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1 December 2024. 719-736
https://doi.org/10.22776/kgs.2024.59.6.719

ABSTRACT


MAIN

  • 1. 머리말

  • 2. 선행 연구의 성과와 주요 과제

  • 3. 읍치 이설의 주요 배경과 절차

  •   1) 읍치 이설의 주요 배경: 기존 입지의 부정 요인

  •   2) 읍치 이설의 과정과 절차

  • 4. 주요 이설 사례로 본 대안 입지의 입지적 지향

  •   1) 국가 차원의 대원칙, 그리고 그 변주(變奏)

  •   2) 다양한 지역적 요인들과 복합성

  •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시대 330여 개 고을의 행정 타운이던 읍치(邑治)는 한반도의 전통도시를 대변한다. 오늘날 옛 읍치의 경관 흔적은 국토 각지에 분포하며,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의 이른바 ‘역사도시경관’(Historic Urban Landscape: HUL)과 조응하는 헤리티지이다(전종한, 2023, 35). 우리 역사에서 읍치는 자연발생적인 것이기보다는 국가가 지방 통치 및 행정이나 군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편성‧관리하던 치소(治所)의 의미였다(최기엽, 2001, 3). 읍치를 일컬어 ‘국가가 지방에 남긴 대표적인 공적 문화유산’이라 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평가일 것이다(이해준, 2015, 76).

읍치의 설치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만큼 옛 읍치 공간에는 당대 왕조와 조정이 상정하던 치소 설치 원칙, 치소 안팎의 주요 경관 요소 및 장소의 상징성과 공간 배치 원리, 읍치에서 행해진 각종 의례 및 전체적 공간 구성을 통해 지향했던 관념이나 사상 등이 명시적이거나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김덕현, 2004, 19). 우리의 전통도시 공간으로서 읍치에 관한 연구는 근대 이전 우리 국토의 보편적 지방 도시 경관에 접근하는 작업이자, 거기에 내포된 지방 통치의 원칙과 전략 등 국토(國土) 경영의 일면을 살펴보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다(전종한, 2004, 322).

지금까지 조선의 읍치에 대한 연구는 지리학, 역사학, 조경학, 건축학, 도시계획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결코 적잖은 빈도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축적된 조선의 읍치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일종의 학제적 분야로서 ‘읍치학’(邑治學)을 설정해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때 읍치학의 연구 대상은 ‘조선시대의 읍치 공간’이 되는 것이고, 대주제로 삼을만한 유의미한 하나는 ‘전통도시로서 읍치 공간의 지역인문학적 성격’이다.

위 대주제는 조선의 읍치를 한반도의 전통도시로 상정하겠다는 인식, 그리고 조선의 읍치 공간을 ‘지역환경과 사회, 문화, 정치의 교차점에 자리한 당대 인간 삶의 응집체로 보면서 우리의 현재적 삶의 질과 정체성 증진의 원천으로 이해하려는’, 요컨대 지역인문학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입장을 담아낸다.

읍치학의 학문 체계는 두 축에서 구성될 수 있다고 보는데, 한 축은 읍치 입지론, 읍치 경관론, 읍치 구조론 내지 형태론, 읍치 신앙의례 등등이고, 다른 한 축은 원형 탐구, 변천 과정 탐구, 현재적 가치 탐구 등이다. 그리고 이 두 축의 조합을 통해 읍치학의 세부 연구 줄기(주제)들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읍치는 무엇보다 지리적 실체이므로 읍치학의 체계에서 토대가 되는 연구 줄기를 뽑는다면 그것은 ‘읍치 입지론(立地論)’일 것이다. 읍치의 입지는 읍치 안팎 핵심 경관 요소들의 상징성, 주요 기능체 및 장소의 절대적, 상대적 배치와 연관될 뿐 아니라, 읍치의 전체적 공간 구성이나 인문적 성격을 구명함에 있어 기본이 되는 사안이 되므로 여타 줄기의 주제들을 탐구하는 데에 기초가 된다. 하지만 이 같은 위상에 비하면 읍치 입지론 관련 연구는 그 성과나 심도에 있어 미흡한 편이며, 그나마도 특수한 사례 연구나 풍수적 해석에 한정되어 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읍치의 입지적 지향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조선시대를 관통해 확인되는 읍치 이설(移設) 사례들을 분석하여 접근하는 방법을 취한다. 물론, 조선 읍치의 입지 요인을 확실하게 알아보는 방법은 당시 읍치 신설의 주요 원칙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사료(史料)를 찾아 거기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읍치 신설(新設)에 대한 기록은 주요 관찬 사료와 지리지, 고지도 등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파편 수준의 사실 정보에 불과하다. 읍치 신설의 자세한 과정을 알려주는 기록은 희소한 편이고, 특히 어떤 요인들이 신설 읍치의 입지에 작용했고 거기에 어떤 입지 원리 내지 원칙이 있었는지 소상히 알려주는 기록은 드물다.

이렇게 빈약한 자료 형편에서 조선 읍치의 입지 문제를 탐구하는 대안적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신설(新設)보다는 이설(移設) 사례를 통해 주요 배경, 전반적 과정과 구체적 절차 등을 분석하는 접근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설 사례는 기존 입지가 부정(否定)된 이유를 알려줌과 동시에, 새로운 대안(代案) 입지의 선정 과정과 주요 요인을 함께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설 사례를 면밀히 분석한다면, 어떤 배경에서 기존 입지를 부정 혹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안 입지를 선정하는 과정에 어떤 요인들을 고려하였는지, 기존 입지로부터 대안 입지로의 이설 절차는 어떠하였는지, 이설에 소요되는 자금은 누가 어떻게 마련했는지, 이설 시기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했는지, 백성들의 바람이 고려되긴 했는지 아니면 관(官)의 입장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정하였는지, 이설 역사(役事)를 실행하기 위해 조정과 지역사회의 관계는 어떠하였는지 등등 단지 입지 요인만이 아니라 그것이 포진해 있던 맥락성까지 상세하게 살필 수 있다.

읍치학에서 읍치 입지론이 갖는 의의와 위상에 비하면 조선의 읍치 입지를 중심 주제로 다룬 연구물은 빈약하다. 읍치 입지를 언급한 연구가 빈도상 적은 것은 아니지만, 기존 연구들은 대개 한두 개의 소수 사례만을 분석하고 있거나 다른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개관하는 수준에서 간략히 입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조선 읍치 입지의 경향성을 논하기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 같은 형편에서 본 고의 선행 연구로 거론한 말한 것은 지리학계의 이기봉・홍금수(2007), 최원석(2007)의 연구와, 역사학계의 정요근(2011)의 연구, 이 세 편으로 압축된다.1) 다만 이 중 첫 번째, 두 번째 연구는 거의 동일한 조사 자료에 근거한 것이므로 아래의 선행 연구 고찰에서는 이 둘을 묶어 ‘전자’로 칭하고, 세 번째 연구를 ‘후자’로 칭하기로 한다. 본 연구는 이들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읍치 입지에 관한 연구 성과와 추가적 구명이 필요한 과제들을 도출하면서 이 주제의 이해를 심화해 보고자 한다.

2. 선행 연구의 성과와 주요 과제

전자와 후자의 연구는 조선의 읍치 입지에 대한 통시적이면서도 공시적인 연구이다. 전자는 경상도 71개 군현의 91개 읍치를 대상으로 읍치 입지의 구체적 형태와 시대적 변화 경향을 살핀 것이고, 후자는 행정구역 통폐합이 빈번했던 여말선초의 신설 및 이동 읍치를 대상으로 입지 경향을 분석한 것이다.

전자의 주요 결론은, ‘조선시대의 전형적 읍치 입지는 배산임수 및 풍수적 조형 원리에 따른 것인데, 다만 이 원리는 1430년대 이전의 신설 읍치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았고 조선 중기 이후의 읍치 입지에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이기봉・홍금수, 2007, 331; 최원석, 2007, 554). 이와 비교해 후자의 결론은 ‘여말선초의 읍지 입지는 풍수적 형국 요인보다는 새롭게 통폐합된 고을 영역에서의 중심성, 교통 요충지, 그 외 방어 상의 유리한 지점에 입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정리한다(정요근, 2011, 205). 이들 연구의 결론에서 볼 수 있듯이 양자의 관점은 서로 대비되고 각자의 성과와 과제도 자명하다. 연구자는 양자의 결론과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차후 과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읍치 입지의 풍수적 요인에 관한 부분이다. 전자의 연구는 읍치 입지와 풍수 사상의 관계를 경상도 전체 고을에 대해 광범위하게 조사한 연구로서 의의가 있는데, 이를 통해 풍수적 요인이 1430년대 이후 혹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읍치 입지를 이해할 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후자 역시 풍수 요인은 여말선초의 읍치 입지에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고려 왕조가 풍수를 불교와 함께 국가 안녕의 기조로 삼았다는 사실이나(최원석, 2002, 166), 고려에 이어 조선 초부터 풍수는 십학(十學)의 하나로서 위상이 높았다 사실(권선정, 2017, 37)을 상기할 때 잘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정상과학으로서 풍수의 학문적 위상은 조선후기보다는 오히려 고려와 조선 전기에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전종한, 2022, 64).

한편, 조선 중기 이후에 국가 차원에서 과연 지방 읍치의 입지를 위해 풍수를 주요 요인으로 중앙 조정에서 진지하게 고려했는지도 의문이다. 또한 조선의 읍치가 기능상 행정 타운이고 관아와 창고 같은 국가 시설이 배치되었던 공간이라는 점에서, 조선의 읍치 입지를 해명함에 있어 풍수적 요인 외에도 백성들의 접근성 향상을 위한 읍치의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 유리한 교통로 입지, 방어상 요충지 입지 등의 여타 요인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후속 연구도 필요하다.

후자의 연구는 여말선초라는 국토 공간의 재편 상황에서 교통과 방어가 읍치 입지에서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큰 틀에서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이지만, 교통과 방어를 묶어 하나의 요인처럼 다루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이며, 특히 풍수적 요인을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한 것은 재고가 요구된다. 당대에 읍치 입지를 판단할 때 신설 고을 영역에서의 중심성이나 지리적 요충성을 1차로 고려하였다 하더라도, 다음 단계로 낙점 위치에서의 풍수적 좌향(坐向)과 국면(局面)을 중요하게 고려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풍수적 요인을 부수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

둘째, 읍치 입지의 지역적 요인에 관한 부분이다. 여기서 지역적 요인이란 지역 차원에서 특수하게 전개되었던 자연환경, 사회적 관계, 지역경제 형편, 지역문화 및 여론 등의 제요인들을 말한다. 지역 현장에서 실제로 관찰되는 산줄기와 물줄기의 흐름과 단절, 주변 산수(山水)에 대한 지역민들의 환경 인지와 대응, 장소정체성의 차이에 따른 지역 내 사회집단의 국지적 분화 및 그들 간 권력 관계, 경지(耕地) 여건이나 도로망 조건, 고을과 지역 차원에서 이어져 온 문화적 관습과 실천, 백성들의 그때그때 민원 등의 요인을 말한다.

