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물도 살고 싶다”
2. 기후정의와 다종적 정의
1) 기후정의
2) 다종적 정의
3. 다종적 기후정의
1) 관계적 정의 접근
2) 다종적 기후정의의 특징
4. 탄소중립과 다종적 불의
1)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해상풍력발전
2) 해상풍력발전의 다종적 기후불의
3)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해상풍력발전?
5. 결론: ‘트러블’과 함께 체제전환
1. “동물도 살고 싶다”
지난 2022년 9월 24일 서울 도심에서는 3년 만에 ‘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 전국에서 모여든 3만 5천여명의 참가자들은 각양각색의 깃발과 손팻말을 들고 기후정의 실현과 체제 전환을 촉구했다. 이날 현장에는 ‘동물’을 내세운 선전물들도 등장했다. “동물도 살고 싶다”, “모든 존재의 해방을 위한 기후정의”, “종차별 없는 기후 행진”과 같이 동물권 단체에서 내건 깃발들과, “함께 살아요”라는 구호 아래 뜸부기, 저어새, 수원 청개구리 같은 멸종위기 동물들의 이름도 보였다. 제주에서 상경한 한 시민은 살아 있는 말 한 마리를 데리고 행진에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기후위기가 비단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 환경, 그리고 제가 키우는 말들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함께 왔다”고 밝혔다(한국일보, 2022). 농민, 어민, 노동자 같은 인간 뿐 아니라, 동물 또한 생존 위기에 처한 기후 위기의 ‘최일선 당사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기후정의행진에 동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 사회의 기후 논의가 인간의 경계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세계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기후 위기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며, 인간 뿐 아니라 동물과 같은 비인간 존재를 포함해 기후정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시민의 손에 들려 있던 “모든 존재의 해방을 위한 기후정의”라는 손팻말은 이 같은 ‘인간 너머’의 기후 위기 인식과 대응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기후정의는 기후 위기로 발생하는 피해와 기후 대응에 따르는 부담의 불평등을 지적하고 해소하기 위한 담론이자 사회 운동이다(Schlosberg and Collins, 2014; 홍덕화, 2021). 온실가스 배출량은 미미하지만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남태평양 섬 국가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기후정의 논의는 지난 20여년 간 국제 환경 논의에서 국내 논의, 즉 한 국가 내에서도 존재하는 기후 불평등에 대한 논의로 확장됐다. 섬 국가들 뿐 아니라 선주민, 도시 빈곤 계층,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 등 기후 변화로 취약성이 강화된 다양한 집단들로 확장된 것이다.
한편, 924 기후정의행진에서 보듯 최근의 환경 및 동물 활동가들과 비판적 연구자들은 기후정의 논의에서 ‘비인간’의 부재를 지적한다(Henning and Walsh, 2020). 빙산에 위태롭게 매달려 표류하는 북극곰은 기후위기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북극곰처럼 인간에게 가시화되지 않은 대부분의 동식물들은 기후 위기의 수동적 피해자로 그려지거나, 기후 대응 논의에서 종종 누락된다. 현재의 기후정의 논의에서 비인간은 인간이 아닌 존재도 포함할 수 있도록 보다 포용적인 기후 정책이 필요하다는 선언적 수준에서 언급되는 듯하다(한상운 등, 2021). ‘비인간’의 범주가 동식물 뿐 아니라 곤충과 미생물, 숲과 습지와 같은 생태계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 인간과 비인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 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논의는 더욱 복잡해진다. 한반도의 온난화로 꿀벌이 피해를 입고 있지만, 흰줄숲모기나 매미나방 같은 외래 곤충은 영역을 확장하며 번성하고 있다. 나아가, 모든 존재가 기후 위기를 함께 겪고 있는 가운데,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한 노력이 특정 종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재생에너지 설비 확대가 철새의 이동 경로를 교란하는 것이 한 예다.
최근 생태인문학과 신유물론 경향의 연구자들은 기후정의가 ‘인간’ 집단 간의 기후 불평등만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따라서 ‘다종적 정의(multispecies justice)’의 관점으로 기후 변화를 새롭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Tschakert et al., 2021; Chao et al., 2022; Tschakert, 2022; Verlie, 2022). 인간과 비인간의 얽힘과 관계성을 중심으로 기후 위기와 대응을 검토하고,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미래를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이들은 다종적 관점에서 기후정의를 모색하는 것이 단순히 기후정의의 대상을 인간에서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Winter, 2022; Chao and Celermajer, 2023). 대신 정의를 인간과 비인간의 고유하고 맥락화 된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보는 관계적 접근을 발전시키고, 어려움 속에서도 다종적으로 보다 정의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려는 지향을 강조한다.
논문은 기후정의와 다종적 정의 논의를 결합해 ‘다종적 기후정의’를 살펴보고, 다종적 기후 정의가 체제 전환에 갖는 의미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최근의 다종적 정의와 다종적 기후 정의 논의를 먼저 살펴보고, 국내 해상풍력발전 논의를 통해 다종적 기후불의 및 기후정의의 가능성을 예시적으로 탐색해 본다. 기후정의를 다종적 차원으로 확장해 고찰함으로써 필자는 기후 위기와 체제전환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진 ‘비인간’ 측면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비인간의 행위성에 주목하고 위험경관, 대북 캠페인, 물관리 등 다양한 사회 현상을 인간과 비인간이 공동 구성, 작동시키는 것으로 새롭게 이해하는 최근의 ‘인간 너머 지리학’과도 조응한다(Choi, 2016; 황진태 등, 2019; 김준수, 2019; 조용혁・지상현, 2023). 최근 국내외 사회과학에서는 인간이 아닌 존재와 인간과의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비인간(nonhuman), 인간 너머(more-than-human), 인간 이상(other than human), 다종(multispecies) 등의 다양한 개념을 고안하고 발전시키고 있다.1) 이 논문은 기후 위기에 얽힌 비인간 존재의 다양함과 인간-비인간 관계의 복잡성을 상기하기 위해 ‘다종’을 주로 사용하고, 국내 지리학계에 비인간에 대한 연구가 ‘인간 너머’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음을 감안해 다종과 유사한 의미로 ‘인간 너머’라는 표현도 활용했다.
