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1 October 2022. 479-499
https://doi.org/10.22776/kgs.2022.57.5.479

ABSTRACT


MAIN

  • 1. 서론

  • 2.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   1) 19세기 이전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   2)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 3. 19세기 충청도 연기현 읍지의 「방리」와 지명 비교

  •   1) 연기현 읍지 「방리」에 수록된 면의 편제와 동리

  •   2) 19세기 연기현의 면별 동리 지명 변화

  • 4. 정리 및 결론

1. 서론

조선시대 지리지의 대부분이 군현 단위로 편찬되었고, 현전하는 전국 지리지 또한 군현 단위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것이 대부분이다.1)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는 당시 지역의 정보를 가장 사실적이고 종합적으로 기록한 문헌으로, 지역의 사회경제적 환경과 공간구조 변화를 이해하는데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료이다. 양보경(1997)에 의하면, 조선시대 읍지는 16세기 후반부터 지방의 사림과 수령을 중심으로 군현 단위에서 활발하게 편찬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연기현(燕岐縣) 읍지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 등의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국 지리지, 도별 지리지 등에 수록된 9종과 연기현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2종이 현전한다. 이들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편찬 당시 ‘연기현’의 지역 정보를 지역 차원에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이지만, 대부분이 편찬자와 편찬 시기가 미상이다. 게다가 이들 지리지는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성책한 전국 지리지인지, 전국 지리지를 누군가가 필사한 후사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후대에 성책된 지리지에 실린 읍지가 앞선 시기 지리지보다 오래된 경우도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가장 많은 읍지가 편찬된 19세기 읍지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읍지 간행 당시부터 간행 정보가 명시적으로 표기되지 않았고, 후대에도 올바르게 비정(比定)되지 않은 채, 개별적 필요에 따라 특정 읍지가 선택적으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기록의 오류를 반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까지 지리지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전국 혹은 도별 지리지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종합적이고 공시적(共時的)인 기록으로 특정 시기의 지역적, 사회적 상황을 고증해 주는 중요 사료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읍지는 구 읍지를 그대로 베낀 경우가 많아 읍지 간행 당시 고을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이재두, 2022, 275). 공시성을 견지하는 전국 혹은 도별 지리지에 수록된 군현 단위 읍지의 본래 간행 시기도 제각각이다. 이는 각 군현 단위 읍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고찰이 이루어질 때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의 모태가 되는 연기군의 조선시대 기록은 연기현 읍지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연기현 읍지나 지명에 대한 역사지리적 고찰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옛 공주목 진관 영역 지명 변천에 관한 연구(김순배, 2009), 옛 연기와 전의 읍치의 전통적 모습과 주요 변화를 고찰한 연구(권선정, 2017), ‘연기’의 지명 연원에 대한 연구(안병섭, 2017) 등에서 연기현 지명이나 경관에 대한 설명이 부분적이고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적으로 의미 있는 새로운 세종시 지리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의 종류와 그 내용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부터 선행되어야 한다.2)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 건치연혁에 의거하면, ‘연기’라는 지명과 행정구역은 신라 757년(경덕왕 16) 연산군 연기현(燕山郡 燕岐縣)으로 편제되면서 시작되었고, 조선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 관찰사제에 입각한 지방제도 개편 때 충청도 연기현으로 편제되어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기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 13도제 실시로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편제되었다. 2012년 7월 1일 출범한 세종시에 흡수되었으며, 옛 지명 ‘연기’의 전통은 연기면과 연기리로 존속되고 있으며, 많은 동리 지명과 함께 지역의 문화 자산으로 현존한다.

지리지 내용을 구성하는 항목 중에서 서술 비중이 높고, 공간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항목은 「방리(坊里)」다. 세종시 공간 구성의 바탕은 조선시대 연기현을 구성했던 면과 동리들이고, 옛 연기현을 설명하는 기초 행정구역과 지명은 현재 세종시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지역 정보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현전하는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의 현황을 고찰하고, 가장 많은 읍지가 편찬되었던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 「방리」의 구성과 지명을 비교,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기현 읍지의 간행 시기를 비정(比定)해 보고자 한다.

2. 조선시대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1) 19세기 이전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전기에 편찬되어 현전하는 주요 전국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여지도서』는 조선 후기에 편찬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연기현 읍지의 간행 시기를 19세기 이전과 19세기로 대분하면서, 이들 3종 전국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을 살펴보았다(표 1).

표 1.

19세기 이전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 수록 항목

전국 지리지 연기현 읍지
읍지
(소장처, 청구기호)
(해제 등의)
간행 사항
행정구역,
수록 정보(청구기호)
(지도 명) 수록 항목 장적 정보
『세종실록지리지』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태백산 사고본)
・ 1454년(단종 2)
・ 8권(제148-155권).
충청도 청주목 연기현,
제149권 9장
건치연혁, 원수산, 웅진, 사방경계,
호구수, 토성과 속성, 간전과 토의,
봉화, 제언.
-
『신증동국여지승람』
(奎貴1932-v.1-25)
・ 1530년(중종 25)
・ 55권 25책 목판본.
충청도 공주목 연기현,
18권 8책
(奎貴1932-25-8).
건치연혁, 관원, 군명, 성씨, 풍속,
산천, 토산, 누정, 학교, 역원, 불우,
사묘, 고적, 명환, 신증(인물, 제영).
-
『여지도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000.2여79)
・ 1757년-1765년
(영조 33-41)
・ 55책 필사본.
충청도 공주목 연기현,
13책
(고000.2여79 v.13).
(연기)
강계, 방리, 도로, 건치연혁, 군명,
관직현감, 산천, 성씨, 풍속, 단묘, 공해,
제언, 창고, 물산, 역원, 누정, 사찰,
고적, 인물, 한전, 수전,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병.
(28개 항목)
기묘장적
(1759년, 영조 35)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연기현은 충청도 청주목 관할의 2군 17현 소속으로 수록되어 있다(태백산 사고본 53책 149권 6장).3) 연기현은 건치연혁, 원수산(元帥山), 대천 웅진(熊津), 사방경계, 호수(戶數)와 인구, 토성(土姓)과 속성(續姓), 간전(墾田)과 토의(土宜)와 토공(土貢), 자기소와 도기소, 봉화, 금사제(金沙堤)에 대해 항목으로 구분하지 않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연기현의 방리에 대한 내용은 제시되지 않았고, 대표적인 산천으로 제시된 원수산과 웅진, 남쪽의 정좌산(正左山), 자기소와 도기소가 있는 현의 북쪽 요혜방(要惠方), 봉화가 있는 현의 남쪽 용수산(龍帥山), 현의 서쪽에 있는 제언 금사제(金沙堤) 등에서 6개 정도의 지명이 등장하는 정도로 지역의 지명 정보가 간단하다(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9장).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된 건치 연혁은 “본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청주 임내에 붙였다가, 명종 임진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그 뒤에 목천감무(木川監務)로 연기를 겸임하게 하다가, 본조 태조 정축에 다시 두 현을 갈라서 각기 감무를 두고, 태종 갑오에 전의(全義)와 병합하여 전기(全岐)로 고쳤다가, 병신에 다시 연기 현감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연기현 읍지들은 ‘두잉지와 연산’을 연기현의 군명(郡名)으로 기록하고 있다.4)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에 의하면, ‘연기’라는 지명은 신라 757년(경덕왕 16) 연산군 연기현으로 편제되면서 공식적인 행정구역으로 처음 명명되었다.5) 고려 1018년(현종 9) 청주에 소속되었고, 1172년(명종 2)부터 감무를 두었고, 목천 감무의 겸임 관할을 거쳐 조선 1397년(태조 6) 연기현으로 독립했으나, 1414년(태종 14)에 전의와 병합하여 전기현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에 비로소 연기현으로 독립하였고, 현감이 관할하는 충청지역의 소규모 지방 행정구역으로 오랫동안 존속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연기현은 충청도 공주목 관할 2군 10개 현의 마지막 현으로 수록되어 있다. 연기현은 건치연혁, 관원, 군명, 성씨, 풍속, 산천, 토산, 누정, 학교, 역원, 불우, 사묘, 고적, 명환, 신증(인물, 제영)의 16개 항목을 5면 정도로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6) 각 항목에서 『세종실록지리지』보다는 많은 지명이 나타나고, “성산(城山)이 현의 동쪽 1리에 있으며 진산이다.”와 같이 주요 지명의 위치와 거리가 설명되지만, 관할 방리나 인구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여지도서』에서 연기현은 충청도 공주목 관할 10개 현의 마지막 현으로 수록되어 있다.7) 연기현은 강계, 방리, 도로에서 군병에 이르는 28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지도서』가 이전 지리지에 비해 항목도 상세하고, 방리와 도로 등 지역의 구체적인 공간 정보를 첫머리에 제시하며, 조세 수취와 관련되는 항목들을 독립적으로 구성하는 등 18세기 조선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기현 읍지 또한 그러한 특성을 반영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연기현의 「방리」를 중심으로 행정구역과 공간적 구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첫 번째 지리지라 할 수 있다. 『여지도서』는 1757년-1765년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것으로 보지만, 연기현은 「방리」의 마지막 읍내면 신촌리 다음에 “이상은 기묘장적을 따랐다(以己卯籍爲率).”고 호구 식년을 표기하고 있다. 이에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1759년(기묘년, 영조 35) 이후에 편찬되었기에 본 연구에서는 간행 시기를 1760년으로 표기한다.

『여지도서』 「충청도 감영」에 의거하면, 충청도는 고려시대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거쳐 1356년(공민왕 5)에 충청도라 불리게 되었고, 조선 1395년(태조 4)부터 관찰사가 임명되었다. 이에 의하면, 연기현은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연산군 연기현이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제되면서 ‘연기’라는 지명이 공적으로 명명되었다. 고려 1356년(공민왕 5)부터 충청도에 속한 군현으로 존속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연기군으로 개칭되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편제되었다. 이처럼 ‘연기’는 8세기 중반부터 충청지역의 독립 행정구역으로 존속했지만, 관할 방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여지도서』에서 처음 발견된다.

『여지도서』는 공식적인 간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누락된 고을이 많고 도별과 지역별로 수록 기준과 내용에 큰 차이가 있는 ‘미완의 전국 지리지’로 남게 되었지만(변주승, 2006) 이후의 지리지 형식이나 내용 구성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무엇보다 『여지도서』는 각 읍의 첫머리에 읍별 채색지도가 제시되고 있는 점이 읍지 편찬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즉, 여지도(輿地圖)와 서(書)의 결합을 의미하는 『여지도서』라는 서명을 붙일 정도로 지도가 중시된 것이고, 각 읍지에 거리와 방위 등이 표기된 대축척 군현지도가 첨부되어, 읍지 내용의 정확성이 증가되었고, 지도의 이용으로 당시 사람들의 공간적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양보경, 1997; 양윤정, 2013).

