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0 June 2020. 265-287
https://doi.org/10.22776/kgs.2020.55.3.265

ABSTRACT


MAIN

  • 1. 서론

  • 2. 길 위의 사람들: 인명

  •   1) 엔닌, ‘자각대사’로 기억되는 이름

  •   2) 당인과 신라인

  • 3. 길 가의 자연들: 지명

  •   1) 산과 강, 도시와 마을

  •   2) 섬과 바다, 그 사이의 길

  • 4. 결론

1. 서론

(839년 4월 8일)1) 잠시 해룡왕묘에 머물렀다. 동해산 숙성촌에서 동해현에 이르기까지는 100리 정도였는데 모두 산길이었다. (나귀를) 타고 가기도 하고 혹은 걸어가기도 하여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6일부터 불기 시작한 동북풍은 며칠 동안 풍향이 바뀌지 않았다. 9척의 배가 천둥과 폭우 그리고 세찬 바람을 만난 후에 바다를 건너지 못하지는 않았을까 걱정과 탄식이 마음에 가득하다. 우리 승려 등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꾀를 내었으나 아직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절단이 귀국할 즈음에 떨어져 남을 모의를 힘들게 도모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들키고 말았다. 좌우에서 온갖 논의를 다했으나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관가에서 엄하게 조사하여 조그만 일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제2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앞서 양주와 초주에 있을 때 구해서 얻었던 법문과 여러 물건들은 제8선에 그냥 두었다. 배에서 내려 떨어져 남고자 할 때 가지고 있던 개인 휴대품은 호홍도(胡洪島)에서 주(州)에 이르는 사이에 모두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빈손으로 배를 타게 되니 다만 탄식이 더할 뿐이다. 이는 모두 아직 구법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2)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838년 7월 2일, 견당사(遣唐使)의 천태청익승(天台請益僧) 자격으로 당나라에 도착한 일본국 승려 엔닌(圓仁, 円仁, 794~864)은 태주(台州) 천태산(天台山)으로의 짧은 유학길을 염원하였으나, 당나라 조정은 귀국 일정상의 이유로 그의 구법의 길을 불허하였다. 귀국의 과정에서 불법 체류를 결심한 엔닌은 귀국선에서 빠져 나와 이동하던 중 해주(海州) 동해현(東海縣)에 있는 동해산(東海山) 숙성촌(宿城村)에서 신라인 목탄 운송업자들에 의해 신분이 발각되어 다시 귀국선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도중에 위의 글과 같은 깊은 한숨과 탄식을 839년 4월 8일의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가 탄식하며 한숨지었던 이유는 오직 불법(佛法)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이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같은 이유도 끝내 잃지 않은 일념이 운명처럼 기회와 희망의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 7일 일본으로 향하던 엔닌이 탄 귀국선은 풍랑에 떠밀려 등주(登州) 문등현(文登縣)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오대산(五臺山)과 장안(長安)으로 향하는 새로운 구법의 길을 걷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 년 전인 838년 6월 13일, 그의 나이 45세에 일본 규슈(九州) 북쪽의 하카타(博多)에서 출항하여 중국 대당국(大唐國, 이하 당나라)을 순례하고 신라국(新羅國) 서남해안을 돌아 54세에 다시 일본에 돌아온 847년 12월 14일까지의 일기를 모아 만든 기행문(travel writing)이 바로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구법순례행기)』(이하 『구법행기』)이다. 이 일기체 기행문은 9세기 전반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역사 공간을 가로질러 만 9년 6개월 동안 그 순례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들, 그리고 이를 조우한 한 개인의 믿음과 심정, 경험과 관찰, 공부와 느낌을 생생하게 저장하고 있는 문자 언어로 된 타임캡슐과 같다.

엔닌이 떠났던 길은 애초 자신이 등진 집과 고향으로 향한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길과 집은 결코 단절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단속적이면서 동시에 관계적이다. 길과 집은 서로에게 단절된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긴밀히 연결된 관계적인 존재들이라는 상식은 자아(self)의 점(點)과 면(面)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타자(other)의 그것으로 연결된 선(線)을 갈망하는 이 세상 모든 생물들이 가지는 태생적 습성을 말해 준다. 곧 시공간에 포함된 모든 존재들은 일정한 점과 영역적 형태를 지니면서 친숙하고 안전한 장소(place)로 인식되는 유명(有名)의 집에 살면서도, 한 번도 겪고 느끼지 못한 무명(無名)의 공간(space) 속, 생경한 미지와 불안으로 이어진 그 길에 항상 눈길과 발길을 주려한다(김순배, 2016, 81-82; 2018, 708-709).

이러한 길과 집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대해 박무영(2016, 56-59)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길이란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지점이며, 집이 주지 않는 흥분과 불안정은 고난이면서 매혹이고, 그래서 일탈과 관조가 발생하는 장소이자, 미지를 향한 동경이며, 귀환의 욕망이다.” 한편 길과 그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과 자연의 생소한 이름들을 인간은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3) 평화와 교류의 시기, 그리고 전쟁과 단절의 시기에 길과 이름을 대하는 인간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고려할 때, 엔닌의 여행 시기는 절묘한 시간적 지원을 받고 있다.

당시 당나라(618~907)는 그들이 구축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문명의 우위성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에 대한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차별이 없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방성과 국제성, 그리고 포용성을 유지하였다. 이로 인해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陝西省 西安)은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해 서역인,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인, 신라인, 발해인, 일본인, 동남아인 등이 모여 들어 인구 규모가 약 100만 명이었고, 도시 안에는 다양한 종교(불교, 도교, 회교, 경교, 마니교, 현교)의 사원들과 함께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서시(西市)와 광주(廣州) 및 양주(楊州) 같은 지방 도시에서 활동하였다. 이 같은 당나라의 개방성과 포용성은 중국 내부의 주요 지역들, 그리고 중국과 주변 세계를 연결하는 교통로와 교역 네트워크의 발달을 가져왔고, 궁극적으로는 9년여 간의 엔닌의 여행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 지방 번진(藩鎭)의 할거와 정치적으로 당쟁과 환관의 전횡, 그리고 외환 등으로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신승하, 2008). 더구나 무종(武宗) 연간(841~846)에 국가주의(nationalism)의 대두와 함께 발생한 회창폐불(會昌廢佛)(842~846)이라는 대대적인 불교 탄압, 그리고 엔닌의 중국 체류와 여행을 지원해 주던 장보고(張保皐)의 암살(841년 경)은 그의 구법 여행 시기와 중복되면서 그의 귀국을 재촉하였고, 결국 (또 다른) 뜻이 있는 곳에서 길은 막히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길과 이름에 대한 사실들과 생각들을 토대로, 본 글은 9세기 전반, 동북아시아 삼국 사이에서 펼쳐졌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을 횡단했던 한 인간의 활동을 길과 이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였다. 즉 엔닌의 『구법행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과 개인의 감정들을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들의 이름을 중심으로 소개하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다.

『구법행기』와 관련된 학술적 연구는 대체로 역사학계와 언어학계, 그리고 불교학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한문으로 작성된 『구법행기』는 엔닌 사후, 약 400여년이 지난 1291년에 일본인 겐인(兼胤)에 의해 필사본이 작성되어 불교학계를 중심으로 알려졌고, 다시 600여년이 지난 1907년에 『續續群書類從(속속군서유종)』(제12집 종교부)에 활자본이, 1926년에는 『東洋文庫論叢(동양문고논총)』에 영인본이 간행되면서 일반인에게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이유진, 2009c). 이후 이 여행기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1910~1990)4)가 1955년 미국 뉴욕에서 영문 번역서(Ennin’s Diary: The Record of a Pilgrimage to China in Search of the Law)와 연구서(Ennin’s Travels in T’ang China)를 동시에 출간한 것에 기인한다. 1964∼69년에는 오노 카츠토시(小野勝年)에 의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4권)가 간행되면서 방대하고 종합적인 정밀한 주석 작업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우, 본 여행기에 재당(在唐) 신라인과 장보고의 관련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된 점과, 앞서 언급한 라이샤워(1955)의 연구물에 그들의 활동과 활약상이 주목되면서 연구의 탄력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복룡(1991; 2007)과 김문경(2001)에 의해 역주(譯註)된 번역서가 간행되었고, 중국과의 수교(1992), 김영삼 정부(1993~1998)와 김대중 정부(1998~2003)를 거치면서 ‘해상왕 장보고’ 관련 연구들이 증가하였다. 역사학계와 일본어학계에서는 한국과 중국 간 해상 교통로 및 거점 포구를 분석하면서 『구법행기』가 언급되었고(강봉룡, 2006; 고경석, 2011), 동아시아 교류사의 관점에서 여행기에 내포된 문화적, 언어적 인식을 연구하거나(김은국, 2008; 이유진, 2009b; 이병로, 2011; 장종진, 2011; 김정희, 2013), 일본의 신라신과 장보고의 관련성 연구(이병로, 2006), 나아가 『구법행기』를 대상으로 당나라의 문화 양상과 숙박시설의 분포 등을 분석하기도 하였다(이유진, 2009a; 2010b). 아울러 고대 동아시아인들이 남긴 기행문의 찬술 역사와 문학성을 고찰하고(권덕영, 2010; 강경하, 2019), 『구법행기』 수록 지명을 분석하여 엔닌의 노정을 디지털 복원하려는 연구도 주목된다(주성지, 2020). 특히 『구법행기』가 가지는 신라사 연구의 1차 사료로서의 중요성이 반영되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는 앞서 언급한 『동양문고논총』(第7所収)(観智院本, 1926)을 번역 대본으로 하는 연구 결과물에 대해 2009년 원문텍스트와 전문 국역, 주석 정보를 제공하였고, 2015년에는 원문에 표점을 부기하였다.

본 글은 위에서 언급한 김문경 역주본(2001)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원문과 번역본을 연구의 대본으로 삼아 실내 문헌 조사를 주로 실시하였고, 엔닌이 구법 여행의 시작과 끝을 갈무리했던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교토(京都) 인근의 사찰, 히에잔(比叡山) 엔랴쿠지(延曆寺)를 2019년 7월경 한 차례 현지 답사하였다.

연구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본 연구는 길과 이름의 관점에서 『구법행기』의 개인 일기로서의 일상적인 생생함과 생동함을 관찬 사서와 비교하여 제시하고, 선행 연구에서 간과했던 지리적, 문화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여행기를 재구성하여 분석하였다. 먼저 엔닌이 구법과 순례의 여행길에서 만났던 이름들을 크게 인명과 지명으로 나누어 장을 구성하였다. 여행기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은 낯선 여행 노정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삶의 모습, 그리고 삶의 무대로서의 마을과 도시, 둘레의 자연 환경에 대한 묘사들이며, 결국 이러한 사람들과 자연들이 문자 언어로 기록되고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것의 이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 위의 사람들’이라는 장에서는 엔닌의 문화역사지리학자로서의 면모와 『구법행기』의 학술적 가치를 간략히 소개한 후, 엔닌이 만난 당나라 사람들과 신라 사람들에 대해 관찬 사서들이 말해 주지 않았던 그들의 평범한 일상의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 제시하였다. ‘길 가의 자연들’이라는 장에서는 9세기 전반 당나라의 산과 강, 마을과 도시의 풍경을 오대산, 황하, 대운하, 그리고 15도(道) 행정구역, 장안, 촌(村)과 방(坊) 등을 사례로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엔닌이 귀국길에 경유했던 한반도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섬 이름을 기초적으로 분석하여 엔닌 일행이 완도의 청해진을 방문하지 못한 사실과 고이도, 구초도, 안도의 지명 위치 비정을 시도하였다.

