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서발턴 사상가 Dipesh Chakrabarty(2008, 7-8)은 그의 고전적인 책 『유럽을 지방화하기(Provincializing Europe)』에서 유럽 중심적 역사주의가 비서구 사회의 역사 경험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비판하며, 역사적 시간의 위계를 문제 삼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역사주의(historism)는 따라서 서구와 비서구 간 존재하도록 가정되었던 (적어도 제도적 발전에서) 문화적 거리의 척도로서 역사적 시간을 상정했다. 식민지들에서, 이는 문명이라는 사고를 합법화했다. 유럽 그 자체에서, 그것은 유럽을 자본주의, 근대성, 혹은 계몽의 최초 발상지의 장소로서 묘사했던 완전히 내재적인 유럽사 체계를 가능케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러나 정확한 경계가 아무리 모호하더라도) 결국 유럽의 지리적 경계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관하여 주로 완벽히 설명된다. 반면, 식민지 거주민들은 ‘유럽 먼저, 그 다음에 다른 곳에서’라는 시간 구조 속에서 ‘다른 곳’이라는 장소로 할당되었다.”
위의 인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역사주의는 근대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정치적 근대성의 보편적 경로로 제시하며, 서로 다른 사회들의 역사적 조건과 실천을 하나의 발전 서사 속에 재배열한다. 이에 따라, 비서구 사회의 역사와 지식 생산은 그 자체의 역사적 조건 하에서 전개되는 독자적인 과정이 아니라, 유럽 기원의 근대성이 결핍되거나 지연되는 저발전의 상태로 설명될 위험이 있다. Chakrabarty는 이러한 역사주의를 비판하면서, 비서구, 탈식민 사회를 ‘보편 역사’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닌 상이한 시간성들 속에서 그 자체의 지식을 구성하고 실천을 전개해 나가는 행위자로 이해해야 함을 제시한다.1) 따라서, 그의 문제의식은 비서구, 탈식민 지역의 역사가 외부 지식의 수용이나 모방으로 단순히 환원되기보다는, 그 지역 내 행위자들의 해석과 변용, 그리고 지식 생산의 과정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한국 지정학의 역사를 조사한다. 한국 지정학의 역사적 발전은 전지구적인 ‘지정학 전통’의 일부를 구성하는데(Dodds and Atkinson, 2000; Sidaway et al., 2013), 환경결정론을 비롯한 서구 지정학의 지적 흐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지상현, 2013; 오태영, 2015). 그러나 자칫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의 지정학 전통’을 이해할 경우, 그것이 단지 서구 지정학의 파생물이자 식민화의 한 양상으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대신, Chakrabarty의 문제의식은 식민 지배와 냉전 및 분단이라는 근대 한국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한국 지정학자들이 지정학의 다양한 지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배치하며 그 나름의 지정학 전통을 구성해왔는지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방법론을 제공한다(이진수・지상현, 2022; 옥창준, 2023). 즉, 한국 지정학자들의 지식 생산을 그 자체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지적 실천으로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정학 전통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위해, 본 연구는 두 가지 상호연관된 질문을 제기한다. 먼저, 본 연구는 어떻게 한국의 지정학자들이 지정학의 지식을 생산하고 재구성했는가에 초점을 둔다. 이는 한국의 지정학 전통을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다양한 지식을 번역 및 접합하여 지정학의 지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Hart, 2018). 두 번째, 이러한 번역과 접합의 과정이 제국적 기원을 지닌 지정학과 한국의 역사적, 공간적 조건 사이에서 어떠한 긴장과 비동일성을 생성하였는가에 관한 것이다. 특히, 본 연구는 이를 제국-식민 질서의 내재화로 환원하지 않고, ‘지정학’이라는 학문 내지는 개념 자체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변형되고 그 의미가 모호해지는 상황에 주목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들을 바탕으로 한국의 지정학 전통을 관계적이고 과정적으로 구성되는 지적 실천의 무대로서 간주한다(Ekers et al., 2020; Hart, 2020).
본 연구는 1969년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을 중심 사례로 분석하고자 한다(그림 1).2) 이 논쟁은 차윤(1969a)이 『정경연구』3)에 발표한 글에 대해 임덕순(1969b)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추가적인 반론과 재반론으로 전개되었다(손세일, 1976). 차윤은 1970년대를 전후한 한반도의 안보 및 통일 문제를 분석하면서 Nicholas Spykman의 지정학적 사고를 활용하여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임덕순은 전후 미국 정치지리학 내부의 실증주의적 전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Agnew, 2002, 85-135). 그러나, 이 논쟁은 서구 지정학 개념 및 이론의 단순한 수입이나 적용에 따른 차이를 넘어 서로 다른 학문적 전제와 위치에서 구성된 지정학적 사고들이 한국의 지적 무대에서 교차하고 충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논쟁은 냉전기 한국에서 지정학 지식이 구성되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사례로 위치된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다음 장에서는 특히 비판지정학 내 지정학의 역사에 대한 서술 방법을 검토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왜 한국의 지정학 전통이 관계적이고 과정적인 지식 생산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의 방법론적 기반을 논의한다. 이어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을 세 가지 분석 축으로 나누어 검토한다. 먼저, 서구 지정학 개념 및 이론의 도입과 번역을 통해 논쟁이 구성되는 방식이다. 둘째, 이러한 논쟁이 식민 지배 이후 지속적으로 재생산된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과 접합되며 그것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셋째, 지정학 개념 자체가 문제화되고, 논쟁적인 것이 되며, 변형되면서 그 제국적 기원이 모호해지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한국의 지정학 전통을 단지 서구 지정학의 확산 내지 식민화의 한 양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관계적이고 과정적인 지식 형성으로 이해할 때의 함의를 간략히 논의하며 마무리한다.
