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28 February 2021. 81-94
https://doi.org/10.22776/kgs.2021.56.1.81

ABSTRACT


MAIN

  • 1. 서론 – 고문헌 재해제의 필요성

  • 2. 「북관장파지도(北關長坡地圖)」에 대한 재해제

  •   1) 지도의 제작 범위와 지도명

  •   2) 지도에 표현된 인문 정보와 특징

  •   3) 장파(長坡) 관련 정보의 검색과 「북관장파지도」

  •   4) 「북관장파지도」와 「장파지도」비교

  • 3. 「화도진도(花島鎭圖)」에 대한 재해제

  •   1) 지도의 제작 범위와 지도명

  •   2) 「화도진도」A와 「화도진도」B가 수록된 이유

  •   3) 「화도진도」를 통해 살펴본 화도진과 관할 포대의 위치 선정 이유

  • 4. 결론

1. 서론 – 고문헌 재해제의 필요성

국립중앙도서관은 국가대표도서관(National Library)으로서 설립 및 운영 목적은 첫 번째가 수집된 지식 자료의 영구보존이고, 두 번째가 국내에서 생산된 자료에 대한 망라적(網羅的) 수집이며, 세 번째가 수집 보존된 자료에 대한 대국민 이용 서비스 제공이다. 다만 고문헌만은 고가로 거래되고 있는 현실 때문에 구입 예산의 한계로 선택적 수집을 하고 있다. 대신 국내외에 산재한 우리나라의 모든 고문헌 자료에 대한 조사 및 통합 서비스의 중심 센터로서 고문헌종합자료관 건립 및 운영을 장기 목표로 삼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국가가 설립한 국립 기관이기 때문에 규정된 절차를 거쳐 신청된 모든 자료에 대한 대국민 이용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또한 잦은 원본을 열람하는 것으로 인한 자료의 훼손을 최대한 방지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 또한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서로 상반되는 듯한 두 가지의 목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원본을 열람하지 않아도 직접 보는 것과 같은 동일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이용자들이 원문 자료를 직접 보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홈페이지에서 원문 이미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원문DB구축사업을 연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고문헌은 모든 소장 자료에 대한 원문DB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저작권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 도서관을 방문하지 않고도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은 결과로 국립중앙도서관의 고문헌에 대한 이용률이 높아지고, 고문헌을 이용하는 이용자의 폭 또한 넓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해제1)는 시간이 흐를수록 연구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한 해제의 작성과 이용자의 넓어진 폭에 맞춘 새로운 해제의 작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소장되어 있는 모든 고문헌에 대한 원문DB구축 사업과 함께 홈페이지에서 초록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해제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2) 원문 이미지 서비스의 제공으로 이용자의 폭이 넓어진 현상은 초록정보의 작성 방법에도 영향을 주었다. 재해제의 필요성에 대해 정리하면, 첫째,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이용자도 접속하여 보는 것이기 때문에 초록정보는 일반 이용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작성되어야 한다. 둘째, 이용자는 원문 이미지와 초록정보를 대조하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 원문 이미지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작성된 초록정보는 원문 이미지를 대조하면서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다시 작성될 필요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인력과 예산의 문제로 미해제 고문헌 자료의 해제를 우선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미 서비스되고 있는 초록정보 중 새로운 연구와 이용 환경의 변화에 맞지 않는 것이 있는지 지속적으로 검토하는 작업도 병행할 수 있는 인력과 예산의 확보에도 노력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든 고문헌 자료에 대한 해제가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5년 또는 10년 등의 주기로 모든 해제를 다시 검토하여 새로운 해제의 작성 필요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을 고유 업무 중의 하나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고문헌에 대한 대국민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재해제하기 위한 방법은 디지털화 되어 제공되고 있는 다수의 고문헌과 근대지형도의 원본・원문・국역 서비스와 검색 기능을 이용하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규장각 홈페이지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내각일력』등에 대한 원본・원문・국역 서비스와 검색 기능,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과에서 제공하고 있는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홈페이지의 검색 기능, 국사편찬위원회,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근대지형도에 대한 원문 이미지 서비스가 활용 대상이다.

본 연구에서는 「북관장파지도」(한古朝61-59)와 「화도진도」(한古朝61-79)를 사례로 재해제를 하고자 한다. 기존에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의 초록정보에서 제공되었던 「북관장파지도」와 「화도진도」의 해제는 내용이 간략할 뿐만 아니라 지도 제작의 시기와 목적, 지도 내용의 의미 등이 작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대국민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해제 재작성의 대상으로 두 지도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3) 현재는 본 해제를 바탕으로 업데이트가 되어 제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두 지도의 해제를 다시 작성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과 그 과정을 전달하여, 해제 재작성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작성하였다.4)

2. 「북관장파지도(北關長坡地圖)」에 대한 재해제

1) 지도의 제작 범위와 지도명

「북관장파지도」는 1684년(숙종 10)에 신설된 무산도호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그렸으며, 색감・글씨・기호 등의 수준이 매우 높은 지도라고 할 수 있다(그림 1). 무산도호부는 일제강점기에 그 영역 전체가 함경북도의 무산군으로 편제되었으며,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량강도의 백암군・대홍단군 전체와 삼지연군의 동북쪽 절반, 함경북도 연사군과 일부를 제외한 무산군, 회령시의 서쪽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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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북관장파지도」의 주요 지명

