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April 2020. 181-195
https://doi.org/10.22776/kgs.2020.55.2.181


ABSTRACT


MAIN

  • 1. 서론

  • 2. 아래로부터의 지정학

  •   1) 국내 원폭피해자 연구

  •   2) 지정학의 자기반성과 서발턴 지정학

  •   3) 서발턴 지정학과 중층적 억압 기제

  • 3.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과 한국인 원폭피해자

  • 4. 다층적인 지정학적 억압 기제

  •   1) 가해자가 아닌, 해방자로서의 미국 헤게모니와 동아시아

  •   2) 국가: 피해자의 정체성을 규정하다

  •   3) 피해자 낙인찍기: 커뮤니티 및 몸 스케일

  • 5. 아래로부터의 지정학

  •   1) 개인과 지역사회의 연대

  •   2) 국가의 책임에 대한 문제 제기와 자발적 활동 ‘수첩 소송’

  •   3) 동아시아 지역스케일: 한・일 시민연대

  •   4) 헤게모니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슈의 확장

  • 6. 결론 및 의의

1. 서론

  1. “원폭피해자의 활동을 방해하는 4가지 요소가 있다. 국가(한국), 일본, 미국, 그리고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우리 스스로다” (인터뷰 대상자 A, 2019.01.29.)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한 피해자는 그들의 현실을 드러내고 대책을 호소하는 움직임이 직면하는 다층적 어려움을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잊혀간 원폭피해자 집단의 소외를 강화하는 것이 단지 국가(혹은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등의 국제 관계인 동시에 피해자들 스스로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일례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일본 전(前) 총리는 2018년 10월 경상남도 합천군에 방문해 일본 정부가 한국인 원폭피해자에게 적절한 지원을 하지 못했다며 깊은 유감과 사과를 표했다. 합천은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인해, 혹은 생계를 위해 히로시마로 이주한 주민 다수가 원폭피해자가 되어 돌아와 지내온 곳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약 7만 명의 한국인이 히로시마(広島市)와 나가사키(長崎市)에서 피폭되었으며, 이 중 4만 명이 사망하였고 생존한 3만 명 중 2만 3천 명이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경남발전연구원, 2013). 같은 해 8월 6일에는 일본 NHK 방송국이 합천에서 개최되는 원폭피해자 추모행사를 최초로 방송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국내 언론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으며, 여전히 많은 한국인이 합천군과 원폭의 관계에 대해 모르고 있다.

이러한 모순의 이면에는 원폭의 피해를 70년 이상 숨겨야만 했던 피해자들의 아픔이 존재한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어난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의 항복과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이끌었으나 그와 동시에 수십만 명의 피폭자를 만들어낸 인류 역사의 비극이다. 그러나 이 비극 이면에 피폭자의 최소 10%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반추해보면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원자폭탄 관련 담론은 일본 제국주의의 종말과 함께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현실을 강조하는 담론 위주로 구성돼 있을 뿐이었다.1)

본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존재가 한국 사회에서 왜 잘 알려지지 않았는가? 둘째,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대책을 요구하는 활동은 어떻게 억압되거나 지지되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정치 엘리트가 아닌 지정학의 피해자에 주목하는 최근의 지정학 논의들을 검토하고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관한 선행연구와 자료들을 조사했다. 또한, 2019년 1월 합천군에 거주하는 원폭피해자 1세와 2세, 합천평화의집 관계자, 원폭피해자복지회관 직원 등 관련 인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수행했다.

본 연구는 다층위의 지정학적 구조가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하는 기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원폭피해자의 신체는 과거 국가주의적・제국주의적 지정학의 잔인성을 드러내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 몸(body)에서 시작해 가부장적 가족제도 및 지역사회, 더 나아가 국가와 동아시아의 냉전 구조, 그리고 미국 헤게모니가 원폭피해자들을 억압하는 다층적 구조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원폭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단체를 조직하고 ‘아래로부터의 지정학’을 구성함으로써 억압적 구조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침묵을 강요하는 다층적 억압 기제에 맞서 원폭 투하 사건에 대해 인간의 가치와 윤리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는 개인을 지정학적 ‘자원’으로 바라보았던 고전 지정학에 대한 저항이며, 지정학의 피해자들을 기술하는 최근의 서발턴(subaltern) 지정학의 한 갈래로서 ‘아래로부터의 지정학’이라는 지정학 주체들의 역동적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정학 주체들의 역동성 역시 중층적인 억압 기제로 인해 끊임없이 억압받아왔다. 즉, 피해자들의 지정학에 대한 도전은 가능성과 동시에 한계를 갖는다.

2. 아래로부터의 지정학

1) 국내 원폭피해자 연구

국내 원폭피해자 관련 연구는 피해자 실태조사로 시작되었다. 민간단체의 관심으로 시작된 실태조사는 이후 정부 차원의 조사로 이어졌으며, 다수의 원폭피해자가 생존해있었던 시기에 이루어진 1970년대의 조사는 이후의 후속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초기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민족지적 연구를 통해 국내 원폭피해자의 역사와 생애사, 정부의 대응 등에 포괄적인 연구가 이뤄졌다(이상화, 1995; 이치바 준코, 1999; 이은정, 2019). 최근에는 영화, 소설, 만화 등 문학작품에서 드러난 원폭의 기억과 재현을 분석하는 연구(한정선, 2009; 최명숙, 2010; 정향재, 2011; 오성숙, 2017; 이영화, 2018; 구민아, 2019)와 합천 원폭자료관을 사례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기억 공간화에 대한 연구(남영주, 2018)가 수행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을 역사적 문서의 발굴과 해석으로 밝혀낸 연구(오은정, 2014)와 그 과정에서 한・일시민연대의 형성과 활동 전개과정을 사회적으로 조명한 연구(오은정, 2018; Duro, 2018)가 존재한다. 특히 오은정(2013, 2014, 2018)은 원폭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정부의 책임으로 귀속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인간의 신체가 권력의 의지와 목적에 의해 정의되고 재정의되는 상세한 과정을 밝혀내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의 풍부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내 원폭피해자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활발하지 못하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1990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결성과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과 제소 활동, 여성운동, 언론 등의 담론화 과정을 거쳐 1993년 ‘위안부피해자지원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부 차원의 지원 체계가 마련되고(심영희, 2000), 1990년 이후로 일본 대사관 앞에서 꾸준히 열리고 있는 수요집회 등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온 것과는 사뭇 비교된다. ‘위안부’ 관련 학술적 논의에 대해 이나영(2010)은 ‘위안부’‘존재’를 규명하고자 하는 연구, ‘위안부’ 문제를 보는 ‘관점’과 관련된 연구, 그리고 ‘위안부’ ‘운동’과 관련된 연구 등 세 가지로 확장되어 나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전까지 ‘위안부’ 혹은 ‘정신대’ 문제가 사회적으로 말해져서는 안 될 침해당한 여성의 정조의 문제였다면, ‘위안부’ 관련 법, 정책, 운동이 점차 형성되어가면서 전쟁과 인권, 역사적 책임의 문제로 인식이 변화해간 것이며, 나아가 ‘위안부’ 문제가 포스트/식민국가인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가부장제의 양면적, 모순적 얼굴을 직시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기획으로 확장되어갔다고 주장한다.