2. 한국의 지정학 전통에 대한 방법론적 재고
비판지정학은 ‘(고전)지정학’을 중립적인 지식이자 학문으로 간주하는 시각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주로 Foucault의 담론 개념 및 그 분석 방법을 기반으로 하여, 지정학은 엘리트 및 대중이 글로벌 공간을 이해하는 ‘권력-지식(power-knowledge)’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다(Ó Tuathail and Agnew, 1992; Ó Tuathail, 1996). 다른 말로 하면, 지정학은 특정한 공간 질서와 국제정치적 현실을 구성하고 정당화하는 지식으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판지정학은 지정학이 사회다위니즘과 환경결정론에 기반하여 제국-식민의 위계 질서를 강화하는 한편, 각 국가의 생존 전략을 고안하는 데 이용되어 왔음을 비판하였다(Ó Tuathail, 1996; Dodds and Atkinson, 2000; Sidaway et al., 2013). 이에 따라, 비판지정학은 지정학을 19세기 말 유럽의 제국주의 쟁탈전 속에서 형성된 지식으로 위치시키면서, 그 역사적 계보를 추적하고자 했다(Heffernan, 2000).
그러한 조사는 대체로 ‘지정학 전통’과 같은 개념들 하에서 이뤄졌다. 지정학 전통은 말그대로의 전통이 아니라 근대 유럽에서 고안된 전통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Dodds and Atkinson, 2000; Sidaway et al., 2013). 일반적으로 각 국가의 형용사는 덧붙여지는데, 이를테면 ‘한국의 지정학 전통’와 같은 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지정학은 독일, 영국에서 기원하여, 미국, 일본, 남아메리카 등으로 확산된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확산은 자연발생적이지 않으며, ‘지정학자’의 역할은 중요하게 고려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접근이 지정학의 역사를 특정 국가와 지정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계보의 연결로 서사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Ratzel은 Rudolf Kjellen(Holdar, 1992), Ellen Churchill Semple(Johnston and Sidaway, 2016, 43-45), Augusto Pinochet(Hepple, 1992; Sidaway et al., 2013)4)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Karl Haushofer(Heske, 1986; 1987)가 일본을 여행했다는 식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한국의 지정학 전통을 근대 서구의 시공간과의 연결 속에서 검토하도록 한다.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 사례는 냉전기 미국 지정학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도입된 환경결정론적 지정학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식민적 지식이 어떻게 탈식민 이후에도 재생산되는가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오태영, 2015).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한국 지정학의 형성 과정을 근대 서구 지정학 전통의 확산과 영향이라는 틀 속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한국 지정학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적・공간적 조건 속에서 구성된 지식이 아닌 서구적 전통의 지역적 변형이나 파생물로 이해될 수 있다(Agnew and Livingstone (eds.), 2011). 비판지정학이 지정학을 권력-지식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음에도, 그 역사 서술 방식은 오히려 서구를 지정학적 지식 생산의 원천으로, 한국을 그 수용지로 위치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서발턴 지정학’(Sharp, 2011)이나 ‘주변부의 지정학’(Sharp, 2013) 같은 비서구, 탈식민 지정학사 연구 또한 한국의 지정학 전통과는 차별된다. 이것의 기획 의도는 “사고의 다른 전통들에 적은 관심을 기울이는” 주류 비판지정학의 “앎의 서구적 방식”(Sharp, 2013, 20)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이는 제3세계를 “서구적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개념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으로도, “서구적 방식에 대한 저항 내지는 ‘토착적 지식’으로만 가득 차 있는 장소”(Sharp, 2013, 20)로도 환원시키지 않으려는 인식론에 기초한다. 유용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실제 연구들은 탄자니아의 범아프리카주의(Sharp, 2013)나 중국의 유교 지정학(An et al., 2021)처럼 서구 지정학과 구별되는 사례에 주로 주목해왔다. 이러한 사례 연구는 비서구 지역의 지정학 전통을 가시화하는 데 기여하지만, 서구적 지식을 변형 및 재구성했던 한국의 지정학 전통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는 특정 연구 경향의 문제라기보다는, 비판지정학 전반의 지정학 역사 서술 방식 자체와 연관된다. Müller(2008)는 ‘전통적인’ 비판지정학이 Foucault의 담론 개념에 기반하면서도, 실제로는 담론이 주체를 생산한다는 그의 핵심 명제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비판지정학은 지정학자를 사회적 맥락을 초월한 담론 생산자로 전제함으로써, 지정학 담론이 국제정치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지정학의 결정성에 맞서 저항과 도전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것이지만5), 그의 비판은 지정학의 역사 연구에도 함의를 제공한다. 지정학의 역사는 ‘제국주의자’, ‘인종주의자’, ‘보수주의자’, ‘탈식민주의자’ 같은 특정 행위자들의 삶과 사상을 중심으로서 서사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정학의 지식 생산은 ‘악명’ 높은 혹은 선구자와 같은 지정학자 중심의 설명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가진다. 한편으로, 지정학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반복적으로 재확인되면서, 지정학 계보를 근대 서구(그리고 제국 일본)의 역사적 무대로 한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비서구 및 탈식민 지역의 지정학 역사는 분석의 중심에서 벗어나거나, 서구적 앎의 방식과의 차이 또는 대항성으로만 선별적으로 재현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서발턴 지정학’이나 ‘주변부의 지정학’이 비서구 사례를 가시화하면서도 여전히 서구 지정학과의 차이 및 대항성에 초점을 두는 방식과 연결된다. 다른 한편으로, 비판지정학이 강조하는 지정학 지식의 맥락성 역시 지정학의 제국적 성격을 설명하는 배경 조건으로 환원되면서, 지식의 관계적이고 과정적인 성격은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군사주의와 같은 역사적 조건들은 지정학적 지식과 상호 구성되는 요소가 아닌 지정학의 성격을 설명하는 외적 배경으로만 기능하게 된다.