무산도호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그렸지만 지도명에 고을에 해당하는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다. 대신 「북관장파지도」라고 지도명을 붙여서 지도 제작의 목적이 무산도호부의 일반적인 상황보다 북관장파(北關長坡)와 관련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함경도는 지도가 제작될 당시, 전국의 8도 중에서 고을과 호구의 수가 가장 적은 도(道)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여진족과 경계를 맞대고 있어 병영을 북청(北靑)의 남병영과 경성(鏡城)의 북병영 두 곳에 설치하였다. 남병영과 북병영의 군사적 관할 경계는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길주의 서쪽에서 동해와 만나는 현재의 마천령산맥이다. 남병영 관할 지역을 남관(南關), 북병영 관할 지역을 북관(北關)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지도의 이름에 북관(北關)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은 이 지도가 함흥 소재의 감영이 관할하는 함경도라는 행정적 측면보다는, 경성 소재의 북병영이 관할하는 북관의 군사적 측면에서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장파(長坡)는 무산도호부의 서남쪽, 백두산 동쪽의 두만강 주변에 있는 지역의 이름이다. 구체적인 범위는 서쪽으로는 증산(甑山, 1511m)과 대노은산(大蘆隱山, 1490m)을 잇는 산줄기, 북쪽과 동북쪽에는 두만강 본류, 남쪽과 동남쪽에는 두만강의 지류인 소홍단수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함경북도 무산군의 삼장면(三長面) 동쪽 끝 지역의 일부였고,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량강도 대흥단군의 북쪽 끝 지역이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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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무산도호부의 영역과 장파 지역(지도 출처: 구글지도)

「북관장파지도」에는 장파 관련 지명으로 장파(長坡), 장파수(長坡水) 2곳, 장파강구설진처(長坡江口設鎭處)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그림 3). 현재의 증산은 남증산(南甑山)으로, 대노은산은 노은동산(蘆隱東山)으로, 소홍단수가 홍단수(紅湍水)로 적혀 있다. 현대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파 지역보다 훨씬 넓게 강조해서 그리고 있어「북관장파지도」가 장파 지역과 밀접한 연관 아래 제작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그림 1, 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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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북관장파지도」의 장파 관련 지명

2) 지도에 표현된 인문 정보와 특징

「북관장파지도」에 수록된 정보의 기호로는 첫째 붉은색 큰 원으로 표기된 무산도호부 중심지, 둘째 고을 아래의 행정단위로 다른 도(道)의 면(面)에 해당되는 사(社)에 설치한 노란색 중간 원으로 표기된 사창(社倉), 셋째 군사기지로 세로로 긴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기된 진보(鎭堡), 넷째 소규모의 병력이 주둔하며 국경을 감시하는 노란색 작은 원으로 표기된 파수(把守), 다섯째 국경에서 발생한 외적의 침입 정보를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서울까지 전하는 봉수대 모습의 봉수(烽燧), 여섯째 사람이 지나다니는 붉은색 실선의 길 등 여섯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표 1).

표 1.

「북관장파지도」의 기호

무산도호부 사창 진보 파수 봉수
기호 https://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1-056-01/N013560106/images/geo_56_01_06_T1_1.jpghttps://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1-056-01/N013560106/images/geo_56_01_06_T1_2.jpghttps://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1-056-01/N013560106/images/geo_56_01_06_T1_3.jpghttps://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1-056-01/N013560106/images/geo_56_01_06_T1_4.jpghttps://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1-056-01/N013560106/images/geo_56_01_06_T1_5.jpghttps://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1-056-01/N013560106/images/geo_56_01_06_T1_6.jpg

종4품의 병마만호(兵馬萬戶)가 파견된 풍산진(豊山鎭)과 종9품의 권관(權管)이 파견된 양영만보(梁永萬堡)는 각각 원래 회령도호부와 부령도호부에 있던 것을 1674년(현종 15)에 이곳으로 옮겨서 전진 배치시켰다. 그리고 두 진보는 1684년(숙종 10)에 무산도호부를 신설한 후 회령도호부와 부령도호부에서 무산도호부의 관할로 옮겼다.5) 무산도호부의 신설 이후 이 지역에 백성들을 이주해 살게 하였고, 일정 호수가 넘으면 면(面)에 해당되는 행정단위인 사(社)로 편제하고, 그곳에 사창(社倉)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길을 제외하면 「북관장파지도」에 기호로 표시된 다섯 개의 정보는 무산도호부의 설치 이후 백성들이 이주해 살면서 호수가 늘어난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장파를 포함하여 백두산 동남쪽의 홍단수와 두만강 상류 유역, 지도 왼쪽 아래의 서북천(西北川) 상류 지역은 길 정보 이외의 다섯 정보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지도 제작 당시에 백성들이 개척하여 들어가 살지 않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그림 1). 그런데 장파를 포함한 지역은 실제보다 훨씬 넓게 강조해서 그린 반면, 서북천 상류 지역은 실제보다 더 좁게 그려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도록 표현하였다(그림 1, 그림 2). 이를 통해 보아도 「북관장파지도」는 장파 지역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길 정보의 표시에서도 장파 지역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 길 위의 주요 지점 사이의 거리는 첫째는 오른쪽 아래의 부령(富寧) 경계인 차유령(車踰嶺)부터 무산도호부의 중심지에 이르는 길, 둘째는 오른쪽 아래의 회령(會寧) 경계인 구절령(九節嶺)으로부터 무산도호부의 중심지에 이르는 길, 셋째는 무산도호부의 중심지로부터 서쪽으로 삼산창(三山倉)-장파(長坡)-삼지연(三池淵)을 거쳐 허항령(虛項嶺)과 백두산(白頭山)에 이르는 길, 여기 세 곳만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산도호부 중심지에서 부령도호부와의 경계인 차유령까지, 회령도호부와의 경계인 구절령까지, 사창(社倉)이 설치된 삼산창까지 연결된 세 개의 길 위에 주요 지점 사이의 거리가 적혀 있는 것은 사람과 물자가 많이 이동하는 길이기 때문에 정보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백성들이 개척해 들어가 살지 않는 곳으로 사(社)란 행정단위로 편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보, 사창, 파수도 설치되지 않은 지역인데, 홍단수와 두만강 상류 지역의 길 위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표기된 것은 자연스럽다고 보기 어렵다.

