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1) 19세기 이전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2)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3. 19세기 충청도 연기현 읍지의 「방리」와 지명 비교
1) 연기현 읍지 「방리」에 수록된 면의 편제와 동리
2) 19세기 연기현의 면별 동리 지명 변화
4. 정리 및 결론
1. 서론
조선시대 지리지의 대부분이 군현 단위로 편찬되었고, 현전하는 전국 지리지 또한 군현 단위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것이 대부분이다.1)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는 당시 지역의 정보를 가장 사실적이고 종합적으로 기록한 문헌으로, 지역의 사회경제적 환경과 공간구조 변화를 이해하는데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료이다. 양보경(1997)에 의하면, 조선시대 읍지는 16세기 후반부터 지방의 사림과 수령을 중심으로 군현 단위에서 활발하게 편찬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연기현(燕岐縣) 읍지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 등의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국 지리지, 도별 지리지 등에 수록된 9종과 연기현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2종이 현전한다. 이들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편찬 당시 ‘연기현’의 지역 정보를 지역 차원에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이지만, 대부분이 편찬자와 편찬 시기가 미상이다. 게다가 이들 지리지는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성책한 전국 지리지인지, 전국 지리지를 누군가가 필사한 후사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후대에 성책된 지리지에 실린 읍지가 앞선 시기 지리지보다 오래된 경우도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가장 많은 읍지가 편찬된 19세기 읍지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읍지 간행 당시부터 간행 정보가 명시적으로 표기되지 않았고, 후대에도 올바르게 비정(比定)되지 않은 채, 개별적 필요에 따라 특정 읍지가 선택적으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기록의 오류를 반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까지 지리지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전국 혹은 도별 지리지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종합적이고 공시적(共時的)인 기록으로 특정 시기의 지역적, 사회적 상황을 고증해 주는 중요 사료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읍지는 구 읍지를 그대로 베낀 경우가 많아 읍지 간행 당시 고을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이재두, 2022, 275). 공시성을 견지하는 전국 혹은 도별 지리지에 수록된 군현 단위 읍지의 본래 간행 시기도 제각각이다. 이는 각 군현 단위 읍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고찰이 이루어질 때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의 모태가 되는 연기군의 조선시대 기록은 연기현 읍지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연기현 읍지나 지명에 대한 역사지리적 고찰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옛 공주목 진관 영역 지명 변천에 관한 연구(김순배, 2009), 옛 연기와 전의 읍치의 전통적 모습과 주요 변화를 고찰한 연구(권선정, 2017), ‘연기’의 지명 연원에 대한 연구(안병섭, 2017) 등에서 연기현 지명이나 경관에 대한 설명이 부분적이고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적으로 의미 있는 새로운 세종시 지리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의 종류와 그 내용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부터 선행되어야 한다.2)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 건치연혁에 의거하면, ‘연기’라는 지명과 행정구역은 신라 757년(경덕왕 16) 연산군 연기현(燕山郡 燕岐縣)으로 편제되면서 시작되었고, 조선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 관찰사제에 입각한 지방제도 개편 때 충청도 연기현으로 편제되어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기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 13도제 실시로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편제되었다. 2012년 7월 1일 출범한 세종시에 흡수되었으며, 옛 지명 ‘연기’의 전통은 연기면과 연기리로 존속되고 있으며, 많은 동리 지명과 함께 지역의 문화 자산으로 현존한다.
지리지 내용을 구성하는 항목 중에서 서술 비중이 높고, 공간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항목은 「방리(坊里)」다. 세종시 공간 구성의 바탕은 조선시대 연기현을 구성했던 면과 동리들이고, 옛 연기현을 설명하는 기초 행정구역과 지명은 현재 세종시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지역 정보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현전하는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의 현황을 고찰하고, 가장 많은 읍지가 편찬되었던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 「방리」의 구성과 지명을 비교,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기현 읍지의 간행 시기를 비정(比定)해 보고자 한다.
2.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1) 19세기 이전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전기에 편찬되어 현전하는 주요 전국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여지도서』는 조선 후기에 편찬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연기현 읍지의 간행 시기를 19세기 이전과 19세기로 대분하면서, 이들 3종 전국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을 살펴보았다(표 1).
표 1.
19세기 이전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 수록 항목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연기현은 충청도 청주목 관할의 2군 17현 소속으로 수록되어 있다(태백산 사고본 53책 149권 6장).3) 연기현은 건치연혁, 원수산(元帥山), 대천 웅진(熊津), 사방경계, 호수(戶數)와 인구, 토성(土姓)과 속성(續姓), 간전(墾田)과 토의(土宜)와 토공(土貢), 자기소와 도기소, 봉화, 금사제(金沙堤)에 대해 항목으로 구분하지 않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연기현의 방리에 대한 내용은 제시되지 않았고, 대표적인 산천으로 제시된 원수산과 웅진, 남쪽의 정좌산(正左山), 자기소와 도기소가 있는 현의 북쪽 요혜방(要惠方), 봉화가 있는 현의 남쪽 용수산(龍帥山), 현의 서쪽에 있는 제언 금사제(金沙堤) 등에서 6개 정도의 지명이 등장하는 정도로 지역의 지명 정보가 간단하다(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9장).