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0 April 2020. 219-230
https://doi.org/10.22776/kgs.2020.55.2.219

ABSTRACT


MAIN

  • 1. 서론

  • 2. 오횡묵, 일상을 기록하다- 『총쇄록(叢鎖錄)』

  •   1) 오횡묵과 『총쇄록(叢鎖錄)』의 주요 개관

  •   2) 『함안총쇄록(咸安叢鎖錄)』과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에 나타난 오횡묵의 지리학자적 면모

  • 3. 총쇄록을 근거로 분석한 『여재촬요』 집필 과정

  • 4. 결론

1. 서론

19세기는 하루하루가 낯설었던 격변의 시대였다(황인희, 2018). 전통적 세계관이자 지배 이념으로 유학이 가능하던 최후의 시대이면서, 폭압적 근대화에 따른 극적 변화를 앞둔 전환의 시대이기도 한다. 이 시기 조선 지식인들은 내부의 동요와 외부의 위협을 동시에 이겨내야 했다. 병자수호조약(1876)체결에 따른 개항으로 본격적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오게 되고 1882년부터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세계질서로 편입되어 갔다.

조선이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외국 문물에 어둡던 당시 국민이나 지식층의 계몽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었다. 이러한 개화사상의 형성 및 전개과정에서 지리학은 다른 신학문들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남상준, 1993).

갑오개혁(1895, 고종 32)을 통해 관제를 개혁하면서 8아문을 7부로 개편하고 학무아문을 학부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학부대신 밑에 협판(協瓣)을 두고, 그 아래에 실무부서로 대신관방(大臣官房)・학무국・편집국을 두었다. 특히 편집국은 교과・도서의 편집・번역・검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다. 서태열(2013)은 1895년에서 1905년까지의 대한제국시대의 학부에서 편찬 및 출판한 지리 교과서 연구를 통해 1895년에 『사민필지(士民必知)』, 『소학만국지지(小學萬國地誌)』, 『조선지지(朝鮮地誌)』순으로 지리교과서를 간행하였으며, 1896년에는 『여재촬요(與載撮要)』와 『지구약론(地球略論)』을, 1899년에 『대한지지(大韓地誌)』, 1902년에 『중등만국지지(中等萬國地誌)』를 순차적으로 편찬・간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기 지리교과서 중 한글로 된 『사민필지』는 국어학계 뿐만 아니라, 지리학계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찬(1968), 장보웅(1970)의 연구를 시작으로, 김재완(2001)은 헐버트의 생애에서부터 『사민필지』체계와 내용 변화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강철성(2009)은 『사민필지』 중에서 자연지리 영역의 내용을 분석하였고, 권정화(2013)는 『사민필지』를 저술하면서 참고했던 지리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저술과정을 분석하였다. 또한 강창숙(2016)은 『중등만국지지(中等萬國地誌)』의 내용체계와 주요 내용을 분석하고, 근대 지리 지식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지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한자로 된 『여재촬요(與載撮要)』는 지리학사나 지리교육사에 매우 큰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임은진・서태열(2012)의 연구 한편에 불과하다. 그들은 학부에서 발간한 교과서인 『여재촬요(與載撮要)』 1권의 원본인 10권을 중심으로 여재촬요의 저술 목적, 전체적인 내용 체제와 세계지리 내용 분석 등을 통해 여재촬요의 특징을 정리하고, 그 가치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임은진・서태열(2012)서태열(2013)은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권형으로 이루어진 『여재촬요(與載撮要)』를 학부에서 한자본 1책으로 축약하여 간행하였다고 논하고 있다. 이처럼 개화기 지리교과서를 사용된 1권으로 된 『여재촬요(與載撮要)』는 그동안 학부에서 편집 및 출판했다는 논의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직 학부가 발간한 것으로 추정되는 교과서들의 출판 시기나 출판 과정 그리고 내용구성에 대한 의문점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개화기 학부의 지리 교과서 발간에 대한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서태열, 2013).

현재 여재촬요는 10권, 8권, 5권, 1권 등 다양한 권형이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및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부산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크기와 서지 내용이 모두 상이하다.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 지리교과서의 효시라고 평가되고 있는 『여재촬요(與載撮要)』 의 집필・편집・간행 및 출판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나라 지리교육의 근간을 밝히고자 하였다.

오횡묵은 1887년 3월 정선군수를 시작할 때부터, 지도군수를 끝내는 1897년 5월까지의 약 10년간의 기록을 『총쇄록(叢鎖錄)』이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본 연구에서는 오횡묵의 일기인 『총쇄록(叢鎖錄)』에 기록된 『여재촬요(與載撮要)』와 관련된 것을 모두 추출하고, 이를 『여재촬요(與載撮要)』와의 대조 작업 등을 통해 『여재촬요(與載撮要)』집필과 출판 과정을 논하고자 한다.

