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31 August 2020. 409-426
https://doi.org/10.22776/kgs.2020.55.4.409

ABSTRACT


MAIN

  • 1. 서론

  • 2. 러시아의 체제 변화와 볼고그라드 지명 변화의 장소적, 역사적 맥락

  •   1) 러시아의 체제 변화와 지명 변경의 역사

  •   2) 지정학적 맥락에서 본 볼고그라드의 지명 변화

  • 3. 볼고그라드 지명 변화의 비판지명학적 이해

  •   1) 표시와 함축

  •   2) 기억의 이데올로기

  •   3) 기념의 대상과 지명의 의미

  •   4) 차별화된 장소성의 재현으로서 지명

  • 4. 종합 및 결론

1. 서론

일반적으로 통치체제의 변화에 있어 지명은 그 변화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이를 더욱 굳건히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권력의 행사나 이데올로기의 주입에 있어 이를 나타내는 지명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매우 친근하면서도 편리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지명이 주는 매력은 사용자의 일상생활에 가까이 존재하면서 쉽게 사용되는 접근성과 반복성, 누구에게나 다가가는 보편성, 그리고 다른 매체에 전이되어 사용되는 확산성이다.

이러한 목적의 지명 제정과 변화는 근현대 역사에 있어 식민지배와 탈식민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통치와 탈공산주의의 흐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Berg and Vuolteenaho, 2009; Palonen, 2008; Sartania et al., 2017). 새로운 통치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만들기(nation-building)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채택(Karimi, 2016, 740)되는 지명 변경은 보다 급격하게 ‘지명 청소(toponymic cleansing)’ (Rose-Redwood et al., 2010, 460)의 형태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식민세력의 후퇴나 통치이념의 변화는 원래 지명의 회복 또는 새로운 지명의 채택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이는 지명 사용의 관행에 또 다른 소용돌이를 발생시킨다.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의 지명을 뿌리뽑아야 할 잔재로 보는 시각과 보전할 가치가 있는 정치적 또는 문화적 유산으로 보는 시각은 지속적으로 충돌하기도 한다.

이 연구는 러시아연방(Russian Federation, 이하 러시아)이 과거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1922∼1991, 이하 소련) 전후에 경험했던 지명의 변화과정과 그 현대적 유산에 주목하고자 한다. 공산당 일당의 강력한 중앙집중식 통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소비에트연방은 소속된 공화국 각지의 도시, 마을, 행정구역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심기 위한 지명을 유산으로 남겼다(Sartania et al., 2017).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또는 그 지도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이후 이들 지명은 이전으로 환원되거나 새로운 지명으로 대체되는 일이 대대적으로 발생했다. 이 연구는 이러한 지명 변화에서 관찰되는 기억과 기념의 전개 양상과 장소성의 축적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의 사례로 채택한 곳은 러시아 서부 볼가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 볼고그라드이다. ‘차리친’이라 불리던 이 도시는 소련 시절 ‘스탈린그라드’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볼고그라드’로 바뀐 곳이다. 그러나 여전히 생생히 남아 있는 스탈린그라드의 기억은 다시 이 이름으로 복원하자는 강력한 요청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게 하였고, 그 결과 2013년부터 연간 지정된 9일에 ‘스탈린그라드’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초유의 절충안이 도입되어 있다. 개칭 요구 세력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보편적인 지명사용 요청을 진행하고 있다.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사례를 관찰해보면, 현재 볼고그라드가 위치한 지역이 갖고 있는 장소성에 대한 각 주체의 차별화된 인식이 그 지명 개칭 요구에 매우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스탈린이라는 지도자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한 스탈린그라드전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장소라는 인식이 교차하면서 강력히 작용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 인식은 각 정치적, 사회적 집단의 위상과 이해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이 연구에서는 이를 지명의 제정, 사용, 변경에 개입되는 권력 관계와 정치적 요소에 주목하는 비판지명학의 관점(Berg and Vuolteenaho, 2009; Rose-Redwood et al., 2010; Rose-Redwood and Alderman, 2011; 주성재, 2019)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각 지명이 함축하는 기억의 이데올로기, 기념의 대상과 의미가 장소성의 축적과 함께 어떻게 다원적인 형태로 발전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주된 관심사이다.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명칭은 러시아 사회의 큰 쟁점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심층적으로 다룬 연구는 드물다(대표적으로 Kangaspuro and Lassilai, 2017; Yanushkevich, 2014). 반면에 러시아 언론은 보도, 인터뷰, 기고 등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스탈린그라드로의 개칭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2002년부터 최근 2019년까지의 언론 내용을 주요 자료로 사용하기로 한다.

2. 러시아의 체제 변화와 볼고그라드 지명 변화의 장소적, 역사적 맥락

1) 러시아의 체제 변화와 지명 변경의 역사

혁명과 내전을 통해 전제주의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급격한 체제 변환을 달성하고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혁명 이념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주입하고자 노력한다. 볼셰비키 이념에 기반한 다양한 국가 재편 작업은 급진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중에서 이 연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생활공간의 이데올로기적 변혁을 통한 재구성이며, 그 가운데 작용하는 지명의 역할이다.

볼셰비키 권력집단이 이미 제정 러시아에서 민족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도시 기념물과 지명에 주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키예프로 대표되는 제정 러시아 주요 도시 경관의 두드러진 요소는 정교회 예배당과 수도원, 그리고 도시 곳곳에 위치한 황제와 장군들의 동상과 같은 기념물이었다. 아울러 표트르 대제의 이름에서 온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1)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름을 딴 예카테리노슬라프(Yekaterinoslav), ‘성스러운 십자가’라는 뜻을 가진 스뱌토이크레스트(Svyatoy Krest), 귀족 보브린스키 가문의 이름을 딴 보브리키(Bobriki) 등의 지명과 그 유래에 대한 전승은 지역민들이 지역적 또는 국가적 집단 정체성을 인식하는 통로가 되어 있었다(김인중 역, 2009, 69, 110). 이들은 니콜라이 1세가 제시했던 관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인 ‘정교(正敎), 전제정(専制政), 민족성’을 일상 속에서 은연중에 구성원들에게 주입하는 요소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임웅 역, 2001, 33; 김인중 역, 2009, 128~129; Демьянов и Рыженко, 2017, 155).2)

국가와 사회 전반을 혁명 이데올로기를 통해 전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볼셰비키는 집권 후 ‘전제 유산의 청산’이라는 슬로건 하에 차르와 장군들의 동상, 교회당과 수도원을 파괴하는 한편, 마르크스, 헤르첸, 라디셰프와 같은 혁명사상가들의 기념물을 차례로 건립하였다(최대희 역, 1997, 24). 지명 역시 혁명의 대상이 되었다. 1918년 모스크바주의 탈돔(Taldom)을 레닌스크(Leninsk)로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점진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 지명 개칭 사업을 진행해나갔다(Демьянов и Рыженко, 2017, 155). 집권 직후에서 적백내전 종결까지는 볼셰비키의 권력이 완전하지 못했던 만큼 급진적인 대규모의 지명 변경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레닌의 급사와 뒤이은 스탈린의 집권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혁명 영웅에 대한 개인숭배(культ личности, cult of personality)’가 시작되면서 지명을 통한 생활공간의 재구성은 본격화되었다(Демьянов и Рыженко, 2017, 155).

스탈린의 개인숭배 정치에 따라 소비에트연방 전역에서 사회주의 혁명 이념, 혁명가와 전쟁 영웅, 또는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한 학자나 작가를 기리는 지명이 기존 지명을 대체하거나 산업화에 따라 새로이 형성된 거주지에 붙여졌다. 볼셰비키의 개칭작업이 거주지 명칭(oikonyms)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자연지명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의도가 철저히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국민을 개조하겠다는 의도를 띠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Sartania et al., 2017).3) 볼셰비키 혁명 이후 채택된 주요 지명을 표 1에 정리하였다.

