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1 December 2023. 672-688
https://doi.org/10.22776/kgs.2023.58.6.672

ABSTRACT


MAIN

  • 1. 서론

  • 2. 1959년 국경지도집의 출간 배경과 내용구성

  •   1) 출간배경

  •   2) 내용구성

  •   3)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의 제작과정

  • 3.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의 분석

  •   1) 난외주기의 분석

  •   2) 지명의 분석

  • 4.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서 국경표시의 문제점들

  •   1) 간도협약 ‘석을수’ 표시의 문제

  •   2) 북한 국립출판사 「조선전도」(1954)의 백두산 국경표시 검토

  •   3) 중국 지도출판사 「중화인민공화국괘도」(1958)의 백두산 국경표시 검토

  •   4) 1959년 백두산 지역 국경관리: ‘삼림방화선’과 국경수비대의 ‘순찰노선’

  • 5. 결론

1. 서론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中華人民共和國邊界地圖集)』이 출간되었다. 이 지도집 제작의 배경에는 시기적으로 인도 및 파키스탄과의 국경분쟁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주변국 전체와 관련하여 지도가 제작되었다.

그중 백두산 지역 국경에 관한 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1962~1964년 북한과 진행한 국경협상 직전 중국의 백두산 국경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에 표시된 인식과 달리, 1962~1964년에 걸친 협상을 통하여 중국은 북한과 천지를 가르는 국경선에 합의하였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북한과 중국 사이의 국경이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 북한과 중국 간의 현재의 국경이 중국이 지나치게 양보한 결과라는 논리를 배경으로 하는 논저들이 발표되고 있다(楊昭全・孫玉梅, 1993; 徐德源, 1996, 1997; 刁書仁, 2001, 2003; 馬孟龍, 2009; 陳慧, 2011; 李少鵬, 2019). 이들의 논지를 분석해보면 정해감계 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1959년 국경지도집에 나타난 국경 인식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지도집의 백두산 지역 국경에 관한 지도는 당시 북한의 국경 인식 역시 표시하고 있다. 북한 국립출판사의 1954년판 「조선전도」의 국경을 인용하여 표시한 것인데, 중국의 국경 인식과 확연히 다르고, 해방 이후 남한의 백두산 지역 국경표시와 일부 다른 점이 있다.

이 연구에서는 1959년 이 국경지도집의 백두산 지역 지도에 나타난 국경 인식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첫째, 지도집의 출간 배경과 내용 그리고 백두산 지역 지도의 제작과정을 파악한다.

둘째, 지도집에 수록된 백두산 지역 지도의 난외주기와 지명 등에 대해 분석한다.

셋째, 백두산 지역 지도의 국경표시에 대해 분석한다. 특히, 이 지도가 간도협약의 석을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시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도가 인용하고 있는, 북한과 중국에서 각각 출판된 지도의 국경선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지, 나아가 1959년 당시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 지도에 표시된 내용을 근거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 지도집은 1964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국경협상이 완결되기 전 양측의 입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를 통하여, 1959년 당시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 지역 국경과 관련하여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북한-중국의 국경협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1959년 국경지도집의 출간 배경과 내용구성

1) 출간배경

1949년 10월에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50년대 초까지도 문제가 되는 국경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입장은 이전 정부에 의해 체결된 국경조약에 대해 승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미국의 봉쇄와 고립정책에 대응하는 ‘평화공존’의 외교방침 속에서 국경분쟁으로 인한 주변국들과의 긴장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1955년 11월 중국-미얀마 황궈위안(黃果園) 교전, 신장 이리(伊犁) 지구에서 소련과의 쌍방 경고사격 등을 통해 국경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1958년 4월 25일 중국 외교부는 변강의 성과 자치구에 공문을 보내 국경문제 해결을 위한 자료수집과 연구를 하달하였다(박종철 역, 2012, 39-40).

선즈화와 동제의 연구(沈志華・董潔, 2011)는 지린성 당안관의 자료을 인용하여, 1958년 7월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외교부장 천이(陳毅)의 지시에 따라 국무원이 국경위원회(변계위원회: 邊界委員會)를 설립하였으며, 이 위원회는 국무원 외사판공실의 직속기관으로 외교부・국방부・내무부・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중국과학원 지리연구소・국가측회총국, 민족사무위원회・지도출판사・총참모본부 측회국 및 경비부 등의 책임자로 구성되었다(박종철 역, 2012, 42)고 하였다.

그러나 선즈화와 동제의 연구 결과와 달리. 국경위원회의 성립 이전에 이미 실질적인 조사업무가 게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의 <서언>에 따르면 국경지도편찬위원회의 조직이 국경위원회의 조직과 거의 같은데, 1957년 12월 성립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언> 우리나라의 육상 국경은 2만여 킬로미터에 달하며, 해안선은 1만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국경문제가 매우 많고 상황이 복잡하다. 대부분 지역이 조사와 측량을 거치지 않았으며 근거자료가 매우 적다.

우리나라 국경 상황에 대한 기초적인 파악과 국경문제의 점진적 해결 조건을 만들기 위해, 저우언라이 총리는 한 권의 국경지도집을 편찬하여 당과 국가 영도자들 및 변강의 성 및 자치구의 영도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제공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근거하여, 외교부・국가측회총국・총참모부측회국・중국과학원・민족사무위원회・공안부・내무부 등 단위로부터 파견되어 구성된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 편찬위원회’가 이 공작을 진행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1957년 12월 성립되어, 1959년 6월 공작을 종결하였다.

지도제작의 근거자료는 거의 대부분 변강의 성과 자치구에서 제공한 것이다. 지도를 그릴 때, 가능한 한 정확성을 기하고, 국경의 현재 상황의 요점, 청말 이래의 변화, 쟁점의 소재, 변강지구 지리형세와 민족분포 상황을 명확히 표현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우리들의 수준이 높지 않고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 관계로, 동시에 실지조사와 측량자료가 결핍된 관계로, 허다한 상황이 여전히 한층 더 자세한 조사를 요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도집은 단지 참고용으로만 제공한다. 잘못된 곳이나 타당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지적하여 주고, 동시에 국가측회국으로 서신을 보내 주기 바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편찬위원회(1959년 6월).