가령 국가 차원에서 해당 고을의 중심부 위치에 읍치를 입지시킨다는 원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조선 조정에서는 반드시 관리를 파견하여 지역 현장을 실제로 확인하거나 지역 여론을 청취하는 등의 절차를 둠으로써 해당 원칙을 경직되게 적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적 요인들은 사료(史料) 분석만으로는 밝혀내기 어려운 것으로, 현지답사를 통한 현장 확인, 지역에서 전하는 구전이나 이야기 채록, 여러 기록 간 교차 검토 등을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셋째, 홍수, 기근, 감염병 등으로 인한 각종 자연재해, 사회적 재난, 그리고 역모나 반란 같은 소위 불온(不穩) 세력 등에 관련된 요인이다. 이러한 자연재해나 사회적 재난, 불온 세력에 관계된 요인은 해당 고을에 국한된 경우도 있고, 도(道) 이상의 지역적 스케일, 더 넓게는 국가 전역에서 나타났던 사건의 일부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 왕조가 지방을 통치하던 방식으로 미루어 보건대, 어떤 고을에서 반복된 홍수나 기근, 감염병 창궐이 있었던 경우나, 불온 세력의 출몰지로 낙인찍힌 고을의 경우, 국가는 그 고을 읍치의 폐지나 이설(移設)을 검토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지역의 경제 형편 및 지역민의 편리와 바람을 고려하여,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지역민의 경계(警戒)와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요약하자면 조선의 읍치 입지는 지방 통치 거점으로서 요구되는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 외에 풍수적 요인, 교통・접근성 요인, 방어 전략적 요인, 전국 각 지역 및 해당 고을의 자연적, 인문적 환경 특성에서 비롯된 제반 지역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 가설에서 염두에 두고자 하는 것은 풍수적 요인이 가장 중요했다던가, 풍수적 요인보다 교통‧접근성 요인이 더 중요했다와 같은 양자택일 방식의 이해는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읍치 이설을 기록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볼 때, 조선시대에는 읍치 입지의 해당 고을 내 중심부나 방어상 요충지 지향, 간선교통로 접근성 등이 국가적 대원칙으로 부상하며 조정(朝廷)에서 어느 정도 공감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입지 선정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역민의 환경 인지, 특정 자연재해의 반복성이나 사회적 재난의 여하, 국지적 지세 및 수리(水利) 환경, 풍수적 평가 등이 때로는 ‘동시에’ ‘복합적으로’ 고려되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따라서 조선 읍치의 입지적 지향을 논의함에 있어서는, 어떤 요인이 가장 중요했는지를 종합 순위로 매기는 식의 결론, 아니면 그와 반대로 단지 병렬 수준에서 제시하는 식의 결론보다는, 한편으로는 국가가 중요시했던 대원칙이 무엇이었는지 살피면서 다른 편으로는 사례 지역의 환경 특성과 시대적 특수 상황을 고려하며 해체하여 접근하는 것이 유효할 것으로 본다.

3. 읍치 이설의 주요 배경과 절차

1) 읍치 이설의 주요 배경: 기존 입지의 부정 요인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의 주요 관찬 사료들에 기록된 읍치 이설 사례들을 분석해 보면 읍치 이설의 배경은 국토의 각 지역에 따라 그리고 특정 사건이 있었던 특정 시기에 주목하며 다양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령 서남해안의 여러 섬이나 압록강 및 두만강 유역, 조선초 새롭게 편입된 북방 영토 등의 변경 지역에서는 신규 고을로의 행정 편입, 행정구역 재편성, 영토 방어 전략상의 필요, 변경지 백성들의 불안과 민원 등이 기존 입지에 대한 주요 부정 요인이었다. 이에 비해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근기(近畿) 지역의 경우는, 마치 지역의 위치적 특성을 반영하듯, 왕가(王家)의 능원(陵園) 조성이나 천릉(遷陵)이 읍치 이설의 주요 배경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비롯한 그 밖의 지역에서는 한 고을 안에서 기존 읍치의 지리적 편중 입지, 읍치 일대에서 발생했던 감염병, 홍수나 화재 등으로 인한 재해, 조선 중기의 양대 전란으로 인한 관아 소실과 파괴, 기존 읍치의 공간적 협착성이나 수리 조건의 한계,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같은 불합리한 행정 경계 재조정에 따른 읍치 이동의 필요 등등이 주요 부정 요인들로 확인된다. 이렇게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요인들은 읍치 이설에 각기 독립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고 종종 서로 연동하여 작동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주요 지역별 사례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 국토의 외곽인 변경 지역의 경우이다. 조선시대의 변경 지역은 영토 개척 과정에서 행정구역으로의 신규 편입, 행정구역 조정 등이 자주 있었던 공간이다. 이에 따라 인구 유입이나 거주지 이동, 그리고 행정구역 재편성과 고을 간 통폐합, 방어에 유리한 요충지에의 읍치 재배치 등이 수시로 필요했고, 이를 배경으로 읍치 이설이 종종 이루어졌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가령 ‘(평안도) 의주부윤 이명언이 읍치(邑治)를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길 것을 소청하였기에 신도 가서 형편을 보았더니 참으로 천작(天作)의 땅으로 힘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니 청컨대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서 장문(壯聞)하게 하소서 하니 … (중략) …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겠다고 하유(下諭)하였다.’,2) ‘병조판서 김상로가 북관(北關)을 순행하고 말하기를 … (중략) … 길주는 대나무를 쪼개는 듯하게 막을 수 없는 근심이 있어서 관방(關防)으로 믿을 곳이 못됩니다. 길주 읍치를 남쪽 10여 리 지점인 창덕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만 못합니다. … (중략) … 임금이 말하기를 … (중략) … 명년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도록 하라.’3), ‘(함경도) 삼수부는 만산(萬山) 가운데에 있는데 읍치가 한구석에 치우쳐 있으므로 백성들의 고통을 살필 수 없습니다. … (중략) … 이제 어면(魚面)에 옮겨 설치한다면 호령이 경내에 행해질 것입니다.’4) 등이 보인다. 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록은 ‘천작(天作)의 땅으로 힘을 얻을 수 있다’, ‘관방(關防)으로 믿을 만하다.’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영토 방어를 위한 천혜의 요충지를 얻기 위해, 그리고 세 번째 기록은 기존 읍치가 고을 한쪽에 치우쳐 있어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배경에서 각각 읍치 이설이 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한성(漢城) 주변인 근기 지역의 경우이다. 근기 지역에서 읍치 이설의 주요 배경으로 주목되는 것은 능원(陵園) 조성 및 천릉(遷陵)으로 인한 것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7년(1731) 5월 9일 기록에 나오는 ‘나의 큰일 중에 능침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주(州)나 목(牧) 같은 큰 곳이라 해도 옮기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천릉은 중요하고 읍을 옮기는 것은 가볍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백성을 불쌍히 돌보라는 성조(聖祖)의 유지(遺志)를 생각하면 충분히 자세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다.’5)라는 내용에서 왕릉 조성을 읍치 이설보다 훨씬 중하게 여기는 임금의 입장을 볼 수 있다. 또한, ‘원소(園所)를 이제 수원으로 완전히 결정하였으니 읍치(邑治) 옮기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읍을 옮기고 백성을 옮기는 일을 매번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생각하신다는 것을 신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나 … (하략).’6)와 같은 내용에서 능원 조성을 위해서라면 읍치 이설은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당대 조정의 의론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경상도와 전라도를 비롯한 삼남 지방과 그 밖의 지역의 경우이다. 특히 삼남 지방은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살아가던 주된 삶터였고, 조선 사대부들의 핵심 근거지들이 산재해 있었으며,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의 피해가 심각했던 지역이다. 그 결과 자연재해, 사회적 재난, 풍수적 환경 인지, 기존 읍치의 지리적 편중 입지, 간선교통로 접근성 제고 등등의 다양한 일반(generic) 요인들이 읍치 읍지 및 이설에 영향을 주었고, 전란 때 외세의 주요 침략 경로에 위치해 큰 피해를 겪었던 고을들에서는 그 뒤의 읍치 입지에서 방어상의 전략적 요충지 요인이 특별히 부각되었다. 주요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종조에 봉산, 재령, 문화 등의 고을에서 여역(癘疫)이 많이 발생하여 읍치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7)라는 기록은 감염병 창궐이 읍치 이설의 요인이었다는 점을, 그리고 ‘지리(地利)가 길하지 않은 것이 또 이와 같아서 요절하는 사람이 줄을 잇고 빈천이 막심하여 백성들이 근심하여 함께 하소연하며 읍의 이전을 바란 지 수백 년이나 되었으나 아직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8)라는 기록은 지역민의 환경 인지가 읍치 이설의 요인이었음을 알려준다.

<<순조실록>> 11년(1811) 3월 30일 기사에 보이는 ‘영원(寧遠)은 읍치를 도리(道里)가 균일한 적합한 지역으로 옮기고 …(하략).’9)라는 내용은 기존 읍치 입지의 지리적 편중성(偏重性)이, ‘수영(水營), 진도(珍島), 제주(濟州) 등 11개 지방은 방어사객(防禦使客)이 지나가는 데 맞이하고 보내기가 어려우므로 병오년에 큰길[大路]의 중앙의 땅에다 읍치를 옮겨 설치하고자 하여 … (하략).’10)라는 기록은 국가 간선교통망에의 접근성 제고가, 그리고 ‘영일현(迎日縣)이 해문(海門)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보니 강물이 들어와 마을이 잠기는데, 장맛비가 조금만 와도 마치 큰물을 겪은 듯합니다. 영일현 북쪽 10리쯤에 그전에 읍을 만들려던 터가 있는데, 지형이 조금 높고 들녘이 넓어서 지세로 보나 백성들의 뜻으로 보나 마을을 옮기는 것이 합당하니 …(하략).’11)라는 기록은 홍수로 인한 자연재해가 각각 주요 요인이었음을 보여준다.

2) 읍치 이설의 과정과 절차

읍치 이설은 해당 읍치의 지방관이나 도(道) 관찰사, 암행어사 등 그 필요성을 인지한 신하가 행정적 위계를 밟아 먼저 조정에 건의하면, 이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하고, 필요시 해당 도의 감사나 특별 관리를 현지에 파견하여 실사하고, 임금이 윤허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당 도 관찰사는 조정의 명에 의거 필요에 따라 현지 조사를 재실시하고 도형(圖形)을 갖추는 등의 보완 자료를 마련하여 보고하였다. 아래 네 건의 기록에서 이 과정을 볼 수 있다.