2. 길 위의 사람들: 인명

1) 엔닌, ‘자각대사’로 기억되는 이름

엔닌 사후 2년 뒤인 866년 7월 14일, 천황에 의해 일본 역사상 최초로 엔닌에게 ‘慈覺大師(자각대사)’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조성을 역, 2012, 43; 이유진, 2009c). 이 이름은 국가에 의해 엔닌의 업적이 공인되어 기념된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엔닌은 국가에 어떠한 공적을 남겼기에 스승인 사이쵸(最澄, 傳燈大師)에 앞서 시호를 받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엔닌이란 한 인물을 소개하기에 앞서 6세기 이래 일본이란 국가가 중국으로부터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와 호국 불교를 받아들이던 시대적 요구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일본은 6세기 후반 역사상 최초로 야마토 정권(大和 政權)이 성립되었고, 쇼토쿠태자(聖德太子, 6세기말~622)의 섭정 이후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기반으로 하는 불교 국가 건설을 지향하였다. 그는 538년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된 이후, 일본 최초의 사찰인 법흥사(法興寺, 593년 창건)에서 고구려 승려 혜자(惠慈)와 백제승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불교의 포교를 위해 사재를 희사해 법륭사(法隆寺)를 짓고, 17조 헌법과 관위 12체계를 만들어 불교적 국가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외교사절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한편 불교를 중심으로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와 외국에서 전래된 유교(儒敎)의 장점을 모아 궁극적으로는 일본 특유의 신불유 습합사상(神佛儒 習合思想)과 독특한 관료 제도의 길을 터놓았다(박석순, 2009).

이후 645년에는 중국 유학생과 유학승의 지원을 받아 처음으로 연호(年號)를 제정하고, 당나라의 율령(律令) 체제와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를 도입한 다이카 개신(大化 改新)이 추진되었다. 670년에는 국명을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고쳐[『三國史記』 文武王 10년(670) 12월조]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으며,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 덴표(天平) 년간(729~749)에는 견당사 등에 의해 전달된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풍부한 국제성과 함께 국가 정책에 의한 불교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는 움직임 속에서 조정에 의한 통치의 정당성과 국가 의식을 반영한 국사(國史) 편찬 사업, 즉 712년의 『고사기(古事記)』, 720년의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완성되었고, 713년에는 일본 내 각국의 지리, 산물, 지명의 유래 등을 모아 『풍토기(風土記)』가 편찬되었다(박석순, 2009). 한편 엔닌의 『구법행기』(838~847)를 전후한 시대 상황은 일본 육국사(六國史) 중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전20권, 833~850)에 기록되어 있다.

나라시대의 마지막 연도에 태어난 엔닌(794~864) 자신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5)의 초기 역사를 체화하고 있다. 헤이안시대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적 율령체제가 수정 및 강화되었고, 동시에 당풍(唐風)에서 탈피하려는 이른바 국풍(國風) 문화가 발달하면서 일본의 문자인 가나[假名]가 널리 보급된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 이 시대의 불교는 국가의 보호 아래 융성하였던 나라시대의 호국(護國) 불교의 특성이 계승된 동시에 종파의 형성에 있어 새로운 움직임도 발생하였다. 804년에는 견당사를 따라 당나라에 유학한 사이초(最澄)가 귀국 후 교토 인근 히에잔(比叡山)에 엔랴쿠지(延曆寺)를 세우고 천태종(天台宗)을 열었으며, 그의 제자인 엔닌과 엔친(円珍)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천적 불교의 성격을 띤 밀교(密敎)6)가 수용되었다(박석순, 2009). 『구법행기』에는 당나라에서 밀교의 교리를 배우고 경전 및 만다라(曼茶羅) 등을 베끼려는 엔닌의 노력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838.12.23.; 841.04. 30.; 841.05.03. 등)

결국 엔닌은 중국의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호국 불교를 수입하여 전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일본 고대사의 마지막 노력을 몸소 경험하고 실천한 승려였으며, 실제 그가 당나라에서 구득하여 가져온 불교 경전과 만다라 등의 목록은 손수 『入唐新求聖敎目錄(입당신구성교목록)』으로 작성되어 일본의 불교와 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그는 일본이 당나라에 파견한 마지막 공식 사절단인 17차 견당사의 일원으로서 9세기 전반 당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동북아시아 삼국, 나아가 동시대 세계의 활발했던 교류의 역사와 그 현장을 『구법행기』에 생생하게 옮겨 놓았다. 이것이 바로 9세기 후반 일본국이 엔닌에게 ‘자각대사’라는 시호를 수여한 배경이다.

일본 최초로 국가로부터 ‘대사(大師)’라는 시호를 받은 엔닌은 현재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인 히에잔 엔랴쿠지의 제3세 좌주(座主)를 역임하였다. 그의 전기는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정관 6년(864) 정월 신축(14일)조의 졸전(卒傳)과 교토 산젠인(三千院)에 소장되어 있는 「비예산연력사진언법화종제삼법주자각대사전(比叡山延曆寺眞言法華宗第三法主慈覺大師傳)」(이하 「자각대사전(慈覺大師傳)」) 등에 실려 있다. 「자각대사전」에 따르면 엔닌은 연력(延曆) 13년인 794년에 스모쓰케국(下野國) 쓰가군(都賀郡)[현재 도쿄시 북쪽 약 100km에 위치한 도치기현(栃木縣) 시모쓰가군(下都賀郡)]에서 백제계(百濟系) 도래인(渡來人)의 후예로 태어났다(이병로, 2006, 324- 326).7) 그의 속성(俗姓)은 ‘미부(壬生)’ 씨로 이 성씨는 하야국(下野國), 상야국(上野國) 등 당시 일본의 동국(東國)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으며(이유진, 2009c), 현재도 도치기현(栃木縣) 시모쓰가군(下都賀郡)에는 ‘미부역(壬生駅)’, ‘미부마치(壬生町)’ 등의 지명으로 그 이름이 존속되고 있다.

그는 9살 때 아버지 수마려(首麻呂)가 죽고 다이지지(大慈寺)의 승려인 광지(廣智)에게 맡겨져 15살 때까지 그곳에서 불교를 수행하였고,8) 15살이 되자 스승인 광지를 따라 히에잔에 올라 사이쵸(最澄)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엔닌은 813년에 관시(官試)에 급제하고, 23살 때인 816년에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 비구가 되었다. 822년 스승인 사이쵸가 입적한 후에는 수년간 히에잔에 머무르며 불법을 설파하고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후 속세로 나가 불법을 전파하다가 40세 때인 833년에 병이 들어 히에잔 자락에 위치한 횡천(橫川)의 초암에 은거하였다. 이후 42세 때인 승화(承和) 2년(835)에 제17차 견당사에 천태청익승(天台請益僧)으로 임명되어 입당 구법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이유진, 2009c).

그러나 836년과 837년 두 차례의 출항이 폭풍으로 좌절되어 4척의 선박 중 두 척을 잃었다가, 승화 5년인 838년 6월 13일에 다시 출항하여 “사신 일행이 제1과 제4박의 배에 승선하였다”라는 『구법행기』 기록으로 당나라로의 구법 여행을 시작하였다(그림 1). 9년이 지난 후인 승화 14년, 847년 9월 19일에 귀국하여 다자이후(大宰府) 고우로칸(鴻臚館)에 도착하였고 그해 12월 14일 “오후에 (제자) 난주(南忠) 사리가 왔다”라는 기록으로 엔닌의 여행기는 끝을 맺는다. 그 후 엔닌은 848년 3월 26일에 성해(性海), 유정(惟正) 등과 함께 입경(入京)하였고, 61세 때인 854년에 엔랴쿠지의 주지로 임명되어 제3세 천태좌주가 되었다. 이후 불법을 계속 수행하다 71세 때인 864년 1월 14일에 입적하였다. 일본 조정은 그가 입적하고 한 달 뒤인 2월 16일에 ‘법인대화상(法印大和尙)’의 직위를 수여하였고, 866년에는 ‘자각대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저서로는 『구법행기』 이외에 『금강정경소(金剛頂經疏)』, 『현양대계론(顯揚大戒論)』이 있다(이유진, 2009c; 201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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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구법행기』의 여행 경로

자료: 김문경, 2001, 부록

엔닌의 구법 여행기에는 불교 승려인 동시에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기록하는 그의 역사지리학자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① 정오 무렵에 강어귀에 도달했다. 오후 2시경 양주(揚州) 해능현(海陵縣) 백조진(白潮鎭) 상전향(桑田鄕) 동량풍촌(東梁豊村)에 도착했다. 오늘은 일본의 승화 5년 7월 2일이고, 당의 개성 3년 7월 2일이다. 비록 연호는 다르지만 월일은 모두 같다. (838.07.02.)

② 올해 책력 초본을 얻었다. 그것을 베껴 적은 것은 아래와 같다. 개성 5년의 역일(曆日) 천간(天干)은 금, 지지(地支)는 금, 납음(納音)은 목이다. 모두 355일이다. 음양이 합치된 날은 을사에 있으니, 흙으로 고치고 짓거나 하면 길(吉)하다. 태세(太歲)는 신(申)에 있고 대장군은 오(午)에 있다. 태음(太陰)도 오에 있고, 세덕(歲德)은 신유(辛酉)에 있으며 세형(歲刑)은 인(寅)에 있고 세파(歲破)도 인에 있다. 세살(歲煞)은 미(未)에 있고 황번(黃幡)은 진(辰)에 있고 표미(豹尾)는 술(戌)에 있고 잠궁(蠶宮)은 손(巽)에 있다. 정월은 큰 달이다. 1일 무인은 토(土)와 건(建), 4일은 득신(得辛), 11일은 우수, 26일은 경칩이다……12월은 큰 달이다. 1일 계묘는 금과 평, 3일은 소한, 18일은 대한, 26일은 납일이다. (840.01.15.)

③ 오대산으로 가는 노정(路程)의 주 이름과 거리를 물어서 기록한다. 8개 주를 지나 오대산에 도착하는데, 도합 2,990여 리이다. 적산촌에서 문등현에 이르기까지는 130리이고, 현을 지나 등주에 도착하는 데는 500리이다. 등주에서 200여 리를 가면 내주(萊州)에 도착하고, 내주에서 500리를 가면 청주(靑州)에 다다른다. 청주를 지나 180리를 가면 치주(淄州)에 도착하고, 치주에서 제주(齊州)에 이르는 거리는 180리이고, 제주를 지나 운주(鄆州)에 이르기까지는 300리이다. 운주에서 황하를 지나 위부(魏府)에 이르는 거리는 180리이고, 위부를 지나 진주(鎭州)에 도착하는 데는 500여 리이다. 진주로부터 산길로 5일 동안 약 300리를 가면 오대산에 이른다. 신라승 양현(諒賢)이 말한 것에 의거해 적었다. (839.09.01.)

위 인용문 ①에는 일본을 출발하여 당나라에 처음 표착한 곳의 지리 정보, 즉 구체적인 행정구역과 함께 시간 정보가 적혀 있다. 엔닌은 여행 도중 연말이나 새해 정월이 되면 당나라의 달력(新曆, 宣明曆)을 구입하거나(838.12.20.), ②와 같이 달력의 초본을 얻어 베껴 쓰곤 하였다. 또한 문종(文宗)의 ‘개성(開成)’에서 무종의 ‘회창(會昌)’, ‘회창’에서 다시 선종(宣宗)의 ‘대중(大中)’으로 황제가 바뀌어 연호가 변동될 때에도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841.01.09.; 847.01.17.). 이를 통해 당시 당나라의 지방 행정구역 체계 및 후부 지명소가 주-현-진-향-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타자의 정확한 날짜를 비교 기록하여 자신의 여행이 어느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③의 경우 재당 신라인으로부터 전해들은 당나라의 행정구역과 도시 간 거리 정보, 그리고 하남도(河南道) 청주도독부 관할의 적산촌에서 오대산까지의 노정을 기록한 것이다. 다음 여행을 떠나기 전 엔닌은 철저한 사전 조사와 여행 노정 등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당시 노정 상의 지명들을 수록한 지도를 사용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밖에도 엔닌은 청주 도독부 관내의 지리 정보(839. 08.16.)와 오대산으로부터 장안까지의 구체적인 노정(840.07.01.~840.08.20.), 그리고 현재의 강소성(江苏省) 연운항시(连云港市) 연운구(连云区)에 위치한 운태산(云台山)으로 비정되는 당시 하남도 해주(海州) 동해현(東海縣) 동해산(東海山)의 지형(839.03.29.)과 하남도 청주 모평현(牟平縣) 부근의 유산(乳山, 현재의 山东省 威海市 乳山市) (839.04.25.) 등의 지리 정보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한편 엔닌은 지리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의 언어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고대 불교 경전을 공부하기 위해 장안의 청룡사(靑龍寺) 등에서 범어(梵語, 悉曇語, 산스크리트어)를 학습하였고(842.05.26.), 당시 그가 기록한 학습 노트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교토 인근의 시가현 오쓰시 이시야마데라(石山寺)에 소장되어 있다(小野勝年, 1967, 圖版 制二十四).

