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0 April 2020. 143-160
https://doi.org/10.22776/kgs.2020.55.2.143

ABSTRACT


MAIN

  • 1. 서론

  • 2. 미군 기지촌 연구에 대한 비판적 고찰4)

  • 3. 붐타운, 용주골

  •   1) 집성촌에서 기지촌으로

  •   2) 혼종, 결합, 배제의 공간

  •   3) 용주골의 달러 경제망과 종속된 근대성

  • 4. 남겨진 마을: 용주골의 경제적 쇠락과 변화

  • 5. 결론

1. 서론

경기도 파주시 연풍1리에 위치한 일명 ‘용주골’은 ‘한국의 텍사스’라고 불리며 1960-80년대 국내 최대의 미군 기지촌 중 하나이자 성매매 집창촌으로 널리 알려졌던 지역이다.1) 한때 주한미군을 통해 미국에서도 회자되었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미군 철수 이후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촌으로도 유명해졌으나 1970년대 초반 이래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용주골의 흥망성쇠는 한국전쟁과 함께 우후죽순 생겨난 미군 기지촌의 한 생애주기를 보여준다. 특히 용주골은 미군기지의 이전 이후 낮아진 개발압력으로 인해 융성했던 시기의 골목과 가옥, 사람들이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지역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기지촌이 남긴 흔적과 기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기지촌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기지촌 연구의 맥락에서도 미군기지가 존속하거나 최근에 이전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논의되면서 용주골을 포함한 파주 지역의 기지촌은 한 층 더 소외되어왔다.

기존 지정학 연구의 흐름에서도 기지촌은 군사시설의 배후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지거나, 국제정치 및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국가 또는 미군과 위안부2) 양측이 대립했던 지역으로 이해되어 왔다. 한국에서 기지촌을 다룬 연구들은 주로 위안부에 대한 국가의 제도나 정책을 다루거나, 위안부의 기억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 흐름은 제국-국가에 의한 기지촌의 발생 맥락과 그 폭력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미군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 시켜 왔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다만 이 연구는 앞서 논의된 폭력과 착취가 실제로 작동했던 ‘마을 공간’과 사람들의 일상사에 주목함으로써 지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기지촌의 형성과 의미를 살피고자 했다. 이를 통해 기지촌이 포주와 기지촌 여성의 착취관계로 점철된 젠더화된 공간(gendered space)만이 아니라 전후 가난했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꾸려갔던 생활공간이었으며, 미군이 떠난 이후에도 당시 만들어진 물적 토대와 기억들이 여전히 지역의 현재를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이 연구는 사회경제적 공간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용주골 지역의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파주 지역의 기지촌을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할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 미군 기지촌으로서 용주골의 형성과 전성기, 쇠락 과정을 추적한다. 연구 방법으로는 문헌 조사와 함께 현장 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주요하게 사용했다. 우선 미군 기지촌과 용주골 관련 기존 연구와 더불어 과거 신문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 기지촌 관련 논란과 이에 대한 사회적 담론 등을 살펴보았다. 앞서 밝혔듯 용주골은 번성했던 당시 기지촌의 공간구조와 거주민들이 남아 있는 지역으로, 우리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약 2년간 골목과 가옥에 대한 실측 조사와 함께 과거 지역에 거주하였던 또는 현재 거주 중인 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3) 초기에는 파주 기지촌 출신이자 기지촌의 과거를 수집해온 지역활동가로부터 인터뷰 대상자를 소개받았으며, 이후에는 스노우볼 샘플링을 적용했다. 이를 통해 기지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의사결정자들과 기지 경제의 기반을 이루었던 상공인들, 용주골에 거주했던 미군 위안부들을 만났으며, 이들에게 기지촌에서의 일상적 행위와 특정 공간의 활용, 기지촌 변화에 대한 의견 등을 물었다.

논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미군 기지촌 관련 기존 연구에 대해 비판적 고찰을 수행하였고, 3장과 4장은 용주골의 흥망성쇠 과정을 사회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분석하였다. 3장은 작은 농촌 마을이 기지를 중심으로 변모하는 과정과 함께 경제의 호황을 맞은 기지촌이 미군기지에 온전히 종속된 성매매 중심의 상업공간으로 구성됨을 밝혔으며, 4장은 미군기지가 떠난 이후 경제적으로 쇠락한 용주골에서 어떤 변화와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기술하였다. 5장에서는 연구 결과를 요약하고 향후 연구 방향을 제시하였다.

2. 미군 기지촌 연구에 대한 비판적 고찰4)

대한민국의 기지촌은 일제시대의 공창제라는 정부주도의 근대적 성매매 시스템 위에 이식된 미군문화, 미군정과 전쟁을 통해 증폭된 가난, 군사정권, 경제개발과 국가발전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사 그 자체이다. 또한 기지촌은 단순히 여성의 몸을 사고파는 성매매의 차원을 넘어 식민주의, 군사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 자본주의, 계급과 인종 등 복잡한 층위의 이데올로기들로 구성되어 있다(이나영, 2010, 171).

일반적으로 기지촌은 “정책적・전략적・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주둔하는 병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발달되며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을 형성하는 군사취락”으로 정의된다(김조영, 1978, 81). 위 발췌문에서 이나영이 주장했듯이, 한국 사회에서 기지촌은 군사시설과 이에 부속된 경제권이라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이에 따른 복합적 권력 관계의 작동으로 폭력, 착취, 개발 등의 실천이 행해진 공간으로 볼 수 있다. 그간 UN 마담, 양색시, 양갈보, 위안부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던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중심으로 한국 기지촌을 분석한 연구들은 상당히 풍성한 성과를 낳았다. 생애사 등의 형식을 이용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함께(이나영, 2006; 2007; 햇살사회복지회, 2011; 2012; 2013; 박정미, 2015; 김준현, 2016), 기지촌 여성을 소재로 한 소설, 영화 등에 대한 분석 등 다양한 인문학적 접근이 이루어졌다(김연숙, 2003; 박선애, 2004; 김영옥, 2010; 송상덕, 2017; 오창은, 2019).5) 그러나 이들 연구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착취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기지촌의 복합적인 권력 관계를 다루지는 못했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들은 “탈식민 한국사회의 시공간에서 식민경험이 있는 한국 남성이 (신)식민지배자 남성(미군)과 식민지 (한국)여성을 사이에 두고 벌인 초남성성의 경쟁”(김영옥, 2010, 321-322)과 같이 기지촌 공간을 젠더화된 권력 관계를 중심으로 상상하거나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김영옥(2010), 박정미(2015) 등은 기지촌 여성들을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호명하면서, 국가에 의한 기지촌 성매매 정책은 일종의 예외 상태를 창출했음을 주장하였다. 박정미(2015)는 “미군을 위해 살리거나 미군에 의해 죽도록 내버려 두는” 존재로서의 기지촌 여성은 냉전 질서 하에서 한국 주권의 허약성과 역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25).6)

동시에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기지촌 여성들이 제국의 작동과 그 폭압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민족의 경계를 확인케 하는 상징으로 전유되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나영은 기지촌이 “‘퇴폐적인 미군 문화, 더러운 양공주, 마약과 섹스로 얼룩진’ 고립된 섬으로 존재하면서 이후 대한민국 국민에게 성적・도덕적 경종을 울려주거나, 제국에 대한 분노를 촉발시킬 수 있는 선택적 상징”(2010, 171)으로 작동하였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우리에게 재현된 기지촌이라는 공간은 “양키들에게 몸 파는 ‘양공주’로 대변되는 모습이거나 처참하게 죽은 윤금이의 시신이 연상시키는 분노와 절망감”(2006, 353)이라고 주장하였다.7) 민족주의 진영의 “화려한 수사와 이데올로기의 대치 전선 뒤에 실질적인 여성들의 삶의 모습과 저항의 경험이 파묻혀버렸다”(이나영, 2010, 190)는 지적처럼, 기지촌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재현의 정치가 가지는 문제점은 비교적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8) 이렇듯 기지촌 여성이 폭력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상징으로 도구화되었다는 문제의식은 기지촌 여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문제 제기가 기지촌 여성을 제국 권력에 대한 피해자에서 저항자 또는 대항자로만 전치 시켰다는 점에서, 기지촌 여성의 사회관계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남는다.