표 1

볼셰비키 혁명 이후 채택된 주요 지명

소비에트 시대 사용 지명 사용 기간 소비에트 지명 유래 현재 지명
스보보드니
(Svobodny)
1917~현재 '자유로운'의 뜻 (사회주의 이념) 스보보드니
(Svobodny)
푸가쵸프
(Pugachev)
1918~현재 예멜리안 푸가쵸프 (Yemelyan Pugachev) (반란 지도자) 푸가쵸프
(Pugachyov)
크로포트킨
(Kropotkin)
1921~현재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 (사상가) 크로포트킨
(Kropotkin)
레닌그라드
(Leningrad)
1924~1991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혁명가・정치가) 상트페테르부르크1)
(Saint Petersburg)
스베르들롭스크
(Sverdlovsk)
1924~1991 야코프 스베르들로프(Yakov Sverdlov) (혁명가) 예카테린부르크2)
(Yekaterinburg)
스탈린그라드
(Stalingrad)
1925~1961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 (혁명가・정치가) 볼고그라드3)
(Volgograd)
키질
(Kyzyl)
1926~현재 소수언어 투바어로 '붉은'의 뜻(사회주의 이념) 키질
(Kyzyl)
요쉬카르-올라
(Yoshkar-Ola)
1928~현재 소수언어 마리어로 '붉은 도시'의 뜻(사회주의 이념) 요쉬카르-올라
(Yoshkar-Ola)
칼리닌
(Kalinin)
1931~1990 하일 칼리닌(Mikhail Kalinin) (혁명가・정치가) 트베리4)
(Tver)
옌겔스
(Engels)
1931~현재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사상가) 옌겔스
(Engels)
고리키
(Gorky)
1932~1990 막심 고리키(Maksim Gorky) (혁명 소설가) 니즈니 노브고로드5)
(Nizhny Novgorod)
스탈리노고르스크
(Stalinogorsk)
1933~1961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 (혁명가・정치가) 노보모스콥스크6)
(Novomoskovsk)
보로실롭스크
(Voroshilovsk)
1935~1943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 (군인) 스타브로폴7)
(Stavropol)
쿠이비셰프
(Kuibyshev)
1935~1991 발레리안 쿠이비셰프(Valerian Kuibyshev) (군인) 사마라8)
(Samara)
부됸놉스크
(Budyonnovsk)
1935~1957
1973~현재
세묜 부됸니(Semyon Budyonny) (군인) 부됸놉스크9)
(Budyonnovsk)
푸쉬킨
(Pushkin)
1937~현재 알렉산드르 푸쉬킨(Aleksandr Pushkin) (작가) 푸쉬킨
(Pushkin)
벨린스키
(Belinsky)
1948~현재 비사리온 벨린스키(Vissarion Belinsky) (저술가) 벨린스키
(Belinsky)
멘델레옙스크
(Mendeleevsk)
1967~현재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y Mendeleev) (화학자) 멘델레옙스크
(Mendeleevsk)
가가린
(Gagarin)
1968~현재 유리 가가린(Yury Gagarin) (우주 비행사) 가가린
(Gagarin)

주: 1),2),4),5),7),8) 볼셰비키 혁명 이전에 사용되다가 환원된 이름

3) 볼셰비키 혁명 이전 이름은 차리친(Tsaritsyn)

6) 볼셰비키 혁명 이전 이름은 보브리키(Bobriki)

9) 볼셰비키 혁명 이전 이름은 스뱌토이크레스트(Svyatoy Krest)

볼셰비키 혁명 이후 채택된 지명, 특히 스탈린 집권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명은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개인숭배의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배층의 경향에 따라 언제든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약점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이 대대적인 변화의 첫 대상이 되었다. 그의 사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전개되기 시작한 격하 운동에 따라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곳곳에 있던 그를 기리는 지명이 모두 원래의 지명 또는 새로운 지명으로 바뀐 것이다.4) 반면에 표 1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이념을 서술하는 지명, 국가 자부심의 대상이 된 사상가, 작가, 과학자 등을 기리는 지명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 아직도 변동 없이 사용된다.

지명 복원의 큰 전기가 된 것은 레닌그라드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회귀한 결정이었다(Терентьев, 2015, 77). 소련 해체 3개월 전인 1991년 9월, 소비에트 최고위원회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반수가 넘은 54%의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회귀를 지지했던 것이다(Терентьев, 2015, 77; Горный, 2015, 19). 이로써 볼셰비키가 시도했던 ‘지명을 통한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주입 사업’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러시아 혁명의 발원지이자 그 지도자의 이름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큰 상징적 의미를 가졌던 레닌그라드가 구 제정 시기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회귀한 사실은, 소련 지도부의 지명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영 작업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실제로 이를 반영하듯, 레닌그라드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개칭에 즈음하여 러시아에서는 광범위한 지명의 탈 소비에트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에 따라 스베르들롭스크, 고리키, 칼리닌과 같은 소비에트 혁명가들의 이름을 딴 주요 도시들이 혁명 이전의 이름으로 회귀했다(Терентьев, 2015, 73).

국내・외에서는 이러한 러시아 지명 변화의 역사적 노정을 두고 평하길,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도시 공간을 더 이상 ‘일상 혁명의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라 하며, 한층 강경한 표현으로는 소련의 유산을 ‘청산’한 것이라고도 언급된다(Терентьев, 2015, 73). 그러나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러시아인들이 소련 체제와 그 정권에 대한 염증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역사로서의 소련, 그리고 역사로서의 소비에트 지명에 대한 인식은 부정 일변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스베르들롭스크(Sverdlovsk)주의 주도(州都)인 스베르들롭스크는 옛 이름인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로 복원할지라도 주의 명칭은 여전히 스베르들롭스크로 남겨둔 것은, 지역민들이 지명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역사로서 인식한 결과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지역민들의 인식과 더불어 소비에트 지명에 여전히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보다 다원화된 현재 러시아의 정치, 사회적 지평이다. 오늘날 러시아 정치, 사회의 장에서 다양한 단체들과 정당들이 각자의 목적을 추구하며 경합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서방과의 대립 구도에서 국민 총화를 추구하는 러시아 정부에 의해, 소비에트 지명은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은 채 다시금 논의의 장으로 소환되어 소련의 성립과 해체 시기의 지명 문제보다 한층 더 복잡한 양상으로 오늘날 러시아 시민사회 정체성 문제의 한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 다룰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지명 문제는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잘 보여주는 현재진행형인 사안이다.

2) 지정학적 맥락에서 본 볼고그라드의 지명 변화

오늘날 볼고그라드라 불리는 러시아의 도시는 16세기 말, 볼가강 연안으로 진출한 모스크바공국5)의 전초진지인 차리친(Царицын, Tsaritsyn)을 모태로 한다. 이곳은 유럽 쪽 러시아의 주요 하천인 볼가강 하류에 위치하여, 볼가강을 따라서는 카스피해로, 돈강을 따라서는 흑해로 연결하는 하천 교통과 물자교역의 거점으로서 잠재력이 풍부한 곳이었다(그림 1). 그 위치적 특성에 걸맞게 차리친은 철도와 수운 교통의 발달에 힘입어 캅카스6)와 중앙러시아, 카스피해와 흑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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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볼고그라드의 위치

차리친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볼가강의 지류인 차리친강에서 왔다는 것, 원래 그곳에 위치하던 타타르인들의 도시 사라친(Сарачин, 타타르어로 ‘누런 섬’이라는 뜻)이 변형되었다는 것(Клейнман, 1954, 9), 그리고 여성 군주 차리차(царица)를 기리어 사용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Минх, 1902, 1094). 어느 것이 정확한 유래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16세기 중・후반 이반 뇌제 시기에 작성된 지도에는 벌써 차리친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Клейнман, 1954, 9).

