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1 October 2020. 485-500
https://doi.org/10.22776/kgs.2020.55.5.485

ABSTRACT


MAIN

  • 1. 머리말

  • 2. ‘역사도시경관(HUL)’으로서 조선의 읍치 경관

  • 3. 읍치 경관의 내재적 가치

  •   1) 지리적 앙상블로서의 읍치 경관

  •   2) ‘보는 방식(a way of seeing)’으로서의 읍치 경관

  •   3) 읍치 경관의 현재적 가치

  • 4. 맺음말 –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 제고

1. 머리말

조선시대 한반도에는 330여 개소의 지방 행정 중심지인 읍치(邑治)가 있었다. 하지만 읍치의 지리적 함의는 ‘지방 행정 중심지’에 갇혀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국의 읍치들에는 다양한 관아 시설이 밀집했던 행정 타운과, 이를 에워싼 소위 삼단일묘(三壇一廟)라는 제향의 장소들, 그리고 국가 수준의 사회‧문화 관념을 비롯해 지역 환경에서 전개된 인간-자연 관계와 삶의 지혜와 지식 등 당대의 무형 문화가 읍치의 다양한 경관과 장소들에 투영되어 집중 분포하고 있었다.

조선왕조 500여 년 역사 속에서 읍치는 당대의 지방 통치, 경제생활, 문화·예술을 함축한 다양한 경관 요소들로 채워졌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반도 고유의 읍치 경관’을 탄생시켰다. 오늘의 관점에서 읍치 경관은 우리나라 전통도시경관을 대변하는 헤리티지로서 현대 도시와 공존하는 소중한 역사도시경관(historic urban landscape, HUL)으로 재인식할 가치가 있다.

한반도의 전통도시 읍치는 서양의 근대도시와는 지리적 성격이 달랐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양의 근대도시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중심성을 독차지한 공간이다. 하지만 조선의 읍치는 그저 지방 통치 행정의 중심지였을 뿐이며, 지역사회, 경제생활, 문화와 예술 등의 중심성은 읍치가 아닌 주변의 촌락 지역에 널리 산재하였다(전종한, 2005, 243-244; 2020a, 89). 서양의 근대도시와 달리, 우리의 전통도시 읍치는 촌락 지역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거나 주변지역으로 전락시키기보다는 다만 기능이 서로 다른 생활공간으로서 공생하는 관계에 있었다.

조선의 읍치 경관은 국가가 지방에 남긴 대표적인 공적 문화유산이며, 역사성과 장소성, 그리고 그곳을 살다간 지역민들의 지혜와 사연들이 축적된 실체이다(이해준, 2015, 76). 본 연구의 주된 문제의식은, 조선의 읍치 경관이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교류사와, 지방에 대한 국가의 통치 전략, 지역의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 장소가 역사를 만나 창출한 장소 관성과 다양한 기억의 장소들, 그리고 당대 관념 세계와 ‘보는 방식(way of seeing)’ 등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반도 고유의 세계적 유산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지금까지 읍치 경관 연구는 상당 부분 건축학, 역사학, 조경학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졌고 거기에서 지리학은 연구의 주요 갈래라 보기 어려웠다. 다행인 것은, 최근 인문지리학계가 읍치의 공간 구조와 주요 경관 요소들의 상징성을 중심으로 관련 연구 성과를 꾸준히 내고 있다는 점이다(예. 김덕현 등, 2004; 전종한, 2004; 2015; 2019; 2020a; 2020b; 홍금수, 2004; 이기봉, 2008; 권선정, 2019; 조정규, 2019; 2020; 최진성, 2019; 2020). 이들 연구를 통해 읍치의 공간 구조와 읍성, 관아, 공간 배치 등의 주요 경관 요소에 대한 문화지리적, 역사지리적 이해가 시도되었다. 하지만 읍치 경관을 구성하는 관아 공간, 제향의 장소, 지역 환경, 상징적 경관과 장소 등을 ‘경관의 완전성이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지리적 앙상블로서 묶어 이해하려 하거나, 읍치 경관이 갖는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작업까지는 아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조선의 읍치를 한반도의 전통도시이자 현대인의 삶의 질에 관여하는 역사도시경관으로 재인식한다. 역사도시경관은 2011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채택된 개념으로 ‘역동적이고 끊임없이 급변하는 현대의 도시 환경 속에서 역사적, 문화적 유산 자원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하나의 접근법’이다. 이 접근은 도시 속의 역사적, 문화적 자원들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인의 문화 콘텐츠로, 경제적 자원으로, 사회 통합의 원천으로, 환경적 지속가능성의 동력으로 활용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UNESCO, 2019, 5). 연구자는 조선의 읍치 경관을 한반도의 전통도시경관이자 현대 도시에 널리 산재하는 역사도시경관으로 인식하면서, 다양한 경관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구성해낸 총체적 문화경관으로 이해하고, 읍치 경관이라는 유형 문화가 내포한 당대의 무형 문화적 차원과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역사도시경관(HUL)’으로서 조선의 읍치 경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운영 지침󰡕에 따르면 세계유산은 세계문화유산, 세계자연유산, 세계복합유산의 3대 범주로 나뉜다(UNESCO, 2013a, 13). 이 중 세계문화유산은 역사, 예술, 과학의 관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갖는 기념물(monument), 건물군(groups of buildings), 유적지(sites)를 포함한다.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문화경관, 역사도시 및 도심부, 유산 운하 및 루트 등의 새로운 유형들이 세계문화유산의 범주에 추가되면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개념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확장성을 보이고 있다(전종한, 2013, 932; 2014, 569-570).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의하면 ‘문화경관’이란 세계유산협약 제1조에 진술된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을 지칭하고, ‘역사도시 및 도심부’란 진정성을 전제로 과거의 고고학적 도시 유적으로부터 20세기의 근대적 도시 경관까지를, 그리고 ‘유산 운하 및 루트’란 중요한 문화적 상호 작용과 교류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역사상의 운하 및 루트를 가리킨다(UNESCO, 2013a, 71-93).

조선의 읍치 경관이 갖는 유산적 성격은 세계문화유산 중에서도 ‘문화경관’과 ‘역사도시 및 도심부’에 동시에 걸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읍치 경관은 국가의 지방 통치 이데올로기와 조선시대의 지배적 관념 및 환경관이 고을 단위의 다양한 지역 환경 속에서 한 데 어우러진 지역적 인간-자연 관계의 산물로서, 유네스코가 정의한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 곧 문화경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 읍치는 태생적으로 지방 통치를 위한 행정 타운이었다. 이점을 본다면 읍치 경관은 한반도의 전통도시경관으로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중 ‘역사도시 및 도심부’ 유형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대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역사도시경관(historical urban landscape)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를 둘러싼 유형 및 무형의 헤리티지는 우리의 과거 모습이고, 우리의 문화이며, 정체성이다(Bassa and Kiss, 2009, 1). 도시경관은 건축물의 단순 집합이 아니며 정치, 사회, 문화적 변천과 함께 진화하고 변동해 온 역동적 실체이다. 현대도시와 공존하는 역사도시경관은 경제 발전의 원천이고, 사회통합의 동력이며, 다양성과 창조성과 혁신과 도시 재생을 이끄는 촉진제이다(UNESCO, 2013a, 4).