엔닌의 치밀한 견문과 관찰, 그리고 치열한 기록 습관은 당대 한・중・일의 관찬 사서 등이 소홀히 했던 중요한 역사적, 지리적 사실들을 『구법행기』에 수록하게 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그의 여행기가 가지는 1차 사료로서의 귀중한 가치이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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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엔닌과 『구법행기』

자료: (좌) 山口光圓, 1961, 圖錄, 慈覺大師円仁像(延曆寺藏); (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 卷第一, http://db.history.go.kr

ⓐ 천태종(天台宗) 승려로서 당(唐)에 들어가 구법(求法)하던 엔닌(圓仁)이 제자 승려 성해(性海)와 유정(惟正) 등을 데리고 지난 해 10월에 신라의 상선을 타고 진(鎭)의 서쪽 부(府)에 도착하였는데, 이 날 조정에 들어왔다. 칙사(勅使)를 보내어 위로하고 각각에게 어피(御被)를 내려 주었다. (『속일본후기』, 권18 仁明天皇, 848년 3월 26일조 기사)

ⓑ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고 하였다. (839.04.20.)

ⓒ 또 듣건대 “당나라 천자가 신라 왕자에게 왕위를 내리기 위해 사절을 신라에 보내고자 하여 그 배를 정비하고 있다. 아울러 녹(祿)을 내려 주었다”고 하였다. (839.04.24.)

ⓓ 당나라 천자가 새로 즉위한 왕을 위문하기 위해 신라로 보내는 사신인 청주병마사(靑州兵馬使) 오자진(吳子陳)과 최부사(崔副使) 그리고 왕판관(王判官) 등 30여 명이 절로 올라왔으므로 만나보았다. 밤에 장보고가 보낸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 최병마사(崔兵馬使)가 절에 와서 위문하였다. 일찍 출발하여 서쪽으로 20리를 갔다. (840.06. 28.)

ⓔ 들에서 발해(渤海) 사신을 만났는데, 상도(上都, 장안)로부터 귀국하는 길이었다. (840.03.20.)

ⓕ 들으니 장대사(張大使, 장보고)의 교관선(交關船, 교역선) 2척이 단산포(旦山浦, 적산포)에 도착했다고 한다. (839.06.27.)

예를 들어, 인용문 ⓐ는 엔닌이 귀국한 이듬해인 838년에 엔닌과 그의 일행이 일본 인명천황이 있던 현재 교토의 헤이안쿄(平安京)에 들어온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다. 17차 견당사와 사절단 일행의 출항 및 귀국과 관련된 사실은 일본의 공식 칙찬(勅撰) 사서인 『속일본후기』 등에 몇 차례 짧게 수록되어 있을 뿐, 약 9년간의 자세한 여행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는 신라 왕족 김우징(金祐徵)이 왕위 쟁탈 과정에서 패하여 청해진(淸海鎭)에 망명해 후일을 도모하다가 장보고의 도움으로 민애왕[金明]을 내쫒고 즉위하여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한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와 ⓓ에는 신무왕이 즉위한 뒤 당이 책봉사(冊封使)를 신라로 파견하려던 계획과 사신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 귀중한 기록으로 평가된다(김문경, 2001, 161).

ⓔ의 경우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 사신과 관련된 기록으로 당나라 사서인 『책부원귀』(권972 조공조)에는 개성 4년(839) 12월에 발해 왕자 대연광(大延廣)이 당에 조공하였다는 기사와 상관된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 각주 711). 엔닌이 하남도 청주 북해현(北海縣, 지금의 山东省 潍坊市) 관법사(觀法寺)에서 하루를 묵고 서쪽으로 20여리를 가다가 발해 사신을 만난 사실을 통해, 역사서에 등장하는 발해 사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발해 견당사의 이동 경로가 장안에서 청주~내주(萊州)~등주의 육로를 거쳐 등주(登州, 현재의 山东省 烟台市 蓬莱市)에서 해로로 랴오둥 반도의 남쪽 끝 다롄(辽宁省 大连市)이나 뤼순(旅顺)으로 향했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의 기록은 한국과 중국측 사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장보고가 파견했던 사무역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小野勝年, 1964, 2권, 60-6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9)

2) 당인과 신라인

엔닌이 거닐고 머물었던 길 위에는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들을 통해 당나라의 국제성과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 사실을 알 수 있고, 당나라 사람들과 재당 신라인들이 만들어 간 일상의 삶과 그들이 형성한 다양한 문화 경관을 엔닌은 능숙한 문화지리학자의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① 그 서장을 살펴보니 “서상각을 수리하기 위하여 『금강경』을 강설합니다. 바라는 금액은 50관입니다. 마침 상공(이덕유)께서 인연을 함께할 사람들을 초청해 모금하도록 하여 그것을 효감사에 기탁하였으니 강경에 참여하여 인연 맺기를 기다립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헤아려 보건대 1만 관으로 이 누각을 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사국(波斯國)은 1천 관의 돈을 내 놓았고 점파국(占婆國) 사람은 200관의 돈을 희사하였습니다. 지금 일본국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면 그 수가 적기 때문에 50관의 돈을 모금하는 것입니다.” (839.01.07.)

② 상공(이덕유)은 우리 승려 등과 가까이에서 마주보고 앉아 묻기를 “그 나라에도 추위가 있는가?” 하였다. 유학승(엔닌)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상공이 “이곳과 마찬가지구나.”라고 말하였다. 상공이 “절은 있는가?”라고 묻자 “많이 있습니다.”라 답했다. 또 묻기를 “절이 얼마나 있는가?”라 하기에 “3,700여 개의 절이 있습니다.”라 대답했다. 또 묻기를 “비구니 사찰도 있는가?”라 하기에 “많이 있습니다.”라 대답했다. 또 묻기를 “도사(道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는 있는가?”라고 하자 “도사는 없습니다.”라 답했다. 또 묻기를 “그 나라 경성(京城)의 사방과 둘레는 몇 리나 되는가?”라 하였으므로 “동서가 15리이고 남북이 15리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묻기를 “하안거(夏安居) 하는 풍습이 있는가?” 하자 “있습니다.”라 대답했다. 상공은 이번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화하였다. (838.11.18.)

③ 당나라의 현재 황제[文宗]의 휘(諱), 즉 이름은 앙(昻)이고, 선조의 이름은 순(純, 淳), 송(訟, 誦), 괄(括), 예(譽, 豫, 預), 융기(隆基), 항(恒), 담(湛), 연(淵), 호(虎, 武), 세민(世民)이다. 음이 같은 것은 모두 쓰기를 피한다. 이 나라에서는 기휘(忌諱)하는 여러 글자는 여러 서장 중에 모두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서명사(西明寺) 승려 종예법사(宗叡法師)가 가르쳐준 것이다. (838.11.17.)

④ 고급관리와 군관 그리고 절의 승려들은 모두 오늘 쌀을 고른다. 날짜를 정하지 않고 주에서 운반해 온 쌀을 여러 절에 나누어 준다. 승려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분배하므로 양은 일률적이지 않다. 그 양은 10곡(斛)에서 20곡 정도이다. 절의 고사승이 그것을 수령해 다시 여러 승려들에게 나누어주는데 혹은 1말 혹은 1말 5되를 주었다. 여러 승려들은 그것을 받아 품질이 좋은 쌀과 나쁜 쌀로 골라 나눈다. 깨어진 것은 나쁜 쌀이고 깨지지 않은 것은 좋은 쌀이다. 가령 1말의 쌀을 받아 좋고 나쁜 쌀로 골라 나누면 좋은 쌀은 겨우 여섯 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쌀과 나쁜 쌀을 각각 다른 자루에 담아 관청에 되돌려준다. 여러 절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좋은 쌀과 나쁜 쌀을 골라 나누어 모두 관청에 반납한다. 관청에서는 좋고 나쁜 두 종류의 쌀을 받으면, 좋은 쌀은 천자에게 진봉(進奉)해 천자의 식사에 충당하고 나쁜 쌀은 남겨 관청에 둔다. 다만 관리, 군인, 승려에게만 쌀을 분배해 고르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시키지 않는다. 주의 관청에서 속미(粟米)를 고르는 일은 더욱 하기 힘든 일이다. 양주에서 쌀을 고르는 것은 쌀의 색깔이 매우 검기 때문이다. 껍질이 붙어 있는 알갱이와 깨어진 알갱이를 골라서 버리고 튼튼한 것만 고르는데, 다른 주에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들은 바에 의하면, 상공(이덕유)은 5섬을 고르고 감군문(監軍門)도 이와 같다. 그리고 낭중은 2섬, 낭관은 1섬, 군관과 사승(師僧)은 1말 5되 혹은 1말을 고른다고 한다. (839.01. 18.)

위의 인용문 ①에는 9세기 전반 당나라의 지방 도시 양주(지금의 江苏省 扬州市)의 국제성이 기록되어 있다. 양주 대도독부의 도독(都督)이었던 이덕유(李德裕, 787~849)가 서상각이라는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파사국(사산조 페르시아)과 점파국(인도차이나 반도의 安南 혹은 林邑國)의 상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으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서역의 페르시아인들과 동남아 사람들이 이른 시기부터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중국과 빈번하게 교섭하면서 활발한 상업 활동을 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②에는 엔닌이 당시 양주 자사(刺使)이자 도독이었던 이덕유와 필담(筆談)을 나눈 대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덕유가 엔닌에게 일본에 도교(道敎)의 도사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는 840년까지 양주 도독 및 회남 절도사를 역임하다가 중앙으로 관직을 옮겨 무종과 함께 ‘회창폐불(會昌廢佛)’(842~846)로 불리는 중국 역사상 3번째이자 가장 규모가 큰 불교 탄압을 주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가 가져온 폐단을 극복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경교, 마니교, 현교 등의 외래 종교를 탄압하고 중국 자생적인 유교, 특히 도교를 적극 장려하면서 중국 중심의 중화적(中華的) 국가주의(nationalism)를 표방했기 때문이다.10) 이 과정에서 환관의 대표 실력자이자 불교를 적극 후원하던 구사량(仇士良, 781~843)이 처형되고(843.06.23.), 엔닌 또한 조칙(詔勅)에 따라 강제로 환속되어 속인의 옷을 입게 되었다(845.05.13.). 엔닌은 환속 후 장안을 떠나(845.05.15.) 귀국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문등현 적산촌의 법화원이 모두 허물어져 법화원에 딸린 장원(莊園)에 머무르게 된다(845.09.22.).

③에서는 중국과 한국 등 유교적 질서와 예법이 강조되었던 시기에 시행되었던 ‘피휘(避諱)’ 관념의 이른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휘(諱)’란 본래 돌아가신 조상이나 현직 왕 및 선대왕의 이름[名]을 뜻하는 것으로 이들의 이름자는 존경의 의미에서 공문서나 역사서, 일반 서적, 심지어는 신하의 인명과 관직명, 지명 등의 표기에 동일한 한자나 유사한 음을 가진 글자의 사용을 피한다. 유교적 전통이 존속되고 있는 한국의 경우, 부모님의 이름자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거나, 도로명이나 지명에 인명을 사용하는 비율이 낮은 현상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김순배, 2016). 당나라의 고위 관리와 접촉하거나 공문서 작성 및 기록을 빈번히 했던 엔닌에게는 이러한 피휘의 법도와 질서를 빨리 익히는 것이 여행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방문하는 곳의 지방 관리, 일례로 양주 자사 이덕유, 등주 자사 및 청주 절도사의 성명과 피휘 글자를 자세하게 여행기에 적어 놓았다(838.08.26.; 839.11.22.).