모스크바공국의 팽창과 함께 국경 요새로서의 성격을 상실한 차리친이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 계기는 적백내전(1918∼1922)과 스탈린과의 인연이었다. 스탈린은 공산당 군사위원장으로서 남부 러시아 교통의 요지였던 차리친을 방어하여 흑해 연안에 자리한 백군이 캅카스 및 중앙 러시아의 백군과 연결하는 것을 막는 한편, 남러시아-캅카스 지역 적군(赤軍)의 전투력 배양을 위한 식량, 물자 보급 임무까지 총괄하면서 전략적 요충지로서 볼고그라드의 기반을 닦았다(Институт Военной Истории, 1984, 799; 류한수 역, 2002, 228). 즉, 차리친은 적백내전에서 스탈린의 군사적 경력과 지역 또는 국가 경영의 능력을 상징하는 공간인 동시에 스탈린 개인의 군사영웅 신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차리친은 1925년 4월 10일, 지역 소비에트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스탈린의 도시라는 뜻의 스탈린그라드(Stalingrad)로 개칭되기에 이른다. 스탈린 본인은 이러한 지역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25년 1월 25일에 위원장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는 자신의 이름 대신 다른 혁명가인 세르게이 미닌(Sergey Minin)의 이름을 딸 것을 권했다고 한다(그림 2).7)

http://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0-055-04/N013550402/images/geo_55_04_02_F2.jpg
그림 2.

스탈린그라드 개칭을 반대한 스탈린의 편지(주: 밑줄로 표시된 부분에서 “개칭이 불가피하다면 미닌그라드 등으로 바꿀 것을 권한다,” “자신을 이 일(개칭)에 끌어들이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 출처: Долматов, Сталин. 1878-1953. Главные документы, ИД Комсомольская правда, 2018, p.122.)

스탈린의 특별한 관심 속에 중공업 도시로 발전한 스탈린그라드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재차 입증된다. 군수생산의 중심지였던 스탈린그라드는 2차대전의 최대 격전으로 평가되는 스탈린그라드전투(1942. 8∼1943. 2)의 무대가 됨으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볼가강과 캅카스를 잇는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교두보이면서 러시아 내륙으로 통하는 철도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는 6개월간 계속되었고, 밀고 당기는 접전 끝에 소련군은 독일군을 패퇴시켰다. 양측에 모두 수십 만의 희생이 따랐지만,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은 소련 군민의 불굴의 투쟁을 기리는 상징으로서 남게 되었다. 소련을 대표하는 지도자 스탈린의 이름이 들어간 도시라는 상징성은 이를 지키고 뺏으려는 더 큰 치열함으로 이끌었다고 볼 수도 있다(안종설 역, 2004).

영웅 도시의 칭호를 수여 받았던 스탈린그라드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운명의 변화를 겪게 된다. 뒤이어 집권한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전개한 스탈린 격하운동의 여파로 인해 스탈린그라드 명칭이 소비에트 고위층 권력 투쟁의 제물이 된 것이다. 1961년 소비에트 공산당 전당대회로부터 시작한 스탈린 규탄의 방향은 스탈린그라드 지역 당국과 기관지에 의해 지명 변경을 위한 여론형성 공작으로 발전해나갔다. 여론 수렴의 대상은 공장 노동자와 관리인 등 전체 구성원 중 일부인 산업계층뿐이었고, 집단농장을 비롯한 농업 종사자, 교육・문화 종사자, 심지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도시 복구에 투입되었던 참전용사들의 의견은 무시되었다(Липатов, 2017, 210). 지명 공모를 거쳐 1961년 채택된 지명은 ‘볼가강에 면한 도시’라는 뜻의 볼고그라드(Volgograd)였다.8) 이 명칭은 스탈린그라드 주민 전체의 의견이 아닌, 일부 공업 노동자들에게서 지지를 받은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Липатов, 2017, 213).

지명 채택과정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볼고그라드라는 새 이름은 이후 큰 갈등 없이 정착했다. 또 다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내에서 정치, 이익집단의 권력 및 이데올로기 투쟁이 전개됨에 따라 스탈린그라드의 기억을 추구하는 집단의 요구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여기에는 스탈린이라는 인물과 스탈린그라드전투라는 역사적 사건이 러시아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재평가하는 시각의 등장, 그리고 소비에트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진 러시아의 정치, 사회 구성 요소들이 저마다의 이해에 따른 견해를 내놓으면서 복잡한 양상을 만들어나가는 시대적 흐름이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Kangaspuro and Lassila, 2017, 144).

지명 문제가 재차 불거진 것은 스탈린그라드전투 60주년을 맞이한 2002∼2003년이었다. 볼고그라드 시의회의 공산당 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스탈린그라드로의 환원이 제안된 이래, 이 개칭 문제는 스탈린그라드전투, ‘대조국 전쟁’의 역사적 의의, 그리고 스탈린이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문제라는 담론에 편승해 단순히 공산당의 정치 투쟁이 아닌, 전 러시아적인 역사 기억 문제로 확장되었다(Терехова и Стегленко, 2015, 86; Глущенко, 2016, 189-190). 개칭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한층 더 심화시킨 것은 스탈린그라드로의 환원을 지지하는 ‘승리자 세대’라고도 하는,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 한 전쟁세대와 전후 흐루쇼프에 의한 반스탈린 교육을 받은 중장년층의 상반된 입장이었다. 현대 러시아 사회의 주류를 구성하는 이들 중장년층 세대는 전쟁세대와 그들의 희생에 존경을 표할 수는 있지만, 스탈린과 그의 폭정을 연상시키는 스탈린그라드로의 환원에는 미온적이거나 반대를 표했다. 공산당의 정치 투쟁으로 시작된 개칭 움직임은 역사 기억 문제를 넘어서서 세대 간 대립의 양상도 보이고 있다(Терехова и Стегленко, 2015, 89).

2013년 1월 30일, 스탈린그라드전투 승리 70주년을 맞이하여 볼고그라드 시의회는 전쟁 및 군사 관련 기념일에 공식적으로 ‘영웅도시 스탈린그라드’ 명칭을 사용한다는 결의를 채택하고 이에 해당하는 6일을 나열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표 2).9) 같은 해 12월에는 시의회 공산당 의원들의 주도로 3일의 기념일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시의회 나름대로 찬반 의견 양쪽을 고려한 결정이었지만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2015년 종전 70주년에 맞추어 전쟁에 대한 기억 문제가 대두되면서 이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이후 현재까지 해결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논쟁을 되풀이하면서 표류하고 있다.

표 2.

2013년 볼고그라드 시의회가 결의한 스탈린그라드 명칭 공식 사용일

날짜 기념 내용
2월 2일1)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한 날
2월 23일2) 조국 수호자의 날
5월 8일2) 스탈린그라드가 영웅 칭호를 수여받은 날
5월 9일1) 전승기념일
6월 22일1) 대조국전쟁 발발일
8월 23일1) 독일군이 최초로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한 날
9월 2일1) 세계 제2차대전 종전일
11월 19일1) 스탈린그라드에서 반격을 시작한 날
12월 9일2) 러시아 영웅들의 날

주: 1)볼고그라드 시의회의 2013년 1월 30일자 결의문(№ 72/2149)에 의해 지정된 기념일

2)볼고그라드 시의회의 2013년 12월 23일자 결의문(№ 9/200)에 의해 추가된 기념일

3. 볼고그라드 지명 변화의 비판지명학적 이해

인물의 이름을 사용한 지명 제정은 항상 그 인물의 상징성과 대표성, 그리고 그 인물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또는 주입하려고 하는 정치적 동기의 문제를 수반하게 된다. 인명에 의한 지명 부여, 더 넓게는 기념지명 제정(commemorative naming)은 인물 또는 역사적 사건의 기념과 연결된 장소 인식, 그리고 그 기념의 대상을 공유하는 지역의 정체성이 교차하면서 나타난다(주성재, 2018, 111). 이러한 장소 인식과 정체성은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 나타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유엔지명회의가 인명을 따르는 지명 제정에 있어 생존 인물의 이름을 자제하고 사후에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후 고려할 것을 권고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10)

스탈린그라드 명칭이 격동의 대상이 된 것은, 소련 시절 채택된 인물명을 딴 다른 지명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의 경우는 명칭 부여 이후 발생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 즉 스탈린그라드전투에 의해 축적된 또 다른 장소성으로 인하여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뛰어넘는 문제로 발전했다. 이를 비판지명학의 시각에서 표시와 함축, 기억의 이데올로기, 차별화된 의미론의 문제 등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들은 장소성에 대한 인식의 차별화,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각 집단의 영향력 문제로 집약된다.