이 <서언>을 통하여, 이 지도집이 국경상황에 대한 기초적인 파악을 위한 것이며, 당과 정부의 중앙 및 성급의 지도자들의 참고용으로 만든 것이고, 중앙 정부의 관련 부서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지도제작의 근거자료는 변강의 성과 자치구에서 제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내용구성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은 크기와 축척이 각각 다른 총 60장의 지도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1). 이들 지도는 <총도>, <조선-중국>, <중국-소련과 중국-아프카니스탄>, <중국-몽골>, <중국-파키스탄・인도・네팔・시킴・부탄>, <중국- 미얀마>, <중국-베트남・라오스>, <중국 해양 강역> 등 8개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각 부분의 명칭들에서 모두 ‘중국’이 다른 국가명 앞에 표기되어 있는데, 예외적으로 <조선-중국> 부분은 ‘조선’이 앞에 ‘중국’이 뒤에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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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1959)의 지도 목차

<총도>에는 중국 국경형세 지도, 중국 민족분포 약도 및 민족 통계가 제시되어 있다.

<조선-중국> 부분에는 총론에 해당하는 중국-조선 국경 형세도(축척 1/70만), 압록강 하구 지역(1/15만),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1/15만), 두만강 하구 지역(1/20만)의 지도가 제시되어 있다.

<중국-소련과 중국-아프카니스탄> 부분에는 중국-소련 국경지도, 중국-소련 동단 국경 형세도(부록 중국-제정러시아 동단 국경 변천 약도), 헤이샤쯔 섬(푸위안 삼각주; 부록 만저우리 지역), 중국-소련 서단 국경과 중국-아프카니스탄 국경 형세도(부록 중국-아프카니스탄 국경지도), 파미르 지역 지도가 제시되어 있다.

<중국-몽골> 부분에는 중국-몽골 국경 형세도, 각종 지도들의 중국-몽골 국경 표시 비교도, 중국-몽골 국경 동단 지도, 중국-몽골 국경 중단 지도, 중국-몽골 국경 서단 지도, 칭허・베이타산 지역, 시차허・홍산쥐 지역 지도가 제시되어 있다.

<중국-파키스탄・인도・네팔・시킴・부탄> 부분에는 중국-파키스탄・인도・네팔・시킴・부탄 국경 형세도, 중국-파키스탄 및 중국-인도 서단 국경 지도(부록 스푸치 고개, 화부상 초지 약도, 상・총사 약도), 우러・란충・라바오 지역 약도 등이 제시되어 있다.

<중국-미얀마> 부분에는 중국-미얀마 국경 형세도, 중국-미얀마 국경 민족 분포도, 이쒀라시 고개-디푸산 고개 중국-미얀마 국경 지도, 펜마・구랑・강팡 지역 지도, 멍마오 삼각지역 지도, “1941년 선” 지도, 반홍・반라오 부족 지도, 중국-미얀마 을단 경계확정 루이리현 구간 국경지도, 청조 이래 중국 각종 지도의 중국-미얀마 국경 표시방법 비교 지도, 원・명・청 시기 중국-미얀마 주변 각지 관계 약도 등이 제시되어 있다. 중국-미얀마 국경에 대한 지도가 상세하고 많다는 특징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55년 11월 중국-미얀마 황궈위안(黃果園) 교전 등과 같은 사건 이후 당면 문제로 떠올랐고, 중국이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 해양 강역> 부분에는 중국 해양강역도, 타이완 해협 지역, 주장 강과 홍콩・마카오 지역, 홍콩・주룽 지역, 마카오 지역, 난사군도 지역(부록 남해 여러 섬의 명칭표), 시사군도와 중사군도(부록 동사군도) 등의 지도가 제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1959년 당시 중국이 파악한 국경문제가 망라되어 있는 지도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집은 현재까지도 비공개로 분류되어 있다. 국경에 대한 중국 자신의 인식과 중국이 읽은 상대국의 의도가 담겨진 지도집이라고 할 수 있다.

3)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의 제작과정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에 수록된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長白山(白頭山) 天池 地區)」지도(그림 2)는 <서언>에서 밝힌 바대로 1957년 12월에서 1959년 6월 사이에 그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를 만들기 위한 기초조사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측량과 지도 제작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중국측회사(中國測繪史) 제3권』(2002)에 실려 있는 내용은 이러한 기초조사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소 길지만, 중요한 기록으로 생각되기에 전문을 인용한다.

1957년 8월에서 9월까지 ‘길림성 장백산 여행단’ 일행 40인이 장백산 천지 지역을 실지조사(勘察)하였다. 조사는 우선 신무성에서 시작하여 천지에 이르렀으며, 이곳의 지리형세를 답사하였고, 무두봉 부근의 무명고지에서 서모수(西姆水: 시무수이)와 압록강의 근원을 살펴봤으며, “목비(穆碑)”, “석퇴(石堆)”, “토문(土門)”을 찾았다. 그리고 삼두랑수(三頭浪水: 싼터우랑수이), 화두랑수(花頭浪水: 화터우랑수이), 1313.0 고지 남쪽의 이름 없는 물줄기의 흐름 그리고 소백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두 하천의 상황을 답사하였고, 또한 삼지연으로 가서 “십자계비(十字界碑)”를 찾아봤고, 흑석구(黑石溝: 헤이스거우)로 가서 “토퇴”와 “석문”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4차에 걸쳐 반복하여 신무성에서 측분처(仄墳處: 쩌펀추)의 시무수 및 앙계무소(昻溪姆蘇: 양시무쑤)까지 답사하였고, 포이호리(布爾湖里: 부얼후리)를 살펴보았으며, 동시에 삼두랑수와 화두랑수가 앙계무소와 합쳐지는 곳의 지도를 그렸다. 여행단은 모두 9조의 하천, 3곳의 호수, 5좌의 산봉우리를 답사하였다.