조선의 읍치 경관은 유네스코가 구상하는 그러한 역사도시경관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진 유산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읍치 경관에서 볼 수 있는 주요 건물이나 공간의 배치 원리, 풍수적 경관과 장소들, 제향의 장소를 비롯한 주요 성소나 금기의 장소 등은 동아시아 전통도시 간의 교류의 흔적이고, 한반도의 다양한 지역 환경 속에서 국가와 지방, 인간과 자연이 만나 탄생시킨 가장 한국적인 도시경관이자 문화경관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조선의 읍치 경관은 일제의 주도 아래 계획적으로 훼철되었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방치되었다(손정목, 1990; 고석규, 2001; 최상식・한삼건, 2003; 전종한, 20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로 인해 오히려 역사적으로나 정체성 측면에서 우리에게 더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를 갖는 유산이다. 급격한 도시화와 세계적 획일화가 지구촌 각 지역의 고유한 역사도시경관을 위기로 내모는 21세기의 상황 속에서 한반도 읍치 경관의 유산 가치는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

3. 읍치 경관의 내재적 가치

인문지리학의 입장에서 읍치 경관의 내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조선의 읍치 경관은 당대의 정신세계가 종합적으로 투영된 지리적 앙상블이었다. 읍치 내의 관아 공간에서는 지방 읍치에서 작동했던 삼원적 권력이 공간을 적절히 나누어 공존하였고, 4대 제향 공간에는 당대의 믿음체계와 관념의 세계가 반영되어 있었으며, 읍치 경관은 지역적 인간-자연 관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상징적 경관과 장소들로 채워져 있었다.

둘째, ‘객관적 실체로서의 읍치 경관’과는 다른 차원에서 ‘보는 방식으로서의 읍치 경관’이 존재하였다. 당대 사람들이 읍치 경관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생활공간으로서 그곳에 어떤 바람을 갖고 있었고 그곳에서 어떤 이상(理想)을 재현하고자 했는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보는 방식으로서의 읍치 경관’은 옛 지리지와 그림 등의 기록 자료에서 엿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 전국의 모든 읍치마다 대축척의 고지도들이 전한다는 것이 보는 방식으로서 읍치 경관의 가치를 높여준다. 조선후기의 이들 지방 고지도는 실재하는 사실을 그리고자 한 측면도 있지만 제작 주체의 마음에 비추어진 세계를 담은, 모종의 심상지도였기 때문이다.

셋째, 읍치 경관이 우리의 삶의 질을 진작시키는 역사도시경관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지자체가 점차 늘고 있고 그 중 일부는 복원 작업에까지 이르고 있다.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옛 읍치 경관의 공간적 흔적은 전국에 걸쳐 잔존한다. 물론 개별 읍치는 파편 수준의 잔존 경관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므로 전국의 모든 읍치가 각기 세계유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환상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전국의 읍치 경관을 네트워킹하며 관통하는 시선으로 본다면, 한반도 읍치 경관의 완전성이 되살아날 수 있다. 읍치 경관은 바쁘고 건조하게 돌아가는 현대 도시에 전통도시의 여유로운 모습과 우리 옛 삶의 이야기를 덧씌움으로써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1) 지리적 앙상블로서의 읍치 경관

(1) 읍치의 삼원적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관아 공간

읍치 경관의 물리적, 상징적 중심에는 관아 공간이 자리한다. 관아 공간은 행정 기능을 하는 기와건물의 집합으로 외관상으로는 일견 동질 경관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지방 읍치에서 작동했던 세 축의 권력이 공존하던 긴장의 공간이었다. 즉, 국왕의 공간, 수령의 공간, 그리고 지역 엘리트의 공간이 읍치의 삼원적 권력을 구성하면서 관아 공간을 적절히 분할 점유하고 있었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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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관아 공간을 이루는 삼원적 지방 권력(자료 : 「황해도 풍천」, ≪1872년 지방지도≫)
*주 : 관아 공간에 공존했던 세 개의 권력, 즉 국왕과 수령과 지역 엘리트의 거점 공간인 객사, 동헌(아사), 향청을 볼 수 있다.

국왕의 공간은 정청, 동헌, 서헌으로 구성된 객사를 비롯해 군기고, 하마대, 기타 객사 부속 시설로 이루어졌다. 수령의 공간은 동헌과 내아를 중심으로 수령을 행정적으로 지원하던 아전들의 공간, 곧 질청, 형방청, 장청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고을의 토착세력인 지역 엘리트의 공간으로서 향청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 역사에서 조선은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중앙집권에 다가간 국가였다. 고려 말까지 각 지방에서는 지방 토착 세력인 호족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초에는 중앙집권을 위한 국가적 노력과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 조선 초까지 유향소로도 불렸던 향청은 수령을 감독하거나 보좌하던 자문기구로서, 과거에 득세했었던 지방 토착 세력의 제도적, 경관적 흔적이었다(이수건, 1990). 이같이 조선의 읍치 공간, 그 중 관아 공간에서는 지방을 장악하고자 했던 국왕(국가)의 공간과, 국왕을 대신해서 파견된 수령의 공간, 그리고 토착 세력인 지역 엘리트 집단이 각자의 공간 영역을 갖고 공존하였다.

객사로 대표되는 국왕의 공간과 동헌으로 대표되는 수령의 공간, 양자의 상대적 입지와 규모는 고을에 따라 달랐다. 동헌과 내아, 질청 등 아사(衙舍)의 부속 시설과 부지가 객사에 비해 더 컸던 고을이 많지만, 객사에 속한 시설과 부지가 더 컸던 고을도 있었다(전종한, 2004, 330). 가령 ≪여지도서≫ 「공해」 조에 의하면, 홍주읍성(충남 홍성군)의 경우 객사는 43칸이었던 반면 동헌과 내아는 각각 7칸과 27칸으로 상대적으로 작았다. 이에 비해 당진읍성의 경우 객사는 27칸이었지만 동헌과 내아 등의 아사는 질청을 제외하고도 35칸으로서 객사보다 상대적으로 큰 규모였다.

한편 국왕의 공간인 객사군 건물과 수령의 공간인 아사군 건물, 양자의 공간 구조는 배후의 주맥(主脈)을 달리하는 사례가 많고1) 주된 진출입로를 대체로 달리하면서 각자 외삼문과 내삼문을 갖춘 경향성이 있었다. 이는 이 두 영역이 적어도 공간적으로는 상호 독립적으로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조선시대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향청은 건물 하나에만 만족하는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심지어 충청도 태안의 경우처럼 그 위치가 관아 공간을 벗어나 읍성 밖으로 밀려났던 사례도 확인된다.2)

(2) 당대의 믿음 체계와 관념 세계를 보여주는 제향의 장소들

장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집단 공동의 경험과 연상 작용이 부가되어 하나의 상징체계로 존재하며, 결국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자기 인식의 틀로 작용하게 된다(Tuan, 1977, 17). 이러한 장소성을 볼 수 있는 전형적 사례가 바로 조선의 모든 읍치에 설치되었던 제향의 장소들일 것이다(전종한, 2008).