한자로 된 『총쇄록(叢鎖錄)』과 『여재촬요(與載撮要)』의 해석과 분석을 위해 『총쇄록(叢鎖錄)』과 관련 있는 각 지역 문화원뿐만 아니라, 한문학자와 역사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2. 오횡묵, 일상을 기록하다- 『총쇄록(叢鎖錄)』

1) 오횡묵과 『총쇄록(叢鎖錄)』의 주요 개관

여재촬요의 저자 오횡묵(吳宖默)은 1834년(음력 12월 27일)에 출생하였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규(聖圭), 호는 채원(茝園)이다. 증조는 호조참판, 조부는 호조판서, 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라 전해진다.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고종이 1884년 공상소(工桑所)를 설치하고, 그를 감동낭관(監董郞官)1)으로 임명하였다. 1886년 영남 별향사(別餉使)2)로 파견되어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에게 채원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김현구, 2007; 박수정, 2008).

그는 1887년 3월에 정선군수를 시작으로, 경상도 자인현감(1888.8~1889.4), 경상도 함안 군수(1889.4~1893.2), 경상도 고성부사(1893.2~1895.2)로 임명되었으며, 1895년 2월부터 다시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이 되었다. 그 다음 지도군수(현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면, 1895.1~), 여수군수(현 전라남도 여수시, 1897.5~), 진보군수(현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양군 일대, 1898.8~), 익산군수(현 전라북도 익산시, 1900.2~), 평택군수(현 경기도 평택시, 1901.7~1905.7)등 약 10여 지역의 수령 등을 엮임하고, 1905년 7월 70세가 넘는 나이로 노쇠하여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이규혁, 2003; 김성윤, 2010; 권미희, 2017)(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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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오횡묵의 주요 관직

이처럼 오횡묵은 약 20년 간 국가 관료 및 지방관을 지낸 조선 후기 행정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영호남 지방 수령관을 골고루 겸했다는 점과 갑오개혁 이후에는 신설된 군(郡)인 지도군과 여수군의 군수로 잇달라 임명된 것을 통해 지방 행정가로써의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 지방관의 공식적인 업무는 이른바 ‘수령칠사(守令七事)’가 대표적이라고 할 있는데, 농상성(農桑盛: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戶口增: 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이며 이외에도 관외 업무가 있었다. 관내의 유일한 관원인 수령은 법적으로 막중한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실제로는 해당 지역 출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임기도 단기간에 지나지 않아‘지나가는 나그네’로 인식될 만큼 그들의 통치력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다(김성윤, 2010; 오용원, 2011).

그러나 오횡묵은 행정 능력 면에 있어서 늘 높은 등급을 받았고, 지방 수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정선, 함안 주민들로 부터 수산(繡傘)을 받고 고을 백성들로부터 유임청원을 받기도 하였다(정선총쇄록,1887. 6. 27; 함안총쇄록,1890 .6. 3 등).

오횡묵은 그가 지방 수령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정선현의 1887년 3월부터 지도군수를 끝내는 1897년 5월까지의 약 10년간의 기록을 총쇄록(叢鎖錄)이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총쇄록은 ‘소소하고 자잘한 사실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함안총쇄록(咸安叢鎖錄)』・『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지도총쇄록(智島叢鎖錄)』이 있다.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과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은 각 1책으로 되어있으며, 『함안총쇄록(咸安叢鎖錄)』은 3책,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과 『지도총쇄록(智島叢鎖錄)』은 각각 2책으로 총 9권이다(표 1).

표 1. 『총쇄록(叢鎖錄)』 종류와 저술 기간

책 명 책 수 기간
정선총쇄록 내제 강원도정선군일록 1 1887.3-1888.8 (고종 24년-25년)
자인총쇄록 내제 경상도자인현일록 1 1888.8-1889.4 (고종 25년- 26년)
함안총쇄록 내제 경상도함안군총쇄록 3 1889.3-1893.2 (고종 26년-30년)
고성총쇄록 내제 경상도고성총쇄록 2 1893.1-1894.11 (고종 30년-31년)
지도총쇄록 내제 전라도지도군총쇄록 2 1895.2-1896.5 (고종 32년,光武1년)

『총쇄록』의 체제를 살펴보면, 첫째 장에는 대체로 그 지역의 채색지도(정선․자인․지도 총쇄록이 해당됨)가 있고, 다음 장부터는 각 장의 왼쪽 상단에 월을 표시하여 열람을 편리하도록 하였다.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과 시의 운자 및 대자에는 주사(朱砂)로 방점을 찍었고, 인명에는 0표를, 지명에는 세로선은, 누정대당(樓亭臺堂)등 중요한 건물과 관청의 이름에는 물결무늬선을 표시하였다. 기사, 시, 공문서등은 독자가 구별하기 편하도록 1자 들여쓰기를 했다. 글씨체가 단정하고 일관성 있다(박수정, 2008)(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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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고성총쇄록』 원문 첫페이지