또한 역사유적을 찾았다. 천지 동남방 5킬로미터에서 서쪽으로 대한하(大旱河: 다한허)와 접하고, 동쪽으로 흑석구에 이웃한 곳에서 청 강희 51년(1712년)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할 때 비석을 세웠던 비좌 1개를 발견하였고, 흑석구의 동남 가장자리에서 청 강희 16년(다른 사료에는 13년으로 실려 있다) 내대신(內大臣) 오목눌(吳木訥)이 산에 오르면서 길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석퇴․토퇴를 발견하였다. 석퇴는 높이가 약 1m, 길이가 약 2m, 폭이 1m이고, 모나거나 둥근 형태이며, 퇴(堆) 사이의 거리는 약 30m 내지 50m였다. 토퇴는 둥근 형태를 보였고, 높이 약 1.5m, 둘레 약 24m, 황사토(黃砂土)와 쇄석(碎石)을 연이어 섞어서 만든 것이며, 무더기(堆) 사이의 거리는 약 100m였다. “화(華), 하(夏), 금(金), 탕(湯), 고(固), 하(河), 산(山), 대(帶), 려(礪), 장(長)”이라는 글자가 각각 한 자씩 쓰여있는 10개의 비석(十字界碑)이 서 있다. 토문(土門)은 장백산 동남쪽 흑석구가 발단하는 곳으로부터 몇 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곧 조선이 역사상에서 “土石封堆之下 兩岸對立如門”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이 부근의 하천을 토문강이라 칭하며, 동시에 목비에서 가리키는 토문은 도문(圖們)이 아니라 곧 이 강을 가리킨다고 한다. 청 광서 연간에 이러한 설에 대하여 쌍방의 쟁의가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청은 조선에 대해 항의하였다. 이번 “토문”에 대한 실지조사를 통해, 흑석구 내 여러 곳에 유수의 침식으로 형성된, 양측 토석이 “문”처럼 마주 보고 서 있는 여러 곳을 발견했다(中國測繪史編輯委員會 編, 2002, 617-618).

이 기록은 ‘여행단’이 ‘측량작업’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후 진행될 북한과의 국경협상을 준비하기 위해 ‘여행단’으로 위장한 것으로 보인다. 측량작업과 더불어 국경의 역사와 관련된 각종 유적들을 살펴보고 있다는 점도 이들이 단순한 ‘여행단’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이강원, 2016, 604-605).

이 기록에서 ‘여행단’이 보고하고 있는 내용 중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십자계비는 정해감계(1887년) 감계위원 방랑(方朗)에 의해 설치계획만 문서로 남아 있을 뿐이며, 실제로 설치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실제로 설치되었다 해도, 국경에 대한 합의가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의 설치를 조선이 동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불법적인 것이다). 또한 석퇴가 오목눌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도 오류이다. 이들은 아마도 유건봉의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岡志略)』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957년 8월과 9월에 ‘길림성 여행단’과 같은 조직이 백두산에 들어가서 측량작업을 수행한 것은 국경지도집의 백두산 국경지도의 제작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들의 이러한 활동이 중앙정부 차원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성 정부 차원의 자체적인 자료수집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지도집의 <서언>에서 언급되듯이 근거자료는 성과 자치구에서 제공되었다고 하므로, ‘길림성 여행단’을 통해 수집된 자료들이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들 ‘여행단’이 돌아다닌 구역도 정해감계(1887)의 석을수(일제지형도의 상두랑수) 선에서 끝나고 있는데, 이는 이 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인용된 중국 지도출판사의 국경표시와 일치한다. 이들이 조사한 9조의 하천, 3곳의 호수, 5좌의 산봉우리 목록은 제시되고 있지 않지만, 이들의 조사구역은 오늘날 지명 기준으로 「두만강-석을수-삼지연-이명수」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측량 조직이 ‘여행단’으로 위장하여 백두산 지역의 정계비터로부터 석을수-삼지연-이명수 선까지 조사하였다는 것은 1950년대에 이미 중국과 북한 사이에 백두산 문제가 잠재적 갈등 사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의 분석

1) 난외주기의 분석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1959)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그림 2) 오른쪽 하단에는 ‘설명(說明)’이라는 제목의 난외주기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명> 장백산 주봉 백두봉은 해발 2,743m로, 산정에는 천지라는 이름의 못이 있으며, 면적이 9.8㎢이고, 못 주위는 낭떠러지 절벽이며, 못의 깊이는 약 400m이다.

두만강(도문강)과 압록강 모두 장백산 사면에서 발원한다. 장백산은 또한 만주족과 조선족 사람들 모두에 의해 자기 민족의 발상지로 간주된다. 이 일대의 중국과 조선의 국경은 그간 명확하지 않았으며, 17세기 청나라가 조선을 정복한 뒤부터 두 나라 사이에는 이 일대 국경과 관련한 논쟁이 자주 있었다. 1887년(광서 13년) 중국과 조선 양국 정부는 인원을 파견하여 공동으로 감정하였는데, 논쟁은 결과가 없었다. 논쟁의 초점은 줄곧 압록과 두만 두 강의 발원처 분수령의 위치와 두만강의 정원(正源)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였다.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후인 1909년 중국과 일본 정부가 북경에서 서명한 “간도조약” 제1조의 규정은 “두만강을 중국과 조선 양국의 국경으로 삼으며, 이 강이 발원하는 지역에서는 정계비로부터 석을수까지를 경계로 삼는다.”고 하였다. 조문은 비록 이렇게 규정하였지만, 중국과 조선 사이의 논쟁은 계속 존재하였다.