각 읍치에서 제향의 장소는 사직단, 문묘, 성황단, 여단의 4개소였다(그림 2).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문묘는 공자를, 성황단은 고을을 지켜주는 신을 위한 제사 장소였고, 여단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거나 정처 없이 떠도는 귀신3)을 위로하기 위한 제단이었다. 이들 장소의 입지는 대개 치소의 관아 공간을 기준점으로 삼고 어느정도 특정한 방위 지향성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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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관아 공간의 둘레에 배치된 제향의 장소들(자료 : 「경상도 대구」, ≪해동지도≫)
*주 : 치소 중심부를 기준점으로 하여 북쪽에는 여단, 동쪽에는 향교, 서쪽에는 사직단, 남쪽에는 성황단이 배치되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공간 배치는 원칙적인 것으로 각 고을 치소 일대의 산천과 지형 조건에 따라 편차가 있었다.

고을 단위의 성황단은 마을 단위의 성황단과 달리 제향 건물을 갖춘 성황사로 존재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고을의 주요 산, 그 중에서도 진산이나 주산에 입지하는 사례가 많았다(정치영, 2011). 그리고 치소 중심부를 기준으로 여단은 북쪽에, 문묘는 동쪽에, 사직단은 서쪽에 입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입지는 조선의 사회‧문화와 자연관에 깊숙이 자리했었던 ‘좌묘우사’의 관념과 ‘음양오행’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읍치 중심부를 둘러싸며 배치된 이들 제향의 장소는 조선의 읍치 경관을 이루던 필수 경관 요소였다. 다산 정약용은 이들 제향의 장소를 아울러 ‘삼단일묘(三壇一廟)’라 하였는데,4) 이를 보면 이들 4대 제향의 장소는 각기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세트로 존재했던 장소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전종한, 2020b, 2).

제향의 장소 중 그 격이 가장 높았던 곳은, 적어도 수령의 입장에서는 사직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새로 부임한 지방관이 우선해서 행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 중 망궐례(望闕禮), 참알례(參謁禮), 문묘 알성(謁聖), 그리고 사직단 봉심(奉審)5)이 있었다. 고을 수령은 문묘와 사직단의 제주(祭主)로서 직접 제사에 임했는데,6)≪목민심서≫에서 정약용은 ≪경국대전≫을 인용하여 ‘직접 제사를 지내지 않는 수령, 더러운 그릇을 쓰거나 음식 찌꺼기로 제수를 쓴 자, 향교를 수리하지 않는 자는 죄를 준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정조실록≫은 사직단 제사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조가)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직단 제사는 곧 옛날의 방구단(方丘壇) 제사이다. 질그릇과 표주박, 국그릇에 제물을 담아 놓고 땅을 쓸어 내고 제사를 지냈으나 밝은 신령은 세상에 가득 차서 물처럼 모여드니 ①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서 사직단을 모실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외읍의 사직단에 깨끗함이 부족하다고 하여 여러 번 신칙하는 하교를 내렸었다.

그런데 요사이 듣건대, ②제도(諸道)에서 사직단을 정비하지 않은 곳이 많아서 제단을 둘러싼 담은 벗겨져 떨어져 나가고 홍살문은 허물어졌으나, ③수령들이 성황당(城隍堂)의 제단같이 여겨서 제사를 지내는 막중한 땅을 끝내 땔나무하고 소먹이는 장소로 만들었다고 하니, 사체가 구차해진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제향 예절을 의식대로 따르지 않고 제품을 정결하게 하지 못하였을 것은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대저 ④수령의 직책은 백성과 사직이 중한 것인데, 이것도 정성을 다하지 않으니 그 밖의 나머지 일에 어찌 볼만한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내용으로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듭 각 도(道)에 관문(關文)으로 신칙하게 하여 사직단을 정비해야 할 곳은 발견하는 대로 즉시 수리하게 하고, 각각 지키는 교졸(校卒)을 두고 경계의 표식을 세워 잡인들을 특별히 금지하도록 하며, ⑤매달 월말에는 사직단에 탈이 있는지 없는지를 영문(營門)에 논보(論報)하고, 영문에서 예조에 전보(轉報)하여 근만(勤慢) 상황을 살필 수 있게 하라. 이 밖에 제향하는 예절이나 제품 같은 것에 대해 판당(判堂)이 관련 자료를 초록(抄錄)하여 1통을 만들어 후록(後錄)으로 관문에 첨부하여 이대로 준행하게 함으로써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 같다는 한탄이 없도록 하게 하라. 그리고 이 전교를 본서(本署)의 의궤(儀軌)에 기록하라.

이와 같이 하교한 뒤에도 도백과 수령이 또다시 내버려 두었다가 앞으로 암행어사나 선전관(宣傳官)이 적간(摘奸)하러 가는 길에 발각되는 일이 있으면 특별히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일체 엄히 신칙하고 거행한 전말을 곧 장문(狀聞)하게 하라고 분부하라.”하였다.

(자료 : ≪정조실록≫ 정조 9년 1월 2일)

위 기록의 ①은 전국 각 고을에서 사직단 제사가 필수라는 점, ②는 사직단을 제대로 정비하는 것은 고을 수령의 임무라는 점, ③은 사직단의 격이 성황단보다 높다는 점, ④는 사직단의 정비와 제사는 수령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 중 하나라 점, ⑤는 사직단의 정비와 제사를 제대로 하는지 국가가 감찰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위 기록을 종합하면 삼단일묘의 제사 위계를 추정할 수 있는데, ④를 통해 사직단 제사가 위계상 가장 높다는 것을 알 수 있고, ②와 ④를 종합해보면 사직단 다음이 문묘이고 그 다음이 성황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민심서≫에는 ≪오례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제 때에 성황신의 위패는 단상(壇上)에 남향하여 앉히고 후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들은 단하(壇下)에 좌우로 서로 마주 보게 놓는다. 무기에 상하여 죽은 자와 수화(水火)나 도적을 만나 죽은 자, 남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협박당하여 죽은 자, 남에게 처첩(妻妾)을 강탈당하여 죽은 자, 천재(天災)나 질역(疾疫)으로 죽은 자의 위판(位版)은 왼편에 놓는다. 맹수(猛獸)나 독충(毒蟲)에 물려 죽은 자, 동사(凍死)나 아사(餓死)한 자, 전쟁에 죽은 자, 위급한 일을 당하여 목매어 죽은 자, 담장이나 지붕에 깔려 죽은 자, 아이를 낳다 죽은 자, 벼락 맞아 죽은 자, 추락(墜落)하여 죽은 자, 무후한 자의 위판은 오른편에 놓는다.

(자료: ≪목민심서≫ 「예전」 제1조 ‘제사’)

위 기록을 보면, 실로 상당히 다양한 이유로 죽은 자들을 일일이 기억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챙겨주어야 한다는 당대의 관념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장소가 바로 여단이었는데, 여단 제사 때에는 성황신 신위를 단 위에 높고 여단의 귀신들 위패는 단 아래에 놓았다. 이 내용에서 성황단 제사의 격이 여단 제사보다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여단 제사 때에는 성황신을 함께 모셨고,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삼단일묘의 제사 위계를 내림차순으로 정리하면 ‘사직단 ⇒ 문묘 ⇒ 성황단 ⇒ 여단’ 순이었다.