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된 건치 연혁은 “본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청주 임내에 붙였다가, 명종 임진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그 뒤에 목천감무(木川監務)로 연기를 겸임하게 하다가, 본조 태조 정축에 다시 두 현을 갈라서 각기 감무를 두고, 태종 갑오에 전의(全義)와 병합하여 전기(全岐)로 고쳤다가, 병신에 다시 연기 현감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연기현 읍지들은 ‘두잉지와 연산’을 연기현의 군명(郡名)으로 기록하고 있다.4)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에 의하면, ‘연기’라는 지명은 신라 757년(경덕왕 16) 연산군 연기현으로 편제되면서 공식적인 행정구역으로 처음 명명되었다.5) 고려 1018년(현종 9) 청주에 소속되었고, 1172년(명종 2)부터 감무를 두었고, 목천 감무의 겸임 관할을 거쳐 조선 1397년(태조 6) 연기현으로 독립했으나, 1414년(태종 14)에 전의와 병합하여 전기현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에 비로소 연기현으로 독립하였고, 현감이 관할하는 충청지역의 소규모 지방 행정구역으로 오랫동안 존속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연기현은 충청도 공주목 관할 2군 10개 현의 마지막 현으로 수록되어 있다. 연기현은 건치연혁, 관원, 군명, 성씨, 풍속, 산천, 토산, 누정, 학교, 역원, 불우, 사묘, 고적, 명환, 신증(인물, 제영)의 16개 항목을 5면 정도로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6) 각 항목에서 『세종실록지리지』보다는 많은 지명이 나타나고, “성산(城山)이 현의 동쪽 1리에 있으며 진산이다.”와 같이 주요 지명의 위치와 거리가 설명되지만, 관할 방리나 인구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여지도서』에서 연기현은 충청도 공주목 관할 10개 현의 마지막 현으로 수록되어 있다.7) 연기현은 강계, 방리, 도로에서 군병에 이르는 28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지도서』가 이전 지리지에 비해 항목도 상세하고, 방리와 도로 등 지역의 구체적인 공간 정보를 첫머리에 제시하며, 조세 수취와 관련되는 항목들을 독립적으로 구성하는 등 18세기 조선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기현 읍지 또한 그러한 특성을 반영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연기현의 「방리」를 중심으로 행정구역과 공간적 구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첫 번째 지리지라 할 수 있다. 『여지도서』는 1757년-1765년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것으로 보지만, 연기현은 「방리」의 마지막 읍내면 신촌리 다음에 “이상은 기묘장적을 따랐다(以己卯籍爲率).”고 호구 식년을 표기하고 있다. 이에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1759년(기묘년, 영조 35) 이후에 편찬되었기에 본 연구에서는 간행 시기를 1760년으로 표기한다.
『여지도서』 「충청도 감영」에 의거하면, 충청도는 고려시대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거쳐 1356년(공민왕 5)에 충청도라 불리게 되었고, 조선 1395년(태조 4)부터 관찰사가 임명되었다. 이에 의하면, 연기현은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연산군 연기현이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제되면서 ‘연기’라는 지명이 공적으로 명명되었다. 고려 1356년(공민왕 5)부터 충청도에 속한 군현으로 존속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연기군으로 개칭되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편제되었다. 이처럼 ‘연기’는 8세기 중반부터 충청지역의 독립 행정구역으로 존속했지만, 관할 방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여지도서』에서 처음 발견된다.
『여지도서』는 공식적인 간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누락된 고을이 많고 도별과 지역별로 수록 기준과 내용에 큰 차이가 있는 ‘미완의 전국 지리지’로 남게 되었지만(변주승, 2006) 이후의 지리지 형식이나 내용 구성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무엇보다 『여지도서』는 각 읍의 첫머리에 읍별 채색지도가 제시되고 있는 점이 읍지 편찬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즉, 여지도(輿地圖)와 서(書)의 결합을 의미하는 『여지도서』라는 서명을 붙일 정도로 지도가 중시된 것이고, 각 읍지에 거리와 방위 등이 표기된 대축척 군현지도가 첨부되어, 읍지 내용의 정확성이 증가되었고, 지도의 이용으로 당시 사람들의 공간적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양보경, 1997; 양윤정, 2013).
2)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19세기에 성책된 것으로 추정되면서 연기현 읍지가 수록된 지리지는 전국 지리지, 도별 지리지, 군현 지리지 형식의 8종이 현전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기현 읍지들도 읍지 첫머리에 연기현 지도를 수록하고 있으며, 수록 항목에 ‘책판’을 부가한 『여지도서』(증보) 형식을 따르고 있다.8) 이들 지리지의 대부분이 간행 시기와 편저자가 미상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소장기관의 해제나 서지정보 및 수록 항목과 내용을 바탕으로 간행 정보를 정리하고, 수록 항목을 비교하면 표 2와 같다.
표 2.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와 수록 항목
(1) 군현 지리지 『연기읍지』와 『연성지』에 수록된 항목과 특징
현전하는 연기현 읍지에서는 연기현의 사림 등 개인이 간행한 사찬읍지는 보이지 않고, 전국 지리지 편찬을 위해 연기 현감 등의 주도로 간행된 관찬읍지로 추정되는 『연기읍지』와 『연성지(燕城誌)』 2종이 현전한다. 두 읍지 모두 1책으로 구성되었고 간행 시기와 편저자가 미상이다.
규장각 소장의 『연기읍지』(奎17381)는 1책 22면(표지 포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도는 없고 표제는 『연기현읍지 전』이다(그림 1, 그림 2). 「인물」의 마지막 부분인 15면에 열녀 장씨 정려각에 대한 내용이 영조 임진년으로 표기되어 있어(張氏士人全五福之弟五倫之妻也其夫病將死張氏不忍見飮藥先死英宗朝壬辰命旌閭), 1776년(정조 1)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9)
책의 첫머리는 강계・도로・건치연혁(3면)으로 시작하고, 군명・형승・성지・관직・성씨・풍속(4면), 능침・단묘・공해(5면)・방리(5-10면), 산천・제언(10면), 창고・물산・교량・역원・목장・관방・봉수(11면), 누정・사찰・고적・진보(12면)・ 인물(12-15면), 전부・진공(16면), 조적(17-18면), 전세(18면), 대동・균세(19면), 봉름・군액(20면)‚ 책판(21면)의 순으로 36개 항목이 수록되었다. 전부, 조적, 전세, 균세 등의 항목이 상세하고, 호구에 대한 내용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하나는 최근 세종시립민속박물관에서 유물로 구입한 『연성지』이다. 이는 연기현에서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 읍지로 희소 자료이지만, 간행시기와 편저자가 미상이다.10) 1책(29*43/51.5cm)으로 21장 42면이고, 4주 단변(四周 單邊), 계선(界線)이 있는 11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에 ‘서원’이라는 소장처가 명기된 것으로 보아, 과거 봉암서원(鳳巖書院)에서 부본(副本)으로 소장했던 읍지로 추정된다(그림 3). 봉암서원은 『여지도서』와 『연기읍지』에서는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연성지』 등에서는 향교와 함께 주요 항목으로 수록된 연기현 유일의 서원이다.11)
『연성지』 첫머리는 채색지도 「연기현지도」가 제시된다(그림 5).12) 38개 항목이 수록되었으며, 「방리」와 「인물」 항목이 서술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상세하다. 「방리」의 마지막 읍내면 끝에 호구식년(以壬午帳籍爲率)을 표기하고 있다(그림 4). 『연성지』에는 편찬자와 편찬시기를 알 수 있는 내용은 없지만, 1934년에 간행된 『연기지(燕岐誌)』 서문에는 1824년 『연성지』와 1854년 『전성지(全城誌)』를 기본 자료로 『연기지』를 발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연기향교, 1934, 3-4). 기록과 함께 옛 연성지와 전성지 서문을 수록하고 있으며, 연성지 서문에는 여지도(輿地圖)를 수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림 6, 그림 7). 최근 발견된 『연성지』에는 서문이 없는 것이 의문이지만, 이를 근거로 『연성지』 간행 시기는 1824년(순조 24)으로 표기한다.