「북관장파지도」에서 눈에 띄게 표현한 정보 중의 하나는 백두산과 1712년(숙종 38) 5월에 세워진 정계비 관련이다.6) 청나라의 대표였던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이 압록강과 토문강의 근원이 갈라진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분수령(分水嶺)과 그 위에 세운 정계비(定界碑), 화산 지형이라 물이 스며들어 다시 솟아나는 두만강 근원까지 국경선과 관련하여 인공적으로 세운 목책과 흙돈대(土墩)의 정보도 아주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다(그림 4). 정계비와 목책은 15리로 연결되어 있고, 이후 흙으로 쌓은 돈대는 35리 떨어져 있는 적암(赤巖)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이서행 등, 2011, 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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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북관장파지도」의 정계비 부근

3) 장파(長坡) 관련 정보의 검색과 「북관장파지도」

국사편찬위원회의 홈페이지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원본・원문・국역 서비스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은 원본과 원문만 서비스하고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의 원본, 『일성록(日省錄)』의 원본・원문, 『내각일력(內閣日曆)』의 원본・원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의 원본・원문・국역을 서비스하고 있다.7) 두 기관 모두 원문과 국역은 검색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장파(長坡)’란 단어로 검색하면 『승정원일기』에는 1740년(영조 16) 4월 10일,8) 『비변사등록』에는 4월 12일의 기록9)에 함경감사 박문수가 올린 삼산진(三山鎭)과 장파진(長坡鎭)의 설치 문제에 대해 불가하다는 주장의 비변사 보고(狀啓)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삼산(三山)은 장파 바로 동쪽의 지역으로 「북관장파지도」에는 삼산창(三山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 9월 2일의 기록에 함경도의 북병사(北兵使) 윤광신이 삼산과 장파 등의 지역을 살펴보고 북병영으로 돌아온 일에 대해 정리하여 올린 보고서를 승정원에 보류해 두라는 내용이 나온다.10)

이후 영조 시기에는 장파진의 설치에 대한 기록이 더이상 나오지 않아 불가하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다가 1784년(정조 8)에 장파진의 설치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그 논의 과정에 대한 내용이 여러 문헌에 일제히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함경도 북병영의 병마절도사 민의혁(閔義爀)이 장파 지역에 대해 조사하여 보고한 내용으로 『정조실록』1785년(정조 9) 7월 14일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11)

“장파(長坡)에 진(鎭)을 설치할 터로서 적합한 곳은 모두 3곳이니, 관동(館洞)농사동(農事洞)강구평(江口坪)입니다. 신이 장파 20여 리 안을 가래를 들고 오르내리며 토질을 살펴본즉, 부식토(腐土)의 두서너 치 아래에는 거친 모래(麤沙)가 있고 거친 모래의 두서너 치 아래에는 다시 좋은 흙(眞土)이 있으며, 장파의 온 벌판은 곳곳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혹은 장파평(長坡坪)에는 용암석(水泡石)으로 인해 백성들이 살 수가 없다고들 하나, 이른바 용암석은 곧 거친 모래이어서 농사에 해롭지 않음은 이미 경험으로 증명한 바 있습니다. (새롭게 진(鎭)을 설치할만한 곳으로) 관동농사동은 물 긷는 길이 조금 멀므로 장파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고 장파 안에서는 강구평에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체로 무산은 저들(여진족) 지역과 땅이 연결되어 있어 육진(六鎭, 세종 때 개척된 함경도 동북 지역의 여섯 고을)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만강 수백 리에 여진족(蕃戶)이 가까이에 사는 일이 전혀 없고, 장파의 동쪽은 사냥하는 오랑캐도 이르지 않는 곳이므로 파수(把守, 국경초소)를 드물게 설치한 것도 역시 이러한 때문인 듯합니다. 요컨대, 무산의 서쪽 수백 리에는 한 곳의 군사기지(關防)도 없으니 장파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말할 만한 폐단이 별로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먼저 조그마한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새로이 입주한 백성에게 세역(稅役)을 경감해주고 환곡을 운영하다가 백성이 많아지고 토지가 개척되기를 기다려서 고을을 설치하고 진으로 승격시킴은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노은동산(蘆隱東山)장파(長坡)천평(天坪) 사이에 있는데, 저들과 우리나라의 지형이 모두 한눈에 들어옵니다. 화저연대(火底烟臺)를 이곳에 설치하여 본부(本府, 무산)의 남산(南山) 봉대에 도달하게 하며, 장파 이상의 강변에 또 두세 곳의 파수(把守, 국경초소)를 설치하여 감시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 진(鎭)을 설치한 뒤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허항령(虛項嶺) 길을 이전에 통행하지 못하게 막아 버렸는데 비록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통행시키든 차단하든 그다지 관계는 없습니다. 지금 만약에 새 진(鎭)을 창설한다면 진의 병사를 갑자기 채우기가 어렵고 군사 물자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니, 경성의 삼삼파보(森森坡堡)와 명천의 재덕보(在德堡)는 중요하지 않은 곳이므로 폐지하여 합해서 (장파에 진을) 설치하는 것이 아마도 무방할 듯합니다. 장파의 형편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려 보냅니다.”