1) 표시와 함축

지명이 장소와 지형물을 지칭하는 표시(denote)의 기능을 초월하여, 문화적 가치, 사회적 규범,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함축(connote)의 특성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주목받아온 사실이다(Azaryahu, 1996; Eco, 1986). 기호학적 텍스트(semiotic text)로서 지명은 표시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각 집단의 이해에 따라 달리 읽히고 해석되며 다른 사회적 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더 큰 의미와 담론을 담는 함축의 영역으로 발전하게 된다(Rose-Redwood et al., 2010, 458).

기념지명 제정은 공식적인 역사의 담론을 일상의 공유된 문화적 경험으로 전환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함축적으로 재현하는 매우 쉽고도 영향력 있는 오래된 관행이다. 인물과 사건이 대표하는 역사적 상징성과 기억이 지명 사용자들이 갖는 공동의 경험으로 체화되면서 그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동일시(identification)의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Rose-Redwood et al., 2010, 459; 주성재, 2019, 453).

16세기 이래 300년 이상 사용되어 온 ‘차리친’을 ‘스탈린그라드’로 변경한 것은, 적백내전의 승리를 이끌고 차리친의 산업발전을 통해 국가경영 능력을 보여준 스탈린 개인의 영웅적 업적을 기념하는 함축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것은 노동자와 지식인의 희망, 즉 적백내전 시기에 도시 방어를 주도했던 스탈린에게 사의를 표하기 위함이었다(Serebryakov, 2019). 이후 지도자의 표상인 스탈린의 상징성을 함축하려는 시도는 소련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는 스탈리노로,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는 스탈리나바드가 되었으며, 그루지야의 츠힌발리는 스탈리니리로 개칭되었다. 아이젠휴텐슈타트는 스탈린슈타트로 바뀌었고, 현재의 노보쿠즈네츠크는 스탈린스크가 된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명칭 채택 27년 후 이곳에서 발생한 독일과의 전투는 그 이름이 함축하는 대상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처음에는 볼가강에 접한 전쟁의 교두보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의 기능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6개월간 2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가 되면서 스탈린그라드라는 장소는 이에 상응하는 정체성을 부여받게 된다. 격전에 이은 승리, 그리고 전쟁 중에 이미 부여받았던 ‘스탈린그라드전투’ 명칭은11) 스탈린그라드에 승리, 애국, 국가 등으로 대표되는 상징성의 함축을 풍부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투에 참여한 개인, 그리고 관련된 모든 집단에 있어 이러한 함축은 그들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고 결코 잊어서는 안될 대상이 된 것이다. 전투 75주년을 맞아 당시 대통령 후보(현 자유당 당수)가 언급한 다음 발언은 이런 점에서 의미 있다.

“볼고그라드도 아니며, 차리친도 아니며, 스탈린그라드가 러시아의 용기, 의지의 힘, 강력함, 애국심, 불굴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하에 볼고그라드는 세계 역사 속에 남았다.” (러시아연방 대통령 후보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의 텔레그램, 2018. 2. 2. 리아노보스티 보도)

그러나 스탈린그라드 명칭에서 인물 스탈린이 함축하는 부분이 배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전투의 과정에서 지도자의 이름을 딴 장소를 결코 빼앗길 수 없다는 동기와 절박함이 있었다는 것은 스탈린을 스탈린그라드에서 떼어낼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자랑스러운 스탈린그라드전투의 승리는 스탈린의 영웅적 행위와 함께 회자되었을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스탈린 사후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개명의 요구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스탈린의 영향력을 제거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던 흐루쇼프는 5년여에 걸친 노력으로 인물 스탈린이 함축하는 바를 도시 이름에서 삭제함으로써 스탈린 격하 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새롭게 채택된 이름은 볼가강에 면한 도시 볼고그라드, 위치를 표시하는 이름이었다.

흐루쇼프의 개칭 시도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이 스탈린그라드 이름에 쌓여있던 함축을 기억하는 집단의 저항이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1956년 개칭 문제를 처음 제기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지도자들이 보인 소극적 태도는 불과 3년 전 사망한 지도자의 기억이 민중 사이에 상당한 존중을 받는 상황에서 책임을 모면하려는 행동의 결과였다(Serebryakov, 2019). 이후 열린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 부쳐진 표결은 78%의 반대, 15%의 찬성으로 흐루쇼프에게 실패를 안겼다. 참여 위원의 대다수를 차지한 군인 집단, 그리고 일부 스탈린그라드전투 참전자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명칭 변경에 성공한 1961년의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레닌과 함께 묻혀있던 스탈린의 시신을 옮기는 일로부터 정지작업을 시작한 개칭의 주도 세력은 노동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세 차례에 걸쳐 열린 토론회에서 반대자들은 “스탈린에게는 공도 있다. 왜 그에게 그렇게 엄격하게 대하는가?,” “스탈린그라드는 오래전부터 국외에서도 유명했다. 이는 붉은 군대 전사들과 모든 소련 인민의 강인함의 상징이다. 도시 개칭은 생각할 수도 없다” 등의 의견을 내놓았고 이는 참석자들의 지지를 받았다(ЦДНИВО Ф.71 Оп.37 Д.32, 1961, Л.94, 99). 그러나 공산당 지역위원회는 명칭의 대안을 내놓으면서 반대의견을 희석시켰다. 결국 그해 11월 10일,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 최고지도부는 모든 함축을 제거한 ‘표시’ 중심의 이름 볼고그라드를 도시와 주의 이름으로 선포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볼고그라드로의 명칭 변경과정을 종합하면, 스탈린그라드가 함축하고 있던 대상은 승리를 안겨준 스탈린그라드전투의 기억과 더불어 지도자 스탈린의 영웅적 치적을 함께 아울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최근 20년 가까이 이루어진 스탈린그라드 복원 주장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었다. 오늘날 위대한 애국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려는 시도는 독재자 스탈린으로 인한 억압과 고통의 트라우마에 의해 종종 가로막히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이슈는 승리의 기억과 트라우마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국가적으로 기념할 사건에서 독재자의 상징성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2) 기억의 이데올로기

스탈린그라드에서 볼고그라드로의 개칭,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스탈린그라드로의 지명 회귀 요청을 둘러싼 논쟁의 근저에는 승리의 영광과 전쟁과 독재에 대한 트라우마라는 상반되는 기억의 충돌이 존재한다(Kangaspuro and Lassila, 2017). 스탈린그라드전투는 승리의 영광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전승 지도자 스탈린은 승리의 기억을 더해 주었지만, 독재자 스탈린은 억압과 잔혹한 행위의 기억을 증폭시켰다. 사회적 기억의 기호학(semiotics of social memory) (Yanushkevich, 2014)으로서 지명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61년 볼고그라드로의 개칭은 스탈린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용한 흐루쇼프의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다. 5년 전 그가 시도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의 훼손”과 “무고한 이들에 대한 억압과 처형”의 반스탈린 테제는 스탈린의 영향력이 강하게 드리워있던 당 간부들의 비난을 받았지만(Градобоев, 1962, 10-13), 이제는 더욱 강력해진 권력기반에서 “붉은 군대의 유능한 지휘관들을 살해한 자,” “많은 무고한 이들을 억압하고 살해한 범죄자”로 격하하는 데 성공하였다(Градобоев, 1962, 32-35). 흐루쇼프의 생각대로 ‘스탈린’은 당 조직과 언론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불법적인 대숙청과 억압적 독재권력이라는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이름이 되었다.