(2) 충청도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항목과 특징
충청도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충청도읍지』, 『읍지』, 『호서읍지』에 수록된 『충청도연기읍지』, 『고궁연기읍지』, 『호서연기읍지』 3종이 현전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충청도연기읍지』는 조선 순조대 혹은 그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13) 최근 연구(이재두, 2020, 393-395)에 의하면 1832년(순조 32)경 『각도읍지』, 즉 『읍지』가 완성되었기에 본 연구에서는 『충청도연기읍지』는 『고궁연기읍지』와 함께 간행 시기를 1832년으로 표기한다.
『충청도연기읍지』는 표지 제외 60면(30장) 분량으로, 첫머리에 채색지도 「연기현지도」가 제시된다. 『충청도연기읍지』도 『고궁연기읍지』와 마찬가지로 1면 10행, 1행 18자로 서술하고 있으며, 검토 결과 구성 항목과 내용의 대부분이 동일하다(그림 8, 그림 9).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전국 지리지 『읍지』(고궁 2798) 74책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다음으로 오래된 전국 읍지이다. 『읍지』는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 전국 읍지 규모로는 유일 필사본으로 비슷한 규모의 복본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이재두, 2020, 224). 『읍지』는 조선 8도 각 고을 읍지로 구성되었지만, 표제에서 보듯이 도별 읍지로 성책한 것이며 본래 표제가 『각도읍지』인 도별 지리지다.14)
이 읍지에 필사본 「연기현읍지」가 채색이 선명한 지도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표제는 『읍지』이고, 연기현은 충청도 제천, 전의, 연기, 영춘, 황간, 아산 순으로 6개현이 수록된 22책에 수록되어 있다. 이하에서는 『고궁연기읍지』로 표기한다(그림 10). 『고궁연기읍지』도 『연성지』와 『충청도연기읍지』 처럼 ‘임오장적’을 표기하고 있다(그림 11). 즉 읍지 편찬은 1822년(순조 22년, 임오장적)의 호구 정보를 따랐다는 것을 표기하고 있다. 『고궁연기읍지』는 호서읍지(奎12176-v.1-17)와 마찬가지로 1면 10행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전체 60면(30장) 중에서 「방리」가 10면, 「인물」이 38면으로 상세히 서술되는 등 구성 항목과 그 순서까지 동일한 바, 「인물」 항목까지 동일본으로 보인다.
표제가 『호서읍지』로 불리는 도별 지리지는 2종이지만, 연기현 읍지가 수록된 것은 1종뿐(奎12176)이다. 17책으로 구성된 『호서읍지』(奎12176)는 당시 충청도 군현을 망라한 호서지역의 읍지이지만, 7책으로 구성된 『(호서)읍지』(奎10767)는 충청도 서부, 즉 충남지역 군현만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읍지 성격이 다르다.
먼저 『호서읍지』(奎12176-v.1-17)는 1871년(고종 8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계획으로 충청도 각 군현에서 상송한 읍지를 17책으로 성책한 편자 미상의 필사본이다. 마지막 17책(奎12176-v.17-17)에 ‘연기・전의・평택’ 읍지가 채색지도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15) 17책의 첫머리에 「연기현지도」가 수록되어 있고, 내제는 ‘연기’로 표기되었지만, 지도 제목이나 ‘연기 진관 공주’ 등의 표기로 보아 행정구역은 공주목 연기현으로 추정된다. 이하에서는 『호서연기읍지』로 서술한다(그림 12).
『호서연기읍지』는 「강계」, 「건치연혁」 항목으로 시작하여 읍례(邑例)에 이르는 39개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그림 13). 표지를 제외한 전체 64면(32장) 중에서 「방리」가 약 9면(4.5장)이고 「인물」 항목이 38면(19장) 분량이다. 마지막 항목으로 추가 서술된 것으로 보이는 「읍례」는 6면(3장) 분량이다. 「방리」에서는 동리별로 관문으로부터의 거리, 호적상 가구 수와 남녀별 인구수가 상세히 제시되는 것이 특징이다. 「방리」의 마지막 읍내면의 끝에선 연기현 전체 인구와 남녀별 인구수를 제시하고 있지만, 호구 식년 기록은 표기되지 않았다. 『충청도연기읍지』와 방리와 인물 등 대부분 항목의 내용이 동일하지만, 창고・전부・진공・조적・전세・대동・균세의 내용 일부는 다르다.16)
‘연기’ 다음에 수록된 ‘전의’ 첫머리는 『전성지』로 제시되고 ‘계축년 5월 20일에 새로 고침(癸丑五月二十日新修)’을 기록하고 있다(그림 14). 이에 의하면, 읍지는 최소한 계축년(1853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표제가 『전성지』인 읍지가 이전에도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연성지』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에 수록된 평택도 『팽성지(彭城誌)』로 제시되고, 평택 읍지 마지막은 ‘진사 신식이 편찬함(進士申埴撰)’으로 편찬자가 기록되어 있다. 전의와 평택의 지도는 수록되지 않았다(그림 15).