• 읍치를 옮겨 설치하고자 하여 현감(縣監)에게 아뢰니, 감사(監司)에게 전보(傳報)하고 계문(啓聞)하여 허락을 얻었습니다(<<문종실록>> 1년(1451) 11월 27일).

별도로 도형(圖形)을 작성하여 보고하니 다시 묘당에서 품처하기를 청합니다.” 읍을 이설(移設)하는 일은 본래 매우 어렵고 … (하략)(<<비변사등록>> 영조 25년(1749) 5월 29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이해(利害)와 편부(便否)를 상세히 탐지하여 옛 터가 새 자리만 못하다면 종전대로 두고 새 자리가 옛 터만 못하면 논리하여 장문(狀聞)한 뒤에 가을에 가서 다시 옮기라는 취지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비변사등록>> 정조 14년(1790) 2월 17일).

• 해군(該郡)이 운흥(雲興)으로 읍을 옮긴 것이 정축년(영조 33, 1757)에 있었는데 정해년에 이르러 화재(火災)를 만난 뒤에 도신이 기지(基地)가 매우 협착하고 우물물이 부족하여 불을 끌 물이 없어서 여러 민가가 연달아 소실되었으므로 읍 옮길 것을 장청(狀請)하자 특별히 비변랑을 파견하여 적간(摘奸)을 하고 대신과 제재(諸宰)에게 물어보고 하교하시기를… (하략)(<<비변사등록>> 정조 24년(1800) 3월 24일).

중앙 조정에서 읍치를 이설하기로 결정하면 실제 이설 작업은 해당 고을의 지방관이 주관하여 시행하였다. 읍치 이설은 중요한 국가 사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당 고을의 재정과 백성들의 노역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해당 지방관이 이설 작업을 감당할 능력이 되는지 미리 점검하기도 하였다. 이 점은 정조 때의 전라 감사의 장계에서 엿볼 수 있는데 ‘창평 현령(昌平縣令) 조광존(趙光存)은 이읍(移邑)하는 큰일을 지금 막 시작하였으니, 우선 성취하는 것을 살펴서 일을 주관할 만한지를 검증해야 합니다.’는 기록이 보인다.12)

읍치 이설 시기는 백성들의 생활이나 농사력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읍치를 옮겨 짓는 것은 우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다시 장계로 보고하고 거행하라는 내용으로 분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13) ‘관에서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고 백성들은 읍치 옮기는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바로 영읍의 책임이니 각별히 유념해서 거행하라는 내용으로 엄히 신칙(申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14) ‘고을을 옮기는 일은 거역(巨役)입니다. 지금처럼 전에 없이 흉년을 당하여 급하지도 않은 거역을 갑자기 경영한다는 것은 시기를 보고 사세를 살피는 것으로도 도리가 아닙니다.’,15) ‘지금 거듭 흉년을 겪은 뒤끝이라 백성을 이동시키고 읍을 옮길 때가 아닙니다.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16) 등의 다수 기록이 있다. 이설 시기를 결정할 때 무엇보다 백성들의 삶에 폐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특별히 유의하였던 것이다.

읍치 이설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였을까? 근기 지역에서 보이는 능원 조성을 위한 읍치 이설의 경우, 왕가(王家)의 필요에 의해 읍치를 이설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비용은 전적으로 조정에서 부담하였다.17) 이에 비해 지방 고을 읍치의 이설 비용은 해당 고을의 관민이 합심하여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이설에 소요되는 총비용과 충당 방법, 집행 등은 조정에 항상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고을에서 마련할 수 있는 이설 자금이 부족할 때에는 조정에서 일부 자금을 해당 고을에 빌려주고 차후 돌려받는 방식을 취하였다.18)

읍치 이설 역사(役事)가 끝나면 그 성공 여부를 가려 해당 지방관이나 작업 감독관에게 논상(論賞)하는 과정이 뒤따랐다. 이에 관한 기록들도 확인되는데, ‘전 위원군수(渭原郡守) 박종성(朴宗城)이 이읍(移邑)을 하고 성(城)을 쌓았는데 역사(役事)를 감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논상(論賞)하게 되어 있는데도 박종성은 공로를 세운 사람들은 보고하지 않고 … (하략).’,19) ‘연일현의 고을 터를 옮겨 설치할 때 해당 현감 원우상(元禹常)이 성실한 마음으로 경영하였는바 매우 가상하며, 감동인(監董人)들도 여러 달 동안 노고를 하였으니 뜻을 보여 주어야 마땅할 듯한 바 논상(論賞)하는 한 가지 일을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달라는 일을 가지고 전교하기를 … (하략).’20) 등이 그것이다. 특히 ‘반드시 논상하게 되어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읍치의 최적 입지 이설은 기본 원칙을 고려해 조정에서 시종(始終)을 계획하고, 과정을 감독하고, 결과를 감리하던, 말하자면 국가적 사업이었고 조정이 책임져야 할 과업이었다.

4. 주요 이설 사례로 본 대안 입지의 입지적 지향

이상에서 살펴본 읍치 이설의 주요 배경은 곧 기존 입지에 대한 부정 요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부정 요인은 대안 입지를 탐색하기 위한 긍정 요인들이 무엇인지 반증(反證)하므로, 결국 대안 입지의 입지적 지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분석 결과, 대안 입지의 입지적 지향은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재해와 재난으로부터 비호(庇護)받을 수 있는 지형 조건, 안전하고 충분한 수토(水土) 환경, 풍수적 환경 인지와 길지(吉地) 관념 등으로 다양하게 확인된다.

그런데 이들 요인을 이해함에 있어 유념할 것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종합적으로 우선순위를 매기거나 이와 반대로 병렬하여 열거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보다는, 국가 차원의 대원칙에 해당하는 요인은 무엇이었는지를 한편으로 파악하면서, 다른 편에서 지역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요인들은 무엇었는지를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고, 이것을 다시 시대적 맥락에서 접근하여 그 지속이나 변화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 차원의 대원칙이 중요했고 지역적 요인들은 부차적이었다.’라거나 ‘이러이러한 요인들이 조선시대를 통틀어 중요했다.’와 같은 형식의 결론을 지양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보다는 국가적, 지역적, 시대적 맥락을 두루 고려하면서 대안 입지의 입지적 지향을 포괄적이고 유연하게 이해해야 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1) 국가 차원의 대원칙, 그리고 그 변주(變奏)

읍치 이설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이 대안 입지의 입지적 지향을 이끈 국가 차원의 대원칙을 알려준다. 그것은 풍수도 아니었고, 교통상의 결절성도, 지리적 요충성도 아니었으며, 다름 아닌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였다. 조선 읍치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 국토 각지의 통치에 있었음을 상기할 때 이 점이 대원칙이라는 점은 당연한 것이다. 고려와 달리 조선은 중앙집권을 추구하던 왕조로서 초기부터 국토 각 지방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각 지방 고을의 가능한 한 최대의 백성들에게 조선의 지배 이념을 효과적으로 확산하며, 백성을 널리 교화하고, 지역 행정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데 주력했고,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읍치 입지의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지향은 대원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읍치의 본질적 성격이 지방 통치의 거점(據點)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17년(1435) 7월 22일 기사에는 각 도의 감사들이 합칠 만한 고을에 대해 보고하면서 적절한 읍치 입지가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자리에서 경기 감사 성개(成槩)는 ‘임진현(臨津縣)은 땅이 좁고 길며 남쪽은 해풍군(海豐郡)으로 깊이 들어갔으니, 합쳐서 한 군(郡)으로 만들고 읍치(邑治)를 중앙에 두어야 합니다.’, ‘임강현(臨江縣)과 장단현(長湍縣)은 서로 떨어진 거리가 30리에 불과하니, 또한 합쳐서 한 군으로 만들고 읍치는 중앙에 두되 …(하략).’라고 하였다. 그는 두 개 이상의 고을을 합칠 때 기존의 각 고을 읍치를 대신해 통합 고을의 읍치를 신설할 것을 말하고 있고, 이때 통합 읍치의 입지는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전라 감사 민심언(閔審言) 역시 거의 비슷한 의견을 내놓는다. 그는 ‘고창(高敞)과 흥덕(興德) 두 현은 사방 경계까지 떨어진 거리가 고르지 않으니, 한 현을 도태할 만합니다. 그러나 고창현에다 흥덕현을 합치면 장성현(長城縣)과의 거리는 대단히 가까워지고 고부군(古阜郡)과의 거리는 멀어지며, 흥덕현에다 고창현을 합치면 고부군과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영광군(靈光郡)과의 거리는 매우 멀어집니다. 또 두 현의 읍치를 설치한 곳도 모두 적합하지 못하니, 두 고을을 합치고 읍치를 중앙에 두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실 위 두 사람이 제시한 구체적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서로 다르다. 경기 감사는 두 고을을 합칠 때 통합 고을의 지리적 중앙을 재확인해서 그곳에 읍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고, 전라 감사의 의견은 단순한 지리적 중앙이 아니라 통합 고을의 읍치와 주변 고을 읍치들과의 거리가 균등한지를 기준으로 그 중심에 통합 고을의 읍치 입지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만약 두 사람의 제안대로 실제 읍치 입지를 지도상에 표시한다면 두 개 위치 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본다. 요컨대 경기 감사와 전라 감사의 결론은 모두 ‘읍치 입지는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에 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거의 같다고 간주할 수 있다. 조선초 조정의 관련 논의를 담은 이상의 기록에서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가 조선 초부터 읍치 입지의 국가적 대원칙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라는 대원칙은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견지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정불변의 것도 아니었고 경직되게 적용하려야 그럴 수도 없었다. 이 원칙은 지역적 특성,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주(變奏)를 보였다. 다음 기록에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삼수부에서) 어면(魚面)으로 읍치를 옮기는 것은 조금만 변통하면 조금은 유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장의 생리(生利)는 오로직 담비, 인삼의 득실에 따라 그 민식(民食)의 풍겸(豐歉)이 달라지고 부치(府治, 읍치)가 치우쳐 있거나 진보(鎭堡)가 두루 벌여 있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읍치를 이곳(삼수부)에 처음 설치한 것은 반드시 ❶어면이 한 고을의 가운데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닐 것인데, ❷저것(어면, 고을의 지리적 중심부)를 버리고 이것(삼수부)를 취한 데에는 반드시 뜻이 있을 것이니 …(하략).21)