(3) 지역적 인간-자연 관계를 표상하는 경관과 장소들

어떤 주체에게 공간은 자신의 존재의식을 강하게 인각하여 나타내는 곳이다(김경복, 1990, 2). 조선후기의 고을별 고지도들을 보면, 지역 환경에 대한 지도 제작 주체의 환경 인지를 보여주는 다양한 경관과 장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풍수 이론을 중시한 것이나 도성을 계획할 때 풍수가를 참여시킨 것, 그리고 조선 왕릉의 위치나 유지 관리에 있어 풍수적 판단을 빼놓을 수 없는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풍수는 정상 지리학이었다(권선정, 2017, 34). 당대의 인간-자연 관계는 사실상 풍수 사상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결과 조선시대 읍치 안팎의 환경 인지와 관련된 경관과 장소들은 상당 부분 풍수적 요인에서 탄생한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경기도 부평부 읍치의 동남쪽에는 소위 오조산이라 불리던 다섯 개의 인공산이 있었다(그림 3). 부평부 고지도들에서는 5개가 아닌 평균 3개의 조산이 등장하는데, 이 중 2개의 조산은 20세기 중반까지도 항공사진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조산은 풍수적 수구처로 인식된 지점에 위치함으로써, 치소에서 바라볼 때 하천(굴포천) 일대의 저습지를 시야에서 가리면서도 읍치 주변의 산줄기를 보강하려는 의도에서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기준(1995)에 의하면, 초기에는 두 개의 조산이 만들어졌고 그 뒤 그것이 부족하다고 인식하여 세 곳의 조산을 추가로 조성했다. 조산의 둘레는 직경이 20-30미터, 높이는 8-10미터였는데 일제 강점기의 경지 개간 과정에서 대부분 저습지 매립용 토사로 사용되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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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지역 환경에 대한 풍수적 인지와 대응: 부평읍치 조산(造山)의 사례(자료 : 「경기도 부평」, ≪해동지도≫(왼쪽), 1990년 항공사진(오른쪽))
*주 : 읍치 중심부와 동남쪽의 하천(굴포천) 사이에 세 개의 조산을 볼 수 있다. 이들 조산은 풍수적으로 취약한 지점으로 인식된 수구처에 위치함으로써, 치소를 기준점으로 하천(굴포천) 일대의 저습지를 시야에서 가리면서도 읍치 주변의 산줄기를 보강하려는 의도에서 조성된 것이다. 1990년에 촬영된 항공사진에서 마지막 조산 터(계양구 계산동 62-1번지)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조산은 네 방위 중 동쪽이 가장 트여있던 도성을 비롯해 소위 수구처가 열려 있다고 인식된 전국의 여러 고을들에 조성되었다. 세종조의 풍수학 훈도 전수온은 ≪지리전서(地理全書)≫를 근거로 ‘수구(水口)를 잘 닫아주어야 부귀가 보장되며 수구 밖으로 훨씬 내려가서 잘 닫아주는 산세가 있다면 영웅과 호걸이 난다.’고 하였다. 그는 조산을 두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삼가 ①≪지리전서(地理全書)≫를 상고하오니 … (중략) … ‘수구(水口)에는 꼭 산세(山勢)가 튼튼하고 조밀한 것이 요청되나니, 천병(千兵)이 모여 선 듯한 것을 이름하여 귀지(貴地)라 한다.’ 하였고, … (중략) … ‘수구(水口)를 닫아 주지 못하면 당년(當年)의 부귀(富貴)는 쓸데없는 것이나, ②수구(水口) 밖으로 훨씬 내려가서 잘 닫아준 것이면 여러 세대(世代)를 두고 호걸과 영웅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수구(水口)라는 것은 관활(寬闊)해서는 안 되고, 나성(羅星)7)은 공결(空缺)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신라(新羅)의 왕업(王業)을 볼 때, 천여 년이나 된 것은 조산(造山)과 종수(種樹)를 가지고 공결(空缺)한 데를 메꿔 준 것이며, ④주부(州府)나 군현(郡縣)에 있어서도 또한 모두 비보(裨補)한 것이 있사오니, 조산(造山)과 종목(種木)을 가지고 관활(寬闊)한 곳을 보충시킨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국도(國都)에 나성(羅星)이 공결(空缺)되고 수구(水口)가 관활(寬闊)하게 되었은즉, 나성과 수구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하오나 ⑤흙을 쌓아서 산(山)을 만들어 보결(補缺)할려면 성공(成功)하기가 어려우니, 나무를 심어서 숲을 이루어 가로막게 하면 작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 (중략) … ‘나성(羅星)은 나성(羅城) 밖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화성(火星)과 서로 대(對)를 짓는 것이다. 화성(火星)으로 용(龍)이 시작되었으면 나성(羅星)은 따라서 있는 법이나, 만일 나성(羅星)이 있다 하여도 나성(羅城) 안에 있어서는 안되나니, 나성(羅城) 안에 있게 되면 포병(抱病)한 사람이 많이 나게 되고, 또는 눈병이나 낙태(落胎)하는 산(山)이 되고 말 것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⑥나성(羅星)이 수구(水口) 안에 있어서는 아니 되는데, 지금 도성(都城) 안과 사청(射廳) 곁에 인조(人造)로 만든 산(山)은 어디서 의거함인지 알 수 없나이다. 보충한 자도 법(法)과 같이 하지 아니하고 세운 것도 그 방위(方位)가 아니오니,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더 해(害)만 될 것입니다. … (중략)…, (상이) 그대로 따랐다.

(자료: ≪세종실록≫ 세종 30년 3월 8일)

이 기록에서 전수온은 인공산인 조산을 만드는 이유 뿐 아니라 해당 지역의 산줄기와 물줄기 환경에 대한 조선시대의 풍수적 인식 틀을 자세히 알려준다. ①에 나오는 ≪지리전서≫는 중국 명나라의 장종도(張宗道)가 지은 풍수지리서로서 ①은 중국의 풍수사상이 주요 이론적 근거였음을 보여주고 있고, ②는 조산의 조성 이유는 그 지역에 영웅과 호걸이 배출될 것이라는 믿음에 있다는 점 및 조산의 조성 위치는 수구 밖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③은 우리나라에서 조산의 조성 역사는 멀리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 그리고 ④는 도성만이 아니라 주부군현 즉 전국의 고을 수준에서도 취약한 환경을 보완[비보(裨補)]할 목적으로 조산을 만들었다는 점, ⑤는 조산은 흙으로만 조성해서는 쉽게 무너질 우려가 있으므로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는 점, 끝으로 ⑥은 조산의 조성 위치는 수구 밖이어야 하며 수구 안에 잘못 조성된 경우가 있다면 수구 밖으로 이전하고자 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산은 지역 환경에 대한 풍수적 인지와 대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형태가 반드시 조산뿐인 것은 아니었다. 지역 환경에 대한 풍수적 인지와 대응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가령 도성의 경우 동대문인 흥인지문의 이름 속에 숨은 ‘지(之)’는 산줄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 흥인지문이라는 지명 자체가 풍수적 대응물이다(한국콘텐츠진흥원, 서울시청 서울스토리). 전라도 전주읍치는 북쪽의 산줄기가 풍수적으로 허(虛)하다고 인식하여 산줄기를 대신할 수 있도록 인공 제방인 ‘덕진제’와 ‘가련산(可連山)’8)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 경우 덕진제라는 제방과 가련산이라는 지명이 그것이다(전종한, 2020a, 76; 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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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전주읍치 북쪽의 ‘가련산’과 ‘덕진제’(자료 : 「전주」, ≪여지도≫)
*주 : 지도에서 가련산과 덕진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면 전주읍치가 북쪽으로 하천과 개활지를 향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히 연결할 만한 산줄기’라는 의미의 가련산과 덕진제라는 제방, 이 두 가지 경관 요소를 통해 이 일대의 산줄기를 보강하려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가련산이란 산줄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하며 지은 지명으로 ‘가히 이어질만한 산’이라는 의미다. 이 밖에 읍수(邑樹)라는 풍수적 관점의 숲을 조성한 사례도 전국의 여러 고을에 있었다. 이와 같이 한 고을의 지역 환경이란 풍수적 인지 및 해석의 대상으로서 읍치 안팎에 다양한 풍수 경관과 장소들을 탄생시켰고, 결과적으로 지역 환경은 읍치 경관의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그와 한 데 융합되어 있던 지리적 앙상블이었다.