오횡묵은 『총쇄록(叢鎖錄)』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는데, 그 날의 날씨, 개인적인 생각과 사건, 그날 만난 사람과 그에 대한 생각, 서신의 왕래 등 사적인 일상생활 기록도 있으나, 주로 지방행정 전반에 걸친 기록과 관찰, 그리고 지방 행정관으로써의 고민 등을 담고 있다. 또한 공무와 관련한 주요한 전령(傳令)이나 공문 등은 내용을 그대로 기록해 두기도 하였다. 『총쇄록(叢鎖錄)』은 조선 후기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상과 지방사회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관련연구의 기본서로 활용 되고 있다. 『총쇄록(叢鎖錄)』과 관련된 연구로는 조선 후기 지방 행정제도나 지방관에 대한 연구(김성윤, 2010; 오용원, 2011; 권미희, 2017; 이이영 2013), 지방교육연구(박수정, 2008; 이성심, 2017 등), 생활사 연구(손계영, 2010 등)가 있다. 특히 지리학계 연구로는 박규택(2010)이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분석을 통해 오횡묵이 날씨, 농사, 주민의 삶, 지방행정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기록했는 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2) 『함안총쇄록(咸安叢鎖錄)』과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에 나타난 오횡묵의 지리학자적 면모

본 절에서는 『여재촬요』에 대한 기록이 있는 『함안총쇄록』과 『고성총쇄록』을 중심으로 책의 주요 특징과 오횡묵의 지리학자적 면모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장서각 주제 분류에 따르면 다른 총쇄록은 개인-생활-일기로 분류한 반면, 『함안총쇄록』과 『고성총쇄록』은 사부(史部)-지리류(地理類)-방지(方志)로 분류하고 있어 지리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함안총쇄록』은 오횡묵이 함안군수로 부임한 1889부터 1893까지 4년간 군수로써의 공적인 사무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해결하는 과정과 감회를 기록하였고 그와 관련하여 수록한 시(詩)만해도 1100편이 넘는다. 『함안총쇄록』은 3권의 책으로 이루어져서 총쇄록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다(그림 3). 자인현감에서 함안군수로 옮기면서 취임 과정으로 부터 시작하여, 함안군지를 열람하고 그 많은 내용을 자필로 『총쇄록』에 그대로 담았다. 그리고 향리들의 부패와 폐단 철폐, 백성들의 어려움, 세금 문제 등에 대한 공정하고 청렴한 지방관의 태도와 권농, 권학 등의 애민 사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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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함안문화원에서 출판한 국역이 포함된 『함안총쇄록』

책의 가장 앞부분에 함안군 지도가 24×22㎝ 크기로 양면으로 그려져 있는데, 동서남북 방위 표시가 되어 있으며, 가장 중심에 물길을 표시하였고, 지역의 경계, 주요 산, 지명, 봉수와 누정 등을 상세히 표시하였다(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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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함안총쇄록』에 있는 함안군지도

또한 『함안총쇄록』(1892.7.23)에 따르면 『여재촬요』 서문을 완성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본인이 쓴 서문을 그대로 담았다. 오횡묵은 고지리서를 보고 요약하여 갖고 다니면서, 실제 답사를 통해 그 경관을 눈으로 확인하여 관련 내용을 기록하는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는 현재 지리답사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 내가 명승지를 다니는 벽(癖)이 있어서 지리(地理)에 자못 애를 많이 썼다. 평상시에 돌아보고 방황하며 개미 맷돌을 돌 듯이 하였고, 두루 놀면서 낱낱이 본 형세는 아니었으나, 일찍이 망령되게 고인들의 지리서를 본뜨고 거두어 모아서 한 권의 책을 이루어서 몸에 휴대하고 다녔다.... (함안총쇄록, 1892.7.23)

『고성총쇄록』은 오횡묵이 경상남도 고성에 부사(府使)로 발령 받은 1893년 1월 29일부터 1894년 11월 26일까지의 일기이다. 『고성총쇄록』의 구성 체제 역시 다른 총쇄록(그림 4)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성총쇄록』이 작성되었던 시기는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청일전쟁 등의 사건이 일어났던 격변기였다. 따라서 당시 고성지역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갑오개혁(甲午改革)후 대한제국이 탄생하면서 지방에서 이루어진 행정과 당시의 사회상이 잘 나타나있으며, 동학농민운동의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지방관으로서 어떻게 겪어 냈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오횡묵은 부임지인 고성으로 가는 길에서 접하는 각 지역에 대한 기록, 고성읍성에 대한 위치와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 지방 읍지를 전사하여 정리하고, 고성의 곳곳을 답사하면서 기록하였다. 그 중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다음으로 연경루에 오르니 남쪽으로 조그마한 섬이 바다에 떠있음이 바라보였다. 이것이 여요(輿要)에서 이른바 있는 죽도이다. 섬의 남쪽은 바로 바닷길로 배를 타는 항구이다....(고성총쇄록,1893. 2. 28)

표충사에 오르니 이곳은 일찍부터 보고 싶은 곳이다. 오각에 동문으로 나아가 용성천에 이르니 3리 거리 오른 편에 장성촌이 있어 여주 이씨들이 대대로 살던 마을로서 마을 모양이 조금 토실해 보였다. 7리 거리 장내 마을에 손씨촌이 있으며...(중략)...냇물도 안고 돌며 들판도 넓고, 논밭도 비옥하였다. 들가운데 둥그러한 민둥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경주산이다. 전설에 이르되....(고성총쇄록, 1894. 1.23)

또한 고성 지역의 지형이나 여러 마을의 특성 뿐만 아니라, 날씨와 기후 그리고 재해와 관련된 기록도 많다.