2) 지정학의 자기반성과 서발턴 지정학

1980년대 후반 이후 고전지정학의 국가중심주의와 환경결정론적인 지리의 이해와 적용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비판지정학(critical geopolitics)은 지정학 연구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비판지정학에 대한 비판 역시 지속되어왔다. 이 중 비판지정학이 극복하지 못한 남성중심주의와 서구중심주의가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영어권의 백인・남성・엘리트 위주의 시각과 강대국의 대외정책 위주의 담론분석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페미니즘 지정학(feminist geopolitics)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을 거부하며, 몸(body)을 지정학적 분석을 위한 현장(site)으로 상정하였다. 특히 지정학 정책의 결정자인 엘리트가 아닌, 지정학 피해자들의 몸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정치와 공간의 관점에서 불안정하고 투영된 미세한 스케일을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페미니즘 지리학 연구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Fluri, 2015). 특히 몸 스케일의 사용은 어느 한 사건의 모호한 실체를 지정학적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상징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담론분석에 치우친 비판지정학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지정학에서 몸 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구체화한다는 특성으로 인해 지정학의 잔인성을 가장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지며 이때 한 개인의 몸은 공적 공간이 된다. Dowler and Sharp(2001)는 몸 혹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narratives)를 국가와 국제 스케일로 연결함으로써 한 개인의 신체를 공적인 자리로 위치시킨다고 주장한다.

몸에 대한 강조는 타자를 ‘대상’이 아닌 ‘주체’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 피해자들이 그저 소극적이고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다. 지정학적 전통에서 대상으로 다뤄졌던 집단을 주체로 보는 연구로 신혜란(2018)은 영국 런던의 탈북민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흔히 북한체제의 피해자로 그려지는 탈북민이 북한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하지 않으며, 실은 이러한 지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Choi(2014)는 탈북 여성을 인신매매와 성 착취의 ‘무력한 피해자(powerless victim)’로 일반화하고 정형화하는 담론이 탈북 여성의 주체성(agency)을 무시하며, 탈북 여성에 대한 이러한 담론이 북한체제의 잔인성과 인권문제를 강조하기 위한 서구 담론의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Mountz(2004)는 민족국가(nation-state)의 행위에 대해 국가・글로벌 스케일에서부터 몸과 같은 미세한 스케일로 바라보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모호했을 사건의 과정과 관계, 경험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1999년 캐나다의 밀입국 보트 적발 사건을 두고 권력이 담론을 통해 어떻게 정체성을 만들고 밀입국자 개인의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당시 밀입국자들에게 씌워졌던 프레임과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방식은 국가가 자신의 안보 담론을 위해 개인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 외에도 Sparke(1998)는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범 사례를 통해 전쟁 경험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었는지 보였으며, Coomaraswamy(1999)는 유고슬라비아의 전시 성폭행의 전범 행위 인정 사례가 개인의 신체가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의 폭력에서 공적 공간이 되었고 국가가 탄생하고 경계가 발생하는 장소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비판지정학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일련의 비판이 지속되어 왔다(Sidaway, 2012). 이에 Sharp(2011)는 서발턴 지정학(subaltern geopolitics)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것이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안티지정학 논의의 연장선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이들과의 차이점으로 지정학의 연구주제로서 주변부(marginality)의 위치를 언급한다. Sharp(2011)는 비판지정학이 지난 수십년 간 국가, 미디어, 그리고 일상을 통해 국제정치가 구성되는 다양한 방식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O’Tuathail과 Dalby의 국가의 권력/지식 생산이라는 선구적인 연구에서부터 다양한 방식의 지정학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대중문화 지정학(popular geopolitics)이 정치적 엘리트가 만들어내는 선언에서 벗어났고(Dittmer, 2005), 페미니즘 지정학은 전통적인 남성중심주의에 도전했으며(Dowler and Sharp, 2001), 이후 등장한 반지정학(anti-geopolitics)은 국가 정치의 공식적인 구조에 대한 비판이었다(Routledge, 2005). 그러나, Sharp (2011)는 글로벌 정치에 의해 주변부화된 세계의 일부분이 지배적인 정치와 미디어 기구를 통해 재현되는 방식을 다룬 연구는 존재했지만 바로 이 주변부를 역동적 주체로 하는 재현의 정치에 대해서는 고려가 부족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페미니즘 지정학이나 반지정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 의해 주변부화되거나 침묵되는 목소리에 대한 학술적 탐색으로서의 탈식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서발턴 지정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Sharp(2011)는 타자가 단순히 지정학적 분석의 대상이나 서구 지정학 이론의 예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며, 지정학적 구조에 도전하는 주체로서의 서발턴을 그려내고 있다.

3) 서발턴 지정학과 중층적 억압 기제

그러나 서발턴 지정학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지정학 주체로서 서발턴의 역할과 성과를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다. 이는 서발턴의 정치적 행위는 다양한 압력에 맞서는 것이며 이러한 활동이 늘 수월하게 진행될 수는 없는 현실에 기초한다. 특히 서발턴을 침묵하게 하는 정치적 힘이 중층적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 이들의 행위는 심각하게 제약받는다.