2) ‘보는 방식(a way of seeing)’으로서의 읍치 경관

한반도의 읍치 경관이 갖는 특별한 유산 가치는 조선후기 330여개의 모든 읍치마다 고지도가 그려졌고, 물론 상호 모사 관계에 있는 경우도 적지는 않지만, 제작 시기를 달리하는 다종의 고지도들이 전한다는 사실이다. 이들 고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읍치 주변부에 대해서는 산줄기와 물줄기, 주요 도로만으로 소략하게 묘사한 반면, 읍치 중심부는 개개의 건물과 장소까지 상세하게 그린 일종의 다중 축척 지도이라는 점이다(노희방, 1980, 11).

물론 이들 고지도의 대부분은 그림 지도로, 과학적 기법이나 객관적 측량 방법에 의해 제작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점 때문에 읍치 경관의 유산 가치는 더 특별해진다. 조선시대의 고을 고지도는 제작 주체가 체험하고 상상했던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특정 장소와 그 장소가 주변 지역과 맺는 관계, 사람과 장소의 관계 등에 ‘당대의 보는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읍치 경관을 그린 고지도 제작 주체를 단순한 개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조선시대라는 특정한 시‧공간의 일부였던 사회적 존재이자 세계내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지도 제작 주체는 가장 작게 보면 화공이었고, 그 배후는 수령이라는 개인이었다. 하지만 더 크게 보면 그는 사회적 존재이자 세계내 존재로서 읍치와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 나아가 읍치라는 지역 환경에 대한 당대의 사회‧문화적 관념을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다중(多衆)과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읍치 고지도의 제작 주체는 나름의 고유한 인지 방식에 의해 지표 세계를 바라보게 되고, 결국 자신과 세계를 동화시켜 고을 고지도 속에서 질서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국의 읍치 경관을 묘사한 고지도를 통해 제작 주체가 자신들의 외부 세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무엇으로 이해하고 내면화하였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고지도 제작 주체는 읍치 안팎의 다양한 경관 요소 중 특정 요소만을 선별적으로 그렸으며 특정한 시선으로 묘사하였다. 실재하는 경관 요소를 묘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소망의 세계 또한 고지도에 담아냈다. 고지도 속의 읍치 경관에는 적어도 세 가지 시선을 담고 있다. 첫째는 권력자의 시선으로 본 읍치 경관, 둘째는 산줄기와 물줄기 중심의 자연관, 셋째는 풍수적 환경관이다(전종한, 2008).

첫째, 고지도 속의 읍치 경관은 중앙의 권력 기원자(국왕)가 지방을 바라본 시선, 해당 고을의 권력 집행자(수령)가 자신의 관할 구역을 바라본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읍치 내 관아 공간을 고지도의 중심부로 삼은 점, 관아 공간 일대는 대축척으로 묘사하고 주변으로 갈수록 상대적 소축척으로 그린 점, 일반 촌락이나 민가는 거의 나타내지 않고 객사, 아사, 창고, 길, 성곽, 행정지명 등 권력자의 입장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주요 경관 요소만을 선별적으로 그린 점 등에서 그 점을 볼 수 있다(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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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읍치 경관을 바라보는 권력자 중심의 시선(자료 : 「구성부」, ≪1872년 지방지도≫)
*주 : 읍치 중심부를 기준점으로 산줄기와 물줄기가 여러 겹의 동심원 형태로 묘사되어 있어 권력자(수령) 중심의 시선을 볼 수 있다.

둘째, 읍치 경관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산줄기와 물줄기 중심으로 보았던 시선이 담겨 있다. 기후나 토양, 식생 등의 다른 자연 요소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담아냈을 뿐이다. 산줄기와 물줄기 중심의 자연관은 한반도에 풍수지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최창조, 1997). 이에 의하면 한반도에서는 풍수지리와 관계없이 산과 하천을 신성한 장소로 여겨왔다는 것이다. 한반도에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모든 고을마다 소위 ‘진산(鎭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의 주산(主山) 개념이 확산되기 이전에 이미 산 신앙이 널리 분포했음을 시사한다.

고려시대에는 민간 신앙이 도교 및 불교와 결합되어 산천에 작위를 부여하는 봉작제(封爵制)가 있었다(한형주, 2002, 164; 정치영, 2011, 79). 이점으로 보면 한반도에서 산줄기와 물줄기의 의미는 풍수지리와 깊은 관련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의례 대상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시대의 봉작제는 폐지하였지만 대신 국가 주도로 산천제(山川祭)를 지내게 된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가 널리 확산되면서 진산 중심의 전통적 산 신앙이 주산 중심의 명당 관념과 병존하였다(최원석, 2003).

이 결과 조선후기 고지도 속의 읍치 경관에서는 전통적 산줄기와 물줄기 관념과 풍수적 산수 개념이 뒤섞여 나타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고지도 속 읍치 경관의 입지 배경이자 필수 요소로 등장하는 산줄기와 물줄기는 한반도의 산천 신앙과 산수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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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읍치 경관의 배경으로 묘사된 산줄기와 물줄기 중심의 자연환경(자료 : 「정산현」, ≪1872년 지방지도≫)
*주 : 산줄기와 물줄기 외에는, 그 밖의 자연환경 요소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산줄기와 물줄기 중심의 자연환경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어떤 경관 요소의 입지 환경을 평가했던 풍수적 시선이 곳곳에서 보인다. 읍치의 중심부 자체, 혹은 왕릉이나 태실, 읍치의 여러 관아 시설 중 중핵으로 인식되었던 객사나 동헌 등의 입지 환경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러한 시선을 볼 수 있다. 풍수적 관점에서는 산줄기를 기(氣)가 흘러다니는 통로로 여기기 때문에 무엇보다 산줄기 흐름의 연속성과 산줄기의 동심원적 배열성, 이 두 가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산줄기와 물줄기의 조화로 구성된, 완결성 있는 일단의 산천을 국(局)이라 칭하면서 그 안에서 최고의 입지인 명당을 정의한다. 여기서 명당은 객사나 동헌 등 관아의 핵심 시설이나 국왕의 태실, 읍치 중심부 그 자체 등의 입지를 위한 장소이다.