민의혁의 보고서에 장파 지역의 진보 설치와 관련하여 나오는 관동(館洞), 농사동(農事洞), 강구평(江口坪), 노은동산(蘆隱東山), 장파(長坡), 천평(天坪), 화저연대(火底烟臺) 등의 지명과 「북관장파지도」에 수록된 지명을 비교해 보면 일치한다. 지도 위의 ‘장파강구설진처(長坡江口設鎭處)’는 민의혁이 ‘관동과 농사동은 물 긷는 길이 조금 멀므로 장파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고 장파 안에서는 강구평에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보고한 내용과 상통하여, 그 뜻은 ‘장파강구에 진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도 위의 ‘신설화저봉처(新設火底烽處)’ 또한 민의혁이 ‘화저연대를 이곳에 설치하여’라고 보고한 내용과 상통하여, 그 뜻은 ‘새로 화저연대를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그림 3). 이러한 민의혁의 보고에 대해 비변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12)

(민의혁의) 보고서를 지도와 참고하여 보면 무산부로부터 장파까지는 거리가 1백 15리인데, 90리 사이는 밭두렁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민가가 매우 조밀합니다. 아직 개간되지 못한 곳은 단지 장파동의 직로(直路) 수십 리뿐이고, (장파의) 강구평(江口坪)은 단지 6호뿐입니다. 비록 조그마한 보(堡)를 먼저 설치하는 데 합당하다해도 보(堡)에도 지휘관(官長)이 있어야 하는데 어찌 6호의 백성을 거느리고 권관(權管, 종9품의 무관)의 칭호를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보(堡)를 설치하는 것은 아직 경솔히 논의하기 어려우니 먼저 무산으로 하여금 한 개의 창고를 이 지역에 설치하여 곡물을 비축하고 환곡을 출납하게 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점차 모이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호수가 20~30호가 되기를 기다린 연후에 비로소 진보를 설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삼삼파보와 재덕보를 혁파하여 합해서 (장파에 진보를) 설치하는 것은 비록 (장파에) 보(堡)를 설치한 뒤의 일에 관계되더라도 거리가 수백 리를 넘기 때문에 진보의 병사를 강제로 옮기는 일은 결단코 행할 수 없는 일이고, 허항령 길은 반드시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장파의 창고 설치 여부는 다시 정리하여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북관장파지도」의 ‘장파강구설진처(長坡江口設鎭處)’ 아래에 ‘인가육호(人家六戶)’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는데, 민의혁의 보고서와 지도를 비교하여 검토한 후 이루어진 비변사의 의견에 ‘강구평(江口坪)은 단지 6호뿐입니다’라고 적혀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그림 3).

장파에 보(堡)를 설치하는 것은 비변사의 의견대로 부결되었고, 장파의 창고 설치 여부에 대해 임금은 장파 관련 전임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도록 명을 하였다. 그리고 전임 대신 대부분이 장파 지역의 호수가 아직 5~6호에 지나지 않아 창고 설치도 불가하다는 의견을 내었고, 이 때문에 장파에는 보(堡)뿐만 아니라 창고도 설치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1797년(정조 21) 2월 25일의 기록에 장파의 보(堡) 설치 문제가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에는 호수가 200여 호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과 지도 위의 색감・글씨・기호 등의 수준이 아주 높은 점을 고려해 볼 때 「북관장파지도」는 민의혁의 장계에 ‘장파의 형편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립니다’라고 언급한 지도였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4) 「북관장파지도」와 「장파지도」비교

국가대표도서관으로서 고문헌에 대한 국립중앙도서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고문헌을 한 곳에서 검색하여 여러 자료를 비교하며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과에서는 2004년에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https://www.nl.go.kr/korcis/, 앞으로는 ‘한고목’이라 부름)을 개발하였고, 2005년에는 고문헌 소장 28개 기관의 목록 DB를 구축하여 서비스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현재 국내 60개 기관과 국외 37개 기관의 목록DB 45만 건과 원문DB 4만2천여 건을 서비스 중이다.

한고목에서 ‘장파지도’로 검색하면 두 개가 나온다. 하나는 국립중앙도서관의 「북관장파지도」이고, 또 하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앞으로 ‘규장각’이라 부름)의 「장파지도」(규12160)’다. 한고목에서는 규장각 「장파지도」의 이미지까지 연결하여 볼 수는 없지만, 규장각 홈페이지의 ‘원문검색서비스’에서 ‘장파지도’로 검색해 보면 PDF 파일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해제에는 1872년 함경도에서 그려 올린 『함경도지도』의 고을지도와 함께 들어가 있고, 비변사(備邊司)의 도장이 찍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 「장파지도」의 전체적인 내용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북관장파지도」와 동일하며, 차이가 있다면 창고 기호의 크기 정도만 다를 뿐이다. 지도 위의 색감・글씨・기호 등의 수준도 높은 편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북관장파지도」와 비교해 보면 조금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북관장파지도」는 임금에게 보고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고, 규장각 소장「장파지도」는 부본으로 제작되어 비변사에서 보관하며 이용하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3. 「화도진도(花島鎭圖)」에 대한 재해제

1) 지도의 제작 범위와 지도명

지도의 이름에 나오는 화도진(花島鎭)의 설치와 혁파 연도, 설치 지역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포탈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 압박이 강해지면서 서울로 향하는 일본과 서양 세력의 근대식 대형 선박이 정박하여 군대를 정박시킬 수 있는 최단거리의 고을인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 지역에 방어를 위한 육군기지와 포대의 설치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1878년 8월에 고종의 명을 내려 두 고을의 육군기지와 포대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879년 7월에 인천의 화도진(花島鎭)과 부평의 연희진(連喜鎭)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되었다(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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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서울, 인천, 부평, 화도진, 연희진(출처:《대동여지도》규10333, 규장각 소장)