논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기존의 기후정의와 다종적 정의 논의를 기후 위기 및 대응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어, 해외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다종적 기후 정의 개념을 소개하고 주요 특징-기후 취약성, 신체와 공감, 응답-능력, 코스모폴리틱스-을 살펴본다. 나아가, 다종적 기후 정의 관점에서 최근의 해상풍력발전 확대 계획을 살펴보고,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체제 전환의 가능성을 검토한다. 필자는 다종적 기후정의를 기후 위기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공유하는 취약성, 신체적 경험과 공감, 관심 기울이기와 응답을 통해 형성, 작동하는 다종적 상호의존성과 돌봄의 감각으로 설명할 것이다. 또, 다종적 기후정의 관점에서 탄소중립을 위한 최근의 해상풍력발전 확대는 다종적 연결망을 단절하고 비인간을 비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다종적 기후불의를 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2. 기후정의와 다종적 정의
1) 기후정의
기후정의는 기후 위기의 피해가 사회적으로 취약한 국가와 계층에 집중돼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책임과 의무 또한 불평등하게 배분돼 있다는 기후불의(climate injustice)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다(Schlosberg and Collins, 2014).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서구 선발 산업국가들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환경 담론 및 운동으로 출발한 기후 정의는 지난 20여년에 걸쳐 기후 위기 적응과 감축의 원칙이자 기후 대응의 보수화를 막는 대안 기후 담론과 사회운동으로 자리 잡았다(홍덕화, 2021). 특히 2015년 파리 협정 서문에 명문화되면서 기후정의는 국가 기후 정책에서 추구해야 할 핵심 원칙이 됐다(IPCC, 2023). 한국에서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이하 탄소중립기본법)’에서 기후정의를 기후 위기 대응의 원칙 중 하나로 제시하고,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사회계층별 책임이 다름을 인정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과정에 동등하고 실질적으로 참여하며 기후변화의 책임에 따라 탄소중립사회로의 이행 부담과 녹색 성장의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어 사회적, 경제적 및 세대 간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탄소중립기본법 제 2조 12항)”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기후 변화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계층과 세대에 걸쳐 공정하게 배분하며, 이들 이해당사자가 기후 관련 의사 결정 과정에 보다 평등하게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인간 집단의 보다 공정한 책임 및 부담 배분, 동등한 참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후정의는 환경정의를 계승하며 분배적, 절차적 정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박재묵, 2006). 기후정의와 환경정의는 큰 틀에서 롤스로 대표되는 근대 자유주의 정의론을 따르고 있다(최병두, 2010). 롤스는 정의의 주체를 ‘자유롭고 평등하며 자율적인 개인’으로 보고, 사회적 편익의 공정한 배분을 정의의 실현으로 봤다. 롤스의 평등 지향의 자유주의 정의론이 1980년대 이후 환경정의 논의에 이론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환경 정의 담론과 운동이 자연 자원 및 환경오염의 계층간, 인종간, 국가간의 공정한 배분에 주력하게 된다(Agyeman et al., 2016; 박재묵, 2006). 기후정의 또한 온실가스 감축에 따르는 비용, 부담, 편익, 피해 등을 보다 공정하게 배분하는 ‘분배적 기후정의’, 기후 관련 논의 및 의사 결정 과정에 기후 변화 취약 계층 및 미래 세대의 참여를 보장하는 ‘절차적 기후정의’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한상운 등, 2019). 아울러 선주민, 소수자, 사회적 취약 계층 등의 기후 피해와 구조적 원인을 인정하는 ‘인정적 기후정의’ 또한 주목을 받아왔다. 지난 2005년 이누이트가 온실가스 감축 실패로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놓였다며, 미국 정부를 상대로 인권 침해 소송을 낸 것이 그 예다(박태현, 2011). 최근의 기후정의 논의는 분배적, 절차적 정의의 측면을 넘어 취약성, 역량, 인권 등과 결합하며 정책적 대응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홍덕화, 2020).
한편, 쉴로스버그 등은 기존의 기후정의 논의가 인간중심적 한계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Schlosberg, 2012; Tschakert et al., 2021). Schlosberg(2012)는 기후정의가 서구 정의론의 ‘자유주의-인간주의 존재론(liberal-humanist ontologies)’에 기반을 두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인간’만을 정의의 주체와 대상으로 삼았다고 비판한다. 세계가 다양한 인간 너머의 관계로 구성돼 있으며, 객관과 이성, 경제적 합리성 뿐 아니라, 신체, 경험, 애착 또한 세계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간과해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에서 기후정의개념의 등장과 발전을 분석한 연구를 인용해, UNFCCC로 대표되는 국제기후협상의 기후정의 논의 어디에도 비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췌이컬트 등(2021)은 기후정의 논의가 인간 중에서도 서구 백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를 주변화, 타자화하는 인간 예외주의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Tschakert et al., 2021). 기후정의 논의가 비서구 인간과 비인간 집단을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 즉, 기후 위기로 생존과 생계가 위협에 처했는데도 지켜낼 역량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췌이컬트 등은 이처럼 기후정의가 여전히 식민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구조 내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지적은 환경정의 논의가 인종, 계급, 절차적, 분배적 정의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며, 미래 세대와의 관계, 다른 종과의 관계도 포함할 수 있도록 환경정의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박재묵(2006)의 지적과도 접점을 갖는다.
2) 다종적 정의
기후정의의 인간중심적 한계에 대한 지적은 최근 신유물론 계열의 인류학, 지리학, 사회학 등에서 발전시키고 있는 ‘다종적 정의’ 논의와 교차된다(Celermajer et al., 2020; Chao and Celemajer, 2023; Chao et al., 2022; 최명애, 2022).2)2) 다종적 정의는 동물권과 동물 정치, 선주민 및 탈식민주의 자연 철학, 포스트휴머니즘과 신유물론, 환경 정의 등의 폭넓은 학술적 논의에 기반을 두고 인간중심주의 근대 체제를 비판하고 대안적 미래를 탐색하는 학술 연구를 가리킨다(Chao and Celermajer, 2023). 생태인문학자들이 주도한 초기 작업은 인간과 동물, 식물, 균, 광물 등 다양한 존재들의 다종적 얽힘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Kirksey, 2014, 2020; Chao, 2022). 이들은 비인간 존재를 수동적 대상이나 배경으로 보는 대신, 인간의 계획과 실천에 협력하고, 저항하고, 때로는 영합하고 교란하는 능동적 ‘행위자’로 재구성하고, 인간과 비인간의 다종적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가 구성되고 작동함을 인류학적 현장 연구를 통해 제시해 왔다.
기존의 다종적 연구가 다종적 얽힘을 드러내는 데만 지나치게 몰두해왔다는 지적 속에서 최근 연구자들은 다종적 관계의 정치적 측면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Tschakert et al., 2021; Thaler, 2022; Winter, 2022).3)3) 즉, 다종적 관계의 형성과 작동을 권력 관계와 식민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구조의 문제와 연결지어 살펴보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최근의 생태사회적 위기의 원인을 인간-자연 이분법과 이에 기반해 자연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확장해 온 인간중심주의에서 찾고, 인간중심주의의 외부에서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미래를 모색할 것을 요구한다. 과학철학자 해러웨이의 지적처럼 “다종적 환경 정의 없이는 환경 정의도 생태적 세계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Haraway, 2018:102). 이 때 다종적 정의 논의의 핵심 쟁점은 인간을 중심으로 발전시켜온 정의 개념과 실천을 인간과 비인간을 망라하는 다종적 관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다.
비인간을 포함해 정의를 새롭게 사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종적 정의는 자연물에게 인간과 유사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자연의 권리(Right of Nature)’ 논의와 교차되는 듯하다. 동물권 및 환경 법학자와 활동가들은 동물, 숲, 강, 산 등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법적 권리를 갖는다고 보고, 자연물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고안해 왔다(Stone, 1972; 이지원 역, 2018; 강금실 등, 2020; Fitz-Henry, 2022). 이들은 특히 동식물과 생태계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개발 사업 등의 환경 변화로 생존 위기에 처하게 됨을 지적하며, 자연물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원고 적격을 부여할 것을 요구해 왔다. 나아가, 인간이 만든 기업이나 단체와 마찬가지로 자연물도 ‘법인’으로 등록해 인간 후견인을 통해 법적 지위와 권리를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4)4) 자연의 권리 논의는 비인간도 환경과 관련된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치와 제도를 개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환경 및 기후정의의 ‘절차적 정의’를 비인간에게 확대 적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Dryzek and Pickering, 2018).