해외의 연구자들은 여성주의적 접근과 더불어 한미관계에 초점을 둔 연구를 주로 진행하였다. 선구자적 연구를 진행한 Katharine Moon은 1970년대 한미 외교정책의 주요한 행위자이자 피해자로 기지촌 여성의 역할과 삶에 주목하였다.9) 그는 이 여성들이 국가안보라는 명분을 위해 도구화되었으며, 미 군부의 이익을 수용하려는 한국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주요한 지표로 작동했다고 주장하였다(Moon, 1997, 13). 이후 기지촌이라는 공간에 초점을 둔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예를 들어 문승숙은 기지촌이 한국의 주권이 유예되고 미군 당국에 의해서 대체된, 사실상 식민화된 공간이라고 주장하였다(Moon, 2010, 54).10)Hwang(2010)의 연구는 주한미군이 냉전의 주요한 목표였던 봉쇄(containment)와 통합(integration)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지적하면서, 미군 기지와 기지촌이 한국과 미국 간의 ‘사적이고 내밀한(intimate)’ 냉전 경계 지대 – 완전히 미국도 한국도 아닌 공간 - 로 작동했음을 주장했다. 기지촌이라는 공간 속에서 미군과 한국인의 교류가 ‘불완전한’ 제국주의와 냉전 통합을 동시에 만들어냈으며, 주한미군은 미군의 군사력을 표상하는 하드파워뿐만 아니라 미국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는 소프트파워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기지촌과 이곳의 거주민들이 전후 한국의 역사와 민족적 상징(imaginary)에서 불가결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주장하였다(Hwang, 2010, 10). Gage(2013)는 한국 동두천 기지촌을 사례로 제국이라는 개념이 기지 밖 일상공간에서 미군들 간 또는 미군들과 점령지 주민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동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는 Hwang(2010)과 유사하게 미군 기지촌을 한국, 미국, 제3세계가 혼종된 일종의 인종화 및 젠더화된 접경지대로 보았다. 기존의 젠더 중심의 관점에 인종적인 관점을 더해 일상공간에서의 다양한 사회관계를 보여주었다는 의의가 있으나, 미군들의 경험과 목소리만을 담았다는 점에서 기지촌에서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데 한계를 지닌다. 미국이 동아시아의 내부에서 새로운 동아시아 주체성을 구성하게 되었다는 주장과 같이(Chen, 2010, 8), 이상의 연구들은 기지촌이라는 공간이 미국이라는 제국의 존재가 한국의 주권과 주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구체적 계기이자 현장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기지촌 공간에 초점을 둔 국내 연구는 이나영과 김원 등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의 연구는 주로 미군 당국과 한국 정부의 정책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기지촌 공간에 작동했던 다양한 권력 형태와 제도적 장치들을 분석했다. 이나영(2010)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스트 사회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기지촌 공간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는 식민권력 간 성매매 관련 제도의 승계와 더불어 일제시대 공창 지역이 미군 기지촌으로 변모한 점을 지적하며, 한국 기지촌의 형성과정이 제국 권력의 작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지촌이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의 명분으로 어떻게 국가의 직접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분석하면서, “대한민국에서 기지촌 형성의 과정은 식민지배자의 피식민지 여성에 대한 지배, 군대 위안소의 유지, 남성 성욕의 ‘안전’한 배출과 성병 통제, 외화벌이와 국가안보를 위해 필수적인 과정”(196-197)이라 규정하였다. 다른 논문에서 이나영(2007)은 1950년대의 기지촌 형성과정을 조직적・제도적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기지촌은 한국전쟁 이후 외화획득이라는 한국 정부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자국 병사들의 안전한 성매매라는 미군 당국의 생명 정치적 이해관계가 부합한 공간적 산물로 나타난다. 특히 이 논문은 기지촌의 공고화가 국가 스케일의 경제 발전과 긴밀히 연관됨을 주목함과 동시에, 미군기지의 설치 또는 확장으로 기존 촌락의 경제구조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소위 ‘기지촌 경제’가 지역 스케일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 또한 간략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기지촌을 “이질적이며 위계적인 두 남성문화와 주체들이 양공주의 몸을 매개로 만나는 곳이자 충돌하는 곳이요, 대한민국의 주권과 민족공동체에 관한 질문을 늘 동반하게 하는 곳”(6)이라 규정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 연구는 기지촌 여성에 대해 배타적인 초점을 둠으로써 기존의 접근과 크게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다. 김원(2015)은 기지촌에 대한 미군과 한국 정부의 개입과 제도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분석했는데, 특정지역 지정 등의 공간적 장치의 도입, 기지촌 정화운동을 통한 기지촌 여성 신체에 대한 규율 권력의 작동, 한미친선협회 등 거버넌스 체제의 동원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특정지역의 지정에 따른 공간적 효과로 기지촌이 게토화 되면서 기지촌 외부의 국민들에게 상대적인 안정감을 제공했음을 주장했다. 이 연구는 국가권력의 정책과 제도화에 따른 기지촌의 공간적 변화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정책의 시행이나 제도의 작동이 지역에 따라 상이한 사회관계와 공간성에 의해 차별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간과하였다.

구체적인 지역을 사례로 한 공간적 접근은 1970년대 말 소수의 지역지리학적 접근 이후 상당 기간 부재하였다가(김조영, 1978; 김재수, 1980), 최근 부산, 송탄, 춘천 등에 대한 지역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차철욱, 2011; 금보운, 2016; 김희식 등, 2018; 정충실, 2019). 김조영(1978)의 연구는 한국 기지촌에 대한 선구적인 공간적 접근이라 할 수 있는데, 경기도 파주시를 사례로 기존 농촌 취락의 형태적・기능적 변모에 초점을 맞추어 기지촌의 발달과 쇠퇴 과정을 분석했다. 다만 그는 인구 구성, 취락 구조, 토지이용, 주요 산업 등의 변화만을 다루며 기지촌에서의 다양한 사회관계 및 권력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1) 즉, 지역지리학의 전통을 충실히 따라 외부에서 지역을 조망하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기지촌의 변천 과정을 피상적으로 분석하는 데 그쳤다. 김재수(1980)의 연구는 김조영과 유사한 방식으로 동두천을 분석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두 연구 모두 기존의 농촌 지역을 “순수”한 것으로 보고, 미군 주둔으로 인해 그 지역성을 상실했다고 기술한다는 것이다.12)