규장각에는 같은 이름의 『(호서)읍지』(奎10767-v.1-7)가 있다(그림 16). 표제는 『읍지』다. 규장각 서지사항에 의거하면, 1895년(고종 32년) 편저자 미상의 7책 필사본으로 간행되었고, 채색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해제에서는 1899년(광무 3년) 전국적으로 실시된 읍지 편찬계획에 따라 호서지역 각 읍에서 작성된 읍지를 7책으로 성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각 읍지는 이전의 읍지들을 저본으로 변동된 사항만 새로 기재하였고‚ 다만 지방재정의 파악을 위해 사례(事例)를 새로이 작성하여 싣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규장각 서지사항과 해제에서 간행 시기가 다르다. 본 연구에서는 1895년 편찬으로 표기한다. 오늘날 충남지역에 해당하는 31개 군현을 수록하고 있지만 연기현은 수록되지 않았다.17)
3책에 수록된 전의는 『호서읍지』(奎12176)와 동일본으로 보이는 ‘전성지’를 수록하고 있지만(그림 17), 마지막 항목으로 구성된 「읍사례」는 앞면과 다른 필체로 40면 정도의 많은 분량으로 상세하게 추가된 점이 다르다. 이와 달리 5책의 평택은 ‘평택읍지’로 수록되어 있다. 호서읍지 편제 맥락상 『연성지』는 『호서읍지』(奎 12176)의 저본이고, 『(호서)읍지』(奎10767)의 누락본일 가능성이 있다.
(3) 충청남도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1895년 이후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변경된 행정구역을 표방하는 『(충청남도)읍지』는 3종이 현전하지만, 1종(奎 10768)만 연기군으로 표기하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 2종은 연기현 읍지를 수록하고 있다.
표제가 『읍지』인 『(충청남도)읍지』(奎10768)는 규장각 해제에 의하면, 1899년(광무 3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 사업에 따라 간행되었다. 편저자 미상의 필사본 6책으로, 채색지도가 포함되어 있다(그림 18). 이전의 필사본에 비해 필체 등이 매우 깔끔하고 단정하다. 연기는 1책(奎10768-6-1)의 첫 번째 군으로, 표지 .포함 22면(11장)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첫머리에 채색이 매우 선명한 「연기군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와 함께 첫머리 행정구역이 ‘연기군’으로 명시되었다. 이하에서는 『충남연기군지』로 표기한다.
『충남연기군지』의 첫 항목 강계는 이전의 ‘연기진관공주’에서 ‘연기군’으로 변화하였으며, 나머지 항목에서도 내용 변화가 나타났다.18) 즉, 수록 항목에서 연기군, 구군명(舊郡名), 관직군수 등의 항목 명칭을 변경하고, 봉암서원,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액, 책판 등의 항목을 생략했으며, 향교, 공해, 물산, 성씨, 산천, 제언, 역원, 사찰, 고적, 전부에서 변화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 『충남연기군지』는 1896년 충청남도로 편제된 당시의 연기군의 지리적 변화를 반영한 읍지로 평가할 수 있다.
「방리」와 「인물」 항목의 수록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방리」의 호구 식년은 ‘기해장적(以己亥帳籍爲率)’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동리별로 ‘관문으로부터 거리, 편호, 남녀 인구수’를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기해장적은 기해박해가 있었던 1839년(헌종 5)에 간행된 장적으로 추정된다(그림 19).
두 번째 『충청남도읍지』(奎10769)는 편저자와 간행 시기가 미상인 등사본 충청남도 지리지다. 9책으로 구성되었고, 각 읍지 첫머리에는 흑백 읍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 정보 및 해제에 의거하면, 고종대(1863년-1907년)에 편찬되었던 충청남도 37개 군현의 필사본 읍지를 등사본으로 다시 간행한 것이다. 규장각 해제에서 연기는 3책(목천, 전의, 연기)에 수록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연기현읍지』(奎10769-9-9)는 9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그림 20).19)
9책의 마지막에 실린 연기현 읍지의 첫머리는 흑백의 매우 단순한 「연기현지도」(231-232면)가 제시되고, 첫 항목이 「창고」(235면)인 것으로 보아 앞 장(233-234면)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그림 21). 즉, 항목은 빈 면(233-234), 창고・누정・물산・형승・성지(235), 능침・풍속・성씨・산천・제언(236), 교량・역원(237), 목장・관방・봉수・사찰・고적・진보(238), 방리(238-247), 도로・전부・진공(248), 조적・전세・대동・균세(249), 봉름・군액(250), 책판(251), 인물(251-288)의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방리」의 마지막은 읍내면의 암천리(岩川里)로 시작해서 신촌리(新村里)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합 2501호, 남자 5246명, 여자 4925명’의 가구와 인구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호구 장적 정보는 없다. 마지막 장(290면 중 288면, 인물)까지 『충청남도읍지』(奎15235-9-3)와 동일하다.
세 번째 『충청남도읍지』(奎15235)도 간행시기와 편저자가 미상인 9책 등사본으로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그림 22, 그림 23). 이 책에 대한 규장각의 서지사항과 해제 내용의 일부도 오류가 있지만, 이에 의하면 고종대(1863-1907)에 편찬되었던 9책 필사본 읍지를 등사본으로 다시 간행한 충청남도 37개 군현의 읍지다.
『충청남도읍지』의 3책(奎15235-9-3)의 마지막에 수록된 『충남연기현지②』(표지 제외 231면-288면)의 항목을 비교하면, 첫머리에 수록된 흑백 「연기현지도」부터 「인물」 마지막 장까지 위의 『충남 연기현지①』(奎10769-9-9)과 동일하다.20) 다만, 누락되었던 「강계」, 「건치」 등의 항목이 순서대로 수록된 것이 다른 점이다.
