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