최근 본격적으로 나타난 공간적 접근의 연구들은 기지촌 여성에 주목하거나 기지촌을 문제의 공간으로 고착화한 기존의 접근과는 달리 기지촌의 공간성에 초점을 두고 지역주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다. 차철욱(2011)은 2006년까지 부산에 자리했던 하야리아 미군기지와 주변 마을 간의 경제적・문화적 교류 과정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교류가 이 지역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장소성을 형성했다고 주장하였다.13)정충실(2019)은 주민들에게 있어 미군은 단지 ‘폭력적 존재’가 아니라 ‘유혹적 존재’이기도 했으며, 위안부를 포함한 주민들이 미군의 주둔으로 다양한 피해를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자율적이며 능동적인 삶”을 살았음을 강조했다(269).14) 또한 이 연구는 기지촌의 문화와 물품이 춘천 내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차별화된 양상으로 나타났고, 춘천의 지역개발에도 영향을 주었음을 설명하였다. 정충실의 연구가 가해자-피해자 프레임을 넘어 미군이나 기지촌 여성, 주민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도전하였다면, 금보운(2016)은 “폭력적인 미군과 억압받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기지촌에 대한 인식을 고착화한 기존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기지촌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활동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 ‘기지생활권’을 제안하였다. 이 연구는 정부의 경제 담론을 주민들이 그대로 수용했다고 가정했다는 점에서 담론분석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를 안고 있으나, 미군 철수에 대한 위기 담론이 정부 주도로 구축되었으며 기지생활권의 위기는 미군의 주둔에 따른 주민 생활공간의 해체에서 이미 시작된 것임을 동두천을 사례로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김희식 등(2018)의 송탄을 사례로 한 연구는 미군기지를 둘러싼 지역개발정치에 초점을 두었다. K-55기지 건설과 확장에 따라 주민들이 토지수용 등의 피해와 더불어 사회기반시설 확충 등 지역개발의 혜택을 누렸고, 그 결과 지역경제가 미군기지에 더욱 종속되는 변화과정과 함께 기지 이전을 둘러싼 지역갈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최근의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기지촌의 지리정치경제적 역동성을 제대로 드러내는 연구는 아직 부재한 형편이다. 그간 페미니스트 연구들은 젠더화된 공간으로서의 기지촌과 여성의 처지에 대해 유의미한 성과를 남겼으나, 기지촌 여성들을 하나의 균질한 집단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지위를 피해자 또는 저항자로만 한정하여 규정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마을에서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주변화하였다. 최근의 공간적 접근들은 이러한 한계들을 넘어서 기지촌에 대해 확장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제국주의, 인종주의, 가부장제, 군사주의 등 중층적 권력 관계들의 매개이자 산물로서 기지촌에 접근하기보다는 여전히 지역 지리적 접근에 매몰되어 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 연구는 이러한 기존 연구의 한계들을 극복하고 기지촌이라는 공간의 변화과정을 다양한 사회관계의 역동성에 초점을 두고 입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기지촌은 일반적으로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단위를 이르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미군을 접대하는 여성들의 거주지로서 이미지화되어 미군들의 유흥가, 혹은 성매매 공간으로 협소하게 인식된다”는 금보운(2016, 3)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며, 이 장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한 이나영(2010)의 기지촌에 대한 정의를 구체적인 지역적 맥락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특히 특정 지역을 사례로 하는 연구들에서 주로 간과해왔던 기지촌 마을 공간의 물질성(materiality)에 주목함으로써 다양한 권력 관계들의 작동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고,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할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경기도 파주시 연풍리에 발달했던 한국 최대의 기지촌 중 하나인 ‘용주골’에 대한 사례 연구를 진행하였다. 여기서는 기지촌의 형성과 몰락을 중심으로 용주골의 변화를 1) 전성기의 기지촌 (1950-70년대), 2) 쇠락하는 기지촌 (1980-90년대), 3) 재생을 시도하는 기지촌 (2000년대 이후) 등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해 설명한다. 1970년대 미군기지의 이전과 2000년대 도시재생사업의 시행은 지역의 변화에 있어 큰 기점이 되었다.

3. 붐타운, 용주골

1) 집성촌에서 기지촌으로

용주골이 위치한 파주시는 임진강을 끼고 북한과 마주한 접경 지역으로 일찍이 미국의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하였다. 김조영(1978)의 조사에 따르면 1978년 당시 파주에는 35개의 기지촌이 있었으며,15) 43개의 미군기지 중 8개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림 1은 1970년대 파주의 인구 분포를 나타낸다. 1970년 기준 파주의 220개 리 중 35개 리가 기지촌으로 분류되며,16) 인구수 기준으로는 16.4만 명 중 약 4.8만 명으로 파주시 전체 인구의 29.2%가 기지촌에 거주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통해 파주시의 주민들이 미군기지에 의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인구수가 가장 많은 10개 리 중 절반이 기지촌이었으며, 용주골(연풍1리)의 인구는 약 4,700명으로 35개 기지촌 중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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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파주 지역의 인구 분포 (출처: 김조영, 1978; 내무부, 1972)

한국전쟁 이전 용주골은 성가, 조가, 박가, 윤가 등 네 개의 집성촌이 모여 살던 농업 중심의 작은 마을이었다.17) 큰 길가를 따라 세워진 집들 외에는 마을 전역이 논밭이었던 이 지역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미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파주군, 1995, 761). 마을 사람들에게 ‘대추벌’로 불렸던 연풍 2리까지 포함하면 연풍리 주변으로 크고 작은 기지 다섯 개가 배치되었다. 특히 1953년 파주읍에 주한미군 2사단이, 1956년 지역 동편에 미군 휴양시설 (Recreation Center 1)이 세워지면서 동네가 본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후 고향으로 돌아온 토착민들은 소유했던 토지가 미군 부대 용도로 징발된 상황에 직면했다.18) 주민들은 토지 징발에 대한 불만을 사실상 표출할 수 없었으며(파주군, 1995, 762),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도로 신설이나 부대 관련 시설 배치 등 미군에 의한 마을 공간의 변화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많은 토착민이 미군 부대를 따라온 외지인들에게 토지를 판매했고, 기존의 농지는 주거공간 또는 서비스업소로 변화해갔다.

당시 용주골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미군을 상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거나(파주군, 1995, 762),19) 미리 전입한 가족 또는 친지를 따라온 경우가 많았다. 김조영(1978)에 따르면 1962년부터 1970년 사이 용주골의 인구는 연평균 5~10%가량 증가했으며, 여타 기지촌과 유사하게 20~24세 여성의 인구 비중이 크게 높았다(1977년 기준). 이는 마을 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위안부 여성의 나이대가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3년 기준 등록 집계된 연풍리 내 위안부의 수는 295명이었으며,20) 1969년에는 800명으로 증가해 미등록자로 추산된 2백여 명까지 합치면 당시 연풍리에서만 1천여 명의 위안부가 활동했다. 이는 마을 주민의 삼 분의 일에 달하는 것이었다.21) 농업 위주의 1차 산업은 유흥업과 그에 파생된 서비스업 위주의 3차 산업으로 급격히 전환되었고, 하루아침에 생활 기반이 변화한 원주민들과 달러 벌이를 위해 모여든 외지인들, 미군들이 한데 섞여 기지촌의 일상을 이루게 되었다.

2) 혼종, 결합, 배제의 공간

1950년대 후반부터 용주골은 기지 문화의 총아로 간주되었으며(파주군, 1995, 761), 1960년대 파주군 내 관광 업소 74곳 중 20개가 용주골에 위치했던 것을 보면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홍성철, 2007). 그러나 용주골은 1km가 채 되지 않는 대로변을 중심으로 형성된 리 단위의 작은 마을이었으며, 북측 명학산과 남측 갈곡천 등의 자연지형으로 다른 지역과 분리되어 있었다. 한 인터뷰 대상자는 갈곡천 건너의 연풍2리조차도 용주골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고 전했다.22) 그림 2는 2019년 현재 지도에 1960년대 용주골의 주요 시설을 표기한 지도로서 그림 3(좌)과 더불어 마을의 크기와 형태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한국인 대상 성매매촌으로 알려진 ‘용주골’은 갈곡천 남단의 연풍2리(‘대추벌’)를 뜻하며,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으로서 발달했던 ‘용주골’은 갈곡천 북단의 연풍1리이다. 이 연구는 미군 기지촌으로서 용주골을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적 범위를 연풍1리로 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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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연풍리 전경 및 1960년대 주요 시설 분포

개발 압력이 비껴가면서 용주골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지촌 형성 당시의 골목 구조가 그대로 보존된 모습을 보인다. 기지와 직접 면해 형성된 마을에는(그림 3, 우) 대로변을 중심으로 미군을 상대하였던 각종 상업과 서비스 업소가 자리했고, 골목 안쪽으로는 주로 한국 사람을 상대하였던 작은 업소들과 주거공간이 있었다. 이곳에서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급작스럽게 한 공간으로 결집한 사람들 사이에는 각종 갈등, 충돌과 경계가 만들어졌으며, 현재 남아 있는 공간에서도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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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2019년 용주골의 모습 (좌, 출처: 파주시 내부자료), 기지(구. RC#1)와 대면한 마을 (우, 출처: 필자 촬영(촬영일: 2019.09.02.))