남쪽 지방은 본래 낮고 습해서 여름에 더위가 후끈후끈 달아오를 때가 많다....(고성총쇄록,1893. 6. 27)

바람 불고 비도 내리니 오래도록 가문 나머지에 지극히 위로 되었다. 오후에는 바람이 점점 커지어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넘어가며 소리가 천지를 움직이니. 새벽에는 북풍이 땅을 쓸고 찬 기운도 맹렬하였다. 날이 새고 일어나 살펴보니 울타리와 숲이 꺽이며 찢어졌고.....(고성총쇄록, 1893. 7. 22, 23)

박규택(2010)은 『고성총쇄록』분석을 통해 오횡묵은 날씨를 다양한 방식으로 역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논하였다. 또한 날씨를 지속적으로 관찰 기록하고 논농사의 상태를 자연환경과 지역적 조건등과 관련시켜 면밀하게 관찰한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다.

1894년 5월 7일에 드디어 『여재촬요』10권을 장책하고 지은 시(時)에서도 지리학자적 면모가 나타나있다.

젊은 나이에 먼 유람을 지으니(妙齡賦遠遊)
호방한 기운 하늘의 별에 닿았지(豪氣貫墟牛)
삼천리 다 보았으니(覽了三千里)
이백 고을 거의 두루 다녔네(遍幾二百州)
...<중략>...
이에 여지승람을 통해서(爰從輿地載)
그런대로 박학을 이루었네(聊寓木天搜)
....

그는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한 지역을 제대로 이해하고 통치하려면 정확한 자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오횡묵은 ‘지도나 전적을 가지고 정확히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면 천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자인총쇄록』, 1888. 11. 9)’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지도나 지리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총쇄록 일부만 보더라도 그가 지리서를 바탕으로 지역을 이해하고, 직접 답사하고 이를 본인의 관점에서 재정리하는 작업에 매우 익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누적된 지리 지식이 『여재촬요』를 집필하게 되는 주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3. 총쇄록을 근거로 분석한 『여재촬요』 집필 과정

조선 후기,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외국 문물과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국제 정세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보급을 위해서 지리학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 시기의 행정 관료이자 문필가이며 지리학에 해박한 오횡묵은 청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도, 지리서, 자연과학관련 책 및 명나라의 일통지, 동국여지승람, 해국도지, 각 지역의 읍지 등 지리 관련된 책들을 수집하여 중요한 부분들을 추리고 자료들을 정리하여 자신의 철학을 투영하여 『여재촬요』를 편찬하였다(임은진・서태열, 2012).

현재 『여재촬요』는 다양한 권형이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및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부산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은 10권 10책으로 된 장서각 소장본을 포함하여 1책, 2책, 5책, 8책, 10책의 8종의 있고, 그 크기와 서지 내용이 모두 상이하다. 1책으로 된 20종은 장서각 소장본 2종을 제외하면 모두 목판본이다(전혜경, 2007).

10권으로 된 『여재촬요』의 체제는 제1권은 세계지리와 관련된 것이고, 제2권에서 제10권까지는 한국지리로 구성되어있다. 제1권의 1장은 기후와 지형 등의 자연지리 부분으로 42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2 장은 각국정교약설(各國政敎略設), 총론 등의 인문 지리적 접근으로 18면이며, 3장은 세계 6대주 51개국에 대한 지역지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138면으로 분량이 가장 많다.

그리고 제2권은 주로 한양에 대한 것이고, 제3권은 경기도, 제4권은 충청도, 제5권은 전라도, 제6권은 경상도좌도, 제7권은 경상도우도, 제8권은 강원도, 제9권은 평안도, 제10권은 황해도와 함경도로 구성되어있다. 이 내용이 축약된 것이 1권으로 된 『여재촬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대한제국기에 학부(學部)에서 지리교과서로 발간하였다(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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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지리교과서로 사용된 『여재촬요』 1권(全)의 지구전도

임은진・서태열(2012)은 『여재촬요』저술 과정에 대해 함안 군수로 재임하던 시절에 저술하여 1892년 7월에 완성하였고, 1893년 1월부터 목판으로 인각하여 고성부사로 옮겨간 1894년에 10권 10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어 5책, 2책 등으로 축약되었고, 학부에서 1896년에 1권으로 축약하여 지리교과서로 출간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서태열(2013)도 학부에서 『여재촬요』를 한자본 1책으로 축약하여 간행하였다고 논하고 있다. 이처럼 개화기 지리교과서로 사용되었던 1권으로 제작된 『여재촬요』는 그동안 오횡묵이 저술한 책을 학부가 축약하여 간행했다는 논의가 일반적이다.