그들에게 작용하는 중층적 억압 기제는 지리학에서 상정하는 글로벌, 국가, 커뮤니티, 몸 등 다양한 스케일에서 작동할 수 있다(Brenner, 2004).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상위 스케일이 하위 스케일에 더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Marston et al.(2005)은 스케일은 제대로 정의된 바 없으며, 서로 다른 맥락에서도 다른 의미로 통용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는 즉 몸부터 글로벌까지 이어진 스케일이 마치 독립되고 구분된 공간 단위라는 인식을 거부하며, 이러한 스케일의 수직적 성격에만 집중하는 것은 ‘상이한 규모의 닫힌 공간들이 차곡차곡 포개진 위계’(Brenner, 2004, 9)로 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Marston et al., 2005). 그러나 스케일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지리학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분석 대상으로 하며, 이러한 분석은 특정한 맥락과 스케일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 반론으로 지적되었다(Jonas, 2006). Cox(1998)는 특히 로컬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케일을 중심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로컬을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존관계로 구성된 실체인 ‘의존의 공간(space of dependent)’으로 정의하였으며, 이로 인해 로컬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움직임은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는 이러한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정치적 자원을 동반하는 ‘연대의 공간(space of engagement)’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배균・김동완(2013)은 이에 대해 스케일의 구성에 있어서 “어떤 사회적 현상이 어떠한 공간적 스케일의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현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매우 큰 영향을 줄 수 있고, 상충되는 이해를 가진 행위자들은 그 현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그 현상이 발생하고 작동하는 공간적 스케일을 상이한 방식으로 규정하려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스케일을 규정하는 한편 그 스케일을 뛰어넘으려는 도전이 계속 일어나는 과정으로서 정치적 역동성을 살펴볼 수 있다(박배균・김동완, 2013).

서발턴들이 맞닥뜨리는 억압 기제를 스케일로 바라보는 것이 의미있는 이유는 이것이 억압 기제들의 중층적인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글로벌 헤게모니의 작동에서부터 국가가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언론 매체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재현하는지, 그리고 지역 커뮤니티에서 이뤄지는 일상적 삶에서 마주하는 제약은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서발턴들의 활동은 여러 한계에 부딪힌다. 이러한 억압 기제는 스케일 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상호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본 연구는 기존의 비판지정학적 관심의 대상이 엘리트에만 치중되어 있었음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지정학의 접근법에 주목하여 피해자를 조명하는 서발턴 지정학이 제시하는 함의에 집중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서발턴 지정학의 주체인 지정학의 피해자를 조명하고 지정학의 역동성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지정학 피해자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 지정학 피해자들이 다층적인 억압 기제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아래로부터의 지정학’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지정학의 가장 큰 피해자인 개인에 집중하며, 그들이 상위 스케일에서 이뤄지는 결정에 휘말리는 수동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역동적인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아래로부터의 지정학’은 지정학의 피해자인 개인에 집중하여 그들을 침묵하게 했던 다양한 스케일의 억압 기제를 밝힘으로써, 비극 이면의 지정학적 구조를 드러내고, 그들의 연대를 통한 극복 전략을 보는 개념이다.

3.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과 한국인 원폭피해자

합천은 경상남도 서북부에 위치한 인구 약 4만 명의 군이다. 합천군의 중위연령은 58.8세(통계청, 2019)로 전국평균인 42.8세보다 16세가량 높으며,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약 38%에 달하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보존된 해인사로 잘 알려진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란 별명 또한 갖고 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피폭된 히로시마에 거주하는 조선인 상당수가 합천군 출신이며, 그중 대부분은 귀국한 이후에도 합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히로시마에서는 “거리에서 조선인을 만나도 고향을 물어볼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합천’이라고 답한다(이치바 준코, 2003)”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합천군 출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치바 준코(2003)는 합천 사람들이 히로시마로 이주한 이유는 경제적 요인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2) 일제에 쌀을 수탈당하던 가난한 농업지역 합천은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한번 수해가 나면 큰 피해를 입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수해와 수탈로 인해 생계가 곤란해진 합천 사람들은 당시 군수공업이 집중된 히로시마로 대거 이주했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도로로 인해 부산으로의 접근성이 확보된 와중에 합천 출신 이민 브로커의 존재와 연쇄 이민으로 인해 다수의 합천 주민이 히로시마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3)

일제강점기 히로시마는 군사도시로서 번영했다. 이치바 준코(2003)는 피해자들의 각종 증언을 통해 당시 히로시마에는 군사 관계시설의 증설이나 군수산업으로서 중공업의 발전, 큰 공장에서의 무기생산을 볼 수 있었다고 묘사한다. 그 외에도 히로시마 시내에서는 도로나 수도의 확장공사, 하천의 보수공사와 해안의 매립, 산간부에선 히로시마 시내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댐이나 발전소의 건설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인의 노동력이 대량으로 필요했고 따라서 일자리를 찾아 히로시마로 이주하는 조선인의 수 또한 증가했다(이치바 준코, 2003). 또한,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등 일본 침략전쟁의 호황으로 인해 히로시마의 군수공업은 더욱 성장하였고 값싼 조선인들의 노동력 수요가 늘어났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인해 피폭된 한국인은 약 7만에서 10만 명, 피폭자 중 즉시 사망자는 약 4만에서 5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원폭피해자 실태조사」(1991)에 따르면, 국내 피폭자의 91.5%는 히로시마, 8.5%는 나가사키에서 피폭됐다. 도일연도는 1940-48년의 비율이 44%로 가장 높았고, 도일 사유는 징용・징병에 의해 도일한 비율이 16%, 친지방문・부모나 가족을 따라・기타 등의 사유가 75%였다. 이들 피폭자의 78%는 1945년에 귀국하였으며, 상당수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했고 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에 수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원폭 피해 생존자’는 2018년 8월 등록자 기준 2,283명이며 연령별로는 70대가 63%, 80대가 33%를 차지하고 생존자의 약 70%가 경상도 지역에 거주한다. 이들의 건강보험 진료비 청구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비슷한 연령대의 일반 인구집단과 비교할 때 암이나 희귀난치성질환 등의 유병률이 대체로 높게 나타났고 피해자들의 의료비 본인 부담 수준도 일반인 대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피폭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질병과 의료비 및 치료비 부담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고 사는 데서 오는 정신적 부담감, 유전병을 물려주지 않기 위한 출산의 포기, 삶에 대한 불만족과 사회의 무관심 등이 복합적인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특히 출산하는 경우 자녀세대에 질병이 대물림되어 일상생활의 어려움, 재정적 어려움, 사회적 차별을 경험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하였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8).