인천의 개항을 허용하기로 결정한 1882년에 먼저 혁파된 연희진은 인천광역시 서구 연희동의 용의머리(龍頭山)에, 1894년 갑오경장의 군제 개편으로 혁파된 화도진은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의 곶섬(花島)에 위치하였다. 1882년에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화도진에서 체결되었고, 100주년이 되는 1982년에 일제강점기 때 사라진 화도진의 복원을 결정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화도진도」를 참조하여 1988년에 완전한 복원이 되었고, 현재 화도진과 그 주변을 포함한 지역이 화도진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14)

「화도진도」의 지도명만 놓고 보면 ‘화도진을 그린 지도’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화도진도」에 그려진 지역의 범위는 화도진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지도 제작 범위가 다른 두 장의 지도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의 지도(앞으로는 「화도진도」A로 부름)는 인천도호부와 영종진의 관할 영역 전체, 인천도호부 주변의 바닷길과 관련된 남양도호부 소속의 영흥도, 자월도, 승황도(현재의 승봉도)까지 그렸다(그림 6).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의 관할 지역은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동구・남구・연수구・남동구 전체와 경기도 시흥시의 포동-도창동-금이동을 포함한 북쪽 지역이다. 두 번째의 지도(앞으로는「화도진도」B로 부름)는 화도진과 주변에 설치된 포대 지역을 그렸다(그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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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화도진도」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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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화도진도」B

따라서 「화도진도」라는 이름만 놓고 보면 「화도진도」B에만 붙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므로 왜 「화도진도」A를 그렸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 수 있다. 그리고 화도진은 일본과 서양의 개항 압박이 강해지면서 서울로 향하는 대형 선박이 정박하여 군대가 상륙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육군기지로 설치된 것이다. 이와 같은 화도진에 초점을 맞추어 그린 지도이기 때문에, 지도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2) 「화도진도」A와 「화도진도」B가 수록된 이유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의 곶섬(花島)에 있던 화도진은 5개의 포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첫째 가장 북쪽의 굉이부리(猫島) 포대는 동구의 만석동에, 둘째 북송곶(北松串)(북성곶(北城串)의 오기)15) 포대는 중구의 북성동에, 셋째 제물포(濟物浦) 포대는 중구의 항동에, 넷째 범아가리(虎口) 포대는 남동구의 논현동 서쪽에, 다섯째 노렴(獐島) 포대는 남동구의 논현동 동쪽에 있었다. 화도진과 관할 포대 모두를 담아내야 할 필요성이 인천도호부의 2/3 영역을 그린 「화도진도」A가 「화도진도」라는 지도명 안에 수록된 이유가 된다.

「화도진도」A의 오른쪽 위에는 화도진을 중심으로 주요 지점 사이의 거리 정보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① 화도진으로부터 서북쪽으로 굉이부리(猫島) 남북쪽 포대까지의 거리는 1리

② 화도진으로부터 서쪽으로 북송곶(北松串)(북성곶(北城串)) 남북쪽 포대까지의 거리는 1리

③ 화도진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제물포 남북쪽 포대까지의 거리는 2리

④ 화도진으로부터 남쪽으로 인천도호부 중심지까지의 거리는 10리

⑤ 인천도호부 중심지로부터 남쪽으로 범아가리(虎口) 포대까지의 거리는 10리

⑥ 인천도호부 중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노렴(獐島) 포대까지의 거리는 10리

⑦ 화도진으로부터 동쪽으로 인천 석바위장(石巖場)까지의 거리는 10리

⑧ 석바위장으로부터 남쪽으로 인천도호부 중심지까지의 거리는 10리

⑨ 석바위장으로부터 동쪽으로 비리고개(星峴)까지의 거리는 10리

⑩ 화도진으로부터 북쪽으로 부평도호부 경계 연희진까지의 거리는 30리

⑪ 서울로부터 화도진까지의 거리는 70리

화도진과 관할 포대만이 아니라 화도진-인천도호부, 인천도호부-포대, 화도진에서 서울로 가는 길인 화도진-석바위장-비리고개, 화도진-연희진, 서울-화도진 사이의 거리 등이 적혀 있다. 이것은 이 지도가 단지 화도진과 관할 포대만이 아니라 화도진과 주변 주요 지점 사이의 관계까지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며, 「화도진도」A가 수록된 또 다른 이유가 된다.

화도진은 서울로 향하는 일본과 서양의 근대식 대형 선박이 정박하여 상륙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육군기지이다. 이러한 화도진의 설치 목적에 부합하려면 서울로 향하는 근대식 대형 선박의 항로에 대한 이해가 꼭 전제되어야 하고, 「화도진도」에도 이런 항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수록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인천도호부와 영종진의 관할 영역뿐만 아니라 남양도호부 소속의 영흥도, 자월도, 승황도(현재의 승봉도)까지 담고 있는 「화도진도」A가 수록된 이유가 되는 것이다.

화도진과 바로 주변 관할 포대의 정보란 측면에서 「화도진도」A와 「화도진도」B는 거의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화도진도」A는 인천도호부와 바닷길 전체를 그렸기 때문에 연희진과 바로 주변의 관할 포대 지역을 상대적으로 작게 그렸다는 점뿐이다(그림 8). 「화도진도」B는 상대적으로 「화도진도」A에 비해 확대한 지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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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연희진과 관할 포대(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지도자료, 한국근대지형도 「김포(金浦)」 1919년 발행)

서울 주변에서 일본과 서양 세력의 압력으로 개항한 항구는 화도진 관할의 제물포 포대가 있던 곳이다. 이 지역이 인천도호부의 영역 안에서 근대식 대형 선박이 정박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형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고, 조선에서도 그것을 잘 파악하여 이곳에 화도진과 관할 포대를 집중시킨 것이다. 따라서 화도진과 바로 주변의 관할 포대에 대한 정보만 집중해서 자세하게 볼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화도진도」B가 수록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3) 「화도진도」를 통해 살펴본 화도진과 관할 포대의 위치 선정 이유