그러나 컬크시, 차오, 셀레마이어 등의 다종적 정의 연구자들은 자연의 권리 논의가 법적 권리와 같은 인간중심적 범주를 일부 비인간에게 그대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선을 긋는다(Chao et al., 2022; Chao and Celermajer, 2023). 법적 권리의 비인간으로의 확장은 인간과 비인간의 유사성에 기반한 것으로, 비인간 존재의 다양성과 다종적 상호작용의 복잡성을 감안할 때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모든 비인간 존재가 고등동물이나 숲, 강처럼 인간의 관심과 법적 지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나아가, 인간-비인간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거나 협력적일 수는 없으며(e.g. 선주민 후견인의 숲 보호), 많은 경우 오히려 상충하거나 모순된다. 이같은 다종적 관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담아내기에 자연의 권리는 협소한 논리라는 것이다. 차오와 셀레마이어는 “단순히 포용적 제도를 비인간으로 연장하는 것을 넘어, 다종적 관계가 갖는 존재론적 다양성, 관계적 복잡성,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incommensurable) 욕망과 의사소통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Chao and Celermajer, 2023:2).
인간중심적 제도를 비인간에게 연장하는 대신, 다종적 정의 연구자들은 고유한 다종적 관계의 형성과 작동에 주목하는 새로운 정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Tschakert et al., 2021; Winter, 2022; Chao and Celermajer, 2023). 이들은 다종적 정의의 주체와 대상이 기후정의에서 다루는 인간이 아님을 강조한다. 대신 다종적 관계, 즉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그들의 상호작용과 과정” 그 자체에 주목하고,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 생명의 생계와 필요가 고려되는 공동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다종적 정의의 목적으로 본다(Tschakert et al, 2021:5). Tschakert et al.(2021)은 다종적 정의는 자율적 개인 주체를 중심으로 발전시켜 온 기존의 서구 자유주의 정의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대신, 인간과 비인간의 고유하고 맥락화 된 상호 작용에 주목하는 ‘관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정의를 모두가 동의하는 보편적 원칙과,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원칙을 실현하는 데서 찾지 않는다. 대신, 정의를 다종적 관계망의 작동에 따라 만들어지는 관계적 성취물로 본다. 관계망이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느냐에 따라 불의가 야기될 수도, 정의가 생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종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지구에 살아감으로서 취약성을 갖고 있으며, 종의 경계를 넘어 취약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Celermajer et al., 2021). 취약성으로 연결된 다종적 연결망 자체가 정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종적 정치는 취약성을 공유하는 다종적 공동체가 지구에서 살아감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을 어떻게 나눠가질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스리니바산과 코크레인은 인간이라는 종의 이해가 환경과 생태 위험을 둘러싼 다종적 의사 결정에 다양하고 미묘하게 개입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다종적 정의도, 다종적 불의도 야기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Celermajer et al., 2021).
3. 다종적 기후정의
최근 한국 사회에서 동물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확산되는 것과 함께, 국내 기후정의 운동에서도 동물을 포함한 비인간에 대한 언급이 늘어나고 있다. 기후 활동가들과 비판적 연구자들로 구성된 기후정의포럼이 펴낸 기후정의선언에서는 “똑같은 재난이 닥쳐와도 (...) 비인간 동물이 인간보다 더 위험해진다”(기후정의포럼 외, 2021:30)고 지적하며 “돌봄과 연대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등 비인간도 포함된다”(기후정의포럼 외, 2021:65)라고 선언하고 있다. 924 기후정의행진에 이어 이듬해 상반기 기후정의 파업에서도 ‘생태학살 중단’ ‘대규모 공장식 축산 통제’ 등이 핵심 요구 사항의 하나로 등장했다. 구도완(근간)은 기후 및 환경 진영의 비인간에 대한 관심을 포착하고 ‘탈인간’을 체제 전환 의제의 하나로 꼽는다. 기존의 기후 담론들이 인간중심주의적 경향을 보여 왔다면 동물권 운동을 중심으로 기존 기후 체제의 생명파괴적 속성을 드러내는 한편, 탈인간중심주의적 담론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절에서는 비인간을 포함해 기후정의를 사유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종적 기후정의 논의를 살펴본다. 최근의 신진 다종적 정의 연구자들은 다종적 정의를 기후 위기라는 맥락과 연결시키고, ‘다종’의 렌즈로 기후 위기와 대응을 새롭게 살펴보는 다종적 기후 정의 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Tschakert et al., 2021; Tschakert, 2022; Verlie, 2022; Winter, 2022). 이들은 특히 2019/2020년 호주 산불을 사례로 인간과 비인간이 기후 위기를 공유하는 가운데 기후 위기의 피해가 인간과 비인간에게 다른 수준으로 공유되어 있음에 주목하고, ‘인간 너머의 기후 정의’ ‘인간 너머의 연대’ 등의 개념 통해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기후 미래를 모색하고 있다. 이 절에서는 먼저 다종적 기후정의 논의의 기반이 되는 관계적 정의 논의를 짚어보고, 다종적 기후정의 논의의 인간-자연 존재론, 인식론, 윤리적 태도 및 정치적 기획 등을 살펴봄으로서 이 개념을 소개한다.
1) 관계적 정의 접근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종적 기후정의 연구자들은 다종적 기후정의가 단순히 기후정의 논의를 비인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Chao et al., 2022; Chao and Celermajer, 2023). 인간 집단 사이의 분배적, 절차적 정의를 중심으로 발전시켜 온 기후정의 개념을 다종적 관계로 확대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또, 특정 비인간을 피해자로 호명하고 법적, 제도적 보호를 제공하는 이른바 ‘자연의 권리’ 방식도 다종적 관계 속에서 기후 부정의를 논의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다종적 연결망에는 인간부터 동물,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존재들이 모순되고 상충되는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다. 한 종에게 정의로운 결정이 반드시 다른 종에게도 공평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다른 종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불의로 이어지기도 함을 감안할 때 개념의 확장이나 일반화로는 다종적 기후정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종적 관계의 다양함과 복잡함을 감안할 때, 고유한 다종적 관계망의 형성과 작동을 중심으로 정의와 불의를 설명하는 관계적 접근을 발전시킨다(Tschakert et al., 2021; Verlie, 2022; Winter, 2022; Reid, 2023). 이들에게 정의는 미리 정해진 보편타당한 기준(e.g. 법적 권리)을 요구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맥락화된 상호 작용의 효과다. 즉, 다종적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정의가 실현될 수도 있고, 불의가 강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기후정의는 개별적 주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부터, 관계의, 관계를 위해서 생성되는” 관계적 산물이 된다(Winter, 2022:1).