4. 다층적인 지정학적 억압 기제

1) 가해자가 아닌, 해방자로서의 미국 헤게모니와 동아시아

1945년 이후 지난 70여년간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겪은 무관심은 여러 층위의 사회적 억압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원폭투하 자체에 대한 통념과 다른 해석이나 비판을 포함해 원폭투하의 정당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한국 사회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폭 사용은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가져온 사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원폭을 사용한 주체인 미국은 원폭피해자를 양산한 ‘가해자’라기 보다는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시킨 ‘해방자’로 여겨졌으며, 이로 인해 미국에 책임을 묻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더하여 한국전쟁과 이어진 냉전 시기 미국이 주도한 전후 동아시아 지배체제가 사실상 “원폭에 대해 거론하거나 상상하는 것을 구조적으로 막은 무의식적 장치”(정근식, 2005: 15)로 기능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반대나 미국 측에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불온한 것으로 여겨졌다(오은정, 2018). 더군다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우방국으로서 미국의 영향력 안에 놓여있던 한국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기까지 하였다. 원폭투하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은 비단 한국 사회 내의 일만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공고해진 미국 헤게모니 속에서 원폭은 전쟁을 지속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었던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종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된 것이라는 담론이 지배적이었다(Walker, 2005).

동아시아 지역의 공고한 냉전체계와 미국 주도의 한국-일본 안보협력 역시 원폭피해에 대한 언급을 막는 구조적인 지형을 제공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그려졌던 분단선은 국제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 그려진 냉전의 단층선이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38선은 휴전선으로 바뀌어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경계선이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한국・일본 동맹과 소련(러시아)・중국・북한 동맹간 경계선으로 작동했다. 냉전의 최전선 한국 사회에서 원폭피해자 지원 등 어떤 방식이든지 ‘사회보장’과 관련된 논의는 공산당의 색채를 띤다고 의심받기도 하였다. 오은정(2018)은 안보 위기와 반공 담론이 지배한 냉전 시기 한국의 정치질서 아래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활동은 그 이후로도 줄곧 일본의 지식인들이나 사회단체와 교류하는 데 있어 엄격하게 제한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구체적으로는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돕는 일본 사람은 공산주의에 물든 이들이라는 색깔이 덧칠되었고, 일본 시민사회운동의 일부 진영에서도 한국 원폭피해자 지원에 반감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과거 일제강점기 식민피지배국과 식민지배국으로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복잡한 관계도 원폭피해자들의 적극적인 행위를 막는 기제가 되었다. 해방 이후, 전후 한국 사회에서 일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한센병 환자들은 사회에서 잊어졌다.4) 이는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잊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양 국가가 본격적으로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를 공식 석상에 올린 것은 1981년 한국 보건사회부(현재 보건복지부)와 일본 후생성(현재 후생노동성)이 1986년까지 5년간 유효한 ‘재한피폭자 도일치료에 관한 합의서’ 체결이 최초였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지원으로, 일본 정부는 일본 내에서의 치료비와 진료비만 부담했고 일본으로 가는 여비와 체류비 등은 한국 정부의 몫이었다. 이마저도 1986년에 종결돼 더 이상의 도일치료는 전무했다(경상남도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조사, 2013). 이후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한・일 정부가 40억 엔에 달하는 지원금 출연에 합의하면서 원폭피해자 복지사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지원금이 전쟁피해에 대한 배상 차원이 아닌 인도주의적 지원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지원금을 한국 정부가 아닌 대한적십자사에 지급, 예산 집행을 위탁했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지원금을 바탕으로 하는 원폭피해자 복지사업의 주체는 정부가 아닌 대한적십자사로 되어있다(국가인권위원회, 2004;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8).

2) 국가: 피해자의 정체성을 규정하다

Taylor(1982)는 스케일에 관한 선구적인 논문에서 국가를 글로벌 스케일과 로컬 스케일의 접합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에 ‘개입’하는 주체로 규정한다. 개입의 목적과 방식에 따라 지정학 주체는 각기 다른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관련 논의에서도 원폭피해자의 정체성은 국가의 개입을 통해 특정 목적을 위해 규정되어 왔다(오은정, 2018).

한국 정부의 원폭피해자 지원은 일본 시민단체 핵병기금지평화건설국민회의의 지원을 받아 1973년 합천 보건소에 설치한 원폭진료소 개설이 시작이었다. 1979년에는 한・일 양국 정부 간 피폭자 도일치료와 한국인 의사의 도일연수, 일본인 의사의 한국 파견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재한 피폭자 의료 원호 합의가 이루어졌다. 1981년에는 정부 간 합의로 한국인 원폭피해자 도일치료를 시작하였으며, 1986년부터는 적십자병원에서 국내 진료를 시작하였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8). 1990년 한・일 정상회담에서 원폭피해자복지기금 조성이 논의되면서 양국 정부가 출연한 자금을 바탕으로 1996년에는 합천에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설립되었다. 한국적십자사는 1986년 보건복지부로부터 재한원폭피해자 국내치료사업을 수탁받았으며, 1996년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설립 이래 현재까지도 운영해오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대한적십자사와 일본 정부가 협약을 맺어 피폭자임을 증명하는 건강수첩의 신청 및 관련 업무를 대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원폭피해자임을 증명하려면 신청서류를 작성하여 주한일본대사관에 접수해 심사를 받아야 했고, 심사 과정에서 일본의 각급 정부는 피해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근거서류를 요청하고 검토하였다. 일련의 지원 중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은 양국 정부가 민감한 외교적 문제를 우회하는 수단이었는데, 이는 적십자사의 기금 출연과 운영이 한국과 일본 모두 직접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의 책임 혹은 보상 및 배상의 책임은 모호해졌고, 피해자는 ‘복지의 대상자’로 규정되었다.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대처는 한일 관계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왔다. 이는 원폭 관련 법제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2017년에 들어서야 ‘한국인원자폭탄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보건복지부 장관 소속의 ‘한국인원자폭탄피해자지원위원회(지원위원회)’를 설치해 피해자에 대한 의료지원 및 기념사업 등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국가 차원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 관련 법안이 제정된 것은 이처럼 최근의 일이다. 이전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체적으로 제정한 조례가 전부였다. 예를 들어, 합천군은 1988년 「원폭피해자 진료소 설치 조례」(제960호)를 개정해 합천군민 중 원폭피해를 입은 자와 그 가족을 위한 진료소를 설치하였고, 2012년에는 「경상남도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 조례」(제3690호)를 제정하였다. 조례는 원폭피해자의 정의, 도지사의 책무, 지원계획 수립, 지원사업, 지원신청, 지원센터 설치, 자료협조 요청, 보조금 관리 등이 이뤄졌다(경남발전연구원, 2013). 원폭피해자 특별법에 대한 논의가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피폭 후 50여 년이 지난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2008년부터 한나라당,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정의당에서 비슷한 내용의 특별법을 발의하였다. 그러나 특별법은 2017년까지 번번이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특별법의 심사과정은 ‘정부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연결되었고, 과거 특별법의 심사과정에서 정부는 국회에 출석해 피해자의 범위, 재정의 부담 등의 이유로 특별법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 제315회 국회(임시회) 제1차 전체회의(2013.04.12.)와 제337회 국회(정기회) 제1차 법인심사소위(2015.10.20.), 제340회 국회(임시회) 제1, 2차 법안심사소위(2016.02.16., 2016.02.17.)의 회의록은 입법의 필요성과 지원대상, 지원위원회의 소속, 피해자 실태조사의 실효성, 기념사업의 종류, 그리고 생활비 지원 등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법안심사 과정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는 일본의 강제점령에 따른 피해로 인정되는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한센병과 다르다는 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경제적인 이유 등 자발적으로 히로시마로 이주했고, 원자폭탄이 터질 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5,6) 위의 지원위원회의 소속 역시 국무총리 산하를 주장하는 측은 원폭피해자 지원이 역사적이면서 반일이라는 상징성을 중요시하였으나7), 업무의 효율성 및 적합성을 주장한 의견에 따라 보건복지부 소속으로 결정되었다.