서해 바다를 통해 서울로 향하는 전통식 바닷배는 강화와 김포 사이의 염하(鹽河)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삼개(麻浦), 용산, 서강 등에 정박하였다(고동환 등, 2017, 50). 하지만 근대식 대형 선박은 썰물 때 수위가 낮아진 한강에 좌초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했고, 근대식 대형 선박을 이용하여 서울로 향하는 일본과 서양의 군대는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 등의 해안가에 정박하여 상륙한 후에 육로를 이용하여 서울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근대식 대형 선박의 출현은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중요한 항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의 바닷가가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해 바다는 깊이가 얕아 약 6시간마다 반복되는 밀물 때와 썰물 때 인천도호부 지역의 해수면 높이 차이는 최대 9m나 된다. 이 때문에 썰물 때 넓게 형성되는 갯벌에 근대식 대형 선박이 좌초하거나 갇혀버릴 가능성이 많아서 장시간 정박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중앙 정부는 이와 같은 자연 조건을 파악하여 근대식 대형 선박의 정박과 군대의 상륙을 방어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 육군기지와 포대를 신설하려고 하였고, 그 결과가 인천도호부의 화도진과 부평도호부의 연희진을 설치한 것이다.

「화도진도」가 근대적 측량이 아니라 전통식으로 제작된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근대지도 못지않게 자세하고 정확하게 담은 지형 정보가 바로 갯벌과 갯골16)이다(그림 6, 그림 7). 이것은 한국근대지형도 1:5만과 비교해 보면 그 정확성이 더욱 분명해진다(그림 9). 갯골은 썰물 때도 물이 차 있어서 배가 다닐 수 있는 곳이고, 밀물 때는 갯벌의 다른 부분보다 깊어서 근대식 대형 선박이 오가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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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화도진과 관할 포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지도자료, 한국근대지형도 「인천(仁川)」1918년 발행)

이러한 갯벌과 갯골에 대한 정보는 일본과 서양 세력에게도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그들을 방어하기 위한 조선의 중앙 정부에게도 근대식 대형 선박이 어느 방향으로 해안가에 접근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갯벌과 갯골에 대한 정보는 「화도진도」의 제작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정보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함을 쉽게 판단할 수 있고, 실제로 「화도진도」에 반영하여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화도진도」B에 그려진 갯벌과 갯골에 대한 정보만 보아도 화도진과 관할 포대의 위치가 왜 그곳에 선정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천도호부의 영역 안에서 갯벌의 크기가 가장 작은 지역이 바로 월미도와 제물포 사이이고, 이곳에는 갯골도 잘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서울로 향하는 일본과 서양의 근대식 대형 선박이 정박하여 군대의 상륙을 시도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조선에서도 이런 지형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통해 그곳에 화도진을 신설하였고, 10개의 포가 설치된 굉이부리(猫島) 포대, 8개의 포가 설치된 북송곶 포대, 13개의 포가 설치된 제물포 포대를 이 지역에 집중시키고 있다(그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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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화도진과 주변의 관할 포대(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지도자료, 한국근대지형도 「인천(仁川)」1918년 발행)

다음으로 일본과 서양의 근대식 대형 선박이 정박하여 군대의 상륙을 시도하기 가장 좋은 곳은 갯벌은 넓지만 두 개의 갯골이 바닷가까지 깊숙이 형성되어 있는 인천도호부의 서남쪽이다. 그중 북쪽 갯골이 육지와 가장 가까워지는 곳에 두 개의 포가 설치된 범아가리(虎口) 포대가, 남쪽 갯골이 육지와 가장 가까워지는 곳에 세 개의 포가 설치된 노렴(獐島) 포대가 있다. 이 중 현재 소래포구가 있는 노렴 포대는 원래 섬이었는데, 포대를 설치하면서 세 개의 섬을 연결하기 위해 둑(堤堰)을 쌓았음이 기록되어 있다.

4. 결론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본 논문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북관장파지도」와「화도진도」의 해제를 다시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과 그 과정을 전달하여, 해제 재작성 논의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관장파지도」는 1784년(정조 8) 함경도 무산도호부의 장파 지역에 군사기지인 진보(鎭堡) 설치 논의가 다시 일어나자, 다음해인 1785년(정조 9) 함경도 북병영의 병마절도사 민의혁이 조사하여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와 함께 제작된 지도의 원본일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규장각 소장「장파지도」는「북관장파지도」와 함께 제작되어 비변사에 보관하며 사용되던 부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얻게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국사편찬위원회와 규장각 홈페이지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내각일력』등에 대한 원본・원문・국역 서비스와 검색 기능,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과의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 홈페이지의 검색 기능이었다. 무산도호부의 장파에 대한 정보는 이전뿐만 아니라 현재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앞의 검색 기능이 없었던 환경에서 이루어진「북관장파지도」에 대한 해제는 해제자의 개인적 능력과 관계없이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재해제에 대한 검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87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879년에 완공된 화도진과 관할 포대는 밀물 때와 썰물 때의 해수면 높이 차이가 9m 정도로 크기 때문에 갯벌이 발달한 인천도호부의 해안에서 근대식 대형 선박이 정박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에 만들어졌고, 이런 사실은 「화도진도」와 한국근대지형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화도진도」에서 화도진과 관할 포대만큼 강조된 정보는 항로와 함께 갯벌과 갯골 정보였으며, 이들 정보는 일본과 서양 세력의 근대식 대형 선박의 정박과 상륙을 방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정보였다. 또한 화도진과 관할 포대를 왜 그 위치에 만들게 되었는지 이해하는데도 핵심적인 정보이다.