• ‘도신 김이양(金履陽)이 두 가지 방책을 아뢰었는데, 하나는 장진을 별해에 이설하자는 것이고, 다음은 별해를 분할하여 독진(獨鎭)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비변사에서 복계하기를, “장진은 백성이 흩어지고 고을이 비어서 과연 고을을 세우기가 어려우나, ❸별해는 땅이 넉넉하고 관애(關隘)가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장진을 별해로 옮긴다면 일거 양전(一擧兩全)의 방책으로서 …(하략).”하니, 그대로 따랐다.’22)

위 글은 함경도 삼수부 읍치를 기존 입지에서 어면(魚面)이라는 곳으로 옮기는 일을 기록한 것이다. ❶은 어면이 삼수부의 ‘고을 가운데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사실을 말한 것이고, ❷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뜻이 있어 지금까지 다른 곳(즉 고을 중심부가 아닌 곳)에 입지해 있다.’는 것으로 그점을 살펴 읍치 이설에 신중을 기하자는 것이다. ‘신이 전에 맡았던 삼수부는 북관(北關)의 중요한 요새입니다. 그 험하고 가로막힌 형세가 한 도에서 으뜸인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땅은 춥고 샘은 차며 또 원야(原野)에 거주할 만한 땅이 없습니다.’23)라는 또 다른 기록과 교차시켜 검토해보면, 삼수부는 조선초에 개척된 북방 영토에 해당하는 곳으로 압록강 건너로 쫓겨간 여진족이 수시로 넘보던 불안 요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수부와 같은 변경 지역의 경우 방어는 중요한 데 비해 경작 가능한 토지 규모와 백성 인구는 적었고, 결과적으로 읍치의 입지 지향에 있어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라는 대원칙은 설령 인지하고 있었더라도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국경 통제 및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 지점을 보다 우선시하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❸은 함경도 장진 고을의 사례인데 앞의 삼수부와 비슷한 경우로, 두 고을 모두 변경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변경 지역에 비해 비교적 민생이 안정되어 있었던 삼남 지방의 경우에도 읍치의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는 기본적으로 고려되는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밖의 여러 요인들이 뒤섞이기도, 가미되기도 하였다. 다음의 사례가 그 전형을 보여준다.

• 삼도 도체찰찰사(都體察使) 정분(鄭苯)이 아뢰기를, 강진현은 탐진과 도강 두 현을 합하여 ❹두 고을의 중앙인 탐진 옛 현의 산성(山城)에 읍치를 설치하였는데 그 뒤에 산성이 협착하다고 하여 감사가 조정에 전보하여 읍을 도강의 송계리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 ❺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가 날로 더욱 감소되고 … (중략) … 읍치를 산성에 둔지 10여 년 되었으나, ❻산성이 협착하고 수초(水草)가 없으며 3면이 비어서 화재(火災)가 끊이지 않아 고나사(官舍)가 다 타 버렸습니다. … (중략) … ❼고을 향리 최당이 탐진의 토성이요, 그의 전토가 소재한 까닭에 관리와 백성과 내통하고 공모하여 여러 가지로 말을 꾸미고 강진으로 도로 가고자 합니다. … (중략) … 신이 도강과 탐진 두 현의 백성들을 불러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물으니, ❽도강의 백성들은 송계에 그대로 두기를 원하고 탐진 백성은 탐진으로 옮기기를 원하여 서로 다투고 힐난하여 능히 상하(上下)가 없으니 … (하략).24)

위 자료에서 ❹는 통합 고을의 지리적 중심에 읍치를 설치했다는 것으로 국가적 대원칙을 일단 적용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❺와 ❻은 공간의 협착성(狹窄性), 향리와 노비 수 및 백성 인구 등 민력(民力)의 감소, 지형 환경에 있어서의 화재 취약성 등이 고을 중앙에 입지했던 기존 읍치의 이설을 압박한 요인들로 작용했음을, 그리고 ❼과 ❽은 고을 내의 국지적 지역사회집단들이 이해관계가 달라 대안 입지의 선정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이설을 위한 논의 과정이 지난했음을 추측케 한다.

시대적 맥락 또한 읍치의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라는 대원칙을 유연하게 만들었다. 특히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대규모 전란 경험은 외세가 침입해왔던 주요 경로를 지킬 수 있는 지형적 요새처나 인근 산성으로 읍치를 이설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경상도 칠곡의 읍치가 있었던 가산산성의 사례가 대표적일 것이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연이어 겪은 뒤, 인조 17년(1639년) 경상 감사 이명웅이 쌓은 것으로, 칠곡 읍치도 이 산성 안에 들였다.25)

이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면, ‘칠곡의 가산산성(架山山城)은 영남의 한 관방(關防)이니 읍치를 산성 안에 설치한 것은 보장(保障)으로 삼으려는 뜻입니다.’26) ‘칠곡부는 현재 읍치를 옮기는 일을 벌여 얼굴 반쪽이 트고 두 다리가 부러지고 … (중략) … 칠곡부는 가산(架山) 안에 있고 공로(孔路)가 지나가는 요로(要路)를 마주하고 있는데 뒷면은 깎아 세운 듯한 천 길 층암이고 앞면은 실처럼 좁은 길 하나가 겨우 통과하며, 가파른 고개는 공중에 걸쳐 있는 듯하고 비탈진 골짜기는 자연적인 해자의 모습이니 실로 영남 제일의 관방입니다.’27) 등이 있다. 이들 기록은 전란의 피해가 심각했던 고을일수록 읍치 입지에 있어 관방 및 지리적 요충성이 특별히 재인식됨에 따라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라는 대원칙은 상대적으로 희석되었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데, 칠곡부 사례에서 보이듯이 어떤 면에서는 전혀 고려 요인에 들지도 않았었다.

2) 다양한 지역적 요인들과 복합성

여기서 다양한 지역적 요인들이란 자연환경이나 인문환경 면에서의 지역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제반 요인들을 가리킨다. 이들 지역적 요인은 읍치의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라는 대원칙과 맞물려 작동하던 경향이 있는데,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는 그것에 우선해서 고려되기도 했으며, 종종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설 사례들에 근거해 주요 지역적 요인을 추출해 보면 재해‧재난으로부터 비호(庇護)받을 수 있는 지형 조건, 충분하고 안전한 수토(水土) 환경, 풍수적 환경 인지와 길지(吉地) 관념, 그 밖의 요인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단, 이상의 지역적 요인들은 고을별 인문지리 환경이나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중요도 순위를 쉽게 논할 수는 없다.

첫째, 재해‧재난으로부터 비호받을 수 있는 지형 조건이다. 이와 관련해 자세한 기록이 나오는 고을은 경상도 진보 읍치이다. 순조 11년(1811) 경상 감사 김회연은 진보 현감 위척철의 첩정을 인용해 ‘진보 읍치의 입지가 지세가 기울어 있고, 강물이 읍치 뒤쪽을 침식하고 있으며, 읍치 전면과 좌우로는 샘물이 한 바가지도 없다.’고 조정에 보고 한다.28) 지형 환경의 불리함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인데, 여기서 지형 조건이 가리키는 바를 그의 말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보면 ‘지세가 기울어져 있다.’[지세에 대한 환경 인지], ‘읍치 뒤쪽이 침식되고 있다.’[지형적 안정성], ‘읍치 일대에서 샘물을 얻을 곳이 없다.’[음용수 여건] 등이다.

이어서 그는 ‘그러한 이유로 요절하는 사람이 줄을 잇고, 빈천이 막심하여, 백성들이 읍치 이설을 바란지 수백 년이 되었다.’며 읍치 이설을 건의한다. 그가 대안 입지로 제시한 곳은 기존 입지의 강 건너에 있는 신한리(新漢里)였다. 진보 고을의 사례는 이설의 주된 요인이 자연재해에 취약한 지형 조건에 있었던 만큼 무엇보다 그 같은 재해로부터 안전한 지형 환경을 찾아 대안 입지를 모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이해를 더할 부분은 대안 입지가 지형적으로 훌륭한 점 외에 그곳에 백성이 이미 많이 살고 있다는 점, 기존 읍치 터와 가깝다는 점(즉 이설에 드는 재정과 수고가 상대적으로 덜할 것이라는 뜻), 고을 백성의 여론이 일치한다는 점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점이다.29)

https://cdn.apub.kr/journalsite/sites/geo/2024-059-06/N013590602/images/geoa_59_06_02_F1.jpg
그림 1.

이설 이후의 영일현 신읍치(지도의 왼쪽)과 구읍치
주: 지도의 왼쪽 상단에 ‘신읍(新邑)’이라 기입되어 있고 그 아래에 기와지붕을 한 주요 관아 시설과 그 밖의 많은 건물들이 집중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끝에 바다가 그려져 있고, ‘北距海門十里’(북쪽으로 해문(海門)까지 10리 거리)라 기입된 지점 바로 아래에 약간의 기와 건물과 민가가 모여 있는 곳이 구읍[기존 입지]이다.
자료: <<1872년 지방지도>> <영일현>(규장각 소장)

고종 7년(1870) 9월 15일에 조정에 보고된 경상도 영일현의 읍치 이설 건 역시 빈번한 홍수로 인한 자연재해에 따른 것으로, 재해로부터 비호받을 수 있는 지형 조건을 찾아 읍치 이설을 도모한 사례이다(그림 1). 다음 기록의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자세히 확인해 보기로 한다.

• 의정부가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 김세호(金世鎬)의 장계를 보니, ‘영일현(迎日縣)이 해문(海門)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강물이 들어와 마을이 잠기는데, 장맛비가 조금만 와도 마치 큰물을 겪은 듯합니다. 영일현 북쪽 10리쯤에 그전에 읍을 만들려던 터가 있는데, 지형이 조금 높고 들녘이 넓어서 지세로 보나 백성들의 뜻으로 보나 마을을 옮기는 것이 합당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해서 분부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남천(南川)과 북강(北江)이 침식하여 마을을 무너뜨리므로 마을을 옮기자는 논의가 마땅히 이와 같습니다. 읍으로 만들려던 곳이 10리나 떨어진 곳에 있어서 강물의 이로움과 참호의 험준한 것이 실로 지형상의 편리함을 갖추고 있으니, 이 시점에서 읍을 옮기는 문제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 (중략) … 백성들의 뜻에 맞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30)

위 영일현 사례는 진보현의 경우와 유사하다. 즉 이설의 주된 요인을 자연재해에 취약한 지형적 불리함에 두고 있고, 재해로부터 안전한 지형 환경을 찾아 대안 입지를 모색하고 있다. 밑줄 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읍치가 바다에서 가까워 장맛비가 조금만 내려도 침수가 될 뿐만 아니라 하천에 의한 침식 또한 심각하다는 점, 이에 반해 내륙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안 입지는 지형이 높고 평야도 있으며 강물의 이로움도 얻을 수 있을 만큼 지형적으로 편리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물론 백성들의 뜻을 살펴도 이설을 바란다고 첨언하고 있다.