『여재촬요』 10권과 5권에는 서문이 4개가 있는데 한장석(韓章錫)・이헌영(李헌永)・윤용선(尹容善)・오횡묵(吳宖默)순서로 되어있다. 한장석, 이헌영, 오횡묵은 서문 끝에 계사(癸巳)년 즉 1893년에 썼다고 밝히고 있고, 윤용선은 갑오년인 1894년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책 말미에 서상봉(徐相鳳)・김인길(金寅吉)의 발문이 각각 1894년과 1895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서문과 발문 등의 연도가 다양해서 『여재촬요』자체와 학부에서 발간한 자료만을 가지고 연대를 추정해서 그 출판과정을 밝혀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본 장에서는 오횡묵의 일기인 『총쇄록』에 기록된 『여재촬요』에 대한 기록을 추출하고,이를 『여재촬요』와의 대조 작업 등을 통해 『여재촬요』집필과 출판 과정을 논하고자 한다. (표 2)는 총쇄록에 있는 『여재촬요』와 관련된 기록을 주요 주제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표 2.『총쇄록』에 기록된 『여재촬요』관련 주요 내용

년도 일자(음력) 주요 내용 책 명
1892
(壬辰年, 고종 29)
7.23 여재촬요의 서문이 이루어짐 함안총쇄록
1893
(癸巳年, 고종 30년)
1. 7 경상감사인 이헌영에게 여재촬요를 보여주고 서문을 부탁함 함안총쇄록
2.20 여재촬요를 인각(印刻)하는 일 함안총쇄록
3.26 이헌영에게 서문이 받고, 그 내용을 그대로 기록함. 고성총쇄록
4.12 황학래(黃鶴來)에게 교정을 부탁함. 고성총쇄록
4.24 여재촬요 교정이 끝남. 고성총쇄록
5. 5 아전들이 여재촬요를 베껴 쓰는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식사를 제공함. 고성총쇄록
5.23 여재촬요의 각자(刻字)가 끝남. 고성총쇄록
6.11 김영환이 여재촬요 28질을 찍어 장책함. 고성총쇄록
6.12 판각한 여재촬요를 김춘파(김인길), 배송파와 석성에게 한 벌씩 나누어줌. 고성총쇄록
6.23 한태사(한장석)의 답장과 서문이 도착함. 고성총쇄록
7.10 신덕희에게 한 권으로 된 여재촬요와 어필(御筆) 한 장과 조맹부 글씨 한건을
선물로 줌
고성총쇄록
7.16 여지승람과 여재촬요 등을 가져다가 다시 교정함 고성총쇄록
1894
(甲午年,고종 31)
1. 9 의령(宜寧)의 백지 열덩이를 여재촬요를 인쇄하기 위해 무역해옴. 고성총쇄록
5. 7 여재촬요 열 책이 완성되고 장책이 끝나 황학래로 하여금 제목을 쓰게 함. 고성총쇄록
6.12 여재촬요를 이혜전(李蕙田)에게 교정부탁 고성총쇄록
6.26 혜전을 만나서 회포를 풀고, 감기로 아픈 이해승에게 여재촬요를 선물함 고성총쇄록
1896
(건양 1)
7. 8 영협(永峽)3)에서 여재촬요 40여건을 가지고옴 지도군 총쇄록

『함안총쇄록』에는『여재촬요』와 관련하여 3건의 기록이 있다. 1892년 7월 23일 처음 『여재촬요』가 언급되는데,『여재촬요』서문의 완성되었다고 하였으며, 1893년 1월 7일에 경상감사인 이헌영에게 『여재촬요』를 보여주고 서문을 부탁했고, 1893년 1월 20일 『여재촬요』를 인각하는 일을 16일부터 시작했다는 내용이 있다.

1892년 7월 23일에 오횡묵은 『여재촬요』서문을 완성하였다. 일기에 의하면 어떠한 사람과 『여재촬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서문을 완성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서문 중 주요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대방이 『여재촬요』의 범례가 『여지승람(輿地勝覺)』과 비슷하지만, 내용이 추가되거나 축소된 것도 있고 다른 면도 있다고 보고 그 이유에 대해 묻자, 오횡묵은 『여지승람(輿地勝覺)』을 본 뜬 것이 아니라 본인이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취미가 있어서 지리(地理)를 밝히고자 구석구석 다녔고, 여러 지리서들을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몸에 휴대하고 다녔다고한다. 그는 『여지승람(輿地勝覺)』은 크고 양이 많아 집에다 두어야 하기 때문에 요약해서 다닐 만한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여재촬요』는 그 자체로 한 책을 만든 것이고, 그 후 『여지승람(輿地勝覺)』을 보면서 내용을 수정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또한 지금의 해와 지구도 등에 대한 것이 새롭고 중요하며, 각국(各國)의 정사(政事)와 표(表)와 설(設)이 중요해서 이를 합쳐 한 권으로 만들었고, 도로 만큼 중요한 것이 없어서 이수(里數)를 표시했다고 하였다.

1892년 7월 말에 서문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여재촬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이 시점에 집필이 완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재촬요』의 오횡묵 서문에는‘계사년 청명일(4월 5일)’에 썼다고 기록하고 있어, 4월에 서문 초안을 완성하고 7월까지 다듬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지승람(輿地勝覺)』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리서를 모으고 본인이 답사한 내용을 추가하였다라는 밝히고 있어 『여재촬요』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급변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보가 중요하여 세계지리 관련 내용은 별도의 한권으로 이루어졌다라고 것을 통해 개화기 시대의 지식인층의 지리관을 추론할 수 있다.