예를 들면 전라도 진산현 고지도를 보면 산줄기의 동심원적 배열성을 강조하면서 조선 태조의 태실 입지를 특별하게 묘사하고 있다. 충청도 서천군의 경우에는 산줄기의 주맥이 연속성이 가장 길게 이어지는 장소에 객사와 아사 등의 관아 시설이 입지함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산줄기의 연속성이나 동심원적 배열성은 ‘실제 산줄기의 모습’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지만 ‘산줄기의 실제 모습’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산줄기가 그렇게 되어 있기를 바라는 소망의 측면, 혹은 그렇게 되어 있다고 보는 믿음의 측면 역시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전종한, 2008, 112; 그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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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중요한 인문 경관 요소의 입지 환경을 바라보는 풍수적 시선(자료 : 「진산현」(왼쪽), 「서천군」(오른쪽), ≪해동지도≫)
*주 : 왼쪽 고지도의 태실과 오른쪽 고지도의 관아 입지를 볼 때, 여러 겹의 산줄기가 둘러싼 중앙부나 본줄기를 주축으로 삼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줄기의 마지막 지점에 자리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읍치 경관을 그린 고지도는 제작 주체의 공간인식과 공간의식은 물론이고, 나아가 그러한 의식이 착근하였던 조선이라는 시대적, 사회적 공간의식의 전체적 양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보는 방식으로서의 읍치 경관, 이에 대해서는 기존의 성과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탐구해야 할 여지가 많다. 조선후기 지방 고지도는 지도학적 평가와는 별도로, 한반도 읍치 경관의 특별한 가치를 담보하는 당대의 보는 방식을 담고 있는 자료로서 문화지리적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두껍게 읽을 필요가 있다.

3) 읍치 경관의 현재적 가치

세계유산의 관점에서 보면 유산 자원의 진정성과 완전성은 헤리티지로서 인정받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물론 읍치 경관 전체가 아닌, 그것의 단편적 구성 요소라 할지라도 탁월한 가치만 증명된다면 얼마든지 개개의 헤리티지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본고의 일관된 문제의식은 ‘읍치 경관을 하나의 전체’로 보고자 하는 것이며, 따라서 관심사는 ‘한반도의 읍치 경관’ 그 자체이다. 하지만 한반도 읍치 경관의 내재적 가치가 아무리 특별하다고 할지라도 330여 개 읍치 경관 중 오늘날까지 진정성 있고도 완전하게 보존된 경우는 단 한 곳도 없다.

읍치 경관은 앞에서 고찰한 여러 가지 내재적 가치를 지니지만, 현재적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읍치 경관의 잔존 상태와 현재 입장에서 ①헤리티지로서의 완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그리고 이것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②사회적 활용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는 먼저 헤리티지로서의 완전성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잔존경관의 네트워킹 방안을 제안하고, 사회적 활용 가치와 관련하여 읍치 경관에 대한 최근 지자체 및 시민들의 관심과 몇 가지 생각해볼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다.

(1) 잔존 경관의 네트워킹을 통한 읍치 경관의 완전성 도모

오늘날 전라북도 김제시는 비록 여타의 읍치 경관 요소들은 사라졌을지라도 옛 김제군의 동헌과 내아가 남아 있고, 동헌으로 진입하는 외삼문과 내삼문의 경관 원형과 배치를 옛 사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사례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의 홍산현 읍치 유적은 조선 읍치의 전형적 입지, 일부 관아 시설의 원형, 그리고 동헌, 외삼문, 형방청, 객사 등 관아 시설의 공간적 배치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는 희귀 사례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의 회인현 객사는 내삼문과 함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경상남도 거제시는 객사와 질청,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의 객사와 동헌 등은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사례이다. 제주시는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화공 김남길을 시켜 기록한 <탐라순력도>에 근거하여 1999년부터 제주 관아를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제향의 장소들도 다수 남아 있다. 향교는 전국 대부분 고을에서 원위치에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고을 사직단은 국가에서 정한 제단 형태와 규모를 ≪오례의≫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고, 전라북도 남원과 경상남도 산청(단성)에는 고을 사직단의 원형이, 그리고 경상남도 창녕, 대구광역시(노변동 경산현사직단) 등에서는 유적의 발굴과 함께 최근 복원이 이루어졌다. 여단은 전주부의 읍치관련 기록에서 정확한 위치와 규모, 제례 등을 확인할 수 있고, 성황단의 입지와 형태는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원로들의 기억과 구전을 통해 전한다. 한반도 읍치 경관의 잔존 경관 현황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한반도 읍치 경관의 잔존 경관 현황(소재지는 가나다 순, 2020년 6월 기준)

문화재 종류 소재지(조선시대의 읍격 및 문화재 이름)
관아 경관 객사군 강릉(강릉대도호부 임영관 삼문), 경주(경주부 동경관), 고창(무장현 객사, 동헌), 김해(김해도호부 객사 후원지),
나주(나주목 금성관), 문경(문경현 관산지관), 보은(회인현 인산객사), 부여(홍산현 객사 은행나무), 상주(상주목
상산관), 서산(서산군 객사), 성주(성주목 성산관), 순창(순창군 객사), 순천(낙안군 객사), 안동(선성현 객사),
안성(안성군 객사), 영월(영월부 관아), 전주(전라감영 풍패지관), 창녕(창녕현 객사), 창원(진해현 객사유지),
청송(청송도호부 운봉관, 찬경루), 청주(문의현 문산관), 평택(팽성현 객사)
아사군
및 기타
강릉(강릉대도호부 관아, 칠사당), 거제(거제현 관아), 경주(경주부 관아), 고창(무장현 동헌, 흥성현 동헌), 고흥
(고흥현 남휘루, 존심당, 아문), 공주(충청감영 선화당, 포정사문루), 과천(과천현 온온사), 괴산(연풍현 향청,
풍락헌), 괴산(청안현 안민헌), 김제(김제군 동헌, 내아), 나주(나주목 관아, 정수루, 내아), 논산(연산현 아문),
대구(경상감영지, 관풍루, 징청각), 대전(진잠현 기성관), 밀양(밀양도호부 관아지), 보령(남포현 관아문), 보은
(회인현 동헌), 봉화(봉화현 봉서루), 부산(동래도호부 동헌, 외대문, 군관청, 망미루, 기장현 장관청), 부여(부여
현 동헌, 홍산현 객사, 동헌, 임천현 사비루, 석성현 동헌), 상주(상주목 향청), 서귀포(정의현 관아), 수원(수원유
수부 방화수류정), 아산(온양군 온주아문), 안산(안산현 관아지), 양주(양주목 관아지), 예산(대흥현 동헌, 아문),
울산(울산도호부 동헌, 내아), 원주(강원감영 포정루, 선화당), 익산(여산도호부 동헌), 인천(부평도호부 관아,
욕은지, 어사대, 인천도호부 관아, 강화유수부 동헌), 전주(전라감영지), 정읍(고부군 관아터, 태인현 동헌), 제주
(제주목 관덕정, 관아), 제천(청풍도호부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진주(경상감영 영남포정사 문루), 창원(진해현
관아), 천안(직산현 관아), 청도(청도군 동헌), 청주(청주목 청녕각), 춘천(춘천유수부 위봉문, 조양루), 충주(충청
감영 청녕헌, 제금당), 태안(태안군 목애당), 통진(통진도호부 이청), 포항(흥해현 제남헌), 함양(함양군 학사루),
합천(삼가현 기양루), 홍성(결성현 동헌), 화순(능주목 죽수절제아문)
읍성
(읍치 성곽)
거제(고현읍성), 경주(읍성), 고창(읍성), 고흥(흥양읍성), 밀양(읍성), 보령(보령성곽, 남포읍성), 부산(동래읍성),
서귀포(정의읍성), 수원(화성, 팔달문, 화서문, 서북공심돈), 순천(낙안읍성), 안산(읍성), 울주(언양읍성), 인천
(교동읍성), 전주(풍남문), 진주(진주성, 북장대, 서장대, 촉석루), 포항(장기읍성), 하동(읍성), 해미(읍성), 홍성
(홍주읍성, 조양문, 결성읍성)
사직단 고성, 남원, 대구(노변동의 옛 경산 사직단), 보은(회인 사직단), 산청(단성 사직단), 진주, 창녕,

*주 : 읍치 경관 중 국가 문화재인 국보, 보물, 사적, 중요민속문화재와, 지자체 문화재인 기념물, 유형문화재,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을 정리한 것. 단, 국방 관련 유적인 전라좌수영의 여수 진남관, 통영 세병관, 남한산성, 부소산성 등의 산성, 개인이 세운 정자나 누각, 도성의 의정부 터와 국가 사직단 등은 읍치 경관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제외함.