재해제를 하는 과정에서 이런 결과를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화도진의 설치 이유와 과정에 대한 정보를 일반 포털사이트에서 쉽게 검색하여 얻을 수 있었고 둘째, 화도진과 관할 포대의 위치를 검색하여 쉽게 알 수 있는 한국근대지형도 서비스가 포털사이트에서 제공되고 있으며 셋째, 경제발전기 이후 많은 간척이 이루어지기 이전 인천도호부 지역의 갯벌과 갯골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한국근대지형도에 대한 원문 이미지 서비스가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제공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검색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북관장파지도」와 「화도진도」를 비롯한 기존에 작성된 해제는 고문헌, 고지도, 근대지형도 등의 정보가 풍부해진 디지털 연구환경이 변화됨에 따라 재해제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북관장파지도」와 「화도진도」 두 지도를 재해제하는 과정에서 정리한 것으로 해제 방법론을 구사하기에는 부족함과 한계를 느낀다. 해제 방법론에 대한 내용은 앞으로 더 많은 재해제 작업을 통해서 연구하기로 한다.

1) ‘해제(解題)’는 자료의 간략한 서지사항(자료면, 저자, 제작년도 등)을 기본으로하여 보다 자료에 대한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연구자 및 일반이용자에게 자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재해제’란 용어는 기존에 해제 내용에서 해제 이후의 연구 성과와 디지털 환경의 변화함에 따라 추가적으로 수정,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본 논문에서 사용하고자 한다.

2)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에는 두 지도에 대한 기존 해제에서 수정,보완한 내용(재해제)으로 제공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화 자료 https://www.nl.go.kr/NL/contents/N10200000000.do 고지도 등 자료와 해제는 인터넷서비스, 도록, 해제집 등 다양한 형태로 이용자에게 제공하고 있다.(김기혁, 2006, 717-719) 기관별로 도서 형태의 해제집을 통해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서울대학교 규장각(편), 1993, 2004; 서울대학교 도서관, 1993; 국립중앙도서관(편), 2008; 국사편찬위원회(편), 2008; 문화재청동산문화재과(편), 200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편), 2012). 또한 지역을 중심으로 고지도를 소장처별로 정리하고 해제하는 유형도 있다.(오상학, 2005, 549-557)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국내 고지도를 비롯한 한국학자료를 소장한 기관에서는 원문DB와 해제를 서비스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고지도 등 원본 자료를 보존을 위해 영인본 제작과 원문DB 구축하고 고지도를 소장하고 있는 주요기관과 연계 통합서비스를 하고 있다.(박병주, 2009, 5)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에서 고지도 51종과 지명 정보 330,822개(중복 포함)를 제공하고 있고, 읍지류 700여종이 순차적으로 서비스하고 있다.(허태구,임한수, 2013, 279-280) 2003년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구축’, ‘한국학 고전원문정보DB구축’ 등 2005년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구축’, ‘장서각소장 국학자료 전산화작업’, ‘한국학고전원문디지털화사업’ 등을 통해 서비스되기 시작했다(김상민, 2011, 54-56). 이러한 사업은 10년~15년 이상 기간이 지난 서비스로 계속적인 연구결과가 반영되어 서비스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기존에 작성된 해제들은 기관에서 요구하는 사항(분량, 시간, 범위 등)에 맞춰서 작업해야 하는 등에 의해 한계가 있었고, 해제 작업을 할 당시에 충분한 연구자료를 통해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제 작업을 한 시기가 많이 지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참조자료들이 디지털화 되는 등의 작업 환경이 많이 변화되었으며 재해제에 대한 필요성이 요구되기도 하였다.

4)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북관장파지도’와 ‘화도진도’로 검색하면 「북관장파지도」와 「화도진도」 가 나오고, 거기에서 초록정보를 누르면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해제의 내용을 볼 수 있다. 또한 ‘온라인(원문)보기’를 누르면 원문의 디지털 이미지를 원문 크기까지 확대하여 볼 수 있어, 이 글에 나오는 「북관장파지도」와 「화도진도」 의 내용은 ‘온라인(원문)보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5)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 :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003025_002숙종실록 15권, 숙종 10년 3월 25일 신묘 2번째기사 新設茂山府。 茂山舊兵馬僉使鎭也。 咸鏡監司李世華謂地當要害, 宜置府, 於是始設邑置守

6)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 :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805023_001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5월 23일 을사 1번째기사 乙巳/接伴使朴權馳啓曰: “摠管登白山顚審見, 則鴨綠江源, 果出於山腰南邊, 故旣定爲境界, 而土門江源, 則白山東邊最下處, 有一派東流。 摠管指此爲豆江之源曰: ‘此水一東一西, 分爲兩江, 名爲分水嶺可也’ 嶺上欲立碑曰: ‘定界立石, 乃是皇旨。 道臣、儐臣, 亦宜刻名碑端。’ 臣等以旣不得同往看審, 而刻名碑端, 事不誠實, 爲答矣。”

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문검색서비스 https://kyudb.snu.ac.kr/

8)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o.kr/main.do, 원문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연결된다. 승정원일기 910책 (탈초본 49책) 영조 16년 4월 10일 경진 18/18 기사, 出擧條 拓基曰, 此亦咸鏡監司朴文秀狀啓也。 以爲三山長坡設鎭事及親騎衛加設事, 因監賑御史趙榮國書啓, 令前兵使看審。