레이드는 다종적 정의를 특정한 다종적 관계성(multispecies relationality)-관계망에 결합된 존재들의 ‘번성(flourishing)’을 지향하는 관계에서 찾는다. 다른 종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취약성을 알아차리며, 이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비로소 다종적 정의의 가능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다종적 정의가 “인간과 비인간 친족 관계를 만들고 길러내는 것”이라는 해러웨이(2018:102, 강조 필자)의 설명과도 조응한다. 레이드는 특히 다종적 정의를 위해서는 법과 제도,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통해 착취가 아니라 종의 경계를 넘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e)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췌이컬트는 다종적 연결망에 결합한 비인간 존재들의 다양성을 상기시키며, 개별 존재가 아니라 존재들의 ‘연결’을 강조하는 관계적 접근이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동물 뿐 아니라 미생물, 숲, 강, 흙과 같은 다양한 존재들을 망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Tschakert, 2022: 278)”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비로소 “공유된 취약성이 무수한 다른 존재들에 대한 돌봄의 추동력이 되는(Tschakert, 2022:278)” 다종적 정의가 상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종적 기후정의는 행위자-연결망과 어셈블리지를 통해 자연-사회 관계를 바라보는 최근의 인간 너머 지리학과 신유물론 사회과학 논의와 교차한다. 인간 너머 지리학의 자연-사회 논의는 인간과 비인간의 이질적 연결망을 중심에 놓고 사회 현상을 연결망의 효과로 보는 관계적 존재론, 신체와 정동을 강조하는 인식론, 고유한 인간-자연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되는 관계적 윤리,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보다 민주적인 공동세계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코스모폴리틱스의 정치적 지향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Choi, 2016). 실제로 다종적 기후정의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신체적 조우를 통한 다종적 윤리의 감각(Verlie, 2022), 인간과 비인간을 망라하는 포용성, 응답-능력, 코스모폴리틱스(Tschakert et al., 2021) 등은 자연-사회 관계에 대한 관계적 접근의 핵심 개념들과 조응하고 있다. 관계적 접근을 통한 기후정의에 대한 탐색은 기존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정의 이론을 보완하는 한편, 인간 너머 지리학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못한 정의 논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론적 공간을 열어줄 것이다.
2) 다종적 기후정의의 특징
이처럼 다종적 기후정의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다종적 관계를 중심으로 기후 위기와 대응을 이해하고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데 목표를 둔다. 다종적 기후정의 논의는 누가 정의의 대상이 될 것인가, 기후 위기와 불의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기후 위기 속 인간-비인간의 윤리적인 관계는 어떻게 생성되며 어떤 정치적 기획이 가능한가 등의 핵심 질문에 대해 기존의 인간중심적 기후정의 논의와 차별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글은 기존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다종적 취약성, 신체와 공감, 응답-능력,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다종적 기후정의의 특징으로 제시한다. 다종적 기후정의 연구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었음을 감안할 때, 이 글에 제시하는 다종적 기후정의의 특징은 호주 산불 사례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최근 논의에서 두드러지는 지점들이며, 논의의 확장에 따라 새로운 특징들이(e.g. 국가의 역할, 비서구적 인간-자연 관계 등)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1) 취약성을 공유하는 다종적 연결망
먼저 다종적 기후정의는 인간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연결된 다종적 연결망을 정의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삼는다. 다종적 기후정의 연구자들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삶이 기후 변화로 크게 취약해졌으며, 모든 존재가 신체를 통해 취약성을 경험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기후 위기 맥락에서 취약성(vulnerability)은 인간 및 비인간 존재가 기후 재난으로 입는 피해를 가리킨다. 최근 기후정의 논의에서 취약성은 기후 위기로 인한 피해가 단순히 재난 노출 정도가 아니라 재난에 대응하고 재난으로부터 복구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역량과 연결지어 논의된다(홍덕화, 2020). 즉, 사회 취약 계층의 재난 취약성이 유난히 높은 것은 사회적 측면에서 재난 대응과 복구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므로, 취약 계층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지원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 취약성은 특정 인간 집단의 기후 피해를 심화하는 부정적 요인으로, 조속한 정책적 개입을 통해 완화시켜야 할 요소로 여겨진다.
한편 다종적 기후정의 연구자들은 취약성을 위험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들은 취약성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연결하는 “행위력(agentic force)”을 읽어낸다(Reid, 2023). 기후 위기로 인한 생존의 위협과 삶의 질 악화는 종의 경계를 넘어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기후 위기로 더욱 취약해졌다는 감각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고르게-그러나 다른 강도로-경험되고 있으며, “공유된 취약성(shared vulnerability)”을 통해 전혀 다른 생활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취약성에 기반한 다종적 연결은 “개별 인간 주체를 넘어 상호의존적인 생물 및 원소(elemental) 행위자들을 포함하는 다종적 ‘연결망’이 [기후] 피해에 노출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Reid, 2023, in Chao and Celermajer, 2023:6). 즉, 기후 위기에 대한 취약성의 감각이 취약성을 공유하고 있는 비인간 존재들로 기후 위기의 연결망을 확장하고, 개별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넘어 다종적 연결망 자체를 중심으로 기후 위기와 기후정의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2) 신체와 공감
췌이컬트(2022)는 특히 신체적 교환을 통해 비인간 존재들이 겪고 있는 괴로움을 맞닥뜨림으로서(encounter)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인간 너머의 연대(more-than-human solidarity)’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후 피해와 책임의 배분을 둘러싼 합리적인 판단 만큼이나, 신체를 통해 다른 존재의 취약성을 알아차리고 공감하는 경험을 통해 윤리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후 위기와 관련한 다종적 신체 대면을 시각적(visual), 체현적(embodied), 윤리적(ethical), 정치적(political) 조우의 4가지로 구분하고 각각의 방식을 통해 각기 다른 수준으로 다종적 연결망에 결합된 비인간 존재와 그들의 고통을 인지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시각적 조우가 텔레비전을 통해 산불에 그을린 캥거루를 보는 것처럼 원거리에서의 간접적 대면을 가리킨다면, 체현적 조우는 새끼를 잃고 괴로워하는 코알라를 보면서 동물의 고통이 마치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감정적, 신체적 상태를 가리킨다. 윤리적 조우는 비인간 존재와의 공감이 현재의 불의한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정치적 조우는 비인간 존재를 인간과 함께 변화를 견인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자로 보는 것을 가리킨다. 췌이컬트는 이처럼 다양한 수준에서의 대면을 통해 비인간 존재를 기후 변화 속에서 인간과 더불어 “함께 살고 함께 죽는”(Van Dooren, 2019) 존재로 재구성한다고 강조한다.
