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서평을 작성한 2024년 12월 15일 전날인 14일에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2월 3일 22시 23분에 선포한 비상계엄령에 대해 내란혐의를 묻는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2시간 만에 해제한 것에 대해 12월 12일 담화에서 자신은 국회의 결정을 존중하여 계엄을 해제한 것이므로 “2시간짜리 내란이 어디있냐”며 내란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미시적 지리학(micro-geography)의 차원에서 사태를 바라보면 그의 설명과는 다른 분석이 도출된다.
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를 위한 국회 본회의 성립에 필요한 국회의원들이 경찰에 의해 국회출입이 막힌 상황을 순진하게 받아들여 국회 담을 넘지 않았다면, 국회 관계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소화기를 뿌리며 계엄군 진입을 막지 않았다면, 스마트폰을 포함하여 외부와 연결된 수많은 눈을 갖고 있는 시민들이 국회 앞으로 몰려와 감시와 항의가 없었더라면 2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계엄령이 작동했을 수 있다. 결국 12월 7일과 14일, 여의도에 모인 시민들이 형성한 거대한 광장의 정치가 국회를 압박하여 탄핵안도 가결할 수 있었다. 지난 보름의 시간은 정치와 지리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해하는 정치지리학 수업을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온몸으로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정치지리학은 우리의 삶을 설명하고, 전망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핵심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임덕순 교수의 『정치지리학 원론』(법문사, 1997) 출간 이후 20년 가까이 정치지리학 개론서가 없었다는 사실은 정치지리학자인 필자도 민망했다. 핑계를 대자면, 국내 정치지리학자들(대표적으로 박배균, 지상현, 이승욱, 신혜란, 정현주 등)은 개별 주제에 관한 학술논문 집필에 집중해 왔다. 해외 출간된 다양한 정치지리학 개론서들이 있지만 국내 번역서가 적은 이유 중의 하나는 국내 정치지리학자들은 서구 이론을 소개하고, 국내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정・지경학 차원에서 서구 이론・개념들을 비판・재해석하는 작업을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학계와 소통하는 ‘이론의 역수출(theorizing back)’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즉, 정치지리학 분야의 개론서가 없었던 것이지 국내에 누적된 정치지리학 연구성과는 고무적이다. 그러나 축적된 학술성과를 바탕으로 지리학 전공의 후학들을 인도할 개론서 집필로 이어지지 않은 상황에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 시점에서 국내 비판지리학계의 거목 최병두 대구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의 『정치지리학』(한울아카데미, 2024) 출간은 한국 지리학계의 축복이다. 이 짧은 서평에서는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구성이 갖는 의의를 논하는 것이 책의 강점을 드러내는 데 보다 효과적일 거 같다.
첫째, 책의 구성이 국가를 중심에 두었다는 점이다.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정치지리학』에서 4개의 장(제2장 ‘국가의 형성과 영토 결속’, 제3장 ‘국가의 자연환경과 정치’, 제4장 ‘국가의 인문환경과 정치’, 제6장 ‘국가, 지방정부, 시민사회’)이 국가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구 정치지리학 개론서에는 인종, 젠더, 생태 등의 논의가 비중 있게 들어갔다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가 경험한 국가 주도의 발전주의가 생산한 정치지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분석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최병두 교수의 선택은 적절했다고 본다.
『정치지리학』에서도 언급했지만, 세계체제론의 중심-반주변-주변의 수평적 3단 구조를 스케일의 측면에서 재해석한 피터 테일러(Peter Taylor)의 세계경제-국가-지방의 수직적 3단 구조의 틀은 책의 기본 골격에 잘 부합하고 있다. 즉, 수평적 3단 구조의 ‘반주변’과 수직적 3단 구조의 ‘국가’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을 분석하기에 용이하다. 국가 관련 장들에서 영토, 국경, 민족 등의 핵심 정치지리학 개념들을 살피고서 후반부는 국가를 벗어나 (또한 국가와 긴밀히 연관된) 제국주의(제8장), 냉전/탈냉전(제9장), 동아시아/한반도(제10장)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백화점식으로 온갖 내용을 채운 지루한 개론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잘 짜인 구성미를 보임으로써 독자의 이해도 수월히 돕는다.