대신, 본 연구는 지정학의 지식 생산을 서로 다른 역사적・공간적 조건들이 교차하며 구성되는 지적 실천으로 이해할 필요를 제기한다. 여기서 지적 실천이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고통받고,’ ‘생각하며,’ ‘저항하는’ 지정학자들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Kipfer, 2012; Loftus, 2020). 그러므로, 지정학은 (서구 제국주의를 위한) 고정된 지식으로 틀지워지지 않고, 다양한 역사적 경험과 공간적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실천으로 이해된다. 이에 따라, 동일한 개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위치하는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특히 지식 생산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단선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되고 교차하는 ‘(비)동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Kipfer, 2012). 따라서 지정학의 역사는 이러한 (비)동시적 조건들이 얽히며 형성되는 관계적이고 과정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Hart, 2018; 2020; Ekers et al., 2020).
최근 지정학의 역사에 대한 사례 연구들은 지정학적 지식이 서로 다른 역사적・공간적 조건 속에서 새롭게 의미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Watanabe(2018)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분석하면서, 일본 지정학자들이 태평양 전쟁기 Ratzel의 국가유기체론을 일본의 토착적 ‘지역’ 개념을 통해 해석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기존 개념이 지역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또한 Sidaway and Woon(2017)은 과거 제국주의적 담론으로 배제되었던 Richthofen의 ‘실크로드’ 개념이 오늘날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에서 어떻게 재활용되는지를 분석한다. 이는 동일한 지정학적 개념이 역사적 조건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 사례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지정학의 계보를 선형적 확산이 아니라 그 의미가 지정학자들에 의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Mayhew, 2011).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은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될 수 있다. 이 논쟁은 1970년대 전후 냉전 질서 속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옥창준, 2022). 이는 근대에 접어들어 한국 사회에서 고착화되었던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과 당시 서구의 지정학 이론들이 한국 지정학자들에 의해 번역 및 접합되는 과정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서구 지정학의 ‘한국화’, 한국 지정학의 ‘서구화’로 요약될 수 있다(이진수・지상현, 2022; 옥창준, 2023). 그러나 이러한 번역과 접합의 과정은 지정학의 보편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공간적 조건이 교차하면서 형성되는 긴장을 내재하게 된다. 아래에서 볼 것처럼, 특히 지정학이 제국적 지식이라는 인식과 이를 불가피한 분석 언어로 사용하는 현실 사이의 긴장은 논쟁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동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지정학이 비판과 활용이 교차하는 지식으로서 모호함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3.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
1969년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은 중소분쟁의 구조적 고착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전환의 조짐이 나타나던 시대적 상황과 연루되어 있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개발독재 체제를 본격화하는 가운데, 닉슨 독트린을 비롯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한미동맹의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국내적으로 자주 국방과 경제 발전을 국가 생존 전략의 핵심 과제로 부각시켰다(Hundt, 2022). 이러한 정세 속에서, 차윤은 그의 글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지위를 논의하고 통일의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3년 워싱턴 대학교에서 한국의 분단을 연구하여 석사 학위를 받은 후6), 그 무렵 주한미군 내 메릴랜드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몇 개의 글을 통해 전통적인 대륙 및 해양세력의 쇠퇴,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경향을 강조한 바 있었다(옥창준, 2022, 103-112).7)