“취약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자각이 인간과 비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에 눈길을 돌리게 하고,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상실한 것에 대해서 애도하게 한다. (...) 이같은 윤리적 어셈블리지를 붙들고 씨름함으로써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을 다른 존재들 또한 행위성과 인격성(personhood)을 갖고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일상과 공간을 요구하고, 또한 재구성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Tschakert, 2022:288)
신체를 경유하는 공유된 취약성의 감각과, 이를 통해 생성되는 다종적 기후정의는 벌리(2022)의 호주 산불 연구에서 보다 선명히 드러나는 듯하다. 벌리는 호주 산불 기간 동안 ‘숨쉬기’를 통해 시드니 공원에서 숨을 고르는 자신과 다양한 시공간에서 산불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비인간 존재들이 접속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산불이 인간과 비인간을 망라해 수십억에 이르는 존재들에게 ‘호흡의 위기’를 가져왔으며, ‘재난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행위가 다양한 비인간 존재들과 기후 재난을 공유하는 실천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벌리는 “그 연기를 호흡하는 것”은 “소각된 생태계를 들이마시는 것이며, 이를 통해 불타버린 다종적 신체의 작은 조각들을 우리의 폐로, 혈액으로, 기관으로, 뇌로 들어오게 하는(Verlie, 2022:297)” 신체적 횡단의 과정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특히 숨쉬기라는 신체적 실천이 산불 현장의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우리의 신체로 소환하고, 우리의 신체를 산불 현장으로 데려가는 횡단신체적 역할을 수행하며, 나아가 재난 현장의 취약한 존재들을 인지하고, 응답하고자 하는 열망(aspiration)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한다. 이 때 다종적 정의는 산불 현장의 취약한 인간 및 비인간 존재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공모(conspiration)’하여 무엇이라도 하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라고 벌리는 설명한다.
(3) 응답-능력
그렇다면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윤리적 관계와 정치적 기획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다종적 기후정의 연구자들은 관계적 자연-사회 논의에서 발전시켜온 응답-능력과 코스모폴리틱스를 기후 위기 맥락으로 불러온다(Tschakert et al., 2021). 해러웨이 등이 지적하듯 다종적 연결망에 결합된 다른 존재를 알아차리고, 이들의 고통과 기쁨을 보고 듣는 법을 배우고, 책임 있게 응답하는 것이 다종적 윤리의 실천이라는 것이다(Haraway, 2018). 다종적 연결망에 결합된 다른 존재를 인지하고 윤리적 관계를 맺는 방법의 하나로 왈도와 쉴로스버그는 누스바움의 개념을 빌려 ‘공감적 상상’(symapthetic imagining)을 제시한다(Celermajer et al., 2021). 인간이 전혀 다른 생활 세계에 살고 있는 동물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갖고 있는 신체의 경험과 감각을 통해 동물의 처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이 기후 위기로 취약성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감적 상상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비인간 존재들로 다종적 연결망을 확장하게 하는 듯하다. 벌리(2022)는 시드니 도심에서 반쯤 타버린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들고 산불 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한 코알라를 떠올린다. 폭우의 경험은 재난 현장에서 황급히 피난하는 주민들 뿐 아니라 축사에 갇힌 채 물에 잠겨 죽어가는 가축들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폭염은 도시의 인간 뿐 아니라 축사의 동물들도 달군다. 폭염의 경험은 “축사 지붕에 물을 뿌리고 환풍기를 돌려도 축사 온도는 42도를 넘어서기 일쑤였다”는 언론 보도를 보면서 더위에 지쳐 죽어가는 닭에 대한 공감적 상상을 가능케 한다(MBN뉴스, 2021).5)5) 나아가, 기후 재난에 대한 취약성이 인간 집단 뿐 아니라 종의 경계를 따라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으며, 시장주의, 성장주의, 인간중심주의 사회경제 체제를 통해 구조화되고 강화되고 있다는 자각은 다종적 불의의 관점에서 기후 위기와 대응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신체적 경험을 통한 공감적 상상이 종의 경계를 넘어 “인간 너머의 연대” (Tschakert, 2022) “종간 동맹(inter-species alliance)”(Chao and Kirksey, 2022)을 가능케 하고, 보다 정의로운 다종적 관계를 위한 윤리적 응답과 정치적 기획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4)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전환
라투르와 스텐저스가 제안한 코스모폴리틱스는 “세계를 이해하고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 비인간 존재를 적극 고려하고자 하는 정치적 지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최명애, 2022:93). 췌이컬트 등은 기후 정치의 코스모폴리틱스를 기술관료적, 신자유주의적 기후 위기 대응을 넘어 “활기찬 삶, 생존가능성, 정의(liveability, survivability, justice)” (Tschakert et al., 2021:7)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들은 기술과 시장에 의존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기후 코스모폴리틱스를 실현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기후 코스모폴리틱스의 모습과 경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뚜렷한 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듯하다.
다종적 기후정의를 정치적 기획에 결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홍덕화(2020)는 기후정의 담론과 운동이 기후위기 논의가 탈정치화되는 것을 막고 급진적인 기후 변화 대응 정책을 이끌어내는 데 일정 정도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전환의 정치를 구성하는 사회운동으로 기후정의에 어떤 요구가 포함되느냐에 따라 기후위기 대응 방향과 전환 경로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홍덕화, 2020:305)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전환 대상이 되는 산업과 노동자에 대한 보호가 기후정의의 이름으로 제기되었고, 이를 계기로 노동자 보호를 포함한 포괄적인 사회 전환 요구가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기후 의제로 대두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다종적 정의가 기후정의의 한 요구로 포함될 때 기후위기 대응 방식과 경로 역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다종적 정의를 주장하는 것은 탄소중립과 체제전환 논의가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존재, 나아가 다종적 관계의 차원을 누락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마련된 정책과 전략이 비인간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불의를 드러내고, 지난한 협상을 거쳐 책임있는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비로소 기후 위기 속에서 비인간 존재와 함께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방법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6)6)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기후 정치를 상상하기 위해 비인간 동식물과 생태계를 기후 변화의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기후 논의에서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행위자”(Tschakert, 2022)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인간 너머 지리학과 신유물론 사회과학에서 강조해 온 비인간의 행위성 논의와도 조응한다(Choi, 2016). 