둘째, 안전하고 충분한 수토(水土) 환경이다. 여기서 ‘수토’라는 용어는 사료(史料)에서 그대로 따온 표현인데, 앞의 지세‧지형 조건과는 구별되는 요인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세‧지형 조건이 주로 자연재해로부터의 물리적 안전성에 관계된 조건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수토 환경이란 백성들의 보건‧위생을 담보할 수 있는 수질과 물의 이용 및 토양 조건을 가리킨다. 개인위생과 공중위생 모두 취약했던 조선시대에는 이질, 장티푸스(염병), 콜레라 등의 각종 수인성 전염병(水因性 傳染病)에 거의 무방비였다고 볼 수 있고, 이로 인한 사회적 재난은 한 고을 전체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을 만큼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다. 수토 문제로 인한 주요 읍치 이설 사례는 아래와 같다.

• 경상도 거제현은 수토(水土)가 매우 나빠서 관리가 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감사 이상진이 계문하여 본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 명진촌(明珍村)으로 읍을 옮기자고 청하였다.31)

•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 황해 감사 이태영이 올린 금천군 읍치 이전에 대한 장계로 … (중략) … 무엇보다 물이 맑지 않아서 거주하는 백성이 병에 걸리는 통에 잇따라 사람들이 떠나서 읍치가 갈수록 쇠잔해지니 이보다 더 큰 민생고는 없습니다. … (하략).”하니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원인을 없애려 하는 것이니 늦추어서는 안되며 … (하략).” 하였다.32)

• 전 평안 감사 박종갑이 아뢰기를 “상원군은 읍치 내의 수토(水土)가 나빠서 백성들이 병들어 일찍 죽는 일이 많습니다. 그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백성들이 점차 흩어져 지금은 200호도 되지 않는데 … (중략) … 읍에서 서북쪽으로 30이를 가면 내로(內櫓)라는 곳이 있는데 산수로 둘러 있고 샘물이 맑고 깨끗하며, 게대가 강에 임해 있어 여유 있게(생업을 넉넉하게)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 (하략).” 하여 하교하기를 “지리(地利)와 인화(人和)가 합치되어 모든 것이 좋다면 묘당에서 다시 도백에게 물어보고 하나로 결론을 지어 나아게 물어서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33)

• 비변사 계사(啓辭)에 “(전략) … 곽산군수 윤홍심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거론하기를 ‘본군의 신읍(新邑)은 바로 석년(昔年)의 구기(舊基)입니다. 처음엔 수토(水土)가 불리하고 정도(程道)의 원근이 평균하지 못함으로 해서 운흥(雲興)에 이거(移居)하였습니다. … (하략).’34)

위 기록들의 밑줄 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좋지 않은 수토 환경은 한 고을의 많은 관리들을 병들어 죽게 하거나 백성들이 전염병에 걸리거나 고을을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등 고을을 크게 쇠락하게 하였다. 그리고 ‘수토 문제로 백성들이 전염병에 걸리는 것이라면 읍치 이설은 늦추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임금이 특별히 심각하게 인식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안 입지를 찾는 데 있어서는 당연히 안전하고도 충분한 수토 환경을 최우선 요인으로 삼고 있는데, 이 외에 생업을 넉넉하게 할 수 있는 입지, 정도(程道)의 원근이 평균한 곳(즉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등의 요인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풍수적 환경 인지와 길지 관념이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전국의 옛 읍치가 있던 지역에서 풍수적 환경 인지에 관련된 경관과 장소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해당 지역의 옛 읍지(邑誌)나 고지도에 풍수적 경관과 장소들이 기록된 사례도 있다. 이에 반해, 적어도 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국가 수준 관찬 사료들에서 읍치 입지와 관련해 풍수를 언급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다. 도읍 주변 근기 지역의 읍치 이설에 관한 기록에서 간혹 풍수에 대한 언급이 보이긴 하지만, 기존의 읍치 일대가 능원 조성이나 천릉 자리로 괜찮은지를 검토할 때 풍수설이 거론되는 것일 뿐, 읍치 이설을 위한 대안 입지를 정하는 부분에서는 풍수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35)

주지하듯이 조선 왕조는 조선 초 한성에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 풍수를 적용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몇백 년 동안 한성의 경관 경영에 풍수를 수시로 동원하였다(전종한, 2022). 하지만, 한성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적어도 조선 중‧후기의 주요 관찬 사료들에 기록된 풍수란 읍치와 같은 삶터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다분히 음택풍수, 즉 능원 조성이나 천릉과 같은 일을 위한 풍수였다. 앞에 논의한 지형 조건이나 수토 환경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고을의 읍치 이설과 관련한 기록들에서 산수(山水), 즉 산줄기와 물줄기의 의미는 풍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재난으로부터 비호받을 수 있는 지세‧지형 조건, 보건‧위생을 담보해 줄 수 있는 수토 환경 등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였다. 고을의 읍치 이설과 같은 일에 양택풍수가 동원된 사례는 적어도 국가 수준의 주요 관찬 사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면 오늘날 다수의 옛 읍치들에서 풍수적 경관이나 장소들이 전하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일까? 그것은 아마도 읍치 입지가 확정된 이후, 해당 고을의 사대부나 지방관 등이 풍수를 향한 강한 의지와 일종의 지역애(地域愛)의 발로로 ‘자신들의 고을 중심지인 읍치가 좋은 땅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그곳에 행했던 풍수적 실천과 의미 부여의 결과일 수 있다. 풍수를 입지론보다는 일종의 경관경영론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입지 선정 단계보다는 그 이후 단계에서 지역사회 주체들의 주도로 사후(事後) 정당화, 말하자면 사후 길지화(吉地化), 사후 명당화(明堂化)를 위해 풍수가 동원되었을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 연구자가 이해하는 이러한 풍수적 실천과 의미 부여는 ‘지역사회에서 기존에 길지로 통용되었던 장소’를 보강하기 위한 비보(裨補) 행위와 상통하는 면도 있지만 다소 다른 것이기도 하다. 기존에 길지로 여겨졌던 장소이건 아니건, 그에 상관 없이 행하던 사후 정당화 맥락의 풍수적 행위들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https://cdn.apub.kr/journalsite/sites/geo/2024-059-06/N013590602/images/geoa_59_06_02_F2.jpg
그림 2.

이설(1차) 후 진보 읍치 일대와 풍수적 묘사
주: <<일성록>>의 기록대로 창고는 기존 입지에 그대로 남아 있고 동헌[縣治]과 객사 등 일부만 이설했음을 보여준다(<<일성록>> 순조 20년(1820) 4월 19일). 기존 입지와 대안 입지 사이의 굵은 실선은 하천으로, 기존 입지에 침식 피해를 주고 자주 홍수를 일으켜 읍치 이설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료: <<1872년 지방지도>> <진보현>(규장각 소장)

그림 2는 읍치 이설이 있었던 경상도 진보현 고지도이다. 지도의 오른쪽(남쪽)이 기존 입지이고, 왼쪽(북쪽)이 대안 입지이다. 조선 고종 7년(1870) 경상 감사 김세호의 장계에는 예외적으로 풍수 관련 언급이 보인다. 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백성을 거주시키는 데 있어서는 먼저 풍수를 보아야 하는데 여기에서 이미 향배(向背)가 잘못되었고 저기에서 비로소 좌처(坐處)를 얻었다면 여기를 버리고 저기로 가는 것은 또한 사세가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상언하였다.36) 이에 앞서 그는 홍수와 침식으로 재해가 잦다는 이유로 진보 읍치의 이설이 필요하다고 보고한 상황이었는데, 위의 상언은 그 뒤 이설을 위한 대안 입지를 선정하는 단계어서 풍수를 보아야 한다는 맥락이다.

그림 2의 오른쪽(남쪽)에는 비봉산(飛鳳山)이 그려져 있고, 거기에서 봉황이 읍치를 향해 날아드는 모습이 흥미롭게 표현되어 있다. 비봉산은 전국적으로 다수 분포하는 지명으로, 풍수에서는 봉황이 명당 배후의 현무[後玄武]와 짝을 이루는 주작(朱雀)의 형태가 되어 남방(南方)을 주관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봉황 그 자체가 길조가 된다(최창조, 1997, 754-755). 전국의 134개 봉황형 산과 마을을 조사한 한 연구에 의하면, 풍수적 봉황형 산의 경우 그 주변에 봉황의 거처인 봉서(鳳捿), 봉황이 마실 물인 봉정(鳳井)이나 봉소(鳳沼) 등등 봉황이 머물 수 있는 경관이나 지명을 조성한 경우가 있다(천인호, 2011, 235).

이상의 두 견해를 따른다면, 지도에서 보이는 비봉산이라는 지명이나 그 아래의 봉황 이미지 두 날개 끝에 있는 세 곳의 둥근 연못은 봉황이 떠나가지 않게 붙들어 둘 목적으로 조성된 풍수적 의미의 경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대안 입지가 북쪽으로 배산, 남쪽으로 임수, 남향의 좌향 등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봉산과 세 곳의 연못은 기존 입지보다는 대안 입지의 ‘풍수적 길지로서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 전주작(前朱雀) 및 정당화 경관에 해당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존 입지에 대해 ‘지세가 기울어져 있다.’고 평가한 반면에 대안 입지에 대해서는 ‘천부(天府)의 길지(吉地)’라 했던 경상 감사의 장계 내용도 이 해석을 지지한다.37)

이같이 풍수는 읍치를 길지화, 명당화할 목적에서 해당 고을을 둘러싼 산줄기와 물줄기에 풍수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 과정에서 넓은 의미의 비보(裨補) 경관 및 장소들을 조성하는 등 읍치 경관 경영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풍수는 지방관이나 고을 사대부를 비롯해 주로 지역민 차원에서 중시되고 고을 백성들의 환경 인지와 결합되어 작동했던 요인으로 생각되며,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중앙 조정에서 읍치 입지 선정을 위해 고려한 국가 차원의 주요 요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추론을 뒷받침하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영조 10년(1734년) 경상도 안동 유생 권석규는 ‘본부(本府)의 재이(災異)와 변란(變亂)의 원인이 지리(地理)의 훼손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고쳐 옛 모습대로 복구해달라.’는 취지로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영조는 ‘그러한 일은 너의 고을만의 불행이 아니라 국가의 불행이었으니, 어찌 풍수설(風水說)에 미혹한단 말인가? 학업에 힘쓰며 정도(正道)에 어긋난 요청으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비답하였다.38) 이 경상도 유생의 사례는 그가 살았던 지역사회에서 풍수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지역 사대부들의 사유 세계에서 차지하던 풍수의 높은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것이 당시 중앙 조정의 풍수 인식과는 사뭇 달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역사회 주체들은 읍치의 입지와 관련해 풍수를 절대적 명당을 찾기 위한 고정된 틀로 이용하기보다는, 소여(所與)의 절대적 환경을 길지로 가꾸고 명당으로 상대화하는 일종의 경관경영의 지침으로 참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서 볼 때, 풍수적 요인이 읍치의 경관 경영에 작용한 정도는 해당 고을의 지역사회가 풍수론을 얼마나 추앙하던 분위기였느냐에 따라 크게 달랐을 것이고, 오늘날 읍치 관련 풍수 담론이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이게 된 배경도 거기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그 밖의 요인이다. 여기서 ‘그 밖의 요인’이라는 제목으로 논의하려는 것은 고을 내 서로 다른 백성 집단 간의 세력 관계, 백성과 향리의 관계, 지방관과 조정의 관계, 그리고 이를 통해 전개된 다양한 입지 요인들 간의 상쇄적 관계 등을 통해 조선의 읍치 입지를 둘러싼 복잡다양한 요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부침하고 중앙 조정에서 어떻게 처치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복합적 요인이다.