둘째, 환경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국가와 자연・환경 간의 관계를 강조한 점이다. 최근 출판계에서 지정학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리의 힘』(사이, 2016)과 같은 지리학자가 저술하지 않은 지리학 서적들이 흥행하고 있다. 유사하게 『정치지리학』에서는 환경결정론을 드러낸 대표 저서로 『총・균・쇠』(김영사, 2023)를 비판한다. 물론 국가의 형성, 지속에 있어서 자연・환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환경결정론적 지정학 서사에 스며든 숙명론이 국가와 자연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막는다는 점이 문제이다.
관련하여 흥미로운 지점으로 『정치지리학』은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의 국가의 공간적 성장 법칙과 같은 고전 논의를 주목했다는 점이다(26~27쪽).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 라첼은 독일 나치의 영토 팽창의 논리를 제공한 ‘생활공간(Lebensraum)’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해외 학계에서는 라첼을 인간 너머의 지리학이나 정치생태학적 시각에서 국가를 이해한 선도적 학자로 재조명하고 있다. 제3장을 중심으로 저자는 환경과 무관하게 간주하여 온 국가가 자연・환경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정치지리학이 인문지리학에 속하지만, 자연지리학자들도 국가 연구를 할 수 있다는 학제적 연구 가능성도 넌지시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라첼이 학부에서 자연지리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인류세, 다중 위기의 시대에 정치지리학이 학제적 연구의 중심이 될지도 모른다.
셋째, 해외 정치지리학의 최신 논의를 적절하게 소개한 점이다. 필자는 앞서 동아시아, 한국의 맥락에서 『정치지리학』의 구성이 국가를 중심에 두었다는 점을 강점으로 손꼽았다. 하지만 어떤 독자는 해외 정치지리학 동향이 궁금할 수 있고, 국내 정치지리학 동향과 비교하고 싶을 수 있다. 저자는 제1장 ‘정치지리학의 개념과 발달’에서 근대 정치지리학부터 최근 정치지리학까지 정리하면서 서구 정치지리학 개론서들의 주요 내용도 요약했다. 제1장의 분량은 짧지만, 정치지리학을 처음 공부하는 학부생이나 석사 초년생뿐만 아니라 해당 전공의 소장학자인 필자에게도 연구지형을 조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쩌면 제1장을 집필함으로써 저자는 『정치지리학』에서 젠더, 비인간 등의 주제들을 다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알리바이’를 확보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장 덕분에 나머지 장들은 국가에 오롯이 초점을 두면서 저자만의 유기적 수준이 높은 개론서를 집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지리학 개론서가 최병두 교수의 『정치지리학』만 존재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서 갈증을 느낀 후속세대에게 젠더, 비인간 등의 본서에 빠진 주제들에 초점을 맞춘 정치지리학 개론서의 집필을 자극하는 것도 이 책의 기여일 수 있다. 또한 저자가 희망하듯이, 빠진 주제들을 보완한 『정치지리학』 개정판 출간도 환영이다.
앞서 언급한 강점들을 압도하는 가장 큰 강점은 전공서이지만 대중서처럼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연구와 강의를 통해 쌓인 내공 덕분에 가능한 저술 역량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학술서에 대한 극찬이 아닐까? 학술의 언어를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것은 논문 작성에 익숙한 학자들에게 쉽지 않다. 필자는 『정치지리학』을 읽으면서 지리학자가 쓰지 않은 지리학 서적들에 대중이 열광한다면, 지리학자가 쓴 이 책에 열광하지 못하겠느냐는 반문이 들었다. 정치지리학 학술논문 100편 이상의 성과에 버금가는 최병두 교수의 『정치지리학』 출간을 우리 학계가 자축하고, 지리학도들과 일반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