이들 2종 읍지의 표제는 충청남도를 표방하고 있지만, 읍지에 수록된 내용과 형식은 표제 그대로 과거 충청도 연기현 읍지이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의 요건을 어느 정도 갖춘 충청남도 연기군지는 1종만 현전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또한 과거의 어느 읍지를 저본으로 항목의 구성과 항목별 내용 일부만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은 모두 『여지도서』(증보) 유형의 읍지들이다. 즉,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읍지』는 1759년(영조 35) 말 홍문관에서, 각 고을에 하달한 전국 읍지의 표준양식을 따르고 있다. 첫머리에 연기현 채색지도를 수록하고 있으며, 수록 항목은 궁실・학교・총묘・명환・제영과 같은 『(동국)여지승람』 수록 항목을 제외하고, 방리와 도로 등 지방행정과 재정 상황을 반영하는 신설 항목을 중심으로 실용성을 강화한 항목으로 구성하였다. 이후의 연기현 읍지들도 대동소이하다.21)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에 중앙정부나 지방 감영에서는 여러 차례 읍지상송령을 내렸다. 숙종・영조・정조 시기에는 하달된 수록 규정에 따라 지방관과 사족・향리들이 합심하여 양식에 맞춰 읍지를 편찬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수록 규정이 분명하지 않았거나, 구지(舊誌)를 베껴 올리라는 지시가 많아 고을에 보관하고 있던 구지를 그대로 베껴 상송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동일한 시기에 수집한 읍지라 하더라도 수집 당시의 정보를 반영하기보다는 이전 시기의 정보를 반영한 읍지들이 많다(이재두, 2021, 219).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실증되고 있다. 중앙 정부나 지방 감영에서 성책하고 간행한 전국 지리지나 도별 지리지에 수록된 각 읍지의 실제 편찬 시기는 제각각이고 그 시차가 상당히 큰 경우도 많다. 이들 지리지의 저본은 군현 단위 읍지이기에 『연성지』와 『연기읍지』가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이들 2개 읍지는 중앙에 상송한 정본(正本)을 연기현에서 필사해 놓은 부본(副本)으로 추정되지만, 후대에 부본을 필사한 후사본(後寫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의 대부분은 『연성지』 수록 항목을 따르고 있어, 이를 저본으로 한 읍지로 추정된다. 『연기읍지』는 수록 항목에서 『여지도서(연기현읍지)』와 『연성지』의 과도기적 형식을 보인다. 즉, 『연기읍지』는 『여지도서(연기현읍지)』의 28개 항목보다 더 많은 홍문관의 범례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 『여지도서(연기현읍지)』에서는 연기현에 해당하는 항목들만 신설, 수록하였지만, 『연기읍지』에서는 형승, 성지 등 연기현과 관련 없는 항목까지 수록하고 있다. 전국 읍지 편찬에 따른 범례를 따르기 위해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연기읍지』의 수록 항목은 『연성지』 등 19세기에 간행된 읍지들과 대동소이하지만, 수록 항목의 순서가 다르고, 일부 항목의 내용은 다르다. 『연성지』에서는 ‘향교와 봉암서원’이 항목으로 수록되었고, 나머지 충청도 읍지들도 『연성지』와 동일하지만, 『연기읍지』에서는 수록되지 않은 점도 특이점이다.
표제가 충청남도를 표방하는 3개 도별 읍지는 1896년 이후에 성책되고 간행된 읍지로 보인다. 『충남연기군지』는 비교적 간단한 27개 항목을 수록하고 있지만, 일부 항목의 명칭이나 내용은 당시의 연기군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2개 등사본 읍지는 표제와 달리 연기현을 표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읍지는 『연성지』와 수록 항목과 순서가 동일하고, 방리 구성이나 호구 정보가 동일하다.22) 일단, 이들 읍지도 『연성지』 부본이나 후사본을 필사, 등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에 수록된 항목과 그 순서 및 장적 정보를 바탕으로 19세기 연기현 읍지들의 간행 시기를 비정하면, 『연성지』는 1824년 갑신년 연기현에서 편찬된 것을 1832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 시기에 조정에 상송했으며, 이를 저본으로 편찬된 것이 『충청도연기읍지』, 『고궁연기읍지』, 『호서연기읍지』, 『충남연기현지 ①, ②』로 추정된다. 즉, 19세기 초반에 간행된 『연성지』에서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충남연기현지』는 모두 임오장적(1822년) 시기 공간 정보를 담고 있으며, 『충남연기군지』는 기해장적(1839년) 시기의 공간 정보를 담고 있는 읍지이다. 『연성지』가 19세기 연기현 읍지들의 간행 시기를 가늠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지만, 『연기읍지』는 간행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3. 19세기 충청도 연기현 읍지의 「방리」와 지명 비교
1) 연기현 읍지 「방리」에 수록된 면의 편제와 동리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은 간행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연기읍지』를 포함하여 모두 19세기에 간행된 관찬읍지들이다. 이들 연기 읍지에 수록된 항목별 내용을 비교하면 좀 더 구체적인 시기를 비정할 수 있지만, 본 연구에서는 지역 환경 및 공간 정보를 가장 명시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방리」 항목에 수록된 면별 동리 구성과 그 지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연기현의 지역 환경을 기록한 읍지는 15세기 중엽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충청도 청주목 관할의 연기현 읍지에서 시작되지만, 주민들의 삶터이자 연기현의 지역 환경에 대한 구체적인 공간 정보는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방리」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났고, 이후 읍지에서 계속되었다. 이에 조선시대 연기현의 방리를 기록하고 있는 지리지와 지도 등 11종의 주요 내용을 비교해 보면 표 3과 같다.
표 3.