2)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19세기에 성책된 것으로 추정되면서 연기현 읍지가 수록된 지리지는 전국 지리지, 도별 지리지, 군현 지리지 형식의 8종이 현전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기현 읍지들도 읍지 첫머리에 연기현 지도를 수록하고 있으며, 수록 항목에 ‘책판’을 부가한 『여지도서』(증보) 형식을 따르고 있다.8) 이들 지리지의 대부분이 간행 시기와 편저자가 미상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소장기관의 해제나 서지정보 및 수록 항목과 내용을 바탕으로 간행 정보를 정리하고, 수록 항목을 비교하면 표 2와 같다.

표 2.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와 수록 항목

읍지
(소장처, 청구기호)
(해제 등의)
간행 사항
연기현 읍지
행정구역,
수록 정보(청구기호)
(지도 명) 수록 항목 장적 정보
『연기읍지』
(奎17381)
・ 1776년 이후
・ 1책 22면 필사본
충청도 연기현,
(奎17381-1)
강계, 도로, 건치연혁, 군명, 형승, 성지, 관직,
성씨, 풍속, 능침, 단묘, 공해, 방리, 산천, 제언,
창고, 물산, 교량, 역원, 목장, 관방, 봉수, 누정,
사찰, 고적, 진보, 인물, 전부,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액, 책판.(36)
-
『연성지』
(세종시립박물관)
・ 1824년
・ 1책 42면 필사본
충청도 연기현,
『연성지』
(연기현지도, 채색지도)
강계, 건치연혁, 군명, 관직현감, 단묘, 향교,
봉암서원, 공해, 창고, 누정, 물산, 형승, 성지,
능침, 풍속, 성씨, 산천, 제언, 교량, 역원, 목장,
관방, 봉수, 사찰, 고적, 진보, 방리, 도로, 전부,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액, 책판,
인물.(38)
임오장적
(1822년, 순조 22)
『충청도읍지』
(국립중앙도서관,
한古朝62-188)
・ 1832년
・ 51책 필사본
충청도 연기현,
32책(중앙도서관 51-32)

『충청도연기읍지』
『읍지』
(국립고궁박물관,
고궁2798)
・ 1832년
・ 74책 필사본
충청도 연기현,
22책(고궁2798)

『고궁연기읍지』
『호서읍지』
(奎12176-v.1-17)
・ 1871년
・ 17책 필사본
충청도 연기현,
17책(奎2176-v.17-17)

『호서연기읍지』
(연기현지도, 채색지도)
강계, 건치연혁, 군명, 관직현감, 단묘, 향교,
봉암서원, 공해, 창고, 누정, 물산, 형승, 성지,
능침, 풍속, 성씨, 산천, 제언, 교량, 역원, 목장,
관방, 봉수, 사찰, 고적, 진보, 방리, 도로, 전부,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액, 책판,
인물, 읍례(진상, 상납, 읍상, 관청수미). (39)
-
『(호서)읍지』
(奎10767-v.1-7)
・ 1895년
・ 7책 필사본
연기현 없음 - -
『(충청남도)읍지』
(奎10768)
・ 1899년
・ 6책 필사본
충청남도 연기군,
1책(奎10768-6-1)

『충남연기군지』
(연기군지도, 채색지도)
연기군, 건치연혁, 구군명, 관직군수, 단묘, 향교,
공해, 물산, 형승, 성지, 능침, 풍속, 성씨, 산천,
제언, 교량, 역원, 목장, 관방, 봉수, 사찰, 고적,
진보, 방리, 도로, 전부, 인물. (27)
기해장적
(1839년 헌종 5)
『충청남도읍지』
(奎10769)
・ 9책 등사본 충청도 연기현,
9책(奎10769-9-9)

『충남연기현지①』
(연기현지도, 등사본 흑백지도)
빈면(강계, 건치연혁, 군명, 관직현감, 단묘, 향교,
봉암서원, 공해), 창고, 누정, 물산, 형승, 성지,
능침, 풍속, 성씨, 산천, 제언, 교량, 역원, 목장,
관방, 봉수, 사찰, 고적, 진보, 방리, 도로, 전부,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액, 책판,
인물. (38)
-
『충청남도읍지』
(奎15235)
・ 9책 등사본 충청도 연기현,
3책(奎15235-9-3)

『충남연기현지②』
(연기현지도, 등사본 흑백지도)
강계, 건치연혁, 군명, 관직현감, 단묘, 향교,
봉암서원, 공해, 창고, 누정, 물산, 형승, 성지,
능침, 풍속, 성씨, 산천, 제언, 교량, 역원, 목장,
관방, 봉수, 사찰, 고적, 진보, 방리, 도로, 전부,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액, 책판,
인물. (38)
-

주: 수록 항목에서 밑줄 친 항목(연구자 표기)은 기록 내용이 없어 ‘無’라고 표기된 항목이다. 항목 마지막 괄호 안은 제시된 항목의 수이다.

(1) 군현 지리지 『연기읍지』와 『연성지』에 수록된 항목과 특징

현전하는 연기현 읍지에서는 연기현의 사림 등 개인이 간행한 사찬읍지는 보이지 않고, 전국 지리지 편찬을 위해 연기 현감 등의 주도로 간행된 관찬읍지로 추정되는 『연기읍지』와 『연성지(燕城誌)』 2종이 현전한다. 두 읍지 모두 1책으로 구성되었고 간행 시기와 편저자가 미상이다.

규장각 소장의 『연기읍지』(奎17381)는 1책 22면(표지 포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도는 없고 표제는 『연기현읍지 전』이다(그림 1, 그림 2). 「인물」의 마지막 부분인 15면에 열녀 장씨 정려각에 대한 내용이 영조 임진년으로 표기되어 있어(張氏士人全五福之弟五倫之妻也其夫病將死張氏不忍見飮藥先死英宗朝壬辰命旌閭), 1776년(정조 1)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9)

https://cdn.apub.kr/journalsite/sites/geo/2022-057-05/N013570505/images/geo_57_05_05_F1.jpg
그림 1.

『연기읍지』(奎17381-1) 표지

https://cdn.apub.kr/journalsite/sites/geo/2022-057-05/N013570505/images/geo_57_05_05_F2.jpg
그림 2.

『연기읍지』 첫 항목(3면)

책의 첫머리는 강계・도로・건치연혁(3면)으로 시작하고, 군명・형승・성지・관직・성씨・풍속(4면), 능침・단묘・공해(5면)・방리(5-10면), 산천・제언(10면), 창고・물산・교량・역원・목장・관방・봉수(11면), 누정・사찰・고적・진보(12면)・ 인물(12-15면), 전부・진공(16면), 조적(17-18면), 전세(18면), 대동・균세(19면), 봉름・군액(20면)‚ 책판(21면)의 순으로 36개 항목이 수록되었다. 전부, 조적, 전세, 균세 등의 항목이 상세하고, 호구에 대한 내용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하나는 최근 세종시립민속박물관에서 유물로 구입한 『연성지』이다. 이는 연기현에서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 읍지로 희소 자료이지만, 간행시기와 편저자가 미상이다.10) 1책(29*43/51.5cm)으로 21장 42면이고, 4주 단변(四周 單邊), 계선(界線)이 있는 11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에 ‘서원’이라는 소장처가 명기된 것으로 보아, 과거 봉암서원(鳳巖書院)에서 부본(副本)으로 소장했던 읍지로 추정된다(그림 3). 봉암서원은 『여지도서』와 『연기읍지』에서는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연성지』 등에서는 향교와 함께 주요 항목으로 수록된 연기현 유일의 서원이다.11)

『연성지』 첫머리는 채색지도 「연기현지도」가 제시된다(그림 5).12) 38개 항목이 수록되었으며, 「방리」와 「인물」 항목이 서술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상세하다. 「방리」의 마지막 읍내면 끝에 호구식년(以壬午帳籍爲率)을 표기하고 있다(그림 4). 『연성지』에는 편찬자와 편찬시기를 알 수 있는 내용은 없지만, 1934년에 간행된 『연기지(燕岐誌)』 서문에는 1824년 『연성지』와 1854년 『전성지(全城誌)』를 기본 자료로 『연기지』를 발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연기향교, 1934, 3-4). 기록과 함께 옛 연성지와 전성지 서문을 수록하고 있으며, 연성지 서문에는 여지도(輿地圖)를 수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림 6, 그림 7). 최근 발견된 『연성지』에는 서문이 없는 것이 의문이지만, 이를 근거로 『연성지』 간행 시기는 1824년(순조 24)으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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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연성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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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연성지』 ‘임오장적’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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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연성지』 「연기현지도」(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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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연기지』 서문에 수록된 『연성지』 서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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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연기지』 서문에 수록된 『전성지』 서문 일부

(2) 충청도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항목과 특징

충청도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충청도읍지』, 『읍지』, 『호서읍지』에 수록된 『충청도연기읍지』, 『고궁연기읍지』, 『호서연기읍지』 3종이 현전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충청도연기읍지』는 조선 순조대 혹은 그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13) 최근 연구(이재두, 2020, 393-395)에 의하면 1832년(순조 32)경 『각도읍지』, 즉 『읍지』가 완성되었기에 본 연구에서는 『충청도연기읍지』는 『고궁연기읍지』와 함께 간행 시기를 1832년으로 표기한다.