1893년 1월 7일에 경상감사인 이헌영에게 『여재촬요』를 보여주고 서문을 부탁한다. 이때 이헌영이 다음과 같이 책에 대하여 평가하였다.‘내가 지리에 대한 책을 본 것이 많으나 혹 한만(汗漫)하고 혹 소략(疏略)하였으니, 이같이 넓음과 요약의 두 가지가 함께 된 것은 있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판적(版籍)의 중요한 보배이다’라고 하였다. 이헌영의 서문은 오횡묵이 부탁한 날에서 3개월 정도 뒤에 도착하게 된다(고성총쇄록, 1894 3. 26). 『여재촬요』를 인각하는 일을 1월 16일 부터 시작하였고, 작업은 관노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각수(刻手)4)는 문기로, 조성로, 이동, 우준이 맡았는데, 그사이에 오횡묵은 계속적으로 편집한 책을 점검하였다. 판각(板刻)하는 것을 보고 대체로 만족하였으나 글자의 형세가 가늘고 시간이 부족하여 많이 어려울 것 같다고 감회를 적고 있으며, 간본(刊本)하는 일은 조장환, 김종석에게 맡겼다고 하였다(함안총쇄록, 1893. 1. 20).

『고성총쇄록』에는 『여재촬요』에 대한 것이 비교적 많이 언급되고 있다. 1893년 3월 26일에 경상감사 이헌영 등을 만나 동학사건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때 서문을 받았는데, 이헌영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좋은 책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한 벌을 그대로 베껴 놓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횡묵은 그 서문을 그대로 『고성총쇄록』에 담았다. 그 중에 최초의 여재촬요가 5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 공무의 여가가 있으면 손에는 책을 놓지 않고, 안으로는 여지승람(輿地勝覺)을 밖으로는 해국도지(海國圖志)를, 크게는 산천인물을, 작게는 도, 리, 마을을 후비어파고, 들추어내어 자료를 모아 5책의 서적을 만들어 내었으니, 이름 하여 ‘여재촬요’라. 무릇 사방 세계의 많고 많은 것들이 한번 눈길을 주면 모두 알 수 있으니, 이른바 그 재주의 크기는 바다와 같고, 마음의 섬세함은 터럭과 같다고 한 말이 틀리지 않다... (고성총쇄록, 1893. 3.26)

그리고 1893. 4.12 에 황학래에게 교정하는 일을 의뢰하였고, 24일에 끝났다. 그 사이에 글을 잘 베껴 쓰는 것을 아전들에게 나누어 맡겼고, 5월 3일에 흰 쌀밥과 고깃국을 끊여 제공하면서 고마움을 전달하였다. 아래 1893년 5월 23일 기록을 보면 5책과 1책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함안 문아기로(文雅耆老)와 이동(李童)이 여재촬요의 각자가 끝난 후에 두 명의 짐꾼을 시켜 판을 짊어지고 오게했다. 판이 모두 43인데 안팎 면에 각자가 도합 83장이다. 이것이 바로 본책 5권 중에서 요약해서 하나로 만든 것이니 요람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대저 유치영(柳致永)을 통해 간절히 인쇄에 올리고자 함으로 찰방 이용순에게 부탁해서 간검(看儉:확인하고 검열함)하고 독려하게 하는 것이다....(고성총쇄록,1893. 5.23)

『여재촬요』 판각과 관련한 중요한 일은 앞에서 언급한 『함안총쇄록』 1893년 1월 20일부터 시작하여, 『고성총쇄록』 1893년 5월 23일, 1893년 6월 11일, 1893년 6월 12일 일기에 나온다. 정리하면 1893년 1월 16일 부터 여재촬요를 인각하는 일을 관노의 방에 시작하였고, 그리고 5월 23일에 각자가 끝난 후, 그리고 6월 11일에 28질을 찍어 장책하였다. 5책과 1책에 대한 것은 6월 12일 일기에 다시 나온다. 5권에 대한 것은 여러 차례 증보가 이루어지고 베끼어 쓰고, 이를 요약한 1권은 판각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판각한 <여재 촬요>는 다만 한 책이니 요약하고 또 요약한 것이다. 여러 차례 증보해서 5권을 만들고 베끼어 세벌을 만들어 김춘파(김인길)5), 배송파와 석성에게 한 벌씩 나누어주었더니, 석성이 사례하여 이르되 ‘ 이 책은 사군(使君)께서 마을을 다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루신 것인데 얻는 사람은 앉아서 받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더구나 문 밖에 나설 필요도 없이 온 세상의 보배로움을 모두 볼 수 있으니 얼마다 다행입니까? 다만 이책은 오래지 않아 온 천하의 공물이 될 것이니....(고성총쇄록, 1983. 6.12)