연기현 읍지 「방리」에 수록된 면의 편제와 호구 정보
『여지도서』에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하 『명칭일람』)에 이르는 문헌 자료 중에서, 『호구총수』와 『1872년지방지도』는 전형적인 읍지는 아니지만 당시 연기현의 방면(坊面)과 방리에 대한 중요 정보를 담고 있다. 나아가 『명칭일람』(1912년)은 20세기 자료이지만, 1914년 일제가 대대적인 부군면동리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기 직전의 ‘서면(西面) 시기’ 상세정보를 담고 있으며, 19세기와 직결되는 자료이다. 이는 19세기 말 연기현의 ‘서면 시기’ 지명의 지속성과 한자 표기 변화 및 동리 폐지나 폐합을 추론하는 참고자료로 함께 살펴보았다.23)
『명칭일람』에서 읍내면은 군내면으로 개칭되었고, 면별 동리 지명 제시 순서도 이전의 읍지들과 다르지만, 비교의 편의를 위해 『연성지』의 순서를 따라 표기하였다. 또한 동일면에서 가장 먼저 제시된 용연리와 같이 이전의 지명인 용산리와 분명한 관련성은 확인되지 않지만, 제시되는 순서를 근거로 해당 위치에 표기하였고, 내대리와 같이 지명의 전부(前部) 요소 중 하나가 일치하는 경우도 해당 위치에 표기하였다. 이전 읍지에서 제시되지 않았거나 관련성을 찾기 어려운 지명은 마지막에 표기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면리제가 시행되었지만, 연기현의 면리(방리)에 대한 지리지 기록은 『여지도서』 「연기현 읍지」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현전하는 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연기’는 1760년 연기현부터 1912년 연기군까지 7면으로 지역 행정구역이 실행되었다. 7면의 지명은 동서남북 방위에 따른 위치를 근거로 한 이른바 ‘방위면’으로 계속되었고,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읍지에서 면의 제시 순서도 동서남북 순으로 이루어졌다.
『여지도서』에서는 읍내면의 위치를 ‘정동・정서・정남・정북 네 방위의 사이에 위치’ 혹은 상대적으로 중앙에 위치함을 나타내는 ‘간방(間方) 읍내면’으로 표기하였지만, 『호구총수』(1789년) 시기부터 읍내면은 공해(公廨)가 위치한 읍치의 중심지로 위상을 갖춘 ‘읍내면’으로 명명되었다.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된 시기부터는 「방리」에서 읍내면이 가장 먼저 제시되고 있기에 명실상부한 연기현 행정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인다.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기현의 방리는 18세기 중반부터 7면 체제로 행정구역이 편제되었다. 18세기와 달리 19세기 연기현 7면의 지명이나 관할 동리의 수는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지만, 규장각에 「연기현지도」(奎10402)로 소장되어 있는 이른바 『1872년지방지도』에서는 관할 동리가 가장 많았던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칭되는 변화를 표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연기현의 방리와 지명은 물론 공간 정보 고찰에 매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24) 이하에서는 『1872년연기현지도』로 서술한다(그림 24).
규장각 상세정보에 의하면, 『1872년연기현지도』는 1871년 고을별 지도 편찬 상송령(列邑地圖謄上令)에 따라 1872년(고종 9년) 충청도 각 군현에서 만들어 올린 도별도에 포함된 채색지도이다. 연기현의 방리 및 공간 정보를 해당 위치에 명시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1871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연기읍지』 「방리」에서는 북삼면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연기현의 방리(면의 편제) 변화는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명시적으로 표기되고 있지만, 1868년(고종 5) 연기 향교에서 간행한 『향교둔전양안(鄕校屯田量案)』에서는 읍내면, 남면, 동이면, 북일면, 북이면, 서면 등 6개 면에서 총 56개 필지의 교둔 보유를 기록하고 있다(문광균, 2018, 21에서 재인용). 이에 의하면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된 것은 1868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1868년 이전에 연기현의 면리 행정구역이 개편되었고, 『1872년연기현지도』는 이러한 변화를 명시적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5)
2) 19세기 연기현의 면별 동리 지명 변화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 8종의 「방리」에 수록된 면별 동리 지명을 북삼면과 서면 시기로 구분하여 통시적으로 비교해 보았다. 이를 통해 19세기 연기지역의 동리 지명 변화 현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연기현 읍지들의 간행 시기를 상대적으로 비정(比定)해 보고자 한다. 면별로 「방리」 지명 변화를 정리하면 표 4, 5, 6, 7, 8과 같다.
북삼면 시기 지명 표기 변화는, 『연성지』를 기준으로, 『호서연기읍지』, 『고궁연기읍지』, 『충남연기현지』, 『연기읍지』 순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이는 1차 분석 결과 지명 표기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따른 것이며, 『충청도연기읍지』는 『연성지』와 동일하였기에 생략하였다.26) 『연기읍지』는 나머지 읍지들과 다른 지명들이 표기되고 있어 마지막 순서로 비교하였다. 서면 시기는 『1872년연기현지도』, 『충남연기군지』 순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먼저, 연기현 동쪽의 큰 하천(당시는 東津) 건너 동쪽에 위치하는 동일면은 북삼면 시기와 서면 시기 모두 동리 지명은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표 4). 동일면은 연성지에 표기된 14개 지명 중 서면 시기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정촌’을 제외하고 13개 지명이 연성지와 6개 읍지 모두에서 표기되고 있다.
용산리, 전암리, 명학리 등에서 지명의 전부 요소의 일부 한자가 변화하지만, 이들은 같은 한자 부수(部首)의 이체자(異體字)이거나 표기가 좀 더 간단한 속자(俗字)로 훈과 음이 동일한 한자들이다. 외태산리가 외태리로 변화한 것 또한 후부(後部) 요소의 간략화 현상이다. 이러한 표기 변화는 해당 지명의 고유성이나 개별성이 변화한 경우가 아니기에 본 연구에서는 지명이 개칭되거나 변화하지 않은 경우로 보았다.