췌이컬트는 아직까지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대가 기후정의 논의에서 소환되고 영향력을 행사함을 주목하며, 기후 정치의 모든 당사자가 현존하거나 실체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 기후 난민을 기후 변화로 삶의 터전을 잃은 피해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후 위기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동하는 존재로, 이동 정의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위자로 새롭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비인간 동식물과 생태계 또한 미래 세대처럼 현존하지 않고도 기후 위기 대응 논의의 장에 참여할 수 있으며, 기후 난민처럼 서식지 이동과 행동 변화를 통해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능동적 행위자로 볼 수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국가간 패널(IPCC) 6차 보고서를 포함해 국제 기후 논의에서 비인간은 종종 지구 기온 상승에 따라 멸종에 처하는 수동적 존재로 묘사된다(IPCC, 2023).7)7) 그러나 실제 많은 동식물은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남북극 극지방 및 고산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조연주 역, 2022). 기후 난민을 예외로 하면, 이동하지 않는 것은 인간 뿐이다. 바이오시프트(bioshifts), 즉 기후 변화에 따른 동식물의 이동 속도는 연평균 0.42km 이상이며, 해양 동물의 이동 속도는 육상 동물보다 2배 이상 빠르다. 이를 감안할 때 동식물과 생태계는 기후 위기 앞에서 무기력하게 멸종을 기다리는 존재라기보다, 빠르게 변화를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해 온 능동적 행위자가 된다. 비인간은 줄곧 ‘말했지만’, 기후 운동과 기후 협상이 듣지 않았던 것이다. 르느와르 등은 육상 동물과 해양 동물의 바이오시프트 속도 차이를 육상 동물의 경우 인간이 만든 건조 환경에 가로막혀 이동에 제약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설명한다(Lenoir et al., 2020). 기후 변화에 따른 동식물의 이동을 기후 파국의 전조로 보는 대신, 이들의 이동을 인정하고 보조할 수 있는 방안을 기후 적응 대책에 포함시키는 것이 비인간에게 ‘응답’하는 기후 정치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탤러는 다종적 정의의 유용성을 “만약...이라면(what if)”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불가능하다고 여겨온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데서 찾는다(Thaler, 2022: 252). 다종적 관점에서 기후 위기와 대응을 바라보는 것은 이처럼 인간중심주의의 외부에서 기후 위기를 생각하고,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상상할 수 있는 개념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기후 위기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의존성과 취약성을 인지하고, 익숙하거나 당연히 여겨 온 기후 변화 대응을 새롭게 바라보며, 이를 통해 발생하는 생태사회적 변화가 인간과 비인간의 취약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 어떻게 응답할지를 탐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4. 탄소중립과 다종적 불의
이 절에서는 다종적 기후정의를 분석의 렌즈로 삼아 국내 해상풍력발전 확대 사례의 다종적 측면을 살펴본다. 해상풍력발전 설비의 설치와 운영은 어민의 삶 뿐 아니라 연안에서 살아가는 어류, 해양포유류, 갯벌 저서생물, 나아가 바람길을 이용하는 조류까지 다양한 비인간 존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해상풍력발전을 둘러싼 최근의 논의는 발전 설비 확대 정책 드라이브가 비인간 존재의 삶을 위협한다는 측면에서 ‘다종적 불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발전 설비로 비인간 존재의 삶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설비 입지를 재고하려는 일부 노력은 비인간 존재를 포함해 기후 위기를 사유하는 ‘다종적 기후정의’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절의 분석은 본격적인 사례 연구라기보다는, 다종적 기후정의를 경유해 기후 위기와 대응을 살펴볼 때 어떤 새로운 관점과 가능성들이 생성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론에 가깝다. 향후 다종적 기후정의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는 과정과 함께 본격적인 사례 연구가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1)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해상풍력발전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의 대응은 기술과 시장을 이용한 온실가스의 파격적 감축부터 시장주의, 성장주의, 인간중심주의 사회경제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체제 전환 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전개되고 있다(구도완, 근간). 기후 운동가들과 비판적 연구자들은 체제 전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재 기후 변화 대응 정책과 제도의 주류는 2050년까지 탄소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탄소중립으로 기울어진 상태다(IPCC, 2023). 기후 위기 비상 상황이라는 위기의식이 체제 전환을 통한 기후 문제의 근본적 해결보다는, 지구 기온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된 탄소부터 줄이고 보자는 탄소 환원주의적 기후 대책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홍덕화, 2021).
한국의 탄소중립 드라이브는 2021년 탄소중립기본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시행되면서 본격화됐다. 2023년 4월 발표된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는 중단기적으로는 2030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2018년 대비 40% 감축, 장기적으로는 2050년 탄소중립이다. 정부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하여 탄소중립 사회로 이행하고 환경과 경제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모한다”는 비전과 함께 4대 전략 12대 과제를 제시했다. 이 때 제 1 과제가 원전・신재생 등 무탄소 전원을 최대한 활용한 온실가스 감축으로, 재생 에너지 설비 확대 등을 통해 전력분야 에너지원을 화석 연료에서 저탄소 에너지원(원자력, 재생에너지, 신에너지)으로 교체하고, 2030년까지 전력 분야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의 절반 가까운 수준(45.9%)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22년 9.2%에 불과한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30년까지 21.6%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정책 목표를 갖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핵심은 해상풍력발전으로, 풍력 발전 설비를 2030년까지 현재 규모의 10배로 확대하고, 이 중 70% 이상을 해상 풍력으로 충당한다는 계획이다.
해상풍력발전을 통한 재생에너지 확대와 탄소중립의 청사진은 해상풍력발전의 현재 수준을 감안할 때 매우 야심만만하다. 2021년 말 현재 국내 해상풍력발전 설비는 142.1메가와트(MW)로 전체 풍력발전(1.6GW) 설비의 8.7%에 불과하다. 해상과 육상을 합친 전체 풍력발전 설비 자체가 국내 전력발전 설비 규모(129.2GW)의 1.3%에 그친다. 발전량 기준으로는 더 낮아 해상풍력의 기여는 거의 미미한 수준이며, 전국 풍력발전 전체 발전량도 국내 발전량의 0.6%에 불과하다.8)8) 2030년까지 풍력발전 설비를 16.5GW로, 이 중 12GW를 해상풍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상풍력발전 설비 규모를 지금의 96배로 키워야 한다(이후승・정슬기, 2021).
해상풍력에 대한 관심은 해상풍력이 상대적으로 입지 및 운영이 수월한 재생에너지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해상풍력은 설비 규모나 고도 관련 제약을 덜 받기 때문에 육상풍력이나 태양광에 비해 설비를 대형화하기 용이하다. 또 바다 위에 설치되기 때문에 거주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소음 피해나 자연 파괴 논란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때문에 해상풍력발전 설비를 설치할 수 있는 전국 연안 지역과 지자체에서 강력한 해상풍력 확대 바람이 불고 있다. 현재 운영 중인 설비는 제주 탐라 30MW, 전남 영광 34.5MW 등 수십 MW급 6곳에 불과하지만,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곳은 89곳에 이른다(한국수산경제, 2021). 이미 허가를 취득한 곳도 39곳이다. 해상풍력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풍력발전보급촉진을 위한 특별법도 발의돼 논의 중이다. 지자체 주도로 풍력 입지를 선정하고, 환경영향평가를 간소화해 풍력발전 인허가 시간을 대폭 단축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탄소중립을 위한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의 핵심에 해상풍력발전 확대가 자리잡고 있다.