위에서 서술한 조약 규정과 우리 측의 역사자료에 근거하면, 장백산과 천지 모두는 마땅히 우리나라에 속해야 하지만, 조선 측은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일본에서 출판된 지도는 대개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천지 위쪽에 그리는데, 간도조약과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조선의 현재 지도 그리는 방법 역시 일본의 지도와 일치한다. 항일 전쟁 시기에 김일성 동지가 거느린 조선인민항일유격대가 장백산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견지하였으며,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후 조선인민은 이 지역에 대해 더욱 깊고 두터운 감정을 갖게 되었고, 조선 측은 장백산을 조선인민혁명의 책원지(策源地)라고 칭송하여, 국가・교과서・영화・연극・시・그림에서 모두 때로는 드러내놓고 때로는 암암리에 장백산과 천지가 조선 영토라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지도가 장백산과 천지를 중국 경내로 그린 것에 대하여, 조선 측은 1954년부터 이미 여러 차례 우리에게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제기하였으며, 우리 외교부는 답변하기를, 이 일대의 국경은 양국의 정식 감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양국 정부가 적당한 시기에 협상하여 해결할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다.

<범례>

자주색 선: 중국 지도출판사 1958년 8월판 「중화인민공화국괘도」에 그려진 국경선.

주황색 선: 조선 국립출판사가 1954년 출판한 「조선전도」에 그려진 국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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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1959)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
주: 지도원본에 필자가 추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붉은 실선: 정계비로부터 이어지는 분수계
- 검은 점선: 간도협약 부속지도의 일점쇄선 국경선
- 파란 실선: 현재의 북-중 국경
- 한글 표기: 선에 대한 설명의 번역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대한 이 설명의 첫 번째 문단과 두 번째 문단은 지리적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이며, 세 번째 문단에서 백두산 국경과 관련하여 중국이 파악한 북한의 입장과 정서 그리고 지도상의 국경표시 현황이 기술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중국측 역사자료와 ‘간도협약’에 따르면, 장백산(백두산)과 천지 모두 중국에 속한다.

② 북한 국립출판사의 「조선전도」는 국경을 천지의 위쪽(북쪽)에 그리며, 이는 일본이 그린 지도와 같다.

③ 북한 국립출판사의 「조선전도」의 백두산 국경은 ‘간도협약’과 부합하지 않는다.

④ 북한은 1954년부터 중국의 지도가 백두산과 천지를 중국령으로 그린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⑤ 중국 외교부는 백두산 일대의 국경은 협상을 통해 해결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들에 대해 각각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중국측 자료와 간도협약에 따르면, 장백산(백두산)과 천지 모두 중국에 속한다는 난외주기의 설명: 이 설명은 기본적으로 오류이며, 부분적으로만 사실에 부합한다. 여기서 “우리 측의 역사 자료”(중국측 역사자료)는 문맥상 정해감계(1887)에서 중국측이 주장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해감계에서는 조선측 이중하의 입장과 중국측 방랑의 입장이 대립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결렬되었다. 따라서 결렬된 협상을 국경획정의 역사적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백두산이나 천지가 어느 나라에 귀속되었는가를 따질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분명한 것은 조선측 대표 이중하가 정계비의 북쪽에 있는 천지를 조선의 영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중하는 「압록강-정계비-백두천(흑석구)-모수림하-홍토수-두만강」을 국경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정해감계 당시 중국측이 「두만강-석을수-삼지연-이명수-압록강」을 국경으로 주장하였다고 그린 중국 지도출판사의 지도와 그것을 인용한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지역 지도」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당시 중국측의 국경주장은 「압록강-소백수-소백수 상류 우측 지류-소백산 정상-석을수-두만강」을 잇는 선이었다(이강원, 2022a, 243-248; 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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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정해감계(1887) 결렬시 조선과 청의 국경주장(이강원, 2022a, 248)

② 북한의 지도는 국경을 천지의 위쪽(북쪽)에 그리며, 이는 일본이 그린 지도와 같다는 난외주기의 설명: 당시 북한의 지도가 천지의 위쪽에 국경선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1962~1964년 북‧중 국경협상 완료 전까지 그러한 지도를 출판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남한과 다른 점이다. 남한에서 천지 전체를 우리나라에 귀속된 것으로 지도(지리부도)에 표현하게 된 것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이다(안종욱・김명정, 2017, 186). 남한에서 천지 전체를 둘러싸는 지도를 그린 경우에도 북한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예로, 이찬 등(1984), 그림 4). 1945년 해방으로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상당수의 지도는 천지가 한국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그렸다(예로, 임표(1967), 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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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이찬 등(1984)이 그린 백두산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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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임표(1967)의 백두산 지도
주: 이점쇄선으로 그려진 한국과 중국의 국경이 병사봉(2,744m)과 정계비를 지나며, 천지가 한국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그렸다.

1959년 변계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서 북한의 지도가 백두산 지역 국경을 그리는 방식이 일본의 지도와 같다고 한 것은 아마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1/5만 지형도(그림 6)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조선총독부가 공인한 조선전도들은 간도협약에 따라 정계비를 기준으로 하기에 천지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그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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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일제지형도(1/5만)의 백두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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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최신 조선전도」의 백두산 부분
주: 大阪每日新聞社 編纂, 朝鮮總督府土木課 監修(연도미상).
https://blog.naver.com/green_panda/220714203374. 간도협약에 따라 국경을 그렸다.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일제지형도(1/5만) 백두산 지역 지도에 국경선은 그려져 있지 않지만, 지도로 그려진 구역을 조선의 영토로 착각하기 쉽게 그려져 있다(그림 6). 특히 백두산 최고봉을 ‘대정봉(大正峰)’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천지 전체 역시 조선총독부가 관할하는 구역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는 간도협약(1909)에 따르면, 백두산 정상부와 천지가 조선의 영토에 속하지 않지만, 일제지형도(1/5만)는 간도협약의 주체인 일본인들이 그렸음에도 백두산 정상부와 천지 전체가 마치 조선의 영토에 포함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의 이러한 제도적 표현은 간도협약과 관계없이 해방 후 한국인들이 백두산 정상부와 천지를 자신들의 영토로 인식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확신을 심어주는 작용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지형도(1/5만)는 당시까지 전국을 단위로 그려진 지도 중 가장 상세한 지도였고, 또한 국경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찬 등(1984)의 지도(그림 4)에서처럼, 간도협약 부도에 그려진 국경선을 따라 정계비에 이르고, 다시 천지를 외륜산 능선을 따라 둘러싸도록 그리는 것은 이 일제지형도(1/5만)의 영향으로 추정된다(물론 이찬 등(1984)의 지도에서는 정계비의 위치는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천지의 북쪽 유출구(이도백하) 부근에서 국경선이 북쪽으로 돌출되도록 그린 것은 일제지형도(1/5만)에 천지 외륜산 능선을 따라 그려진 짙은 검은색 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일제지형도는 판매되었고, 북한도 일제지형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도 만주국 정부나 한국전쟁을 통해 이 지형도를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중국의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 제작자들은 북한의 백두산 국경표시가 일본의 지도와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제지형도는 백두산 지역에 국경을 표시하고 있지는 않다.1)