원폭피해자 자녀와 손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피폭의 유전을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과거 미국과 일본이 실시한 조사에서 원자폭탄으로 입은 피해가 유전된다는 과학적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원폭피해자 2세대 지원 결정 이전에 보건복지부 주도의 실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타협안으로 마무리되었다.8) 그 외 기념사업의 범위와 정도에 있어서 원자폭탄, 비핵・평화박물관 건립 등의 기념사업은 국가의 외교안보적으로 민감한 사항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위령공원 등 추모 공간처럼 너무 광범위한 부분은 현실적으로 조정”(제340회-보건복지소위제2차(2016.02.17))되었고, 추모묘역과 위령탑 등으로 제한되었다. 추가로 피해자(1세)가 받고 있는 월 10만원 가량의 진료보조비 외에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현재 지급되는 의료보조비가 생활 지원에 준하며,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과 중복이 우려된다는 정부 측의 반대로 해당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 제정 과정에서 생활비지원 부분이 논쟁의 대상이 된 이유는 이 법이 가지는 선언적인 의미 때문이었다. 정부는 일본이나 중국 등 원폭피해자가 있는 어느 국가에서도 의료비 이외에 생활비를 지원하는 선례가 없음을 언급하는 한편, 강제징용 대상자나 향후 생길 수 있는 모든 다른 사례에 미칠 파급 효과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선례가 없기 때문에 피해자인 우리나라가 먼저 시행함으로써 가해자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책임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해당 법안의 취지가 공감을 얻어 결국 의료보조비라는 명목을 통해 지급한다는 우회적인 방안이 가결되었다. 즉, 최근의 과거사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은 국회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논의를 복지와 지원의 범주에서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수단으로 변화시켰고, 이러한 변화는 수년간 실패했던 원폭피해자 지원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 되었다.

3) 피해자 낙인찍기: 커뮤니티 및 몸 스케일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만든 것은 냉전 지정학이나 국가의 무관심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역 사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그들 스스로부터 배제당했다. 피폭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질병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기 일쑤였다. 그들이 이상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거나, 혹은 비슷한 아픔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였다.

  1. “결혼해서 37세에 첫 아이를 낳았는데 뇌성마비였어요. 시어머니와 남편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죠. 나중에 둘째를 임신했을 때 첫아들이 그러니까 낳기가 좀 그래서 (지우려고) 병원을 수십 번을 갔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원폭 피해자의 자녀라고 해서 병이 생겼다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세상 밖으로 나와서 원폭 자녀들과 만나고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된거죠” (인터뷰 대상자 C, 2019.01.29)

가까운 가족, 친척 혹은 이웃들에게서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 스스로의 존재를 숨기게 했다. 원폭으로 인한 유전병에 대한 사회적 공포와 차별, 자녀의 유전적 질병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가부장적 사회는 피해자들을 오랫동안 침묵시켰다. 이러한 이유에서 피해자들은 신분을 밝히는 것을 꺼렸으며, 밝힌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1. “현실적인 부분에서 2세 분들은 본인이 2세라는 걸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1세 분들도 그러하시죠. 결혼할 때 원폭피해자임을 밝혔다면 결혼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씀하세요. 가끔 내부 피폭자로 등록하고 싶다는 분들이 오시는데 그분들은 아들딸들 다 여의고 남편이 죽고, 그제서야 커밍아웃을 하는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는 증명하는게 어려우니까 그런 사정을 본다면 1세 분들 중에, 경제적 사정이 괜찮은 분들 중에는 지금도 숨기고 사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터뷰 대상자 D, 2019. 01.29)

피해자 내부에서도 자신이 피폭자임을 공개하는 사람과 공개하지 않는 사람이 나뉘는 이유는 피폭 증상과 유전은 확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피폭자는 피폭 이후에도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지만, 일부는 피폭으로 고통받고 자녀들도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피폭은 강제점령으로 인한 피해로 인정받는 위안부, 강제징용, 한센병과 다르게 뚜렷한 인과관계를 남기지 않는다. 원폭피해자들은 각기 다른 증상과 다른 정도의 피해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피해자임을 ‘과학적으로’ 증명받지 못한 이유다.9)

  1. “모든 2세에게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에요. 먹고 사는게 지장이 없다면 자신이 2세라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 거죠. 일부에서는 ‘원폭 2세 환우회’란 명칭을 쓰는 것도 싫어해요. 원폭 피해자 2세들이 모두 환우냐는 것이죠.” (인터뷰 대상자 C, 2019.01.29)

5. 아래로부터의 지정학

영문도 모른 채 고통에 시달리던 원폭피해자들은 중층적 억압 기제 속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그림 1). 그러나 자신들의 고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자 공감대를 형성하고 연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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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다층위의 지정학적 억압 기제

1) 개인과 지역사회의 연대

합천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합천평화의집-한국원폭2세환우회(합천평화의집)‘이다. 원폭피해자복지회관 등도 존재하나 이는 대한적십자사에서 운영하는 복지회관으로, 1세대 대상의 장기요양시설로 시민단체로서의 성격은 제한적이다.