둘째, 동일면과 마찬가지로 연기현 동쪽의 동이면도 북삼면 시기에는 14개 동리 지명에 변화가 없다(표 4). 다만 노곡리가 연기읍지에선 표기되지 않았지만, 서면 시기 2개 읍지에서 표기되었기에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될 때, 3개 동리(문산직촌리, 판산직리, 노산소리)가 폐지되고, 1개 동리(용곡리)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노산소리는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용곡리는 『충남연기군지』에서 각각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충남연기군지』에서 상판리(上板里)는 두 번 표기되었다. 상송리 위치에 표기된 상판리는 ‘상송리’의 필사 오류이다.
표 4.
동일면과 동이면 방리 지명 비교
동이면의 내・외판교리가 『연기읍지』에서 내・외판리로 표기되고, 이후 2개 읍지에서 동일하게 표기되는 것으로 보아 『연기읍지』가 북삼면과 서면의 과도기에 편찬된 읍지로 추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 ‘노노산리(老〻山里)’ 표기에서는 반복을 뜻하는 부호가 사용되었는데, 북삼면 시기 5개 읍지에서 모두 같은 형식으로 표기했다는 것이 특이점이다.27)
셋째, 남면의 북삼면 시기 25개 동리 지명은 5개 읍지에서 변화가 없다(표 5). 백정촌이 『연성지』와 『연기읍지』에서만 표기되는 점은 의문이지만, 필사자의 필사 오류로 보인다. 백정촌은 북삼면 시기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28) 『연성지』 등 다른 4개 읍지와 달리 『충남연기현지』에서만 나타나는 만수동리(萬水洞里), 소학동리(巢嶌洞里), 갈운리(葛云里) 표기는 한자 필사의 음차(音借)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필사 오류로 보인다. 갈은리(葛隱里)와 제곡동리(霽谷洞里) 표기는 특히 여러 읍지에서 각기 다르게 표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지명 개칭이 아니라 필사 오류로 보인다.
표 5.
남면의 방리 지명 비교
서면으로 개편되면서, 월성리가 월성리와 월현리로 분동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의 근거는 월현리가 월성리 다음에 제시된다는 점이다. 운주동리(雲住洞里)와 정자동리(亭子洞里)는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갈은리는 『충남연기군지』에서, 양화리는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각각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1872년연기현지도』에서만 내삼리 다음에 유일하게 표기된 내동리(內洞里)는 『명칭일람』에 없는 것으로 보아 표기 오류로 추정된다.
따라서 19세기 남면의 동리는 연성지에 표기된 22개 동리 지명은 큰 변화없이 존속되었고, 3개 동리(백정촌, 운주동리, 정자동리)는 서면으로 개편되면서 폐지 혹은 폐합되었으며, 1개 동리(월현리)가 월성리에서 분동(分洞) 혹은 신설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넷째, 가장 많은 34개 동리로 구성된 북삼면의 지명도 『연성지』와 4개 읍지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표 6). 다만, 『연기읍지』에서 청라동리(靑羅洞里)가 청라전리(靑羅田里)로, 치복동리(致福洞里)가 치박동리(致朴洞里)로 표기된 것은 필사 오류로 보인다. 원봉리(圓峯里)가 3개 읍지에서 ‘元峯里’나 ‘元峰里’로 표기되었지만, 한글 발음이 같은 한자로 표기되었기에 지명 개칭보다는 표기 오류로 추정된다.
표 6.
북삼면・서면의 방리 지명 비교
서면 시기 『명칭일람』에서 보이지 않는 6개 동리(사방동리, 상마룡리, 학암리, 원봉리, 치복동리, 성당사)는 서면으로 개편되면서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동산리는 서면 시기 2개 읍지에서 표기되지 않았지만, 『명칭일람』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폐지 혹은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일 수 있다. 서면 시기 2개 읍지 중에서 어느 한 곳에만 표기된 6개 동리(청라동리, 헌대리, 화동리, 우덕동리, 용계리, 명봉리, 치암리, 봉림동리)는 『명칭일람』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부동리는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폐지되었거나 연접한 읍내면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표 7 참조). 서면 혹은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4개 동리(행정리, 행화리, 와촌리, 망북리)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표 7.
북일면・북이면 방리 지명 비교
이처럼 북삼면의 34개 동리 지명은 『연성지』와 4개 읍지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이 존속되었지만, 서면으로 개편되고,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동리가 폐지, 폐합, 신설되는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서면으로 개편될 때 6개 동리가 폐지 혹은 폐합되었고, 연기군으로 개편될 때 1개 동리가 폐지되었으며, 4개 동리가 신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삼면 동리 지명 표기에서도 『연기읍지』만 지명 표기가 다른 과도기적 특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원봉리(圓峯里) 한자 표기는 유일하게 『연성지』와 동일한 점은 시기를 비정하는데 혼란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표기 특성은 『연기읍지』가 『연성지』 방리를 저본으로 필사하면서 당시의 일부 동리의 변화 상황을 반영하였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다섯째, 북삼면 시기 북일면 19개 방리의 지명은 5개 읍지가 동일하다(표 7). 지명 표기에서 같은 뜻의 이체자나 속자로 표기하는 정도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서면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크다. 우선 5개 동리(송산리, 죽림리, 진포리, 만포리, 화산리)가 서면으로 개편될 때, 1개 동리(토흥리)는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3개 동리(서곡리, 저촌리, 신대리)가 신설된 지명으로 보인다. 『충남연기군지』에는 표기되었지만, 『1872년연기현지도』에는 없는 3개 동리(월곡리, 황조동리, 월암리)는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흑암리(黑巖里)가 흑암평리(黑巖坪里)로 표기되고, 명칭일람에서는 평리(平里)로 표기되는 현상은 필사 오류 지명이 본래 지명과 다른 새로운 지명으로 개칭되고 고착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여섯째, 북이면의 12개 동리 지명도 『연성지』와 4개 읍지가 동일하다(표 7). 다만, 마지막의 하박동리(下朴洞里)는 『연기읍지』에서만 유일하게 제시된다. 오직 『연기읍지』에서만 제시되는 지명 하박동리와 북삼면의 치박동리는 이전의 『여지도서』나 『호구총수』에도 없는 지명이지만, 『충남연기군지』 북이면에서 하복동리(下卜洞里)와 상복동리(上卜洞里)로 표기되었다. 이러한 특이점은 『연기읍지』가 『연성지』보다는 늦은 시기에 간행된 읍지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반면 나머지 3개 읍지와 달리 월명동리는 『연성지』와 동일하게 표기한 점은 여전히 의문이고, 『연기읍지』 간행 시기를 비정하는데 혼란을 준다. 복동리(福洞里)가 하박동리와 하복동리 표기되었다가 명칭일람에서 하복리(下福里)로 표기된 것은 필사 오류로 표기된 지명들이 본래 지명으로 복구된 사례로 보인다.