차윤의 이전 글들은 그가 Nicholas Spykman과 Alexander Seversky 같은 냉전기에 영향력이 있던 지정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전자는 ‘지리는 주장하지 않는다’는 명제로부터 인간의 역사가 변화를 추동한다고 주장하였고, 후자는 대륙 및 해양세력을 넘어서는 제공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Ó Tuathail, 1996). 이러한 사고는 1969년 글에서 특히 그가 Spykman의 변연지역(邊緣地域; rimland) 개념을 정세 분석을 위한 주요 틀로 이용하면서 반영되었다. Spykman은 유라시아 중심부를 글로벌 역사의 주요 축으로 간주했던 Mackinder의 심장지역이론에 대응하여 변연지역, 즉 유라시아 대륙의 주변부인 해안 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 개념을 이용함으로서, 차윤(1969a)은 1970년대 다가올 국제 정세에 관하여 미국과 소련 양 세력이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달성할 것으로 보았으며, 이에 따라 한반도의 통일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의 개념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는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는 ‘중앙적 위치’이다. 다른 하나는 냉전에 접어들어 한반도가 양 세력이 크게 대립하는 ‘변연지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하에서, 그는 1970년대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 한국에게 통일을 가능하게 할 전략적 자율성을 부여하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치의 변동만을 염두에 두고 통일 가능성을 낙관했던 것은 아니었다. 차윤은 지정학적 위치를 중요하게 고려하면서도, ‘구심력’ 중 하나로 간주했다. 대신, 그는 외적으로 “경제협력, 군사동맹의 체결, 반공외교의 강화로써 한국을 주축으로 하는 자유진영의 공산운명체제를 구축하여야”(차윤, 1969a, 56)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그가 글로벌 공간을 자유주의/민주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로 구분하는 냉전 지정학의 시각을 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Agnew, 2003).
이에 따라, 차윤은 당시 중국과 소련의 이념적 갈등을 거론하면서 북한이 상대적으로 고립될 것이라고 보는 한편, 변연지역에 걸친 국가들, 특히 일본과의 결속을 강화시켜 동아시아 내 제공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목할 부분은 그가 국내적으로 “국가의 주체성확립을 해치는 모든 요소”(차윤, 1969a, 57)를 배격하고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국제적 고립이 결국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으로 향하도록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이 점에서 현정부가 일사불난하게 경제개발에 전념하고 있는 것은 믿음직한 일이며 북괴가 전쟁을 도발해서라도 경제개발을 저지시키려는 것도 남한의 구심력이 증대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북괴의 초조하고 불안한 경지”(차윤, 1969a, 57)라고 평하였다. 경제 발전에 대한 강조는 그가 안보와 경제 개발을 연결해 정치적 합법성을 지향했던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개발주의에 동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Moon, 2005).
차윤의 이러한 주장에 대응하여, 임덕순(1969b)은 「변연지역이론의 한반도적용에 있어서의 문제점」이라는 반론 성격의 글을 출간했다. 당시, 그는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8), 부산교육대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같은 해 『지리학』9) 제4호에 실린 논문에서, 그는 미국 지리학자 Stephen Jones의 ‘정치지리학의 통일장이론’을 이용하여 한반도를 물리적 공간(field)으로 간주하면서, 어떻게 한반도가 지난 100여년간 주변 세력들(미국, 소련, 중국,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는가를 분석한 바 있었다. 차윤이 반공주의, 개발주의 등 그의 정치적 견해를 상당히 드러냈던 것과는 달리, 임덕순은 그의 연구에서 이념적 주장과 정치적 해석을 거의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냉전기 미국 정치지리학이 지정학의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경계하며 실증주의적 분석을 강조하던 흐름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Agnew, 2022).
정치적 해석을 자제하는 임덕순의 태도는 차윤의 주장에 대한 그의 반론에 투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변연지역을 기후와 자연자원의 측면에서 국가의 발전에 더 가치 있는 지역으로 이해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그 개념을 공간의 물리적 특성에 기반해 해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임덕순(1969b, 157)은 한반도가 변연지역의 개념에 부합하는 공간인지를 의심하면서, 대신 “한국이 극동자체내의 정치지리적 공간실재(空間實在)로서의 그리고 호상배열(弧狀配列)상의 한 지역이기 때문에, 열강이 이곳에서 자국의 국가이익을 생각했고, 그것이 국토분단의 커다란 가능성을 안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전 논문에서, 그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변화가 통일의 가능성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차윤의 해석에 회의적이었다(임덕순, 1969a). 그는 국제정치를 위치의 문제를 포함하여 국가 이익, 이념, 세력 관계 등에 따라 복합적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임덕순의 이러한 인식은 1970년대 전후 냉전 질서에 대한 그의 정세 분석과 관련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차윤은 데탕트를 미소 간 긴장 완화, 그리고 이를 통한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 증가로 파악했다. 이에 관하여, 임덕순(1969b, 157)은 이를 “이념적으로 안정상태”로 접어든 것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중국과 소련 간 “국경분쟁이 있긴 하나 이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임덕순, 1969b, 157) 것이었다. 그 의미는 그의 경계 연구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임덕순(1972)은 다른 글에서 ‘이념형 경계’를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블록 간에 나타나는 배타적인 경계로 정의한 바 있다. 더욱이, 그는 “미국도 무력통일을 예나 지금이나 원치 않는 상태”(임덕순, 1969b, 157)로 보았다. 한반도를 네 주요 세력 속에서 규정되는 공간으로 보는 임덕순(1969a)에게, 1970년에 전후의 데탕트는 이러한 냉전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현상 유지에 가까웠던 것이다.