2) 해상풍력발전의 다종적 기후불의
해상풍력발전이 재생에너지 확대와 탄소중립의 전략으로 주목받는 이면에서는 해상풍력발전으로 예상되는 어민 피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풍력발전에는 수심 50m 이하, 초속 6m 이상의 바람이 부는 연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조건을 충족하는 곳 대부분이 현재 연안 어업이 이뤄지고 있는 지역이다. 정부의 계획대로 해상풍력발전을 12GW 규모로 확장하려면, 여의도 면적의 1000배에 이르는 2800km2의 연안이 풍력발전 단지로 전용돼야 한다(임현지 등, 2021). 어민들이 이용하는 어장에 발전 설비가 설치되고 운영되면서 어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경남 통영, 부산 청사포, 전남 영광 등 정부가 예고한 주요 해상풍력발전 단지들이 어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좌초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해상풍력발전 단지 설치가 사회적으로 취약한 어민의 생계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는 전형적인 기후불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어민과 달리 해양 동식물과 생태계는 해상풍력발전 논의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해상풍력발전 설비와 운영은 어민 뿐 아니라 어류, 저서생물, 조류 등 연안의 비인간 존재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들 비인간 동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바다, 갯벌, 섬, 연안과 상공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어민의 어장은 곧 해양 동물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해상풍력발전 설비가 이미 운영 중인 제주 연안은 남방큰돌고래 서식지이며, 대형 해상풍력사업이 줄줄이 예정된 전남 해안에는 멸종위기 해양포유류 상괭이와 다양한 갯벌 저서생물이 살고 있다. 서해안 해상풍력 계획 지역에는 괭이갈매기의 집단 번식지가 다수 존재한다(이후승・정슬기, 2021). 풍력발전단지 설치와 운영은 해양 포유류와 조류, 어류, 저서생물 등 연안에서 삶을 꾸려가는 다양한 비인간 존재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Goodale and Milman, 2016; Best and Halpin, 2019; Bennun et al., 2021). 풍력발전 설비 공사와 운영은 어류와 포유류의 서식지를 직접적으로 파괴하고, 소음, 진동, 전자기장을 일으켜 해양 포유류의 생태를 교란할 수 있다. 발전기와 함께 송전 케이블 매설은 저서생물이 서식하는 해저면을 직접적으로 훼손한다. 발전기 운영에 사용하는 윤활유, 냉각제, 연마제 등의 화학 물질은 바다를 오염시킬 수 있다. 나아가, 풍력발전기 예정지는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해양성 조류의 이동 경로이기도 하다. 풍력발전기와 조류의 충돌 또한 우려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민 뿐 아니라 다양한 비인간 존재 또한 해상풍력발전의 확대로 생존과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나 현재 해상풍력발전 논의에서 이들 비인간의 존재감은 매우 미미하다. 육상 개발 사업에서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발견돼 사업이 중단되거나 우회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해양 동물은 바다 속에 서식해 인간의 눈에 잘 띄지 않는데다, 해상풍력발전 예정지가 인간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관련 논의에서 누락되기 쉽다. 나아가 현재의 해상풍력발전 논의 구조에서 비인간을 고려할 수 있는 부분은 환경영향평가의 ‘입지 선정 및 환경 영향 감축’ 항목뿐이다. 저서 생태계, 어류 및 수산자원, 보호종 및 보호구역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해당 사업이 이들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최근의 해상풍력특별법은 그나마 환경영향평가마저도 간소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9)9) 해상풍력발전 예정지에 어떤 동식물과 생태계가 있는지 파악하고, 해상풍력발전 사업이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대응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이 모두 함께 겪고 있는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비인간 동식물과 생태계의 생존을 되레 위협한다는 점에서 해상풍력발전 확대는 다종적으로 ‘불의’한 모습을 보인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다종적 기후정의는 특히 인간과 비인간이 공유하는 취약성에 기반한 다종적 연결망을 강조한다.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도 기후 위기와 재난으로 취약해지고 있다는 인식이 인간 위주의 연결망을 비인간으로 확장하고, 기후와 관련된 의사 결정이 비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이를 감안해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해상풍력발전 확대는 다종적 연결망을 확장하는 대신, 오히려 연안을 매개로 인간과 비인간이 맺어왔던 다종적 연결망을 끊어내는 듯하다. 어민, 어류와 해조류, 해양포유류, 저서생물 등 연안의 인간과 비인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생활과 생계의 다종적 연결망을 구성하고 작동시켜 왔다(김준, 2010). 그러나 해상풍력발전 논의에서 연안은 어민과 동식물의 ‘삶의 터전’에서 ‘풍력발전 설비를 설치할 수 있는 부지’로 새롭게 구성된다. 연안이 갖는 다종적 삶의 공간이라는 차원은 탈각되고, 대규모 재생에너지 설비를 빠르게 설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단순화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민의 피해는 가시화되고 논의의 장에 포함되지만, 비인간 동식물과 생태계에게 미칠 피해는 논의의 장에서 누락되거나 축소된다. 환경영향평가는 해상풍력발전 설비와 운영이 비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공론화 할 수 있는 유용한 정책적 도구지만, 환경영향평가 간소화 논의는 이 정책 도구를 무력하게 한다. 연안 다종적 공동체의 연결망이 해체되고, 인간만이 해상풍력발전 확대의 피해자로 구성되고 정책적 개입이 이뤄지는 것이다. 기존의 인간-동식물-생태계를 연결하는 다종적 관계가 단절되면서, 비인간 존재들은 연결망에서 분리돼 발전단지 예정 부지의 존재감 없는 일부가 된다. 이처럼 다종적 ‘연결’ 대신 ‘분리’를 강화하고, 비인간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논의의 장에서 누락시킨다는 점에서 현재의 해상풍력발전 확대 정책 드라이브는 다종적으로 정의롭지 못하다. 비인간 존재가 비가시화 되어 있는 상황에서 비인간 존재와의 신체적 조우와 공감은 물론, 응답도 기대하기 어렵다.
해상풍력발전 확대는 인간을 연안의 다종적 연결망에서 분리하고, 인간에게만 풍력 발전 피해의 예외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적, 인간예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듯하다. 지금의 기후 위기가 근대 인간중심적 사유와 실천의 결과라는 차크라바티 등의 지적을 상기할 때(Chakrabarty, 2009),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이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더구나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로 인간과 비인간이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데,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해 나온 제안이 비인간의 삶을 더욱 취약하게 한다는 상황은 사뭇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탄소중립 논의가 기후 위기를 일으키고 강화하는 체제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온실가스 감축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말러 등은 시장주의 체제 속에서 작동하는 탄소중립의 기획이 결국 시장에 포섭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Maller, 2021).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 체제 속에서는 탄소중립 방안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인간의 필요를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다종적 불의를 재생산하고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3)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해상풍력발전?