평안도 곽산군 읍치는 기존 입지가 지닌 몇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대안 입지로의 이설이 이루어졌고, 10년 뒤 기존 입지로 환읍(還邑)되었으며, 30년 뒤 재차 대안 입지로의 재이설이 건의되면서, 고을과 조정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특이 사례이다. 평안도 곽산군은 의주로(義州路), 달리 말하면 도성인 한성과 중국을 오가던 연행로(燕行路)가 통과하던 곳으로 사신 및 칙사 접대를 지원하는 일이 이 고을이 맡았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의주로의 곽산군 관내에는 간선 대로에 접한 곳에 운흥(雲興)이 있었고, 이곳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영청(永淸)이 있었다. 그리고 곽산군 읍치의 입지는 운흥과 영청, 이 두 곳을 오가며 논의되었다.

먼저, 맨 처음에 읍치는 의주로에서 10리 떨어진 영청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의 수토(水土)가 불리하고 그 입지가 고을의 지리적 중심부가 아니라는 고을 수령의 건의와 이를 인용한 평안 감사의 장계에 따라 1757년 운흥으로의 이설을 조정에서 허락하게 된다(그림 3).39)

https://cdn.apub.kr/journalsite/sites/geo/2024-059-06/N013590602/images/geoa_59_06_02_F3.jpg
그림 3.

곽산군 읍치 이설 전후의 고지도(왼쪽: 읍치-운흥, 오른쪽: 읍치-영청)
주: 곽산군 읍치는 처음에 영청에 있다가, 운흥으로 이설했으며(1757년), 다시 영청으로 환읍하고(1767년), 그 뒤 운흥으로의 재이설이 건의(1790년)되며 많은 논란이 있었던 특이 사례이다. 왼쪽 지도는 ‘운흥’에 읍치가 있었던 시기의 고지도이다. 고을 중심부의 읍치 표시는 ‘운흥’이고, 그 아래의 ‘古邑面’(고읍면)‘이라 기입된 곳은 ’영청‘이다. 오른쪽 지도는 ‘영청’에 읍치가 있었던 시기의 고지도이다.
자료: 왼쪽-<<팔도군현지도>> <곽산군> (규장각, 古4709-111-v.1-3), 오른쪽-<<1872년 지방지도>> <곽산군>(1872년) (규장각 소장)

그러나 10년 뒤인 1767년, 운흥에 있던 읍치의 화재로 인하여 ‘다급하게’ 원래 읍치인 영청으로 환읍(還邑)하였다. 기록에는 ‘창졸지간(倉卒之間)’에 옮겼다고 나오는데, 아마도 옛 읍치 시절의 관사 일부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영청으로 속히 환읍할 여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읍 이후 운흥으로의 재이설 건이 일부 백성과 고을 유학, 지방관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고을 전체적으로는 재이설 지지 입장과 반대 입장으로 여론이 갈렸고, 이로 인한 논란은 조정으로까지 확대된다. 표 1은 관련 기록들을 종합하여 당시 운흥으로의 재이설을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주장한 영청 및 운흥의 입지적 장단점을 정리한 것이다.40)

표 1.

운흥으로의 재이설을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의 주장

입장 차이 운흥과 영청의 입지적 장단점
운흥을 지지하는 입장
(재이설 찬성)
∙ 운흥[대안 입지]의 장점
‧ 많은 백성들이 원한다는 점.
‧ 고을의 힘을 분산하는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점(사신과 칙사를 대하는 일이 고을의 주된 임무인데, 이 일을 수행하기에 유리한 곳이 대로변의 운흥이라는 면에서).
‧ 아사(衙舍)와 각청(各廳) 등 관사가 아직 있어 이설 비용이나 민력이 과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 촌려(村閭)가 은성(殷盛)하며 도로(道路)가 균적(均適)하다(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는 점.
‧ 중국을 오가는 대로상의 요새처라는 점[關隘] 등.
∙ 영청[기존 입지]의 단점
‧ 고을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땅이라는 점.
‧ 사진과 칙사 접대 지원을 위해 먼 거리(운흥까지)를 오갈 때 물건의 태반이 부서지고 잃어버린다는 점.
‧ 사신과 칙사 접대를 위해 먼 거리를 오가느라 드는 비용이 모두 백성들에게[民庫] 부담된다는 점.
‧ 환읍 후 30년도 안 되어 관장(館長)이 스물여섯 번이나 바뀐 것은 지리(地理)가 불길(不吉)하기 때문이라는 점.
‧ 관장을 맞이하고 보낼 때 드는 비용 역시 모두 백성들에게[民庫] 부담되는 데 지리가 좋지 않으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
영청을 지지하는 입장
(재이설 반대)
∙ 영청[기존 입지]의 장점
‧ 토질이 비옥하고 어염집이 즐비하다는 점.
‧ 물의 근원이 깊고 장원하다(풍부하다)는 점.
‧ 운흥과의 거리가 10리도 못되어 출참(出站) 임무는 삽시간에 할 수 있는 비교적 수월한 일이라는 점.
‧ 기타, 관장이 자주 바뀐 것은 지리(地理)의 불길함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즉 지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제대로 얻지 못한 문제라는 점).
∙ 운흥[대안 입지]의 단점
‧ 터가 협착(너무 좁다)하다는 점.
‧ 땅이 척박하고 샘물이 부족하다는 점.
‧ 일부 관사가 남아 있다하더라도 형체만 있을 뿐이어서 보수와 건축하는 일에 소란이 클 것이라는 점(쇠잔한 고을의 힘으로 공해와 백성들의 거주지를 갑자기 운영하여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
‧ 환읍한 지 수십 년도 안 되어 재이설을 하면 어느 쪽도 이익이 없다는 점.
‧ 옮기기를 원하는 백성은 열에 한둘에 불과하다는 점.

표 1을 바탕으로 몇 가지 복기해 볼 만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애초의 1차 이설(영청⇒운흥) 때 이설의 이유로 조정에 보고된 요인은 ‘영청의 수토(水土)가 좋지 않았다.’는 점인데, 지금 재이설 반대 측 주장을 보면 영청보다는 오히려 운흥의 수토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운흥과 영청의 거리는 10리 거리인데, 어느 입장에서 주장하느냐에 ‘먼 거리’와 ‘삽시간에 가능한 거리’, 이렇게 대조적으로 인식한다. 동일한 지리적 사실을 놓고도 다르게 평가하는 것이다.

관장(館長)이 스물여섯 번이나 바뀐 것을 두고도 입장에 따라 ‘지리(地理)가 불길(不吉)한 탓’, ‘지리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제대로 얻지 못한 탓’, 이같이 다르게 주장한다. 여론에 있어서도 운흥으로의 재이설을 찬성하는 백성이 많다고 하기도 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찬성하는 백성은 열의 한둘뿐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운흥으로의 재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재이설이 고을의 힘을 분산시키지 않는 방책이라고 하고, 반대 측에서는 재이설은 어느 쪽도 이익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고을 수령에 따라서도 운흥으로의 이설을 건의한 경우와 반대한 경우가 있었다. 평안 감사 역시 그때그때 고을 수령의 건의를 바탕으로 조정에 보고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실상의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은 이 복잡한 사례를 다음과 같이 처리하였다.

먼저, 최초로 이설을 건의했던 고을 수령에게 불서지전(不敍之典)을 시행, 즉 서용하지 않는 벌을 내렸다. 당시의 수령이 이설의 주된 이유로 거론한 것이 ‘영청의 수토(水土)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조사해 보니 그보다는 ‘수령이 관속을 이끌고 영청과 운흥을 오가는 데 드는 번거로움을 사사로이 덜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던 것으로 조정에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수령이 업무를 게을리하려고 사사로운 편리를 위해 둘러댔던 핑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료는 조정에서 평안 감사를 통해 현지 상황을 다시 확인한 내용과, 그에 대한 중앙 조정의 최종 조처를 보여준다.

• ㉠고을의 논의가 절반은 지금의 읍치[영청]가 낫다고 하고, 절반은 운흥이 낫다고 합니다. 또 그중에서 ㉡이노(吏奴)와 향인(鄕人)의 논의가 달라 이노들은 운흥을 주장하고 향인들은 지금의 읍치를 주장합니다. 이는 대체로 사역이 지나치게 고달프거나 거주지가 가깝기 때문에 ㉢각각 그들의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지 공정한 안목으로 대체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 (중략) … 백성들이 운흥으로 옮기기를 바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출참(出站)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니는 데 지쳤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령이 자주 바뀌는 것이 지리(地理)에 연유한다는 것입니다. 출참의 폐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수령이 자주 바뀌는 폐단은 진실로 적임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지 수백 년이나 내려오는 ㉣옛 읍치 터에다 전적으로 지리의 책임을 지울 수는 없을 듯합니다. … (중략) … 다시 도신으로 하여금 이렇게 복주(覆奏)한 것을 가지고 거듭거듭 참고하여 따져 보아 만약 운흥으로 도로 ㉤옮기는 것이 충분히 의심할 것이 없고 100년 동안 폐단이 없는 방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소견에 따라 별도로 급히 장계하게 하고 장계가 올라온 뒤에 상께 여쭈어 처리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윤허하였다.41)