마을 북단의 ‘집단골’은 당시 미군 내의 흑백 갈등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곳이다(그림 2). 이 곳은 마을의 안쪽에 있다 하여 집성촌 주민들에게 ‘안용주골’로 불리는 구역의 일부로, 미군기지 입성 후 민가 속에 흑인들만 다니는 클럽이 들어서면서 ‘집단’, ‘집단촌’ 등으로 불렸는데, 이와 같은 인종화된 공간(racialized space)은 기지촌 또한 인종간 공간적 분화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인터뷰에 따르면 MP(Military Police)가 수시로 돌아다니면서 집단골로 들어가는 백인들을 통제하거나 싸움을 진압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그림 4).24) 이러한 흑백 갈등은 위안부들의 ‘계급’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인터뷰를 진행한 과거 미군 상대 위안부로 일한 경험이 있는 여성은 흑인 미군 병사를 상대하는 위안부를 ‘흑인 여자’라고 불렀으며,25) 당시 장미회, 민들레회 등으로 불렸던 위안부 자치회 또한 흑인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별도 조직되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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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한국의 텍사스: 바에서 행패부리다 출동한 미 헌병에게 체포되어 연행되는 미군병사(출처: 동아일보, 1967.02.13.)23)

기지촌에서의 인종갈등과 이에 따른 공간분화와 더불어, 기지촌 위안부 여성에 대한 공간 통제 또한 기지촌의 주요한 권력 작동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미군 위안부에 대한 통제와 관리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한 여성은 오후 네 시만 넘어가면 “동네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반짝반짝하고 방망이 들고 지키”는 등의 감시 활동이 있었다고 전했다.27) 용주골 대로변 중심에는 당시 위안부들의 살림 짐 등 각종 물건을 나르던 리어카꾼이 모인 공터가 있었는데, 이곳이 주요한 감시 공간이었다고 한다. 용주골에서는 커다란 빌라에 단 하나의 작은 출입문이 있는 건물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건물들 또한 위안부 감시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것이었다. 그림 5는 여러 건물을 연결해 증축하여 대규모의 주거시설을 만들고,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하나만 낸 대표적인 사례로, 당시 위안부들에 대한 통제 목적의 물리적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물리적 통제와 함께 ‘검진 패스’와 같은 제도적인 장치가 작동했다.28) 현재 용주골에서 할머니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과거 ‘평화의원’이라는 성병 진료소로, 미군 위안부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여성들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줄을 서서 성병 검진을 받았다. 연풍리에 위치한 두 곳의 고아원에는 전쟁고아들과 더불어 미군과 위안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생활했다. 19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한 인터뷰 대상자는 한 반에 서너 명 이상의 혼혈아들이 있었으며, 하천에 버려진 사생아를 보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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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과거 위안부 숙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출처: 필자 촬영(촬영일: 2019.09.02.(좌), 2019.07.01.(우)))30)

미군과 한국 남성들 사이에도 흑백 갈등과 유사한 경계가 지어졌다. 기지촌의 중심을 차지했던 ‘홀’이 한국인 출입금지 공간이었던 한편, 용주골 남쪽에 한국인을 상대하는 성매매업소가 자리했던 ‘대추벌’(연풍2리)은 미군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31) 길가에는 미군의 물건을 훔쳐 도망가는 ‘슬렉키(slicky) 보이’나 당시 ‘재건대’로 활동했던 넝마주이들이 배회했으며(Hwang, 2019), 반대로 미군에 의한 민간인 및 위안부 폭행 치사 사건이 꾸준히 보도되었다.32)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주로 호남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 갈등은 물론이고33) ‘자리’를 놓고 싸우는 포주들 간의 다툼이 벌어졌다.34) 앞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물리적 공간이 어떻게 국가나 미군의 제도 및 지역의 다층적인 권력 관계와 결합하여 실질적인 경계와 통제 수단으로 작동했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크고 작은 영토적 경계와 갈등 상황 속에서도 대다수의 기지촌 사람들은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달러 경제망 속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3) 용주골의 달러 경제망과 종속된 근대성

기지촌 사람들은 보초, PX 판매자, 하우스보이 등으로 미군 부대 내에서 근무하거나 기지촌의 상권에서 생계를 꾸렸다. 그림 6은 주민들의 기억을 통해 복원된 1960년대 용주골 상업시설의 업종 분포이다. 업종별로 분류하면 식료/잡화점(17%), 양품점(8%), 양복점(8%), 클럽(7%), 선술집(6%) 순으로, 대부분의 업종이 서비스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970년대 동두천시의 파주시의 기지촌을 대상으로 조사한 김재수(1980), 김조영(1978)의 결과와 유사하여 기지촌 특유의 상업공간 구성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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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1960년대 용주골 내 상업시설 분포(출처: 현장사진연구소35))

특히 위안부의 성매매를 중심으로 한 유흥업은 기지촌 경제의 축이었다. 특히 ‘홀’은 기지촌에서 돈이 가장 많이 돌았던 곳으로,36) 당시 국가 외화벌이의 핵심 공간이었다. 홀에서 팔려나간 버드와이저 등의 수입 맥주, 소위 ‘관광 맥주’ 판매는 국가사업으로서 한 병당 2달러씩 세금이 부과되었으며,37) 미군 전용 홀을 통해 국가가 벌어들인 금액은 1964년 기준 9백 7십만 달러 이상으로 이는 당시 한국이 벌어들인 총 외화의 10% 수준이었다(이나영, 2007, 31-32 재인용). 기지촌 형성 초기에 ‘집을 한두 칸 헐어’ 세워졌던 홀은 1965년경부터 본격 대형화되어 마을 대로변에 ‘진주클럽’, ‘아리랑클럽’, ‘로맨스클럽’과 같은 대형 홀이 들어서기 시작했다.38) 그림 7은 과거 대형 홀로 사용되었던 두 건물의 평면도로 당시 사람들의 동선을 짐작해볼 수 있다. 보통 홀 옆에는 구름다리 등으로 이어진 안채가 있어 홀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이곳 또는 다른 포주집이나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성매매를 하는 식이었다. 구체적으로 그림 7(좌)에서 홀과 복도로 이어진 중정을 둘러싼 작은 ‘숙소’들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안채’로 사용되었다. 그림 7(우)의 건물은 1층 전체를 홀로, 2층과 3층은 안채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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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용주골 대형 홀의 평면도 (출처: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내부자료(실측일: 2019.08.02.))