스탈린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후 스탈린그라드로의 개칭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독재자 스탈린의 트라우마를 배제한 스탈린그라드전투를 강조함으로써 승리의 기억에 집중하기 원한다. 스탈린그라드는 전승의 영광, 러시아 역사뿐 아니라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상징하는 이름이며, 그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모두를 기념하는 이름이라고 주장하며 그 함축의 의미를 확대시켰다. 세대가 바뀌고 승리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전 세계가 기념하는 스탈린그라드를 회복하자고 주장한다(Озеров, 2018).

개칭 반대자들은 아무리 스탈린그라드 전승의 기억을 강조할지라도 결국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은 스탈린과 그의 행적, 그리고 소련의 어두운 과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스탈린그라드전투를 비롯한 대조국전쟁 기간 중 발생한 많은 희생은 스탈린의 안일함과 무능함에서 기인하였기에 오히려 스탈린그라드로의 회귀는 스탈린의 폭정과 대조국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자 그 후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 인터뷰의 내용은 스탈린그라드 명칭이 가져올 불가피한 스탈린 트라우마를 전달한다.

“억압받은 이들의 심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대에 핍박당한 이들의 후손들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과거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것이 현재의 문제를 대하는 것보다 안전하고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든다.” (크세니야 소브차크, TV 진행자, 정치인, 2015. 3. 18.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보도)

“당신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저는 보다 상정하기 쉬운데, 제 조부가 숙청 대상이었거든요.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볼고그라드 주민인데, 친척이 숙청당했죠.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그리고 스탈린 때문에 죽었어요. 그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자기 친척을 죽인 사람의 이름을 가진 도시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블라디미르 보르소빈, 정치평론가, 2013. 2. 6.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보도)

승리와 트라우마의 상반된 기억의 문제는 다음 절에서 상술할 기념 대상의 분리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개개인의 다양한 관점이 표출되는 현재 러시아 사회에서 스탈린그라드전투의 영광과는 별도로 이 전투가 도시와 사람들에게 남긴 트라우마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관점도 있다. 이것은 소련 해체 이후 개인과 시민단체의 활동에 따라 스탈린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다양한 서사가 분출되며 나타나는 기억의 복수화(commemorative pluralization)로 이해된다(Kangaspuro and Lassila, 2017, 153). 이 이슈는 스탈린그라드가 축적한 장소성의 문제에서 다루기로 한다.

3) 기념의 대상과 지명의 의미

지명은 특정 유래와 함께 부여되고 사용되지만, 이후 그 문자적 의미는 쇠퇴하며 그 장소는 지명과 함께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다고 이해된다(주성재, 2018, 22). 지명은 그 문자적 의미를 뛰어넘는 함축과 상징성을 보유하기 때문에 지명의 의미를 어느 정도로 새길 것인지의 문제는 사용자의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2002년 이후 스탈린그라드로의 복원을 요구하는 집단과 이를 반대하는 집단의 주장을 보면, 대조국전쟁 스탈린그라드전투를 기념해야 한다는 힘과 독재자 스탈린을 다시 소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힘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전자는 스탈린그라드 명칭이 이미 인물 스탈린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스탈린그라드의 복원이 스탈린의 범죄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일이 될 것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상반된 의견이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스탈린그라드로의 복원 운동은 1993년 헌정 위기 이후 러시아 정계에서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던 공산당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면서 소련 시절의 영광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재인식시키기 원했다. 스탈린그라드전투 60주년을 맞았던 2002∼2003년, 볼고그라드 시의회를 내세운 그들의 요구는 스탈린주의로의 회귀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고 실패한다.

스탈린을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시도와 이를 반대하여 스탈린을 연결시키려는 주장은 전투 70주년을 맞아 다시 살아난다. 스탈린그라드 명칭에 대한 담론은 2013년 1월 30일, 볼고그라드 시의회가 전쟁 및 군사 기념일에 영웅 도시 스탈린그라드의 이름을 공식 사용하기로 의결한 후 발전했다. 첫 반응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의러시아당에서 나왔다. 니콜라이 레비체프 당수는 기자간담회에서 스탈린그라드전투 승리를 기리는 의식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볼고그라드가 폭군과 연관되는 옛 이름으로 개칭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이미 1961년 스탈린그라드가 볼고그라드로 되었을 때 결정되었다고 봅니다. 이를 환원한다는 것은 훌륭한 러시아 도시가 수백만을 죽이고 불법적으로 특정 민족들을 강제이주시킨 독재자를 기려 명명한다는 것이며, 이는 신성모독입니다.” (2013. 1. 31. 리아노보스티 보도)

이와 반대로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과는 별개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는 종교단체가 앞장을 섰다. 총대주교 키릴이 수장으로 있는 세계러시아민족협의회와 러시아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러시아정교회가 대표적이었다. 교회 자체는 공식적인 의사를 표명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지만, 러시아정교회의 사회소통을 담당하는 프세볼로트 차플린 신부는 스탈린과 분리된 스탈린그라드를 말하면서 복원을 주장하였다.

“스탈린 개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스탈린그라드는 우리 군사 예술과 비상한 용기의 상징이다. 볼고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가 전 세계인들에게 파시즘과의 투쟁의 전환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탈린그라드전투의 승리는 우리 민족의 각성을 보호하는 전환점이자, ‘러시아 민족이 수 세기 동안 공유해왔고 기독교 복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애 관념의 표상이다.” (총대주교 키릴, 2013. 2. 5. 포브스 보도)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의 동의어가 아니다. 스탈린그라드는 우리 역사의 유명한 시기, 오늘날 우리가 70주년을 맞이하는 전투와 연관된 이름이다. 나는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과 우리 사회가 오늘날 또는 장래에 내릴 스탈린 개인에 대한 평가를 분리하고자 한다.” (러시아정교회 사회소통담당 신부 차플린, 2013. 2. 6. NTV, 인터팩스 보도)

2000년대 중반부터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의 존재와 그 명칭이 가진 브랜드가치를 중요시하면서 복원을 주장해왔던 전 부총리 드미트리 로고진은 그 주장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는 2014년부터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공개적으로 지명 환원을 지지하는 발언을 내놓고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위대한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을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을 의심한 적 없다. 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2014. @Rogozin 트위터)

스탈린그라드로의 복원 주장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반대는 인권을 중요시하는 쪽에서 주도했는데, 그들의 주장은 스탈린그라드를 스탈린이라는 인물과 분리할 수 없음에 기초하였다. 복원 요구가 쏟아진 날, 러시아 대통령 인권위원회 미하일 페도토프 위원장은 이 점을 확인하는 논평을 했다.

“(스탈린의) 범죄는 그 어느 순간에도 영웅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범죄의 영웅화는 범죄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지명에 이러한 명칭을 환원시키겠다는 이 생각이 마치 56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2013. 2. 6. 리아노보스티 보도)

시장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야당인 야블로코당이 같은 날 발표한 입장도 같은 것이었다.