합천평화의집 설립은 원폭피해자 2세의 경우 한・일 양국 정부에서 어떤 지원도 받고 있지 않으며 마땅한 복지시설 또한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범했다. 실제로 1만 명이 넘는 원폭피해자 2세 중 피폭의 후유증을 물려받아 고통받는 원폭 2세 환우는 약 2,300명에 달하지만(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이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은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쉼터는 물론이고 치료와 요양을 할 수 있는 전문시설이 절실하다는 위기의식이 존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10년 개관한 합천평화의집은 2세를 위한 독립적인 단체이며, 민간기금으로 운영되고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합천평화의집은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치유서비스 등을 비롯하여, 「원폭피해자지원특별법」 제정추진연대 활동과 ‘합천 비핵・평화대회’ 개최, ‘원폭희생자 추모제’ 지원, 그리고 한국인 원폭피해자 홍보캠페인 등의 활동을 지속해왔다. 이는 합천평화의집이 단순히 2세 환우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원폭피해자지원의 법제화 및 반전・비핵화 운동 등으로 그들의 정치적 역동성을 확장하기 위한 조직임을 보여준다. 기타 원폭피해자들의 활동 또한 대부분 합천평화의집에서 주도한 것이며, 대표와 운영자 모두 한국인 원폭피해자 2세라는 점에서 원폭 피해 논의에서 가장 소외된 서발턴의 연대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 속에서 원폭피해자들의 요구는 지방자치단체의 조례 제정, 국회의 특별법 제정 등으로 조금씩이나마 반영되어왔다. 또한, 지역 내 다른 단체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었는데, 지역 소재 대학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에 소장돼있는 오래된 기록물들을 전산화하는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기록물들은 대부분 수기로 작성된 것이기에 오염과 분실의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10)

2) 국가의 책임에 대한 문제 제기와 자발적 활동 ‘수첩 소송’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을 의미하는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마침내 2016년 5월 제정 및 2017년 5월 시행되기까지 원폭피해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합천평화의집을 비롯한 피해자 개인들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했으며, 2019년에는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성락구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은 국회에서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대비되는 정부의 소극적인, 혹은 무관심한 대응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 “이게 16년째 내려오고 있어요. 16년째요. 하나의 법이 16년째 내려온다는 것은 부끄러운 상황이고. (중략) 일본하고 싸우는 것은 원폭피해자협회 개인들이 나가서 싸웠지, 우리 국가에서는 하나도 보조를 해준게 없어요. (중략) 민족을 사랑하는 분이 있으면 나와서 좋게 해줄 것이고, 민족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대로 넘어가겠지요.” (보건복지소위제1차 회의록, 2016.02.16.)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한 대응을 지적했다. 합천평화의집에 소속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인터뷰 대상자 C는 이러한 무관심과 그로 인한 무기력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 “우리가 국회에서 받은 느낌은, 고여있는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거였어요. 물이 순간적으로는 갈라질지라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거죠. (국회) 문을 닫고 나오면 그냥 기존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 힘들죠.” (인터뷰 대상자 C, 2019.01.29.)

지난 수십 년간 원폭피해자들은 보상을 받기 위해 개인적으로 혹은 일본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일본 정부에 소송을 제기했고 성과를 얻었다. 이는 국가의 도움 없이 그들 스스로 이뤄낸 것이며, 실제로 피해자들은 국가의 부재를 강조하며 비판한다.

  1. “1세 어르신 분들도 직접 나서서 일본에 대한 소송과 재판을 수없이 많이 했어요, 지금 그 결과로 한국에서 의료비도 지원받고 약간의 수당을 받고 있는 거죠. 다 우리(피해자)가 직접 한거에요. 정부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인터뷰 대상자 C, 2019.01.29.)

소위 ‘수첩 소송’이라는, 피폭자 건강수첩을 둘러싼 논의에서 정부 역할의 부재는 “정부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위의 발언으로 대표된다. 수첩 소송으로 불리는 일련의 소송들은 원폭피해자 개인이 나서 일본 정부의 행동을 이끈 상징적인 사건이다.

1978년 원폭피해자 손진두 씨는 일본 정부에 원폭생존자 인정 소송을 제기해 한국인들이 원폭피해자임을 일본 정부에 인정받음으로써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는 흔히 “피폭자건강수첩을 받는다”는 말로 표현된다. 그러나 수첩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에서 신청과 발급이 이뤄져야 하고, 일본 내에 1개월 이상 체류해야 한다는 조건과 일본 영토를 벗어나면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존재했다. 이에 2001년 6월 곽귀훈 씨의 ‘피폭자원호법의 평등적용’ 요구 소송은 피폭자건강수첩의 효력을 일본의 시정권 내에 한정한 일본 법안을 문제 삼아 진행됐다. 해당 일본 법안의 위법성이 인정되면서 2003년부터는 수첩이 있다면 일본 밖에 거주해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즉,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임이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해당 판결이 내려진 이후에도 일본 후생성은 피폭자건강수첩의 신청 및 교부 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일본 영역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행정조치를 내놓았다. 이에 제기된 정남수 씨의 소송으로 인해 2008년부터 일본에 직접 가지 않고 피폭자건강수첩을 신청할 수 있게 했다. 신청서류를 작성해 주한일본대사관에 접수하면 일본 정부가 심사한 뒤 일본대사관을 통해 받음으로써 한국에서도 수첩의 신청 및 교부가 가능해진 것이다.

일련의 수첩 소송 과정에 대해 오은정(2014)은 일본의 원폭피해자원호정책의 초국경적 적용은 사실상 일본 전후 내셔널리즘의 핵심 기제 중 하나인 유일 피폭국이라는 국가화된 피해자 서사와 관료제적 행정체계 내에서 생산되고 유지된 주장이 반박되는 재영토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이 소송들은 개별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일본 정부의 행정조치를 문제 삼아 승소한 점에서, 서발턴 지정학 주체의 극복 서사를 보여주며, 동시에 이 사안에서 한국 정부의 부재를 드러낸다.