차윤(1969b; 1969c)은 「한국의 안보문제와 관련된 지정학적 고찰의 적용성 시비」라는 재반론 성격의 글을 출간했다. 그는 변연지역 개념에 대한 임덕순의 이해가 협소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차윤(1969c, 187)은 변연지역 개념이 “Mackinder의 Heartland 이론에 대응하고 나선 상대적인 이론으로서 어디까지나 Rimland의 지정학적 내지 전략적 의의를 중시하여 설명한 개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덕순이 ‘지리적 위치’와 ‘지정학적 위치’를 변별하지 못했다고 반박하며, 전자를 “고정적이고 불변성을 지닌 위치의 표현”으로, 후자를 “가변적이고 상대적이니까 형태학적인 특징보다는 그 기능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정의했다(차윤, 1969c, 187). 이러한 구분으로부터, 그는 “미소 양국이 한국의 지리적 실재 즉 한반도의 어떤 형태학적인 가치 때문에 그 이익추구가 상충하여 그 결과로 한국의 분단을 초래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임교수의 생각은 옳지 못한 견해”(차윤, 1969c, 189) 라고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차윤은 데탕트가 한반도의 전략적 기능 변화를 암시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는 남북 분단의 직접적 원인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에서 나타난 미국과 소련 간 대립으로 간주했다. 차윤은 소련이 태평양 진출 및 세계 공산화의 ‘본능적인 탐욕’을 갖고 한반도를 침략했으며, 미국이 이러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서 대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공간의 물리적 관계에 기초하여 한반도의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고자 했던 임덕순의 견해와 상충될 수 밖에 없었다. 차윤은 “한국의 변연지역적 특징, 즉 유라시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간에 있어서의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는 변연지역으로서의 한국의 지정학적 특징을 파굴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한국의 분단의 원인과 그 과정과 장래를 해명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차윤, 1969c, 189)이라고 재차 주장하면서, 임덕순의 반론을 비판했다.
이 논쟁은 임덕순과 차윤이 그들의 상이한 학문적 배경에 따라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이론 선택의 차이는 외견상 ‘논쟁’의 외피를 구성하지만, 중요한 것은 임덕순과 차윤 모두 그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한반도의 공간적 의미를 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냉전과 분단 속에서 한국이 북한과 체제 경쟁을 하며 산업화를 지향하던 시대상 속에서, 이들은 지리와 지정학의 언어로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고민하였다. 다시 말해, 이 논쟁은 당시 서구 지정학의 지식이 확장 혹은 적용되는 것을 넘어 한국의 역사적, 공간적 조건 속에서 그러한 지식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충분하게 설명되지 않은 것은 이들이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의 공간으로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 지정학 논쟁이 ‘반도’(혹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에 대한 한국 지정학의 역사에 위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은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의 기반 위에 있었다. 이는 ‘반도’라는 자연지리적 개념이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지정학적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음을 의미한다. 반도는 한국의 ‘전통적인’ 지리적 개념은 아니었다. 반도(peninsula)는 16세기 유럽에서 유래하여 구한말 일본을 거쳐 조선에 유입된 용어였는데, 일본이 이를 조선을 가리키는 용도로 이용하여 1900년대를 전후로 조선에서도 안착하게 되었다(강경원, 2015). 그 시기, 근대 지리학의 도입과 함께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 문명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정의했는데(류시현, 2007), 이는 ‘반쯤 섬’이라는 반도의 어원상 의미와 연결된다. 이를테면, 최남선은 한반도를 육지와 해양의 장점을 갖고, 대륙과 해양 문화 모두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그러한 문화를 대륙과 해양 양 방면으로 전파시키는 공간으로 규정한 바 있었다(권동희, 2004).