『충청도연기읍지』는 표지 제외 60면(30장) 분량으로, 첫머리에 채색지도 「연기현지도」가 제시된다. 『충청도연기읍지』도 『고궁연기읍지』와 마찬가지로 1면 10행, 1행 18자로 서술하고 있으며, 검토 결과 구성 항목과 내용의 대부분이 동일하다(그림 8, 그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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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충청도연기읍지』 32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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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충청도연기읍지』 ‘임오장적’ 표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전국 지리지 『읍지』(고궁 2798) 74책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다음으로 오래된 전국 읍지이다. 『읍지』는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 전국 읍지 규모로는 유일 필사본으로 비슷한 규모의 복본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이재두, 2020, 224). 『읍지』는 조선 8도 각 고을 읍지로 구성되었지만, 표제에서 보듯이 도별 읍지로 성책한 것이며 본래 표제가 『각도읍지』인 도별 지리지다.14)

이 읍지에 필사본 「연기현읍지」가 채색이 선명한 지도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표제는 『읍지』이고, 연기현은 충청도 제천, 전의, 연기, 영춘, 황간, 아산 순으로 6개현이 수록된 22책에 수록되어 있다. 이하에서는 『고궁연기읍지』로 표기한다(그림 10). 『고궁연기읍지』도 『연성지』와 『충청도연기읍지』 처럼 ‘임오장적’을 표기하고 있다(그림 11). 즉 읍지 편찬은 1822년(순조 22년, 임오장적)의 호구 정보를 따랐다는 것을 표기하고 있다. 『고궁연기읍지』는 호서읍지(奎12176-v.1-17)와 마찬가지로 1면 10행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전체 60면(30장) 중에서 「방리」가 10면, 「인물」이 38면으로 상세히 서술되는 등 구성 항목과 그 순서까지 동일한 바, 「인물」 항목까지 동일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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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고궁연기읍지』 (고궁2798)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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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고궁연기읍지』 ‘임오장적’ 표기

표제가 『호서읍지』로 불리는 도별 지리지는 2종이지만, 연기현 읍지가 수록된 것은 1종뿐(奎12176)이다. 17책으로 구성된 『호서읍지』(奎12176)는 당시 충청도 군현을 망라한 호서지역의 읍지이지만, 7책으로 구성된 『(호서)읍지』(奎10767)는 충청도 서부, 즉 충남지역 군현만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읍지 성격이 다르다.

먼저 『호서읍지』(奎12176-v.1-17)는 1871년(고종 8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계획으로 충청도 각 군현에서 상송한 읍지를 17책으로 성책한 편자 미상의 필사본이다. 마지막 17책(奎12176-v.17-17)에 ‘연기・전의・평택’ 읍지가 채색지도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15) 17책의 첫머리에 「연기현지도」가 수록되어 있고, 내제는 ‘연기’로 표기되었지만, 지도 제목이나 ‘연기 진관 공주’ 등의 표기로 보아 행정구역은 공주목 연기현으로 추정된다. 이하에서는 『호서연기읍지』로 서술한다(그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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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호서읍지』(奎12176) 17책 표지

『호서연기읍지』는 「강계」, 「건치연혁」 항목으로 시작하여 읍례(邑例)에 이르는 39개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그림 13). 표지를 제외한 전체 64면(32장) 중에서 「방리」가 약 9면(4.5장)이고 「인물」 항목이 38면(19장) 분량이다. 마지막 항목으로 추가 서술된 것으로 보이는 「읍례」는 6면(3장) 분량이다. 「방리」에서는 동리별로 관문으로부터의 거리, 호적상 가구 수와 남녀별 인구수가 상세히 제시되는 것이 특징이다. 「방리」의 마지막 읍내면의 끝에선 연기현 전체 인구와 남녀별 인구수를 제시하고 있지만, 호구 식년 기록은 표기되지 않았다. 『충청도연기읍지』와 방리와 인물 등 대부분 항목의 내용이 동일하지만, 창고・전부・진공・조적・전세・대동・균세의 내용 일부는 다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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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호서연기읍지』 ‘연기’ 1면

‘연기’ 다음에 수록된 ‘전의’ 첫머리는 『전성지』로 제시되고 ‘계축년 5월 20일에 새로 고침(癸丑五月二十日新修)’을 기록하고 있다(그림 14). 이에 의하면, 읍지는 최소한 계축년(1853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표제가 『전성지』인 읍지가 이전에도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연성지』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에 수록된 평택도 『팽성지(彭城誌)』로 제시되고, 평택 읍지 마지막은 ‘진사 신식이 편찬함(進士申埴撰)’으로 편찬자가 기록되어 있다. 전의와 평택의 지도는 수록되지 않았다(그림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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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호서읍지』 17책 전성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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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호서읍지』 17책의 팽성지 1면

규장각에는 같은 이름의 『(호서)읍지』(奎10767-v.1-7)가 있다(그림 16). 표제는 『읍지』다. 규장각 서지사항에 의거하면, 1895년(고종 32년) 편저자 미상의 7책 필사본으로 간행되었고, 채색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해제에서는 1899년(광무 3년) 전국적으로 실시된 읍지 편찬계획에 따라 호서지역 각 읍에서 작성된 읍지를 7책으로 성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각 읍지는 이전의 읍지들을 저본으로 변동된 사항만 새로 기재하였고‚ 다만 지방재정의 파악을 위해 사례(事例)를 새로이 작성하여 싣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규장각 서지사항과 해제에서 간행 시기가 다르다. 본 연구에서는 1895년 편찬으로 표기한다. 오늘날 충남지역에 해당하는 31개 군현을 수록하고 있지만 연기현은 수록되지 않았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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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호서읍지』(奎10767-7-3)의 표지

3책에 수록된 전의는 『호서읍지』(奎12176)와 동일본으로 보이는 ‘전성지’를 수록하고 있지만(그림 17), 마지막 항목으로 구성된 「읍사례」는 앞면과 다른 필체로 40면 정도의 많은 분량으로 상세하게 추가된 점이 다르다. 이와 달리 5책의 평택은 ‘평택읍지’로 수록되어 있다. 호서읍지 편제 맥락상 『연성지』는 『호서읍지』(奎 12176)의 저본이고, 『(호서)읍지』(奎10767)의 누락본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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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호서읍지』(奎10767-7-3)의 전성지 1면

(3) 충청남도 지리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수록 항목과 특징

1895년 이후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변경된 행정구역을 표방하는 『(충청남도)읍지』는 3종이 현전하지만, 1종(奎 10768)만 연기군으로 표기하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 2종은 연기현 읍지를 수록하고 있다.

표제가 『읍지』인 『(충청남도)읍지』(奎10768)는 규장각 해제에 의하면, 1899년(광무 3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 사업에 따라 간행되었다. 편저자 미상의 필사본 6책으로, 채색지도가 포함되어 있다(그림 18). 이전의 필사본에 비해 필체 등이 매우 깔끔하고 단정하다. 연기는 1책(奎10768-6-1)의 첫 번째 군으로, 표지 .포함 22면(11장)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첫머리에 채색이 매우 선명한 「연기군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와 함께 첫머리 행정구역이 ‘연기군’으로 명시되었다. 이하에서는 『충남연기군지』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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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

『충남연기군지』 표지

『충남연기군지』의 첫 항목 강계는 이전의 ‘연기진관공주’에서 ‘연기군’으로 변화하였으며, 나머지 항목에서도 내용 변화가 나타났다.18) 즉, 수록 항목에서 연기군, 구군명(舊郡名), 관직군수 등의 항목 명칭을 변경하고, 봉암서원,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군액, 책판 등의 항목을 생략했으며, 향교, 공해, 물산, 성씨, 산천, 제언, 역원, 사찰, 고적, 전부에서 변화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 『충남연기군지』는 1896년 충청남도로 편제된 당시의 연기군의 지리적 변화를 반영한 읍지로 평가할 수 있다.

「방리」와 「인물」 항목의 수록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방리」의 호구 식년은 ‘기해장적(以己亥帳籍爲率)’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동리별로 ‘관문으로부터 거리, 편호, 남녀 인구수’를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기해장적은 기해박해가 있었던 1839년(헌종 5)에 간행된 장적으로 추정된다(그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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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

『충남연기군지』 ‘기해장적’ 표기

두 번째 『충청남도읍지』(奎10769)는 편저자와 간행 시기가 미상인 등사본 충청남도 지리지다. 9책으로 구성되었고, 각 읍지 첫머리에는 흑백 읍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 정보 및 해제에 의거하면, 고종대(1863년-1907년)에 편찬되었던 충청남도 37개 군현의 필사본 읍지를 등사본으로 다시 간행한 것이다. 규장각 해제에서 연기는 3책(목천, 전의, 연기)에 수록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연기현읍지』(奎10769-9-9)는 9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그림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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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0.

『충남연기현지①』 표지

9책의 마지막에 실린 연기현 읍지의 첫머리는 흑백의 매우 단순한 「연기현지도」(231-232면)가 제시되고, 첫 항목이 「창고」(235면)인 것으로 보아 앞 장(233-234면)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그림 21). 즉, 항목은 빈 면(233-234), 창고・누정・물산・형승・성지(235), 능침・풍속・성씨・산천・제언(236), 교량・역원(237), 목장・관방・봉수・사찰・고적・진보(238), 방리(238-247), 도로・전부・진공(248), 조적・전세・대동・균세(249), 봉름・군액(250), 책판(251), 인물(251-288)의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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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

『충남연기현지①』 235면

「방리」의 마지막은 읍내면의 암천리(岩川里)로 시작해서 신촌리(新村里)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합 2501호, 남자 5246명, 여자 4925명’의 가구와 인구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호구 장적 정보는 없다. 마지막 장(290면 중 288면, 인물)까지 『충청남도읍지』(奎15235-9-3)와 동일하다.

세 번째 『충청남도읍지』(奎15235)도 간행시기와 편저자가 미상인 9책 등사본으로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그림 22, 그림 23). 이 책에 대한 규장각의 서지사항과 해제 내용의 일부도 오류가 있지만, 이에 의하면 고종대(1863-1907)에 편찬되었던 9책 필사본 읍지를 등사본으로 다시 간행한 충청남도 37개 군현의 읍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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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2.

『충남연기현지②』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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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3.

『충남연기현지②』 235면

『충청남도읍지』의 3책(奎15235-9-3)의 마지막에 수록된 『충남연기현지②』(표지 제외 231면-288면)의 항목을 비교하면, 첫머리에 수록된 흑백 「연기현지도」부터 「인물」 마지막 장까지 위의 『충남 연기현지①』(奎10769-9-9)과 동일하다.20) 다만, 누락되었던 「강계」, 「건치」 등의 항목이 순서대로 수록된 것이 다른 점이다.