이를 통해 여재촬요를 한 권으로 요약한 것은 학부가 아니라. 오횡묵 자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게 여재촬요를 선물하였고, 1권의 여재촬요 인쇄도 계속 이어졌다(1894. 1. 9). 1893년 6월 23일에 한장석으로 부터 서문이 도착하여 크게 감동하였고, 한장석의 서문 전체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한장석은 『여재촬요』가 8권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 책은 8편에 지나지 않지만 일통지(一統誌)와 여지승람(輿地勝覺)과 해국도지(海國圖志)가 합하여 하나의 책의 되었으니, 요약되면서도 갖추어지고, 넓어도 번거롭지 않아 천하의 큼과 만국의 무리를 손바닥에서 운전할 수 있도다....(고성총쇄록, 1893. 6.23)

이를 통해 오횡묵은 5권을 계속적으로 증보하여 8권이 만들었고, 이를 한장석에게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오횡묵은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여재촬요를 교정하였다(1893년 7월16일)

그리고 1894년 5월 7일, 여재촬요 10권이 완성하여 그 감회를 일기와 ‘여재촬요십책고성(輿載撮要十冊告成)’이라는 시로 남겼다.

1894년 5월 7일
...<여재촬요> 열책의 완성을 장책까지 끝났으므로 황학래로 하여금 제목을 쓰게 하였다. 이것이 삼년 동안 문서처리 복잡한 속에 편집 교정하느라고 골몰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머리가 세고 눈이 어두어짐도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완성되어 책상 위의 물건이 되었으니 한 번 펼쳐보면 온 천하가 모두 나의 손안에 있도다. 누가 세상일이 노력해도 이루지지 못한다 하는가? 바야흐로 나누어 정서하게 할 때에 어찌 여러 사람들이 병날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안일해서는 원대한 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작은 은혜는 큰 사업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독려만 힘써서 오늘의 마무리를 보게 된 것이다. 비록 당시에 괴로워하던 사람이라도 응당 이미 지나간 괴로움은 잊어버리고 성공만을 기뻐하리라 인하여 한편의 시를 이루었다.

이날의 일기와 시(時)는 오랜 시간 오횡묵 집필, 편집과 교정에 얼마나 노고를 다했는지 알 수 있다.

乙未(1895)년 10월, 김인길은 10권의 책이 완성된 『여재촬요』를 받고 발문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앞의 10권의 여재촬요는 茝人 오횡묵이 집성한 것이다. 이 책은 널리 포괄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자세히, 섬세히 전부를 읽어보면 지구의 큼과 본 지도(책)가 가르치는 핵심을 알 수 있다6).....(『여재촬요』 김인길 발문 중)

특히 김인길의 발문 중에 오횡묵의 여재촬요 1권은 학부에서 인정받아 공무원 시험 과목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896년 학부에서는 『여재촬요』를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판매 공고를 내기 전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재주와 의지를 크게 하여 그 시대의 쓰임에 보탬이 있기를 기다렸으니 그렇게 한 연후에 이 저작이 세상의 가장 훌륭한 식자들(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이와 같을 뿐만이 아니라 또, 요즈음 교육부 산하 학교(學部頖宮)에서는 여재촬요 제 1권을 선택하여 고시공부의 교재(肄業試士)로 삼기도 한다.7) (『여재촬요』 김인길 발문 중)

정리하면, 처음 오횡묵은 1892년 7월 여재촬요를 5권으로 완성하였고, 1893년 2월, 5권을 기초로 하여 1권으로 요약한 여재촬요의 목판 인쇄 작업을 시작하였다. 1893년 6월 이전에 이를 보강하여 8권으로 확장하였으며, 1894년 5월, 최종적으로 10권이 완성된 것으로 판단된다(표 3). 그리고 그 사이에 1권에 대한 수정과 목판 작업은 계속 되었다. 또한 5권을 완성한 후인 1894에 받은 윤용선 서문 등이 추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아 5권 역시 계속적으로 간행되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오횡묵 계속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수정해 가면서 축약과 증보 작업등을 계속했다고 볼 수 있다. 1896년 이후 학부에서 교과서로 발간하게 되면서 1권의 『여재촬요』가 대량으로 인쇄되었다. 결론적으로, 장보웅(1970)이 개화기 지리교과용 도서로 여재촬요에 대해 논하면서 ‘학부에서는 癸巳年에 간행된 오횡묵의 『여재촬요』를 1책으로 축소하여 지리교과용 도서로 간행하였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고, 그 이후 지리학계에서 1책으로 된 『여재촬요』에 대해 학부에서 편집 및 출판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총쇄록을 중심으로 한 여재촬요 출판 과정 분석을 통해 볼 때 오횡묵이 직접 한권을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3. 여재촬요 4종 책의 출판 과정

년 도 권 책 근 거
1892년 5책본 『함안총쇄록』의 1892년 7월 23일 일기
『고성총쇄록』의 1893년 6월 12일 일기
『여재촬요』의 이헌영 서문
1893년 1책의 목판본 『고성총쇄록』의 1893년 5월 23일, 1893년 6월 12일 기록
1893년 8책의 필사본 『여재촬요』의 한장석의 서문
1894년 10책의 필사본 『고성총쇄록』의 1894년 6월 12일 기록
『여재촬요』의 김인길의 발문