③ 북한이 그린 백두산 국경은 정해감계나 ‘간도협약’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설명: 정해감계는 합의되지 않았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정해감계 당시 중국 측이 주장한 국경이 국경지도집의 백두산 지역 지도에 그려진 것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가 인용하여 표시한 중국 지도출판사의 국경표시도 정해감계에서 청측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정해감계 당시 석을수의 유로가 소백산 정상으로 이어진다는 청측 방랑의 조작이 있었고(이강원, 2022a, 245-247), 백두산 상류 물줄기 중 석을수가 가장 길다는 것도 조작된 것이었다는 점이 밝혀졌기(이강원, 2022a, 241) 때문이다.

④ 북한은 1954년부터 중국의 지도가 백두산과 천지를 중국령으로 그린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는 설명: 이러한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이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1958년 11월 김일성을 수행하여 중국을 방문한 황장엽이 사무실 벽에 걸린 중국지도를 보고 격노하여 김일성에게 보고하였고, 이를 김일성이 저우언라이에게 진지하게 제기한 것에서 국경협상이 시작되었다는 황장엽의 회고(서길수, 2009, 203)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⑤ 중국 외교부가 백두산 일대의 국경은 협상을 통해 해결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설명: 민국시기 지도에서 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표시하는 방법은 대략 3종이 있었다. 첫째, 「압록강-이명수-허항령-삼지연-홍단수-두만강」, 둘째, 「압록강-이명수-허항령-삼지연-석을수-두만강」, 셋째, 간도협약 부도에 따른 「압록강-정계비-홍토수-두만강」 등이 그것이다.2) 이 어느 것도 조선과 청 사이에 합의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고, 1960년대 초 사실상 협상을 통해 해결되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협상”에서 중국이 지나치게 양보하였다고 보고 있다. 본래 협상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천부적 혹은 자연적인 경계(natural boundary)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지명의 분석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는 여러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일부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한자 지명과 상이하게 표기되어 있지만, 주로 음역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부분은 논쟁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여기서는 국경과 관련하여 관건이 되는 지명들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① 목석하(木石河: 무스허): 지도에 천지 동쪽의 두만강 상류 물줄기 중 하나에 표시된 이 지명은 물줄기의 상대적인 위치로 보아 오늘날 신무성수이다. 이 물줄기는 홍토수(紅土水)로 이어져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이 지도에는 이 물줄기를 따라 중국 국경 수비대의 순찰노선이 표시되어 있다. 한편, ‘목석하(木石河)’라는 지명을 처음으로 기록한 것은 유건봉(劉建封)의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岡志略)』인데, 그가 ‘목석하’로 표시한 물줄기는 신민둔(新民屯: 신무성(神武城))3) 바로 남쪽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므로, 오늘날의 신무성수(안심수: 신무수), 곧 이 지도의 목석하와 같은 물줄기이다.

② 서모수(西姆水: 시무수이): 지도의 신무성(神武城) 서쪽에 표시된 서모수는 오늘날 ‘신무수’ 또는 ‘안심수’ 등으로 지도에 표시되는 하천이다. 물줄기가 노출과 복류를 반복하다가 홍토수로 이어진다.

③ 대랑하(大浪河: 다랑허): 지도의 홍토수와 석을수 사이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물줄기에 대랑하라고 표기되어 있다. 오늘날 산천수(삼천수)를 가리킨다. 세 개의 샘에서 발원하는 것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 물줄기를 ‘대랑하’로 처음 표기한 것은 유건봉의 『장백산강강지략』이다.

④ 삼두랑수(三頭浪水: 싼터우랑수이): 대랑하 남쪽의 물줄기에 석을수(石乙水)라 쓰고 괄호에 ‘삼두랑수’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일제지형도(1/5만)에 ‘상도랑수’라고 표기한 것을 음역한 것이다. ‘위에 있는 도랑물’이라는 뜻이다.

⑤ 화두랑수(花頭浪水: 화터우랑수이): 무봉(1,319m)의 서쪽을 흘러 석을수에 합류한 후 두만강에 유입되는 하천을 ‘화두랑수’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일제지형도(1/5만)에서 ‘하도랑수’로 표기된 것을 음역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지형도에서는 무봉의 동쪽을 흐르며, 오늘날 무봉수라고 불리는 물줄기를 하도랑수로 표기하고 있다. ‘아래에 있는 도랑물’이라는 뜻이다.

⑥ 석을수(石乙水: 스이수이): 이 지도에 석을수로 표기된 물줄기는 오늘날 북한에서 석을수라고 부르는 하천과 동일한 하천이다. 이 하천은 정해감계(1887)에서 청측 감계위원 방랑에 의해 두만강의 정원(正源)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간도협약 부도에 표시된 ‘石乙水’는 신무성의 북쪽에 그려져 있으므로 이 하천이 아니며, 오늘날 ‘모수림하(무수린허)’로 불리는 하천이다. 모수림하는 홍토수에 합류하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간도협약 부도의 ‘석을수’는 모수림하-홍토수-두만강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말한다.