이들 2종 읍지의 표제는 충청남도를 표방하고 있지만, 읍지에 수록된 내용과 형식은 표제 그대로 과거 충청도 연기현 읍지이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의 요건을 어느 정도 갖춘 충청남도 연기군지는 1종만 현전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또한 과거의 어느 읍지를 저본으로 항목의 구성과 항목별 내용 일부만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은 모두 『여지도서』(증보) 유형의 읍지들이다. 즉,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읍지』는 1759년(영조 35) 말 홍문관에서, 각 고을에 하달한 전국 읍지의 표준양식을 따르고 있다. 첫머리에 연기현 채색지도를 수록하고 있으며, 수록 항목은 궁실・학교・총묘・명환・제영과 같은 『(동국)여지승람』 수록 항목을 제외하고, 방리와 도로 등 지방행정과 재정 상황을 반영하는 신설 항목을 중심으로 실용성을 강화한 항목으로 구성하였다. 이후의 연기현 읍지들도 대동소이하다.21)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에 중앙정부나 지방 감영에서는 여러 차례 읍지상송령을 내렸다. 숙종・영조・정조 시기에는 하달된 수록 규정에 따라 지방관과 사족・향리들이 합심하여 양식에 맞춰 읍지를 편찬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수록 규정이 분명하지 않았거나, 구지(舊誌)를 베껴 올리라는 지시가 많아 고을에 보관하고 있던 구지를 그대로 베껴 상송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동일한 시기에 수집한 읍지라 하더라도 수집 당시의 정보를 반영하기보다는 이전 시기의 정보를 반영한 읍지들이 많다(이재두, 2021, 219).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실증되고 있다. 중앙 정부나 지방 감영에서 성책하고 간행한 전국 지리지나 도별 지리지에 수록된 각 읍지의 실제 편찬 시기는 제각각이고 그 시차가 상당히 큰 경우도 많다. 이들 지리지의 저본은 군현 단위 읍지이기에 『연성지』와 『연기읍지』가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이들 2개 읍지는 중앙에 상송한 정본(正本)을 연기현에서 필사해 놓은 부본(副本)으로 추정되지만, 후대에 부본을 필사한 후사본(後寫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의 대부분은 『연성지』 수록 항목을 따르고 있어, 이를 저본으로 한 읍지로 추정된다. 『연기읍지』는 수록 항목에서 『여지도서(연기현읍지)』와 『연성지』의 과도기적 형식을 보인다. 즉, 『연기읍지』는 『여지도서(연기현읍지)』의 28개 항목보다 더 많은 홍문관의 범례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 『여지도서(연기현읍지)』에서는 연기현에 해당하는 항목들만 신설, 수록하였지만, 『연기읍지』에서는 형승, 성지 등 연기현과 관련 없는 항목까지 수록하고 있다. 전국 읍지 편찬에 따른 범례를 따르기 위해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연기읍지』의 수록 항목은 『연성지』 등 19세기에 간행된 읍지들과 대동소이하지만, 수록 항목의 순서가 다르고, 일부 항목의 내용은 다르다. 『연성지』에서는 ‘향교와 봉암서원’이 항목으로 수록되었고, 나머지 충청도 읍지들도 『연성지』와 동일하지만, 『연기읍지』에서는 수록되지 않은 점도 특이점이다.

표제가 충청남도를 표방하는 3개 도별 읍지는 1896년 이후에 성책되고 간행된 읍지로 보인다. 『충남연기군지』는 비교적 간단한 27개 항목을 수록하고 있지만, 일부 항목의 명칭이나 내용은 당시의 연기군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2개 등사본 읍지는 표제와 달리 연기현을 표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읍지는 『연성지』와 수록 항목과 순서가 동일하고, 방리 구성이나 호구 정보가 동일하다.22) 일단, 이들 읍지도 『연성지』 부본이나 후사본을 필사, 등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에 수록된 항목과 그 순서 및 장적 정보를 바탕으로 19세기 연기현 읍지들의 간행 시기를 비정하면, 『연성지』는 1824년 갑신년 연기현에서 편찬된 것을 1832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 시기에 조정에 상송했으며, 이를 저본으로 편찬된 것이 『충청도연기읍지』, 『고궁연기읍지』, 『호서연기읍지』, 『충남연기현지 ①, ②』로 추정된다. 즉, 19세기 초반에 간행된 『연성지』에서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충남연기현지』는 모두 임오장적(1822년) 시기 공간 정보를 담고 있으며, 『충남연기군지』는 기해장적(1839년) 시기의 공간 정보를 담고 있는 읍지이다. 『연성지』가 19세기 연기현 읍지들의 간행 시기를 가늠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지만, 『연기읍지』는 간행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3. 19세기 충청도 연기현 읍지의 「방리」와 지명 비교

1) 연기현 읍지 「방리」에 수록된 면의 편제와 동리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은 간행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연기읍지』를 포함하여 모두 19세기에 간행된 관찬읍지들이다. 이들 연기 읍지에 수록된 항목별 내용을 비교하면 좀 더 구체적인 시기를 비정할 수 있지만, 본 연구에서는 지역 환경 및 공간 정보를 가장 명시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방리」 항목에 수록된 면별 동리 구성과 그 지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연기현의 지역 환경을 기록한 읍지는 15세기 중엽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충청도 청주목 관할의 연기현 읍지에서 시작되지만, 주민들의 삶터이자 연기현의 지역 환경에 대한 구체적인 공간 정보는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방리」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났고, 이후 읍지에서 계속되었다. 이에 조선시대 연기현의 방리를 기록하고 있는 지리지와 지도 등 11종의 주요 내용을 비교해 보면 표 3과 같다.

표 3.

연기현 읍지 「방리」에 수록된 면의 편제와 호구 정보

읍지
(간행시기)
면의 편제와 동리(수) 호구 정보
『여지도서
(연기현)』
(1760년)
東一面
(10)
東二面
(9)
南面
(23)
北三面
(24)
北一面
(11)
北二面
(9)
間方
邑內面
(9)
・ 기묘장적(1759년)
・ 7면 95리, 2587호
・ 남 4926명, 여 5121명(총 10,047명)
・ 동리별로 관문과의 거리, 가구,
남녀인구 기록
『호구총수
(연기현)』
(1789년)
邑內面
(10)
南面
(29)
東一面
(14)
東二面
(13)
北一面
(17)
北二面
(12)
北三面
(36)
・ 7면 131리, 2502호
・ 10,174명:남 5248명, 여 4926명
・ 면별로 가구, 총인구, 남녀인구 기록
『연기읍지』
(1776년 이후)
東一面
(14)
東二面
(13)
南面
(26)
北三面
(34)
北一面
(19)
北二面
(13)
邑內面
(8)
・ 7면 127리
・ 동리별로 관문과의 거리만 표기
・ 가구 및 인구 등에 대한 정보 없음
『연성지』
(1824년)
東一面
(14)
東二面
(14)
南面
(26)
北三面
(34)
北一面
(19)
北二面
(12)
邑內面
(9)
・ 임오장적(1822년)
・ 7면 128리, 2501호
・ 남 5246명, 여 4925명, 총 10,172명
・ 동리별로 관문과의 거리, 편호,
남녀 인구수 기록
『충청도
연기읍지』
(1832년)
東一面
(14)
東二面
(14)
南面
(25)
北三面
(34)
北一面
(19)
北二面
(12)
邑內面
(9)
・ 임오장적(1822년)
・ 7면 127리, 2501호,
・ 남 5246명, 여 4925명, 총 10,172명
・ 동리별로 관문과의 거리, 편호,
남녀 인구수 기록
『고궁연기읍지』
(1832년)
東一面
(14)
東二面
(14)
南面
(25)
北三面
(34)
北一面
(19)
北二面
(12)
邑內面
(9)
『호서연기읍지』
(1871년)
東一面
(14)
東二面
(14)
南面
(25)
北三面
(34)
北一面
(19)
北二面
(12)
邑內面
(9)
・ 7면 127리, 2501호,
・ 남 5246명, 여 4925명, 총 10,172명
・ 동리별로 관문과의 거리, 편호,
남녀 인구수 기록
『충남연기현지』
(1896년 이후)
東一面
(14)
東二面
(14)
南面
(25)
北三面
(34)
北一面
(19)
北二面
(12)
邑內面
(9)
『1872년
연기현지도』
邑內面
(10)
東一面
(13)
東二面
(12)
南面
(23)
西面
(21)
北一面
(9)
北二面
(12)
・ 7면 100리, 2128호,
・ 총 7462명
・ 면별로 가구, 인구 표기
『충남연기군지』
(1899년)
邑內面
(8)
東一面
(12)
東二面
(12)
南面
(21)
西面
(26)
北一面
(16)
北二面
(13)
・ 기해장적(1839년)
・ 7면 108리, 2500호
・ 남 5142명, 여 4590명(총 9732명)
・ 동리별로 관문과의 거리, 편호,
남녀 인구수 기록
『구한국지방행정
구역명칭일람』
(1912년)
郡內面
(10)
東一面
(18)
東二面
(16)
北一面
(13)
北二面
(20)
西面
(31)
南面
(39)
・ 7면 147리, 3845호
・ 남 9811명, 여 8919명, 총 18,730명

『여지도서』에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하 『명칭일람』)에 이르는 문헌 자료 중에서, 『호구총수』와 『1872년지방지도』는 전형적인 읍지는 아니지만 당시 연기현의 방면(坊面)과 방리에 대한 중요 정보를 담고 있다. 나아가 『명칭일람』(1912년)은 20세기 자료이지만, 1914년 일제가 대대적인 부군면동리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기 직전의 ‘서면(西面) 시기’ 상세정보를 담고 있으며, 19세기와 직결되는 자료이다. 이는 19세기 말 연기현의 ‘서면 시기’ 지명의 지속성과 한자 표기 변화 및 동리 폐지나 폐합을 추론하는 참고자료로 함께 살펴보았다.23)

『명칭일람』에서 읍내면은 군내면으로 개칭되었고, 면별 동리 지명 제시 순서도 이전의 읍지들과 다르지만, 비교의 편의를 위해 『연성지』의 순서를 따라 표기하였다. 또한 동일면에서 가장 먼저 제시된 용연리와 같이 이전의 지명인 용산리와 분명한 관련성은 확인되지 않지만, 제시되는 순서를 근거로 해당 위치에 표기하였고, 내대리와 같이 지명의 전부(前部) 요소 중 하나가 일치하는 경우도 해당 위치에 표기하였다. 이전 읍지에서 제시되지 않았거나 관련성을 찾기 어려운 지명은 마지막에 표기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면리제가 시행되었지만, 연기현의 면리(방리)에 대한 지리지 기록은 『여지도서』 「연기현 읍지」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현전하는 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연기’는 1760년 연기현부터 1912년 연기군까지 7면으로 지역 행정구역이 실행되었다. 7면의 지명은 동서남북 방위에 따른 위치를 근거로 한 이른바 ‘방위면’으로 계속되었고,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읍지에서 면의 제시 순서도 동서남북 순으로 이루어졌다.