4. 결론

조선은 16세기 전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고, 서양문물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그동안 본인들이 지켜왔던 성리학과 서구의 가치관과 문물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혹은 포기하거나 취해가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오횡묵은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시기에 20년 이상 국가 관료 및 지방관을 지내면서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정책을 세우고 실천해야만 했다. 그는 뛰어난 행정 능력과 문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리에 대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지리 지식이 풍부하고 이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이 많았다. 또한 그는 지리학자가 가져야 할 자연경관이나 인문경관에 대한 이해와 해석 능력 역시 매우 뛰어났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 학부에서 출판한 지리교과서인 『여재촬요』의 원저자이기도 하다. 『여재촬요』는 지리교과서로 출판된 1 책 외에도 2책, 5책, 8책, 10책 등 체제와 내용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다양한 권형의 『여재촬요』 집필 및 출판 과정을 분석하고, 특히 교과서로 사용된 1권에 대한 집필・편집・간행 및 출판 등의 과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오횡묵이 1887년 3월부터 1897년 5월까지의 약 10년간의 일기를 『총쇄록』이라는 이름으로 남겼는데, 이 중에 『여재촬요』에 대한 내용을 추출하여 분석하고, 『여재촬요』와의 비교를 통해 다양한 권형의 집필과 출판과정을 검증하였다.

『총쇄록』은 『정선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 5종이 있는데, 개인적인 일상생활과 관련된 내용뿐만 아니라, 지방행정 전반에 걸친 기록과 이와 관련된 고민, 그리고 본인이 직접 지은 시문 등을 담고 있다. 『총쇄록』 일부만 보더라도 그가 지리서를 바탕으로 지역을 이해하고, 직접 답사하고 이를 본인의 관점에서 재정리하는 작업에 매우 익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누적된 지리 지식이 『여재촬요』를 집필하게 되는 주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여재촬요』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과 『여재촬요』의 서문과 발문을 중심으로 비교 및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오횡묵은 가장 먼저 1892년 7월 『여재촬요』를 5권으로 완성하였으며, 이를 요약하여 1권의 책으로 만들고, 1893년 2월에 여재촬요의 목판 인쇄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93년 6월 이전에 이를 보강하여 8권으로 확장하였으며, 1894년 5월에 최종적으로 10권이 완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1권에 대한 수정과 목판 작업은 계속 되었으며, 또한 5책 본 완성 후인 1894에 받은 윤용선 서문 등이 추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아 5책본 역시 계속적으로 간행되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즉 오횡묵 계속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수정해 가면서 축약과 증보 작업등을 계속했다고 볼 수 있다.

1896년 이후 학부에서 교과서로 발간하게 되면서 1권의 여재촬요가 대규모로 발행되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지리교육계에서는 개화기 지리교과서인 1책으로 된 『여재촬요』를 학부에서 편집 및 출판하였다고 보고 있었으나, 본 연구를 통해 오횡묵이 직접 한권을 제작했으며, 이미 1권으로 된 목판본이 대중화되었고, 교과서로 판매되기 전부터 국가 관료를 선정하는 시험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본 연구는 『여재촬요』의 집필과 간행 과정에 집중한 논문으로 『여재촬요』의 제작 동기와 시대적 역할까지는 담아내지 못한 한계가 있다. 또한 『총쇄록』의 양이 너무나 방대하여 『여재촬요』 관련 내용만 추출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추후 오횡묵의 주요 저서를 분석하여 그의 지리학자적 면모와 교육자적 자세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면, 지리학과 지리교육뿐만 아니라 개화기 시대의 우리나라 교육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1) 감동관은 통상 국가의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하는 관원이며, 낭관은 정3품 통훈대부 이하의 당하관을 총칭한다.

2) 별향은 사변에 대비하여 따로 비축한 군량으로 그것을 관리 감독하기 위하여 파견된 관리를 말하는데, 이 무렵 그의 활약이 컸고 추후 지방 수령을 역임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또한 통영 들머리인 원문에 영세물망비(永世不忘碑)가세워졌다(함안총쇄록, 1890. 3. 2).

3) 경상북도 영양군

4) 조각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5)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경백(敬伯) 호는 석성(石醒)이다. 1842년 임인(壬寅)생으로 1882년 임오(壬午)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였다. 오횡묵의 지인 중 한 명으로 오횡묵이 고성(固城)부(府)로 부임하는 1893년 2월부터 퇴임하기 전인 1894년 8월까지 오횡묵과 함께 고성(固城)에 머물렀다. 오횡묵은 김인길의 학문과 성품을 높게 평가하여 고서(古書) 내의 문장에 대한 논의와 시를 짓는 일 및 자신의 개인적, 업무적 고민들에 대한 일 등을 그와 상담하였다. 『고성총쇄록(固城叢瑣錄)』 내에서 오횡묵과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인물이다(김현구, 2007).

6) 右十冊茝人吳令公輯成者 是編也包括廣博記載 纖悉讀之可知爲方輿之大全 圖版之指南

7) 大其才志 而俟其有裨於時措 夫然後 知是編之見重於大方宗匠 有如是且聞近自學部頖宮取其一冊者 用作肄業試士之具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6S1A5A2A0126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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