이상의 지명 분석을 통해,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표시된 물줄기 명칭 표기는 유건봉의 『장백산강강지략』, 그리고 부분적으로 일제지형도(1/5만)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서 국경표시의 문제점들

1) 간도협약 ‘석을수’ 표시의 문제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는 “1909년 간도조약 부속지도의 선, 일본 지도에 근거(一九0九年間島條約附圖線 根據日本圖繪)”라는 표기와 더불어 붉고 굵은 실선이 석을수(삼두랑수)의 발원지로부터 정계비터까지 연결되어 있다(그림 2).

그러나 간도협약 부속지도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이강원, 2022b, 366-371). 간도협약 부속지도의 ‘석을수’는 오늘날의 홍토수 및 그와 연결된 모수림하(母樹林河: 무수린허)를 가리키며, 부속지도의 ‘홍토수’는 오늘날 약류하(弱流河: 뤄류허)를 가리킨다. 간도협약 부속지도에서 ‘석을수’로 표기된 물줄기는 옛 신무성(舊武城)4)의 북쪽을 지나고, 원지에서 나오는 물과 만나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오늘날 이러한 물줄기로는 모수림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림 8). 따라서 간도협약 부속지도의 의도를 해석하자면, 그림 9의 C선과 같이 표시하는 것이 옳다(이강원, 2022a, 248; 2022b, 374). 다시 말해서, 간도협약 부속지도의 국경표시는 「압록강-정계비-압록강・송화강 분수계-대연지봉-두만강・송화강 분수계-현재의 홍토수 지류 모수림하-홍토수-두만강」이다(이강원, 2022b, 369, 그림 9그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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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간도협약 부도의 백두산 및 두만강 상류지역 부분
주: 日本 外務省 外交史料館 소장(분류번호: C33). 이강원(2022b, 367). 지도의 일점쇄선이 조・청 국경 및 간도의 범위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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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정해감계와 간도협약의 비교
주: 이강원(2022a, 248; 2022b,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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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최근 북한 1/5만 지형도』에 표시한 간도협약 부도 내용
주: 경인문화사(1997)에 표시. 검은 점선은 간도협약 부도의 「압록강-정계비-석을수-두만강」 국경선이며, 붉은 실선은 간도협약 부도의 분수계선(分水界線). 이강원(2022b, 369).

2) 북한 국립출판사 「조선전도」(1954)의 백두산 국경표시 검토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는 1954년 북한의 국립출판사가 그린 국경을 인용하여 주황색 선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림 2에서 천지를 둘러 지나가는 선이 그것이다. 북한의 국립출판사가 이 주황색 선을 국경으로 그린 근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신무성~두만강」 구간에서는 간도협약 부속지도의 흔적이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표시된 국경선에 「두만강-홍토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간도협약 본문은 석을수를 국경으로 삼는다고 하였지만, 그 부속지도에는 오늘날의 홍토수를 ‘석을수’로 표시하였고, 그에 더하여 일점쇄선을 국경으로 표시하고 있다(그림 8). 그런데 일제지형도(1/5만)은 국경선을 표시하지 않고, 홍토수에 ‘석을수’라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간도협약 원문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일제지형도(1/5만)에 표시된 ‘석을수’ 물줄기를 따라(곧 오늘날의 홍토수 물줄기를 따라) 간도협약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제지형도(1/5만)에서 ‘석을수’로 표시된 홍토수의 상류는 오늘날 신무성수라고 불리는 물줄기이며, 신무성(구신무성)을 지난다. 따라서 북한 국립출판사의 「두만강~신무성」 구간의 국경표시는 ‘간도협약을 일제지형도(1/5만)에 입각해서 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구간에 대한 남한 지도들의 국경표시는, 이찬 등(1984, 그림 4)에서 보듯이, 북한의 그것보다 중국쪽으로 더 올라가 있다. 이찬 등(1984)의 지도 역시 이 구간을 간도협약에 의거하여 그린 이전의 지도들을 따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북한과 남한 사이에 간도협약을 지도에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무성으로부터 서쪽으로는 간도협약과 달리 정계비로 이어지지 않고, 거의 직선에 가깝게 대각봉(2170m)을 지나는 선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점은 남한에서 그려진 이찬 등(1984)의 지도와 다른 점이다. 북한의 국립출판사가 「천지~신무성」 구간의 국경을 이렇게 그린 이유에 대해 필자는 다음 두 가지로 추정한다. 첫째, 천지를 북한의 영토로 포함하기 위해 신무성에서 천지 외륜산에 이르는 선을 임의로 그렸을 가능성, 둘째, 김일성의 항일운동 근거지 중 하나였던 ‘대각봉 밀영’을 북한의 영역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렇게 그렸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특히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의 <설명>에 김일성이 거느린 조선인민항일유격대의 항일 투쟁과 그에 대한 북한에서의 ‘두터운 감정’에 대해 언급한 점에 비추어 후자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된다.5)이찬 등(1984, 그림 4)과 임표(1967, 그림 5) 등의 남한의 지도들이 정계비를 경유하는 국경선을 그린 반면, 북한의 지도는 정계비를 경유하지 않고 대각봉을 경유하면서 천지 외륜산 능선에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그러한 추론을 뒷받침한다.

한편, 북한 국립출판사의 주황색 선은 압록강 최상류에서 그 대안을 북한의 영토로 포함시키고 있다(그림 2 참조). 이는 간도협약과 크게 다른 점이다. 간도협약 및 그 부속지도는 「압록강-정계비」를 국경으로 삼기 때문이다. 남한의 지도들은 소축척의 중고등학교 지리부도 정도의 지도들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어떤 근거에 입각해서 그렸는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지도들은 압록강 대안을 포함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 국립출판사가 압록강 최상류 지역 대안 일부를 북한의 영토로 그린 부분은 압록강 본류와 소백수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서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4㎞ 부근 이상의 상류지역이다. 일제지형도(1/5만)에 그려진 압록강 대안지역 중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이 그려져 있고, 북한의 「조선전도」(1954)에 그려진 범위를 포괄한다. 대략 국경선이 압록강 분류에 접할 때까지 대안지역의 압록강 수계 분수령을 따라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그림 11). 따라서 1954년 북한 국립출판사 「조선전도」의 「압록강~천지 외륜산」 구간 국경은 일제지형도(1/5만)에 지도화된 압록강 대안 지역을 근거로 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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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1954년 북한 「조선전도」 국경선과 현재 북‧중 국경선의 비교
주: 1954년 북한 국립출판사 「조선전도」의 국경선과 비교하여 1962~1964년 국경협정으로 북한이 더 확보한 지역(A)와 잃게 된 지역(B). 이 「조선전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북한으로서는 천지의 약 절반도 잃은 것이 된다.