홀은 많은 사람이 생계를 의존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홀 주인과 종업원, 포주, 스냅 사진사 등 직접 홀에 드나들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소비로 파생된 각종 사업이 성행했다. 대로변에는 미군의 소비를 반영한 보석상과 화방, 기념품 가게, 양복점, 사진관 등이 자리하였고 위안부들의 머리를 올리거나 맞춤복을 제작하는 미용실과 양장점, 국제결혼이나 비자를 대행하는 오피스가 들어섰다. 골목길에는 한국 사람들을 상대하는 식료품점, 약국, 선술집, 튀김집, 환전을 위한 ‘달러방’, 아이들을 위한 문구점 등이 자리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당시 밖으로 난 길에 틈만 있으면 구멍가게를 차리고, 가족들이 자는 방을 줄여서라도 셋방을 냈다고 회상한다. 임대업이 활성화되면서 당시로써는 큰 규모의 빌라들이 신축되기도 했다. 셋방에는 미군 위안부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사를 책임지는 식모들과 숙소에 둘 가구를 만드는 목수 등 기지촌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길가에는 위안부들의 잦은 이사로 인해 리어카꾼들이 상시 대기하였고, 외제 생필품이나 간식이 담긴 바구니를 멘 행상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행상은 주로 삼사십 대의 여성들로, 인터뷰 대상자들은 이러한 ‘양키 물건 장사’로 아이들을 키운 사람들이 많다고 증언했다.39) 이들은 벤치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위안부들을 상대하거나 가정 방문 판매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외제품을 본격적으로 취급하는 상회를 열거나 버스 혹은 기차를 통해 서울의 남대문 시장으로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인터뷰 대상자는 기지촌 경제를 ‘전표(군표) 경제’라고도 했는데, 이는 기지촌에서 PX 물품 유통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군표는 군대가 보증하는 특수 화폐로서 원칙적으로는 미군기지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기지촌에서 군인들이 물건을 사거나 화대를 지급할 때도 사용했다. 군표로는 PX 물품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PX 물품 유통은 그 시작부터 성매매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위안부들은 미군을 통해 물품을 구입하여 상점에 넘기고 ‘커미션’을 받거나 ‘다이알 비누’ 같은 생활용품을 챙겼으며, 일부 양복점은 영어를 구사하는 점원을 고용해 위안부들의 전표를 물건으로 바꾸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40) 미군 정부가 군표를 경신할 때마다 “남대문통 한국은행 부근에 산재하여 있는 ‘딸라’ 암시장은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는 기사는41) 당시 한국에서 기지촌 경제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성매매와 PX 물품 밀매를 축으로 한 경제적 번영 속에서 사금융이 성행했으며,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전당포도 생겨났다. 한 인터뷰 대상자는 기지촌에서 돈을 벌려면 장사가 아니라 ‘돈놀이’를 했어야 했다고 증언했다.42)

이러한 달러 경제의 번영은 미군기지의 쓰레기마저도 자원이었던 시대상과 맞물려 기지촌을 ‘근대성의 첨단(Hwang, 2010, 88)’으로 만들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이는 가로등 및 직통전화 등 기반시설의 빠른 도입이나 ‘닭튀김’, ‘플레이보이’ 잡지와 같은 미국 문화에 대한 접근성, 극장이나 피아노학원 등의 새로운 문화와 교육에 대한 앞선 경험을 의미했다. 한 인터뷰 대상자는 당시 위안부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이나 화장법, 맞춤복 등을 예로 들면서 “파주가 이거지(최고지). 파주 용주골 문화는 못 따라오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43) 그러나 이러한 도회성과 상대적 풍요는 미군기지에 완전히 종속된 것이었다. 기지촌 경제의 주요한 축이었던 성매매와 PX 물품 유통은 미군 고위관계자의 결정에 따라 그 흥망이 결정되었으며, 앞서 보았듯 기지촌 대부분의 상업과 임대업은 이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이었다. 미군의 외출 금지(off-limit) 명령이 떨어지면 상인들이 가서 ‘읍소’를 하거나44) 위안부를 앞세우고 캠프에 몰려가 데모를 벌였던45) 사건들은 미군기지에 대한 마을의 의존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군은 학교와 교회를 건설하고 “크리스마스에는 탱크에 장식을 하고 초콜릿과 사탕을 던져” 주었지만,46) 이는 미군의 주둔 방식으로서 설계된 대민지원정책 중 하나였으며, 한국 정부 또한 주한미군에 대한 대우 차원에서 주둔지인 기지촌에 우선적으로 물질적×행정적 혜택을 준 것이었다(파주군, 1995, 764). 결국 1970년대 미군기지가 이전 및 축소하기 시작하면서, 번성했던 마을은 빠르게 그 기반을 잃어갔다.

4. 남겨진 마을: 용주골의 경제적 쇠락과 변화

“다들 미군 따라 간 거죠. 이제까지 벌어먹고 산 게 이것 뿐이니까. 미군 따라서 동두천이고 오산이고 다 따라 갔어. 남은 사람들은 여기에 땅 좀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대부분은 땅도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도망치듯 미군 따라 갔다니까.” (용주골 주민, 60대 남성, 2018.11.16. 인터뷰)

1970년대 들어 용주골은 주한미군기지 재편으로 인해 전례 없는 인구 감소를 경험했다. 미군 상대로 영업하던 상인과 포주, 위안부 여성들이 재배치된 미군을 따라 이동했는데, 집이나 땅을 통째로 버리고 대구, 왜관, 칠곡, 포항과 같은 ‘후방’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많았다.47) 동시에 청장년층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1968년 용주골 내 연풍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한 인터뷰 대상자는 4학년 때인 1971년부터 학부모들 사이에 ‘전학 붐’이 불었다고 했다. “미군들이 떠나서 경기가 없고 교육환경이 안 좋다”는 이유로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전학을 갔으며, 특히 연신내 부근으로 이사한 사람들이 많았다.48)

그럼에도 용주골은 1980년대까지 경기를 유지했는데, 대형 홀이 많아 문산, 판문점 등 파주 외곽에 위치한 부대에서도 찾아오는 미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는 위안부들이 브로커를 통해 마을을 벗어나 미군 훈련 장소로 ‘출장’을 나가는 일이 잦아지다가, 1990년대에는 상권이 완전히 쇠퇴하게 되었다.49) 한편으로는 용주골 대신 갈곡천 너머 ‘대추벌’이라고 불렸던 연풍2리의 경제 규모가 커지는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본래 이곳에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 업소가 소수 자리하고 있었는데, 1990년대 후반 서울 천호동, 신길동, 미아리 일대의 윤락가들이 폐쇄되면서 규모가 커졌다.50) 이와 함께 미군기지가 있던 당시 용주골이 가졌던 ‘한국의 텍사스’라는 미군 대상 기지촌이라는 지역적 정체성은 한국 사람들이 찾는 대표적인 집창촌으로 탈바꿈했다. ‘새로운’ 용주골은 남성들 사이에 은밀하게 공유된 경험과 맞닿아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소설, 만화, 영화 등의 소재로 활용되며 재생산되었다. 미군기지와 위안부에 의존하던 용주골의 경제는 다리 건너 대추벌에서 일어나는 한국 사람들의 성매매와 윤락여성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여성들을 구매하는 주체가 미군에서 한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용주골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해 주었던 것은 여전히 여성들의 성매매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떠나고 나서는 그때만큼 벌기는 힘들죠. 그런데 저기 건너 있는 언니들이 몰고 오는 사람들 덕분에 저녁 장사는 나쁘지 않았어요. 치킨, 호프집들이 그래도 남아 있는 건 그런 이유라고 볼 수 있죠. 저 지역에 들어가는 중국집 배달원이나 택배 기사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거기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하더라고.”(용주골 주민, 60대 여성, 2019.07.09. 인터뷰)

용주골 대로변의 건물 소유권 변화 양상은 위에서 언급한 마을의 경제적 쇠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림 8). 1990년 이전까지 대체로 매매를 통해 소유권이 변화했던 반면, 그 이후로는 가압류/가처분, 경매의 비율이 크게 높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8년의 높은 수치는 IMF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1990년대 초부터 이미 ‘원치 않는 처분’이 늘어난다. 이의 원인을 살펴보면 ‘보증을 잘못 서서’ 소유권이 기관으로 이전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개인들 간의 소유권 변화가 많았다. 용주골 내부에서 소유권이 이전된 경우 근처에 주소지를 가진 이웃에 의한 처분이 많았는데, 이는 용주골에서 사금융이 빈번했다는 증언을 뒷받침하며 경제적 파산이 사회적 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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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용주골 대로변의 건물 소유권 변화 (1965-2000)51)