④에는 중국에서 진(秦)나라 이래로 행해져 온 제사 및 진상용 곡식을 고르는 일, 즉 간미(揀米)의 과정과 그 실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간미를 관장하는 관리를 도관(導管)이라 하는데, 당나라에서는 사농시(司農寺)에 도관서(導官署)를 두어 이 일을 맡아 왔다. 그동안 간미의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으나 엔닌의 이 기록을 통해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김문경, 2001, 100). 특히 군관이나 절의 승려보다 고급 관리일수록 가려야할 쌀의 양이 많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엔닌의 『구법행기』에는 9세기 전반 당나라 사람들의 일상과 시골 인심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있다. 아래의 ⓐ 인용문에는 메뚜기[蝗, 누리] 피해로 인한 실상을 유추할 수 있는 사례가 제시되어 있다. 메뚜기가 떼 지어 날아다니며 곡식을 갉아먹는 재해는 오랜 옛날부터 중국 동북 지방에서 자주 발생하여 농사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주로 음력 4월부터 8월에 주로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6월에 가장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대체로 안휘(安徽), 강소(江蘇) 이북, 산동 지방의 서쪽, 섬서(陜西)와 하남(河南) 지방의 동쪽에서 자주 발생하였고, 중국에서는 메뚜기 피해를 줄이기 위해 메뚜기를 신격(神格)으로 하는 사당도 지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한반도에도 메뚜기의 재해가 일어나 『삼국사기』 등의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행기, 각주 425, 426). ⓑ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자연 재해로 인한 피해는 그대로 인심에 반영이 되어 낯선 여행객을 대하는 인색한 시선이나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 적산원의 많은 승려와 압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청주(靑州)에서 이 곳에 이르는 여러 곳에 최근 3, 4년 동안 메뚜기의 재해[蝗䖝灾]가 있었다. 그것들이 곡식을 다 먹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굶주리고 도둑들이 많아져 죽이고 빼앗는 일이 적지 않다. 또 여행하는 사람이 먹을 것을 구걸해도 보시하는 사람이 없다. 지금 4명이 함께 가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잠시 이 절에 있으면서 여름이 지나고 가을 곡식 때를 기다렸다가 떠나는 것이 온당하다. 만약 굳이 떠나고자 한다면 양주와 초주 땅으로 향해 가라. 그 지방은 곡식이 잘 여물어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쉬울 것이다.” (840.01.21.)

ⓑ 다시 5리를 가서 고산촌(孤山村)에 도착해 송씨 집에서 음식을 먹었다. 주인은 몹시 인색하여 한 줌의 소금과 한 숟가락의 간장, 식초도 돈을 주지 않으면 주지 않았다. 재(점심)를 마친 후 30리를 가서 수광현(壽光縣) 땅의 반성촌(半城村)에 도착해 이씨 집에서 숙박했다. 주인은 탐욕스럽고 인색하여 머무는 손님에게 숙박비를 받았다. (840.03.20.)

이 외에도 엔닌의 여행기에는 당나라의 동지와 정월 초하루, 혹은 국기일(國忌日)의 풍속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838.11.27.; 838.12.08.; 842.01.01.), 혜성(彗星) 출현으로 황제가 재계(齋戒)하고 근신하는 모습(838.10.22.), 그리고 개가 달과 해를 삼켜 월식(月蝕)이나 일식(日蝕)이 생긴다고 믿어 그 개를 쫓기 위해 절 안의 승려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판을 두들기며 소리를 내는 광경(839.10.15.; 846.12.02.) 등도 기록되어 있다.

엔닌의 여행기에는 당나라에 살고 있는 많은 신라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9세기 전반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일본 사이의 국제 관계를 이해하여야 왜 당나라에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했는지, 그리고 일본인이었던 엔닌이 왜 당나라로의 구법 여행에 외교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던 신라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엔닌이 입당하기 170여 년 전인 7세기 후반, 한・중・일 사이에서는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 발생하였다. 당-신라와 고구려-백제-왜(일본) 사이의 전쟁은 660년 백제의 멸망과 668년의 고구려 멸망으로 끝나면서 당나라와 신라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후 백제 부흥을 위해 파견된 일본의 군대는 663년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더 이상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가는 해로가 막히게 되었다. 백제의 영토는 대부분 신라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많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결국 백제를 지원하던 일본과 신라의 관계는 단절되기에 이른다(이유진, 2009c).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한때 회복되기도 했으나 8세기 중엽 발해(渤海)를 사이에 두고 긴장이 높아져 결국 신라 혜공왕(惠恭王) 15년인 779년에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고, 다만 민간인의 왕래만 있었다(김문경, 2001, 132). 아래의 인용문을 통해 엔닌이 활동하던 9세기 전반에 일본인들이 신라를 ‘적(賊)’으로 인식한 점과 자신들의 입당과 귀국을 도왔던 장보고마저 신라의 정쟁에 휘말려 신라 조정과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11)

제2선의 선두 장잠 판관이 말하기를 “대주산은 헤아려 보건대 신라의 정서쪽에 해당한다. 만약 그곳에 이르렀다가 출발한다면 재난을 헤아리기 어렵다. 더욱이 신라에는 장보고(張寶高)가 난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있는 판국인데, 서풍과 북서풍 혹은 남서풍이 불면 틀림없이 적지(賊地, 신라)에 도착할 것이다. 옛 사례를 살펴보면, 명주(明州)에서 출발한 배는 바람에 떠밀려 신라 땅에 다다랐고 양자강에서 출발한 배 또한 신라에 도착했다. 지금 이번의 9척의 배는 이미 북쪽으로 멀리 왔다. 적경(賊境, 신라)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다시 대주산으로 향하는 것은 오로지 적지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야지, 대주산으로 향해 가서는 안된다.”라 하였다. (839.04.02.)

따라서 660년과 668년의 전쟁 승리로 연합국의 관계에 있던 당나라와 신라의 사이는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는 신라인들의 당나라 이주와 정착을 촉진시켰을 것이다.12) 이후 일본도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을 펴면서 당나라와의 관계가 복원되었고, 17차례에 걸친 견당사 사절단을 파견하게 되었다. 다만 신라와 일본의 공식적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비공식적인 민간인들의 교류와 교역은 존속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입장에서는 신라 서남해안을 경유하는 해로가 중국으로 통하는 가장 안전한 경로로서 인식되었고, 뛰어난 항해술 및 조선술을 보유하면서 이곳의 해상 질서를 통제하고 있던 장보고 세력과는 비공식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한 견당사에 중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신라어 통역사, 즉 신라역어(新羅譯語)를 배치하여 중국 내에서의 원활한 활동과 신라 해안으로의 표착을 대비하기도 하였다(장종진, 2011).

당시의 국제 관계 속에서 재당 신라인들은 당시의 하남도, 회남도(淮南道), 강남동도(江南東道), 즉 현재의 산동반도 동남 해안과 대운하 주변, 그리고 남쪽으로는 강소성과 절강성 해안까지 분포하면서, 상업, 운송업, 중계무역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특히 대운하와 해로를 따라 위치한 초주(楚州), 연수(漣水, 지금의 江苏省 淮安市 涟水县), 해주(海州), 적산포 일대에는 많은 신라방, 신라원, 신라촌[숙성촌], 구당(勾當) 신라소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839. 02.24.; 839.04.05.: 839.11.16.; 845.11.15.; 김문경, 2001, 115).

특히 아래의 인용문 ①에서 보듯이 적산촌에 있던 적산 법화원은 재당 신라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그림 3). 엔닌은 이곳에서 약 2년간이라는 많은 시간을 체류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적산촌의 전부 지명소를 구성하고 있는 산 지명 ‘적산’의 구체적인 지질과 지형, 지세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또한 엔닌의 ②의 기록에서는 신라 불교의 전통 강경 의식과 범패(梵唄) 등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과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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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적산법화원 입구와 엔랴쿠지의 청해진대사장보고비

자료: (좌) Google Maps, https://www.google.com/maps; (우) 필자 촬영(2019.07.23.)

① 오후 2시경에서 4시경 적산(赤山)의 동쪽 언저리에 도착해 배를 정박시켰다. 북서풍이 더욱 세차게 불었다. 이 적산은 순전히 암석으로 된 우뚝 솟은 곳으로, 곧 문등현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이다. 산에는 절이 있어, 그 이름을 적산 법화원(法花院)이라 하는데 본래 장보고가 처음으로 세운 것이다. 오랫동안 장전(莊田)을 갖고 있어, 그것으로 절의 식량을 충당한다. 그 장전은 1년에 500석의 쌀을 거두어들인다. 이 절에서는 겨울과 여름에 불경을 강설하는데, 겨울에는 『법화경(法花經)』을 강설하고 여름에는 8권짜리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설한다. 여러 해 동안 그것을 강설해왔다. 남쪽과 북쪽에는 바위 봉우리가 솟아 있고 물은 법화원의 마당을 관통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동쪽으로는 멀리 (지금 石島灣의)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터져 있고, 남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은 봉우리가 이어져 벽을 이루고 있다. 다만 서남쪽은 비스듬히 경사지게 흘러내리고 있다. 지금 신라 통사 압아 장영(張詠)과 임대사(林大使), 그리고 왕훈(王訓) 등이 전적으로 맡아 관리하고 있다. (839.06.07.)

② 남녀 도속(道俗) 모두 절에 모여 낮에는 강경을 듣고 밤에는 예불 참회하고 청경하며 차례차례로 이어간다. 승려 등은 그 수가 40여 명이다. 그 강경과 예참(禮懺) 방법은 모두 신라 풍속에 의거하였다. 다만 오후 8시경과 새벽 4시경 두 차례의 예참은 당나라 풍속에 의거하였다. 그 밖의 것은 모두 신라 말로 행하였다. 그 집회에 참석한 승려, 속인, 노인, 젊은이, 귀한 사람,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라인이었다……적산법화원의 강경의식[赤山院 講經儀式]……신라의 일일강의식[新羅 一日 講儀式]……신라의 송경의식[新羅 誦經 儀式] (839.11.16.~11.22)

3. 길 가의 자연들: 지명

1) 산과 강, 도시와 마을

엔닌은 그가 걸은 길 가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자연과 인문 경관을 여행기 속에 문자 언어로 담아 놓았다. 그의 시선으로 재현한 자연 경관의 일면을 오대산과 황하, 대운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곳에 깃든 행정구역, 도시, 마을을 15도의 분포와 장안, 그리고 최하위 행정구역인 촌(村)과 방(坊)을 사례로 소개하였다.

엔닌은 840년 6월 8일부터 840년 2월 18일까지 약 8개월간을 적산 법화원에 머물다 신라 승려 성림화상(聖林和尙)의 추천으로 천태산 대신 오대산(五臺山, 3,040m, 현재의 山西省 북서쪽에 위치)으로의 구법 여행을 떠나게 된다(839.07.23.). 그는 오대산에 840년 4월 28일에서 같은 해 7월 1일까지 약 2달간 머물며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신앙의 성지를 몸소 체험하게 된다(그림 4). 오대산이란 이름은 산을 구성하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봉우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각각 동대(망해봉), 북대(협두봉), 중대(취령봉), 서대(계월봉), 남대(금수봉)가 있다(김문경, 2001, 2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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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오대산의 중대와 동대, 포진관 부근의 황하, 가오유(高郵) 부근의 대운하

자료: (좌・중) Google Maps, https://www.google.com/maps; (우) 百度地图, https://map.baidu.com

오대산은 청량산(淸凉山)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 지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문수사리가 청량산에서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 각주 959). 아래의 인용문 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엔닌은 자연 경관인 오대산의 둥글고 완만한 산세에 주목하면서 모든 중생이 평등하다는 문수보살 신앙의 평등성을 떠올리고 있다.