『여지도서』에서는 읍내면의 위치를 ‘정동・정서・정남・정북 네 방위의 사이에 위치’ 혹은 상대적으로 중앙에 위치함을 나타내는 ‘간방(間方) 읍내면’으로 표기하였지만, 『호구총수』(1789년) 시기부터 읍내면은 공해(公廨)가 위치한 읍치의 중심지로 위상을 갖춘 ‘읍내면’으로 명명되었다.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된 시기부터는 「방리」에서 읍내면이 가장 먼저 제시되고 있기에 명실상부한 연기현 행정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인다.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기현의 방리는 18세기 중반부터 7면 체제로 행정구역이 편제되었다. 18세기와 달리 19세기 연기현 7면의 지명이나 관할 동리의 수는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지만, 규장각에 「연기현지도」(奎10402)로 소장되어 있는 이른바 『1872년지방지도』에서는 관할 동리가 가장 많았던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칭되는 변화를 표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연기현의 방리와 지명은 물론 공간 정보 고찰에 매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24) 이하에서는 『1872년연기현지도』로 서술한다(그림 24).

https://cdn.apub.kr/journalsite/sites/geo/2022-057-05/N013570505/images/geo_57_05_05_F24.jpg
그림 24.

『1872년연기현지도』의 일부(검은 점선 연구자 표기)

규장각 상세정보에 의하면, 『1872년연기현지도』는 1871년 고을별 지도 편찬 상송령(列邑地圖謄上令)에 따라 1872년(고종 9년) 충청도 각 군현에서 만들어 올린 도별도에 포함된 채색지도이다. 연기현의 방리 및 공간 정보를 해당 위치에 명시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1871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연기읍지』 「방리」에서는 북삼면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연기현의 방리(면의 편제) 변화는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명시적으로 표기되고 있지만, 1868년(고종 5) 연기 향교에서 간행한 『향교둔전양안(鄕校屯田量案)』에서는 읍내면, 남면, 동이면, 북일면, 북이면, 서면 등 6개 면에서 총 56개 필지의 교둔 보유를 기록하고 있다(문광균, 2018, 21에서 재인용). 이에 의하면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된 것은 1868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1868년 이전에 연기현의 면리 행정구역이 개편되었고, 『1872년연기현지도』는 이러한 변화를 명시적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5)

2) 19세기 연기현의 면별 동리 지명 변화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 8종의 「방리」에 수록된 면별 동리 지명을 북삼면과 서면 시기로 구분하여 통시적으로 비교해 보았다. 이를 통해 19세기 연기지역의 동리 지명 변화 현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연기현 읍지들의 간행 시기를 상대적으로 비정(比定)해 보고자 한다. 면별로 「방리」 지명 변화를 정리하면 표 4, 5, 6, 7, 8과 같다.

북삼면 시기 지명 표기 변화는, 『연성지』를 기준으로, 『호서연기읍지』, 『고궁연기읍지』, 『충남연기현지』, 『연기읍지』 순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이는 1차 분석 결과 지명 표기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따른 것이며, 『충청도연기읍지』는 『연성지』와 동일하였기에 생략하였다.26) 『연기읍지』는 나머지 읍지들과 다른 지명들이 표기되고 있어 마지막 순서로 비교하였다. 서면 시기는 『1872년연기현지도』, 『충남연기군지』 순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먼저, 연기현 동쪽의 큰 하천(당시는 東津) 건너 동쪽에 위치하는 동일면은 북삼면 시기와 서면 시기 모두 동리 지명은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표 4). 동일면은 연성지에 표기된 14개 지명 중 서면 시기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정촌’을 제외하고 13개 지명이 연성지와 6개 읍지 모두에서 표기되고 있다.

용산리, 전암리, 명학리 등에서 지명의 전부 요소의 일부 한자가 변화하지만, 이들은 같은 한자 부수(部首)의 이체자(異體字)이거나 표기가 좀 더 간단한 속자(俗字)로 훈과 음이 동일한 한자들이다. 외태산리가 외태리로 변화한 것 또한 후부(後部) 요소의 간략화 현상이다. 이러한 표기 변화는 해당 지명의 고유성이나 개별성이 변화한 경우가 아니기에 본 연구에서는 지명이 개칭되거나 변화하지 않은 경우로 보았다.

둘째, 동일면과 마찬가지로 연기현 동쪽의 동이면도 북삼면 시기에는 14개 동리 지명에 변화가 없다(표 4). 다만 노곡리가 연기읍지에선 표기되지 않았지만, 서면 시기 2개 읍지에서 표기되었기에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될 때, 3개 동리(문산직촌리, 판산직리, 노산소리)가 폐지되고, 1개 동리(용곡리)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노산소리는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용곡리는 『충남연기군지』에서 각각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충남연기군지』에서 상판리(上板里)는 두 번 표기되었다. 상송리 위치에 표기된 상판리는 ‘상송리’의 필사 오류이다.

표 4.

동일면과 동이면 방리 지명 비교

북삼면 시기 서면 시기
연성지 ① ② ③ ④ ⑤ ⑥ 명칭일람
東一面 龍山里 ③④竜山里 0 龍淵里
傅巖里 ③傅岩里 0 鷹岩里
合江里 0 0 0
龍塘里 ③④竜塘里 0 0
外台山里 ④外台里 外台里 -
內台山里 ④內台里 內台里 內臺里
新垈里 0 0 -
鳴鶴里 ③鳴嶌里 0 0
釜洞里 0 0 0
葛山里 0 0 0
白丁村 0 - -
新院里 0 0 新村里
生芝里 0 0 0
薪洞里 0 0 -
- - - 龍湖, 龍溪, 泥峴, 沼地, 性洞, 高亭,
葛湖, 鳳舞洞. (8리)
東二面 問舟里 0 ⑥文舟里 文舟里
問山直村里 ④問山直里 - -
上板里 0 0 0
板山直里 0 - -
內板橋里 ④內板里 內板里 內板里
外板橋里 ④外板里 外板里 外板里
老谷里 ④없음 0 0
上松里 0 ⑥上板里 上松里
內松里 0 0 松里
松山所里 0 松山里 松山里
外松里 0 0 0
老〻山里 0 老山里 老山里
老山所里 0 ⑤없음 -
養仁洞里 0 養仁里 養仁里
- - ⑤龍谷里
⑥없음
龍谷里
- - - 仁洞, 新垈, 雄洞, 松潭.(4리)

주: 표에서 『호서연기읍지』, 『고궁연기읍지』, 『충남연기현지』, 『연기읍지』는 각각 ①, ②, ③, ④로 표기하였고, 『1872년연기현지도』와 『충남연기군지』는 ⑤, ⑥으로 표기하였다.

『연성지』 지명과 표기가 같은 경우는 0으로 표기하였고, 변화된 경우만 해당 읍지 번호와 지명을 표기하였다.

‘-’는 해당 지명이 표기되지 않은 경우다. 이하 표 5, 6, 7, 8도 동일하다.

동이면의 내・외판교리가 『연기읍지』에서 내・외판리로 표기되고, 이후 2개 읍지에서 동일하게 표기되는 것으로 보아 『연기읍지』가 북삼면과 서면의 과도기에 편찬된 읍지로 추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 ‘노노산리(老〻山里)’ 표기에서는 반복을 뜻하는 부호가 사용되었는데, 북삼면 시기 5개 읍지에서 모두 같은 형식으로 표기했다는 것이 특이점이다.27)

셋째, 남면의 북삼면 시기 25개 동리 지명은 5개 읍지에서 변화가 없다(표 5). 백정촌이 『연성지』와 『연기읍지』에서만 표기되는 점은 의문이지만, 필사자의 필사 오류로 보인다. 백정촌은 북삼면 시기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28) 『연성지』 등 다른 4개 읍지와 달리 『충남연기현지』에서만 나타나는 만수동리(萬水洞里), 소학동리(巢嶌洞里), 갈운리(葛云里) 표기는 한자 필사의 음차(音借)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필사 오류로 보인다. 갈은리(葛隱里)와 제곡동리(霽谷洞里) 표기는 특히 여러 읍지에서 각기 다르게 표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지명 개칭이 아니라 필사 오류로 보인다.

표 5.

남면의 방리 지명 비교

북삼면 시기 서면 시기
연성지 ① ② ③ ④ ⑤ ⑥ 명칭일람
南面 訥旺里 0 0 0
松亭里 0 0 松玉里
靑龍里 ④靑竜里 0 0
萬壽洞里 ③萬水洞里 0 -
白丁村 ①②③없음 - -
秀山里 0 0 水山里
石峴里 0 0 花峴里
國士洞里 0 國士里 國士里
中里 0 0 0
月城里 0 0 0
- - ⑤月峴里 月峴里
巢鶴洞里 ③巢嶌洞里 0 鶴川里
雲住洞里 0 - -
金沙里 0 0 0
分圡洞里 0 0 -
館垈里 ④官垈里 0 新垈里
防築洞里 0 防築里 方丑里
德洞里 0 0 0
伏龍洞里 0 伏龍里 伏龍里
外三歧里 0 0 -
山所洞里 0 山水洞里 水望里
內三歧里 0 ⑤三歧里
⑥內三里
內山里
- - ⑤없음
⑥內洞里
-
葛隱里 ①葛隱洞里
③葛云里
⑤葛云里
⑥없음
葛雲里
大洞里 0 0 0
亭子洞里 0 - 高亭里
霽谷洞里 ②南霽谷洞里
④霽洞里
霽谷里 濟川里
陽化洞里 0 ⑤없음
⑥陽化里
陽化里
- - - 月龍, 元岩, 根谷, 所也, 上村, 五山,
元谷, 下訥, 道峯, 旺德, 旺岩, 臺川,
坪村, 旌門村, 介洞, 紫芝洞. (16리)

서면으로 개편되면서, 월성리가 월성리와 월현리로 분동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의 근거는 월현리가 월성리 다음에 제시된다는 점이다. 운주동리(雲住洞里)와 정자동리(亭子洞里)는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갈은리는 『충남연기군지』에서, 양화리는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각각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1872년연기현지도』에서만 내삼리 다음에 유일하게 표기된 내동리(內洞里)는 『명칭일람』에 없는 것으로 보아 표기 오류로 추정된다.

따라서 19세기 남면의 동리는 연성지에 표기된 22개 동리 지명은 큰 변화없이 존속되었고, 3개 동리(백정촌, 운주동리, 정자동리)는 서면으로 개편되면서 폐지 혹은 폐합되었으며, 1개 동리(월현리)가 월성리에서 분동(分洞) 혹은 신설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넷째, 가장 많은 34개 동리로 구성된 북삼면의 지명도 『연성지』와 4개 읍지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표 6). 다만, 『연기읍지』에서 청라동리(靑羅洞里)가 청라전리(靑羅田里)로, 치복동리(致福洞里)가 치박동리(致朴洞里)로 표기된 것은 필사 오류로 보인다. 원봉리(圓峯里)가 3개 읍지에서 ‘元峯里’나 ‘元峰里’로 표기되었지만, 한글 발음이 같은 한자로 표기되었기에 지명 개칭보다는 표기 오류로 추정된다.

표 6.