2019년 현재 용주골에서는 주택 소유자들의 방치나 수리 지연으로 폐허가 된 빈 집과 가게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52) 1996년과 1998년에 발생한 대규모의 수해로 상당수의 건물이 리모델링 또는 신축되었으나, 파주시(2016)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용주골의 30년 이상 노후주택 비율은 84%(234호)이며, 과소 필지 수는 80.2%(489호), 무허가 주택 비율 또한 43%(120호)에 이른다. 불량 도로(4m 미만 도로)에만 접한 주택 비율은 75%(209호)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길목도 많다.53) 골목길마다 자리했다는 각종 상점은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물건을 그대로 둔 채 방치되거나 손님이 거의 없는 상태로 문만 열어둔 가게도 많은 형편이다(그림 9). 운영하는 가게들은 대체로 대로변에 입지해 있는데, 2016년 당시 용주골 대로변과 연풍시장 점포 217개소 중 약 40%인 80개소가 공실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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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빈 집과 빈 가게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과거 클럽, 숙소, 숙소(2층), 목욕탕)
(출처: 필자 촬영(촬영일: 순서대로 2019.09.03., 2019.08.02., 2019.09.02., 2019.07.01.))

건물과 함께 인구도 점차 고령화되는 추세로, 2016년 기준으로 용주골 인구의 54%가 65세 이상으로 나타났다. 기초생활수급자도 약 15%로 전국 단위 비율인 3%에 비해 크게 높은 수준이다. 과거 위안부였던 여성들 중 폐지를 주우며 기초생활수급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는데, 한 인터뷰 대상자는 “무슨 행사만 있으면 너도나도 (마을 번영을 위해 기부) 했던 손 큰 엄마들이 지금은 다 돌아가시거나 이사 가시고” 지금은 살기 어려운 사람들만 지역에 남아있다고 전했다.54) 동시에 인근 공단으로 일을 나가거나 이들과 함께 입국한 외국인의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위안부 숙소로 쓰였던 한 다세대 주택은 가구의 약 삼 분의 이가 외국인으로, 이들은 장기간 공실이었던 집들을 채워가고 있다. 이러한 지역의 변화에 대응해 2000년대 중반부터 지역재개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바로 이듬해인 2005년, 경기연구원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용주골의 재개발 논의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날 ‘파주시 발전방안과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지역공동체 심포지엄’에서는 “태생적 원인이었던 미군의 철수로 성매매 집결지, 일명 ‘용주골’에 대한 장래 발전방안 마련이 필요하다”면서 지역특화상품으로 성교육장(‘젠더파크’) 개발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재개발 논의는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다. 용주골은 주한미군공여지 관련 개발 대상지에 포함되었으나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했으며, 2013년 도시 환경정비 예정 구역으로 지정되어 재개발을 시도했으나 결국 사업성 미흡 평가를 받았다.55) 이후 용주골의 개발은 ‘도시재생’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낙인으로 작동했던 ‘용주골’이라는 이름이 다시 소환되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파주시의 도시재생사업으로 갈곡천 둑길에 용주골의 기억을 형상화한 디자인의 난간과 작은 화단, 조형물 등이 설치되기도 했다(그림 10, 좌).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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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2017년 ‘쉼 있고 아름다운 골목길’ 조성 사업으로 조성된 조형물
(좌, 출처: 필자 촬영(촬영일: 2019.12.18.)) 6070 창작문화거리 조성안(우, 출처: 파주시(발표일: 2019.04.12.))57)

2019년 현재 용주골에서는 행정안전부의 ‘특수상황지역 개선 사업 지원(2017-2021)’을 받는 ‘창조문화밸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의 골자는 ‘6070 창작문화거리’ 조성으로, 1960년대와 70년대의 거리 복원을 통해 관광 자원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그림 10, 우). 이를 위해 현재 남아 있는 점포를 근대 문화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으로 리모델링하고, 빈 점포를 임대해 소규모 공작소를 입점 시켜 새로운 인구 유입과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사업은 파주시의 도시재생과를 중심으로, 마을에서는 지역 상인으로서 미군기지가 있던 시기에 유년시절을 보냈던 이장, 부녀회장 등의 ‘마을 지도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다만, 여러 차례 시도된 계획들의 실효성, 지지부진한 개발 속도, 개발 방향에 대한 의문, 개발 예산의 부족 등으로 해당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가 현저히 낮고, 사업 용역 업체나 입점 상공인 등 개발 추진체가 변동하면서 사업에 난항을 겪는 중이다.

5. 결론

이 연구는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파주 용주골의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기지촌의 마을 공간을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할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 용주골의 변화상을 ‘전성기의 기지촌(1950-70년대)’, ‘쇠락하는 기지촌(1980-90년대)’, ‘재생을 시도하는 기지촌(2000년대 이후)’ 등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작은 집성촌이었던 용주골은 한국전쟁 이후 마을 주위에 입성한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확장되었으며, 마을 경제가 미군기지에 온전히 종속된 성매매 중심의 상업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1970년대 초 미군기지가 철수하면서 마을은 심각한 인구 유출을 겪었으나, 곧 기지의 자리를 한국인 대상 성매매촌이 대체하며 유흥업 중심의 경제 생태계를 비교적 최근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지역경제는 지속적으로 쇠락하면서 2000년대 이후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한 도시재생사업이 시행되고 있으나 아직 큰 변화의 가능성은 포착되지 않는다.

용주골의 반세기 역사는 기지촌의 형성이 상대적으로 고립된 접경지대에 서비스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회경제적 공간구조를 고착화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시대적인 특수성 속에서 미군기지는 하나의 거대한 ‘자원 창고’로 기능했으며, 성매매를 중심으로 미군에 온전히 종속된 기지촌 특유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 연구에서는 지역의 사회경제적 발전 경로를 추적하며 이러한 마을 공간의 물질성에 주목했는데, 이는 기존 기지촌 관련 연구들에서는 간과하였던 부분이다. 물적 장치는 제도나 사람들 사이의 권력 관계와 결합해 구체적인 일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앞에서 보였듯 전성기의 용주골에서 흑인 구역, 위안부 숙소 등의 물적 장치는 기지촌 사람들을 통제하는 직접적인 경계로 작동했으며, 미군이 떠난 후에는 지역과 마을 주민들의 자산이자 근거가 되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도시재생 등 각종 변화 시도의 맥락을 설명해준다.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의 자산과 경험이 서비스업 중심으로 굳어진 상황에서 지역 활성화에 대한 시도는 ‘과거의 영광’, 즉 새로운 ‘소비자’를 찾아오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지역(local) 차원에서 기지촌을 다시 읽어냄으로써 기지촌이 국가와 제국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된 공간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고자 했다. 즉, 폭력과 착취가 실제로 작동했던 마을 공간과 사람들의 일상사에 주목함으로써 지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기지촌의 형성과 그 의미를 살피고자 했다. 우리가 본 기지촌은 미군기지에 의존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살아갔던 ‘생활공간’이었으며, 이때 만들어진 물적 토대와 기억들은 다양한 스케일의 담론과 접합해 현재의 지역 동학과 사람들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연구는 대표적인 기지촌이었던 파주 용주골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조망과 함께, 우리가 현재진행형의 기지촌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기지촌의 마을 공간에 주목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다만 이 연구는 비교적 광범위한 시간대의 역사를 사건사 중심으로 다룸으로써 시대별로 분석의 세밀도에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서술적인 한계가 있다. 관련해 향후 세 가지 논의가 더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타지역에 위치한 기지촌의 역사적 경로를 살펴봄으로써 이 연구에서 다룬 사례와의 유사성과 차이를 밝히고 그 의의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지역 간의 역사적 경로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서 기지촌의 거버넌스에 대해 논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깊이 다루지 않았으나, 파주에서 기지촌 형성 당시 지역의 발전 또는 자원 통제의 명목으로 형성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거버넌스는 현재의 정치 동학과 직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마지막으로 기지촌의 서발턴 주체를 중심으로 기지촌의 일상을 더욱 세밀하게 살펴보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다. 이는 국가 제도와 담론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소외되고 착취당한 이들의 실제 삶을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기지촌에서 작동한 권력구조의 억압성과 착취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진 ‘용주골’은 마을 주민들이 ‘대추벌’이라고 부르는 연풍 2리로, 미군 기지촌이 들어섰던 곳은 연풍 1리이다. 본 연구에서 칭하는 ‘용주골’은 연풍1리에 한정하며, 내용에 따라 공간적 범위가 확장되는 경우 리 명칭을 사용한다(그림 2 참고).