반도의 이러한 개념 정의는 제국 일본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Shin, 2006). 그러한 민족주의적 태도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지속되었다. 이를테면 1930년대 김교신은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가능성과 미래를 반도의 ‘유리한’ 위치로부터 찾고자 하였다(이은숙, 1996).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반도를 민족의 성격과 역사적 운명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결정론적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른바 ‘정체성론’을 통해 조선이 반도에 위치한다는 사실 자체를 정치적・문화적 열등성의 근거로 해석하였으며, 나아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김교신이 반도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려 했던 것 역시 이러한 정체성론에 대한 대응이었다(이은숙, 1996). 그러나 그의 해석이 결정론적이라는 면에서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그 시기 제국 일본은 대륙 침략을 가속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학자들을 동원하여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자 소위 ‘식민사관’을 유포시켰다. 관련하여, 대표적인 것으로 만선사관과 반도성론을 들 수 있다. 만선사관은 일본 동양사학의 산물로, 만주를 역사 발전의 축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르면, 조선은 통일신라 이래로 대륙을 상실하여 그 역사적 무대가 반도로 국한되었고, 그럼으로써 자주성을 결여하고, 사대주의를 추종하며, 타율성을 내재해왔다(강진원, 2016). 반도성론은 일본사학의 산물로, 일본을 역사 발전의 중심으로 보면서 조선을 그 주변부로서 간주했다. 대표적인 학자로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가 있는데, 특히 그는 환경결정론에 영향을 받은 조선사학자였다(강진원, 2016). 그는 조선의 역사 발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가까이 부착된 이 반도는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반드시 대륙에서 일어난 변동의 여파를 받음과 동시에, 또 주변 위치 때문에 항상 그 본류로부터는 벗어나 있었다. 여기에 한국사의 두드러진 특징인 부수성이 말미암는 바가 이해될 것이다…그러므로 한국사는 내용적으로도 대외관계 사항에 의하여 차지된 부분이 심히 많고, 또 그 국외 여러 세력과의 관계를 중축으로 하여 한국사가 전개되어 가는 듯한 양상마저 드러내고 있다”(三品彰英, 1940, 2-3; 이기백, 1987, 4 재인용).
식민사관은 반도의 지리적 위치를 근거로 한국 사회가 역사적 발전의 지체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Paik(2000)은 냉전과 분단의 역사적 조건이 식민성의 지속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과 같이, 해방 이후 반도를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설명하는 공간적 조건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냉전과 분단의 현실 속에서 반도의 의미는 민족주의자들의 지정학적 사고 같은 한국인의 우월성을 고취시키는 것보다는, 국가의 안보 취약성과 생존 문제를 설명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었다. 반도라는 공간은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상황과 국가적 과제를 이해하는 주요 틀로 자리 잡았으며, 미군정기 이래 교과서, 학술서, 논문 등은 한국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관계 속에 위치시키려는 지적 실천의 장으로 기능하였다(옥창준, 2022; 2023; 이진수・지상현, 2022; 권은주・김기남, 2023).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이 해방 이후 반복적으로 재생산된 반도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차윤의 경우, Spykman의 변연지역 개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 놓인 한국의 완충지역으로서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자체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육지수(1947)는 해방 직후 “조선은 육교적 위치”로, “미소 양국의 성장첨단의 충돌점”이 되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또한 노도양(1954)은 한반도의 정세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 대립 및 충돌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설명들은 해방 직후의 분단과 이어진 한국전쟁에 따른 반도의 지정학적 의미를 반영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차윤은 이러한 사고를 1970년 전후의 정세 하에서 변연지역 개념을 통해 재맥락화하고 있었다.
임덕순 또한 차윤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덕순(1969b, 157)은 “한국 호[가] 바다와 육지의 교합지에 있으면서, 양방으로의 지향가능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세의 차단 기능도 갖고” 있다고 설명하며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 세력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Richard Hartshorne의 기능주의적 정치지리학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는 반도의 지리적 위치를 하나의 기능적 공간으로 간주하여, 그러한 위치가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한국에 대한 욕심의 지리적 이유”(임덕순, 1969b, 157)라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임덕순(1969a)은 Jones의 ‘정치지리학의 통일장이론’을 주요 분석 틀로 이용하여, 한국이 지난 100여년간 미국, 중국, 일본, 소련의 제국적 각축장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임덕순 역시 차윤과 마찬가지로 반도의 지정학적 사고를 Hartshorne과 Jones의 정치지리학적 언어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는 임덕순이 빈번하게 사용한 ‘관계’ 개념을 검토할 때 분명해진다. 임덕순(1969a)은 자신이 사용한 ‘관계’ 개념이 미국 정치지리학자 George Renner의 ‘공간 관계(space relations)’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Renner(1942, 42)는 이를 ‘상대적 위치(relative location)’의 의미로 설명하였다. 임덕순은 이러한 개념을 차용하여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 세력이 교차하는 관계적 공간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관계적 위치의 사고는 해방 이전부터 일본 정치지리학을 통해 소개되었으며10), 이후 한국 지리 서술에서도 반복적으로 참조되었다(이진수・지상현, 2022; 권은주・김기남, 2023). 