북삼면・서면의 방리 지명 비교

북삼면 시기 서면 시기
연성지 ① ② ③ ④ ⑤ ⑥ 명칭일람
北三面

西面
龍巖里 ③④竜岩里 0 龍岩里
生川里 0 0 0
舍房洞里 0 - -
靑羅洞里 ④靑羅田里 ⑤靑羅洞里
⑥없음
靑羅里
獻垈里 0 ⑤없음 -
雙流洞里 ③﨎流洞里
④双流洞里
②雙流里 雙流里
自龍里 ④自竜里 0 0
起龍里 ④起竜里 0 0
禾洞里 0 ⑤없음 禾洞里
友德洞里 ③友德里 ⑤없음
⑥友德里
友德里
上馬龍里 ④上馬竜里 - -
龍溪里 ④竜溪里 ⑤없음 西溪里
鶴巖里 ④鶴岩里 - -
新林里 0 0 0
圓峯里 ②元峰里
①③元峯里
- -
新垈里 0 0 0
鳴鳳里 0 ⑤없음 -
山德洞里 0 ⑥山德里 山德里
防築洞里 0 ⑥防築里 孝防里
釜洞里 0 ⑥없음 -
致福洞里 ④致朴洞里 - -
五龍洞里 ③④五竜洞里 ⑥龍洞里 龍洞里,五龍里
磻巖里 ③④磻岩里 0 磻岩里
西村里 0 0 -
栗村里 0 0 菊村里
獐隱洞里 ④獐隱里 - 隱洞里
大也洞里 0 ⑤⑥大也里 -
隱巖里 ③④隱岩里 0 隱岩里
鴟巖里 ③④鴟岩里 ⑤없음
⑥中巖里
中巖里
東山里 0 - 東山里
鳳林洞里 ④鳳林里 ⑤없음 鳳岡里
孝橋洞里 0 ⑤⑥孝橋里 孝橋里
龍洞里 ③④竜洞里 ⑥龍巢里 -
聖堂寺 0 - -
- - ⑤杏亭里
⑥杏花里
杏亭里,
杏花里
- - ⑤瓦村里
⑥없음
瓦村里
- - ⑤없음
⑥望北里
望北里

서면 시기 『명칭일람』에서 보이지 않는 6개 동리(사방동리, 상마룡리, 학암리, 원봉리, 치복동리, 성당사)는 서면으로 개편되면서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동산리는 서면 시기 2개 읍지에서 표기되지 않았지만, 『명칭일람』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폐지 혹은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일 수 있다. 서면 시기 2개 읍지 중에서 어느 한 곳에만 표기된 6개 동리(청라동리, 헌대리, 화동리, 우덕동리, 용계리, 명봉리, 치암리, 봉림동리)는 『명칭일람』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부동리는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폐지되었거나 연접한 읍내면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표 7 참조). 서면 혹은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4개 동리(행정리, 행화리, 와촌리, 망북리)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표 7.

북일면・북이면 방리 지명 비교

북삼면 시기 서면 시기
연성지 ① ② ③ ④ ⑤ ⑥ 명칭일람
北一面 月谷里 0 ⑤없음
⑥月洞里
-
磻巖里 ③④磻岩里 0 0
黃鳥洞里 0 ⑤없음 -
竹內里 0 0 0
松山里 0 - -
竹林里 0 - -
眞浦里 ②眞浦洞里 - -
滿浦里 0 - -
黑巖里 ③④黑岩里 ⑥黑巖坪里 平里
砧山里 0 0 0
- - ⑤없음
⑥瑞谷里
瑞谷里
華山里 0 - -
薪洞里 0 0 0
圡玉洞里 0 ⑤⑥玉洞里 玉洞里
內倉里 0 0 0
樂隱洞里 0 ⑤樂隱里
⑥隱洞里
樂隱里
- - ⑤없음
⑥苧村里
苧村里
圡興里 0 ⑤圡興坪里
⑥없음
-
上洞里 0 ⑤없음
⑥東里
東里
百官里 ③百官洞 ⑤없음 0
月岩里 ②月巖里 ⑤없음
⑥月峯里
-
- - ⑤없음
⑥新垈里
新垈里
北二面 鳳巖里 ③④鳳岩里 0 0
月河洞里 0 ⑥⑥月下洞里 月下里
月明洞里 ①②③月明里 ⑤없음
⑥月溪里
月溪里
雙槐亭里 ③﨎槐亭里 ⑤⑥雙槐里 雙槐里
錢城里 0 0 -
斗玊洞里 ④斗玊里 ⑤⑥斗玊里 -
養智洞里 0 - -
錢塘里 0 0 0
性齋洞里 0 ⑥性才里 -
新里 0 0 新香里
高山洞里 0 ⑤東高里
⑥없음
東高里
- - ⑤⑥西高里 西高里
福洞里 0 ⑥上卜洞里 上福里
- ④下朴洞里 ⑤없음
⑥下卜洞里
下福里
- - ⑤鳴鳳里
⑥없음
鳳村里
- - ⑤없음
⑥窠城里
窠城里
- - - 獨洞, 道山, 元峰, 富谷, 典洞, 槐洞, 槐村, 大朴.(8리)

이처럼 북삼면의 34개 동리 지명은 『연성지』와 4개 읍지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이 존속되었지만, 서면으로 개편되고,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동리가 폐지, 폐합, 신설되는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서면으로 개편될 때 6개 동리가 폐지 혹은 폐합되었고, 연기군으로 개편될 때 1개 동리가 폐지되었으며, 4개 동리가 신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삼면 동리 지명 표기에서도 『연기읍지』만 지명 표기가 다른 과도기적 특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원봉리(圓峯里) 한자 표기는 유일하게 『연성지』와 동일한 점은 시기를 비정하는데 혼란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표기 특성은 『연기읍지』가 『연성지』 방리를 저본으로 필사하면서 당시의 일부 동리의 변화 상황을 반영하였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다섯째, 북삼면 시기 북일면 19개 방리의 지명은 5개 읍지가 동일하다(표 7). 지명 표기에서 같은 뜻의 이체자나 속자로 표기하는 정도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서면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크다. 우선 5개 동리(송산리, 죽림리, 진포리, 만포리, 화산리)가 서면으로 개편될 때, 1개 동리(토흥리)는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3개 동리(서곡리, 저촌리, 신대리)가 신설된 지명으로 보인다. 『충남연기군지』에는 표기되었지만, 『1872년연기현지도』에는 없는 3개 동리(월곡리, 황조동리, 월암리)는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흑암리(黑巖里)가 흑암평리(黑巖坪里)로 표기되고, 명칭일람에서는 평리(平里)로 표기되는 현상은 필사 오류 지명이 본래 지명과 다른 새로운 지명으로 개칭되고 고착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여섯째, 북이면의 12개 동리 지명도 『연성지』와 4개 읍지가 동일하다(표 7). 다만, 마지막의 하박동리(下朴洞里)는 『연기읍지』에서만 유일하게 제시된다. 오직 『연기읍지』에서만 제시되는 지명 하박동리와 북삼면의 치박동리는 이전의 『여지도서』나 『호구총수』에도 없는 지명이지만, 『충남연기군지』 북이면에서 하복동리(下卜洞里)와 상복동리(上卜洞里)로 표기되었다. 이러한 특이점은 『연기읍지』가 『연성지』보다는 늦은 시기에 간행된 읍지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반면 나머지 3개 읍지와 달리 월명동리는 『연성지』와 동일하게 표기한 점은 여전히 의문이고, 『연기읍지』 간행 시기를 비정하는데 혼란을 준다. 복동리(福洞里)가 하박동리와 하복동리 표기되었다가 명칭일람에서 하복리(下福里)로 표기된 것은 필사 오류로 표기된 지명들이 본래 지명으로 복구된 사례로 보인다.

양지동리는 서면으로 개편될 때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이고, 고산동리는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동고리와 서고리로 분동되었고, 과성리가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서면 시기에 4개 동리(월명리 혹은 월계리, 동고리, 하박동리, 명봉리)는 각각 『1872년연기현지도』와 『충남연기군지』에서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읍내면의 9개 동리 지명 표기도 북삼면 시기 5개 읍지가 동일하다(표 8). 다만, 『연기읍지』에서 교촌리와 남부는 누락된 것으로 보이고, 중부는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서면으로 개편될 때 동이부는 동부로, 동삼부는 폐지되었거나 중부로 개칭되었고, 창동리는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읍내면의 ‘중부’표기를 고려하면, 『연기읍지』는 서면 시기에 간행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면으로 개편될 때 3개 동리(치암리, 월곡리, 보통리)가 신설되었고,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부동리는 신설 혹은 연접한 북삼면에서 편입되었으며, 남부는 폐지 혹은 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신촌리는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치암리, 월곡리, 보통리는 『충남연기군지』에서 각각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동리 규모가 가장 작았던 읍내면은 서면 시기에 12개 동리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삼면 시기 연기현 「방리」 지명은 『연성지』를 비롯한 5개 읍지 모두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 일부에서 지명의 전부 요소가 훈과 음이 같은 이체자나 속자로 변화하거나 후부 요소가 간략화되는 정도이다. 5개 읍지 중에서 『연기읍지』만 지명 표기가 서면 시기 지명과 연계되는 과도기적 특성을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연기읍지』가 『연성지』 방리를 저본으로 필사하면서 당시의 일부 동리의 변화 상황을 반영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북삼면이 서면으로 편제되는 과도기에 간행된 읍지로 추정한다.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된 시기에는 각 면에서 동리의 폐지 혹은 폐합, 신설 혹은 편입으로 추정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서면 혹은 충청남도로 개편될 때 이루어진 일종의 연기현 지역 행정구역 개편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필사 과정 오류로 보이는 지명 누락이나 표기 오기(誤記) 현상도 나타났다.

표 8.