2) 서울고등법원 2018.2.8. 선고 2017나2017700 판결에 따르면, “1957년경부터 대한민국 내 각 지역에 소재한 미군 주둔지 주변의 미군을 상대로 한 상업지구(속칭 ‘기지촌’)에서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였던 여성들”을 ‘위안부’로 정의한다. 이 연구에서는 위안부라는 호칭에 대하여 위의 정의를 따른다.

3) 현지조사는 2017년 겨울부터 수시로 진행되었으며, 구체적인 인터뷰 일자는 다음과 같다. 2018.05.18., 2018.06. 27., 2018.07.27., 2018.10.19., 2018.11.02., 2018.11.16., 2019.05.03., 2019.05.17., 2019.05.23., 2019.07.09., 2019.07.11., 2019.07.16.

4) 여기서는 미군기지(military bases or military camps)와 관련한 연구는 제외하고 기지촌(camptowns)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5) 이행선(2007, 34)은 시대별 기지촌 소설을 시대별로 정리하였는데, 최근 작품들을 추가하여 아래 표로 새롭게 작성하였다.

연대 작품명
1950년대 별빛 속의 계절(한말숙, 1956), 난영(오상원, 1956), 쑈리 킴(손병수, 1957), 해방촌 가는 길(강신재, 1957),
오발탄(이범선, 1959), 깃발 없는 기수(선우휘, 1959), 보수(오상원, 1959)
1960년대 황선지대(오상원, 1960), 안나의 유서(오영수, 1963), 왕릉과 주둔군(하근찬, 1963),
분지(남정현, 1965), 엘리제 초(박순녀, 1965)
1970년대 아메리카(조해일, 1972), 낙타누깔(황석영, 1972), 분노의 일기(신상웅, 1972), 해벽(이문구, 1972),
황구의 비명(천승세, 1973), 경외성서(송기원, 1974), 몰개월의 새(황석영, 1976),
돛대도 아니 달고(윤흥길, 1977), 중국인의 거리(오정희, 1979)
1980년대 밤과 요람(강석경, 1983), 낮과 꿈(강석경, 1983), 외로운 증언(박석수, 1982), 철조망 속 휘파람(박석수, 1982),
동거인(박석수, 1987), 문신의 땅(문순태, 1987), 고삐(윤정모, 1988), 공존의 그늘(이윤섭, 1988)
1990년대 이후 은마는 오지 않는다(안정효, 1990), 쑥고개(박석수, 1993),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복거일, 1994), 뺏벌(안일순, 1995),
베이비(윤이나, 1996), 아이린(이재익, 2011), 리틀 시카고(정한아, 2012)

6) 위안부로 일했던 김애란은 한국 정부가 미군을 위한 하나의 거대 포주에 다름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Vine, 2015).

7) “미군에게 죽어야만 한국인이 되는 기지촌 여성”(캐서린 문 등, 2002, 95)이라는 표현은 삶과 죽음을 통해 민족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지촌 여성들의 비극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8) 기지촌 여성의 저항에 대해 주목한 연구들로는 Moon (1999), 이나영(2010) 등의 연구들이 있다.

9) 기지촌 여성들은 실제로 당시 한국정부에 의해 ‘민간 외교관’으로 호명되었다(박준용, 2016).

10) 같은 책의 Maria Höhn과 함께 쓴 장에서 문승숙은 기지촌의 사회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군과 지역주민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어떤 유형의 군인이 파견되는지가 이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였다(Höhn and Moon, 2010, 18). 독일과 같이 가족이 동반하는 군인이 배치될 경우 미군기지와 주변 공동체 간에 보다 정상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반면, 한국의 경우 대부분 젊은 미혼 남성이 1년 주기로 배치되어 독일과는 상이한 관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1) 예를 들어 위안부에 대해 미군의 주둔에 따라 출현한 새로운 인구집단으로 설명하면서 이들이 “지역사회에 불순화를 초래함으로써 국민윤리 의식의 앙양과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김조영, 1978, 90)하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이 겪는 폭력과 착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70년의 미군철수에 대해서도 이를 둘러싼 기지촌 내외의 지정학적이고 경제적인 협상과 경합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은 채 이를 지역의 변화를 초래한 요인으로 한정해 간략히만 다루었다.

12) 김재수(1980)는 동두천 지역의 변화에 대해 “원래 순수한 농촌 취락이었으나 6.25사변후 미군이 주둔함에 따라 흑백의 인종 대립이 이곳까지 연장되어 살인, 방화, 약탈, 린치 등이 빈번한 무법지역을 이루는 등 기지촌으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소위 ‘리틀-시카고’(275)라고 불리었고, “야간의 골목을 누비는 미군과 위안부와 물결로 이루어진 이 점이문화 지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마음마저 들게 한다”(292)라고 기술하였다. 그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하는 한편 기지촌 여성의 자치조직인 민들레회 활동에 대해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김조영(1978)과 차별화된 논의점을 제공하였다.

13) 이를 위해 지역에 오래 거주한 주민들에 대한 구술사 연구방법을 동원하였는데 그 결과 오히려 기지촌을 정태적으로만 기술하였다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14) 정충실(2019)은 위안부들이 PX물품 판매 등 나름대로 자율적 공간을 확보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미 헌병의 성병 검진을 다양한 방식으로 회피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미군의 화대 인하에 대한 대응으로 자치회를 조직해 집단적으로 저항하거나 화대를 담합하기도 했다는 점을 주목했다. 또한 한국인 상대 성매매 여성들과는 달리 미군 상대 위안부 여성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외국인과의 연애를 통해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으며, 과감한 애정 행위나 세련된 패션, 한국인 남성 희롱 등으로 기존 한국 사회에 대해 저항하는 양상을 보였음을 강조했다. 이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미군을 상대로 한 피해자나 저항자의 위치로 고착화하는 대신 이들의 다양한 주체성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본 파주 기지촌에서는 위안부 여성이 자치회 활동을 통해 본인의 아이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사례가 있었다(지역 활동가, 70대 남성, 2019.07.11. 인터뷰).

15) 당시 행정구역 기준 리 단위

16) 내무부(1972)에서 인구가 집계된 리 만을 포함한다.

17)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공하는 해방전후항공사진을 통해 1954년의 용주골 모습과 주변 기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8) “11대째 용주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왔다는 성건영은 “1951년 늦여름 피난길에서 돌아오니 집이란 집은 거의 폭격으로 무너져 없어졌더군요. 다행히 우리 집과 주변 4, 5채만은 무사해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는데 연풍교 앞에서 유엔 경찰들이 민간인 통제구역이라고 못 들어가게 막더군요.”라고 회고하고 있다.”(파주군, 1995, 761)

19) 홍성철(2007)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여름부터 전쟁을 빗겨간 가옥들에 미군 상대의 성매매 여성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20) 경향신문, “설레는 이방지대”, 1963.12.30.