① 평평한 골짜기에 진입하여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오전 10시경에 정점보통원(停點普通院)에 도착했다. 보통원 안에 들어가지 않고 서북쪽을 향해 멀리 중대(中臺)를 바라보고 땅에 엎드려 예배했다. 이곳은 곧 문수사리가 계시던 곳이다. 다섯 봉우리는 둥글고 높은데 수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양은 마치 구리 화분을 엎어 놓은 형상이었다. 멀리 바라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수목과 기이한 꽃들도 다른 곳과 같지 않아 그 기이한 경지는 특별히 심오했다. 이곳은 곧 청량산(淸凉山) 금색세계(金色世界)로, 문수사리가 현재에도 중생을 이롭게 교화하는 곳이다. 곧 정점보통원에 들어가 문수사리보살상에 예배하였다. (840.04.28.)……재를 마친 후 공양주인 두타승 의원 등 몇 명과 함께 일행이 되어 남대를 향해 떠났다. 금각사에서 서쪽으로 5리를 가면 청량사(淸凉寺)가 있다. 지금 남대를 관리한다. 이 오대산 모두를 청량산이라 불렀는데, 산중에 세운 절 가운데 이 절이 최초였으므로 청량사라 불렀다. 절 안에는 청량석(淸凉石)이 있다고 한다……옛날 대화엄사에서 재를 크게 마련하여 속세의 남녀, 거지, 빈궁한 사람들이 모두 와서 공양을 받았다……오대산의 풍습과 법식은 이로 인하여 평등한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840.07.02.)

한편 엔닌은 아래의 ② 기록에서처럼 적산법화원에서 오대산으로, 그리고 오대산에서 장안에 이르는 여정에서 두 차례 황하(黃河)를 건넌다. 도강(渡江) 지점은 황하를 건너는 입구, 즉 황하도구(黃河渡口)로 표현되는데 각각 약가구(藥家口)와 포진관(蒲津關)에 해당된다. 엔닌의 기록을 통해 역사지리적으로 황하 하류의 물길이 바뀐 지점과 그 시기를 분석할 수 있다. 그의 기록에는 우성현(禹城縣) 선공촌(仙公村)에서 정서쪽으로 약 40리를 지나 포구(약가구)에 도착한다고 기록하였다(840.04.10.). 장안 부근의 포진관에서 황하를 건널 때에는 여러 개의 배를 이어 만든 두 곳의 배다리[船橋]를 언급하고 있다. 황하에 설치되었던 선교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이 그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小野勝年, 1967, 3권, 23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 각주 446).

② 오전 6시경에 출발해 정서쪽으로 30리를 가서 12시경에 황하 나루터에 도착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약가구(藥家口)라 불렀다. 물 색깔은 누런 진흙색이어도 물살은 화살과 같이 빨리 흘렀다. 강의 너비는 1정 5단 정도 되며 동쪽으로 흘렀다. 황하는 곤륜산(崐崘山)에서 발원하는데 아홉 굽이가 있다. 6번째 굽이는 토번국(土蕃國)에 있고 3번째 굽이는 당나라에 있다. 나루의 남북 양안에는 나루터 성이 있는데 남북이 각각 4정 정도이며 동서는 각각 1정 정도가 된다. 이 약가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많아, 왕래하는 사람들을 서로 태우려 하였다. 배 삯은 한 사람당 5문이고 노새 한 마리는 15전이다. 황하의 남쪽은 제주(齊州) 우성현에 속하고 북쪽은 덕주(德州) 남쪽 땅에 속한다. (840.04.11)……재를 마친 후 남쪽으로 35리를 가서 하중절도부에 도착했다. 황하는 성의 서쪽 언저리로부터 남쪽을 향해 흐른다. 황하는 하중절도부 이북에서 남쪽을 향해 흐르다가 하중절도부 남쪽에 이르면 곧 동쪽을 향해 흐른다. 북쪽으로부터 부성(府城)에 들어가 순서문(舜西門)으로 나왔는데, 가까이에 포진관(蒲津關)이 있다. 관에 이르러 조사를 받고 들어갈 수 있었다. 곧 황하를 건넜다. 배를 띄워 다리를 만들었는데 넓이는 200보 남짓하였다. 황하가 서쪽으로 흐르는 곳에도 두 곳에 다리가 만들어져 있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과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물줄기가 합쳐진다. (840.08.13.)

엔닌은 황하~회수(淮水)~양자강(揚子江)~항주(杭州) 부근을 여행하면서 여러 차례 대운하(大運河)를 이용하였다. 아래의 ③에서 엔닌은 대운하의 굴착 역사와 함께 운하의 규모, 형태 등을 기록해 놓았고, 운하 양쪽에서 물소를 이용하여 배를 끄는 방식도 소개하였다. 특히 촌락, 관리 등이 숙박하는 관점(官店)이나 수관(水館, 安樂館) 그리고 운하의 수위를 조절하는 수문이나 갑문[常白堰] 등과 같이 운하를 따라 설치된 다양한 시설들을 기록하고 있다(838.07.26.; 839.02.22~02.23.).

③ 오전 10시경 녹사 이하 수수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수로를 따라 양주(揚州)로 향해 갔다. 물소 두 마리를 40여척의 방선에 매어 끌게 했다. 3척을 엮어 하나의 배를 만들거나 또는 두 척을 엮어서 하나의 배를 만들어 밧줄로 그것을 이어서 묶었다. 선두와 후미의 거리가 너무 멀어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으므로 서로 부르는 소리가 심하였으나 진행 속도는 제법 빨랐다. 운하의 폭은 2장 정도인데, 곧게 흐르고 굽어서 흐르는 곳은 없었다. 이 운하는 수나라 양제(煬帝) 때 굴착한 것이다. (838.07.18.)

인문 경관과 관련하여 엔닌은 당나라의 지방 행정구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당나라에서 처음 실시되어 주변국 고려와 일본의 행정구역체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도제(道制)가 주목된다. 이 때 ‘도(道)’라는 개념은 초기에 왕도와 지방사이의 활발한 소통과 교류를 표현하면서 이동과 관계를 강조하는 선적이고 동적인 개념이었다. 초기의 선적이고 동적인 도 개념은 한국의 경우, 후대로 오면서 점적이고 면적인 개념, 곧 정적이면서 닫혀 진 개념으로 변형되어 왔다(김순배, 2016, 41-42). 당나라의 15도(道) 체계는 송나라에 계승되어 15로(路)로 재편되었다. ⓐ에는 엔닌이 양주 관리로부터 전해들은 당나라의 15도 체계와 도-주-현의 행정 구역 소속 관계, 그리고 주요 도시 간 거리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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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당 15도 행정구역도와 장안성

자료: (좌) 戴均良, 2005, 3712, 唐時期中心區域圖(741년); (우) 小野勝年, 1967, 地圖, 唐長安圖

ⓐ 양주절도사(揚州節度使)는 7개의 주를 관할하는데, 양주・초주(楚州)・여주(廬州)・수주(壽州)・서주(徐州)・화주(和州)가 그것이다. 양주에는 7개의 현이 있다. 강양현(江陽縣)・천장현(天長縣)・육합현(六合縣)・고우현(高郵縣)・해릉현(海陵縣)・양자현(揚子縣)이다. 지금 이 개원사는 강양현 관내에 있다. 양주부는 남북이 11리, 동서가 7리, 둘레가 40리이다. 개원사의 정북쪽에 양주부가 있다. 양주에서 북쪽으로 3,000리를 가면 수도 장안이 있고, 양주부에서 남쪽으로 1,450리를 가면 태주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태주까지 3,000리 정도라 한다. 사람마다 말하는 바가 일정치 않다. 지금 이 양주는 회남도에 속하고, 태주는 강남서도(江南西道)에 속한다. 양주부 내에 비구와 비구니가 거주하는 절은 모두 49개가 있다. 양주 내에는 2만의 군대가 있어 7주를 총괄한다. 이들 주의 군대를 모두 합하면 12만 명이 된다. 당나라에는 10개의 도(道)가 있는데,14) 회남도 14개 주, 관내도 24개 주, 산남도 31개 주, 농우도 19개 주, 검남도 42개 주 등으로 총계 311개 주이다. 양주는 수도 장안에서 2,500리 거리에 있고, 태주는 수도에서 4,100리 떨어져 있다. 태주는 곧 영남도에 속한다. (838.09.13)

아래의 ⓑ 인용문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성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장안성을 둘러싼 성문들과 공덕사가 위치한 황성 내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장안성은 신(新)・구(舊) 두 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한(漢)나라의 장안성으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건축한 것이다. 장안은 한나라 이후 후주까지 대체로 수도였으며 신 장안성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신 장안성은 수나라 문제가 개황 2년(582)에 용수원(龍水原)에 조영한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로, 처음에는 대흥성이라고 불렀다. 당나라는 그 성을 이어받아, 이름을 ‘장안’으로 고쳤으며, 옹주성(雍州城)이라고도 하였다(小野勝年, 1967, 3권, 256).

당나라의 장안성은 주작대가(朱雀大街)를 중심으로 좌우로 구분되어 대가 동쪽은 좌가(左街), 서쪽은 우가(右街)라고 불렀으며, 때에 따라 이를 동성(東城), 서성(西城)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내부적으로 도성 중앙 북쪽에 황성(皇城)과 태극궁(太極宮)이, 그리고 태극궁의 북동쪽에 대명궁(大明宮)을 배치하였고, 좌가와 우가에 각각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라는 시장을 설치하였다. 좌가[동성]는 만년현(萬年縣)에, 우가[서성]는 장안현(長安縣)의 관할 구역이었다(小野勝年, 1967, 3권, 265). 엔닌은 장안에 840년 8월 20일부터 845년 5월 14일까지 약 5년간을 머물렀으며, 그의 거처는 황성 동쪽의 숭인방(崇仁坊)에 자리한 자성사(資聖寺)였다.

ⓑ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장안성 동쪽의 장경사 앞에 도착해 쉬었다. 절은 장안성 동쪽 통화문 밖에 있다. 통화문 밖에서 남쪽으로 3리 정도 가서 춘명문 밖의 진국사(鎭國寺) 서선원(西禪院)에 이르러 묵었다. (840.08.20.)……오전 8시경에 순원(巡院)의 압아가 문서를 작성하여 순관을 보내 우리들에게 공덕사(功德使, 불교를 통관하는 업무를 담당함)를 찾아뵙게 하였다. 좌가공덕사 호군중위(護軍中尉)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지내성사(知內省事) 상장군(上將軍) 구사량(仇士良)은 식읍 3천 호에 봉해진 사람이다. 승려 등은 순관의 안내에 따라 절에서 북쪽으로 가서 4개의 방(坊)을 지나 망선문(望仙門)을 들어가 이어서 현화문(玄化門)으로 들어갔다. 다시 내사사문(內舍使門)과 총감원(總監院)을 지나 다시 중문 하나를 들어가 공덕사 관아의 남문에 도착하였다. 문 안에는 좌신책보마문(左神策步馬門)이 있다. 모두 6개의 문을 지나서 공덕사 관아의 문서계에 이르러 서장을 전하고 처분을 청하였다. 장안에 오게 된 이유를 자세히 묻고, 다시 한 통의 서장을 작성하여 그 사유를 알리도록 하였다. (840.08.24.)

엔닌의 여행기에는 당나라 지방통치체제의 최말단 행정구역인 촌(村)과 방(坊)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아래의 ⓒ에서 공문서에 기록된 촌방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通典(통전)』(권3, 食貨, 鄕黨條)에 의하면, 도성 밖의 전야에 마을을 형성한 것을 ‘촌’이라 하고, 촌에는 책임자로서 일반 백성 가운데 선발된 촌정(村正)을 두었다. 한편 ‘방’은 성곽 안에 사는 주민들의 주거지를 인위적으로 구획한 행정구역으로, 현 또는 주의 치소와 같이 성곽이 존재하는 곳에 설치되었다. 방에는 방정(坊正) 1인을 두어 방문(坊門)의 개폐를 관장하고 방 안 주민들을 감찰하였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 각주 258).