읍내면 방리 지명 비교

북삼면 시기 서면 시기
연성지 ① ② ③ ④ ⑤ ⑥ 명칭일람
邑內面

郡內面
巖川里 ④岩川里 0 岩川里
校村里 ④없음 0 校村里
東二部 0 東部 -
東三部 0 - -
- ③없음④中部 中部 中部
北部 0 0 0
倉洞里 0 - -
西部 0 0 0
南部 ④없음 ⑥없음 -
新村里 0 ⑤없음 新村里
- - ⑤致巖里⑥없음 雉岩里
- - ⑤月谷里⑥없음 月里
- - ⑤洑通里⑥없음 洑通里
- - ⑥釜洞里 釜洞里

4. 정리 및 결론

조선시대 연기현은 중앙 정부에서 지방관 현감을 파견했던 소규모 행정구역이었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체계의 기본 단위는 군현이었지만,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지리지 『여지도서』에 수록된 연기현의 「방리」에서 ‘면’은 경계를 지닌 최하위 단위로 표기되었고, 관할 동리 지명도 명시되었다. 하지만, 연기현 읍지나 읍지의 「방리」 지명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와 읍지에 수록된 방리 지명을 통시적으로 비교, 분석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현전하는 연기현 읍지는 전국 지리지에 수록된 4종, 도별 혹은 지역 지리지에 수록된 5종, 군현지 2종 등 관찬읍지 11종이 수집되었다. 이들 읍지에서 연기현의 면과 동리를 기록한 방리 항목을 수록한 읍지는 9종이었고, 『여지도서』를 제외한 8종은 19세기에 간행되었으며, 편찬자와 간행시기 등이 미상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19세기에 간행된 연기현 읍지들의 수록 항목과 방리를 비교, 고찰한 결과, 5종은 최근에 발견된 『연성지』를 저본으로 한 읍지들이고, 『(충청남도)읍지』에 수록된 『(충남)연기군지』는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개편된 이후의 면과 동리 지명을 수록하고 있으며, 『연기읍지』는 과도기적 특성을 갖는 읍지로 추정되었다.

셋째, 조선시대 연기현의 면리 행정구역은 18세기부터 7면(동일면, 동이면, 남면, 북삼면, 북일면, 북이면, 읍내면)의 방위면으로 계속되었지만, 『1872년연기현지도』에서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되었음이 명시적으로 표기되고 있다. 1868년 이전에 서면으로 개편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도 발견되고 있다. 북삼면 시기 각 면의 동리 지명은 거의 변화가 없지만, 서면과 충청남도로 개편될 당시 각 면에서 동리의 폐지 혹은 폐합, 신설 혹은 편입으로 추정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넷째, 간행 시기를 조사, 분석한 결과 19세기 연기현 읍지들의 저본이 되었던 『연성지』는 1824년에 간행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충청도읍지』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읍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는 1832년에 간행된 것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들 3종 읍지와 함께 1871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호서읍지』와 1896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읍지』에 수록된 연기현 읍지의 방리는 모두 1822년 임오장적(128 동리, 2,501 가구, 총 인구 10,172명)을 근거로 기술한 『연성지』 방리와 동일본으로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연기현의 북삼면이 서면으로 개편된 이후의 방리에 대한 기록은 『1872년연기현지도』와 『(충청남도)읍지』에 수록된 『충남연기군지』 2종뿐이다. 『1872년연기현지도』는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연기현 방리 및 지역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임이 확인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행정구역이 변경되면, 새로운 지명이 명명되거나 옛 지명이 폐지되기도 하지만 동리 지명은 주민들의 일상 세계를 공간적, 인식적으로 구성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기에 변경이나 폐지가 어렵다. 행정구역의 마지막 단위인 동리 지명의 보수성과 공간적 지속성을 연기현 방리 고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19세기 연기현 읍지들은 구 읍지를 그대로 베낀 경우들이 많아 읍지 제작 당시 고을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실증되었다. 현전하는 연기현 읍지를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읍지를 발굴하면 좀 더 정확하고 의미 있는 조선시대 연기현의 지역 정보를 지역 문화 유산으로 기록, 전승할 수 있을 것이다.

Acknowledgements

연성지 구득에 도움을 준 충북대학교 사학과 김영관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5] 1) 근대 이전 특정 지역에 대한 종합적, 총체적 기록을 지칭하는 지리지는 지지(地志, 地誌) 혹은 읍지라고 한다. 지리지는 대상 지역의 공간적 범위나 성격에 따라 전국 지리지, 도지(道誌), 군현지(郡縣誌) 등으로 구분한다. 본 연구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는 ‘연기현 읍지’는 전국 지리지나 도지에 수록된 경우도 있지만, ‘연기현 읍지’가 수록된 원전의 표제는 대부분 ‘읍지’다. 이에 맥락에 따라 지리지나 읍지로 통용, 기술한다.

[6] 2) 예로부터 지리지는 국가적, 지역적 차원의 행정구역 변경이나 전란 등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면 편찬이나 기록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자의 ‘행정수도’ 신설 공약으로 시작되어, 2012년 7월 1일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이하 세종시)는 국가 차원에서 계획된 것이지만, 그 변화의 구체적인 현상은 지역 차원의 행정구역 변화와 그에 따른 지명의 폐지나 폐합 등으로 진행되었다.

[7] 3) 『세종실록지리지』는 1454년(단종 2년)에 완성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에 부록으로 수록된 지리서(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8권)이지만, 본 연구에서는 세칭 『세종실록지리지』로 표기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원문(세종실록 태백산 사고본)과 국역본을 열람, 인용하였다.

[8] 4)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군명을 두잉지와 전기로, 『여지도서』는 잉지와 연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 이후 대부분의 읍지(연기읍지, 연성지, 호서읍지, 고궁읍지, 충청남도읍지 등)에서 ‘두’가 누락된 잉지와 연산을 군명으로 기록하였지만, 이들 읍지의 「건치연혁」에서는 ‘두잉지(豆仍只)’로 표기하고 있다. 전대의 필사 오류가 수정되지 못하고 계속되는 필사본 지리지의 한계점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백제의 고유 지명을 한자로 차자한 지명 ‘두잉지’와 ‘연기’에 대한 옛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처음 발견된다. 즉, 『삼국사기』(제36권 잡지 제5)에는 “燕山郡 本 百濟一牟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燕岐縣 本 百濟豆仍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昧谷縣 本 百濟未谷縣 景德王改名 今懷仁縣”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조규남 등 옮김, 2012).

[9] 5) ‘연기’ 지명의 연원은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이뤄진 지명 개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러 의견이 있지만, 두 가지 설명이 설득력을 갖는다. 먼저, 신라는 당시 연기지역에 근거를 둔 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인 연씨(燕氏)와 교통로의 분기점의 의미하는 ‘岐’를 조합한 한자 지명 ‘燕岐’로 개칭했다는 설명이다(안병섭, 2017). 다른 하나는, 과거 중앙 및 지방 권력이 행정 편의를 위해 인접한 지방 행정구역 명칭과 동일한 지명소를 부여한 사례라는 것이다. 즉, 사람 이름에 동일한 돌림자(항렬자)를 사용하듯이 당시 燕山(현 청주시 문의면)의 지명 요소 ‘燕’을 따라 ‘燕岐’로 개칭하였다는 것이다(김순배, 2021, 171).

[10] 6) 본 연구에서는 규장각(奎貴1932-v.1-25)의 원문 이미지를 활용하였다. 충청도 연기현은 18권 8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奎貴1932-25-8).

[11] 7) 『여지도서』에서 ‘연기’는 충청도(제6책-제13책) 13책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 본 연구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1973)에서 간행한 영인본과 김우철 역주(2009) 번역본을 참고하였다.

[12] 8) 대체로 읍지는 공간적으로는 전국 모든 고을에서 편찬하였고, 여러 시기에 걸쳐 있다. 분량이 방대하고 수록항목이 매우 이질적이어서 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 이외에는 일정한 수록 항목(규식, 범례)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영・정조대의 읍지를 보면, 이 두 유형 이외에도 경상도읍지, 여지도서+α, 호남읍지 유형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α 유형, 즉 여지도서(증보) 유형은 여지도서 수록 항목에 책판과 선생안을 신설하고, 누정에 제영을 부기한 것이 전형적이며, 선생안 없이 단지 책판의 유무를 파악한 것도 여지도서 편찬 이후의 읍지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여지도서+α(증보)유형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이재두, 2020, 379-380).

[13] 9) 규장각 해제 등에서는 “편찬 시기에 대한 정확한 단서가 없어 간행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인물」 항목에 수록된 열녀 장시가 정려된 시기가 ‘영종조 임진’으로 기록되어 있어 1772년(영조 48) 이후에 편찬된 읍지로 판단된다”고 시기를 비정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인물」 등의 항목에서 표기한 ‘本朝’는 정조대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1776년(정조 1) 이후로 비정한다.

[14] 10) ‘燕城’은 여러 읍지에서 보이지 않는 생소한 지명이지만, 조선시대 이전에 연기의 이칭으로 ‘연성’과 ‘燕州’가 존재했고 널리 통용되었음이 자연마을의 지명(燕城 부락), 연기 김씨의 관향명(燕城 김씨 또는 燕州 김씨), 조선시대 봉호명(燕城正, 鷰城君) 등을 통해서 확인되었다(안병섭, 2017, 150-152).

[15] 11) 『연성지』 「봉암서원」 항목에는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동재(東齋)에 장의(掌議) 1인과 유사(有司) 2인, 서재에 장의 1인과 원생 30명이고 모입(募入) 원생 30명이다.”를 기록하고 있다.봉암서원은 1651년(효종 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한충(韓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62년(현종 3) 김장생(金長生), 1686년(숙종 12) 송준길(宋浚吉), 1721년(경종 1)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1665년(현종 6)에 ‘봉암’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현재는 서원터에 봉암서원사적비(鳳巖書院事蹟碑)가 남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 12) 4면에서 강계・건치연혁・군명・단묘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고, 향교・봉암서원・공해・창고・누정・물산・형승・성지・능침・풍속(5면), 성씨・산천・제언(6면), 교량・역원・목장・관방・봉수・사찰・고적・진보・방리(7면), 방리(8-13면), 도로・전부・진공・조적(14면), 전세・대동・균세・봉름・군액(15-16면), 책판・인물(17-41)의 순으로 38개 항목이 수록되었다.

[17] 13) 국립중앙도서관 초록 및 해제정보에 의하면, 『충청도읍지』는 충청도 50개 읍지와 1개 진지(평신진, 39책)을 모아 51책으로 성책한 도지이다. 각 고을에서 작성한 지리지를 성책한 것이기에 작성 시기와 체제 등이 각각 상이한 51책으로 편찬되었으며 1책에 1읍씩 수록되어 있다. 연기현은 32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순조대 또는 그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규장각의 고지도(古4709-59) 「湖西圖」에 표기된 충청도 관할의 54개 군현을 수록하려 했다면, 단양, 대흥, 은진, 평택의 4개 고을이 누락되었고, 1개의 진지(平新鎭誌)가 추가된 충청도 지리지라 할 수 있다.