양지동리는 서면으로 개편될 때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이고, 고산동리는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동고리와 서고리로 분동되었고, 과성리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서면 시기에 4개 동리(월명리 혹은 월계리, 동고리, 하박동리, 명봉리)는 각각 『1872년연기현지도』와 『충남연기군지』에서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읍내면의 9개 동리 지명 표기도 북삼면 시기 5개 읍지가 동일하다(표 8). 다만, 『연기읍지』에서 교촌리와 남부는 누락된 것으로 보이고, 중부는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서면으로 개편될 때 동이부는 동부로, 동삼부는 폐지되었거나 중부로 개칭되었고, 창동리는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읍내면의 ‘중부’표기를 고려하면, 『연기읍지』는 서면 시기에 간행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면으로 개편될 때 3개 동리(치암리, 월곡리, 보통리)가 신설되었고,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부동리는 신설 혹은 연접한 북삼면에서 편입되었으며, 남부는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신촌리는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치암리, 월곡리, 보통리는 『충남연기군지』에서 각각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동리 규모가 가장 작았던 읍내면은 서면 시기에 12개 동리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삼면 시기 연기현 「방리」 지명은 『연성지』를 비롯한 5개 읍지 모두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 일부에서 지명의 전부 요소가 훈과 음이 같은 이체자나 속자로 변화하거나 후부 요소가 간략화되는 정도이다. 5개 읍지 중에서 『연기읍지』만 지명 표기가 서면 시기 지명과 연계되는 과도기적 특성을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연기읍지』가 『연성지』 방리를 저본으로 필사하면서 당시의 일부 동리의 변화 상황을 반영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북삼면이 서면으로 편제되는 과도기에 간행된 읍지로 추정한다.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된 시기에는 각 면에서 동리의 폐지 혹은 폐합, 신설 혹은 편입으로 추정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서면 혹은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이루어진 일종의 연기현 지역 행정구역 개편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필사 과정 오류로 보이는 지명 누락이나 표기 오기(誤記) 현상도 나타났다.
4. 정리 및 결론
조선시대 연기현은 중앙 정부에서 지방관 현감을 파견했던 소규모 행정구역이었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체계의 기본 단위는 군현이었지만,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지리지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의 「방리」에서 ‘면’은 경계를 지닌 최하위 단위로 표기되었고, 관할 동리 지명도 명시되었다. 하지만, 연기현 읍지나 읍지의 「방리」 지명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와 읍지에 수록된 방리 지명을 통시적으로 비교, 분석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현전하는 연기현 읍지는 전국 지리지에 수록된 4종, 도별 혹은 지역 지리지에 수록된 5종, 군현지 2종 등 관찬읍지 11종이 수집되었다. 이들 읍지에서 연기현의 면과 동리를 기록한 방리 항목을 수록한 읍지는 9종이었고, 『여지도서』를 제외한 8종은 19세기에 간행되었으며, 편찬자와 간행시기 등이 미상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의 수록 항목과 방리를 비교, 고찰한 결과, 5종은 최근에 발견된 『연성지』를 저본으로 한 읍지들이고, 『(충청남도)읍지』에 수록된 『(충남)연기군지』는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개편된 이후의 면과 동리 지명을 수록하고 있으며, 『연기읍지』는 과도기적 특성을 갖는 읍지로 추정되었다.
셋째, 조선시대 연기현의 면리 행정구역은 18세기부터 7면(동일면, 동이면, 남면, 북삼면, 북일면, 북이면, 읍내면)의 방위면으로 계속되었지만,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되었음이 명시적으로 표기되고 있다. 1868년 이전에 서면으로 개편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도 발견되고 있다. 북삼면 시기 각 면의 동리 지명은 거의 변화가 없지만, 서면과 충청남도로 개편될 당시 각 면에서 동리의 폐지 혹은 폐합, 신설 혹은 편입으로 추정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넷째, 간행 시기를 조사, 분석한 결과 19세기 연기현 읍지들의 저본이 되었던 『연성지』는 1824년에 간행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충청도읍지』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읍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1832년에 간행된 것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들 3종 읍지와 함께 1871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호서읍지』와 1896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읍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방리는 모두 1822년 임오장적(128 동리, 2,501 가구, 총 인구 10,172명)을 근거로 기술한 『연성지』 방리와 동일본으로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연기현의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된 이후의 방리에 대한 기록은 『1872년연기현지도』와 『(충청남도)읍지』에 수록된 『충남연기군지』 2종뿐이다. 『1872년연기현지도』는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연기현 방리 및 지역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임이 확인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행정구역이 변경되면, 새로운 지명이 명명되거나 옛 지명이 폐지되기도 하지만 동리 지명은 주민들의 일상 세계를 공간적, 인식적으로 구성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기에 변경이나 폐지가 어렵다. 행정구역의 마지막 단위인 동리 지명의 보수성과 공간적 지속성을 연기현 방리 고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19세기 연기현 읍지들은 구 읍지를 그대로 베낀 경우들이 많아 읍지 제작 당시 고을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실증되었다. 현전하는 연기현 읍지를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읍지를 발굴하면 좀 더 정확하고 의미 있는 조선시대 연기현의 지역 정보를 지역 문화 유산으로 기록, 전승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