첫째, 현지 여론을 실제로 확인해 보니 거의 반반으로 나뉜다는 점(㉠), 둘째, 여론은 다시 이노(吏奴)와 향인(鄕人)이 엇갈리는데, 영청에서 운흥을 오가는 노역을 감당해야 하는 이노는 운흥을, 그렇지 않은 일반 백성들은 영청을 주장한다는 점(㉡), 셋째, 현지 여론은 각자의 사익을 이루려는 것이지 공정한 안목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넷째, 읍치의 수령이 자주 바뀌는 것은 적임자를 얻지 못한 문제이지 지리(地理) 탓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읍치 재이설은 100년 동안 문제 없는 완벽한 일이라는 확신이 설 때에만 평안 감사는 다시 장계를 올리라고 처리한다. 달리 말해 100년이 지나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장계를 올리지 말라는 것이다. 예상하듯이, 그 뒤로 재이설을 요청하는 장계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곽산군 읍치의 이설과 환읍, 그리고 재이설 논란은 읍치 입지의 요인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똑같은 사실을 놓고도 주체에 따라 다르게 접근한다는 점과, 각각의 요인에 대한 평가나 인식이 지역민, 향리, 지방관 등에 따라 어떻게 달랐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10리(里)’라는 거리를 평가하는 입장이나 ‘지리(地理)’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요인들은 각각의 입장이나 평가와 맞물리고, 이것은 다시 실제 사실관계만이 아니라 관련 주체들 간의 이해관계, 권력 관계 등과 복합적으로 얽혀 읍치의 입지 선정 과정에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5. 맺음말

본문에서 사례로 들었던 진보현 읍치를 여기서 재소환하여 맺음말에 갈음하고자 한다. 본문에서 살폈듯이 진보현 읍치는 홍수와 침식으로 인한 잦은 재해를 이유로 1811년 강 건너편으로 이설되었다. 이설 과정에서 당시 경상 감사는 이례적으로 풍수까지 언급하며 강 건너의 대안 입지가 ‘자연의 기혈이 모이는 풍요로운 길지’[天府之吉地]라 강조하기도 하였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820년, 대안 입지를 저버리고 다시 환읍(還邑)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환읍을 허락하였다.

사실 조선시대에 임금과 조정은 한 고을을 없애거나 다른 고을과 통폐합하는 등의 백성들의 삶터와 관련된 정책을 번복하는 것에 대해 백성들에게 큰 병폐를 안기는 일이라 여기고 상당히 경계하였다. 그 자세한 이유는 경상도 감사 김효정이 조정에 보고한바 ‘군을 설치하고 땅을 나누어 각기 한 구역을 지키게 해서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군현을 합치거나 도태한다면 민심이 들뜨고 아전과 관노비가 서로 흩어지는 등의 폐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43) 더구나 한 고을의 읍치를 다른 곳으로 이설한 뒤 다시 번복(飜覆)하고 환읍(還邑)한다는 것은, 불필요했을 수 있는 노역과 재물을 거듭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백성들의 삶에 큰 폐해가 됨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존숭을 기대하던 임금과 조정 입장에서는 실책을 자인하고 임금과 조정의 위엄(威嚴)을 떨어뜨리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에, 환읍은 좀처럼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임금과 조정에서 결국 환읍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관련 장계 기록에서 살펴보면, 당초 대안 입지로의 이설을 위해 고려했던 요인과는 또 다른 차원의 생경한 요인들이 부상한다.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 김이재(金履載)의 장계를 보니 진보 현감 권중민(權中敏)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거론하고 ‘본현의 읍치는 신미년(순조 11년(1811))에 옮겨 설치하였는데 ⓐ본래 땅이 좁아서 생활 방도가 지극히 곤란하므로 관속(官屬)들은 여전히 옛터에서 살고 있습니다.창고와 옥사는 애초에 옮겨 짓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공무가 대부분 시기를 놓치게 되고, 폐단이 여러 가지여서 ⓒ모두가 옛터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때 ⓓ옮긴 것은 객관(客館)과 관아 건물뿐인데 재목과 기와는 운반할 수 있고물력(物力)은 이미 마련해 둔 것이 있으며, ⓕ공역은 열흘에서 한 달 안에 마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을 전체를 새로 짓는 것과는 크게 다르니 묘당에서 상의 뜻을 여쭈어 시행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윤허하였다.44)

위 기록을 보면 경상 감사는 진보 현감의 요청을 인용하고 있는데, 향리와 노비들이 여전히 기존 입지에서 살고 있고 창고와 형옥 등의 일부 시설도 기존 입지에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관련 업무 처리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는 폐단이 있다는 점(ⓐ, ⓑ), 환읍하는 것이 대부분 백성들의 바람이라는 점(ⓒ), 환읍하는 데 드는 물력(物力)과 민력(民力)이 부담이 없고 한 달 내에 환읍을 마칠 수 있으므로 큰 역사(役事)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기존 입지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로, 옛터에서 여전히 지내는 관속(官屬)들의 삶[백성들의 생활 안정], 그로 인한 인적, 물적 허비와 업무 지체[원활한 고을 행정], 환읍하더라도 백성들이 짊어질 물력과 공역 부담은 크지 않다는 점[백성들의 공역(公役) 부담 완화], 무엇보다 다들 돌아가기를 원하는 점[백성들의 소망]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장계를 보면서 임금과 조정은 환읍을 허락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앞의 평안도 곽산군의 재이설 논란이나 진보현의 환읍 사례에서 특기할 것은, 읍치 입지에 있어서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입지와 같은 국가적 대원칙이나, 재해‧재난으로부터 비호받을 수 있는 지형 조건, 안전하고 충분한 수토(水土) 환경, 풍수지리적 환경 인지나 길지 관념 등 본 연구에서 진지하게 확인하고 분석했던 읍치 입지의 주요 요인들이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조선 읍치의 입지적 지향을 이해하고자 할 때 환기할 필요가 있는, 당대의 ‘현실판 입지론’을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백성들의 삶과 현실 사태 앞에서 읍치 입지의 국가적 원칙이나 존엄의 손상은 그다음 문제라고 보고 내린 결론이 ‘환읍의 허가’일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진보현의 옛 대안 입지를 오늘날 현지에 가서 확인해 보면 대안 입지의 장단점을 체감할 수 있다. 과거 경상 감사의 말대로, 현장에서 본 대안 입지는 북쪽으로 산지를, 남쪽으로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자리로서, 전면으로 시야가 트여 있고 햇빛이 밝으며 남쪽으로 비봉산을 바라보는 이른바 길지 형국의 기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그림 4).

https://cdn.apub.kr/journalsite/sites/geo/2024-059-06/N013590602/images/geoa_59_06_02_F4.jpg
그림 4.

진보 읍치의 향교와 배후 산지
주: 현 진보 향교는 이설 이후 환읍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며, 처음 이설했던 강 건너의 대안 입지(남사면)에 그대로 남아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사창은 기존 입지에 그대로 남아 있고, 객사, 동헌, 향교만 이곳에 이설한 것으로 나타난다.
자료: 연구자 촬영(2023년 12월 21일).

하지만, 읍치가 평온하게 들어서기에는 산지와 강 사이의 공간이 대단히 협착하고 경사져 있으며, 배후 산지가 대단히 낮은 편이고, 북쪽으로는 긴 골짜기가, 서쪽으로는 강 유로가 광폭으로 뻗어 있어 한겨울의 매서운 북서풍이 장애물 없이 불어닥치는 상당히 불리한 환경이다. 이점은 특히 연쇄 화재의 취약성과도 직결될 수 있어 열악한 환경으로 당시 인식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한겨울 현지에서 체험한 옛 진보현의 대안 입지는 자세한 입지 요인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당장이라도 환읍(還邑)을 추진하라고 조언했을 것 같은 그런 입지였다.

조선 읍치의 입지적 경향을 논의할 때 우리는 주요 요인을 추출하고 일반화하려는 관점에 익숙하다. 하지만 본 연구는 읍치 입지의 주요 요인이 국가적 차원과 지역적 차원으로 나뉠 수 있다는 점, 그것을 다시 시대적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 백성들이 직면한 삶의 현실 사태 앞에서 이상의 모든 입지 요인을 무력화시키는 ‘현실판 입지론’의 등장 등을 강조하며 일반화보다는 해체해서 재구성해 보려는 시각을 견지하였다.

읍치 입지의 고을 내 지리적 중심부 지향으로 대변되는 국가적 차원의 요인과, 지형, 수토, 풍수 등등의 지역적 차원의 요인은 어느 하나가 더 상위의 요인이거나 부수적 요인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키어 작동한다는 점, 지역적 제반 요인들 역시 그 상대적 비중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 읍치 입지의 원리로서 종종 거론되는 풍수 사상은 입지론보다는 경관경영론의 관점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 객관적 사실 관계에 대한 판단조차 주체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고 사회적 이해관계나 권력관계와 연루되어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는다는 점도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곽산군의 재이설 논란 그리고 진보현의 환읍 사례는 지금까지 도출한 다양하고도 복잡한 입지 요인들의 존재감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차원이 다른, 아주 다르게 전개되었던 현실 국면을 제시한다. 요컨대 조선 읍치의 입지적 지향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으며, 전국적 보편성, 지역적 고유성, 시대적 맥락성, 고을 내 주체들 간 역학 관계, 실제 현실 사태 등의 교차로에서 이해하려는 관점이 요구된다.

끝으로, 본 연구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조선 읍치의 입지적 지향은 이론적인 그 무엇 혹은 연역적으로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보다는 복잡다단한 지역 환경 속에서도 삶을 위해 분투하는 ‘인간 삶’이고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본 연구에서 살폈듯이 조선의 읍치 입지가 어떠하여야 최적인지에 대한 모종의 원칙이나 관념들은 분명히 존재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몇몇 연구들은 그러한 원칙과 관념들을 추적하고 그것들에서 출발하여 조선의 입지 문제를 분석하고 또 성과를 내고 있다. 이에 비하면, 지역적 처지와 시대적 상황에서, 당대 ‘시공간 환경에서 살아내고자 했던 다중(多衆)의 인간 삶과 현실’, 이 점에 주력하며 조선 읍치의 입지 문제에 접근하는 연구는 부족하며, 이 부분을 좀 더 도모하며 조선 읍치의 입지적 지향을 해명해 볼 가치가 있다.

[1] 1) 이기봉, 홍금수, 2007, “조선시대 경상도 읍치 입지의 다양성과 전형성 - 고려말 이후 입지 경향의 변화를 중심으로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13(3), 321-340.

최원석, 2007, “조선시대 지방도시의 풍수적 입지 분석과 경관 유형 - 경상도 71개 읍치를 대상으로 -,” 대한지리학회지 42(4), 540-559.

정요근, 2011, “여말선초 군현 간 합병‧통합과 신읍치의 입지 경향,” 역사와 현실 80, 152-206.

[2] 2) <<경종실록>> 1년(1721) 8월 5일.

[3] 3) <<영조실록>> 25년(1749) 10월 18일.

[4] 4) <<정조실록>> 11년(1787) 7월 4일.