[18] 14) 『읍지』 74책은 한성부를 제외하고, 1899년까지 부・군으로 편성한 모든 고을을 포함한 전국 읍지이다. 원래는 『각도읍지』 80책이었는데, 일제가 각도읍지 중에서 『경상도읍지』 20책 대신, 1878년에 편찬한 경상도의 읍지 14책을 선택하여 74책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각도읍지』 중에서 유일하게 『경상도읍지』만 남아있었으나, 환수한 74책을 통해 1832년에 전국 읍지 편찬 사업이 추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도읍지』는 1773년・1780년・1793년・1832년의 전국읍지 편찬 사업, 1832년 『각도읍지』 완질의 완성과 1899년의 보유편 제작, 영・정조대에 개발 보급한 읍지의 유형 등을 알려준다(이재두, 2020, 377-379).이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규장각에서 대출하여 일본 궁내청 도서관에서 보관하던 것을 2011년에 환수한 것이다. 규장각본 『읍지』 74책은 반환받을 당시 ‘권별로 보면 유일본으로 손색이 없는 희귀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략 1832년경 『각도읍지』를 완성하던 시기에 각 군현의 읍지를 토대로 필사, 성책한 것으로 보고 있다. 22책에 수록된 『고궁연기읍지』는 1832년에 편찬한 읍지로, 『여지도서』 수록 항목에 책판과 선생안을 신설하고, 누정에 제영을 부기한 『여지도서』를 증보한 유형이지만, 책판 유무만 밝히고 선생안(혹은 환적)은 수록하지 않은 유형이다(이재두, 2020, 393-395).

[19] 15) 『호서읍지』(奎12176-v.1-17)는 제1책(公州 巡營) 제2책(牙山) 제3책(忠州) 제4책(林川 文義 堤川 永春 延豊) 제5책(新昌 唐津 禮山 結城 藍浦) 제6책(瑞山 平薪 沃川) 제7책(永同 黃澗 靑山 懷仁) 제8책(槐山 報恩 德山) 제9책(陰城 淸安 鎭川 木川) 제10책(淸州 兵營 洪州) 제11책(海美 稷山) 제12책(淸風 天安) 제13책(庇仁 鴻山 扶餘 靑陽 定山 石城) 제14책(泰安 溫陽 韓山) 제15책(魯城 恩津 懷德 連山 保寧 水營 鎭岑 薪島) 제16책(丹陽 舒川 舒川浦 大興 沔川) 제17책(燕岐 全義 平澤)의 59개 읍지로 구성되었다. 규장각 해제에 의하면, 1871년(고종 8) 전국적인 읍지 편찬계획으로 충청도의 각 군현에서 상송한 읍지들을 17책으로 성책한 것이다. 각 읍지마다 편찬 연대나 수록 항목이 일정하지 않으나 영・정조대 이후에 편찬된 읍지를 저본으로 순조대에서 고종대 초기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본다. 읍지의 편찬목적이 대원군의 지방재정 파악에 있었기 때문에 재정과 군병(軍兵) 관계항목에 큰 비중을 두어 재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20] 16) 『호서연기읍지』 「창고」의 수록 내용은 상세하고, 「전부・진공・조적・전세・대동・균세」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는 등 상대적으로 간략하다. 두 읍지 모두 1면 10행으로 구성되었다.

[21] 17) 『(호서)읍지』(奎10767)는 1책(덕산, 해미, 면천, 당진, 서산, 태안), 2책(부여, 석성, 임천, 홍산, 한산), 3책(전의, 목천, 천안, 직산), 4책(서천, 비인, 남포, 보령, 결성), 5책(평택, 아산, 온양), 6책(회덕, 영동, 황간, 청산), 7책(노성, 은진, 연산, 진령)으로, 충남지역에 해당하는 31개 군현을 수록하고 있지만 연기는 수록되지 않았다(https://kyudb.snu.ac.kr/2022.08.17. 원문열람). 1책의 첫머리는 ‘開國五百四年正月 日德山郡邑誌’로 시작한다. 이에 최소한 1책은 1895년 음력 1월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2] 18) 항목은 연기군・건치연혁・관직군수・단묘・향교(3-5면), 공해・물산・형승・성지・능침・풍속・성씨・산천(6면), 제언・교량・역원・목장・관방・봉수・사찰・고적(7면), 진보・방리(8-15면), 도로・전부(15-16면), 인물(16-22면)의 순으로 수록하고 있다.

[23] 19) 원문을 다시 구성하면, 1책(공주), 2책(홍주, 결성, 예산, 대흥, 덕산), 3책(직산, 평신), 4책(임천, 서천, 비인, 남포, 보령), 5책(회덕, 아산, 청양, 진령, 홍산, 한산), 6책(해미, 서산, 태안, 면천, 당진, 천안), 7책(아산, 신창, 온양, 평택), 8책(부여, 연산, 석성, 노성, 은진), 9책(목천, 전의, 연기)의 37개 읍지로 구성되어 있다.규장각 해제에서는 제1책(公州), 제2책(扶餘 連山 石城 尼城‚ 恩津) 제3책(木川 全義 燕岐), 제4책(海美 瑞山 泰安 沔川 唐津 天安), 제5책(牙山 新昌 溫陽 平澤), 제6책(洪州 結城 大興 德山 禮山), 제7책(稷山 平薪), 제8책(懷德 定山 靑陽 鎭岑 鴻山 韓山), 제9책(林川 舒川 庇仁 藍浦 保寧)으로 설명하고 있다. 『충청남도읍지』(奎15235) 9책 수록 정보와 서로 뒤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24] 20) 『충남연기현지②』(奎15235-9-3)는 연기현지도(231-232), 강계・건치(233), 군명・관직・단묘・향교・봉암서원・공해(234), 창고・누정・물산・형승・성지(235), 능침・풍속・성씨・산천・제언(236), 교량・역원(237), 목장・관방・봉수・사찰・고적・진보(238), 방리(238-247), 도로・전부・진공(248), 조적・전세・대동・균세(249), 봉름・군액(250), 책판(251), 인물(251-288)의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25] 21) 영조 후반기인 18세기 중엽부터 중앙 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부세 수취・군액 확보 및 호구와 지방행정 등 변화하는 전국 각 고을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전국 읍지 편찬을 추진하였다.1759년(영조 35) 말에는 홍문관에서 읍지의 범례(표준양식)를 완성하여 각 고을에 하달하였다. 홍문관 범례에 의하면, 첫 장에는 채색지도를 수록하였고, 『여지승람』 수록 항목 가운데 궁실・학교・총묘・명환・제영을 제외하고, 방리・도로・관직・공해・제언・창고・목장・관애・한전・수전・진공・조적・전세・대동・균세・봉름・군병 등 17개 항목을 신설하였다. 이 무렵에 편찬한 『여지도서』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지방행정과 재정 상황을 반영한 항목을 신설하고, 시문 수록을 지양한 실용적인 전국 읍지이다. 즉, 『여지도서』는 『(동국)여지승람』 수록 항목을 바탕으로 하지만, 시문 등 일부 항목을 지양하고 제외하면서 행정과 재정 관련 항목을 다수 신설 수록하였다. 『여지도서』에는 1760년(영조 36) 이후 추가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이 책은 1760년 이후에 홍문관에서 성책한 미완의 전국 읍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이재두, 2021, 227).

[26] 22) 『고궁연기읍지』와 『연성지』를 비교해 보면, 첫머리 지도와 수록 항목 등이 거의 모두 동일하다. 다만, 「제언」에서 ‘침산(砧山)제언’의 수심을 『연성지』에서는 ‘3척 5촌’이라 표기한 것을 『고궁연기읍지』 ‘3척’으로 표기한 정도의 매우 미미한 차이가 있다. 이는 필사 과정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사항으로 보인다.『연성지』에서는 ‘효자 본조 홍신민(洪信民)에서 시작하여 金乆祖(김구조)’에 이르는 176명 정도를 나열하고 있으며, 나머지 읍지의 「인물」 항목에서 제시된 인물들이 대부분 동일하지만, 일부 내용은 차이가 있다. 읍지에서 「인물」은 가장 논란이 많았던 항목이기에, 간행 시기를 비정하는데 중요한 항목이 될 수 있다.

[27] 23) 일종의 주제별 지리지라 할 수 있는 『호구총수』는 18세기 후반(1789년) 연기현의 면별 가구 및 인구수를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호구총수』 4책(奎1602-v.9-4)에서 연기현은 충청도가 관할하는 54개 군현 중 48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명칭일람』에는 호구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에 연기현의 호구 정보는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1910)에 수록된 기록으로 대신하였다.

[28] 24) 「방리」를 비롯해 연기읍지에 수록된 각 항목에서 위치와 거리 등의 공간 정보를 표기하는 기준이 되는 ‘관문’이 읍내면 동헌(東軒) 외삼문(外三門)임을 뚜렷하게 표기하고 있다.

[29] 25) 세종시 연서면 행정복지센터의 연혁에서는 연서면이 과거 ‘1909년 군제 개편으로 서면이라 칭함.’으로 소개되고 있다(https://www.sejong.go.kr/yeonseo/2022.4.5.열람). 이를 비롯하여 세종시 지명 등 정보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 많다.

[30] 26) 『충청도연기읍지』는 동이면의 ‘老〻山里’를 ‘老老山里’로 표기하고, 3종 읍지와 마찬가지로 남면에서 ‘백정촌’이 표기되지 않았으며, 북삼면의 ‘원봉리(圓峯里)’를 음이 같은 ‘元峯里’로 표기하였다는 점만 『연성지』와 다르다.

[31] 27) 중세와 근대 한국어 글에서는 점 두 개를 이은 모양인 〻가 주로 같은 글자를 반복할 때 쓰였고, 같은 단어를 반복할 때도 쓰였다(이종덕, 2004, 24-25). 하지만, 이러한 표기는 다른 읍지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본 연구에서는 『연성지』가 나머지 4개 읍지의 저본이 되었다고 추정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노노산리(老〻山里)’ 표기 형식이다. 또한 『연기읍지』가 북삼면과 서면의 과도기에 간행된 읍지로 추정하는 근거이다.

[32] 28) 동일면과 남면의 백정촌은 각기 다른 촌락이다. 『연성지』에 의거하면, 동일면의 백정촌은 ‘관문에서 26리’에 위치하고, 남면의 백정촌은 ‘관문에서 12리’ 거리에 위치하는 촌락이다. 19세기 중엽 연기향교에서 작성한 『향교사례(鄕校事例)』에 의하면, 동일면의 백정촌은 유기(柳器)를, 읍내면의 백정촌은 황육(黃肉) 3근과 육촉(肉燭) 3병을 향교에 상납했다(문광균, 2018, 12에서 재인용). 이에 의하면 백정촌은 동일면과 남면 외 읍내면 등 다른 면에도 분포했던 일종의 자연촌으로 추정된다. 즉, 조선시대 신분제도를 고려하면 ‘백정촌’은 최하층민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다른 동리들과는 위계를 달리하는 곳이기에 방리에 필수적으로 수록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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