ⓒ 사부(祠部)의 첩문. 상도(上都) 장경사(章敬寺) 신라승 법청(法靑)에 관한 일. 위 사람은 격(格)에 준하여 인연을 따라 여러 곳을 다니며 탁발 수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번에 여러 산에 가서 순례하고 더불어 의사를 찾아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 아마 여러 곳의 관수(關戍, 경비 초소), 성문, 가포(街鋪, 도로 검문소), 촌방(村坊)의 불당, 산림의 난야(蘭若, 작은 불당), 주현의 절간 등이 여행 사유를 잘 알지 못할까 두렵다. 청컨대 공험(公驗, 여행 허가 증명서)을 발급해 달라’고 하였다. (839.09.12.)

중국 정사(正史)에서 ‘촌’이라는 용어가 처음 보이는 것은 3세기 말에 간행된 『삼국지(三國志)』부터이며, 이후 남북조 시대의 사서에 산발적으로 기록되다가 당나라 때 행정구역 단위로 법령에 규정되었다고 한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45, 列傳, 제5, 乙巴素, 191년 04월, 각주 013). 당나라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도성인 한양(漢陽)에는 ‘방’이 설치되었고, 도성 밖 농촌에는 ‘촌’이 분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섬과 바다, 그 사이의 길

847년 9월 2일 당나라 적산포를 출항하여 귀국길에 오른 엔닌은 847년 9월 10일 일본 땅인 녹도에 8일 만에 도착하게 된다(그림 6). 그러나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엔닌 일행이 청해진(현재의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806)을 거쳐 일본으로 귀국했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15) 왜냐하면 엔닌을 태우고 귀국한 신라인 김진(金珍)과 그의 선박은 친(親) 장보고 세력이며 당시 신라 조정과의 정쟁 과정에서 희생된 장보고의 암살 배경을 고려한다면 김진의 배가 신라 조정에 의해 장악된 청해진을 방문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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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엔닌의 귀국 항로 예상도

주: Google Maps의 기본도 위에 엔닌의 귀국 노선, 경유 지명, 날짜 등을 추기한 것임.

엔닌 일행은 항해술에 능했던 신라인 김진의 배를 얻어 타고 적산포~웅주 앞바다(충남 태안반도 부근)~고이도~구초도~안도~녹도에 이르는 한반도 서남해안을 경유하였다. 엔닌이 귀국할 때 이용한 항로는 기존에 알려진 한-중 사이의 3개의 항로와 일치하진 않는다. 고대 한반도와 중국 간에는 3개의 항로, 즉 북부 연안항로(중국 산동반도 등주~발해만 노철산 하구~대련만 동쪽~한반도 압록강 하구~대동강 하구~옹진만~강화도~남양만), 중부 횡단항로(중국 산동반도 동단 성산두~황해 경유~한반도 옹진반도 장산곶 및 백령도 부근), 그리고 남부 사단항로(중국 양자강 하구 및 항주만~황해 경유~ 한반도 흑산도~영산강~전남 나주 회진)가 있었다(고경석, 2011. 98).16)

엔닌의 귀국 항로는 중부 횡단항로와 남부 사단항로의 일부 노선이 중복될 뿐이다. 따라서 9세기 전반 중국 적산포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는 이용 주체가 주로 당나라와 왕래하던 신라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당시 신라와 일본의 적대적 외교 관계는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다만 장보고가 암살된 841년 이전이나 청해진이 혁파된 851년(신라 문성왕 13) 이전에 엔닌의 귀국 사례처럼, 비공식적으로 장보고 세력에게 승선을 요구하는 경우는 일본인의 항해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래의 인용문 ①에서 볼 수 있듯이 장보고는 신라 조정과의 정쟁 과정에서 841년 염장(閻長, 閻丈)에 의해 살해되고, 이듬해인 842년 염장은 직접 일본 규슈에 와서 장보고의 죽음과 함께 그의 잔당이 일본으로 도망 올 경우 신라로 송환해 줄 것을 일본 조정에 알렸다(『속일본후기』 842.01.10.; 조성을 역, 2012, 287-288). 아래 ①에 등장하는 최훈(崔暈)이란 인물은 바로 염장이 말한 장보고의 ‘잔당’으로 볼 수 있으며,17) 엔닌의 표현처럼 국난(장보고의 암살 사건) 이후 당나라로 도망쳐 연수현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851년에 가서야 청해진이 철폐되기는 하나, 엔닌이 귀국하는 시점인 847년 9월경에는 신라 조정과 염장에 의해 장악된 청해진을 장보고에 호의적인 신라인(김진)과 일본인이 방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추론된다.

① 재를 들 시간에 연수현(漣水縣)에 이르렀다. 이 현은 사주(泗州)에 소속되어있다. 초주의 신라어 통역 유신언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연수현의 신라인에게 보냈는데, 안전과 아울러 체류할 수 있도록 해줄 것 등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현에 도착하여 먼저 신라방으로 들어갔다. 신라방 사람들을 만나보았으나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총관 등에게 머물 수 있도록 보증해 줄 것을 간곡히 구하였으나 매사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을 만났다. 그는 일찍이 청해진병마사(淸海鎭兵馬使)로 있었는데 등주의 적산원에 머물고 있을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름을 적어 남기고 약속하여 말하기를 “스님께서 불법을 구하여 귀국하실 때 반드시 이 이름을 적은 명함을 가지고 연수(漣水)에 도착하시면 제가 백방으로 힘을 써서 함께 일본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서로 약속을 한 뒤 그 사람 또한 신라로 돌아갔는데, 국난(國難)을 만나 도망하여 연수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금 만나보니 바로 알아보았고 그 정분도 소원하지 않았다. 그는 힘을 다하여 우리가 머무는 일을 도모하여 간곡히 보증해 줄 것을 청하였다. (845.07.09.)

이상에서 설명한 엔닌의 귀국 시 완도에 있는 청해진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근거로 그의 귀국 항로를 재구성하면 <표 1>과 같다. 그가 탄 김진의 배는 847년 9월 2일 당나라 적산포를 출항하여 정동쪽으로 항해하다가 신라 웅주(현재의 충청남도 일대)의 태안반도와 안면도 일대의 섬을 관찰하였고, 9월 3일에는 정북풍으로 바뀐 바람을 타고 동남쪽을 향하여 하루 동안 항해하였다. 9월 4일 밤 10시경이 되어 고이도(高移島, 현재의 전남 신안군 하의면 어은리 일대의 하의도로 비정)에 정박한다.18) 적산포로부터 고이도까지는 약 58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보인다.

표 1.

신라국 서남해안 경유 노정과 지명

일기 날짜 내용 기착지
수록 지명 기착지 사이
항해 시간
비고
唐 宣宗 大中 元年
新羅 文聖王 九年
日本 仁明 承和
十四年

847.09.02.
정오 무렵에 적산포(赤山浦)로부터 바다를 건넜다.
적산의 막야구(莫琊口)를 나와 정동쪽을 향하여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을 갔다.
(대당국)

赤山浦
*赤(山)浦,
赤山,
**莫琊口
적산포~
고이도
(약 58시간)
*적산포: 中國 山東省
威海市 荣成市 石岛管
理区 法华路
**막야구: 荣成市 镆铘岛
847.09.03. 3일의 날이 밝을 무렵에 동쪽을 향해 바라보니
신라국의 서쪽 산들이 보였다.
바람의 방향이 정북풍으로 바뀌어,
돛을 옆으로 기울여 동남쪽을 향하여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갔다.
新羅國
847.09.04. 4일 날이 밝을 무렵에 이르러
동쪽으로 산들이 있는 섬이 보였다.
높거나 낮거나 하며 이어져 있었다.
뱃사공 등에 물었더니 이르기를
"신라국의 서쪽 웅주(熊州,
지금의 충남 공주시)의 서쪽 땅인데,
본래는 백제국(百濟國)의 땅이다."라 하였다.
하루 종일 동남쪽을 향해 갔다.
동쪽과 서쪽에는 산으로 된 섬이
연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밤 10시가 가까워질 무렵
고이도(高移島)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광역시)의
서남 지역에 속한다.
섬의 서북쪽 100리 정도 떨어진 곳에
흑산(黑山)이 있다.
산의 모양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듣기로는 백제의 셋째 왕자가
도망해 들어와 피난한 땅인데,
지금은 300, 400 가구가
산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신라국)

髙移嶋
新羅國,
熊州,
百済國,
百濟,
*髙移嶋,
武州,
黑山
*고이도: 대한민국
전남 신안군 하의면
어은리 일대의 하의도
(荷衣島) ?
皐夷島(고려사, 세가,
권1, 太祖 총서, 909)
皐夷島城(고려사절요,
권1, 太祖 1년, 6월,
918.06.15)
羅州 河衣島
(세종실록, 121권,
세종 30년 8월 27일
경진 1번째 기사, 1448)
고이도~
구초도
(약 6시간)
847.09.05. 바람이 동남풍으로
바뀌어 떠날 수가 없었다.
밤 12시 무렵이 되어
서북풍이 불어 출발하였다.
847.09.06.
847.09.06~07.
오전 6시경에 무주의 남쪽 땅인
황모도(黃茅嶋)의 니포(泥浦)에 도착해
배를 정박하였다.
이 섬을 또는 구초도(丘草嶋)라고도 부른다.
너댓 사람이 산 위에 있기에 사람을 보내어
잡으려 하였으나
그 사람들은 도망가 숨어버렸으므로
잡으려 해도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신라국의 제 3재상(宰相)이
말을 방목하는 곳이다.
고이도로부터 구초도에 이르기까지는
산들이 있는 섬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동남쪽으로 멀리 탐라도(耽羅嶋,
지금의 제주도)가 보인다.
이 구초도는 신라 육지로부터
바람이 좋은 날이면
배로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잠시 뒤에 섬지기 한 사람과
무주태수 집에서 매를 키우는 사람 2명이
배 위로 올라와서 이야기하기를
"나라는 편안하고 태평합니다.
지금 당나라의 칙사가 와 있는데,
높고 낮은 사람 500여 명이며 경성
(京城, 지금의 경북 경주시)에 있습니다.
4월 중에 일본국 대마도(對馬島)의
백성 6명이 낚시를 하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는데,
무주의 관리가 잡아 데리고 갔습니다.
일찍이 왕에게 아뢰었으나
지금까지 칙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 무주에 감금되어
본국으로 송환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병으로 죽었습니다."라 하였다.
6일과 7일에는 일정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이 없었다.
黃茅嶋
(丘草嶋)
武州(4),
*黄茅嶋,
泥浦,
*丘草嶋(2),
新羅國,
新羅,
髙移嶋,
此(丘)草嶋,
躭羅嶋.
京城,
日夲國,
對馬
*구초도(황모도):
전남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및 창유리
일대의 상조도(上鳥島)와
하조도(下鳥島), 또는
조도면 서거차도리와
동거차도리의
西巨次島와
東巨次島 ?
草島·鳥島:
'새섬'의 차자표기 ?
草·鳥:
'새'의 훈(음)차 표기 ?
丘草嶋·巨趨島·巨次島:
*kVchV
(*구초~거추~거차)의 음차 표기
구초도~안도
(약 6시간)
847.09.08. 나쁜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고 두려웠으나
바람이 없어서 떠날 수가 없었다.
배의 사람들은 거울 등을 바치며
신에게 제사 지내고 바람을 구하였다.
승려 등은 이 섬의 토지신과 대인신(大人神),
소인신(小人神) 등을 위하여
향을 피우고
다 같이 본국에 도달할 수 있도록
불경을 외며 기원하였다.
즉 그곳에서 이곳 토지신과 대인신·
소인신 등을 위하여
≪금강경≫ 100권을 전독(轉讀)하였다.
오전 4시경에 이르러
비록 바람은 없었으나 출발하였다.
포구를 겨우 빠져 나가니
서풍이 갑자기 불어왔다.
곧 돛을 올리고 동쪽을 향해 갔다.
마치 신묘한 이치가 있어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산들이 있는 섬을 따라 그 사이를 가니,
남북 양쪽에 산과 섬으로
겹겹이 겹쳐져 느긋하게 퍼져 있었다.
오전 10시가 될 무렵
안도(雁嶋)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이곳은 신라의 남쪽 땅으로
왕실에서 말을 방목해 기르는 산이다.
동쪽 가까이에는 황룡사의 장전이 있는데,
띄엄띄엄 인가 두세 군데가 있다.
서남쪽으로는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
오후에는 바람이 다시 좋아져 배를 출발시켰다.
산들이 있는 섬을 따라
신라국의 동남쪽에 이르렀다가
큰 바다로 나아갔다.
동남쪽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鴈嶋 *鴈嶋, 新羅,
新羅國,
黄龍寺,
躭羅嶋
구초도~안도
(약 6시간)
*안도: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일대의
안도(安島)
기러기섬,雁島(전남
여천군 남면 安島里
안도,安島) (한글학회,
1983, 26)
贈突山郡鴈島李虞候
承潤(叢瑣,册十,詩○
麗水郡, 1897-1899)
後一時雁島着(朝鮮漁
業協會 第七回 巡邏報
告書 進達 件, 1899)
欲智島·安島·所安島
(韓國水産業 視察 復命
書 提出 件, 1905)
安島 北方(조선지지자료,
1911년경, 전라남도
突山郡 南面 備攷)
鴈(雁): '기러기'의
훈차 표기
安(안): 鴈(안)의 取音
표기, '안'의 음차 표기
鴈嶋>雁島>安島
안도~녹도
(약 48시간)
847.09.10. 날이 밝을 무렵에 동쪽으로
멀리 대마도가 보였다.
낮 12시경에 전방에
일본국의 산들이 보였다.
동쪽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후 8시경이 되어 비전국(肥前國)
송포군(松浦郡) 북쪽 땅인 녹도(鹿嶋)에
도착해 배를 정박하였다.
(일본국)