그렇다면 다종적 기후정의를 지향하는 탄소중립과 해상풍력발전은 불가능한 것일까. 필자는 해상풍력발전으로 영향을 받는 해양 동물이나 조류를 드러내려고 하는 최근의 시도에서 다종적 기후불의를 넘어 다종적 기후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제주 해양환경단체 핫핑크돌핀스(2022)는 탐라해상풍력발전 예정지가 남방큰돌고래의 서식지와 교차하고 있다며, 남방큰돌고래 서식지 보호를 위해 풍력발전사업을 취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앞서 대정해상풍력발전단지 시범사업은 2020년 제주도의회에서 부결돼 추진이 중단됐다. 해녀 등 어민의 반발이 주된 이유였지만, 해상풍력발전 시범 사업이 남방큰돌고래의 생태와 서식지를 교란할 수 있다는 우려도 부결 결정의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한편, 한국환경연구원과 국립생태원의 서해 조류 조사는 해상풍력발전으로 영향을 받게 될 바닷새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두 기관은 2021년 6월부터 1년 반에 걸쳐 서해를 중심으로 전국 섬 지역의 괭이갈매기 집단번식지와 이동경로를 조사했다(연합뉴스, 2023). 괭이갈매기와 노랑부리저어새 166마리에 직접 위성추적장치를 달아 파악한 대형 조사로, 조사 결과는 해상풍력발전 사업 환경영향평가 자료로 활용될 계획이다. 서해는 섬이 많고 수심이 얕아 해상풍력발전에 적합하지만 동시에 호주와 시베리아를 잇는 동아시아-대양주 철새 이동의 주요 경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풍력발전설비 설치와 운영이 서해를 이용하는 새들의 생태와 서식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시도는 인간중심주의에서 한 발짝 물러서 해상풍력발전 논의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듯하다. 해상풍력을 둘러싼 정책적 논의가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망을 단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면, 이들 환경단체와 연구기관은 기존 논의에서 누락되어 왔던 비인간 존재에 주목하고, 해상풍력발전 확대가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해상풍력발전의 연결망을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확장함으로써, 정책의 연결망과 구분되는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때 연결망은 어민이 어장을 잃듯 남방큰돌고래와 괭이갈매기 또한 해상풍력발전 확대로 삶터를 잃을 수 있다는 공유된 취약성에 기반하고 있다. 이 때 남방큰돌고래와 괭이갈매기는 일상적인 인간의 삶터와 유리된 해상과 도서지역에서 살고 있지만, 환경단체가 찍은 사진을 통해, 연구기관의 서식지 지도와 숫자, 서식지에서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재현되면서 인간과 대면한다. 특히 풍력발전기 틈에서 위태롭게 유영하는 남방큰돌고래의 모습, 중국과 북한, 서해를 넘나들며 알을 품고 번식하는 괭이갈매기의 생태는 비인간 존재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연안에서 삶을 꾸려가는 존재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때 연안은 비단 풍력단지 예정부지나 어민의 어장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삶을 꾸려가는 다종적 삶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종적 취약성, 신체와 공감을 통한 대면은 해상풍력발전이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게 하고, 인간의 결정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때 ‘응답’은 다종적 관점에서 해상풍력발전을 새롭게 살펴보고, 다른 종에게 가해지는 피해와 폭력을 직시하고, 다종적으로 보다 정의로운 전환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편 필자는 다종적 기후정의에 대한 희구가 반드시 다종적 불의를 이유로 (제주의 사례처럼) 계획 중단으로 이어지거나 사업 철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환경부는 괭이갈매기 서식지 조사로 그간 해양풍력발전 논의에서 소외되었던 비인간 존재를 부각시켰지만, “바닷새 핵심 서식지가 해상풍력발전소 입지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연합뉴스, 2023). 해상풍력발전 입지 결정에는 멸종위기 조류를 포함해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의 경합하는 이해와 요구가 중첩돼 있다는 것이다. 다종적 관계의 다양성과 복잡성 속에서 기후 위기 대응은 지난한 협상과 최선일 수 없는 선택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이같은 협상과 선택이 인간을 넘어 비인간을 포함한 다종적 관계의 번성을 지향할 때 비로소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트러블’과 함께 체제전환
924 기후정의행진은 기후정의 실현과 체제 전환을 핵심 요구로 내걸었다. 이는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기존의 시장주의, 성장주의, 인간중심주의 체제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비판적 연구자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기후정의동맹, 2022). 탈인간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 현실의 기후정의와 체제 전환 논의에서 비인간은 종종 누락되거나 선언적으로 언급되는 데 머무는 듯하다. 이 글은 기존의 기후 논의가 인간중심적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 인간과 비인간의 다종적 관계를 중심으로 기후 정의와 체제 전환을 살펴봤다.
필자는 먼저 다종적 기후정의 개념을 소개하고, 다종적 기후정의가 인간중심적으로 발전시켜 온 기존의 정의 개념과 제도를 비인간으로 확장하는 것이기 보다는, 인간과 비인간의 고유하고 맥락화된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되는 관계적 감각과 지향을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다종적 관계는 기후 위기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공유하는 취약성, 신체적 경험과 공감, 관심 기울이기와 응답-능력을 통해 형성・작동하며,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기후 위기 대응을 모색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제안된 해상풍력발전 확대가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망을 단절하고 비인간을 비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다종적 기후불의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한편, 해상풍력발전 논의에서 누락된 비인간 존재를 드러내고 연결시키는 최근의 시도에서 다종적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논문은 기후정의 논의를 비인간 존재를 포함하는 다종적 관계로 확장하고, 분배적・절차적 정의를 넘어 취약성과 신체, 공감에 기반하는 관계적 정의를 살펴봄으로써 국내 인문 지리학의 환경정의 논의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결론을 대신해 다종적 기후정의 논의의 후속 연구 방향과 의의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호주 산불 사례로 촉발된 논의를 중심으로 다종적 기후정의 개념을 국내에 소개하고, 다종적 기후정의의 관점이 해상풍력발전 확대와 같은 현실 사례를 분석하는 데 갖는 통찰을 살펴봤다. 기존의 연구는 취약성, 신체, 공감 등을 중심으로 미시적 차원에서 인간-비인간의 상호작용을 세심하게 살펴봐 왔으나, 다종적 기후불의를 야기한 구조적 원인에 대해서는 ‘인간중심주의’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종적 기후정의 논의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기후불의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정치하고 맥락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기존 기후정의 논의에서 발전시켜 온 식민주의, 자본주의와 인간중심주의의 접점을 찾아내고, 이 접점이 어떻게 다종적 기후불의를 야기하는지를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에서는 국가의 자연에 대한 통제와 관리가 지역적으로 특수한 인간-비인간 관계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김준수 등, 2022). 국가-자연 관계 논의를 다종적 기후정의와 결합함으로써 동아시아 맥락에서의 다종적 기후불의/정의의 구조적 원인과 대안적 가능성들을 탐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종적 기후정의가 기후 위기와 체제 전환 연구 및 실천에 갖는 의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필자는 앞서 해상풍력발전을 둘러싼 정책 논의가 다종적 기후불의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글이 다종적 기후 불의를 고려해 탄소 감축 노력을 중단하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탄소 감축 목표를 조속히 달성하기 위해 돌고래와 철새, 저서생물의 생태와 서식지를 훼손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체제 전환과 다종적 기후 정의가 결코 무구하지 않으며 지난한 협상과 책임있는 판단의 과정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다종적 얽힘 속에서 한 종에 대한 정의의 실현은 불가피하게 다른 종을 위험에 노출시키거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수반하게 된다(Parreñas, 2018).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보편타당한 해결책은 없다. 어느 하나도 덜 중요할 수 없는 가치들의 경합 속에서 고통스러운 협상과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다종적 기후정의가 이같은 인간 너머의 협상과 책임 있는 선택의 지향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홍덕화는 기후정의가 “탄소 배출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문제를 환기하며 생태적 현대화를 의심하는 출발점”(홍덕화, 2021:133)으로 기능해 왔다고 지적한다. 기후정의의 요구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 온 기존의 체제와 체제 개선의 기획에 파열음을 내어 왔다는 것이다. 다종적 기후정의도 마찬가지다. 해상풍력발전 사례에서 보듯 다종적 기후정의는 다종적 측면에서 기존의 기후 대응 전략이 정의롭지 못함을 드러내는 분석 도구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을 포함해 기후 위기 대응과 체제 전환을 설계하고 실천해야 한다는-거의 불가능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지향점이 될 수 있다. 다종적 기후정의를 체제 전환의 지향으로 삼음으로써 경합하는 존재와 가치들 속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고, 결정의 결과와 함께 살기를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차오와 셀레마이어는 종의 경계를 횡단하는 책임 있는 “트러블과 함께 하기”를 통해 “거의 가능하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공동의 미래”((Haraway, 2003:7, Chao and Celermajer, 2023:6 재인용)가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다종적 기후정의를 향한 체제 전환은 그래서 매끄럽지 않으며, 최선일 수 없는 선택들과 어색하게 공존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