[5] 5) <<승정원일기>> 영조 7년(1731) 5월 9일.

[6] 6) <<일성록>> 정조 13년(1789) 7월 13일.

[7] 7) <<승정원일기>> 영조 6년(1730) 1월 15일.

[8] 8) <<일성록>> 순조 11년(1811) 10월 10일.

[9] 9) <<순조실록>> 11년(1811) 3월 30일.

[10] 10) <<문종실록>> 1년(1451) 11월 27일.

[11] 11) <<승정원일기>> 고종 7년(1870) 9월 15일.

[12] 12) <<정조실록>> 17년(1793) 6월 2일.

[13] 13) <<정조실록>> 18년(1794) 10월 5일.

[14] 14) <<정조실록>> 22년(1798) 7월 4일.

[15] 15) <<순조실록>> 14년(1814) 12월 28일.

[16] 16) <<순조실록>> 13년(1813) 4월 5일.

[17] 17) 이에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밑줄은 연구자가 표시함.): ‘읍치(邑治)를 옮길 곳에 바야흐로 지사를 보내어 여러 곳을 골라 정하도록 하였는데, 민가가 옮겨 갈 빈 곳 또한 찾기 쉽지 않고 민전(民田) 중에 매입당해 진전(陳田)이 되어 버릴 곳도 많습니다. 모두 조정에서 비용을 구해 주어야 하는데 호조의 경비가 바닥을 드러낸 상태라 허다한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수 없습니다.’(<<승정원일기>> 영조 7년(1731) 5월 14일)

[18] 18) 이에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밑줄은 연구자가 표시함.): ‘비국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경상 감사 김회연(金會淵)의 장계로 인하여 진보현의 읍치를 옮기는 데 드는 재력을 다시 장계로 보고하라는 내용으로 초기하고 공문으로 알렸습니다. 방금 경상 감사의 장본(狀本)을 보니 … (중략) … 5000금(金)을 소비한다면 공사를 마칠 수 있을 것이고 백성들에게 거두고 모으는 일은 애초에 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향교와 서원 및 향사인(鄕士人)이 이전하기 위해 일찍이 비축해 둔 것이 1000냥이고 현감이 녹봉을 쪼개어 어렵게 모은 것이 500여 냥이며, 영문(營門)이 대여해 준 공화(公貨)가 2000냥이고 각종 민역(民役)을 방납해 줄 몫으로서 귀속시킬 데 없는 것이 또한 1000냥 가까이 되어서 도합 4500냥을 지금 조달해 두었고 공전(公錢)을 도로 갚는 기한을 3년으로 한다면 이 또한 편리한 대로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읍치를 옮기는 일을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 뜻을 여쭈어 분부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일성록>> 순조 11년(1811) 11월 22일)

[19] 19) <<영조실록>> 21년(1745) 6월 17일.

[20] 20) <<승정원일기>> 고종 8년(1871) 6월 11일.

[21] 21) <<정조실록>> 11년(1787) 7월 4일.

[22] 22) <<순조실록>> 14년(1814) 12월 28일.

[23] 23) <<순조실록>> 12년(1812) 11월 12일.

[24] 24) <<문종실록>> 1년(1451) 11월 27.

[25] 25) <<연려실기술>> 별집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

[26] 26) <<일성록>> 순조 16년(1816) 6월 12일.

[27] 27) <<일성록>> 순조 20년(1820) 2월 19일.

[28] 28) <<일성록>> 순조 11년(1811) 10월 10일.

[29] 29) 다음 기록이 그것이다(밑줄 친 부분은 연구자가 표시함.):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미 많고 또 지형이 훌륭하니(地形又爲叶吉) … (중략) … 신이 올봄 진보현에 순행(巡行)했을 때 직접 그 형지(形址)를 살펴보니 보고한 내용과 같았습니다. … (중략) … 또 옛 읍기(邑基)와 가까우며 온 고을의 여론이 일치하니,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실로 편리하고 마땅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 뜻을 여쭈어 분부하게 해 주소서.”하여, 전교하기를 “즉시 회계하도록 묘당에 분부하라.” 하였다.(<<일성록>> 순조 11년(1811) 10월 10일)

[30] 30) <<승정원일기>> 고종 7년(1870) 9월 15일

[31] 31) <<현종실록>> 5년(1664) 윤6월 13일.

[32] 32) <<일성록>> 정조 19년(1795) 11월 24일.

[33] 33) <<일성록>> 정조 22년(1798) 4월 15일.

[34] 34) <<비변사등록>> 정조 24년(1800) 3월 24일.

[35] 35) 다음과 같은 기록이 그 예이다. 다음 자료의 밑줄 친 부분을 참고하면, 국장(國葬) 즉 능원 조성과 관련해서는 이하에 풍수적 서술이 전개되고 있으나 읍치 이설에 대한 부분 이하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상이 이르기를 “향교 뒤가 국장(國葬)할 땅은 아닌가?”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향교는 한쪽 가에 있는데 형국이 묘한 듯하니 사대부의 집안에서 쓰면 혹시 이름난 묘가 되겠지만 끝내 국장할 곳은 아닙니다. 객사 뒤는 기세가 존엄합니다. 혹은 삼각산이 보이니 좋지 않다고 의심하였지만, 지남철을 놓고 살펴보니 진방(辰方)이 아니었고 진방이라도 나쁘게 보이는 것은 없었습니다. … (하략).” … (중략) … 상이 이르기를 “읍치가 옮겨 갈 만한 곳은 있는가?” 하니 송명성이 아뢰기를 “읍에서 10리 지역에 신귀중(愼龜重)의 집이 있는데 현재의 아사(衙舍)와 맞먹기에 충분하므로 한창 구입하여 거처를 옮기고 있는데 대내에서 내린 은자로 그 값을 대기에 충분하다고 합니다.”하고, 홍치중이 아뢰기를, “지금의 사록(司錄)인 신귀중의 집입니다. 대대로 거주하던 곳으로 수목이 꽤 무성한데 또한 그 아비와 할아비가 심은 것도 있기 때문에 그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이는 바로 국가의 일이니 또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 읍치를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승정원일기>> 영조 7년(1731) 5월 20일).

[36] 36) 당시 경상 감사 김세호의 장계에는 풍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나오는데 이는 읍치 이설과 관련해 다른 도 감사의 장계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다음은 그 원문이다(밑줄 친 부분은 풍수적 개념과 관련된 것으로 연구자가 표시함.): ‘議政府啓曰, 卽見慶尙監司金世鎬狀啓, 則眞寶邑基, 背水臨山, 狂瀾嚙其後, 峻嶺迫于前, 民不安居久矣, 而近又水道變遷, 少値潦雨, 輒受沈墊之害。本縣北距越江一里許, 號稱新漢地, 卽天府之吉地, 左抱右廻, 民俱願居, 及今移設, 無容更議, 請令廟堂稟旨分付, 所入物力, 自本營從長措劃計料云矣。凡於居民, 先見風水, 而此焉而旣失向背, 彼焉而始得坐處, 則捨此就彼, 卽亦事勢之所不容已也。況財力之措劃, 綽有其方, 依狀請特許移邑, 用副民情, 何如? 傳曰, 允。’(<<승정원일기>> 고종 7년(1870) 12월 9일)

[37] 37) 이 내용들은 다음 기록에 보인다: <<일성록>> 순조 11년(1811) 10월 10일, <<승정원일기>> 고종 7년(1870) 12월 9일.

[38] 38) <<승정원일기>> 영조 10년(1734) 9월 17일.

[39] 39) <<비변사등록>> 정조 24년(1800) 3월 24일.

[40] 40) 표 1은 다음 기록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일성록>> 정조 14년(1790) 4월 26일, <<일성록>> 정조 21년(1797) 8월 20일, <<일성록>> 정조 21년(1797) 12월 24일, <<비변사등록>> 정조 24년(1800) 3월 24일, <<정조실록>> 24년(1800) 3월 25일.

[41] 41) <<일성록>> 정조 24년(1800) 3월 25일.

[42] 42) <<승정원일기>> 고종 7년(1870) 12월 9일.

[43] 43) <<세종실록>> 17년(1435) 7월 22일.

[44] 44) <<일성록>> 순조 20년(1820) 4월 19일.

References

1

권선정, 2017, "'차이나는' 지리로서 풍수와 Geography의 정상화와 타자화," 문화역사지리, 29(2), 31-44.

2

김덕현, 2004, "경상도 읍치경관 연구서설 - 읍치경관 조사 연구를 위한 방법적 탐구 -," 문화역사지리, 16(1), 19-28.

3

이기봉・홍금수, 2007, "조선시대 경상도 읍치 입지의 다양성과 전형성 - 고려말 이후 입지 경향의 변화를 중심으로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13(3), 321-340.

4

이해준, 2015, "조선후기 관아 기록 자료의 정리와 활용: 충청도 홍산현 관아 사례를 중심으로," 지방사와 지방문화, 18(1), 75-115.

5

전종한, 2004, "내포지역 읍성 원형과 읍치 경관의 근대적 변형 - 읍성취락의 사회공간적 재편과 근대화 -," 대한지리학회지, 39(2), 321-343.

6

전종한, 2022, "조선시대 국도 한성의 풍수적 경관 경영과 풍수 담론의 노정," 문화역사지리, 34(2), 51-68.

10.29349/JCHG.2022.34.2.51
7

전종한, 2023, "읍치 경관에 대한 유네스코 '역사도시경관' 접근의 함의 - 충청감영지 공주 읍치의 사례 -," 문화역사지리, 35(1), 34-48.

10.29349/JCHG.2023.35.1.34
8

정요근, 2011, "여말선초 군현 간 합병‧통합과 신읍치의 입지 경향," 역사와 현실, 80, 152-206.

9

천인호, 2011, "지명 형성의 풍수 담론 - 봉황형국을 중심으로 -," 지명학, 17, 211-248.

10

최기엽, 2001, "조선기 성읍의 입지 체계와 장소성," 응용지리, 22, 3-29.

11

최원석, 2002, "한국의 비보풍수론," 대한지리학회지, 37(2), 161-176.

12

최원석, 2007, "조선시대 지방도시의 풍수적 입지 분석과 경관 유형 - 경상도 71개 읍치를 대상으로 -," 대한지리학회지, 42(4), 540-559.

13

최창조, 1997, 한국의 자생 풍수 2, 민음사, 서울.

14

<<1872년 지방지도>>(규장각 소장).

15

<<고종순종실록>>(동방미디어).

16

<<비변사등록>>(한국사데이터베이스).

17

<<승정원일기>>(고전종합DB).

18

<<일성록>>(고전종합DB).

19

<<조선왕조실록>>(고전종합DB).

20

<<팔도군현지도>>(규장각 소장, 古4709-111-v.1-3).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