1954년 북한 국립출판사 「조선전도」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해석하자면, 1962~1964년 국경협상에서 북한이 「천지 외륜산~두만강」 구간에서 영토를 더 확보한 것(그림 11의 A)은 이 「조선전도」에 그려진 압록강 대안(그림 11의 B)에 대한 포기의 대가로 해석할 수도 있다. 1962~1964년 당시 국경협상에서 활용된 일제지형도(1/5만) 상에서 볼 때, 북한이 더 확보한 지역과 포기한 지역의 면적이 대략 비슷하기 때문이다. 1959년 중국측 변경순찰노선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관할구역의 경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북한이 확보한 구역은 이보다 더 넓다(그림 11). 그러나 이러한 북한 「조선전도」의 국경표시에 어떤 일관된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1954년 북한 국립출판사 「조선전도」의 백두산 지역 국경선은 기본적으로 일제지형도(1/5만)가 지도로 그린 영역을 기초로 하고, 「천지 외륜산~두만강」 지역에서는 「천지 외륜산-대각봉 밀영-대각봉-신무성-홍토수-두만강」을 잇는 선을 적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대각봉 밀영은 김일성 항일운동의 유적이고, 홍토수는 간도협약의 ‘석을수’이다. 따라서 이 지도의 북한의 국경표시에 일관된 지리적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3) 중국 지도출판사 「중화인민공화국괘도」(1958)의 백두산 국경표시 검토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는 1958년 8월 중국 지도출판사가 출판한 「중화인민공화국괘도」에 그려진 백두산 지역 국경이 표시되어 있다. 그림 2에서 자주색 선으로 그려진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지명으로 표현하자면, 「압록강-이명수(리명수)-허항령-삼지연-석을수-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선이다.

그러나 청측은 조선과의 국경협상에서 이러한 국경을 주장한 적이 없다. 따라서 1958년 중국 지도출판사 「중화인민공화국괘도」의 백두산 지역 국경표시 역시 지리적 역사적 근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러한 오류는 을유감계(1885)에서는 홍단수, 정해감계(1887)에서는 석을수가 주장되었다는 사실만을 단편적으로 듣고 지도에 표시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청측의 국경 주장에서 홍단수와 석을수에 각각 대응하는 압록강 지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주의하지 않은 것이다.

을유감계에서는 백두산 상류 물줄기 중 홍단수가 약 200여 리로 가장 긴 물줄기로 파악되었고, 석을수는 조사되지 않았으며, 홍토산수(홍토수)가 약 100여 리로 조사되었다. 반면, 정해감계에서는 석을수가 153리 325보로 가장 긴 물줄기로, 홍토산수가 147리 290보로 다음, 홍단수가 142리 160보로 가장 짧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들은 모두 오류였다. 현대의 측정에 의하면, 홍단수가 76.5㎞로 가장 길고, 다음으로 석을수가 62.5㎞, 홍토산수가 58.9㎞로 가장 짧다. 청측은 가장 긴 물줄기를 국경으로 삼자고 주장했는데, 그 측정치가 오류였던 것이다. 이렇게 기초적인 측량 수치마저 잘못된 상태로, 정해감계에서 청측이 주장한 국경은 「압록강-소백수-소백수 상류 우측(동쪽) 지류-소백산 정상-석을수-두만강」이었다(이강원, 2022a, 243-248 참조).

그럼에도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중국 지도에서 백두산 지역 국경은 「압록강-이명수(리명수)-허항령-삼지연-석을수-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표시되었고(이강원, 2022b, 381-382),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 역시 이와 같이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 공동감계에서 중국측은 이러한 선을 국경으로 제시하거나 주장한 적이 없다.

4) 1959년 백두산 지역 국경관리: ‘삼림방화선’과 국경수비대의 ‘순찰노선’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는 ‘삼림방화선(森林防火線)’과 ‘현재 우리(중국)측 변경방비 순찰선(目前我方邊防巡邏線)’이 표기되어 있다. 전자는 지도의 두만강 대안 「적봉(赤峯)-장산령(長山嶺)」 구간과 무두봉(無頭峰) 서북쪽에서 발원하는 「목석하(木石河)-서모수(西姆水)-신무성(神武城)-홍토수(紅土水)」 구간에 각각 쓰여 있다. 후자는 무두봉(無頭峰) 북쪽에서 발원하는 「목석하(木石河)-서모수(西姆水)-신무성(神武城)-홍토수(紅土水)」 구간에만 쓰여 있다.

필자가 ‘삼림방화선’과 ‘변경 방비 순찰선’에 주목하는 것은 이 두 가지 표기가 1959년 당시 백두산 지역의 실질적 관할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표기는 「목석하(신무성수)-서모수(신무성수: 안신무수: 안심수)-홍토수-두만강」을 잇는 선이다. 이 선은 1909년 간도협약 부속지도의 국경선(그림 8)보다 약간 남쪽으로 내려와 있으며, 신무성(구신무성)이 중국측 관할구역에 속하도록 그려져 있다. 이는 간도협약이 중국측에 의해 이와 같이 해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측의 변경 방비 순찰노선은 북한측에 의해서도 용인된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북한 국립출판사 「조선전도」에 그려진 국경선의 이 구간이 중국측의 ‘순찰노선’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간도협약 부속지도(그림 8)에 표시된 국경선은 일점쇄선이다. 이 일점 쇄선은 두만강에서 출발하여 ‘석을수’로 표기된 물줄기를 따라가다가 두만강 수계와 송화강 수계 사이의 분수령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간도협약 부속지도의 국경을 오늘날의 지도로 표시하면 그림 10과 같다. 그런데 1954년 북한 국립출판사 지도의 국경선과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표시된 중국측 변경 방비 순찰선은 「두만강-홍토수-신무성」을 지난다.