따라서 임덕순의 논의는 한국에서 지속되어 온 반도에 대한 공간 인식을 새로운 이론 언어로 재구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반도를 대륙과 해양 세력 사이의 관계적 공간으로 이해해 온 지정학적 상상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종합하면, 차윤이 Spykman의 변연지역 개념을 통해 반도를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의 완충지역으로 설명했다면, 임덕순은 정치지리학의 기능주의적 개념들을 통해 이를 관계적 위치로 해석했다. 이러한 차이에도, 이 논쟁은 반도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이론적 대립을 넘어, 일제강점기 이래로 고착화되어 온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을 상이한 개념들을 통해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냉전과 분단의 대외적 정세, 그리고 반공주의에 기초한 개발국가 체제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두 사람은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공간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조건은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경제발전을 과제로서 사고하도록 하는 중요한 틀로서 작동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 논쟁은 식민지배와 냉전・분단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이 서로 다른 서구 지정학의 개념을 통해 번역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5. 냉전기 ‘지정학’의 연속성과 변형
이 논쟁을 정리하고 논평한 손세일(1976, 161)에 따르면,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은 “주로 접근방법 자체, 곧 지정학에 대한 부정적인 논거에 의한 지정학과 정치지리학의 설명”에 집중했다. 더 구체적으로, 임덕순이 ‘지정학’의 학문 및 용어를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기피하려 했던 반면, 차윤은 그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이전 논문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임덕순(1969b, 155)은 지정학이란 용어 대신 ‘정치지리학’을 이용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그의 반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독일식 지정학은 일본군국주의에도 도입되어, ‘팔굉일우(八肱一宇)’,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론이 거침없이 전개되었던 것이나, 이것도 전후 세계의 정치학 및 정치지리학계에서 침략의 공공연한 구실이었다고 지탄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정학이란 표현은 2차대전 후 추축국의 패망과 함께 당연히 쇠멸되고, 순수학문으로서의 정치지리학이 다시 활기를 띠우고 있는게 오늘의 세계적 추세이다. (...) 이 같은 추세는 특히 지정학을 혐오했던 미국에서 현저한데, 미국을 주로 학문적배경으로 갖고 있는 한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이 여사한 지정학의 성격이나 시대적조류를 모를 리 없건만, 굳이 ‘정치지리학적’ 대신에 ‘지정학적’을 애용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필자로서는 알기 쉬운 바 아니다.”
앞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임덕순은 미국 정치지리학의 조류를 따르고 있었다. 미국 정치지리학은 전간기에 독일 지정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수립되었다. 이를테면, 미국 정치지리학자 Isaiah Bowman은 ‘과학적 정치지리학’을 옹호하는 한편, 지정학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폄하했다(Smith, 1984). 이러한 경향은 전후 미국 정치지리학에서 지속되었다. 이를 수용하여, 임덕순(1969c, 197)은 “geopolitics는 학(學) 자체의 문제점도 많고, 그것이 풍겨주는 뉘앙스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며, 한국의 지리와 관련된 국제정치적 현상을 논하는 데 있어 “geographical(지리적)과 political(정치적)의 합성어”로서 politico-geographical(정치지리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임덕순의 이러한 반론에 관하여, 차윤(1969b, 162-163)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지정학이 Karl Haushofer를 위시한 독일의 지정학파 일파에 의해 독일의 팽창주의를 합리화시키는 데에 오용 내지 악용되었던 것이 원인이 되어 2차대전 이후 지정학이 마치 독일의 침략적 민족주의의 교리인양 백안시 당해 왔다는 사실이다. (...) 지정학을 1) 국영사업으로서의 선전 내지 교훈 2) 독일의 정치적 목적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이비지리철학 3) ...침략의 합리화운동 등등으로 못박아 버린 것을 보아서도 보나마나 임교수도 그와 같은 선입관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geopolitics-phobia” 병에 걸려 있는 많은 환자 중 한 사람인 것 같아서 이해가 가기는 하면서도 자못 답답하다. 이와 같은 경향은 마치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 담는다’는 속담이 뜻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편협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록 이들의 논의가 용어 사용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임덕순과 차윤 모두 자신들의 논의가 환경결정론으로 이해되는 것을 경계했다는 점이다. 특히 임덕순의 이러한 태도는 냉전기 한국 지리학이 직면했던 인식론적 딜레마와 맞닿아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 지리학자들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습득한 환경결정론적 지리관을 완전히 폐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생 독립국으로서 한국의 발전 가능성과 국가의 미래를 설명하기 어려웠음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환경이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가능론적 입장을 적극 수용하였다(이진수・지상현, 2022). 임덕순 역시 차윤의 논의가 “환경결정론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지리적 환경은 단지 인간들에게 가능성을 줄 뿐이지 그것이 인간의 행방과 운명을 결정지우는 것은 결코 아니”(임덕순, 1969b, 157-158)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차윤(1969c, 188-189)은 임덕순의 그러한 비판이 또한 스스로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놀라운 것은 임교수 자신이 환경결정론을 배격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본설 7월호 임교수의 반론을 읽어서 알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지리적 공간실재가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호상배열상의 한 지역’, ‘바다와 육지의 교합지’ 등의 한반도의 형태학적 특징을 들어서 한국분단의 원인을 구명하려고 있는데 한국분단의 문제를 환경결정론적 입장에서 해명하기를 반대하는 임교수의 경우 이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순이다.”