이와 같이 조선의 읍치 경관은 일제강점기의 계획적이고도 철저한 파괴 전략 속에서도 지금까지 전국의 곳곳에 살아남아 있다(손정목, 1990; 류제헌, 1991; 고석규, 2001; 김기혁・김성희, 2002; 최상식・한삼건, 2003; 전종한, 2004). 물론 현재의 잔존 경관은 대부분 단편적인 경관 요소 수준이다(그림 8). 일부 지역의 경우 헤리티지로서의 진정성을 보장받을 수는 있지만 완전성은 결여되어 있다. 그러면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주장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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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읍치 경관의 잔존 경관 분포(2020년 기준)
*주 : DMZ 이남 지역의 읍치 경관(관아 시설, 읍성, 사직단 등)의 잔존 경관 분포도이다(단, 향교는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 남아 있으므로 분포도에서 제외하였으며, 조선시대 군현을 기준으로 잔존 경관이 1건 이상이면 건수에 관계없이 기호 1개를 부여).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 등의 역사적 질곡을 경험하면서 부분적으로 원형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원화성은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제주 관아 역시 대부분 건물이 1999~2002년 사이에 새롭게 지은 것이지만 비교적 성공적인 복원 사례로 평가를 받는다. 이 두 사례에서 유산 가치의 인정과 긍정적 평가는 해당 경관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원형 고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옛 문헌이나 정밀화 기록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비록 물리적 경관이 부분적으로 파괴된 상황일지라도 그것의 진정성 있는 복원을 가능케 하는 증거 자료가 있는 경우 해당 헤리티지는 진정성과 복원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러한 논리는 헤리티지의 완전성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하는 전략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헤리티지의 진정성이 인정되는 것과 동형의 논리로, 우리는 현재 파편처럼 남아 있는 잔존 경관일지라도 그들 간 네트워킹을 통해 조선후기 읍치 경관의 완전성을 도모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잔존 경관을 기계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읍치 경관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아니다. 잔존 경관이 소재하는 지역마다 디지털 정보 센터를 설치함으로써 해당 지역의 잔존 경관뿐만 아니라 전국적 현황에 대한 정보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구축할 주요 내용으로는 읍치 경관을 담은 고지도로부터 근대 사진들, 홀로그램을 활용한 가상 체험 등이 있을 수 있고, 주요 내용으로는 읍치 경관의 주요 요소, 그것의 공간적 배치, 전국적으로 확인되는 유형별 공통된 특징, 지역 간 차이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다.

잔존경관의 네트워킹이란 가령, 전국의 여러 지역에 남아 있는 읍치 경관의 잔존 경관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이어서 조선시대 주요 관아 시설의 일반적 평면구조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동헌의 평면 구조는 ‘一’자형, 내아는 ‘ㄴ’ 또는 ‘ㄷ’자형, 객사는 정청과 익청을 갖춘 ‘一’자형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읍치내의 대부분 건물들은 팔작지붕이었지만, 국왕의 권위와 위엄을 표상하는 객사 정청만큼은 맞배지붕9)이 보편적이었다. 질청의 평면 구조는 ‘ㄴ’ 혹은 ‘ㄷ’자형이 많았다. 이 경우 질청은 평면 구조만으로는 수령의 살림집인 내아와 구분이 어려울 수 있는데, 동헌과의 배치 관계에서 두 시설을 구별할 수가 있다. 즉 내아는 동헌의 좌우나 배후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고, 질청은 동헌 전면을 가로막지 않는 수준에서 대각선 방향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록 각 지역에 흩어진 파편적 경관 요소 정도로는 유산적 완전성을 인정받기 어렵지만, 전국에 산재하는 진정성 있는 경관 요소들의 네트워킹을 통해 우리는 읍치 경관의 완전성에 접근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작업은 읍치 경관의 전국적 일반성과 지역적 차별성을 드러내주는 한편, 헤리티지의 가치 측면에서는 한반도 읍치 경관의 완전성 제고에 기여할 것이다. 도시화와 도시재개발이 급속히 전개되는 최근 실정에서 이 작업은 시급하다.

(2) 지자체의 관심과 지역민 참여

읍치 경관은 몇몇 지자체를 중심으로 주요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가령 경기도 양주시는 터만 남아 있던 양주목 관아에 대해 5차례의 발굴 조사를 바탕으로 경관 복원을 진행하여 2018년 8월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경상남도 밀양시는 2010년 4월 밀양 관아를 복원하였고, 인천광역시는 2019년 10월 관내 인천도호부 청사 및 부평도호부 청사에 대해 ‘청사’라는 호칭이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각각 인천도호부 관아 및 부평도호부 관아로 개칭하였다.

고창군은 무장현 관아와 읍성 복원을 위해 2003년부터 기본계획과 발굴 및 복원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원주시는 2018년 강원감영 복원 사업을 준공하였다. 전주시는 2016년부터 5개년 사업으로 전라감영 복원 사업을 진행하였다. 대구시는 관풍루, 주된 진출입로 등을 발굴하면서 경상감영의 복원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까지 관아 건물의 가장 완성도가 있는 복원 사례는 부여군 홍산현 관아와 제주시의 제주목 관아가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옛 읍치 경관의 복원을 진행했거나 진행 중인 지자체로 부산광역시의 동래부 관아, 나주 관아, 김제 관아 등등이 있다.

경관 복원을 위한 포럼이나 학술대회도 열리고 있다. 공주시는 2019년 8월 <충청감영 역사문화자원 발굴과 콘텐츠 활용>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고, 과천문화원은 2018년 11월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과천의 관아’라는 부제로 <과천 관아 복원 시민포럼>을 열었다. 인천광역시 계양구와 계양문화원은 2019년 9월과 2020년 10월 관내 시민들을 대상으로 <부평도호부 읍치 경관 복원>이란 주제의 학술대회와 토론회를 연이어 개최하였다(그림 9).

http://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0-055-05/N013550503/images/geo_55_05_03_F9.jpg
그림 9.

읍치 경관 복원 학술대회에 대한 시민 호응
*주 : 2019년 9월 27일 인천광역시 계양구와 계양문화원서 주최한 학술대회로 발표자와 토론자, 행사 관계자를 제외하면 참여자 대부분은 지역사회의 일반 시민들이다.

읍치 경관에 대한 지자체의 최근 관심은 지역민의 관심사를 반영하면서도 다시 그것을 이끄는 동력이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지역민들이 읍치 경관의 복원 작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지자체의 최근 관심과 지역민의 활발한 참여 역시 역사도시경관의 의미를 더해줌은 물론이고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세계유산의 경우 유산의 보존과 관리에 현지민의 생각과 운영방법 등 시민들의 직접적 참여는 절대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최재헌・이혜은, 2012, 3).