“폭군을 떠받드는 것은 대조국전쟁과 그 승리를 기리는 것과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스탈린을 칭송하는 것은 그 전쟁에서 스탈린 개인의 실책으로 죽임당한 수백만 선조들을 잊는 것이며, 스탈린에게 전쟁을 야기한 무능하며 부도덕한 대외정책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는 것을 의미한다.” (2013. 2. 6. NTV 보도)

이후 러시아의 인권단체 메모리알의 대표인 아르세니 로긴스키 역시 한 인터뷰에서 스탈린그라드로의 지명 환원은 스탈린 개인에 대한 재평가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표했다.

“공개적으로 스탈린을 기리는 것은 모두에게 러시아 정부와 국민이 스탈린에게 긍정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이는 불필요한 것이다. 러시아 농민들을 없애고, 1937~1938년 사이에만 70만 명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의 이름을 도시에 붙일 수는 없다. 달리 말하자면, 도시는 범죄자의 이름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2015. 2. 25. 인터팩스 보도)

이러한 공방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러시아 최고권력인 푸틴 대통령의 태도이다. 그는 2002년에 스탈린그라드로의 복원이 스탈린주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는 의심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함으로써 그 첫 시도를 무산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2014년 6월, 노르망디상륙작전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참전용사와 나눈 대화에서 러시아연방 헌법에 근거하여 지역주민이 원한다면 투표에 따라 지명을 변경할 수 있다는 말로 그 가능성을 제시했다.12) 이것은 푸틴의 중앙정부가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지명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회 집단의 대립을 중재하기보다는 지방자치의 원칙을 내세워 방관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앙정부의 불간섭은 지명분쟁에 있어 책임은 줄이되 애국주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킴으로써 국민 전체를 단합시키고 국가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푸틴 행정부의 계산된 행동으로 보아 마땅하다.

스탈린인가, 스탈린그라드인가? 볼고그라드에서 스탈린그라드로의 개칭 또는 복원을 둘러싼 논쟁은 기념의 대상을 스탈린그라드전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물 스탈린으로 볼 것인가, 또는 스탈린그라드와 스탈린을 분리된 별개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발전해왔다. 이것은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진 기념의 대상이 함축하기를 기대하는 상징성과 의미의 갈등이었다. 그 갈등은 현재 볼고그라드라 불리는 장소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 즉 어떤 장소성을 부여하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4) 차별화된 장소성의 재현으로서 지명

지명은 장소와 지형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독특한 생각과 정서를 가진 개인과 집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인식을 나타내는 지명을 만들어간다(주성재, 2019, 465). 축적된 장소 인식이 집단 안에서 공유되고 인정받으면 장소가 주는 고유한 특성, 즉 장소성(placeness)으로 발전한다. 지명 부여자 또는 사용자는 장소성을 가장 적절히 재현하는 지명을 요구하게 되고, 따라서 차별화되어 존재하는 장소성은 특정 지명에 대한 지향성 또는 거부감을 드러내게 된다. 러시아의 남서부에 위치한 장소를 부르는 일련의 이름, 차리친, 스탈린그라드, 볼고그라드는 바로 이 장소성의 표현이었고, 이 이름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은 차별화된 장소성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발생했다.

현재 스탈린그라드로의 개칭 또는 복원을 주장하는 집단이 이 도시에 부여하는 장소성은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나타났던 적과의 치열한 전쟁, 그리고 그 결과 어렵게 성취한 승리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것은 차리친으로부터 변경할 때 부여했던 “스탈린이 방어하고 발전시켰던 스탈린의 도시”라는 장소성과는 차별화된 것이다. 스탈린이라는 인물과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국가를 위한 희생과 애국주의의 장소라는 담론이 담긴 장소성이다. 스탈린그라드 명칭은 바로 이러한 장소성을 재현하는 것이라 본다. 러시아 공산당과 러시아정교회가 이를 강조하고 있고 푸틴의 연방정부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사회의 존경받는 과학자와 작가도 이 관점에 동참한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 스탈린그라드전투는 대조국전쟁의 전환점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우리 군 지휘관들은 독일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스탈린그라드는 그야말로 전환점이었다. 내 형제 또한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우고 전사했다. ‘영웅도시 볼고그라드’는 그다지 울림을 주지 못한다.” (조레스 알페로프, 노벨상 수상자, 러시아 과학원 부총장, 2015. 3. 18.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보도)

“스탈린그라드는 사람들이 그로부터 신성한 에너지를 얻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찻잔과도 같다. 스탈린그라드로부터 그 이름을 빼앗고 그 이름을 볼고그라드로 바꾸었을 때, 그들은 스탈린그라드를 잠그고 아스팔트를 부어버린 것과도 같다. 이제 러시아 에너지의 성스러운 원천을 해방시킬 때가 왔다.”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 작가, 사회평론가, 2015. 3. 18.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보도)

스탈린그라드의 장소성을 창출하려는 노력은 이미 다양한 전쟁 관련 기호(semiotics)로 표현되어 있다(Yanushkevich, 2014). 전쟁영웅의 동상, 전쟁 도구와 무기는 도시 곳곳에 세워지고 전시되어 집단기억을 불러일으키며, 전쟁 관련 도로명은 일상생활에서 애국적 느낌과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제 도시 이름의 변경은 이러한 장소성 창출의 정점이 되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승리한 전쟁의 집단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애국 지향의 장소성을 재현하기 위한 스탈린그라드 명칭 복원 노력이 반대로 전쟁의 역사에 대한 거부감을 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사실이다. 이미 역사가 된 사건으로 현재를 치장하는 것,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전쟁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은 미래지향의 흐름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러시아 시민의 다음 언급은 이 정서를 대변한다.

“만일 볼고그라드가 스탈린그라드가 된다면, 도시는 전쟁기념비가 될 것이다.” (미하일 투레츠키, 지휘자, 2015. 3. 18.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보도)

‘볼가강의 도시’ 볼고그라드도 이미 60년에 이르는 기간과 함께 그 이름의 장소성을 축적해왔다는 사실은 스탈린그라드로의 향수에 대한 반대의 힘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성장한 볼고그라드 세대에서 뚜렷하게 나타남으로써, 지명 갈등이 세대 갈등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3) 야당인 야블로코당 지역대표의 다음 발언이 이를 대변한다.

“이름을 바꾼다면 도시는 전후 폐허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될 것이다. 도시의 425년 역사에서 기념할 것이 스탈린그라드전투 이외에 없다는 말인가? (중략) 나는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고 이 도시를 정말 사랑한다. 볼가강은 위대한 강이다. 나는 이 이름이 좋으며, 스탈린그라드에서 살고 싶지 않다.” (야블로코당 볼고그라드지부 대표 갈리나 볼디례바, 2014. 6. 7.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러시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련의 설문조사는 승리와 애국의 장소를 대변하길 기대하는 스탈린그라드 명칭이 충분히 지지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민간 독립 조사기관인 레바다센터가 2013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55%의 러시아인들이 볼고그라드 이름을 유지할 것에 동의했다(Kangaspru and Lassila, 2017, 145). 최근 개칭 논의가 진행되면서 시행된 조사에서도 72%의 응답자가 개칭에 반대(2019년 4월, 793명 응답), 23%만이 개칭 찬성(2019년 4월, 716명 응답)으로 각각 나타났다.14)

여러 명칭이 갖는 장소성 논의에서 함께 주목할 것은 이 도시의 첫 이름 차리친이다. 이 이름은 1961년 스탈린그라드를 끌어내릴 때 후보로 언급된 적이 있으나, 노동자를 억압한 구체제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기각되었었다(Serebryakov, 2019). 그러나 차리친은 앞서 언급한 2019년 4월 조사에서 각각 12%와 6%의 지지를 받았던 이름(스탈린그라드는 16%와 23%)이었고, 스탈린그라드로의 개칭보다는 분열을 줄이는 선택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5) 실제로 볼고그라드의 문장가이자 예술가인 블라디슬라프 코발은 차리친을 되돌리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16) 이러한 사실은 100년 가까운 소멸의 시간에서도 차리친 명칭은 축적된 장소성과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명은 장소성을 담는 매개체이다. 현재 스탈린그라드로의 개칭을 둘러싼 논쟁은 승리와 애국의 장소성을 담으려는 힘과 이를 반대하는 힘의 대결이라 볼 수 있다. 그 이름이 필연적으로 연상시키는 스탈린이라는 인물, 그리고 전쟁의 역사로 회귀시키는 장소성에 대한 거부가 그 반대의 힘이다. 여기에는 이미 60년 가까이 사용된 이름 볼고그라드의 장소성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인식, 그리고 과거 300년 이상 사용된 차리친에 대한 향수가 함께 작용함으로써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각 지명에 담긴 장소성은 표시의 기능을 넘어 함축의 의미로 발전한다.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분쟁은 이러한 장소성의 차별적 발전을 볼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사례이다.