鹿嶋
對馬嶋,
肥前國,
松浦郡,
*鹿嶋
*녹도: 일본국 長崎県
北松浦郡 小値賀町
일대의 오지카시마
(小値賀島) ?
주1: ‘수록 지명’란의 지명 옆에 부기된 괄호 안 숫자는 해당 지명의 2회 이상의 빈출 횟수를 의미함.
주2: ‘비고’란의 ‘a > b’는 시간의 변화와 함께 지명 표기자가 a에서 b로 바뀌었음을 의미함.
주3: 항목 내의 윗별표(*)와 물음표(?)는 추정 자료를 뜻함.

다음날인 9월 5일 밤 12시가 되어서야 서북풍을 타고 남쪽으로 항해하여 9월 6일 아침 6시경에 무주(현재의 전라남도 일대) 관할의 구초도(丘草嶋, 黃茅嶋, 현재의 전남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및 창유리 일대의 상조도와 하조도, 또는 조도면 서거차도리 및 동거차도리의 서거차도와 동거차도로 비정)에 약 6시간이 지나 정박한다.19) 앞선 항해 시간에 비해 매우 짧았던 이유는 구초도 지점부터 항로를 동쪽으로 바꾸어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9월 7일을 구초도에 머물면서 서풍을 기다리다가 다음날인 9월 8일 새벽 4시에 ‘신묘한 이치’로 때마침 서풍이 불어 동쪽으로 항해하다 (잠시 왼편으로 멀리 완도 청해진 방향을 바라본 후) 약 6시간이 지난 당일 오전 10시경 안도[鴈嶋, 현재의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일대의 안도(安島, 雁島, 기러기섬)]에 도착한다(한글학회, 1983, 26).20) 이때의 짧은 항해 시간도 안도 부근에서 항로를 바꿔 일본이 위치한 동남쪽으로 가야 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안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당일 오후 경에 출항하여 동쪽으로 신라의 섬들 사이를 잠시 따라갔다. 얼마 지나 다시 동남쪽의 큰 바다를 향해 항해하다가 9월 9일을 배 위에서 지낸다. 다음날인 9월 10일 동이 틀 무렵에 동쪽으로 대마도가 보였고, 다시 낮 12시경에는 멀리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일본의 산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8시간이 지난 9월 10일 밤 8시에 일본국 녹도(鹿嶋)에 도착하게 된다. 안도로부터 녹도까지는 약 48시간이 소요되었다.

4. 결론

오전 10시경 해제(解除,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기도하는 일)하고 배에 올라 스미요시 오가미(住吉大神)에게 제사지냈다. (839.03.22.)……오전 10시경에 순풍을 얻기 위하여 스미요시 오가미(住吉大神)에게 제사지냈다. (839. 03.28.)……오전에는 스미요시 오가미(住吉大神)를 위하여 500권을 전독하고, 오후에는 가시이 묘진(香椎名神)을 위하여 500권을 전독하였다. (847.11.29.)……오전에 지쿠젠 묘진(筑前名神)을 위하여 500권을 전독하였다. 오후에는 마스우라소이(松浦少貳)의 영혼을 위하여 500권을 전독하였다. (847.12.01.)

839년 3월, 엔닌은 천태산으로의 구법 여행이 좌절된 후 귀국의 길에 올랐을 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847년 11월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여 집에 머무를 때도 무사 귀환을 도와준 신들에게 또 다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불경을 수백 번 읽었다.21) 그의 간절한 구법에의 염원은 낯선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는 힘이 되었고, 지친 순간과 거친 공간을 위무하던 9년 6개월간의 일기 기록을 탄생시켰다.

본 연구는 9세기 전반에 작성된 이 일기체 기행문에 대해 동북아시아 한・중・일 삼국 사이에서 펼쳐졌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을 횡단했던 한 인간의 활동을 길과 이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였고, 엔닌의 『구법행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과 개인의 감정들을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들의 이름을 중심으로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연구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길과 이름의 관점에서 『구법행기』의 개인 일기로서의 일상적인 생생함과 구체성을 관찬 사서와 비교하여 제시하고, 선행 연구에서 간과했던 지리적, 문화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여행기의 가치를 선별하고 재현하였다. 먼저 엔닌이 구법과 순례의 여행길에서 만났던 이름들을 크게 인명과 지명으로 나누어 그것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두 개의 장을 구성하였다.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법행기』에 기록된 사람들의 이름, 특히 당인과 신라인들이 살아간 삶의 역사와 문화를 ‘길 위의 사람들’이라는 장에 선별하여 소개하였다. 엔닌의 구법 여행기에는 불교 승려인 동시에 시간(새 달력 베끼기)과 공간(주-현-진-향-촌의 행정구역 체계, 오대산까지의 노정 기록), 인간과 자연(동해산과 유산 지형 관찰)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기록하는 그의 역사지리학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치밀한 견문과 관찰, 그리고 치열한 기록 습관은 당대 한・중・일의 관찬 사서 등이 소홀히 했던 중요한 역사적, 지리적 사실들(장보고의 신라 정쟁 개입과 당나라 책봉사 파견, 장보고의 사무역선 존재, 발해 사신의 존재와 이동 경로)을 『구법행기』에 수록하게 하였고, 이것이 바로 그의 여행기가 가지는 1차 사료로서의 귀중한 가치이다.

아울러 그 이름들을 통해 당나라의 국제성과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 사실(양주에서의 파사국과 점파국 상인의 활동)을 알 수 있고, 당나라 사람들(이덕유와의 대화를 통해 도교 중시와 회창폐불의 전조 확인, 피휘 관념, 쌀을 고르는 간미 과정, 메뚜기 피해와 민심의 동향, 각 절기의 풍속 등)과 재당 신라인들(산동반도 동남해안과 대운하 주변에 거주하는 재당 신라인들의 분포, 장보고가 건립한 적산법화원과 신라인들의 활동 등)이 만들어 간 일상의 삶과 그들이 형성한 다양한 문화 경관을 엔닌은 능숙한 문화지리학자의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 삶의 무대로서의 마을과 도시, 둘레의 자연 환경에 대한 묘사들을 ‘길 가의 자연들’이라는 장에 제시하였다. 즉 9세기 전반 당나라의 산과 강, 마을과 도시의 풍경을 오대산(오대산의 지형과 지명 분포, 그리고 평등 의식), 황하(약가구와 포진관에 위치한 두 곳의 황하도구 관찰), 대운하(대운하의 역사와 형태, 운영 방식 및 관련 시설 기록), 그리고 당나라 15도(道) 행정구역, 장안(도시의 역사와 공간 구조), 촌(村)과 방(坊) 등의 분포와 유래 등에 대한 엔닌의 기록을 소개하고 설명하였다.

끝으로 엔닌이 귀국길에 경유했던 한반도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섬 이름을 기초적으로 분석하여 엔닌 일행이 신라와 장보고 사이의 정쟁으로 인하여 완도의 청해진을 방문하지 못한 사실을 확인하고, 고이도(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의 하의도로 비정?), 구초도(현 전남 진도군 조도면 상・하조도 및 동・서거차도로 비정?), 안도(현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로 비정)의 지명 위치 비정을 시도하였다.

9세기 전반 구법의 일념으로 당-신라-일본 사이의 육로와 해로의 길을 횡단하며 엔닌은 국가(nation)와 정치(politics)라는 존재와 그것들이 가지는 소극적인 포용성과 적극적인 배타성을 몸소 감지하였다. 우주 속 아주 작고 초라한 인간 존재와 그 존재가 품은 웅대한 믿음과 바램을 억누르기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의 국가와 정치는 한시적이고 한계적인 것들이었다.

1) 이후 본문에서 『입당구법순례행기』(엔닌, 838~847)의 내용 일부를 직접 인용할 때는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김문경, 2001)와 『입당구법순례행기』(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 do?itemId=ds)의 번역문을 참고하여 인용문 앞이나 문장 끝의 괄호 안에 해당 음력 날짜를 제시하였다. 또한 인용문 안에 있는 괄호들은 필자 또는 상기 번역문에 의해 문맥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추가한 주석들임을 밝힌다.

2) 교감 및 표점된 원문은 다음과 같으며, 이후에 제시되는 인용문의 원문은 생략한다: “暫住海龍王廟. 從東海山宿城村至東海縣一百餘里, 惣是山路. 或駕或步一日淂到. 従六日始東北風吹累日不改. 恐彼九隻舩逢雷雨惡風之後, 不淂過海欤(歟) 憂悵在懷. 僧㝳(等)為求佛法起謀数度未遂斯意. 臨㱕國時苦設留却之謀事, 亦不應遂彼探覓也. 左右盡議不可淂留. 官家嚴撿不免一介. 仍擬賀(駕)第二舶㱕夲國. 先在揚楚(揚)州, 覓淂法門并諸資物留在第八舩. 臨畄却所將隨身之物, 胡洪島至州之會並皆与他. 空年(手)駕舩但增歎息. 是皆為未遂求法耳.” [김문경, 2001 145-146,; 入唐求法巡禮行記, 卷 第一, 開成四年, 四月, 八日, 제2선이 정박한 곳에 이르다(0839년 04월 08일(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ds&levelId=ds_001_0020_0040_0080&types=o]

3) 평화와 안정의 시대에 길은 서로 다른 사람들과 물자, 정보들을 매개 시켜주는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지만,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전쟁과 전염병이 발생할 때는 그 길을 통해 나로 향하고 있을 미지의 적과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하루 빨리 차단해야 하는 위험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또한 특정 개인이나 공동체의 자랑스런 정체성과 자긍심을 타자에게 표현할 때는 자신의 이름이나 사는 곳의 지명을 널리 과시하지만, 특정 개인이나 지역에서 범죄나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는 자신의 이름과 지역의 이름을 숨기고 외부에 알려지길 꺼려한다. 이런 까닭으로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가 중국 우한(武漢)에서 발생했을 때(2019.12~2020.3), 중국 우한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모든 길은 차단되었고, ‘우한 폐렴’이나 ‘대구 폐렴’처럼 특정 지명의 사용을 둘러싼 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4)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미국의 역사학자 라이샤워는 주일미국대사도 역임하였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난 미국 선교사 매큔(George M. McCune, 1908~1948)과 함께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McCune-Reischauer Romanization)을 1937년에 창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5) 헤이안시대는 794년 간무천황(桓武天皇, 재위 781~806)이 나라시대의 수도였던 헤이조쿄(平城京, 현재의 奈良県 奈良市 二条大路 南3丁目)로부터 현재의 교토(京都府 京都市 上京区 일대)인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개설한 1185년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지방 호족 세력에 의한 막부의 개설은 이후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전까지 약 700년간 지속되었다.