3) 동아시아 지역스케일: 한・일 시민연대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위한 연대의 움직임은 일본에서 나타났다. 한・일 시민연대라는 초국적 연대는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글로벌 스케일에서의 활동은 아니다. 그렇지만 각 국가의 정부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란 점에서 지역(Regional)으로 분류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피폭자로 인정받는 과정을 연구한 오은정(2018)은 원폭피해자 역사에서 한・일 시민연대는 운동의 중요한 축이자 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일본 사회에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의 대두는 비교적 이른 1950년대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일본 식민지배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느끼는 애착과도 관련 있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히로시마 사람들이 한국인 원폭피해자 치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연구(Duro, 2018; 오은정, 2018)가 뒷받침한다. 한국보다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가졌던 이유에 대해 오은정(2018)은 일본에서 ‘유일피폭국’, 그리고 ‘평화의 초석’으로서 ‘피폭자’라는 담론에 가려져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지 않던 과거 피식민자들과 마주하는 데서 온 충격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했다. 이는 전후 일본이 피해자임을 자처하며 내세웠던 주류적 내셔널리즘의 회피와 직면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들어 일본 시민단체와의 연대가 원폭피해자 활동에 중요한 축으로 작용했다. 오은정(2018)은 1967년 원폭협회 설립 이후 약 20여 년간 한・일간 대외교류와 구호 활동, 시민연대는 주로 인도적 구호와 위로 그리고 의료지원 차원에 한정되었으며, 이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활동의 방식이 구호금이나 인도적 지원이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당시 활동한 일본의 주요 시민단체는 민단(재일한국인민간협회)과 반핵단체 카킨(Kakkin Kaigi), 그리고 히로시마 협회(Hiroshima committee) 등이다(Duro, 2018). 민단은 1963년 한국인 원폭피해자 협회를 설립하여 1965년 한국인원폭피해자조사단을 파견하기 시작했고, 이후 카킨과 연합하여 1968년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치료를 위한 한일협회’를 설립했다. 피폭에 대한 의료적 지식이 없던 당시의 한국 사정과 경제적 제약 등으로 인해 도일치료를 받을 수 없던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을 위해 민단은 1971년부터 의사를 파견하였다. 이는 1973년 합천에 원폭피해자 치료센터가 건립된 이후에도 1995년까지 이뤄졌다. 한편, 히로시마 협회는 1984년 설립되어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을 히로시마의 병원으로 초대해 치료를 제공했다. 이는 2016년 일본 대법원이 “일본 정부는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을 치료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Duro, 2018).

4) 헤게모니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슈의 확장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과거 지정학에 대한 문제 제기는 글로벌 차원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1・2・3세대를 아우르는 대표 4인은 지난 2017년 8월, 대구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조정을 신청하였다. 조정의 대상은 미국정부를 비롯하여 원폭 제조와 투하에 책임을 갖는 듀폰, 보잉, 록하드 마틴 등 미국의 군수기업이며, 배상청구권 협의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촉구하는 취지로 한국 정부가 포함되었다(뉴스민, 2017.09.18.). 조정 내용은 원폭 투하 행위가 위법행위이며 미국의 국가책임임을 확인하고, 원폭 투하에 의한 피폭자 관련 정보와 자료를 공개하고 사죄할 것, 대한민국 정부의 일본과 한국인 원폭피해자 배상청구권 협의 이행 촉구, 한・미 정부와 원폭 관련 기업체들의 한국인 피폭자 실태 진상조사 협력 촉구 및 피해회복 재단 조성과 손해배상 등이다. 과거 우리나라와 일본을 대상으로 법적 소송이 진행되기도 하였으나 2017년 소송은 직접적으로 미국의 책임과 보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큰 변화이다.

이 외에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지난 2015년 미국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발언하고 시위를 벌였다. 2016년에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한국원폭2세환우회 대표 등을 비롯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맞춰 일본을 방문해 추모행사를 벌이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달할 서한을 낭독했으며, 피켓팅 등을 진행했다. 그러나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인터뷰 대상자 A는 이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작용하는 ‘침묵의 기제’를 느꼈다고 밝혔다.

  1.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일본 히로시마 방문에 대응해) “일본을 방문하고자 갔는데 공항에 몇 시간 동안 이유 없이 억류됐다. 일본 정부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억류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인터뷰 대상자 A, 2019.01.29)

합천평화의집을 비롯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매년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을 즈음하여 ‘합천 비핵・평화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는 단지 원폭으로 인한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자리만이 아니다. 이들은 ‘비핵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경상남도의 작은 농촌 지역인 합천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말하는, 글로벌 스케일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행사에는 국내・외 시민단체가 참여하며 영어로 된 자료집과 안내 책자를 배부하고 국제토론회가 열려 한국의 시민운동가뿐만 아니라 외국의 비핵평화활동가 등이 의견을 개진하기도 한다.

이는 스케일 점핑(scale jumping) 전략을 보여준다. 본 행사가 수십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비핵과 평화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제로 합천평화의집에서 활동하는 인터뷰 대상자 C는 본인들의 관심사가 단순히 75년 전 과거에 있지만은 않음을 끊임없이 말하고자 했다.

  1. “저희는 후쿠시마 쓰나미 때 캠페인을 했어요. 모금도 했어요. 우리가 방사능의 피해자로서, 그래서 캠페인과 모금 활동을 해서 전달한 건데 우리 힘을 싣자는 마음이 많았고 또 일본 정부의 반응도 궁금했죠.” (인터뷰 대상자 C, 2019.01.29)>

위에 서술된 원폭 피해자들의 연대와 활동은 스케일에 따라 표 1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서발턴의 대응은 그들을 침묵하게 하였던 억압 기제에 대한 반박으로 나타나며, 이는 다층적인 스케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활동과 전략들이 하나의 스케일에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스케일에 존재하는 억압 기제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과 활동은 해당 스케일에 맞게 구성되고 있다.