4. 종합 및 결론

통치체제의 변화과정에서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기념공간의 창출과 인위적 지명 변화를 관찰하는 데 있어 러시아(구 소련)는 매우 좋은 사례이다. 또한 다원화된 정치・사회의 구성체가 존재하는 시대에서 차별화되어 나타나는 각 주체의 요구가 어떤 담론에 근거해서 어떤 변화의 지향성을 갖는지를 살펴보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 이 연구는 각 지명에 담긴 상징성의 함축, 트라우마와 승리가 교차하는 기억의 양면성, 하나의 지명에 담긴 기념의 차별화된 대상, 각 기억과 기념으로 인한 장소성의 축적을 비판지명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차리친에서 스탈린그라드로, 다시 스탈린그라드에서 볼고그라드로 진행된 과거의 명칭 변화는 강력한 권력집단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반대의견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도시 방어와 산업발전을 주도한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의 상징성을 함축하는 명칭으로 무난히 채택되었다. 27년 후 독일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장소가 됨으로써 스탈린그라드는 막대한 희생의 결과 쟁취한 승리와 애국의 상징성을 동시에 함축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그를 배제하려는 세력은 승리의 의미와 불가피하게 공존하여 함축되는 인물 스탈린을 지우기 원했고, 볼가강 연안을 나타내는 표시 지향의 이름 볼고그라드로 대체한다.

이와 반면에 지난 20년간 진행되고 있는 스탈린그라드로의 개칭 또는 복원 요구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으면서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 사회 각 구성 요소들이 각자의 이해와 관심에 기반하여 의견을 쏟아내는 시대적 변화, 그리고 적절한 간격을 두어 관찰하고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개칭을 둘러싼 흐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에 국한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태도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세대 간에 달리 나타나는 생각, 관심, 정치적 성향과 이를 전달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활발한 이용이 그 복잡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러나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명칭 논쟁은 기본적으로 스탈린그라드가 기념하는 대상을 인물 스탈린이 배제된 스탈린그라드전투로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상반된 의견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단순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 편에서는 스탈린그라드가 스탈린이 아닌 승리한 애국전쟁 스탈린그라드전투의 역사적 흔적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 편에는 그 이름이 불가피하게 독재자 스탈린으로 인한 억압과 고통의 트라우마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억과 기념 대상의 차이는 차별화된 장소성 인식으로 발전했다. 즉, 치열한 전쟁 끝에 쟁취한 승리의 장소, 희생과 애국주의의 장소라는 인식과 영웅 스탈린의 도시를 거부하는 인식이 대치한다.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반대는 전쟁의 역사로 회귀시키는 전쟁기념관으로서의 장소성에 대한 거부와 이미 60년간 축적된 ‘볼가강의 도시’ 볼고그라드의 장소성을 존중하자는 의견이 더해진다. 소수의 의견이지만 도시의 첫 이름 차리친으로 돌아감으로써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이전의 장소성을 회복하자는 의견도 있다.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사례는 이와 같이 지명에 담긴 기억과 기념이 다원성(pluralism)을 갖고 전개되며(Kangaspuro and Lassila, 2017, 162), 이에 따라 차별화된 장소성을 축적됨을 잘 보여준다. 그림 3은 이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http://static.apub.kr/journalsite/sites/geo/2020-055-04/N013550402/images/geo_55_04_02_F3.jpg
그림 3.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명칭 논쟁을 둘러싼 다원성

상반된 기억과 기념의 대상, 그리고 이에 따른 장소성의 축적이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승리의 전쟁을 기억하기 원하는 공산당, 참전용사 및 전쟁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성향의 시민은 스탈린그라드전투를 기념하고 그 장소성을 나타내는 명칭으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러시아정교회의 경우 공식적인 언급은 않지만, 소련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호국 종교로서 헌신하여 전쟁 승리에 기여한 현장이었다는 측면에서 스탈린그라드라는 지명에 보다 우호적이다.17) 푸틴의 연방정부는 지역주민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표방하지만, 국민 단합과 국가주의 강화를 통한 통치력 강화를 위해 스탈린그라드 주장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다.

반면에 사회민주주의나 자유시장주의를 지향하는 야당과 인권 보호를 기치로 하는 단체는 독재와 억압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스탈린이 연상되는 명칭과 그로 인한 장소성을 완강히 거부한다. 진보성향의 젊은 세대는 스탈린그라드전투를 과도하게 기념하는 데에도 반대한다. 전쟁의 기억을 통해 과거로 회귀하려는 것이고 도시 전체를 전쟁기념관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볼고그라드 명칭 채택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는 그 이름을 사용하면서 쌓아온 장소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논쟁에서 각 집단이 갖는 입장과 그 배경은 추후 더 상세한 분석을 통해 밝혀야 할 과제이다. 러시아 사회 전체 맥락에서 갖는 각 정당, 정부, 종교단체, 시민단체, 이익집단의 본질과 정치적 지향성, 그리고 이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과 손실의 비교 등이 그 분석 대상이 될 것이다. 명칭 논쟁을 바라보는 각 세대의 차별화된 생각도 보수-진보, 전쟁-비전쟁, 중장년-청년 등 이원적 구도를 초월한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는 일반적으로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같은 청년이라도 20대와 30대는 부모 세대의 영향, 교육의 지향성, 소셜네트워크 사용 등의 요인에 따라 차별화된 성향을 보일 수 있다. 스탈린을 포함한 과거 역사에 대한 재평가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명칭 논쟁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 여러 불확실성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문제가 이미 정치적 고려의 영역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연간 지정된 9일에 스탈린그라드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한다는 결정이 그 정치성의 결정판이다. 스탈린그라드전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릴 때마다 스탈린그라드로의 개칭 주장은 고개를 들 것이며 좋은 뉴스 아이템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 명칭을 주장하거나 명시적, 암묵적 동조를 통한 애국주의의 강화 흐름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그라드 명칭 사용 일수를 확대할 가능성은 있지만, 완전한 개칭은 쉽지 않아 보인다. 스탈린그라드전투를 기념하는 주체에서도 지명 변경까지 주장하는 힘은 그리 크지 않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스탈린그라드 논쟁이 정치적 영역에서 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탈린그라드’는 전쟁과 승리를 상징하는 하나의 브랜드로서 자본을 유치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 브랜드 사용의 혜택이 개칭으로 인한 행정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점(Kangaspuro and Lassila, 2017, 160)도 있다. 그러나 개칭으로 마무리되는 것보다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쟁이 계속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관심을 유발할 수 있다는 예측도 가능하다. 이 문제는 지명 브랜드 가치의 본질과 평가 방법의 문제(주성재・김희수, 2015)를 적용하여 스탈린그라드 명칭의 정치경제학을 더욱 심화시켜 발전시킬 수 있는 주제가 될 것이다.