차윤의 이러한 지적은 임덕순이 환경결정론을 비판하면서도 한반도의 지리적 형태와 위치를 통해 한국의 분단과 국제정치적 상황을 설명하고 있음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임덕순 개인의 모순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임덕순과 차윤 모두가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에 위치한 공간으로 이해하는 공통된 인식 구조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공통된 인식은 서로 다른 이론적 자원(Spykman의 변연지역 개념과 미국 정치지리학의 기능주의적 접근)을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국가의 생존과 국제정치적 조건을 설명하는 핵심 변수로 수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환경결정론의 수용 여부를 둘러싼 대립 이상으로 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국가의 운명과 연결하는 결정론적 사고의 재구성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이 논쟁이 단순히 두 학자의 이론적 입장 차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냉전기 한국에서 ‘지정학’이 어떻게 이해되고 작동했는가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임덕순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정학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기된 학문으로 간주하는 것과 달리, 차윤은 독일 지정학의 오용을 이유로 그 전체를 폐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단순한 이론적 차이라기보다, 지정학의 이론 및 개념들이 냉전기 한국이라는 조건 속에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윤의 지정학적 분석은 Spykman으로 대표되는 전후 지정학 논의의 요소들을 경유하며 구성되었고, 임덕순은 전후 미국 정치지리학에서 나타난 지정학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논쟁은 냉전기 한국에서 지정학이라는 학문과 용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호출되고 재맥락화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상이한 규정 방식은 ‘지정학’이 단일한 학문적 범주가 아닌, 제국주의적 기원을 지닌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냉전과 분단의 한국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국제정치적 위치를 설명하는 실천적 언어로 동시에 호출되는 이중적 의미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지정학의 이중적 지위에 대한 인식은 비단 개별 학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냉전기 한국 학계 전반에서도 공유되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경제지리학자 육지수(1962, 28-29)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지정학이란 말이 쇠퇴해 간 것은 지정학이라는 학문이 전체주의 국가에서 발생하고 그 발생에 따라 전체주의 국가의 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부여한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지정학을 냉정히 생각할 때 우리나라의 현실을 타개하는 데 어떠한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는 점이 없지 않을까 한다. (...) 우리나라에서 지정학이 운운되고 있는 것도 이와 흡사한 것이다. 2차대전 후 타방에 의하여 식민지로서의 예속은 해제되었으나 뜻하지 못한 38선의 출현은 우리나라를 양단하고 말았으며 인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비극이 유래되었고 경제적 빈곤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도 실지 회복을 부르짖고 있으며 경제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여기 지정학에 대한 동경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육지수의 논의가 보여주는 것처럼, 냉전기 한국에서 지정학은 단지 서구로부터 수입된 이론의 수용이나 폐기라는 이분법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정학은 서구에서 제국주의적 팽창과 결부된 학문이라는 오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이러한 역사적 성격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 경험, 냉전 및 분단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지정학은 배제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한국의 지리적 위치와 국제정세를 해명하고 국가의 생존을 사고하려는 ‘지정학자’들에게 실천적 언어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점에서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은 서구 지정학의 문제적인 계보를 단절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유하고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에 맞게 재맥락화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결국 제국적 기원으로서의 지정학은 한국에서 단절되지 않은 채 지속되었지만, 그 지속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의미와 기능이 변형된 형태의 지속이었다.
6. 결론
본 연구는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을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관점에서 조사하고자 하였다. 이 논쟁은 단순히 두 학자의 이론적 입장 차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서구 지정학 이론의 번역과 접합의 과정 속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상상력이 구성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사례였다. 임덕순과 차윤은 당시 미국 지정학으로부터 도입한 상이한 개념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에 위치한 공간으로 이해하는 공통된 지정학적 상상력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냉전과 분단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당시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반도의 지정학적 상상력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논쟁의 주요 축인 ‘지정학’과 ‘정치지리학’이라는 개념적 구분 역시 실제로는 서구 학문 전통의 번역과 재맥락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지정학이라는 범주가 폐기와 유용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작동하는 지식 체계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Chakrabarty(2008)는 비서구 사회의 역사를 유럽 중심의 역사주의적 서사에 환원하기보다,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와 지식 생산의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제기하였다. 본 연구는 한국 지정학을 서구 지정학의 확산이나 식민성의 단순한 재생산으로 이해하지 않고, 냉전과 분단이라는 조건 속에서 다양한 지적 자원들이 선택적으로 결합되며 형성된 지식 생산의 과정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정학은 제국주의적 기원을 지닌 이론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동아시아 냉전 질서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인식이 교차하는 가운데 구성된 실천적 지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지정학은 한국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실천적 언어로 활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세력 간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지정학적 상상력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본 연구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임덕순과 차윤의 지정학 논쟁을 한국 지리학 및 지정학사의 한 계기로서 조망하고자 했다(김기혁, 2016). 비록 하나의 사례에 국한되어 제한적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한국 지리학의 역사를 통사적 발전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지식이 생산, 유통, 재구성되는 지식의 역사로 접근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특히 해방 이후 한국 지리학의 전개는 서구 및 영미권 지리학으로부터의 일방적 수용보다는, 다양한 지적 자원이 번역되고 접합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최병두, 2014).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지정학의 역사에 대한 탈식민적 접근은 지정학을 수용과 저항의 이분법으로 환원하기보다, 지식이 형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분석할 수 있는 방법론적 잠재성을 제공한다. 본 연구가 충분히 다루지 못한 이러한 쟁점들은 향후 보다 폭넓은 지식사적・역사적 분석을 통해 확장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