표 1. 아래로부터의 지정학: 서발턴들의 대응과 관련 행위자

스케일 내용 관련 행위자
개인(body), 커뮤니티(community) 개인들의 모임 설립 및 지역 사회와 연대 피해자, 지역민, 지역 대학생
국가 및 동아시아 국민국가의 책임에 대한 문제 제기
국가의 부재로 인한 자발적 활동
피해자 커뮤니티, 국회의원
지역(regional) 합천평화의집 단체 설립과 일본 시민단체와 연대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글로벌(global) 헤게모니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
'피해'에서 반핵으로 이슈의 확장 및 공감대 형성
한국과 미국 정부 및 군수기업, 그 외 세계 활동가

6. 결론 및 의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광복 이후 75년이 지날 동안 한국 사회에선 해방의 기폭제로서만 여겨질 뿐, 원폭피해자의 10% 가량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잊혀 왔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의 강제점령으로 인한 위안부, 한센병,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존재가 한국 사회에서 “왜 잘 알려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

본 연구는 다층위의 지정학적 구조가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하는 기제가 되었음을 주장하면서 이 질문에 답한다. 한 개인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은 글로벌 스케일에서부터 지역(regional), 국가,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위자(agent) 간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즉, 한 개인의 신체가 원자폭탄에 의해 피폭된 것, 보호와 원호의 대상이 된 것, 이것의 종류와 성격이 글로벌, 국가, 지역, 커뮤니티 등의 지정학적 주체에 따라 정의되어 왔다. 이는 개인의 신체가 다양한 스케일의 지정학적 주체들이 경합하는 일종의 ‘site’가 된 것으로 이해 가능하다(Marston et al., 2005). 원폭피해자의 경우, 원폭 투하라는 사건의 원인은 2차 세계대전 도중 일어난 강대국 간 파워게임(power game)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 때문에 원폭 투하의 주체인 미국, 그런 미국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어온 주제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스케일에서 한・일 관계 악화의 원인이 될만한 새로운 주제의 등장에 대한 양국의 부담감으로 인해 원폭피해자의 인정 및 구호는 국가 차원이 아닌 민간단체를 통한 우회적인 접근이나 개인의 법률 소송 차원에 머물렀다. 이러한 (상위) 스케일에서의 억압 기제뿐만 아니라, 원폭에 의한 유전병에 대한 사회적 공포와 차별, 자녀의 유전적 질병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가부장적 사회는 피해자들을 오랫동안 침묵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피폭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는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근처에 있던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태내에 있던 자, 혹은 원폭 투하 이후 사체 처리 및 구호 등에 동원된 자까지만 인정된다. ‘피해자’(1세)는 사건 이후 75년이 흐른 오늘날 고령으로 인한 병환과 이동의 어려움 등을 겪고 있다. 이들의 자손인 피해자 2세, 3세는 일반적인 인구사회집단보다 현저히 높은 유병률을 보이고 있으나 유전에 대한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별도의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연유로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내는 집단이 2세이기도 하다.

합천평화의집으로 대표되는 원폭피해자(2세)들은 같은 아픔을 가진 개인들 간의 공유와 연대에서 시작해 다양한 스케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으로 남아있기보다는 단체를 설립하고, 지역 대학과 교류하며 지역-사회와 연대한다. 국회를 방문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의 개입을 촉구하며, 국가의 부재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이러한 투쟁은 공식적인 영역인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국가 및 동아시아에서 한・일 시민단체들의 연대는 국가의 공식적인 개입 이전부터 원폭피해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피해자들은 글로벌 스케일에서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경상남도 합천군이라는 작은 농촌 지역에서 반핵・탈핵이라는 주제로 담론을 확장하고 있다. 합천평화의집으로 대표되는 서발턴, 즉 행위자들의 활동은 개인의 신체에 부과된 피폭이라는 몸 스케일에 국한되지 않으며, 상위 스케일에서 원폭 문제에의 접근하고자 했다. 이것은 서발턴의 새로운 스케일의 구성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서발턴을 단순한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의 행위에 집중하여, 피폭된 한 개인에서 시작해 그들이 어떻게 지정학의 피해자가 되었는지, 지정학적 억압 기제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에 집중하였다. 이것이 본 논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아래로부터의 지정학’이다.

1) 미국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논쟁 즉, 전통주의자들은 핵무기의 사용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고, 수정주의자들은 미국의 냉전 지정학 전략의 일환으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핵무기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Walker, 2005) 참조

2) 물론 징용으로 인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다. 인터뷰에서도 이러한 응답이 있었는데, 이 경우 일제강점기 징용과 취업, 강제성과 자발성에 대한 논쟁점이 다시 등장한다.

3) 기존 연구(이치바 준코, 2003)에서 나타난 이주 브로커의 존재는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1920~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 다수에서 일본으로의 밀항 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항 증명서를 위조하는 등 밀항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던 사람들의 존재도 확인된다.

4) 그러나 이들은 1990년대 이후 사회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한다.

5) “한센인의 경우는 한센인 피해자의 원인행위자가 국가 또는 분명히 규정된 경우에 한정이 되어있고, 원폭피해의 경우에는 정확하게 말씀드린다면 강제징용이라기보다는 원폭 피해가 발생한 당시에 현지에 거주하시던 분들로서 (중략)”라는 정부 측 인사의 발언으로, 피해의 원인이 피폭자들의 자발적인 이주에 있었음을 강조한다(제340회 보건복지소위제2차(2016.02.17.))

6) 이에 대해, 모 위원은 “원폭이든 강제노역이든 또 위안부든지 간에 개인의 불행이라고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역사의 희생자였고 그리고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국가의 책임이다”라고 대응하였다. (제340회 보건복지소위제2차(2016.02.17.))

7) 실제로 이러한 맥락에서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는 국무총리 산하에 있으며, 보건복지부장관 소속의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실무위원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8) 결국 2018년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해 ‘원자폭탄 피해자 현황 및 건강・실태조사’가 실시됐다.

9) 그러나 피폭의 유전성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말과 무색하게 사실로서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존재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9년 8월 실시한 원폭피해자실태조사에 따르면, “원폭피해자와 자녀들은 전반적으로 신체 및 정신적 불건강,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차별 등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원폭 피해자 2세들은 원폭 노출의 유전성에 대해 심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10) 학생들의 봉사활동에서 시작한 이 활동은 2019년 10월부터 합천군과 피해자협회, 그리고 지역대학이 원폭자료관 기록물 전산화 구축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어 공식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경희대학교 2018-특정과제(20182323)와 정부재원(교육부), 한국연구재단한국사회과학연구사업(SSK)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7S1A3A206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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