6) ‘밀(密)’이란 험한 수행을 쌓은 자만이 아는 비밀이란 뜻으로, 밀교는 비밀 주법(呪法)을 전수 및 습득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불교 내 한 종파이다. 밀교는 석가의 가르침을 경전에서 배워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현교(顯敎)와 대치된다(박석순, 2009). 한편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갖춘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만다라(曼茶羅)’는 부처가 증험한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상징주의적 교의(敎義)를 본받고자 하는 밀교가 특히 존중하였다고 한다.

7) 이병로(2006, 320-326)는 씨족의 계보를 정리한 일본 헤이안시대 초에 편찬된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을 근거로, 엔닌 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인 사이쵸(最澄) 또한 백제계 이주민 계통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당나라에서 만났던 장영(張詠) 등의 재당 신라인들이 많은 원조와 보호를 무상으로 베푼 이유를 동일한 한반도 이주민 후손이라는 공통점에서 찾고 있다(846.02.05.; 847.07.21. 등)

8) 그가 9~15세까지 수행했던 다이지지(大慈寺)는 현재 栃木縣 栃木市 岩舟町 小野寺 2247에 위치하며, 그곳에는 앞서 언급한 엔닌과 그의 『구법행기』를 세계에 알린 라이샤워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과 “Great World Citizen”(위대한 세계 시민)이라 쓰인 작은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Google Maps, 大慈寺, https://www.google.com/maps).

9) 그 외에도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당시 백제군에 의해 사로잡힌 당나라 포로를 일본에 바친 기사가 『일본서기(日本書紀)』(齊明紀 6년, 660년)에 기록되어 있다(김문경, 2001, 240): “겨울 10월에 백제 좌평 귀실복신(鬼室福信)이 좌평(佐平) 귀지(貴智) 등을 보내어 당 포로 100여 인을 바치게 하였다.” 이 기록은 한국과 중국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법행기』(840.02.28.)에는 문등현 적산촌에서 오대산으로 가는 도중 모평현(현재의 山东省 烟台市 牟平区) 부근에 있던 오대관 앞 한 비문에서 엔닌이 확인한 사실이다. 그 비문에는 당나라 포로 100여 명 중 일본을 탈출하여 귀국한 왕행칙이란 사람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재(점심)를 마친 후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15리를 가니 길옆에 왕부군묘(王府君墓)가 있었다. 돌에 묘지(墓誌)가 새겨져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지석은 땅에 넘어져 있었다. 북쪽 바닷가 포구를 따라 20여 리를 가서 오대촌(仵臺村) 법운사(法雲寺)에 이르러 숙박했다. 지관인(知館人)이 대관(臺館)을 맡아 관리하였다. 이 객관은 본래 불교 사찰이었는데 후에 관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오대관이라 불렀다. 객관 앞에 탑 2기가 있다. 한 탑의 높이는 2장이고 5층이며 돌을 다듬어 짜서 만들었다. 또 하나는 높이가 1장으로 철을 주조해 만든 7층탑이었다. 그 비문에 말하기를 “왕행칙(王行則)이란 사람은 조칙을 받들어 동번(東蕃, 백제)을 정벌하다 패하여 같은 배에 타고 있던 100여 명과 함께 적에게 사로잡혀 왜국(倭國)에 보내졌다. 그 한 몸만이 도망쳐 숨었다가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인덕(麟德) 2년(665) 9월 15일에 이 보탑을 세웠다”라고 운운하였다.”

10) 회창폐불이 발생한 원인으로는 당시 불교 교단의 내부적 퇴폐와 면세의 특권을 갖는 사찰 승니(僧尼)의 증가로 인하여 국가 재정이 어려워진 점과 함께, 직접적으로는 무종이 도사(道師) 조귀진(趙歸眞)을 신임하여 재상 이덕유와 함께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42년 이후 불교의 승니와 외래 종교의 성직자들에 대한 환속 및 추방이 강행되었고, 심지어는 마니교의 포교자인 마니사를 처형(843.04 중순) 하기도 하였다. 845년에는 대탄압의 명령이 내려져 사찰 4,600개소, 작은 절 4만여 개소가 폐쇄되고, 승니 환속 26만여 명, 사전(寺田) 몰수 수십만 경(頃), 그리고 사찰 노비의 해방이 15만 명에 이르렀다. 다만 장안(長安) ・뤄양(洛陽)의 양경(兩京)에 각각 사찰 4곳, 승려 30명, 각 주에는 사찰 1곳, 승려 5∼20명을 두도록 허락하였다. 다음해 무종이 죽고 선종이 즉위하자 다시 사찰 건립이 허용되는 조서(詔書)가 시행되었다(네이버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846.05.01.)

11) 일본과 신라와의 적대적 관계는 엔닌의 귀국 과정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엔닌을 자신의 배에 태워 귀국을 도왔던 신라인 김진(金珍)에 대해 일본의 태정관(太政官) 공문은 ‘당나라 손님(唐客)’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나라에 있을 때 엔닌은 김진을 분명 신라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신라인의 도움으로 견당사의 일원이 귀국한 점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태정관의 10월 13일의 공문을 받았는데, 당나라 사람 김진 등에게 후하게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847.11.14.)

12) 엔닌이 당나라에 도착하기 1년 전인 837년(신라 희강왕 2년) 3월에 수도 장안의 국학(國學)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라 학생의 수가 216명에 달했다는 『당회요(唐會要)』(권36, 附學讀書)의 기록이 있다(권덕영, 2010, 14). 이로부터 30여년 뒤인 868년(신라 경문왕 8), 최치원(崔致遠, 857~?)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하였다.

13)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은 중국의 오대산을 모방하여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월정사를 창건하고 주변 산의 이름도 오대산(五臺山, 1,565 m)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자장은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하여 중국의 오대산과 지형이 유사한 곳을 물색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오대산도 대체로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완만한 능선을 가진 토산(土山)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 월정사를 둘러싼 오대산에는 중국처럼 중대(中臺)를 비롯하여 북대・남대・동대・서대가 상징 지명으로 배치되어 있고, 문수보살과 관련된 창건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14) 당나라 정관 원년(627) 태종(太宗)은 전국을 10도로 나누었고, 그 후 현종(玄宗) 개원 21년(733)에 5도를 더 설치하여 엔닌이 여행할 당시에는 15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종 시기 15도의 주와 현의 수는 주 328개, 현 1,573개였다(小野勝年, 1964, 216; 김문경, 2001, 5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

15) 김문경(2001, 12)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해제를 쓴 이유진(2009c)에는 정확한 근거 제시 없이 엔닌이 청해진(지금의 완도)을 거쳐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쓰고 있다.

16) ① 북부 연안항로는 연안을 따라 이동하여 유사시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는 안전한 항로였다. 그러나 바람을 이용하기 어렵고 운항 거리가 너무 길어 운항 시간이 많이 걸린다. ② 중부 횡단항로는 654년 일본 사절단이 ‘신라도(新羅道)’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 항로를 개설한 주체는 신라인으로 판단된다. 이 항로는 620년대 중반 고구려가 북부 연안 항로를 차단하자 백제와 신라가 대 중국 교류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가 620년대 중반부터 654년 이전까지의 기간 중 이 항로를 개설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660년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백제를 정벌할 때 이 항로를 이용하였고, 이후 신라의 중심 항로가 되었다. ③ 남부 사단항로는 중국 남부의 무역항과 한반도 및 일본을 연결하려는 필요성에서 개설된 항로였다. 중부횡단항로가 정치 외교적 필요에 의하여 국가의 주도 하에 개설된 것과 달리, 이 항로는 경제적 필요성에 의하여 민간 상인이 개설을 주도한 항로였다. 따라서 당시 당-신라-일본을 왕래하며 교역을 주도하였던 재당 신라인과 신라 상인들이 이 항로를 개척하고 활성화 시킨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개설 시기와 관련하여 나말여초 신라 선승들의 귀국로, 승화 연간 일본 사신선의 귀국 경로, 절동 지역에 식량을 구걸한 신라인 170명의 사실,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흑산도에 대하여 언급한 엔닌의 사례 등을 종합해 볼 때 늦어도 9세기 중반 경에 이 항로가 이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경석, 2011, 98).

17) 최훈이란 인물은 속칭 제12랑(郞)이라고 불린다. 장보고의 부하로 그의 명을 받아 당나라 산동 및 양주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신라 신무왕이 죽고 아들 문성왕이 즉위하면서 장보고와의 관계는 악화된다. 그 과정에서 장보고가 염장에 의해 암살이 되면서 최훈 또한 당나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초주의 연수현 안에 위치한 신라방에서 잠복하며 살았다. 그는 연수향 출신의 신라인으로 추측된다(小野勝年, 1969, 4권, 21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 각주 463).

18) 김문경(2001, 528, 각주 230)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847.09.04., 각주 648)는 ‘고이도’를 모두 ‘하의도’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비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皐衣島(고의도)’는 『고려사』(권1, 건화 4년, 914)의 기사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같은 문헌[世家, 권제1, 태조 총서, 태조가 수군을 지휘해 진도를 함락하다, 梁 開平 三年(909년) 己巳]에 ‘皐夷島(고이도)’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또 다른 ‘영광현(靈光縣) 고이도(古耳島)’ (세종실록, 121권, 세종 30년 8월 27일 경진 1번째 기사, 1448) (현 전남 신안군 압해읍 고이리 古耳島)가 있다. 이 ‘고이도’는 엔닌의 여행기에서 묘사한 “동쪽과 서쪽에는 산으로 된 섬이 연이어져 끊이지 않았다”와는 주변의 지형이 유사하나, 흑산도의 위치가 엔닌이 표현한 “섬의 서북쪽 100리 정도”와는 다르게 남서서 방향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고지명 위치에 대해 추후 심도 있는 비정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19) 구초도(황모도)의 위치에 대하여 김문경(2001, 529, 각주 233)은 ‘거차군도의 한 섬’으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847.09.06., 각주 654)는 ‘거차 군도의 최동단에 위치하는 조도(鳥島)’로 비정하였다. 현재 관련 고지명 자료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 추후 지명 조사가 필요하다.

20) 김문경(2001, 531, 각주 238)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입당구법순례행기(847.09.08., 각주 665) 모두 안도를 “전남 완도의 동남쪽에 산재한 섬 중 하나”라고 비정하였으나 특정하지는 않았다. 후자의 동일한 각주에는 라이샤워(1955, 403)의 경우 전남 여수(麗水)의 남쪽 30 km에 있는 안도(安島)의 ‘安’과 ‘雁’의 음이 유사하고 지리적으로도 적당하여 ‘안도’에 비정하였다고 언급하였다. 필자의 경우, ‘鴈嶋 > 雁島 > 安島’의 지명 변천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음을 <표 1>의 비고란에 간략히 고증하였다. 따라서 엔닌이 847년 9월 8일에 잠시 기착한 ‘鴈嶋(안도)’는 현재의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에 위치한 ‘安島(안도, 기러기섬)’로 비정된다. 엔닌이 경유한 중국 적산포에서 일본 녹도 사이의 신라국 서남해안의 세 곳의 기착지(고이도, 구초도, 안도)에 대한 지명 위치 비정은 추후 별도의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21) 일본인은 도처에 있는 신들을 향해 평생 끊임없이 기도한다. 집에서는 신[가미]과 조상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집을 나와서는 길가 곳곳에 있는 신사(神社)를 향해 기도한다. 6세기경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일본 고유의 신앙인 신도(神道)와 불교는 깊이 습합된다. 일본 사람들은 ‘죽음’ 이후는 불교에 의지하고 ‘영원한 지금’의 ‘삶’을 즐겁고 최선을 다해 살며 항상 신에게 기도한다(박규태, 2005, 5-19). 빈번한 자연 재해와 위험에 방치되어 있는 현대 일본인의 신앙은 흡사 무사 항해를 끊임없이 기원하던 엔닌의 이 기도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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