21) 매일경제, “위안부들 뜯기는 달러에의 ‘과녁’”, 1969.04.24.

22) 용주골에서 쌀가게를 운영해 온 인터뷰 대상자는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데도 머리가 깨지 않아서 춥고 배고픈”, 즉 기지촌에서 장사할 생각을 하지 못해 “돼지 키우고 소 키우면서”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했다(용주골 주민, 70대 남성, 2018.06.27. 인터뷰). 실제 미군부대 주둔 지역과 자연지형으로 차단되어 있던 지역은 미군과 별다른 접촉 없이 살았다고 한다(파주군, 1995, 762).

23) 동아일보, “법보다는 빵을 걱정”, 1967.02.13.

24) 용주골 주민, 70대 남성, 2019.07.16. 인터뷰.

25) 선유리 주민, 70대 여성, 2018.06.27. 인터뷰.

26) 일례로 용주골의 흑인 위안부 자치회장은 ‘조마마상’으로 불리며 지역의 갈등 조정에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27) 용주골에서 위안부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70대 여성, 2018.05.18. 인터뷰.

28) “하나의 위안부가 미군을 상대하기까지에는 복잡한 수속을 거쳐야 한다. 첫째로 신분을 보장하는 신분증(주민등록증)을 관할파출소에 제출, 신분보장을 받아 보건소발행의 검진증을 발부받아야 한다. 검진은 1주에 2번, 보건소지정 대용진료소에서 화요일과 금요일에 받는다. (중략) 둘째로 위안부가 갖춰야 하는 ‘패스’는 부녀회원증이다. 이는 일상생활에는 그다지 소용되지 않으나 타처로 전출할 때 반드시 회원증을 가져야 인정받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것. 끝으로 증명서 중에서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클럽카드’이다” (매일경제, “위안부들 뜯기는 달러에의 ‘과녁’”, 1969.04.24.)

29) 용주골 주민, 70대 남성, 2019.07.16. 인터뷰.

30) 오른쪽 사진은 왼쪽 사진의 오른편 하단에서 건물 안쪽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반대편에서 촬영한 것으로, 오른쪽 사진의 골목 오른편에는 건물로 통하는 단 하나의 출입문이 위치한다.

31) 용주골의 골목에는 ‘마포장’, ‘대흥장’ 등 한국인을 상대하는 ‘요정’도 네 군데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폐쇄되어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용주골 주민, 60대 남성, 2018.10.19. 인터뷰).

32) 경향신문, “미군의 폭행 또 생겼네”, 1957.04.30.

33) 한 인터뷰 대상자는 지역 갈등을 겪던 끝에 향우회를 조직했다. “전라도 놈의 새끼 어쩌고 하는 그런 소리가 비일비재해. (…)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러고, 의형제를 만들었어요.”(과거 용주골 주민, 70대 남성, 2018.11.16. 인터뷰)

34) “싸움은 클럽끼리 많이 났어. 어떨 때는 조폭을 이용하기도 하고, 어느때는 행정 기관에서 문을 닫게 하고.” (지역 활동가, 70대 남성, 2019.07.11. 인터뷰)

35) 현장사진연구소에서 인터뷰를 통해 제작한 좌표 데이터를 재구성했다.

36) 용주골에만 한때 최대13개의 대형 홀이 있었다. 당시 홀에 연탄을 배달했던 한 인터뷰 대상자는 각 홀마다 배달된 연탄이 차 한 대(약 2천 장)로는 부족했다고 증언했다(용주골 주민, 70대 남성, 2018.06.27. 인터뷰).

37) 택시기사, 70대 남성, 2019.05.03. 인터뷰.

38) 용주골 주민, 70대 남성, 2018.11.02. 인터뷰.

39) 용주골 주민, 70대 남성, 2019.07.16. 인터뷰.

40) 지역 활동가, 70대 남성, 2018.11.02. 인터뷰.

41) 동아일보, “휴지화한 거액의 딸라 암거래시장은 때아닌 울음 홍수”, 1954.05.27.

42) 용주골 주민, 70대 여성, 2018.11.02. 인터뷰.

43) 과거 용주골 위안부, 70대 여성, 2018.05.18. 인터뷰.

44) 지역 활동가, 70대 남성, 2019.07.11. 인터뷰.

45) 동아일보, “행협발효 그후의 미군기지촌 현지 르뽀 (2) 범죄”, 1976.02.14.

46) 용주골 주민, 70대 남성, 2019.07.11. 인터뷰.

47) 당시 용주골에서 미군 위안부로 일하던 여성은 당시 사귀던 남성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당시 용주골 위안부, 70대 여성, 2018.05.18. 인터뷰). “마지막 하는 말이 몇 달 안 있으면 미국 군부대가 떠난다. 훈련 장소만 남고 의정부로 가고 동두천에 몇 남고 떠나니까 너도 갈 준비를 해라.” 이는 군부대 철수 이전부터 기지촌을 떠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48) 60년대 말에 연풍초등학교에 입학한 한 인터뷰 대상자는 동기 중 절반이 전학을 갔다고 전했다(용주골 주민, 60대 남성, 2018.10.19. 인터뷰). 그림 8의 등기부등본 분석에서도 건물 소유주가 연풍리에서 은평구 갈현동, 불광동으로 이전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일명 ‘불광동 터미널’로 불렸던 서울서부버스터미널과의 연결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서부시외버스터미널은 과거 통일로를 경유해 문산, 고양, 의정부를 목적지로 운행되는 서북권 시외버스들의 종착지로서 용주골과 서울을 잇는 주요한 교통망 중 하나였다. 1980년대 후반 서울시내버스의 노선 확장과 1990년대 후반 일산선 개통으로 시외버스의 수요가 급감했고, 2015년에는 용주골의 시외버스터미널이 폐쇄되었다.

49) 용주골 주민, 70대 여성, 2018.11.02. 인터뷰.

50) MBC, “윤락가 폐쇄되면서 수도권으로 확산”, 1997.11.05.

51) 용주골 대로변 내 약 200개 건물의 등기부등본을 통해 분석한 결과이다. 무허가 건물이 많은 지역의 특성상 1980년대 이전 기록은 적은 편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52) 나대지일 때 세금이 더 부과되기 때문에 빈 집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용주골은 무허가 주택 비율이 높고 토지 소유자와 건물 소유자가 다른 경우가 많아 토지 활용에 대한 의견 조율이 어렵다고 한다.

53) 단, 이 수치는 파주시(2016)에서 지정한 사업 구역 내의 건물만을 포함한 것이다.

54) 용주골 주민, 60대 여성, 2018.07.27. 인터뷰.

55) 반면 연풍2리는 2014년부터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 용주골 주민에 의하면, 2019년 7월 기준으로 연풍2리의 윤락업소는 113가구 중 42가구라고 한다. 이 지역은 2014년부터 19만㎡에 이르는 대단지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56) 2015년 기준 파주읍은 3년 연속 인구 감소세를 보이며 도시재생사업 대상지 기준을 충족했으며, 전체 건축물 2,790동 중 1,819동이 준공 이후 20년이 지난 노후 건축물로, 노후도가 파주시 내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파주시는 용주골이 포함된 파주읍을 도시재생사업 대상지로 우선 선정하고 ‘도시재생 지역의 마중물 사업’을 실시했다.

57) 파주시, “6070 창작문화거리 기본설계 1차 보고회”, 2019.04.12.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2017년도 정부재원(교육부)으로 한국연구재단 한국사회과학연구사업(SSK)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7S1A3A206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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