9) 국사편찬위원회 비변사등록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bb, 원문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연결된다. 영조 16년 1740년 04월12일(음), 今四月初十日,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右議政兪所啓, 此亦咸鏡監司朴文秀狀啓也, 以爲三山・長坡設鎭事及親騎衛加設事, 因監賑御史趙榮國書啓, 令前兵使看審, 而朝家創革, 非萬不得已, 則不必爲之云, 創革之不可不審, 誠如其言, 而但此事, 則朝家姑無必爲變通之意, 故只令道臣及新兵使, 往復消詳狀聞, 則道臣之不待往復, 先自馳啓, 至謂以廟堂覆啓, 亦有許施云者, 殊未可知矣, 令道臣依前覆啓, 與帥臣往復消詳, 亦於秋巡時, 審察便否後狀聞, 以爲議處之地何如, 上曰, 依爲之。

10)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영조) http://sjw.history.go.kr/main.do, 원문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연결된다. 승정원일기 920책 (탈초본 50책) 영조 16년 9월 2일 경오 10/10 기사, ○ 李世璡成貼。 闕內無事爲白在果, 兵曹今九月初一日一二所巡將各更各度行巡無事單子, 烽燧候望無事單子。 今九月初一日觀象監單子合三度段, 監封上送爲白乎旀。 公洪左道京試官李成中所封監試初試榜目啓本一度, 全羅右水使金相斗今秋水操設行事啓本一度, 北兵使尹光莘茂山境三山長坡等地看審後還營狀啓一度, 合三度, 竝姑留院之意, 馳啓爲白臥乎事是良爾, 詮次善啓向敎是事。

11)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907014_003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7월 14일 신유 3번째기사, 北道兵馬節度使閔義爀狀啓言: “長坡之可合鎭基者, 凡三處, 曰館洞, 曰農事洞, 曰江口坪。 臣於長坡二十餘里之內, 操鍤上下, 審視土品, 則腐土數寸之下, 卽有麄沙, 麄沙數寸之下, 復有眞土。 長坡一坪, 在在皆然。 或以爲長坡坪水泡石, 民不可居, 而所謂泡石, 卽是麄沙, 不害於農, 已有可驗之跡。 館洞、農事洞, 汲路稍遠, 當以長坡爲定, 長坡之內, 當以江口坪爲定。 大抵茂山之與彼地接壤, 與六鎭無異, 而豆滿江數百里, 絶無蕃戶逼居之事, 長坡以東, 獵胡亦所不至, 把守之稀設, 似亦以此要之, 茂山西數百里, 無一關防, 長坡設鎭, 別無可言之弊。 臣意, 則先設小堡, 新入之民, 蠲役減稅, 分糶斂釋, 待其民殷土闢, 設邑陞鎭, 唯在處分。 盧隱東山, 在長坡、天坪之間, 彼我地形, 擧在眼中。 設置火底烟臺於此, 達于本府南山之烽, 長坡以上江邊, 又置數三把守, 使之詗察, 俱係設鎭後, 不可已之事。 虛項嶺路, 年前禁塞, 雖未知緣何而通塞, 無甚關係。 今若創設新鎭, 鎭卒猝難充定, 軍物未易辦備, 則鏡城之森森坡, 明川之在德堡, 便屬等閑, 革罷合設, 恐似無妨。 長坡形便, 圖畫上送。”

12)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907014_003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7월 14일 신유 3번째기사 備邊司啓言: “以狀本參諸地圖, 則自茂山府距長坡, 爲一百十五里, 而九十里間, 則田陌相連, 民家甚稠, 未及開墾者, 只是長坡洞直路數十里而已。 江口坪, 只是六戶, 則雖合先設小堡, 而堡亦有官長, 體樣豈可率六戶之民, 而稱權管之號乎? 設堡一款, 姑難輕議, 先令茂山, 置一倉厫於此地, 儲穀糶糴, 則人民必當漸聚。 少待民戶之爲數三十, 然後始置鎭堡未晩。 森森坡、在德堡, 革罷合設, 雖係設堡後事, 程途不啻數百里, 則鎭卒之勒遷, 決是行不得之端, 至於虛項嶺路, 不必設營而防之。 長坡設倉便否, 更令論理狀聞。” 又命問議原任大臣。

13)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102025_005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2월 25일 병신 5번째기사 “… 茂山之南, 所謂長坡地, 在於白頭山下, 北距茂山府爲二日程, 西距雲龍堡爲三日程。 白山一帶, 最爲要害處, 而沿江百里, 無一鎭堡之守, 識者之憂久矣。 近年以來, 人民漸聚, 土地增墾, 以戶則殆過二百餘家, 以地則可設一二鎭堡。 沿江重地, 有此民聚, 而距邑如彼之遠, 其在邊政, 豈不踈虞? 若移鏡城一二堡於此處, 則軍器諸物, 不患不備, 而初頭設施, 不過一築城而已。”

14) 인천광역시 인천소개(사진으로 보는 역사) https://www.incheon.go.kr/IC040316/1519280

15) 「화도진도(花島鎭圖)」1, 2에는 북성곶(北城串)이 북송곶(北松串)으로 표기되어 있다. 「화도진도(花島鎭圖)」1, 2에 오류표기로 보인다. 본 논문에서는 ‘지도 지명표기(오류 수정표기)’로 쓰기로 한다.

16) 갯골은 갯벌 사이로 난 물길(갯고랑)이다. 갯골은 자연 정화조로서의 기능과 자연재해 및 기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연안 생태계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갯골을 따라 내륙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도 했고, 갯골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기도 했다. 따라서 화도진도가 제작되었을 당시 갯골을 통한 외세의 침침에 대해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갯벌과 갯골의 정보를 자세히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Acknowledgements

본 논문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북관장파지도」와 「화도진도」 재해제 작업을 통해 정리한 논문임을 밝힘.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진흥사업단)의 한국학 분야 토대연구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AKS-2016-KFR-123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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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국립중앙도서관) https://www.nl.go.kr/korcis/bulletin/view.php?rnum=&no=54&keyfield=2&key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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