하지만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충분한 고증이 없이 복원이 진행되면서 자칫 전국적으로 획일화된 건물 복원, ‘성형 미인’식 복원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지자체 단체장의 활동 선전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는 지적도 있다. 관련 자원의 원형과 본래 가치를 복원하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관광자원화를 주된 목적으로 하다보면 오히려 지자체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막대한 비용, 부정적 효과 등의 장벽에 부딪칠 수도 있다. 최근의 복원 사업을 보면 읍치 경관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거의 관아 경관에 집착하고 있는 바, 이러한 태도 역시 경관 복원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관아 시설이 그 위치에 있게 된 이유는 지역 환경 맥락 및 풍수적 평가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는 점, 동헌에 거하던 수령이 처음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이 사직단이었다는 점, 관아 지구는 삼단일묘의 공간 배치와 지리적 앙상블로서 입지했다는 점 등등을 상기해보더라도, 읍치 경관의 제요소들을 전체적 관점에서 접근될 필요가 있고 이 때 비로소 읍치 경관의 지역적 고유성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 제고

조선시대 한반도의 읍치 경관은 당대 동아시아의 보편적 전통적 환경관과 주요 사상의 교류사를 담고 있는 지리적 표상이다. 읍치 입지 자체와 읍치 안팎의 다양한 경관과 장소들에 관여한 풍수사상, 읍치를 둘러싼 사직단과 문묘의 입지에 적용된 좌묘우사 및 음양오행의 원리 등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정신세계와 고유의 환경인지를 형성해 왔고, 이것은 전통도시의 공간 구조, 경관 구성, 정원과 정자, 서원, 촌락 등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 경관과 장소에 투영되었다. 이러한 환경관과 주요 사상은 국가 간에 획일적으로 전파되지 않았으며, 국가에 따라 적절히 적용되고 때로는 수정되었으며 국가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서도 지역 환경에 알맞게 변용되었다.

이 맥락에서 한반도의 읍치 경관은 동아시아 고유의 정신세계와, 환경인지의 교류사, 국가적, 지역적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이 점은 세계유산이 요청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위한 10개 등재기준 중 <ⅱ. 오랜 기간 혹은 특정한 문화 지역 안에서 건축이나 기술, 기념비적 작품, 도시 계획이나 경관 다자인의 발전과 관련하여 인류 가치의 중요한 상호 교류를 드러내는 것인가>와 맞닿아 있다(UNESCO, 2013b, 20).

조선시대 한반도의 읍치 경관은 세계유산의 등재 기준 ⅲ과 ⅴ에서 요구하는 조건에도 다가갈 수 있다. 읍치 경관은 조선시대라는 한 시대의 전통도시인 읍치의 공간 구성이 어떠하였고, 주요 경관 요소들이 무엇이었으며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었는지, 다양한 지역적 환경에서 전개된 인간-자연 관계는 어떤 양상이었는지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세계유산의 등재 기준 ⅲ은 <이미 사라진 문명 혹은 현존하는 문명을 포함해서 어떤 문명이나 문화적 전통의 존재를 증거할 만한 고유하거나 예외적인 흔적을 지니고 있는가>이고, 등재 기준 ⅴ는 <특정 문화를 대표하는 전통 취락, 전통적 토이 이용 및 해양 이용, 인간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인가>이다.

특히, 급속한 도시화와 지역개발로 인해 아직 미발굴 상태의 읍치 경관 흔적들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는 점과, 최근 무분별한 복원에 대한 우려와 부작용, 불충분한 고증 문제 등이 지적되고 있는 점에서, 등재 기준 ⅴ에서 부연하고 있는 ‘불가피한 변화로 인해 매우 취약한 상황에 처한’이라는 한정이 주목된다. 이 밖에 ‘인류 역사상의 어떤 중요한 단계를 대표하는 건물 유형, 건축 또는 기술의 조합 혹은 경관의 탁월한 사례에 해당하는가’를 요구하는 등재 기준 ⅳ, ‘과거의 대사건이나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예술 및 문학 작품과 직접적, 실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는가’를 요구하는 등재 기준 ⅵ와도 관련될 수 있다.

읍치 경관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정신세계와 국가간 교류사의 반영이면서, 다양한 지역 환경에서 전개된 인간-자연 관계의 결과이며, ‘다양한 경관 요소들이 구성해낸 지리적 앙상블’이자 총체로서의 문화경관이다. 한반도의 읍치 경관을 세계유산적 관점과 역사도시경관 개념으로 재인식하려는 한국적 이유는 더 특별한 데 있다. 우리나라의 읍치 경관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읍성을 비롯한 일부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 관아 시설들은 1910년 조선총독부의 1호 법령인 ‘조선읍성 훼철령’에 따라, 그리고 당시 근대 도시 계획의 추진이란 미명 아래 크게 멸실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읍치 경관은 전통적 도시 구조와 경관의 자연스러운 진화가 아닌 식민지적 전용과 파괴의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지리 및 국토지리를 위한 유용한 교육 콘텐츠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몇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읍치 경관의 복원에 임함에 있어서는, 물론 건물의 원형과 공간 배치 등의 객관적, 물리적 측면의 원형 복원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물리적 경관과 그것이 담고 있는 스토리를 발굴하여 연결하는 작업, 읍치 경관을 둘러싼 지역 환경의 특징과 그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환경 인지 즉 지역적 인간-자연 관계에서 탄생한 각종의 문화 경관과 장소들을 발굴하는 작업 등 읍치 경관과 관련된 유형 및 무형의 경관 요소들을 함께 담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관아 공간만이 아니라 그것과 뗄 수 없는 지역 환경, 제향의 장소들, 풍수를 비롯한 각종의 사회·문화적 경관과 장소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기능적, 상징적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관아 현판, 누각이나 관아에 방문한 묵객들의 시문, 각종 건물의 중수기, 특색 있는 지명 등으로부터 당대의 사상과 관념, 예술과 문학 등과의 연관성을 드러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읍치 경관의 복원에 임함에 있어 물리적 경관만이 아니라 역사성과 장소성, 그리고 그곳의 지역민이 살다간 이야기를 함께 되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1) 전주읍치의 사례가 이러한 전형이다.

2) 조선후기 충청도 태안의 향청은 동문 밖에 위치하였다(「태안」 ≪1872년 군현지도≫).

3) ≪목민심서≫ 「예전」 1조에는 ≪좌전(左傳)≫을 인용하여 ‘귀신이 돌아갈 곳이 있어야 여(厲)가 되지 않는데 돌아갈 곳이 없는 귀신은 혹시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준다.’라 하여 여단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4) ≪목민심서≫ 「예전」 제1조 ‘제사’.

5) 사직단을 살피고 사직신에게 고하는 의식을 말한다.

6) ≪목민심서≫ 「예전」 제1조 ‘제사’.

7) 도성이나 읍성 밖의 수구 부근에 위치한, 다양한 모양의 둔덕들을 일컫는다.

8) 산줄기가 이어지기를 소망하며 가히 이어줄만한 산이라는 뜻이다.

9) 다만 객사의 정청은 맞배지붕이었지만, 양쪽에 딸린 익청 즉 동헌과 서헌은 팔작지붕인 경우도 많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19년 연례학술대회 발표 원고를 바탕으로 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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