1) 이 논문에서 지명은 영어식 로마자 표기를 따라 적기로 한다.

2) 물론 이는 러시아만의 요소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고대 로마에서 황제들은 자신의 이름을 딴 광장이나 개선문을 건설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업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했으며,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역시 넬슨 제독을 비롯한 전쟁영웅이나 식민지 개척의 선구자들의 기념물을 전시함으로서 런던 시민들에게 제국의 수도로서 런던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염운옥, 2017, 247).

3) 소비에트연방 구성국 중 하나였던 조지아의 소비에트 지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는 지명의 ‘소비에트화’가 당국의 정치적, 사회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밝힌다. 이러한 의도에 따라 ‘소비에트화’된 지명은 조지아의 15%에 달하며, 그 다수가 촌락, 도시와 같은 거주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4) 스탈린 격하 운동에 따라 1961년 그를 기리는 지명을 제거하는 일이 시작된다. 그중에서 도시의 이름으로는 러시아 3개(스탈린그라드, 스탈리노고르스크, 스탈린스크), 소비에트연방 국가 3개(타지키스탄 스탈리나바드, 우크라이나 스탈리노, 조지아 스탈리니리), 동유럽 국가 6개(알바니아 취테티스탈린, 불가리아 스탈린, 루마니아 오라슐스탈린, 동독 슈탈린슈타트, 헝가리 스탈린바로시, 폴란드 스탈리노그루트) 등 12개가 발견된다.

5) 14∼15세기 러시아 여러 나라를 통일하여 러시아제국의 기초를 이룬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를 말한다.

6) 캅카스(Kavkaz)는 러시아 남부의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산악지역을 총칭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코카서스(Caucasus)라는 영어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7) 이러한 스탈린의 표면적 반대는 추후 스탈린 비판의 중요한 화두인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대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심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8) 당시 제시된 지명으로는 레닌그라드나볼게(볼가강의 레닌그라드), 퍄티모르스크(다섯 개 바다의 도시), 네포코르니(불굴의), 고로드슬라비(영광의 도시), 미르-고로드(평화의 도시), 포베도그라드(승리의 도시), 스탈그라드(강철의 도시), 게로이스크(영웅의 도시), 트베르디냐(요새) 등이 있었고, 심지어 흐루숍스크라는 지명도 있었다고 한다(https://volgaland.volsu.ru/ru/object/4 참조).

9) 볼고그라드 시의회는 2013년 1월 30일자 결의문(№ 72/2149)과 그 부록에서 “스탈린그라드전투 승리 70주년을 기리면서 대조국전쟁의 전기가 된 그 전투의 의의에 주목하고 스탈린그라드의 수호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역사적 기억을 수호하고자 하는 참전용사 단체의 호소를 존중하기 위하여 국가와 도시의 전쟁 및 군사 관련 기념일에 ‘영웅도시 스탈린그라드’라는 명칭을 ‘영웅도시 볼고그라드’와 함께 공식적으로 사용한다”고 명시했다.

10) 유엔지명표준화총회(UN Conference on the Standardization of Geographical Names)는 2002년 결의를 통해 이를 권고했고, 이에 따라 각 회원국은 사후 유예기간(waiting period)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0년이다(국토지리정보원, 2018, 지명 표준화 편람 제3판).

11)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 12월 22일에 이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이것은 승리해야 할 대상으로서 참전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의미 있는 가치 부여였다.

12) 러시아연방 헌법 130조 2항은 “지방자치는 시민들에 의해, 선거기관 또는 기타 지방자치기관을 통한 투표나 선출, 기타 의사표시 방법으로 실현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푸틴은 지명 변경이 지방자치의 영역이기에 지방에서 의견 수렴 등을 통해 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http://www.constitution.ru/10003000/10003000- 10.htm

13) 그러나 세대 간 의견이 단순한 방향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소셜네트워크 사용에 익숙한 10∼20대는 개칭에 대하여 반반의 찬반 의견을 보인다고 한다. 이것은 러시아의 제반 환경을 둘러싼 영향으로 인한 젊은 세대의 보수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의 증대, 그러나 아직까지는 역사적 선택의 영향에 대한 충분한 인식 부족으로 해석한다(Терехова и Стегленко, 2015, 88).

14) 각각 러시아언론사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V1.ru에 보도된 조사에 의한다.

15) 2013년 2월 6일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가 개최한 대담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16) 2014년 6월 7일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보도에 의한다.

17) 러시아정교회의 이러한 입장은 표면상으로는 중립을 취하되, 여타 조직이나 개인의 발언을 통해 당국이 의도한 기념, 기억의 의미를 표출하고 만들어간다는 ‘비정치적 정치(non-political politics)’라는 러시아 당국의 전략(Kangaspuro and Lassila, 2017, 142)을 엿볼 수 있는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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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fax, "Мемориал" против переименования Волгограда в Сталинград и памятника Сталину в Москве ("Memorial" against the renaming of the Volgograd to the Stalingrad and the monument of Stalin in the Moscow). https://www.interfax-russia.ru/south-and-north-caucasus/main/memorial-protiv-pereimenovaniya-volgograda-v-stalingrad-i-pamyatnika-stalinu-v-moskve
36
Komsomolskaya Pravda, «Сталинград - это символ памяти и мужества, а не памятник Сталину!» (Stalingrad: It is symbol of the memory and valor, not the monument of Stalin!). https://www.volgograd.kp.ru/daily/26028.4/2945777/
37
Komsomolskaya Pravda, Владимир Путин предложил провести референдум о переименовании Волгограда в Сталинград (Vladimir Putin proposed to conduct a referendum on renaming Volgograd to Stalingrad). https://www.volgograd.kp.ru/online/news/1756022/
38
Komsomolskaya Pravda, Волгоград vs Сталинград: кто из известных россиян «за», а кто «против» переименования (Volgograd vs Stalingrad among the famous Russians: who agreed and who against the renaming). https://www.volgograd.kp.ru/daily/26355/3237712/
39
Komsomolskaya Pravda, Геннадий Зюганов пообещал продолжить борьбу за переименование Волгограда в Сталинград (Gennady Zyuganov promised to continue fighting for renaming Volgograd to Stalingrad). https://www.volgograd.kp.ru/online/news/2087729/
40
NTV, Волгоград или Сталинград: споры о переименовании города не утихают (Volgograd or Stalingrad: Disputes about the reaming city do not calm down). https://www.ntv.ru/novosti/457340/
41
Ria Novosti, Путин о переименовании Волгограда в Сталинград (Putin about the renaming Volgograd to Stalingrad). https://ria.ru/20021219/2854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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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a Novosti, Нельзя переименовывать Волгоград в Сталинград даже временно - Левичев (Never rename Volgograd to Stalingrad even temporarily). https://ria.ru/20130131/9206813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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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a Novosti, Жириновский предложил переименовать Волгоград в Сталинград (Zhirinovsky proposed renaming Volgograd to Stalingrad). https://ria.ru/20180202/15138558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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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domosti, Рогозин поддержал переименование Волгограда в Сталинград (Rogozin supported renaming Volgograd to Stalingrad). https://www.vedomosti.ru/politics/articles/2014/06/07/rogozin-podderzhal-pereimenovanie-volgograda-v-stalin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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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ru, Волгоград переименован в Сталинград (Volgograd was renamed Stalingrad). https://v1.ru/text/gorod/6165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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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ru, «Многие голосовали против»: Сталинград 58 лет назад переименовали в Волгоград - хроника событий (Many voted against: Stalingrad was renamed Volgograd 58 years ago-a chronicle of events). https://v1.ru/text/culture/6630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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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ru, В Волгограде странным образом переименовали благочиния: появилось «Сталинградское» (In the Volgograd deanery strangely renamed: appeared <Stalingrad>). https://v1.ru/text/culture/69279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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