1909년 간도협약 부속지도의 국경선과 1959년 중국측 변경 방비 순찰선의 차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지형도(1/5만)의 영향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과 일본제국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일제지형도 백두산 지역 지도는 ‘가제판(假製版)’이라는 이름을 달고 1933년에 출판되었다. 이 지도에는 홍토수를 ‘석을수’로 표기하고 있다. 홍토수는 신무성을 지나며, 그 상류는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목석하(木石河)’로 표기된 물줄기이다. 따라서 중국측의 순찰노선은 일제지형도(1/5만)에 따라서 해석된 간도협약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측의 ‘순찰노선’ 표시는 1959년 당시 북한과 중국 사이의 실질적 관할구역 경계를 의미하는데, 북한 국립출판사의 1954년 지도의 국경선에서 「두만강~신무성」 구간은 중국측 순찰노선과 일치한다. 따라서 1950년대 북한과 중국의 백두산 지역 국경 인식에는 간도협약과 일제지형도(1/5만)의 영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압록강 최상류에는 중국측의 ‘삼림방화선’ 혹은 ‘변경 방비 순찰선’과 같은 표기가 없으며, 도로 역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이 지역이 급경사의 협곡 등으로 인해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북한 국립출판사 「조선전도」와 1958년 중국 지도출판사 「중화인민공화국괘도」의 백두산 지역 국경표시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두만강 상류의 실질적인 관할은 간도협약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1959년 국경지도집의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표시된 중국측 ‘삼림방화선’과 ‘순찰노선’을 통해 알 수 있다.

5. 결론

이상에서 1959년 『중화인만공화국 국경지도집』에 실린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당시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 지역 국경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논의의 결과를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압록강 본류-(소백수 합류점 부근 이상에서는) 압록강 대안의 일부-천지 외륜산-대각봉-신무성-홍토수(간도협약의 ‘석을수’)-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경은 역사적으로 조・청 국경협상에서 조선측에 의해 주장된 적이 없다. 일본에 의해 체결된 간도협약의 국경과도 다르다. 북한이 이러한 국경을 주장한 것에는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일제지형도(1/5만)의 영향, 간도협약의 영향, 그리고 김일성의 항일운동 근거지 중의 하나였던 대각봉 밀영 등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중국은 「압록강-이명수(리명수)-허항령-삼지연-석을수-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경은 역사적으로 조・청 국경협상에서 중국측에 의해 주장된 적이 없다. 일본에 의해 체결된 간도협약의 국경과도 다르다. 중국이 이러한 국경을 지도에 표시한 것에는 정해감계(1887)에서 청측이 주장한 국경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중국은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지도에 이러한 국경선을 일관되게 표시하였다.

셋째, 백두산 지역 국경 인식에 있어서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중국은 두만강 상류 지역에서 간도협약(1909)에 입각하여 잠정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지도에 표시된 중국측의 ‘삼림방화선’과 ‘변경 방비 순찰노선’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넷째, 지도에 간도협약 부속지도에 의한 국경선으로 표시된 선은 간도협약 부속지도를 잘못 해석한 오류이며, 당시 자신들의 ‘삼림방화선’이나 ‘순찰노선’이 일제지형도(1/5만)에 입각하여 해석된 간도협약의 국경선이라는 것을 1959년의 지도편찬자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분석결과를 통하여, 1959년 당시까지도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 국경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심스러운 추정이지만, 1962~1964년의 국경협상에서도 양측은 임진정계(1712)나 을유감계(1885), 정해감계(1887), 심지어 간도협약(1909)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꾸어 말하자면, 1962~1964년의 북・중 국경협상 직전 양측의 입장은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에 실린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에 그려진 것이 최종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지도집』에 실린 「장백산(백두산) 천지 지역」 지도는 국무원의 비준을 거친 국경지도편찬위원회에 의해 편찬되었으므로 매우 높은 수준의 권위를 갖는 지도이다. 그럼에도 이 지도에 표시된 정해감계나 간도협약의 내용은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는 이 지도의 ‘권위’로 인해 확대 재생산되었는데, 이 지도 출판 이후 정해감계에서 청측이 주장한 국경을 이 지도에 그려진 것과 같이 설명하거나, 정계비 이비설 주장하는 것, 나아가 간도협약의 국경을 이 지도와 같이 그리는 것에서 그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동북아역사재단의 기획연구과제로 수행한 결과임(NAHF-2023-기획연구-10).

[1] 1) 그럼에도 이 일제지형도가 홍토수를 석을수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간도협약이 반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2)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는 그중에서도 첫 번째 방식을 사용하였다(이강원, 2022b).

[3] 3) 이 지명은 을유감계와 정해감계에서는 ‘신무충(申武忠)’으로, 유건봉의 『장백산강강지략』에서는 ‘신민둔(新民屯)’으로 표기되었다. 일제지형도(1/5만)에서부터 ‘신무성(神武城)’으로 표기되었다. 지형도를 제작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제1대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에서 글자를 따온 것이 분명하므로, 한자로서 ‘神武城(신무성)’은 친일지명이다. 북한에서는 ‘신무성(新武城)’으로 쓰고 있다(조선 과학백과사전출판사, 한국 평화문제연구소 공동편찬, 2005, 475).

[4] 4) 간도협약에 표시된 신무성(神武城)은 오늘날 구무성(舊武城)으로 불린다(조선 과학백과사전출판사, 한국 평화문제연구소 공동편찬 2005, 476). 새로운 신무성은 그보다 남쪽에 건설되었다.

[5] 5) 백두산 지역 쌍목봉에도 김일성의 밀영이 있다. 그러나 신무성에서 쌍목봉을 거쳐서 천지까지 선을 그리는 것은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며,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에 있는 모든 밀영을 포함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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